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는 부분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에 수록됨과 동시에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노랑무늬영원‘이다.

처음 밑줄친 두 문장은 개인적으로 표현이 신박하다고 느껴져서 적어보았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었지만 이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동안 앞에서 읽었던 단편 소설들에 나왔던 핵심 모티브들을 차용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앞에서 읽었던 소설들의 핵심 내용들을 다시금 상기할 수 있었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들이야 제각기 다르겠지만, 적어도 무언가 교집합이 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간 독서를 허투루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세면대에 딸린 거울을 보면, 숱한 동물적 감정들로 출렁거리는 내 내면이 간신히 한 겹의 피부로 봉합되어 있는 것 같았다. - P231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어느 어둠 속의 창고에서 내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지고 있었을까. 퇴행과 은밀한 발광의 흔적을 고스란히 이목구비에 새겨가고 있었을까. - P232

그곳은 내 집이 아니다. 나에게는 집이 없다. 이 삶은 나의 삶이 아니다. 어떤 정서적 유대도 느낄 수 없다. 어떤 장소, 어떤 기억, 어떤 미래에 대해서도. - P232

내 얼굴에 흐르는 땀, 쇠약해진 다리의 비척거리는 느낌, 늘어뜨려진 두 손ㅡ몸의 작은 감각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나는 살아 있다.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보고 듣고 숨 쉰다. 분명한 것은 그것뿐이다. 그것만이 나에게 남았다. - P232

대개 승용차에는 주인의 취향이 배어 있게 마련 - P233

모든 상황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의 평화는 내 건강을 전제한 것이었다. 조건이 달라지면 상황도 달라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 P234

그 과정에는 어떤 부도덕도, 죄악도 없었다.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나도 예전의 내가 아니며, 그도 그때의 그가 아닌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을 따름이었다. - P234

외딴섬에 단둘이 표류된 사람들처럼, 우리는 서서히 서로를 질식시켰다. 그렇게 다시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어갔다. 서로에 대한 배려, 이타적 관계, 우정, 동료의식 들은 강 저편에 남았다. 애초에 완전한 타인이었다는 것ㅡ그 한 가지 명료한 사실만이 이편의 강가에 남았다. - P234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성이 여리고 다정했었다. 그러나 닳아간다. 타이어가 닳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그와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조금씩, 닳아간다는 것을 의식 못 하면서 조금씩, 바퀴가 미끄러워진다. 미끄러워지고, 미끄러워져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브레이크가 듣지 않는다. - P245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그럴 수 없었다. 억지로 배를 쥐고 웃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사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한 일은, 모든 사랑을 잃은 뒤 다시 찾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끌어안고 있던 짐을 물살에 떠밀리는 동안 놓쳐버리고 만 것처럼, 매우 쉽게. - P246

그런 나를 자책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대로의 진실이 가리키는 길로 가볼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볼 것이다. 뜬 눈으로ㅡ설령 훗날 돌이켜보아 감은 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ㅡ뜬 눈으로 가볼 수밖에 없다. - P246

다른 길이 없다. 자기기만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속임수 없는 희망이 아니라면 소용없다. 어떤 속임수도 나에게 먹히지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투명함이 나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전에는, 이렇게 자신을 잘 들여다볼 수 없었다. 이제는 마치 내가 한 마리 빙어가 된 것처럼, 뼈마디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인다. 아무것도 자신에게 속일 수가 없다. - P247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자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만. 내 생에서 중요한 것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만. - P248

빛이 화면 뒤에서 비쳐 나온다. 구원의ㅡ떠오르는ㅡ잠잠한ㅡ승화된 눈물의 빛. 서로 다른 빛깔의 동그라미들이 겹쳐져 더 진해지고 어두워져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떠오른, 물을 섞은 유채꽃 빛깔의 노랑. 간혹 그보다 강렬한 주황. 멀리서 보면 이 그림들은 결코 위력적이지 않다. 가까이 갈수록 착시처럼 더 밝아지는, 실제로 튀어나오며 확장되는, 눈과 혼을 홀리는 노란 빛방울들. - P250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빛을 내면에서 보고, 그것을 나에게 다시 보게 했는지, 빛의 지문(指紋)과 같은 이 점들을 찍으며, 사랑하며, 어루만지고 빨려들고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었고, 나는 거기에 다시 내 영혼을 내려놓은 건가? - P251

가슴으로 생의, 우주의, 한없이 깊고 밝고 가벼운 빛이 물처럼. - P251

문득 생각한다. 이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251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 이와 같은 것을 하고 싶은가.
그렇지 않다, 라고 나는 대답한다. - P251

