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봤던 ‘나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것과 오늘 봤던 ‘너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것이 약간은 다르게 느껴졌다.

‘나의 그림자‘가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진 반면, 오늘 본 ‘너의 그림자‘는 한 사람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일종의 ‘페르소나‘ 같다고나 할까? 쉽게 말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또 다른 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작가가 ‘나와 너의 그림자‘ 를 통해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지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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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어나가다가 p.176~178에 ‘나‘와 ‘나의 그림자‘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읽으면서 ‘나의 그림자‘가 말하는 내용들이 너무나도 공감이 되어서 읽으면서 머릿속 뇌세포 전체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내 마음과 생각이 요동쳤다. 대화 내용의 일부분에 밑줄도 쳤는데, 내가 만약에 이 소설 속 ‘나의 그림자‘로 나왔어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 같아서 어찌보면 비현실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정이 가는 캐릭터라고 느껴졌다.

"단각수는 그림자가 있어?"
"응, 짐승들은 그림자를 갖고 있어. 그 외 모든 것에도 그림자가 있어. 그림자가 없는 건 인간뿐이야." - P133

그 도시에 가면 나는 진짜 너를 가질 수 있다. 그곳에서 너는 아마 전부를 내게 줄 것이다. 나는 그 도시에서 너를 갖고, 그 이상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리라. 그곳에선 너의 마음과 너의 몸이 하나가 되고, 유채기름 램프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나는 그런 너를 품에 꼭 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였다. - P134

"네 것이 되고 싶어"라고 너는 공원벤치에서 말했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어."
그 말이 그뒤로 계속 내 머릿속에 울리고 있다. 그것이 거짓이거나 과장이거나 일시적인 충동이 아님을 나는 안다. 네가 무슨 말을 꺼낸다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특별한 잉크를 써서 특별한 종이에 적은 틀림없는 약속이다. - P135

아니, 네가 나를 간단히 잊을 리 없다. 내가 너를 잊을 리 없는 것처럼 그렇게 거듭 스스로를 타이른다. 나 자신을 납득시키려 한다. 그러나 여자에 대해, 그 심리나 생리에 대해 내가 무얼 얼마나 안단 말인가? 아니, 그런 일반론을 떠나 내가 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 P136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라고 너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주문처럼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는 양상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았다. 수시로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하루에 몇 번씩 벽걸이 달력을 쳐다보고, 때로는 역사연표까지 펼쳐보았다. 시간은 몹시 느릿느릿하게, 그래도 결코 뒷걸음치지 않고 내 안을 통과해 갔다. 일 분에 정확히 일 분씩, 한 시간에 정확히 한 시간씩. 느리게 나아갈지언정 거꾸로 가는 법은 없다. 그것이 그때 내가 몸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때로는 그 당연한 것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 P138

인간의 뇌가 좌우로 나뉜 것처럼 도시는 그 강에 의해 남북으로 거의 절반씩 나뉜다. - P139

강에는 이름이 없다. 그저 ‘강‘이다. 도시에 이름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 P140

"멀찍이 서서 보기만 할 거야." 나는 너를 설득한다. "어떤건지 궁금해서 그래. 물가에만 가까이 가지 않으면 되잖아."
너는 작게 고개를 젓는다. "아뇨, 아무리 조심해도 그 물이사람을 불러들여요. 웅덩이에는 그런 힘이 있어요." - P141

그건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려고 의도적으로 꾸며내 퍼뜨린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의심한다. 사람들 사이에는 벽 바깥의 세계를 두고 갖가지 무서운 소문이 나돌았지만 대부분 근거 없는 것들이었다. 웅덩이에 대한 이야기(불길한 전승)도 그런 유의 위협이 아닐까. 그 웅덩이는 어쨌거나 벽 바깥의 세계로 통하는 셈이고, 만약 벽 바깥으로 주민이 나가는 걸 도시가 원치 않는다면 접근을 단념케 할 심리적 장치를 깔아두는 것도 있을 법한 얘기다. 그렇게 오싹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웅덩이에 대한 나의 흥미는 더욱 강해졌다. - P141

벽 안에서 짐승들은 몇 가지 세세한 규칙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의 규칙이다. 언제 어떻게 그런 규칙이 확립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아가 규칙의 대다수는 존재 이유나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 - P143

"무슨 소리지?"
"웅덩이의 물소리예요." 너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하지만 물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 귀에는 무슨 질환을앓는 거대한 호흡기의 헐떡임으로만 들린다. - P144

"옛 사람들은 웅덩이 바닥에 거대한 용이 산다고 믿었어요" - P144

"봤죠? 바닥에 거센 소용돌이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암흑 속으로 끌어들여요." - P146

"문지기 오두막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들었는데, 자네 그림자가 식욕이 통 없고 그나마 먹은 것도 다 토해버린다더군. 요 사흘쯤은 바깥 작업도 못 갔다고 하고.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는 모양이야." - P147

나는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았다. 그림자는 천장을올려다보며 느릿하게 숨을 쉬었다. 열이 나는지 말라붙은 입술에 군데군데 딱지가 앉았다. 숨쉴 때마다 목 안쪽에서 작게 색색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문득 그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는 틀림없는 나 자신의 일부였는데. - P148

