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어팩은 소위 말하는 ‘설렘‘ 아이스크림을 담는 형태의 팩이다. 플라스틱 입구가 달려있어서 뚜껑을 손으로 돌려 딴 다음 입을 대고 먹으면 되니 훨씬 편리하다. 정재민처럼 어린아이들이 먹다가 흘릴 일도없다.

회사를 다닐 때는 몰랐는데 장사를 시작해보니 이런게 쉽지가 않았다. 누구든 대신 결정을 내려주지 않는다. 뭐든지 혼자 알아서 해야 한다. 원래 내가 벌인 일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인드를 갖고 살아왔지만, 이러한 결정들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
일단 조금은 더 지켜보기로했다. 아직 장사를 시작한 지 열흘밖에 안 됐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지.
며칠 장사하고 말게 아니니까.

이것저것 하나씩 새로 늘리고, 시도를 해보는 게 재밌었다. 잘 된다는 보장이 없기에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설렘이 더 컸다.

켈달법, 멜링 시험, 닌히드린 시험, 밀론 시험, TBA 값시험, 염산, 황산, 질산, 붕산, 에테르, 포름알데히드, 알데히드, 지방산, 글리코겐, 수중유적형의 유화 식품, 아밀라아제, 리파아제, 프로테아제, 펙티나아제, 나이아신, 엽산, 티아민, 리보플라빈 등등.
눈에 익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몇 개를 제외하면 처음 보는게 대부분인 듯했다.

그런데도 문제를 푸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익숙하지 않아도 문제를 읽다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있었고, 정답에 이르렀다.

일 자체에 즐거움이 있으니 욕심도 더 커졌다.

예전에는 이따금씩 허황된 망상이나 하다가 현실에 지친 나를 술과 인스턴트식품으로 달래고 잠들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자기 전까지도 일에 대한 생각을 하며 열정을 불태운다.
과거의 생활이 점점 잊히고, 새로운 삶에 익숙해져 간다.

"그래도 해야지.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솔직히 자격증들을 보유하나 하지 않으나 내가 가진 능력은 똑같거든? 이거 공부한다고 뭐 더 새롭게 많이 알게 되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도 사람들한테 어필하려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표현하려면 자격증만큼 확실한 게 없잖냐."
-하긴, 그건 그렇다. 나도 회계사 딱지 없으면 누가 일 맡기겠냐.

슬러시용 사과즙과 포도즙은 기존에 판매하는 것보다는 농도가 낮았다. 마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일즈 포인트가달랐다.
슬러시는 건강을 위해 먹는게 아니다. 일단 시원하고 맛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고농축 즙은 맛만 따지면 사람에 따라 다소 부담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슬러시용 즙은 비율을 낮춰 순하고 달달한 맛을 냈다. 덕분에 마진율도 조금 높아지긴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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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스토리들이 극적으로 전개된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몰입감이 엄청났다.

사건은 국민들의 반발이라는 톱니와 맞물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마른 낙엽에 불이 붙듯 여론은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방송이 런칭한 지 이틀째부터 마침내 진짜 언론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통수? 내가 준비한 게 뒤통수뿐일까?"
[뭐?]
"기다려 봐. 내가 아주 큰 선물을 당신한테 안겨줄 테니까."

"미국과 캐나다에서 열두건, 제주도에서 다섯 건 발생한 디벨로퍼 화재 사건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저희는 자체조사와 검거된 용의자를 통해 방화의 모종의 배후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종의 배후는 우리의 차량을 분석해 사고를 가장해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이 심각한 범죄를 시행했습니다."
찰칵찰칵.
"하여 저희 유니콘은 이번사건을 이렇게 부르려 합니다.
이번 사건은 전기차 화재 사건이 아닌 방화 사건입니다."

"배후에 대해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유니콘의 전신인 한국 공조는 회계장부를 조작해 비자금을 조성했습니다. 조성된 비자금은 당시 사 측인 유럽계 사모펀드인 PAI의 관계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당시 부정은 명목뿐인 회계감사를 통해 처벌 없이 넘어갔습니다. 한국 공조의 후신인 유니콘은 이 문제에 대해 마땅한 법적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또한 회사의 대표인 저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해 분명히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저 내용 그대로 내보내도됩니까? 내용이 확실하다면 유니콘은 처벌을 면치 못할 텐데요."
"네, 물론입니다. 그러라고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표님, 갑자기 회계부정문제를 말씀하신 이유가 뭡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2005년 회계부정을 저지른 한국 공조 핵심 임원이 한명 있습니다. 그분이 지금 중원 자동차 직원으로 가 계시죠."

[전기차, 그 분수에도 안 맞는 사업 포기해.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너희 2005년 장부가 검찰에 넘어갔어. 그 내용이 까발려지면 유니콘이 어떤 꼴이 될지 아주 잘 알고 있겠지?]
"지난 1월 15일 전 김강현이라는 사람과 강남 모처에서만났습니다. 그때 저희가 받은 협박을 녹취한 겁니다."

"이제 조금 전 질문에 대해 이제 답을 드리겠습니다.  김강현이라는 자의 대화를 통해 우린 모종의 배후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배후는 바로......."

