저자는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이미 다 완성되어 더이상 새롭게 변할 것이 없고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완성된 사회‘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완성된 줄로만 알았던 사회도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부조리함과 개선해야 할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위해 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ㅈㅅ‘ 이다.

솔직히 ‘ㅈㅅ‘이라는 말의 어감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독자인 나는 이 페이퍼를 쓰면서도 모음을 제외한 초성만 쓰는 것을 양해바란다.

다만 본문을 읽다보면 이 ‘ㅈㅅ‘을 택하는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읽으면서 그들의 행위에는 솔직한 심정으로 동의하는 것이 어렵지만, 독자인 나도 그들의 생각과 의도, 취지 같은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4분의 3정도 읽고 있는데, 뒤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말하고자하는 바에 대해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한 세대가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것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냥 그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어 각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세대가 사회구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사회는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단순히 ‘완성‘이라는 개념을 서로 달리 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맨눈으로 보면 다 굳어서 더 움직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불안정하게 흐르고 있는 물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유리죠. 그렇다고 유리를 액체라고 해야 하나요?

제 생각에 ㅈㅅ선언은 이를테면 헵번스타일이라든가, 로큰롤과 같은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주장을 펼치는 표현 방법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기를 의도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목표나 책임감은 없습니다.

연쇄살인범 중 일부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해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관장‘해야 한다고 여긴다 ...(중략)... 그들은 남이 자신의 목숨에 손대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이 어릴 때 보이는 세 가지 징후가 있다고 한다. 야뇨증, 방화, 동물 학대가 그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죽어야만 이게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투쟁의 수단이나 삶을 완결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신이 맞이하려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라온 사람의 절반 정도가 그냥 내려간다."

육체를 의지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형 선고가 죄수들에게 기괴하게 삶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고 들었다. 우리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셈인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겠지.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재키는 존 F.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애칭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의 미들 네임이다.

하비는 케네디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의 미들 네임이다. 오스왈드는 잭 루비에게 살해당한다.

제리 헤인스는 케네디의 암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사람이다.

메리 무어맨은 케네디 암살 목격자 중 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재키,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루비, 하비, 제리, 메리라는 이름을 영어로 구글 검색창에 입력하면 쉽게 답이 나왔을 문제였던 것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케네디 암살의 목격자들‘ 이라는 카테고리까지 있으니까.

케네디는 하나의 상징물이며, 오직 상징으로서만 기능하는 존재고, 그 상징은 그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같은 대부호도, 재클린 오나시스와 같은 명사도,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들과 케네디가 붙어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나 리 하비 오스왈드, 잭 루비, 제리 헤인스, 메리 무어맨과 같은 보통 사람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케네디도 찰스 맨슨과 비슷했다. 별 내용도 없는 연설을 하고 강한 개인적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불멸성을 얻어 현대의 아이콘이 됐다.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는 산문시를 두고 입증되지 않은 논리라든가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선언에 맞서려면 이 선언과 같은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가슴에 와닿는 반박 논리를 펼쳐야 한다. 곳곳의 빈틈을 공격해봐야 핵심을 놓친 트집 잡기처럼 보일 뿐인데, 그게 여러 언론사의 논설위원들이 저지르는 오류였다.

귀신은 함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수줍음 많은 처녀였으며,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처녀귀신은 꿈을 간직한 순수한 영혼이었지만, 죽은 뒤에야 그 꿈을 이룬 소망의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다.

죽음 그 자체와 아무도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부정해오던 절대자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연하게 구는 것이 가장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

‘제자들‘을 자기와 같은 결론으로 유도해 다짐을 받고, 의지를 북돋워주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데에는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할 때 세연과의 약속은 저버린 거야. 세연과 한 약속만 지켜야 하고 예식장에서 한 약속은 안 지켜도 되나?

ㅈㅅ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좋은 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인정에 대한 욕구‘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패배나 사회변혁이 없어도 적절한 수준에서 채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앞의 세대라고 해서 그 사람 중 어느 누구 한 명이 자기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은 아니잖아. 그네들이 가진 자부심도 하나하나 쪼개놓고 보면 나도 가방 하나 들고 해외출장 나가봤다, 밤새워 일해봤다, 거리에서 돌 던져봤다, 그런 일들 아닌가.

ㅈㅅ선언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ㅈㅅ선언은 내가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ㅈㅅ선언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야망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얘기에는 더더구나 찬성할 수 없다. 내가 ㅈㅅ선언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ㅈㅅ선언은 잘못됐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적절한 반론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그 선언은 역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감염자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었다.