"몸이 안 좋다고 들었어."
"안 좋네요." 그림자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아요."
"어디가 안 좋은데?"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닙니다. 수명이죠. 그림자 혼자서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지난번에 말했잖아요. 본체에서 떨어진 그림자는 빈껍데기 같은 겁니다." - P148

"일주일 안에 마음을 정해주세요." 그림자는 말했다. "일주일 안이면, 나와 당신은 다시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있어요. 하나가 되면 나도 기운을 차리겠죠. 아직 늦지 않았어요." - P150

"이곳에서 나가는 건 허락되지 않을 거야. 도시에 들어올 때계약을 맺었으니까."
"압니다. 계약에 따르면 이 문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남쪽 웅덩이를 통해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죠. 강의 동쪽 입구는 쇠창살로 막혀 있어서 불가능해요. 남은 가능성은 웅덩이뿐입니다."
"남쪽 웅덩이는 바닥에 거센 소용돌이가 있어서 그대로 지하수로에 휩쓸려들어가. 얼마 전에 직접 보고 왔어. 거기로들어갔다가 살아서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해" - P150

"그건 새빨간 거짓말일걸요. 놈들이 사람들을 겁주려고 지어낸 거라고요. 그 웅덩이를 통해 벽 밑을 빠져나가면 곧바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게 내 추측이에요. 여기 있는 동안 나름대로 도시의 사정을 조금씩 알아봤어요. 이 오두막엔 간간이 사람들이 찾아오고 문지기도 보기보다 말이 많아서 여러 이야기가 귀에 들리거든요. 지하의 암흑 수로가 어쩌고 하는말은 써먹기 편하도록 지어낸 게 분명해요. 이곳은 온갖 가짜 이야기로 가득하죠. 이 도시로 말할 것 같으면 구성부터가 모순투성이고요." - P151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말마따나 이 도시는 가짜 이야기로 가득할지도 모르고, 구성은 모순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나와 너 둘이서 여름 한 철을들여 만든 상상 속 가상의 도시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도시는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는 이미 우리 손을 떠나 독자적으로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한 그 힘을 나는 제어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누구도 할 수 없다. - P151

"하나만 말씀드리죠. 당신은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그녀의 그림자고, 이 도시에 있는 것이 본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글쎄올시다. 실은 반대일지도 모르거든요. 어쩌면 바깥세계에 있던 것이 진짜 그녀이고, 이곳에 있는 건 그림자인지도 몰라요. 만약 그렇다면 모순과 가짜이야기로 가득한 이 세계에 머무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당신은 확신합니까, 이 도시에 있는 그녀가 진짜라고?" - P152

"어디까지나 본체는 본체, 그림자는 그림자예요. 다만 어쩌다가 입장이 역전되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죠. 인위적으로 뒤바꾸는 경우도 있을지 모르고요." - P152

"당신은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어 벽 바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그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요. 들어보세요,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며 나이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또한 미흡하게나마 그에 따르고 있고요.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 P153

"당신은 짐승들이 왜 그리 맥없이 픽픽 죽어간다고 생각해요?"
모르겠다고 나는 말했다. "그들은 온갖 것을 떠맡고 아무 말 없이 죽어갑니다. 아마도이곳 주민들을 대신해서요. 도시를 성립시키고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가 그 역할을 떠맡아야 하죠. 그것을 저 불쌍한 짐승들이 짊어진 겁니다." - P154

"물론," 그림자는 말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죠. 좋습니다. 이 도시에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그럴 여유가 없어요. 일주일 안에 어떻게 할지 결정해주세요." - P154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 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는 스스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P156

편지를 쓰지 못하면 더는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없으니까. 숨을 쉬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 P156

벌써 일주일 넘게 그 누구하고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어. 내가 하는(혹은 하려고 하는) 모든 말이 내 의도와 다르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듯 느껴져. 그래서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어. 절대 침묵을 목적으로 한 침묵이 아니야. 하지만 사실이 아닌(여기에 연필로 진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말을 꺼내면 나 자신이 산산이 부서져 보잘것없는 먼지 덩어리가 되어버릴것 같아. - P157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의 대역에 기나지 않아. 진짜 나의 그림자 같은 존재ㅡ아니, 말 그대로 ‘그림자‘야. 그리고 본체와 떨어진 그림자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해. 내가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건 매우 드문 경우야. 평범하지 않은 일이야. - P158

나는 세 살 때 본체와 떨어져 벽 바깥으로 쫓겨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어. 돌아가신 어머니와 지금도 살아 있는 아버지는 나를 진짜 딸이라고 생각하지만(생각했지만), 물론 잘못된 환상이야. 나는 그저 먼 도시에서 바람에 실려온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야. 그들은 그 사실을 몰라 (몰랐어). 그리고 나를 자신들의 진짜 자식이라고 믿었어. 누군가가 그렇게 믿게 한 거야. 요컨대 기억을 통째로 바꿔넣은 거지. 그러니까 내가 이 사실로 (내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그들은 상상도 못해. - P158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너를 만날 때까지, 내가 그저그림자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었어. 이런얘기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머리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뿐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를 만난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특별한 사건이었지. 그렇게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내 인생에 일어나리라곤 생각도 못했고, 솔직히 지금도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아.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어. - P159

