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다른 일반적인 소설들과는 구성 방식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느껴졌다. 보통은 하나의 흐름이 쭉 이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책에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또는 로봇의 입장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여 서술한 것이 개인적으로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대략적인 기억들을 더듬어보면, 콜리와 연재 그리고 연재의 엄마인 보경, 연재의 누나 은혜 등과 같은 인물들 각각의 스토리들이 소개되는데, 이것들 중에는 각 캐릭터들만의 고유의 스토리도 있지만, 등장인물들간에 겹치는 사건 등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이야기의 맥을 중간에 놓치지 않고 쭉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연재의 엄마인 보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나오는데, 읽어보면서 캐릭터별로 어떤 기질과 특징이 있는지를 좀 더 파악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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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보니 보경이라는 인물은 과거에 배우로 활동했을 정도로 외모가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인해 얼굴에 상처가 생기고 이로 인해 왕성했던 배우활동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외면의 상처뿐만 아니라 내면의 상처까지 유발시키고 말았는데, 어떤 일이 발단이 되어 그 상처들을 조금씩 회복해 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회복도 잠시였다. 예상치 못했던 또다른 일로 인해 다시 마음에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된다. 결국 돌고 돌아 자신이 꿈꿔왔던 삶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데, 참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하나 내 마음이나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기 정말 힘들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내가 꿈꾸는대로 인생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루 다 말하기 힘들정도로 굉장히 많은 요소들이 필요한데, 솔직히 이런 요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인생은 절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읽었던 유현준 교수의 책에서 저자가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정확한 문장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나 핵심은 바로 ‘차선이 모여서 최선이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매번 최선의 선택지를 선택할 수 없기에 내가 생각했던 최선보다는 조금 못미치는 차선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 이런 선택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최선을 만들어간다는 말이다. 실제로 유현준 교수도 자신의 책에 고백한 바에 따르면 ‘자기 인생도 결코 자신이 처음에 생각하고 꿈꿨던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차선책을 선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식으로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이 비록 못마땅하거나 꿈꿔왔던 것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그 처한 상황에서의 최선을 늘 추구하는 것이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냥 힘겹다고 인생의 끈을 무작정 놓을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이렇게 예쁨 받는데 더 많은 사람에게 왜 예쁨 못받겠어?‘ 라는 생각
모친은 인생의 2막이란 원래 아무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보경이 보기에는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예견된 추락일 뿐이었다.
여기가 왜 지하인줄 알겠어?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니까, 이곳에 네가 뿌리를 내려야 지상에 꽃으로 필 수 있다는 말이야.
삶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게 생겼다. 선남선녀가 목숨을 계기로 만났으니 사랑에 빠지기는 쉬웠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꽤 가쁘게 흘러갔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자 자연스럽게 회복도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소방관과 약지에 반지를 나눠 낀 후부터 보경의 삶은 자신이 그려왔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배우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급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시선보다 단 한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도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3%도 살았는데 80%는 왜 못살아. 당신 왜 이러고 있어."
모친의 요리 솜씨로 시작됐던 인생은 긴 레일을 돌고 돌아 다시 모친의 요리로 돌아왔다.
요리는 연구하지 않아도 혀가 시키는대로 따라가면 금세 모친이 내던 맛이 났다.
죽음이 확률로 계산되지 않고 예견되지 않는 날들을 쭉 누릴 생각이었다. 연재가 쓰레기같은 기수 휴머노이드를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쟤가 뭐를 저렇게 갖고 싶어 한 게 처음인 것 같아서."
예전에는 휴머노이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멀쩡히 은행에 다니던 사람을 밖으로 내쫓더니 이제는 제 딸이 다 망가진 휴머노이드를 가지고 왔다. 어쩐지 눈은 뜨고 있으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이었다. 휴머노이드를 보면 그랬다.
사람은 이따금씩 강렬하게 무언가에 끌렸다. 그게 사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음악일 수도, 물건일 수도 있었다. 그 강렬한 끌림 앞에서는 무엇도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마지막 월급을 전부 꼬라박을 정도의 강렬한 끌림을, 어제 연재는 다 망가진 콜리를 보고 느꼈으리라.
때때로 어떤 일들은, 만연해질수록 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지구가 너무 많이 바뀌어야 했다. 다수의 입장에서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전가하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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