"배후는 중원 자동차와 2005년 회계장부를 특정해 압수 수색한 검찰 또 그 검찰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권력자입니다."
마침내 피해자의 입으로 배후가 특정되었다. 내 목소리가 사라진 그곳엔.
"세상에....."
정적, 그리고 경악한 기자들만이 가득했다.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는 뚜껑을 딱 열었을 때 목을 콕콕 찔러오는 탄산이 맛의 절반 이상을 좌지우지한다.
그러니 김빠진 사이다는 더이상 탄산음료가 아니다. 설탕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것.
돈 주고 마시라고 해도 마다할 그걸 돈 내고 마시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
그래서 우린 그렇게 했다.

2005년 한국 공조 회계부정을 당사자인 우리가 먼저 발표해 버린 것. 상대방의 손에 넘어간 약점이 어떤 식의 폭발을 일으킬지 고민하는 것보다 우리가 먼저 터뜨리기로 마음먹었다.

폭발의 여파를 컨트롤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 김강현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원칙이 있었기에 결정할 수 있었다.
문제를 직접 터뜨리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우린 발 빠르게 움직였다. 회계부정, 그걸 볼모로 잡은 김강현의 협박, 그리고 전기차 방화사건의 전모까지.
일사불란하게 준비된 자료들이 기자회견장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지나온 삼 년,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회귀를 통해 원했던 바는 이루어졌다. 하루하루 전쟁같이 지냈던 시간이었기에이제는 한 발자국 물러설 때가 되었다.

‘지키기 위해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회귀해서 삼 년간 공들여 키워온 회사이기에, 그걸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이제 결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겨우 우리 쪽으로 가져온 이 흐름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다.

여준선을 통해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구명줄을 잡지 못한 죄로 여종선의 인생은 나락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번 일이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 될 거예요.
이번 사건 김강현 선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언론들이 최대한떠들도록 놔두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아예 제대로 떠들 수 있게 협조해 주는 게 좋겠지요?"
"네? 어떤?"
"프레스 센터를 준비하라고 하죠."
프레스 센터. 중요한 현장 취재를 하는 기자들을 위한 공간. 그게 있으면 지금 한구석에서 이쪽 눈치만 보고 있는 기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프레스 센터를 중심으로 취재된 내용은 즉시 본사로 타전될 것이며 아울러 병원도 현 상황을 실시간으로 브리핑할 수 있다.

자신의 사업에 나타난 걸림돌. 환경과 미래를 위한 신기술을 적용한 차에 불을 질러 그 걸림돌을 제거하려 했던 더러운 야욕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세계적 공분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폭로전의 끝엔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을 뿐이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난 김강현의 그림자에 숨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리와 동료를 말하는 유제국 앞에서 난 끝내 비정한 심판자이자 김강현을 앞세운 비겁자로 남았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너한테 하나만 묻자."
이건 과거엔 없었던 질문.
"넌 꿈이 뭐냐?"
그리고 그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대답은 쉬웠다.
"...제 의지로 절 바꾸고, 그렇게 바뀐 제가 회사를 바꾸고, 그렇게 바뀐 회사가 세상을 바꾸는 겁니다."
"뭐?"
유제국의 얼굴에 남아 있던 불쾌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저도 여쭙겠습니다.
상무님 꿈은 뭡니까?"
"내 꿈?"
그가 피식 웃는다. 의미심장한 눈으로 빈 잔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회사는 그저 월급 받아먹으려고 오는 데 아냐.
뭐 그렇다고 한국 공조가 특별하냐? 물론 그것도 아냐. 그냥 대가리 크고 나서 동고동락한 사람들이 다 이 회사에 있잖아."

"그래서 우리 회사가 잘됐으면 좋겠어. 저 빌어먹을 사주 놈 빼고 우리끼리 오순도순 일하고 싸우면서 발전하는 그런 회사가 됐으면 좋겠어. 나랑 동고동락한 우리 동료들이 분위기 좋은 직장에서 다 같이 웃으면서 먹고 살았으면 좋겠단 말이야."
고개를 끄덕였다. 술병을 들어 그의 빈 잔에 채웠다.
"꼭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사람 따를거야."

유제국이 대표가 될 수 있던 원동력은 승진욕이나 권력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속한 이 회사를 누구보다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고혈을 짜내는 사주와 대립했고 직원들의 구심점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았기에 대표가 되었다.
유제국은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이 제 대표여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대표님."

"그랬구나. 그래서 그 순간이 그렇게 길었구나."
"와. 그걸 기억해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허공으로 날아오른 상태로 난 회귀한 인생을 떠올렸고 서동출과 성수대교를 떠올렸으며 회귀한 인생을 평가까지 했다.

"그럼요. 한 1미터만 더 날았으면 용재한테 나 병원 있는 동안 해야 할 일도 얘기해 줄 수 있었을 거 같은데."
경하나가 피식 웃었다.
"그런 말 마요. 그 정도라 산 거예요. 일 미터 더 날았으면 우리 이렇게 얼굴 볼 일도 없었을 거예요."

살아 있길 잘했다.
단지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왔기에 드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내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소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실을 방문했다.

전기차 화재에 대한 모든 오해가 일소되었고 수많은 나라들이 전기차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벨로프엔 수없이 많은 곳에서 러브콜이 날아들고 있었다.
탄력은 받은 건 유니콘 역시 마찬가지.

잠든 동안 모든 악행은 수면위로 드러났고 피해자였던 우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간 여준선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치솟았고 이제 난 대한민국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눈앞에 미래가 그려졌다.
내 한마디로 트렌드가 바뀌고 내 몸짓 하나로 산업의 미래가 바뀌고 내 아이디어 하나에 세상이 들썩이는 그런 위치.
여준선은 이제 그런 인간이 되었다.