하지만 부디 믿어줘. 내가 지난번에 공원 벤치에서 너에게한 말은 전부 사실이야.
나는 너의 것이야. 만약 네가 원한다면, 나의 모두를 너한테주고 싶어. 하나도 남김없이. 다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할 뿐이야. 알아주면 좋겠어. - P160

나는 여러모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그때 말했지. 정확한표현은 잊어버렸지만 그런 말을 했던 건 기억해. 너는 기억하니? 그런데 이제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지도 물라. 그래서 톡톡톡, 필사적으로 키를 두드리고 있어. 톡톡톡톡....… 어쩌면 통신문을 끝맺지 못할지도 몰라. 바닷물이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밀려들지도 몰라. 차갑고 심술궂고 자디짠, 지극히 치명적인 바닷물이. - P160

"잘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그림자와 떨어졌다고 딱히 곤란한 건 없어. 그래도 그림자를 영원히 잃는다면, 그와 함께 다른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ㅡ그런 기분이 들어." - P165

"그래서 당신 그림자가 뭔가를 요구하나요?"
"나와 다시 한번 하나가 되고 싶어해. 그러면 그림자는 원래의 생명력을 되찾을 수 있어.
"하지만 그림자와 다시 하나가 되면, 당신은 이 도시에 머무를 수 없어요." - P165

"그렇다면 역시 그림자를 단념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림자에겐 안된 일이지만, 당신은 이 도시에서 그림자 없는 생활에 익숙해질 거예요. 조금 있으면 그림자 생각도 잊을 거고요. 누구나 그런 것처럼." - P166

너의 눈동자에 비친 난롯불 빛이 반짝인다. 아니, 그건 난롯불이 아니라 네 안에 내재된 빛인지도 모른다. - P166

"걱정할 건 전혀 없어요." 너는 말한다. "당신은 이곳에 와서 주어진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걸요. 다들 감탄할정도로, 앞으로도 분명 잘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감탄할 정도로. - P166

"그래도 당신의 열성적인 조력이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면밀한 구축물이 완성되지 않았을걸요. 당신이 이 도시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상상력이라는 양분을 끊임없이 공급해왔어요."
"분명 처음에 이 도시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 태어났을 거야.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스스로 의지와 목적을 갖게 된 것 같아." - P174

"이 도시는 구축물이라기보다 생명을 지니고 움직이는 생물처럼 보일 때가 있어. 유연하고 교묘한 생물이야. 상황에 맞춰 필요에 따라 그 모양을 바꿔나가지. 이곳에 온 뒤로 어렴풋이 느껴왔어." - P175

"그런데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꾼다면 생물보다 세포에 가깝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몰라."
사고하고, 방어하고, 공격하는 세포. - P175

"하지만 당신이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것이 도시에 무슨 의미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 P176

"하지만 그 작업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을 거야. 이 도시에서그것을 읽는 특별한 역할이 내게 주어졌고, 도시는 내가 그 작업을 계속하기를 강력히 원하잖아." - P176

그림자는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여기 있는 그녀가그림자고 벽 바깥에 있던 그녀가 본체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전부터 그게 마음에 걸려서, 여기 오는 사람들의 얘기를듣고 조각조각 정보를 모아 나름대로 생각해봤어요. 그리고이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실은 이곳이 그림자의 나라가 아닐까. 그림자들이 모여 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서로 도와가며 숨죽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 P176

"하지만 네 말처럼 여기가 그림자들의 나라라면, 어째서 본체인 내가 도시에 들어가고 그림자인 너는 여기 갇혀 죽어가는 걸까? 반대라면 이해되지만."
"내 생각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이 본체고 벗겨져나간 그림자가 벽 바깥으로 쫓겨난다고 믿고 있죠.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가 아닐까, 벽 바깥으로 쫓겨난 것이 본체고, 여기 남은 이들이야말로 그림자가 아닐까ㅡ 그게 내 추측입니다." - P177

나는 그 말을 생각해봤다. "그리고 벽 바깥으로 추방된 본체들은 자신들이 그림자라고 믿고 있다. 그런 건가?"
"그렇죠. 제각기 가짜 기억을 주입당한 겁니다." - P177

"오래된 꿈이란, 이 도시가 성립하기 위해 벽 바깥으로 추방당한 본체가 남겨놓은 마음의 잔향 같은 것 아닐까요. 본체를 추방하더라도 송두리째 모조리 들어낼 순 없고, 아무래도 뒤에 남는 게 있어요. 그 잔재들을 모아 오래된 꿈이라는 특별한 용기에 단단히 가둔 겁니다." - P178

"마음의 잔향?"
"여기서는 아직 어릴 때 본체와 그림자를 떼어내죠. 그리고본체는 불필요한 것, 해로운 것으로 치부당해 벽 바깥으로 추방돼요. 그림자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설령 본체를 쫓아내도 그 영향이 말끔히 지워지진 않아요. 미처 제거하지 못한 마음의 작은 씨앗 같은 게 뒤에 남고, 그것이 그림자의 내부에서 은밀히 성장해가죠. 도시는 그것을 재빨리 찾아내서 긁어낸 뒤 전용 용기에 가둬버리는 겁니다." - P178