이 세계는, 이 감동적인 세계는 나에게 억지와 같다. 나는 이렇게 억지로 초월할 수 없다. 아름다워질 수 없다. 소리 없이, 내가 입술을 물고 울기 시작한 것을 깨닫는다.
나는, 그릴 수 없다. - P251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존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그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 외에 다른 것이 되어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원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의지력이 없으며 미성숙한 인간이었지만, 그림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를 끌고 다녔다.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인간적 약점의 처방으로서 그림은 나를 살렸다. 거짓, 나태함, 자기중심성, 비굴함, 천박함으로부터 나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곧장 낮은 지점, 가장 동물적인 지점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먹고 배설하고 잠을 자는, 본능만으로 남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 P252

그림 없이 존재의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예전에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 내 모든 에너지는 그림을 위해 삶에서 유보되었고 저축되었다. 오로지 작업을 위해 모든 것이 유보된 상태, 그것이 자연인으로서의 내 삶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살아보았던 적이 없다. 나는 사는 법을 모른다. - P252

이렇게 비어 있을 수가. 내 지나온 모든 시간이 완벽하게,
고스란히 비어 있을 수가. 텅 빈 어두운 방을 들여다보는 것같다. - P252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 P270

소진이 거실의 오디오를 켠다. 에릭 클랩튼의 오래된 음반이다. 네 살 된 아들을 잃고 만들었다는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나는 고단한 몸을 소파에 파묻은 채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인다. 시간은 너를 밑바닥까지 내려놓을 수 있지. 네 무릎을꿇게 만들 수 있지. 네 가슴을 영원히 찢어놓고, 구걸하고 애원하게 할 수 있지. - P276

소진의 대답이 노래 가사의 일부 같다. 다 흩어져버린다는걸. 남김없이 닳아지고 사라져버린다는 걸. - P277

이거, 이름 있니?
나는 묻는다.
영원이요.
영원?
네, 노랑무늬영원. - P275

노랑무늬영원
불도마뱀
Fire Salamander - P278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 동물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만져보면 축축하고 차가울 듯한 피부. 끝부분이 갈라진, 허공으로 길게 내민 혀, 근육질의 긴 꼬리. 민첩해 보이는 네 개의 짧은 다리들. - P278

중동의 사막 지방에서 서식하는 그 동물은, 불 속에서 사는 것으로 이집트인들에게 믿어졌었다고 거기 씌어 있다. 도마뱀의 재생력과 불의 정화력이 결합된 믿음일 것이다. - P279

그 짐승의 징그러운 외양에 대조돼 더욱 돋보이는 무늬의 아름다움을 나는 오랫동안 음미한다. 이글거리는 태양에 가까운 지역이 아니라면 결코 새겨질 수 없을 화려함이다. 밝은 레몬빛에 가까운 투명한 색채, 나비나 흰 새, 젊은 여자의 스카프에 어울릴 법한 강렬한 패턴. - P279

노랑무늬영원, 하고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영원이란 도롱뇽과에 딸린 속명일 뿐이라고 씌어 있지만, 그 동명이의어의 울림은 가냘프게 내 마음을 움직인다. 왜인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한 움직임이다. - P279

네 말대로 우울해질 때도 있지만, 꼭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야. 특히 둘째를 보면 순간순간 놀라. 배만 안 고프면 저 애는 웃거든. 끊임없이 장난할 거리를 찾고, 행복하고, 활기에 넘쳐.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 인간은 그런 존재인가봐. 우리도 원래는 그랬지만, 그 뒤로 프로그래밍이 된 상태니까 원래의 상태를 잊고 사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 P279

그런가...... 그런데 기억이 안 나니까.
뭐가?
나는 대답한다.
내가 저만했을 때, 어땠는지.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은 정말 무의식 속에 들어가 있는걸까? 그렇다면 좋겠어. 그런 자연스러운 상태가 숨어 있다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우릴 도와준다면. - P280

그림 다시 그리고 싶지 않아?
생각 없어. 안 그리니까 편해.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좋아. - P280

나는 떤다. 두렵기 때문이다. 너무 아름다운 것도 고통이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못이나 씨앗처럼 몸 안에 박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토록, 끈덕지게 죽지 않고 살아 꿈틀거리리라는 것까지 열세 살의 나는 아직 모른다. 갈망과 절망, 풀리지 않는 긴장으로 내 몸이 들뜨고 지칠 것임을 모른다. - P282

사랑받는다는 것은 황홀하구나. - P283

우거진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나는 문득 놀란다. 역광을 받은 나뭇잎들의 형상이 낯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수한, 어두운 초록빛 동그라미들 틈으로 비쳐 나오는 햇빛.
좀더 걸어가다가 나는 흠칫 깨닫는다.
Q가 그린 것, 저것이었나. 저 노랑이었나. - P283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계속해서 가로수들을 올려다본다. 따가운 햇빛을 역광으로 받은, 반짝이는 잎사귀, 잎사귀의 동그라미들. - P284