하지만 난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없다.

거울로 내 얼굴을 확인했다.
거울 속 인간 여준선의 얼굴엔.
다시 유니콘의 대표로 업계를 호령하겠다는 강한 의지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인사로서 톡톡히 이름값을 하겠다는야망도 없었다. 의지와 야망이 사라진 얼굴엔 그저 사람 좋은, 이젠 아무런 욕구도 느껴지지 않는 잔잔한 미소를 지은 인간 여준선이 있을 따름이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오늘 전 공식적으로 대표직을 내려놓고 유니콘을 떠납니다.]

[이제 회사의 주인인 여러분이 유니콘을 이끌어주십시오.]

"왜냐면 그건 리얼이거든요."
카페 카운터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경하나.
"아! 그럼 이분이 그?"
팔을 들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경하나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당겼다.
"네 맞습니다."

[책임지겠다고 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 전 그 원칙만큼은 깰 수 없습니다.]
내 사임 이유는 하나였다.

[여준선 사임, 이유는 2005년 회계부정에 대한 책임인 것으로 알려져.]
속속 올라온 후속 기사들처럼.
난 직접 약속한 책임을 지기로 했다.
충격 속에서도 큰 혼란이 없었던 건 사임을 통해 약속을 지키려 했던 우직한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사임 후 대한민국엔 그토록 바라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가 전기차 국내 출시를 공식 승인했습니다. 또 정부는 전기차 인프라 확산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인프라는 충전소는 물론 공공과 민간 주차시설에 대한 전기차 충전 시설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대통령 차대철과 그가 이끄는 정부는 인간 여준선의 책임감 있는 행동과 끓어오르는 여론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고문을 맡고 있다면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다양한 아이콘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아이러니하지만 상호 존대했던 과거 때문에 최지용과 난 기존의 상하 관계를 완벽하게 탈피한 아주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구시대의 사람인 최지용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은 향후 10년 동안 가장 주목받는 사업 중 하나다.

"대박 나겠는데요?"
"그래?"
"이거 규모 좀 키워서 제대로 시작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또 삼전 하고 제휴하면 시너지도 엄청날 거 같구요."
삼전, 그들의 스마트폰 인프라, 또 유중호의 지휘하에 올해 초 오픈한 애플리케이션 스토어. 머릿속에 조유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장대한 청사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꿀리고 들어가면 너 시댁가서 대접 못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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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전기차 사업을 음해하려는 세력들이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한다리만 건너면 다 알만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보면서 참 세상의 무서움을 다시금 느낀다.

비록 지금까지 불에 탄 네대의 디벨로퍼 화재를 막지는 못했지만 다섯 번째는 아니었다. 화재 발생 전 배터리가 이상고온 현상을 일으켰고 그 상태로 운전자는 험악하게 차를 몰았다. 마침내 그 조건과 부합하는 차량이 푸른 밤 센터에서 확인되었다. 푸른 밤 직원들과 제주도청의 협조 요청을 받은 현지 경찰들이 출동해 현장을 덮쳤다.
한적한 도로에서 차량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불길이 솟구치기 전 운전자가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범행에 쓴 장비들을 유기하기 직전이었기에 정황은 명확했다.
[혹시나 싶어 신원조회를 해봤는데.......] 검거 사실은 지사에게 전달되었고 범인의 이름을 들었을때 지사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자네 사촌이더구만. 이름이.......] 머릿속에 이름 하나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늘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이자, 늘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자동차 회사에서 돈 많이 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내 사촌 동생.

"설마 여종선?"
[그래. 맞아.] 되돌아온 고상원 지사의 목소리에 난 잠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그놈이 배터리 냉각장치 전원을 끊어놓은 겁니다. 그 상태로 차를 험하게 몰았으니 출력 때문에 올라간 열을 배터리가 당해내질 못한거죠."

"냉각장치는 부품 사이 깊숙한 곳에 있어서 손으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놈들 디벨로퍼의 사양은 물론 어떤 식으로 작업을 해야 흔적 없이 냉각장치 전원을 끊어 놓을 수있는지 미리 연구해 놓은 거예요."

이호영의 설명대로라면 중원 자동차는 디벨로퍼를 분석해 자연스러운 화재 현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최적의 방식을 연구하고 실행했다.
전기차에 대한 불안감을 극대화하고 벨로프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그 악독한 범법을.
"작업법을 적업 놓은 메모도 차량 분해를 위한 장비도 현장에서 확인되었어요. 게다가 이번 일을 벌인 놈이 겁대가리 없게도 중원 자동차 직원인 것까지 확인되었어요. 한마디로...."
걸어가던 이호영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체크메이트죠."

녀석의 단언처럼 우린 연쇄 화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 제주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도지사는 대통령 차대철과 다른 당 소속. 정부의 입김을 받지 않고 거의 완벽한 자치 운영을 하는 제주도였기에 확보한 범인이 사라질 염려는 사라졌다.

여종선. 녀석에 대한 좋은 기억은 별로 없다. 어릴 적 부터 서울에서 자랐던 녀석과 충남 공주에서 자랐던 나.
녀석을 가끔 만난 건 제사때가 고작이었고 성인이 되면서는 아예 얼굴을 볼 기회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녀석에 대한 기억은 강렬히 남아 있다.
"이런 촌뜨기가 무슨 형이야? 재수 없게" 세상 모르는 꼬맹이의 말이었다면 그냥 철없는 소리라고 생각해 넘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했을 때 녀석은 무려 고등학생.