‘야심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신이 그 야심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7급 공무원으로서 나는 재미없고 불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런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거나 세상을 바꿀 업적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ㅈㅅ선언을 허황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 선언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반대로 멋있게 사는 법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은 차분한데 심장은 왜이리 뛰는 걸까. 도망치려면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어.

나는 왜 세연이 물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궁금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물은 생명과 재생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라도 했나?

"그 계획은 잘못됐어.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 정말 옳은 거라고 믿어?"
"어차피 다들 시시한 인생이잖아."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언니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어. 날카롭지만 깨지기도 쉬웠지.

뭔가 함정이 있음을 직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건 일흔 살이 넘어서였어. 그런데 넬슨 만델라가 예순 살 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상황은 그냥 절망스럽기만 했어.

정말 위대한 생각은 말이지,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 고독을 견뎌내지.

지금 세상은 너희들이 결론지은 것만큼 결코 완벽한 게 아냐.

나도 따라 뛰어들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기다려온 죽음의 방식이다. 선로에 뛰어든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지하철에 치여 죽는 것을 내가 얼마나 바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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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전직 절대자는 아카데미 펫 관리자 08 전직 절대자는 아카데미 펫 관리자 8
말랑부들 / ARC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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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권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생을 물 위에 떠다니며 흘러가는 낙엽에 빗대어 표현한 장면이었다. 본문에선 이것을 제3자의 시선과 낙엽 자체의 시선 이렇게 2가지로 살펴보는데, 이를 통해 한걸음 떨어져서 넓은 시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스스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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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표백 세대‘로 일컬어지는 세대의 한계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그들의 잘못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완성된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고민 등과 같은 것들을 할 필요조차 없게 만든 측면도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쉽게 말해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좀 더 크다는 말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이렇게 중간중간 나오는 저자의 날카로운 시대통찰(?) 같은 것들이 독자인 나에게는 뭔가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는 저자의 시대통찰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이 시대를 통찰하는 시각은 뭔가 예리함이 느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고민과 생각을 깊게 했던 흔적들이 엿보였다고나 할까. 독자인 나로썬 훌륭한 인사이트(통찰력)를 얻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저자께 감사드린다.

이런 한계 속에서 표백 세대의 내면은 추하게 일그러진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인 위치나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 없으므로 역사의식이 희박해지며, 민족주의처럼 그들의 자존감을 손쉽게 높여줄 수 있는 불합리하고 값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패배를 자연스러운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 중 몇몇은 정면 승부를 벌이고 작은 이득을 위해 아득바득 싸우는 태도를 촌스럽다고 여기게 된다. 기왕에 지는 것, 한발 물러난 자세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와 같은 태도를 보이거나 아예 싸움을 피하는 것이 그나마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다. 그것이 ‘쿨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진정으로 새로운 주장이나 사상이 없는 상태에서 조롱과 비아냥거림, 의미 없는 장난이 이 세대(표백 세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사유와 생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표백 세대는 소비를 삶의 표현 방식으로 삼는데, 이는 여가와 사교 활동에서 문화예술 및 창작 활동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걸쳐 이들의 사고와 행태에 깊숙이 영향을 미친다.

물론 이들(표백 세대)이라고 해서 바보는 아니며, ‘뭔가가 잘못됐다‘는 느낌 정도는 갖고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사회에 대해 그런 의심을 품는 행위는 자칫 그 자신을 바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될 수도 있기에, 이들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고로, 음흉함은 그들의 제2의 천성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예는 자신의 노예적 존재를 지속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보장받는 데 비해 노동자는 그 계급적 지위가 점점 가라앉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노동자는 노예보다 더 비참하다고 주장했다.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 주거나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표백 세대가 완성된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순응, 타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의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순응은 완성된 사회의 시스템과 경쟁 체제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 판검사나 의사가 되거나 좋은 기업에 취직해 ‘치열하게‘ 살다가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다. 존경받는 기업인이나 법조인, 정치인들은 거의 다 이 분류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고시 폐인‘ , 범죄자와 사기꾼, 실패한 사업가나 장사꾼, ‘악바리‘ 혹은 ‘또순이‘라는 칭찬을 듣는 저소득층도 이 유형에 속한다.