그 모든 것들이 고요히, 그 사진관의 먼지 낀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내 시계처럼. 이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죽지 않고 고요히 돌아가고 있었던 초침처럼. - P284

만나고 싶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의 그가 아니라, 그때의그를. 아니, 실은 그때의 나를 그 여자를 고집 세고,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그래서 성숙하지 않은 그 여자를 그러다가, 뜻밖에도 불에 덴 듯 깨닫는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자신을. 그,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 P284

나는 시큰거리는 손가락들을 내 따뜻한 목덜미에 문지른다. 그때 안다. 만일 내가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진 인간으로서 다시 살아나가야 한다면, 내 안의 죽은 부분을 되살려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부분은 영원히 죽었으므로 그것을 송두리째 새로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것이다. - P285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나는 언제나 독립적이고 강한 인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손을 쓰지 못하는 나는 조금의 경제력도 가질 수 없는 인간이다. 죽는 순간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이 나의 삶이 될 것임을 의심한 적 없었지만, 고작 서른세 살에 붓을 꺾은 사람이다. 누구에게도 폐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고통스러운 부담이 되고 있다. 단지 숨 쉬며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 P287

이렇게 더 작아져간다. 더 지워지고 뭉개어진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어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 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 P287

하얗게 다시 덮쳐온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이, 한 마리 한마리의 물고기들이 시야 가득 확대돼 퍼덕거린다. 비늘들이 번쩍인다. 아가미들이 벌컥벌컥 벌어졌다가 다물어진다. 한마리 한 마리의 투명한 물고기들이 물을 가르려 안간힘 쓴다. 나아가기 위해, 퍼렇게 멍든 몸들을 단단한 물살에 부딪친다. 몸부림친다. - P288

삶을 정리할 여지 따위도 없었다. 아팠을 뿐이다. 무서웠을 뿐이다. 죽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 P289

나는 가끔 생각했다. 다시 그와 같은 순간이 닥친다면, 그게 언제든, 죽음의 얼굴을 마주본 그 자리에서 나는 좀더 꿋꿋할 수 있을까. - P289

분명한 것은 이대로 그 순간을 맞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내지 않는다면, 진실을 살아보지 않는다면, 다시그 순간이 닥칠 때 결단코 두려움과 후회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다. - P289

그러나 그 진실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환영과 잿더미가되어버린 뒤, 내가 움켜쥘 수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인가. - P289

어떤 인간이든,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을 소유할 수 있는 거지. - P290

남편이 사랑스럽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내 사랑이 메말랐다. 내 사랑이 마르자 삶이 사막이 되었다. 내 사랑이 말라서, 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흔히 들었던 성경 구절을 이제 이해한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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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약 3주 정도만에 다시 읽는다. 그동안 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읽느라 한동안 손놓고 있었는데, 드디어 다시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은 ‘훈자‘라는 단편 소설의 중후반부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잠깐 언급했었는데, 훈자는 파키스탄과 중국의 국경에 맞닿아있는 작은 소도시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들이라면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계시겠지만, 독자인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지명이다.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 소설에는 한 여자가 나오는데, 그녀는 습관적으로 훈자를 생각한다고 한다. 꿈에서도 나올정도라고 하니 뭐 말 다했다. 근데, 본문을 읽다보면 그 꿈의 내용이 그다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뭔가 역설적인 느낌을 준다. 훈자가 아닌 훈자라는게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에 대한 궁금증은 뒷부분을 읽어나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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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의 남은 뒷부분을 읽어봤는데, 솔직히 저자가 이 작품에서 의도하려했던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독자인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보자면 ‘훈자‘에 나오는 그 여자는 훈자라는 것을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자아와 동일시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훈자가 아닌 훈자라는 것은 자신이 꿈꾸던 자아가 아닌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의 자아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을 정신없이 살아가다보면 이상적인 자아든 현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아든 뭐든 생각할 겨를없이 마치 화살이 날아가듯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게 우리들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인데 이 ‘훈자‘에 관한 다른 분들의 생각이나 작가님의 해설을 들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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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자‘에 뒤이어서 나온 작품은 ‘파란 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독자인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작가님의 책 중 《바람이 분다, 가라》에 나왔던 부분과 비슷한 부분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먹과 물의 삼투압 현상의 원리를 이용한 작품 제작 과정이었는데, 아마도 출간년도 상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이 먼저 출간된 것으로 보아 여기 나왔던 이 모티브가 이후에 나온 《바람이 분다, 가라》 에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것들은 같은 작가의 책을 집중적으로 읽다보니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스토리적인 부분에서는 딱히 코멘트 할 건 없지만 굳이 몇마디 붙여보자면,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생生과 사死가 큰 틀에서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약간은 철학적인 혹은 추상적인 생각같은 것들을 해볼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위의 훈자에 적은 것처럼 전문가의 비평이나 다른 독자님들의 평을 참조하여 좀 더 심화된 이해를 할 수 있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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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로 만난 ‘왼손‘이라는 소설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던 작품이다. 주인공인 이성진이라는 인물은 은행의 대부계에서 일하는 은행원인데, 그의 상사인 신부장의 까칠한 태도로 인해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소설의 제목이 ‘왼손‘인 이유는 이성진의 왼손이 이성으로 컨트롤 되지 않은 채 철저히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는 설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본능적인 왼손은 결국 평소 불편하게 생각하던 신부장을 향해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때리려는 액션까지 취하는 상황까지 연출하고 만다. 이성진은 자신의 왼손을 강제로라도 통제하고자 오른손으로 왼손을 강하게 잡으려고 애쓰지만, 이런 상황이 회사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자 상사는 이성진에게 휴식을 취할 것을 권하는 지경에 이른다.