"집에서 꼬랑내 나! 쟤한테도 냄새나는 거 같애. 여기 X라 싫어. 빨리 가자 아빠."
호형은 고사하고 녀석은 만날 때마다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꼴 보기 싫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쁜 감정을 가지진 않았다. 사촌이라는 건 가까운 친척관계가 분명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서적 유대를 가진 사이에서나 해당한다.
녀석과 어떠한 정서적 유대도 없었기에 사실 녀석과 난 남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최근까지 만날 때마다 들었던 작은 아버지의 자랑 때문에 여종선은 좀 짜증스러운 존재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용서할 수 있다. 말로 상처를 주긴 했지만 실질적인 피해도 도움도 받은 것이없다. 우린 가까운 친척이지만 그냥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수 없다.

"나 억울해, 형. 이 사람들 나한테 차에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야. 형이 이 사람들한테 말 좀 해주면 안 돼?"
살아오면서 이 녀석한테 이렇게 형이라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상황이 이래서 그런 건가? 녀석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착한 동생인양 굴고 있었다.
"믿어줘. 나 그냥 바람 쐬러 여기 내려온 거야."

"하아."
입 밖으로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미 녀석의 혐의는 재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확실하다. 검거 당시 녀석은 자동차를 손쓰기 위한 장비를 가진 채였으며 차량 블랙박스엔 녀석의 모든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게 차가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 직전이어서 확보가능한 증거들이었다.
"종선아."
"어, 형."
"예전에 네가 했던 그 말 기억하니?"

"응? 무슨 말?"
"네가 그랬잖아. 어떻게 이렇게 냄새나는 촌구석에서 사냐고. 이런 데서 사느니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나은 거 아니냐고"
"어?"
마지막으로 봤을 때까지 녀석은 일말의 싸가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녀석이었다.
덕분에 일이 한결 편하게 되었다.
녀석은 이 상황에서도 그나마 사촌 형이라서 날 믿고 있던 모양이다만.

그 아슬아슬한 구명줄이 눈앞에서 끊어져 나가는 걸 본다면 녀석의 멘탈을 더욱 크게 뒤흔들 수 있을 테니까.
"형이 충고 하나 할게."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얼굴은 바라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 짓거리 누가 시켰는지 깔끔하게 부는 게 좋을 거야.
그럼 최대한 선처받을 수 있도록 힘써볼게. 하지만 그러지않는다면 이거 하나만은 약속할 수 있어."

"합의는 없어. 넌 확실하게 깜빵에서 썩게 될 거야. 작은 아버지한테 듣자 하니 애도 둘이나 있다고 들었는데 이거 안됐네. 다음에 아이들 얼굴은 교도소 면회실에서 봐야 할 거 같으니까 말이야."
남의 재산의 흠집을 내는 행위는 처벌을 받는다. 특히 방화는 그 처벌의 수위가 높다. 더구나 사람이 타는 자동차에 방화를 했다는 건 그저 처벌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농담 같지? 근데 잘 생각해봐. 네가 해놓은 짓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차를 썼을 때 불이 날 수도 있었어."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녀석의 행위는 무고한 희생자를 낼 수도 있는 참사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종선아. 아쉽지만 고민할 시간이 많지는 않을 거 같아.
여기 도지사랑 경찰들이 아주 화가 많이 났거든."
"어어......."
녀석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내 말이 모두 사실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녀석의 입을 열기 위해 난 중요한 단서 하나를 더 알려주었다.
"뭐 회사를 위해서 입을 닫는다면 그것도 좋아. 거기 김강현이라는 인간 있지? 그 인간 내가 잘 아는 사람이거든?"
종선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장장 오 년 동안 그 인간하고 부대끼면서 살았어. 그래서 너무 잘 알아. 너처럼 들킨 꼬리 같은 건 기똥차게 잘라낼 수 있는 인간이거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그러지다 못해 곧 울음을 터뜨릴것 같은 녀석의 얼굴이 내 쪽을 향했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꼬린내 나는 깜빵에서 푹 썩기 싫으면 말이야."
뒤돌아섰다. 이걸로 충분하다.
한눈에 보더라도 녀석은 툭치기만 해도 아는 바를 줄줄 털어놓을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은 경찰에게 맡겨두면 된다.

"형은 바빠서 이만 간다."
"형! 형?!"
뒤에선 여종선이 애타게 날 불렀지만.
쿵.
미련 따윈 남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화면 너머의 마크 던컨이 피식 웃었다.
"그쪽도 같은가요?"
[그래. 똑같아. 발화 시작점은 배터리야. 정확히는 고열로 인해 셀이 팽창했고 결국 누액이 발생하면서 불이 난 거지.
아마 운전자도 그 독특한 냄새를 맡았을 거야. 그때 차를 세우고 보닛을 열어 소화기를 썼다면 전소까지는 가지 않았겠지.]
"하지만 모두 전소되었죠."
[그래.]