타협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품으면서도 대체로 그에 따라가는 삶의 형태다. 이런 삶의 유형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그런 의심을 억누른다. 여가 시간에 봉사활동을 하거나, 권력에 대한 의지 없이 선의로 정당 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행동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근본적으로 삶의 우선순위에서 가장 앞에 오는 것이 아니며, 그런 활동들에 대한 욕구도 따지고 보면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삶의 형태는 완성된 사회에 대단한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한다.

소극적 저항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없으나 적어도 그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닌 삶의 형태다. 예술가, 종교인, 전업 NGO 등이 여기에 해당하며,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직업인, "패배자라고 불려도 좋으니 아등바등 살지 않고 속 편하게 생활하고 싶다" 라며 교직원이나 하급 공무원, 카페 사장 따위를 꿈꾸는 부류도 이에 속한다.

이들(소극적 저항자)은 완성된 사회의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경멸하지만, 자신들이 완성된 사회로부터 제대로 된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 중 일부는 경쟁 시스템에서 도피하기 위해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으로, 세속적인 성공을 거머쥐게 되면 언제든지 ‘순응형‘이나 ‘타협형‘으로 태도를 바꿀 준비가 돼 있다.

소극적 저항자들은 대체로 연대를 하지 않으며 사회시스템을 전복하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는 한 완성된 사회의 관점에서 대체로 무해하다.

적극적 저항은 사회에 대한 폭력적인 타도를 시도하는 것이다. 정의에 따라, 완성된 사회에서 적극적 저항은 이념적 근거를 가질 수 없다. 적극적 저항자들은 처참할 정도로 논리가 없거나 아니면 일반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단적인 원리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한다. 프랑스나 그리스 등에서 간혹 보는 방향성 없는 학생 폭동이 전자의 예이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나 대단히 공격적이고 반체제적인 환경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그룹 등이 후자의 예다.

완성된 사회는 이들(적극적 저항자)을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으며 이념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적극적 저항자들의 성공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기껏해야 기억에 남는 테러를 몇 건 저지를 수 있을 따름이다.

물을 인정할 수 없는 물고기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뿐이다.

자살 선언자들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미약한 대가를 사양하며, 완성된 사회를 긍정해 그 구조 안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죽음의 고통과 사후에 당할 모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에 대한 어떤 기대나 선망도 갖고 있지 않다.

기실 완성된 사회는 어떤 사상이나 자존심을 위해 개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완성된 사회는 인간을 하찮은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자살 선언자는 그 존재만으로 완성된 사회의 기본 가정을 부수며, 완성된 사회가 완전하지 않음을 고발한다. 자살 선언자는 희고 완벽한 완성된 사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점 얼룩이다.

완성된 사회는 자살 선언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능력이 없으며, 자살 선언자의 행위를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자살 선언자들의 목표는 완성된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사회의 천박함과 불완전성을 고발하고 자신들이 품고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있으며, 그 방법은 오로지 죽음이라는 완전한 거부 뿐이다. 왜냐하면 봉건시대의 부르주아지와 산업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대안과 미래가 있었으나 표백 세대와 자살 선언자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완성된 사회는 구성원들의 최대 복리를 위해 시스템을 움직이지만 구성원들의 자존심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은 영웅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영웅다운 죽음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선택은 그대에게 달렸다.

하급 공무원은 사무관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사무관은 국-과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국-과장은 실장과 차관, 장관 눈치를 살펴야 하고, 장관은 청와대와 여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데, 여론은 공무원들이 에어컨 바람 쐬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니 냉방관련 지침을 바꾸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공무원들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하급공무원들도 그랬고, 국-과장들도 똑같았다. 황당한 지시가 떨어지지 않도록 장차관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주가 있는 국-과장들이 능력있는 상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니 느는 것은 눈치밖에 없었다.

잡기가 사실과 진실의 기록일 때에만 거기에서 힘이 나올 것

근처에 있던 네 사람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선언은 그냥 우스갯거리일 뿐이다.

재키는 그들에게 출구를 열어두었다. 4년 뒤에 그들은 한 번 더 선택할 수 있다. 그건 출구가 있다고 말해놓음으로써 예비 선언자들을 더 교묘히 얽어매기 위함이기도 했다. 약속은 그냥 파기해도 되지만, 이 출구를 통해 나가려면 ‘왜 나는 이 세상을 살기로 결심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직장과 직업이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고, 사회적 신분이 그 사람의 내면과 성격을 좌우하는 것 같았으며,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완성된 사회에서 자살은 낙오이며, 낙오자에게 완성된 사회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낙오자 수가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구조적인 실패를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기에 완성된 사회는 그 사실을 알리는 데 인색하다.