"마음의 씨앗?"
"그래요. 사람이 품은 갖가지 종류의 감정이죠. 슬픔, 망설임, 질투, 두려움, 고뇌, 절망, 의심, 미움, 곤혹, 오뇌, 회의, 자기연민… 그리고 꿈, 사랑. 이 도시에서 그런 감정은 무용한것. 오히려 해로운 것이죠. 이른바 역병의 씨앗 같은 겁니다."
"역병의 씨앗." 나는 그림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네. 그러니 남김없이 긁어내 밀폐용기에 담아서 도서관 깊숙이 넣어두는 거예요. 그리고 일반 주민의 접근을 금지하죠." - P178

"그럼 내 역할은?"
"아마 그 영혼을 혹은 마음의 잔항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일이겠죠. 그림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이에요. 공감이란 진짜 감정을 가진 진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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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부분에서도 여러가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특별히 p.123 부터 나오는 ‘나‘와 ‘나의 그림자‘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설정이지만, 이 소설 속에선 어떤 도시의 벽을 기준으로 ‘나‘와 ‘나의 그림자‘ 가 분리되어 둘이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닌 애초부터 아예 다른 존재인 것 마냥 묘사된다.

그들 간의 대화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나는 이 ‘그림자‘ 라는 것이, 이 책의 독자들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그들의 대화 내용을 일부분 밑줄 치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여기 나오는 ‘그림자‘로 상징되는 것이 가까운 내 주변에 있으면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잘 못 보거나, 평소에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서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독자들에 따라 그 대상이 조금씩은 다를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그림자‘가 자신을 위해 뒷바라지 해주는 부모님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늘 자신과 함께 하는 친구 혹은 형제 자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범위를 좀 더 밖으로 넓히면 우리가 늘상 만나지만 평소엔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그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채 마주치게 되는 버스기사님 같은 분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외에도 내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에 나온 ‘그림자‘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 ‘그림자‘와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서 ‘이렇게 보고 느끼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독자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주변 환경 등 여러 요인들에 따라 ‘그림자‘의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라는 컨셉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이 책의 독자들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도록 해주신 이 책의 저자분께도 감사드린다.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하고 의도한 이 ‘그림자‘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지도 문득 궁금해진다.

너는 그럴 때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 선을 긋기 힘들어지는・・・・・・ 아마 나는 다른 사람보다 그런 경향이 훨씬(저울의 바늘이 헛돌 정도)로 강한 게 아닌가 싶어. 어떤 이유로 인해, 아마도 타고난 기질 덕에. - P58

실은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꿈을 기록하기에는 몽당연필이 제일 좋아. 길이가 8 센티미터 안 되는 것. 전날 밤에 몇 자루를 칼로 잘 깎아둬. 기다란 새 연필은 절대 안돼! 왜 그럴까? 왜 꼭 짧은 연필이어야 꿈 얘기를 문제없이 써둘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 P59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를 버릴 때처음으로 그것에 뚜렷한 무게가 있었음을 실감한다. 평소 생활에서 지구의 중력을 느낄 때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물론 그림자를 버리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뭐가 됐건 오랜 세월 함께하며 친밀해진 상대와 갈라서는 건 아무래도 심란한 일이다. 이 도시에 도착했을때, 나는 입구에서 문지기에게 내 그림자를 맡겨야 했다. - P65

"걱정할 것 없어." 문지기가 나를 격려하듯 말했다. "그쪽도 그림자 없는 생활에 차츰 익숙해질 거야. 머지않아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는 사실마저 잊게 될걸.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더랬지, 하듯 말이야." - P67

"일단 이 문을 넘어 도시에 발을 들인 자는 두 번 다시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벽이 허락하지 않아. 그게 이 도시의 규칙이야." - P68

"한 가지 더. 그쪽은 지금부터 ‘꿈 읽는 이‘가 될 테니 ‘꿈 읽는 이‘의 눈을 받게 된다. 이것도 규칙이야. 눈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얼마간 불편을 겪을 수도 있어. 그것도 알고 있지?"
그리하여 나는 도시의 문을 넘었다. 그림자를 버리고, ‘꿈 읽는 이‘로서 눈에 상처를 내고, 두 번 다시 그 문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의 ‘계약‘을 맺고. - P68

"어두운 마음은 어딘가 먼 곳으로 보내져 결국 생명을 다하게 돼요." - P70

이 도시에서 나는 더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철저히 외톨이라는 생각 사이를. 내 마음은 그렇게 정확히 둘로 쪼개져 있다. - P71

"걱정 마요"라고 너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망설이지 말고 이대로 계속하세요. 당신은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으니까."
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확신에 차 있다. 도시의 높은 벽을 이루는 벽돌처럼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다. - P75

내게 침묵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 침묵을 환영했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기억을 일깨워주므로. - P76