미국과 캐나다에서 싣고 온 화재 차량을 조사한 마크 던컨 역시 같은 결론에 도착해 있었다. 미국의 차주들 역시 배터리 냉각장치를 손댔고 차가 전소될 때까지 차를 멈추지 않았다.
[이 문제가 전기차 자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라면 귀책은 제조사로 넘어가겠지. 하지만 제주도 건처럼 누군가 손을 쓴 거라면.]

전화기 너머의 마크 던컨의 목소리는 제법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다. 의뢰인이 원하는 걸 찾아냈을 때 그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쾌활함.
[이번 일은 범죄가 되는 거지. 정확히는 벨로프를 노린 누군가의 의도된 범죄 말이야.]

범행의 꼬리를 찾은 순간부터 고민해왔던 일이었다. 던컨이 제안한 수사기관을 이용하는 것 역시 고민의 대상이었지만 난 결론 내렸다.
"아쉽지만 이번 일은 접근법을 좀 달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이 움직이고자 한 건 여론이었죠, 화재에 대한 불안감을 극대화시켜 이쪽을 궁지로 몰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이쪽도 똑같이 여론전으로 대응할 겁니다."
[여론전이라. 재미있는 방식이긴 한데 굳이 왜?] 마크 던컨의 얼굴은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무엇이 튀어나올 줄 모르는 보물상자를 앞에 둔 트레저헌터의 표정처럼.

"두 가지 이유가 있죠. 첫 번째는 수사기관을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번 일이 어디의 누구까지 관여되어 있는지 특정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경우 중원자동차와 수사기관 그리고 정권의 핵심이 이번 일에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미국도 그렇다면, 다국적 완성차 제조사들과 에너지화학기업 그리고 그들의 입김을 받은 공화당이 한패가 된 상황이라면.
"수사기관에 증거를 넘기는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것과 다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두 번째로 제가 언론을 좀많이 알죠. 이번 일은 한국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될 겁니다."
유명세를 얻으면서 수많은 언론사들과 만났다. 방송 신문 그리고 해외의 유명 잡지사까지. 어떨 때는 우리의 필요에 의해 또 어떨 때는 그들의 요청에 의해 만났던 그들이었지만 지금 순간 더없이 든든한 아군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저 혼자서 벌인 일입니다. 배후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사촌 형 여준선이라는 놈이 너무 잘나가니까. 질투가 났어요."

"이거 보세요, 여종선 씨! 배터리 냉각장치를 어떻게 고장내는지, 그건 개인이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자꾸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예요?"

"야, 영태야. 어제 유치장CCTV 좀 확보해 놔. 이거 아무래도 밤사이 어떤 놈이 작업친 거 같다."

"아무튼 생각 잘해요. 당신이런다고 못 빠져나가! 허위진술하면 다 당신 죄목에 추가되는 거니까 웬만하면 서로 좋게 협조 좀 합시다."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던 여종선의 입꼬리가 슬며서 말려 올라갔다. 웃고 있는 그의 입술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웃기고 있네. X신 새끼들."

유치장을 지키던 말단 경찰은 사라져 있었다. 경찰 대신 자리에 앉은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마음 단단히 먹어."

목소리에서 묘한 살기가 풍겼다. 종선으로선 지금껏 한번도 느껴본 적 없던 경험이었다. 마치 맹수 앞에 선 강아지처럼 본능적인 공포를 느껴졌다.
종선의 머릿속에 영화 속한 장면이 떠올랐다.
증인을 처리하기 위해 감옥에 사람을 보내 증인을 자살시키는 그런 이야기.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흠."
그가 헛기침을 하자 미리약속이 된 것처럼 멀찍이서 원래 유치장을 지키던 경찰이 나타났다.
일어선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체구 옷 위로 보이는 살벌한 근육들. 종선은 알 수 있었다.
회사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으며 약점을 가지고 있는 이상이 상황이 오히려 기회라는 것을.

"여준선......."
자신감이 차올랐다. 여준선도, 경찰도,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두고 봐라. 촌뜨기 새끼."
어릴 때부터 하찮게 생각한 그였다. 그랬던 그가 어느새인가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거물이 되었다.
종선은 그런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뭐? CCTV가 왜 없어? 어제 근무자 누구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조사관의 노성을 들으며 여종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번 사건의 전모를 자백해 줄 증인은 사라졌다.
[여종선이 전혀 협조를 해주지 않고 있어요. 자기 혼자 한 일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만.......]
제주 중앙 경찰서의 조사관의 설명을 들으며 난 어금니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중원이 움직였구나.‘

모종의 대가로 증인의 입을 막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죄송합니다. 어떤 식으로 작업이 있었는지 확인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 종선이 입을 닫았다는 건 이미 거래가 성사되었다는 증거, 한 번 닫힌 녀석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을 것이다.

조사실에서 입을 꾹 다문채 알 수 없는 미소만 짓는 녀석 옆에서 조사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변호사의 케어까지 들어간이상 더 이상 제주에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입을 다문 증인을 기다리는 대신 플랜 B를 시행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회심의 플랜 B는 허들이 부딪쳤다. 예상은 했다. 최대철 정권이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손본 것이 바로 방송국. 정권 시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던 방송국들은 대규모 수술에 들어갔고 그 결과 수많은 직원이 해임되고 발령받았다.

"그래도 MBS는 다르지 않습니까. 국장님 같은 분이 계신데."
"에휴....국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가 방송 만들면 뭐 합니까? 윗대가리들이 절대 편성 안 내줘요. 편성은 고사하고 제작에 참여한 애들도 그냥 안 둘 거에요."