한편 이성진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과거 대학생 시절 극회활동을 하면서 짝사랑했던 선혜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성진은 엄연한 가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끌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선혜와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다. 그런데 이 과정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성진의 통제되지 않는 본능적인 왼손이 그 발단이 된 것이었다. 본문에서는 성진과 선혜 간의 분위기가 초반에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성진의 왼손이 둘의 사이를 파탄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성진의 바람을 알아챈 성진의 부인은 성진과의 결혼생활을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성진은 선혜와도, 자신의 부인과도 헤어지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자괴감에 몸서리친다. 결국 성진은 자신의 왼손을 아주 그냥 박살 내기로 작정을 하고 오른손에 망치까지 쥐어들지만, 왼손의 생존 본능 때문이었을까? 왼손은 오히려 오른손을 제압하고 심지어는 칼로 오른손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왼손과 오른손이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결국 성진은 몸에 치명상을 입고 만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어졌는데, 독자인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한 자의 최후가 정말 비참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최후에 이르기 전까지의 과정도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었다. 한편 한 가지 의문도 들었는데, 왼손이 컨트롤되지 않는다는 설정을 저자가 한 이유도 궁금했다. 단순히 내가 앞서 적은 말처럼 그저 본능 제어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아니면 독자인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말이다. 역시나 이 소설에 관해서도 전문가의 해설이나 다른 독자님들의 생각을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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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마지막으로 수록된 ‘노랑무늬영원‘에 대해 잠시 얘기해보자면, 그동안 이 소설집의 앞부분에 나왔던 에피소드들(ex> 왼손, 개, 그림 등)을 핵심 모티브로 활용하는 듯한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 P118

그 여자의 훈자는 더 이상 영문판 《론리 플래닛》 파키스탄 편에 있지 않았고, 그 여자가 암호를 걸어놓은 파일에 담긴 신장 지방과 파키스탄 지도에 있지 않았다. 검색창에 훈자, 라고 써넣으면 떠오르는 블로그들, 카페들에 있지 않았다. 길고 복잡한 화장품의 이름, 깎은 듯 아름다운 여배우의 옆얼굴에 있지 않았다. - P118

더 이상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훈자인 훈자도, 훈자가 아닌 훈자도 생각하지 않았다. - P121

그 여자의 입이 틀어막히면 훈자도 입이 틀어막혔다.
빙하가 녹은 뿌연 물이 흰 피처럼 배수관을 흐르는 동안,
그 여자가 목마르면 훈자도 목이 말랐다.
그 여자가 더럽혀지면 훈자도 더럽혀졌다.
그 여자가 침을 뱉으면 훈자도 침을 뱉었다. - P124

지치지만 견디는 것뿐이야. - P125

아니, 내가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은 내 삶이야. - P125

제발, 잘못되지 말아줘. - P126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 P132

・・・・・・선생님은, 종교가 필요할 때가 없으세요?
글쎄, 종교적인 것과 종교는 다른 것이지. 그런데 왜, 요즘 관심이 있어?
그냥...... 인간적인 한계를 느껴서요.
지나가듯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싸워서 이겨야지, 그래야 그림이 되지. - P136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왜 바로 시작하지 않는거지? - P140