‘직공 지구‘의 공동주택 앞에서 너는 걸음을 멈추고 빈약한불빛 아래서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본다. 꼭 무슨 중요한 일을 떠올리려는 것처럼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고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가능성은 형태를 얻지 못한 채 어딘가로 빨려들어가 사라진다. - P76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없어요. 그저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너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만한 확신이 없다. 과연 시간을ㅡ이 도시가 시간이라고 명명한 것을ㅡ그렇게까지 신뢰해도 괜찮을까? 그리고 이 끝나지 않을 듯 기나긴 가을 뒤에는 대체 무엇이 찾아올까? - P77

나는 바다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볼 때마다 어떤 감동을 받는다. 아마 바다가 영겁에 걸쳐 혹은 거의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화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물은증발해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를 내린다. 영원한 사이클이다.
바닷물은 그렇게 조금씩 교체되어간다. 그러나 바다라는 총체가 변화하는 일은 없다. 바다는 늘 똑같은 바다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인 동시에, 하나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내가 바다에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느끼는 건 (아마도) 그런 종류의 엄숙함이다. - P79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할지,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잖아. 안 그래?" - P82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대를 만나고 나면 그 무한의 가능성은 불가피하게 오직 하나뿐인 현실로 치환된다. 너는 그게 괴로운 것이리라. 네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일 뿐. 실제로 네 곁에 있으면서 네 몸의 온기를 피부로 느끼고, 손을 잡거나 그늘에서 남몰래 입맞춤하는 쪽이 훨씬 좋다. - P82

그건 시커먼 대형견 같은 거야. 한번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손쓸 도리가 없어. 아무리 튼튼한 목줄을 매어 잡아당겨도ㅡ - P83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ㅡ네가 어느 특정한 장소를 향해 걷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는 그저 한 장소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동 그 자체가목적인 이동이다. 네 보폭에 맞춰 나는 나란히 걷는다. 역시침묵을 지키면서. 하지만 나의 침묵은 올바른 어휘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의 침묵이다. - P85

이 세상은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여자의 심리에 관해서라면 내 지식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공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평소와 다른 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일단 침착해야 한다. 나는 남자고, 너보다 한 살 많지 않은가. 실제로는 대단한 차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 P86

그네를 타던 두 여자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네 두 개가 5월의 햇빛 아래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다. 타는 사람 없이 멎어있는 그네는 왠지 몹시 내성적으로 보인다. - P87

내가 좀더 강하면 좋을 텐데. 좀더 힘주어 너를 안고 좀더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ㅡ단 한 마디로 그자리에 걸린 나쁜 주문을 확 풀어버리는, 올바르고 적확한 말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 P88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문지기는 말했다. "머리 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 땐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야."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다만 철학적 성찰보다 실제적인 경고에 가까우리란 건 이해할수 있었다. - P90

이 도시에는 원래부터 호기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혹은 존재하더라도 극히 희박하며 범위도 좁게 제한되어 있거나 생각해보면 그게 이치에 맞는지도 모른다. 만약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러 가지에, 이를테면 벽 바깥의 세계에 호기심을 느낀다면, 그(혹은 그녀)는 바깥세계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지도 모르고,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도시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도시는 벽 안쪽에서 빈틈없이 완결된 상태여야 하니까. - P91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이 도시에 살았던 듯하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러나 어느 시점에 무언가가 일어나 많은 주민들이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가재도구도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황급하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 P93

남은 주민들이 그 ‘무언가‘를 입에 올리는 일은 없다. 말하기를 거부하는 건 아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 집합적기억을 송두리째 상실한 듯 보인다. 아마 그들은 제 손으로 떼어낸 그림자와 더불어 그런 기억도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이 도시 사람들은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딱히 느끼지 않는 듯했다. - P94

벽은 내 ‘호기심‘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려고 마음만 먹으면 벽은 나의 탐색을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쓰러진 나무로 길을 막거나, 빽빽한 덤불로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길 자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거나. 벽이 가진 힘이라면 그쯤은 간단하다ㅡ매일 벽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그런 인상이 강해졌다. 이 벽에는 그만한 힘이있다. 아니, 인상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더욱이 벽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빈틈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피부로 느껴졌다. - P95

그러나 그런 방해 행위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렇다 할 장해물 없이 벽을 따라 나아가며 그 형상을 공책에 자세히 기록했다. 벽은 나의 그런 시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할까. 오히려 재미있어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네가 그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봐라. 그래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니까. - P95

벽에 대한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 벽은 시시각각 살아니서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장기의 내벽처럼. 아무리 정확하게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도 벽은 곧장 모습을 바꾸어 내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내가 글과 그림을 고쳐쓰면 벽은 또 지체없이 변화했다. 견고한 벽돌로 이뤄졌는데 어떻게 저리도 유연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지, 나는 꿈속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벽은 눈앞에서 변화를 거듭하며 나를 조롱했다. 벽이라는 압도적 존재 앞에서는 나의 매일 같은 노력도 아무 의미가 없다ㅡ벽은 그 사실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 P96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기억을 완전히 비워낸 채로 살아갈 수 없다. 물론 진실이 절묘하게 바꿔치기되거나 기억이 날조되지 않았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노인의 이야기가 내 귀에는ㅡ적어도 열 때문에 아직 머릿속이 약간 몽롱했던 나의 귀에는ㅡ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들렸다. - P97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P102