믿었던 국장 역시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머릿속에 방송국 입구에 피켓을 들고 있던 일인시위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의 피켓에 가득 찬 글들은 바로.
낙하산 사장에 대한 비토.
정권의 눈치를 보는 방송국에 대한 토로.
"어쩔 수 없군요. 알겠습니다."

테이블 위 모든 자료는 중원 자동차와 최대철을 범인으로 가리키는 것들이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손에 잡히는 증거 없이 심증과 의혹을 통해 방송을 통해 여론을 움직여보려던 의도는 실패했다.
테이블 위 자료를 챙기고 있는데 국장이 황급히 제지했다.
"아이고, 기다려요. 먼저 터뜨리는 게 안됐댔지, 누가 방법이 없답니까?
"네?"

"팟캐스트라는 게 있는데.
혹시 들어보셨나요? 요즘 그게 아주 핫하거든요."

"팟캐스트라는 건 뉴스도 언론도 아닌 그냥 음성파일일 뿐이거든요."
2010년 기준 팟캐스트는 발언에 법적인 책임을 지는 방송통신법 제재의 대상이 아니다. 서비스 자체가 단지 개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음성파일로 공유하는 목적.
그렇기에 팟캐스트는 자유롭다. 정권에 대한 의혹과 비판, 기업의 불법과 비리. 팟캐스트는 그 모든 걸 규제없이 다룰 수 있다.

"지금 이슈를 퍼뜨리기엔 그만한 게 없어요. 생각보다 그거 듣는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거든요. 지금은 감시의 눈을 피해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시기.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진짜로 그들의 말이 모두 사실처럼 느껴지고 있었던 것.
툭.
이어폰을 귀에서 떼 냈다. 전기차 방화 사건을 플랜 B도 아닌 플랜 C로 진행해야 했지만 이로써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비록 방송은 의혹과 섣부른 단정 어딘가를 오가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어쩔수 없는 부분이었다.
물론 자료를 넘겨주는 자리에서 이미 진행자들로부터 그런 부분에 대해 충분히 얘기를 듣기도 했고.

팟캐스트를 통해 녹화된 음성파일이 공개된 것이 어제.
오늘 아침부터 유니콘엔 이번일과 관련한 방송 및 신문사들의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다.
"기자회견을 열도록 합시다."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른 만큼 난 이 기회를 제대로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팟캐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 파장이 이렇게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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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을하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일이 찾아오는 걸까.

"왜 자꾸 나오래?"
가게 앞에는 1.5m 정도 되는 나무 하나가 있었다.
"개업 축하한다! 대박나라!"
오정득이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이건?"
내가 씩 웃으면 가게 밖으로 향했다.
"이게 뱅갈고무나무라는 건데, 개업 축하로 많이들 준다더라. 그리고 이게 풍요와 장수를 의미한대. 여기에 딱이잖냐."

사과는 자두나 포도, 토마토처럼 바로 추출을 하면 효율이떨어진다. 먼저 분쇄기에 넣어서 갈아낸 뒤 추출해야 수율이 높아진다.

효능. 이게 중요했다.
내가 취급하는 먹을 것의 장점이자 단점은 바로 건강식품이라는 점이었다.

즙이라는 것이 50팩, 100팩을 사가서 맛있다고 하루에 10팩씩 먹고 그러는 식품이 아니다. 보통 하루에 한 팩씩 먹게 마련이다. 많아야 2, 3팩.
즉, 최대한 많은 고객을 확보해야 지속적인 판매가 가능했다.
대신 건강식품에서 오는 이점은 바로 꾸준히 먹는다는 것이었다. 먹고 나서 체감을 할 정도로 효능을 본다면, 매일매일 꾸준히 먹게 된다!
내게는 필승법이 있는 셈이었다.
최상의 품질은 당연하고, 고객에게 가장 필요한 즙으로 판매를 하면 효능을 보고 또 찾아오게 돼 있다.

요즘은 대부분의 건강원이 과채류를 추출할 때는 60~70도 정도의 저온 가열을 한다. 더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요하지만, 특히 과일류는 가열 과정에서 비타민이 파괴되기 때문에 필수가 됐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절대 쭉 뻗어 나가지를 않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됐어, 인마. 아무튼...... 성실해야 돼. 조금만 게을러져도 다 표가 나.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야. 바로 발길 끊긴다. 그러니까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돼. 네 몸이 힘든 만큼 사람도 돈도 붙는 거야."

"그리고 마진 높인다고 장난질하면 안 된다. 물 타고 그러면 안 돼."

"그래, 그거 돈 몇 푼에 빌빌거리고 남겨 먹겠다고 지랄하고 있지? 돈도 재수 없다고 안붙어. 무슨 말인지 알아? 당장 눈앞에 얼마 건지려다가 훨씬 큰돈 다 날린다고. 잠재적 고객까지 다 날리는 거야."

머리로 알고 있던 것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같은 얘기도 다른 시선을 알게 되기도 한다.

"장사하려면 일단 생활이 돼야 돼. 기본이 얼마나 버틸수 있느냐 없으냐야. 지금 이거 차린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 썼을 거 아니야."

"이제 오픈해서 모르지? 아예 그럴 일이 없으면 좋은데,
손님 없고 잔고 비기 시작하지? 가게 시작할 때랑 같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냐? 맛탱이 가는 거 한순간이야.
그게 그냥 정신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실수도 하게 되고, 몸도 안 좋아져"
"아니, 그래도......."
"야, 줄 수 있으니까 주는 거야. 그리고 안정화되면 그때 갚으면 되지."