여자가 월경을 한다는 것, 피를 흘리며 아이를 낳는다는 걸 생각하면 경이로워. 그러니까, 생명은 언제나 핏속에서 시작되는 모양이지. - P142

문득 나는 당신의 병과 당신을 어디까지 분리할 수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당신의 성격, 당신의 말투, 당신의 걸음걸이...... 그러니까 당신의 모든 것은 당신의 병과 이어져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아프지 않았다면, 하고 상상하면 혼란스러웠습니다. 아픈 당신을 지워버린 뒤에 남는 당신의 정수, 그 위로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왔을 또 다른 당신의 모습들은 내가 알던 당신과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달랐을까요. - P142

무엇보다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해주어서, 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신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 P146

희망의 싹들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 P146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 P153

먹빛 하늘이 서서히 밝아집니다.
이렇게 푸른빛이 실핏줄처럼 어둠의 틈으로 스며들 때면,
내 몸속의 피도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의지,
내 기억, 아니, 나라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워집니다.
한차례 파도가 밀려 나간 사이 잠깐 드러난 부드러운 모래펄처럼, 우리가 여기 머무는 시간은 짧은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문득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어집니다. - P154

어쩌면 시간이란 흐르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그때 함께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그 시간의 당신과 내가 빗소리를 듣고 있다구요. 당신은 어디로도 간게 아니라구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다구요. 언젠가부터, 당신과 동갑인 남자를 만날 때마다 세월이 변화시켰을 당신의 얼굴을 막막하게 그려보던 버릇을 버린 것은 그 때문입니다. - P154

거긴 지낼 만한가요. 빗소리는 여전히 들을 만한가요. 영원히 가져오지 못하게 된 감자 생각은 잊었나요. 오래전 꾸었다는 꿈속의 당신, 부풀어 오른 팔로 파란 돌을 건지고 있나요. 물의 감촉이 느껴지나요. 햇빛이 느껴지나요. 살아 있다는 게 느껴지나요.
나도 여기서 느끼고 있어요. - P154

신부장은 당뇨기가 있다고 했잖아. 체력이 약하니 짜증이 자주 나는 것도 당연하지. 자식 자랑할 때봐. 평범한 한 인간일 뿐이지. - P162

알고 있었어.
......뭘?
네가 날 좋아하는 거.
그런데 왜.....
왜 줄곧 모르는 척했냐구?
그녀는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고백하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만 날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까. - P174

혹시 그런 경험 해봤어? 내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 때. - P175

섹스할 때, 나 자신을 어쩔 수 없어지는 순간. 그 순간이 싫어. - P178

가장 나쁜 것은, 왼손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것이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그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 P180

지점장의 갑작스런 존댓말이 마지막 경고이자 배려라는 것을 그는 알아들었다. - P182

없었던 일로 하면 되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 P183

이젠 그만. 더 움직이지 마. - P184

이젠 오히려 내 것이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이며 돈이며 삶이며.. 다 누군가에게 잠깐 빌려다 쓰는 것 같아. - P187

모든 게 이 손 때문이야.
그는 자신의 왼손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 P197

왼손이 말을 듣지 않아. 이것 때문에 다 엉망이 됐어. 직장도 잘렸어. 이게 아니었으면, 그날 여기로 들어오지도 않았을거고.... - P197

.....새장 밖으로 한번 나온 새한테 가장 무서운 건 새장일거야. 그런 새를 붙잡으려면 발톱이며 부리에 찢길 수밖에 없겠지. 설령 새장에 다시 넣는 데 성공한다 해도 아마 새는 제풀에 죽고 말 거야. 네가 날 붙잡을 거란 얘기가 아니라, 만에 하나 붙잡았다 해도 너한테 득이 될 거 없었을 거란 얘기야. 그러니까 잘 생각한 거야. 미안해할 것 없어. - P200

내가 가라고 했지. 내가 이래서 연애 따위 다시 안 하려고 하는 거야, 열에 들뜬 생각, 눈물, 나답지 않은 행동, 복잡한것, 바닥까지 보고 또 보여주는 것...... 싫고 지겨워. 이쯤에서 그냥 가. - P200

미안해 정말, 이 손 때문에………… - P201

......일밖에 모르는 당신과 함께 사는 거 불행했어. 당신은아이도 사랑하지 않고, 주말에 형식적으로 놀아주는 한두 시간동안에도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만 보잖아. 지난 몇 년간 나한테 당신은 현금 지급기 같은 거였고, 난 당신한테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기계 같은 거였지. ...... 아직 늦지 않았다면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 P205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다시는 꿈틀거리지 말라고 했지! - P207