"이해하겠나? 그걸 보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일단 눈으로 보면.……… 자네도 모쪼록 조심하게나. 되도록 그런 것에 가까이 가지 않게끔. 가까이 가면 반드시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지지. 그 유혹을 물리치는 건 보통 일이 아닐세." - P103

"난 너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것 같아."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엉키지 않는 면을?"
"그게 아니라, 분석이나 충고 따위 하지 않고 말없이 나를지지해주는 면을." - P107

"어릴 때부터 이렇게 까다로운 성격이었어. 그래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나를 품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돌아가신 할머니 말고는 단 한 사람도.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생각이 어땠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할머니는 그저 뭘 착각했던 건지도 몰라."
"나는 널 좋아해."
"고마워." 너는 말한다. "그렇게 말해주니 무척 기뻐. 하지만 그건 분명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일 거야. 만약 나를 더 잘알게 되면ㅡ"
"만약 그렇다 해도 너를 좀더 잘 알고 싶어. 여러 가지를, 모든 것을."
"그중엔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을 거야."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연히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싶어지는 거야." - P109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말을 잇는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 P110

"그래도 서두르진 마. 내 마음과 몸은 조금 떨어져 있거든.아주 조금 다른 곳에 있어. 그러니까 좀더 기다려주면 좋겠어. 준비가 될 때까지. 이해해?" - P110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 P111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해 네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면, 너의 실체는 어디 있을까?"
"나의 실체는 진짜 나는 아주 먼 도시에서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어. 도시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고 이름이 없어. 벽에 하나뿐인 문은 억센 문지기가 지키고 있고. 그곳에 있는 나는 꿈을 꾸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아." - P112

"나는 그곳에 갈 수 있어? 진짜 네가 있는 이름이 없는 그 도시에."
너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본다. "만약 네가정말로 그러기를 원한다면." - P112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에 놓인 꿈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것뿐이다ㅡ그 이유도 목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 P117

꿈을 하나 읽고 나면 잠시 쉬어야 한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어둠 속에서 눈을 쉬게 하며 피로가 걷히기를 기다린다. - P117

그럼에도 하나하나의 꿈은 제각기 기쁨과 슬픔, 분노를 내포한 채 어딘가로 빨려들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ㅡ내 몸을 그대로 통과해서. - P118

꿈 읽기 작업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그런 ‘통과의 감각‘을 강하게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반적인 의미의 이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통과해 가는 그것들은 때때로 나의 안쪽을 기묘한 각도에서 자극하고, 오랫동안 망각했던 내 안의 몇 가지 감흥을 일깨웠다.
긴 세월병 바닥에 쌓여 있던 오래된 먼지가 누군가의 숨결에 의해 허공으로 훅 피어오르는 것처럼. - P118

그건ㅡ일시적인 고열ㅡ은 아마 신참 꿈 읽는 이의 통과의례같은 것, 피할 수 없는 과정인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이 도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시스템에 동화된다. 나는 그점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너도 이렇게 기뻐해주고 있으니까. - P119

"이봐, 눈이 아직 아픈가?" 문지기가 말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가끔 아픕니다."
"조금만 참아.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통증도 사라질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P122

그림자가 사는 곳은 도시와 바깥세계의 중간 지점이다. 나는 바깥세계에 나갈 수 없고, 그림자는 도시로 들어올 수 없다. ‘그림자 쉼터‘는 그림자를 잃은 사람과 사람을 잃은 그림자가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 P122

"나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림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체에서 억지로 벗겨져나간 그림자는오래 살지 못해요. 나보다 먼저 왔던 그림자들은 죄다 이 ‘쉼터‘에서 차례차례 죽어나간 모양이에요. 겨울의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 P125

그림자는 말했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얼 추구할지는 당신소관이죠. 누가 뭐래도 당신 인생이니까요. 나는 그저 부속물일 뿐이에요. 훌륭한 지혜를 가진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도 거의 쓸모가 없죠. 그래도 말입니다. 내가 아예 없어지면 나름대로 불편한 점이 있을걸요. 잘난 체하고 싶진 않지만, 나도 지금껏 아무 이유 없이 당신과 함께 행동해온 게 아니라고요." - P125

그림자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결국 당신이 결정할 일이니 나야 할말 없고요. 그런데 만약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면, 그런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되도록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좋아요. 지금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늦어요. 그것만은 꼭 기억해두세요.
"기억해둘게." - P126

그림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보았다. "그래서……… 생각하던 사람은 만났고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행이네요." 그림자는 말했다.
바람이 소리 내며 느릅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갔다.
"어쨌거나 이렇게 면회까지 와주고 고마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러고서 그림자는 두툼한 장갑을 낀 한 손을 살짝들어올렸다. - P126