잘되고 싶다. 그리고 잘하고 싶다.

그냥 앉아서 손님을 기다려서는 안 됐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 듯한 낚시도 떡밥이든 미끼든 루어든 뭐든 써서 살살 꼬신다. 물고기들이 많은 포인트에서 자리를 깐다.
마케팅이 필요했다. 뭘 어떻게 해야 손님이 몰릴까?

의리랍시고 손해를 볼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의리를 쌓은 사이도 아니었고. 비즈니스 아닌가. 모든 관계는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돼야 마땅하겠지만, 비즈니스는 기본적으로 돈부터 깔아놓고 시작이니까.
이기철도 장사를 하루 이틀한 것이 아니다 보니 당연히 이해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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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주인공과 관련된 약간의 로맨스가 나오면서 해피엔딩으로 무난하게 마무리되어갈 줄로만 알았던 이 소설의 결말이 갑작스럽게 검찰의 압수수색이라는 예상치 못한 이슈로 인해 극적인 반전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회귀전에 주인공을 지독히도 힘들게 했던 김강현이 있었다. 한동안 잊혀져 있었던 이 악역이 막판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해서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를 알 수 없게 혼돈의 상태로 몰아간다.

"그럼 이제 게임 시작인가?"
박철규가 물었고.
"반격의 시간이 된 거죠."
"그래. 반격이라. 좋은 말이네."

‘방주인 돌아오면 당분간 몸조심하라고 전해줘요. 천지 분간 못 하고 설치고 다니니까 아주 피곤해 죽겠어. 그쪽만 피곤한가? 우리도 힘들어.‘
메시지의 뜻은 명확했다.
이번 압수수색 뒤엔 힘센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 검찰이 움직이고 그 위에 수많은 하수인이 있겠지만 그 의지를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단 한 사람.
‘대통령 차대철‘

알 수 있었다. 검찰은 바로 그 자료를 얻기 위해 영장을 청구해 압수수색을 벌였다는걸.
"네?"
"무슨?"
경고가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간 건 비록 5년이나 지난 것이지만.
"문제가 심각해지겠는데요?" 그 5년 전 자료엔 과거 한국공조, 정확히는 당시 기획실이앞장서 회사가 저지른 중대한 범법이 기록되어 있다.

"문제라뇨?"
"5년 전이라면...... 설마?"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김동호 이사의 눈에 경악이 스쳤고.
"맞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이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끼어 있는 것 같군요."

김동호의 입에서 5년 전, 그때의 일이 흘러나왔다.
으득.
이를 악물었다. 악물린 어금니 사이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이 순간 분명 야비한 미소를 짓고 있을 그의 이름을 흘러나왔다.
"김강현. 아주 오랫동안 잊었던 이름. 이 순간 등장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그 이름에 최지용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기업 내 돈의 흐름은 모두 기록에 남는다. 비록 은밀하게 조성되어 아무도 모르게 사주에게 전달된 돈이지만 그 역시모두 기록에 남아 있다.
"문제는 숫자 안에 감춰진 범법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그걸 직접 저지른 사람 뿐이라는 거지요."

회계감사가 끝났고 모든 신고절차까지 끝난 2005년 회계장부지만 여전히 법적인 책임은 남아 있다.

당시의 모두가 회사를 떠났다. 억울하게 책임자로 지목된 당시의 임원들부터 배신을 통해 회사를 휘어잡았던 김강현까지.
그럼에도 책임은 남는다.
불법에 대한 책임은 한국 공조의 후신인 유니콘이 져야만 한다.
"장부의 내용이 알려지는 날엔......."
신용재가 말했고,
"유니콘은 회계 조작이라는 천인공노할 불법을 저지른 회사가 되는 거지."

유니콘의 도덕성을 한 방에 날려버릴 수 있는 무기가 정체조차 불명의 적의 손에 넘어갔다. 이번 압수수색에 그 무기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가 끼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은 가능성일 뿐입니다. 정확한 내용이 확인되기 전까지 이번 일은 비밀로 합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아무리 코너에 몰렸다 해도 시작은 적을 아는 것부터다.

두 번째 화재 차량에서 얻어낸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화재 약 한 시간 전 배터리 이상 고온 현상 발생.‘

‘운전자는 화재 전 약 두 시간 동안 디벨로퍼를 상당히 가혹한 조건으로 몰아붙였다.‘

기획실의 파트장이 되기 위해 난 그의 호통은 물론 때때로 날아오는 손찌검을 감내해야 했다. 어리석은 당시 여준선은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제 안다.
김강현은 쓰레기이며 그런 그의 뒤를 아무 말 없이 따랐던 나 역시 다르지 않다는 걸.
가슴속에서 김강현이라는 인간을 향한 혐오와 적의가 울컥울컥 치솟았다.

하지만 이제 필요 없다. 그와는 같은 소속도 아니며 좋은 감정이라곤 일말도 남아 있지 않다. 하나의 욕망만이 꿈틀거렸다.
‘이번만큼은 놈을 완벽하게 파멸시킨다.‘

팔짱을 낀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전기차, 그 분수에도 안 맞는 사업 포기해."