난 널 잘라버릴 수도 있어.... 알겠어? 뼈만 부러뜨리는 걸 다행으로 알아. - P207

두 마리 짐승 같은 팔들이 온 힘으로 엎치락뒤치락하던 한순간, 울부짖는 비명이 아파트의 정적을 찢었다. - P208

나는 책상 앞에 앉은 채, 방금 남편이 내 뒷모습을 향해 던진 말의 여운을 곱씹어본다. 외출이라도 할 건가. 그 행간에 배어 있는 것은 인내와 짜증, 자제된 적개심이다. 약간의 경멸감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답 대신 숨을 들이마신다. 계속해서 서랍을 뒤적인다. - P212

어떻게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 P213

모든 일에는 교훈이 있다. - P216

난 언제나 그렇게,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감당해내려 하는 어리석음이 단점이었어. 순간적인 판단력도 부족했어. 항시 냉철하여, 때로는 잔인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 P216

인생은 학교가 아니다. 반복되는 시험도 아니다. 내 왼손은 으스러져버렸고, 그게 끝이었다. 배울 것도 반성할 것도 없었다. 어떤 의미도 없었다. - P216

첫 불운은 조용히 다른 불운을 불러왔다. - P216

모든 것이 그대로였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 P220

며칠 밤을 새워 작업에 몰입할 수 있었을 때 나는 행복했다. 그 행복만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 P222

전부라고 믿었던 것을 잃고도 살아갈 수 있다. - P222

매 순간 나는 삶과 자신 사이에 생겨난 거리를 느꼈다. 처음경험하는 헐거움이었다. 애잔히 찰랑거리는 감정, 사랑, 연민따위・・・・・・ 환상과 주관성, 소위 정이라 불리는 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감정들이 증발되었다. - P227

아마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P227

내 몸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 P228

회복되고 나면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작업이었다. 세상의 어떤 즐거운 일들보다 그것만이 간절했다. 무척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여행조차 나에게 극히 부수적인 것이었음을 그때 알았다. 내가 마음으로 작업을 포기한 것은, 퇴원하고도 한참 뒤, 오른손마저 망가졌음을 알았을 때였다. - P230

이젠 두 손 다 틀렸어, 라고 중얼거린 순간이, 나에게는 그 이른 봄날의 교통사고보다 더 결정적인ㅡ더 무서운ㅡ순간으로 기억된다. 그것은 연극이 갑자기 막을 내린 데 이어, 객석에서조차 추방된 것과 같았다. 놀라운 일은 그 직후부터 시작됐다. 가까스로 유예되고 있었던, 격렬하고 부정적인, 가장 원초적인 감정들이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포, 후회, 수치, 분노, 원망, 증오, 억울함, 비참함, 살의. 그리고 혼자라는 것. 철저히, 당연히, 언제까지든 혼자라는 것.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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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권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지 싸움을 좋아하는 불량한 학생인줄로만 알았던 정대만이 실은 농구부원이었다는 사실을 안경 선배(준호)가 후배들에게 말해준다. 후배들은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는데...

오늘 읽기 시작한 6권에서는 정대만의 중학교 시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동안 후배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무석중 농구부의 슈퍼스타였던 정대만의 과거 활약상을 엿볼 수 있었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경기 종료가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정대만이 역전할 수 있다고 팀원들에게 파이팅을 불어넣는 장면에서 나온 말인데, 에이스의 이 말 한마디가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린다.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라는 말이 생각나게 하는 멋진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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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 준호가 정대만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정대만은 지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권준호 그리고 채치수와 동기였다. 북산고에 입학하고나서 1학년 신입 부원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맞붙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대만은 키가 큰 채치수를 상대로 자신의 스피드와 테크닉을 믿고 경기를 하다가 그만 불의의 부상을 당하게 된다. 무릎쪽 부상이라 병원에 잠시 입원해있었는데, 농구를 몇 일간 못하게 되자 몸이 근질근질했던 정대만은 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농구 코트로 돌아온다. 정대만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돌아왔다는 생각에 준호를 비롯한 다른 농구부원들이 걱정하지만, 정작 본인은 누워있는 것보다 뛰는 게 더 좋다며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너무 이른 복귀였던 탓일까. 정대만은 연습 경기도중 또다시 무릎 부상으로 쓰러지고 만다. 이로 인해 정대만은 엄청난 좌절감을 느낀 듯하다. 책에는 중간과정이 생략되어 있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폭력적인 불량학생들과 어울리면서 농구부를 박살내러 온 지금의 모습을 보면, 아마도 거듭된 부상으로 인한 좌절감으로 인해 양지에서 음지로 빠져버린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준호의 이야기로 인해 정대만이 준호를 비롯한 다른 농구부원들과 티격태격하던 와중에 농구부 감독인 안 선생님이 이들이 있는 체육관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상황 반전의 서막이었다. 과거 정대만은 중학교 시절 안 선생님의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 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정대만은 원래 경기를 포기하려고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새롭게 정신을 가다듬은 후 승부를 뒤집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 기억은 이후 정대만이 다른 고교가 아닌 안 선생님이 감독으로 있는 북산고로 진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대만에게 안 선생님은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던 것이다.