"육체는 영혼의 신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만." 문지기가 말했다.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처럼 날마다가련하게 죽어나간 짐승들 뒤처리나 하다보면 육체 따위, 신전은커녕 그저 너저분한 폐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리고 그런 궁상맞은 용기에 욱여넣어진 영혼 그 자체에 점점 신뢰를 잃는단 말이지. 그까짓 거, 사체와 함께 유채기름을 끼얹어 확 불살라버리면 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어. 어차피 살아서 고통받는 재주 말고는 없으니 어때, 내 생각이 틀렸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영혼과 육체에 대한 물음에 나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특히 이 도시에서는. - P127

"아무튼 그림자가 하는 말은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게 현명해." 문지기는 다른 손작두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그쪽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몰라도, 하여간 입은 살았으니까 자기가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럴싸한 소리를 되는대로 지껄이거든. 조심 또 조심하는 게 좋아."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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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밑줄친 부분 중에 ‘고정관념 위협‘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와 관련된 설명들이 굉장히 공감이 되었다. 이를 나만의 문장으로 굳이 풀어 보자면, 부정적 고정관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갖게되는 정신적 에너지의 고갈이 그들의 퍼포먼스 감소를 유발시킨다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나라에 만연해 있는 학벌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소위말하는 ‘스카이 대학‘을 나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에 어떤 비교같은 것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을 유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수험생들이 재수 삼수 혹은 그 이상을 해서라도 스카이 대학에 기를 쓰고 가려는 이유가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이 책의 내용과 연관지어 그 이유를 분석해본다면, 나중에 사회에 진출했을 때 사회에서 받게되는 어떤 평가 혹은 대우가 다른 기타 대학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기 때문에 그러한 베네핏benefit을 획득하기 위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부정적인 평가나 좋지 못한 대우를 받는 것을 견딜 수 없거나 그러한 것들이 힘들다고 생각하기에 기를 쓰고 공부하고 노력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카이 대학에 가지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넋두리처럼 하는 말이 ‘아,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더 열심히 할 껄‘ 이다. 꼭 입으로 이런 말을 내뱉지 않더라도 자신의 학교가 스카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들을 누구나 한 번 쯤은 해봤을 텐데, 이런 생각들조차도 자신의 정신적인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고갈시키는데 한 몫 하기에 당사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개인적인 의견을 좀 더 보태자면, 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용어는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정신적인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것이 바로 ‘열등감‘ 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우리나라는 서울대생이 아니고서는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누구나 조금씩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본능적으로 생기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겠으나 되도록이면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되기보다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더 고민하고 생각하여 생산적인 일들에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전반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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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계속 읽다보면 롤 모델의 중요성에 대한 내용들도 나오는데, 자기와 비슷한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롤 모델이 될 경우, 그 롤 모델처럼 되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과 소속감을 심어줘서 그들이 향후 커리어를 밟아나가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MIT의 연구 결과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도 멘토 멘티 같은 것들이 있는 곳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데 다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롤 모델 이야기와 더불어 개척자와 개척자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에 대한 사례들도 나오는데 핵심은 이미 닦아 놓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 비해 개척자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고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고독한 것은 기본이고 그 길이 어떤지 불확실한 상태로 가다보니 심리적인 압박감이 느껴지고 그로 인해 주업무에만 충실해도 힘든 마당에 부가적인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에너지 소모까지 동반되기에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을 훨씬 뛰어 넘을만큼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많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게 겉으로는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것들에 에너지 소모가 많다보니 힘들고 지치기 쉬운 것이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그 길의 선구자들, 개척자들의 노고는 정말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척자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이와 관련된 것 중에 하나로 마라톤의 ‘페이스 메이커‘라는 것이 있다. 장거리 경주인 마라톤을 하다보면 맨 앞에서 오랫동안 달리는 경우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기에 그만큼 달리면서 체력이 소모되는 양도 더 많아지고 그로인해 지치게 되어 순위권에 입상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를 보다보면 초중반까지 맨 앞 쪽에서 뛰면서 자신이 바람의 저항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마라톤 대회에서의 입상보다는 다른 참가자 혹은 선수들의 페이스를 조절하고 그들의 컨디션을 끌어올려주는 것을 목표로 달리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페이스 메이커‘라고 한다.

마라톤에서 보통 페이스 메이커들은 에너지 소모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기도 하고 제 1의 목표가 완주가 아니기 때문에 완주를 하지 않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해, 개척자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뒤에 오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소모하면서도 그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어떤 분야의 선구자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들의 업적이 대단한 것이다.

좀 안 좋게 보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닦아 놓은 다양한 길들이 있기에 다른 사람들이 좀 더 편하게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것들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을 좀 더 희생하면서까지 길을 만들어간 개척자들에게 오히려 고마워하는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서 편견에 대한 사고를 확장한다면, 온갖 사회적 편견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하고 존중받아 마땅한 분들 같다. 이런 분들의 인생 길이 하루속히 순탄해져서 불필요한 곳에 쏟는 에너지를 본업에 좀 더 쏟을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응원하는 바이다.

부모들도 젠더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부모들이 구글에서 ‘내 아들이 재능이 있는가?‘라고 검색하는 비율은 ‘내 딸이 재능이 있는가?"를 검색하는 비율의 2배 반에 달한다).

또 부모들이 ‘내 딸이 과체중인가?‘라는 검색을 ‘내 아들이 과체중인가?‘라는 검색에 비해 2배는 더 많이 한다. 그런데 사실 과체중 비율은 소년이 2배 더 높다.