예상대로 그는 말단이 아니었다. 조건을 입에 올린다는건 중원 자동차에서 김강현은 그런 조건 결정에 관여할 만큼 중책을 맡고 있다는 뜻.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거야. 니들 2005년 장부가 검찰에 넘어갔어. 그 내용이 까발려지면 유니콘이 어떤 꼴이 될지 아주 잘 알고 있겠지?"
잘 알다뿐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던 유니콘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바닥을 치게 될 거다.

직원들의 업무의욕을 고취시켜 주는 주식의 가치는 수직하락할 것이다.
세무조사가 들어오고 징벌적인 벌금이 선고될 거다.
아이콘들이 추진하는 일들은 줄줄이 허들에 가로막힐 것이며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능력을 확보한 공장은 가동률에 허덕이게 될 거다.

"감정은 빼고 말할게. 유니콘 이대로도 좋잖아? 그냥 하던 대로 가전만 하란 말이야.
가전회사에서 자동차를 판다는 게 말이 돼?"

김강현의 말은 너무 익숙했다. 기획실장일 때도 그는 늘 비슷한 말을 했다.
‘어딜 삼전 같은 대기업과 겨루려 하느냐.‘
‘너 따위가 무슨 기획을 하려고 하느냐.‘
‘너 따위가..... 고작 우리가.... 한국 공조 따위가.......‘

"아무리 배포 좋은 기업이라도 먹거리를 뺏기면 무슨 짓이든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지금 네가 그걸 뺏으려고 한 거 잖아. 생각해 봐. 너 중원 자동차뿐만 아니라 그 회사에 다니는 수십만 명한테 큰 죄를 짓고 있는 거라고."
그의 입에선 끊임없이 궤변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자동차 사업 포기해. 당장 그만두라는 거 아냐. 천천히 한 일 년에 걸쳐 정리하면 돼. 그렇게 한다면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대답이 없으니 내가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금 김강현의 얼굴은 진실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진심으로 국가와 우리 회사를 걱정해주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그럼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나는 거야. 더 이상 생기는 문제 같은 건 없어. 유니콘은 지금처럼 그냥 혁신의 아이콘으로 남으면 돼.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가전제품 만들어서 계속 성장하면 되잖아? 그럼 여준선이는 그런 회사를 이끈 능력 있는 대표로 남는 거지."
김강현이 씩 웃었다.
"어때? 이 정도면 제법 합리적인 제안 아닌가?"
말을 마친 그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전기차 사업을 포기해라? 요구사항이 그거였다고요?"

"하긴 중원 자동차 입장에선 눈엣가시였을 테지요. 자기들이 10년이나 미국 시장에 공을 들였는데도 성과가 없었는데 벨로프가 일 년도 안 돼서 성공을 해버렸으니....."

그의 말처럼 벨로프에 대한 중원 자동차의 시기와 질투는 정당하다. 미국 시장뿐만 아니라 이대로라면 내수시장마저 장담할 수 없게 된 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질투를 느끼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건 다른 얘기다. 특히나 상대의 약점을 볼모로 사업 철수를 요구하는 짓거리는 용납이 불가하다.

"김강현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긴....... 그놈을 믿느니 끝장을 보는 게 낫겠죠."
최지용도 전적으로 동감을 표했다. 김강현은 자신이 벌인 일조차 남에게 뒤집어 씌워 파멸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한들더 이상의 위협은 없을 거라는말을 믿을 수 없다.
"게다가 한번 자기 말이 통하면 그놈은 거기서 그치지 않을 사람입니다."

벨로프를 철수하면 다음은 날 치려 할 것이다. 유니콘에서 내가 사라져도 그는 계속 그 다음을 원할 것이다. 아마도 눈엣가시 같은 이 회사가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그는 요구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김강현이라니....... 어차피 우리로선 협상 자체가 불가능한 상대였군요."
"그렇죠."
"중원도 참 한심하군요. 그 쓰레기 같은 놈을 받아주다니 원."
"필요했던 거겠죠. 우릴 치기 위한 무기로."

고개를 끄덕이던 최지용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그 속 시커먼 놈하고 거래를 하느니 벌을 받는 게 맘 편하겠군요. 어쨌든 대비는 해놓으라고 해야겠네요."
협상이 결렬되면 2005년 회계장부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회계부정에 대한 징벌이 언제 어떻게 떨어질지 알 수없지만 어찌 보면 마땅히 받았어야 했던 벌이다.

김강현과 거래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2005년 부정에 대한 벌을 받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기를 쥔 자들이 그걸 어떤 식으로 휘두르느냐.

장담컨대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정부와 수사기관은 부정을 엄청난 부도덕으로 포장해 세상에 터트릴 것이며 그에 동조한 언론은 이슈를 더욱 증폭시킬 것이다.
오랜 시간 국민들의 신뢰속에서 커온 유니콘이었기에 이슈의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물론 믿었던 기업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터져나올 소비자들의 반발은 생각도 하기 싫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제주도지사 고상원, 우릴 도와 제주도 렌터카 사업을 강력하게 밀어붙인 덕에 지금 입장이 아주 곤란해진 그였다.
전화를 통해 그는 다짜고짜 전기차 방화범을 잡아두었으니 제주도로 내려올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어서 그래.]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지사는 단호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정황상 방화는 거의 확실해. 소지한 장비도 확보했고 뭣보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장비로 렌터카에 손을 써놓은 것까지 확인했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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