충격적인 아이디어를 열심히 짜내보라

"너, 사람이 우울증 약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좀비처럼 돼. 그게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약이 아니라 머리를 멍하게 해서 기쁜 일이고 슬픈 일이고 못 느끼게 만드는 약이야."

"거대한 마귀가 아니라 아주 작은 악마가 이반 카라마조프를 괴롭혔듯이, 나를 그저 우러러보기만 하고 아무 자존감이 없어 보이는 네가 나한텐 골칫덩이였지. 그런데 너를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자기혐오에 빠지고 상처받는 사람은 나였거든. 너를 경멸할수록 너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지. 너한테는 이상한 매력이 있어.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런 것 같아. 고통이야. 그러나 그 사랑의 정체가 고통이라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닌 건 아니야. 세상에는 그런 사랑도 있어."

내 남은 삶을 24시간으로 확정한 이제야, 나는 사물을 보다 뚜렷이 볼 수 있게 됐다. 그토록 손에 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너의 모습이 보이고, 너의 생각들이 분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한다.

나는 너 때문에 죽는 게 아니면서, 너 때문에 죽는다.

너는 내가 끊임없이 좌절하고 절망해야 했던 이유가 내 잘못 때문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네가 그런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자책만 하면서 계속 살아갔겠지.

나는 너를 쫓아 죽는 게 아니면서, 너를 쫓아 죽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을 아는 일이었다.

표백 세대의 좌절은 돈이 많거나 적은 것과는 상관이 없어.

숭배자들은 어느 시점이 됐을 때 모두 재키에게 "너한테 나는 무슨 의미냐" 라고 따졌다. 재키는 그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의심하는 것만큼 나도 너를 의심하고 있어.

"왜냐하면 마음속에 의심을 가진 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 너도 나를 의심하지마. 나를 믿고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해."

개인적인 ‘성공 신화‘는 완성된 사회에서도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만, 그것이 사회의 변화를 일으킬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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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바깥여름 - 12g, 7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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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드립백 바깥여름'입니다. 이번 시즌에도 기존에 출시되었던 드립백들과 더불어 아직 출시되지 않은 드립백도 함께 맛볼 수 있었습니다.

알라딘에서 드립백 커피가 출시되면 거의 빠짐없이 구매하여 마셔보는 편인데, 특별히 이번 패키지에는 '페루 라 리마 문도노보' 라는 이름의 커피가 새롭게 눈에 띄었습니다. 찾아보니 역시나 아직 출시되지 않은 드립백 커피였습니다. 먼저 이 드립백 커피에 대해 얘기하자면 포장을 뜯었을 때 그 향이 굉장히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향만 맡았을뿐인데 마치 커피를 절반은 마신 것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아무튼 이 커피를 내리자마자 마셔보니 처음에는 은은한 풋사과향과 오렌지 껍질에서 나는 향같은 게 느껴졌고 마지막 목넘김때는 연한 캐러멜 맛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로 리뷰해볼 드립백은 '콜롬비아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나에어로빅' 이라는 커피입니다. 이 커피는 원두로는 나온 적이 있으나 드립백으로는 아직 나온 적이 없어서 개인적으로 처음 경험해봤는데, 이 드립백 또한 포장을 뜯었을 때 향이 강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납니다. 뜨거운 물에 내려서 마셔보니 은은한 라즈베리 향과 함께 건자두(Dried Plum)와 사탕수수의 일종이라고 알려진 럼(RUM)이 더해져 다른 커피에 비해 달달함을 보다 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에티오피아 넨세보 불가 내추럴' 인데, 이 커피는 몇 달전에 드립백으로도 출시되었으나 그당시 아쉽게도 경험해보지 못했다가 이번에 기회가 되어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자몽만의 상큼하면서도 약간은 씁쓸한 향이 느껴졌고, 홍차의 그득함과 함께 아카시아 꿀이 들어가서 그런지 뒷맛에서 은은한 달달함이 느껴졌습니다.

네번째로는 '인도 리버데일 SL-9' 인데 이것은 예전에 단독으로 출시된 적도 있고 과거 '드립백 가을하다'에 패키징되어 출시된 적도 있는 커피입니다. 겉봉에 써있는 것처럼 오렌지의 상큼함과 팝콘의 고소함과 다크 초콜릿의 깊고 진한 맛이 느껴지는 커피입니다.