정대만은 체육관에 들어온 안 선생님을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자기 마음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말 한마디를 꺼낸다.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도 간만에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의 상처를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고 방황하던 정대만이 회심하게 되는 이 장면은 나를 비롯한 수많은 독자들의 감정을 요동치게 했을 것이다. 안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방황하던 한 사람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을 보며 독자인 나도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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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기존에 있던 채치수, 서태웅, 강백호에 더해 송태섭과 정대만까지 농구부 멤버가 추가 되면서 북산고는 전력이 급격히 상승한다. 예전에 채치수가 말했던 전국제패라는 꿈이 더이상 꿈만이 아닌 실현 가능한 목표가 된 것이다. 실제로 북산고는 64강 토너먼트에서 1, 2, 3, 4회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결승리그 진출을 목전에 둔다. 한편 북산고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해남대부속고의 이정환, 신준섭, 전호장 그리고 상양고의 성현준 등 각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북산고의 시합을 직접 관전하는 장면도 나온다. 추가로 지난번에 북산고와 연습경기를 했었던 능남고의 변덕규와 윤대협의 모습도 함께 볼 수 있었다.

한편 슬램덩크의 영원한 주인공인 강백호는 운동능력은 좋지만 아직 농구를 제대로 시작한지는 얼마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4회전까지 시합을 하는 동안 득점은 단 한 점도 하지 못한 채 매경기 5반칙 퇴장만 당하고 만다. 이런 자신의 모습에 다소 실망한 나머지 그동안 ‘나는 천재야‘ 라고 말하면서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있던 그는 어느순간부턴가 ‘혹시 내가 천재가 아닌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설령 진짜 실력이 부족할지라도 자신감없는 모습보다는 비록 근거없는 자신감일지라도 자기애로 가득차있던 강백호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었기에, 자신감이 결여된 강백호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선 뭔가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던 것 같다. 강백호가 하루속히 예전의 자신감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다행히도 이 6권 마지막 부분에서 강백호가 원래의 자신감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독자인 나도 왠지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아직 시간이 있어!! 우린 이길 수 있다구!! - P11

좋은 조연이 없으면 주연 역시 살아나지 않잖아!! - P21

그는 반드시 엄청난 존재가 될 겁니다... - P60

볼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어떻게 움직여서 프리가 되는가!! 그것도 슈터의 조건이지!! - P64

키로 이길 수 없는 것은 스피드와 테크닉으로 커버하면 돼!! - P77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 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 P85

자, 시합이 얼마 안 남았다!! 게으름피면 안 돼!! - P95

쉬는 편이 더 괴롭다는거.... 너도 입원해보면 알게 될 거야, 준호야. - P99

무리하지마. 대만아.... 만일 아프거든 쉬는 게 좋아. - P99

태섭이를 그렇게나 물고 늘어진 것도 그냥 건방지기 때문이 아니라 태섭이가 농구부 기대주였기 때문에...
자신이 잃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 P112

대만아, 사실은... 농구가 하고싶은 거지...? - P113

다…다리는 이제 나았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함께 하자!! - P115

농구 같은 건 이제 나한테는 지난 추억일뿐이야!! - P117

넌 비겁한 놈이야. 정대만…. 그저 비겁자일 뿐이라구....
그런 주제에 뭐가 전국제패냐... 꿈 같은 소리 지껄이지마!! - P118

지난 일이야!! 이젠 상관없어!! - P119

누구보다도 과거에 얽매이는 건 바로 당신이잖아..... - P120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 P127

연습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 P130

공중에서 잡아서... 두 발로 착지!! 그러면 좌우 어느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 P143

게으름 피지 마, 바보야. - P147

난 천재니까!! - P162

(프리스로 바이얼레이션) 슈터는 심판으로부터 볼을 받은 후 5초 이내에 슛을 쏘지 않으면 안 된다. - P217

알 게 뭐야. - P232

우리는 강해! - P247

어쩌면... 난 천재가 아닌지도 몰라... - P289

싸움 뒤엔 배가 고픈 법이야. - P292

퇴장 안 당하는 요령 같은 건 없어!! 아무리 잘하는 놈이라도 퇴장당할 수 있단 말이다!! - P299

파울과 나이스 디펜스는 종이 한 장 차이야. 하지만 디펜스만큼 꾸준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도 없다. - P299

평소 꾸준한 훈련으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어. 그 때문에 매일같이 풋워크를 하는 거야. - P299

디펜스란 것은...!!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냐!! - P299

단번에 볼을 뺏어서 멋있게 보이려 하면 안 돼!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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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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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에는 총 6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얼핏보면 각각의 작품별로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에 차이가 있기에 다르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뭔가 다른듯 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각각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고통‘인데, 등장인물들이 각자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견뎌내거나 극복해내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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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는 부분은 이 소설에 대한 문학평론가의 해설이다. 여기선 특별히 각 작품별로 등장인물의 분신에 대한 전문가적인 설명을 읽어볼 수 있었는데, 이제껏 읽어왔던 작품들에서 만났던 등장인물들의 전반적인 구도 및 핵심 주제들에 대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었다.