나머지 브라질 캄포 베르텐데스 카투아이 허니, 블렌드 블랙슈가, 블렌드 오렌지선셋의 경우 이미 출시되었던 드립백이고 각각의 해당 제품란에 제가 100자평을 별도로 남겨 놓았으니 관련 내용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각각의 드립백마다 미묘하게 맛과 향이 차이는 있을지언정 무더운 날씨에 잠시 쉬어갈 때 리프레시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유용한 '드립백 바깥여름' 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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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난 5월말에 시작만 해놓고 다른 책들 읽는다고 미뤄뒀다가 다시 집어들었다. 한동안 정보 전달 위주로 된 비문학 위주로 읽다가 간만에 소설을 읽으니 글이 쭉쭉 잘 읽히고 진도도 잘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서머싯 몸의 작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저자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것은 이《표백》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구도와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론 이런 것을 보면서 작가가 글을 잘 쓰기 위해 필요한 것들 가운데 배경지식이라는 것은 많으면 많을수록 글감이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겠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조금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자가 예로 든 서머싯 몸의 작품을 제목만 들어봤을 뿐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향후에 기회가 되면 관심을 갖고 찾아서 읽어볼 수 있길 바래본다. 그리고 만약에 읽게 된다면 오늘 처음으로 밑줄친 부분의 의미를 좀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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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내 입으로 직접 언급하기 좀 꺼림찍한 단어지만 ‘ㅈㅅ‘ 이라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이 행위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표현하려는 듯한 뉘앙스를 반복적으로 풍긴다. 이와 동시에 이 행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에 대한 얘기도 나오는데,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일정부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람 목숨이라는 게 두 개도 아니고 한 개뿐인데‘ 하는 생각으로 인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방법 중 하나로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지 여부는 독자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다만 저자가 이러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던짐으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해 독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과연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것일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주제의 끔찍함(?)과는 별개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하지만 방법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한다면 ...(중략)... 그건 당신이 충분히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어센덴》등 서머싯 몸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테마가 있는데, 바로 너무 천박하다고 생각해 경멸해 마지않는 상대와 지긋지긋한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중에도 상대방을 천박하다고 여기고 그런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긴장 상태가 포인트다.

‘인생은 불가해한 것‘

몸은 그런 괴이한 사랑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태를 마치 재활 노력에 번번이 실패하는 마약중독자나 도박중독자의 상황처럼 묘사하는데, 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내가 원하는 싸움은 없어.

어떤 쓰레기 같은 짓을 해도 주변 사람들이 항상 관심을 보이고 매력을 느낀다 ...(중략)... 현실에서 그럴 정도로 재능이나 매력을 갖춘 캐릭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이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정말로 믿고 있나?"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고, 지금 하지 않으면 이 기회는 지나가 버려.

왜 내가 이 기회를 저버려야 해? 다른 기회를 기다리는 동안 닳고 닳아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죽음이야.

목숨을 바쳐 추진해야 할 목적이 생기니 지금 얼마나 활기에 차 있는지.

"어떤 일이 위대해지려면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이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내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봤다는 뜻이 되는 거야."

누군가가 손을 비비며 애원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가? 엄청나게 코믹하고 궁상맞아 보인다. 희극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사회가 바뀌지 않으리라는 점

믿고 기다려보면 알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일탈할 때조차 정말 독특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회가 궁극적으로 바뀌지 못해도 괜찮다. 우리는 그런 사회에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인간의 가치 하락은 인간이 하등의 항의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 _버나드 맬러머드

아이러니했다. 식객이 집주인에게 큰소리치고 있는 꼴이.

딱히 별 이유도 없이, 동정심도 관심도 아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관성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당신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절대 생활이 곤궁하거나 좌절했을 때 자살하지 마라. 그런 때 자살하면 세상은 당신의 선언을 그저 패배자의 개인적인 도피로 여길 것이다. 여태까지 인터넷 자살사이트나 집단 자살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모두 잊힌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자살하든 세상은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겉으로는 괜찮아보였지만 심적 갈등이 심했고 도피처를 찾던 중이었다."라고 우겨댈 것이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참았다가 당신 삶의 중요한 성취를 이뤘을 때 실행하라. 이 선언이 분명한 사회적 저항임을 전달하려면 그래야 한다.