이에 관해 이야기를 좀 더 보태자면, 등장인물들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원인은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유발된 고통은 하나같이 등장인물의 정신이나 육신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평론가는 이 악영향을 우울증이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는데, 이 소설집을 쭉 읽어왔던 나도 평론가의 설명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독자인 나에게 각각의 캐릭터들이 작품속에서 느꼈던 감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우울감, 분노, 좌절 등과 같은 키워드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여러가지 상황들이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위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평론가의 해설은 이러한 감정을 전문가적인 시선으로 날카롭게 분석하여 나같은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문학작품 감상의 깊이를 보다더 심도있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해설을 통해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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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메시지 중에 살기 위해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있었는데, 얼핏 보면 역설적인 표현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잘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결코 역설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거 이순신 장군이 말했던 것으로 유명한 ‘사즉생 생즉사‘(죽고자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이 생각났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지만 그냥 흘려듣고 넘기는 경우들이 많을 법한 말이기도 한데, 오늘 독서를 계기로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제대로 곱씹어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메시지가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를 가로막으려하는 장애물들에 굴복하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부수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애도가 지나쳐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에 ‘부재하는 현존‘으로, 마치 유령인 듯 합체한 우울증의 다양한 변주 - P318

애도의 대상을 자기 안에 가두는 일은 우울증적 주체가 형성되는 첫 단계이다. 자아의 일부로서 대상을 보유하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자아란 곧 ‘상실된 타자‘라는 역설이 주체 내부에 성립된다. - P318

우울증은 자아가 타자의 상실을 타자와의 합치를 통해 만회함으로써 상실을 거부하고 대상을 보존하는 방법인 셈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주체가 누군가를 자아의 분신이자 거울로 인식한다면, 게다가 그 ‘누군가‘가 우울증적 주체를 형성하는 트라우마의 구체적 외현으로 나타난다면, 주체는 자신의 ‘애도의 과함(지나침)‘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 P318

가족의 상실에 대한 오랜 애도 작업을 그만 끝내야 한다는,
그래야만 남은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는 - P319

우울의 정체, 즉 애도의 과함 - P319

『여수의 사랑』에 반복되는 분신의 구조화는, 그러므로, 우울증적 주체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목도함으로써 비록 불투명하고 의심스러울지라도 치유의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려는 자기 인식의 능동적 장치라 할 수 있다. - P319

『여수의 사랑』은 각각의 개인이 치유하기 힘든 마음의 병을 안고 각자의 ‘여수(麗水)‘를 향해 느릿느릿, 그러나 마치 주어진 운명의 수락을 조용히 거부하는 수난자처럼 자기 몫의 고통을 지고 회귀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들이 앓는 병이야말로 삶에의 의지를 대신 표현하는지 모른다. - P320

‘질병으로의 도피‘는 자아를 위협하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방어책이기도 하다. 이들의 병은 생을 파멸로 이끄는 죽음 충동의 소산이 아니라 자기를 파괴시킬지도 모르는 정신적 압박을 이겨내고자 의식과 무의식이 한판 싸움을 벌여 자아 내부에서 힘겹게 조율된 결과물이다. 그러니 ‘여수(旅愁)‘의 인물들은 죽고자 아픈 이들이 아니라 살고자 아픈 이들이다. - P320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치는 속력"은 의식의 부면으로 솟구치는 상처의 속력이자 상처에 지배받길 원치 않는 욕망의 속력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가리켜 삶의 욕동이자 에로스적 충동이라 했을 것이다. - P320

『여수의 사랑』이 시간의 풍화 작용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튼튼히 살아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까닭은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 P321

흠 있는 영혼들, 상처받은 영혼들은 살기 위해 때로 죽어야 한다. 그것이 존재를 위협하는 죽음으로부터, 엄혹한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 P321

이 길뿐일까, 하는 끈질긴 의문을 버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나가기에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고, 꺼질 듯 말 듯한 빛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자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안도감이 찾아왔었다. - P322

물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썼고, 거품을 뿜으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 때마다 보았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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