창의적이면서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길 바란다

시험 하나에 모든 것을 걸고 티끌만 한 유불리에 부들부들 떨면서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전형적인 고시생의 모습

공감은 하지만 방법이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한다면 ...(중략)... 그건 당신이 충분히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뜻이다.

어떤 주장에 대한 찬성과 반대에는 항상 여러 차원과 수준이 있다.

종교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전세계가 6일 만에 창조됐고 또 아담과 이브가 과거에 살다 죽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믿지만 창세기는 창조에 대한 비유라고 타협한다. 어떤 사람들은 매주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10계명과 예수의 가르침 중 일부는 현대에 맞게 재해석해야 한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고대 유대인을 통한 구원은 믿지 않지만 우주에 하나의 절대 원리가 있고 그를 통한 영적 구원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전부 부정하지만 종교에 사회적 순기능이 많다는 점은 인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주는 신이나 악마가 없이 혼돈 그자체이며 종교를 인류 이성에 대한 거대한 범죄라고 인식한다. 이들 중 어디까지를 종교인으로, 어디서부터를 무신론자로 볼 것인가?

어떤 교회는 자신들의 교리 중 사소한 부분 하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사탄의 자식으로 간주하고 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지옥불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다.

모든 혁명의 목소리가 처음에 그랬듯이, 우리의 주장은 다듬어져 있지 않다. 아마 당신은 우리보다 더 빈틈없는 논리와, 손실을 줄이면서도 더 효과적인 수행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혁명을 주장했지만, 공산혁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처한 상황과 이 세대의 운명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 동의한다면 당신은 넓은 의미의 선언자다.

"그 방식은 과격하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라고 맞서며 우리의 논리를 그 자리에 소개한다면 당신은 선언자다.

우리 세대가 하루하루 좌절에 빠지는 이유가 우리 개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그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고민하고 있다면 당신은 우리와 같은 편이다.

공격은 언제나 번개같이 빠르고, 위협적이어야 한다.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오래 달리기 요령 ...(중략)... 보폭을 너무 크게 하지 말고 숨은 짧게 두 번 들이쉬었다가 두 번 내뱉는다.

완성된 사회라는 것은 구성원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사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완성된 사회는 그런 갈등과 모순이 어느 범위 이내에서 더 커지지 않는 상태로 지속될 수 있는 사회를 의미한다.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완성된 사회)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 해야 ‘선거 혁명‘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체제를 위협할만한 심각한 모순이 없는 가운데, 완성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인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사상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진보세력이 대안이라고 내놓는 이데올로기는 기실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틀 안에서의 미세 수정에 불과하다. 또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과격한 이데올로기 대부분은 그 현실성을 따지기도 전에 논리의 정합성과 일관성에서 절망적으로 유치한 수준에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를 포함한 우리 이후의 세대들은 혁신적인 사상을 내거나 시도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담론을 제기할 수조차 없는 환경은 우리 세대의 가치관에도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친다. 이른바 ‘표백 세대‘의 등장이다. 이 세대에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상도 완전히 새롭지 않으며, 사회가 부모나 교사를 통해 전달하는 지배 사상에 의문을 갖거나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런 시도는 기껏 잘돼봤자 기존 지배 사상이 얼마나 심오하고 빈틈없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효과만 낳는다.

이들(표백 세대)에게 지배사상은 큰 틀에서 항상 옳으며, 그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개인마다 과정과 깊이가 다를 수는 있으나 결론은 언제나 같다. 이들은 지배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 온갖 종류의 불편함과 부당함을 겪어야 하는데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는 개인이나 작은 이익집단 단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되며, 세계는 사상적으로 완전무결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바로 표백 과정이다.

아무도 더 나은 시스템을 떠올리지 못한다. 거대한 흰색 세계는 모든 빛을 흡수하며 무결점 상태를 유지한다.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 기준만 지니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수정자본주의의 결합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결과다.

자유민주주의는 교리에 따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가치 면에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수정자본주의는 시장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평가 척도 한 가지만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두 이데올로기가 결합한 가치체계에서 한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은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 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가치를 갖고 있는가‘ 가 된다.

완성된 사회에서 표백 사회의 젊은이는 부에 대한 욕심이 크지 않더라도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증명하려면 돈을 버는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그 외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존재가치를 주장할 다른 방법이 없다.

군대를 일으켜 무공을 세우는 일은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어긋나며, 단식과 묵상으로 깨달음을 얻는 행위는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이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풍,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센트에 가까워야 한다.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조차 엘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 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이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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