파크는 교사들과 부모들의 편향에 맞서거나 그들이 편향을 가졌다고 납득시키기보다는 인간의 판단에 실수가 들어오는 순간을 확인한 다음 작업의 방향을 바꾸도록 설계했다.

편향을 제거하는 이런 접근법ㅡ사람을 바꾸기보다는 과정을 바꾸는 데 의존하는 방식ㅡ은 널리 퍼지고 있다. 학술 저널은 제출된 논문을 평가할 때 저자 이름을 지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의 수호자로 활동하며, 그 신비에 접근할 수 있는 천문학자를 선발하는 위원회는 최근에 지원자들의 정체를 가리기 시작했다.

직장이 사용하는 편향을 줄이기 위한 구조적 시도 중에는 행동적 설계도 있다. 고용 절차는 편향이 활동하기 아주 쉬운 상황이다. 인간은 고용에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 직관적으로 ‘문화 적합성culture fit‘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면접관이 흔히 본능적으로 자신을 닮은 후보를 선호함을 의미한다.

동종애호homophily(문자 그대로 같은 것에 대한 사랑이라는 뜻) 현상은 우리가 흔히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에게 이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종 애호는 편향이 가져오는 이중적 불행의 본보기다.
낙인이 찍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적대하는 편향뿐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과 가장 비슷한 사람들을 선호하는 편향도 있다.

문화 적합성(culture fit)

어떤 후보가 직원으로 채용되었을 경우 그 조직에서 어떤 유형의 문화적 영향을 발휘할지 판단해 후보를 심사하는 개념. 간단하게 말해해 어떤 조직에서 일하기에 좋은 사람인지 심사한다는 것. culture fit이 맞을 때 사람들은 직장 일원으로 더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편안하다고 느끼며, 기여 의욕을 느껴 조직과 개인의 상호 이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고정관념 위협ㅡ낙인이 찍힌 집단 출신 사람들이 자신들이 부정적 고정관념을 확인해주는 존재로 보일 것이라는 예상과 씨름하는 데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현상ㅡ같은 인간관계의 허상은 여성 또는 평균보다 더 적게 선발되는 집단출신 사람이 같은 기량을 갖추었더라도 더 빈약한 수행결과를 낳게 만들 수 있다.

회사는 직업을 설명하는 말투를 바꾸어 더 많은 청중에게 호소력을 갖게 했다. ‘심술궂게 wickedly‘나 ‘마니아적인 maniacal‘ 같은 용어보다는 ‘깊이 있는 관심care deeply‘ 이라든가 ‘지속적인 관계 last relationships‘ 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선택 설계의 변화 덕분에 편향이 적은 선택을 하게 되었다.

선택 설계는 도움은 되지만 이런 식의 구조적 조정은 현상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더 근본적인 힘을 압도하지 못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무엇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뉴스를 볼때든 해로운 코멘트를 볼 때든 불안과 분노를 야기하는 부정적 내용에 강하게 이끌린다.

뉴스는 독자와 방송으로 증폭되어 더 넓은 청중을 만나는 데 비해, 욕설은 수많은 트롤 무리를 통해 증폭되어 매우 좁은 범위의 청중, 단 한 명의 청중을 목표로 할 수 있다.

트롤

부정적 반응을 이끌어낼 목적으로 화를 돋우거나 도발적인 글을 올리는 인터넷 이용자

컨웨이는 어떤 소프트웨어의 구조가 항상 그것을 만든 조직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어떤 산물이 서로 별개인 네 팀에 의해 개발되었다면, 그 최종 버전은 별개인 네 부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컨웨이의 말에 따르면 "설계 팀을 조직하는 행동 자체가 특정한 설계 결정이 명시적으로든 다른 방식으로든 이미 내려졌음을 의미한다. 조직적이면서도 편향이 없는 설계  집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컨웨이의 통찰은 더 큰 진실을 반영한다. 소프트웨어는 항상 그것을 만든 그룹의 본질적 특징을 전시한다는 것이다.

적극적 조치의 수혜자라는 처지가 내면화된 낙인, 자신이 그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어니타 앨런 Anita Allenㅡ본인도 적극적 차별 개선 조치의 수혜자ㅡ은 역사적으로 억압받아온 사람들은 적극적 조치를 과거에 겪은 배제에 대한 꼭 필요한 치유제이며, 배상reparation의 형태이자 오래 지연되어온 ‘추가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몇 안 되는 구성원을 살펴봄으로써 집단전체에 관련된 패턴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추정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당시 나는 다른 사람들의 오인을 내 개인의 문제로 여겼고, 내가 그들의 오인이 사실임을 입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주변화된 그룹에 적대하는 낙인은 적극적 조치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똑같이 존재한다.

선별적 채용은 자격이 부족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탁월한 사람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치우는 일이었다.

그러나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그 분야에 대한 소속감을 계속 느끼고, 공학도로서 자신감과 재능에 대한 감각을 유지한 것은 여성 멘토를 만난 사람들뿐이었다.

남성 멘토를 만났거나 멘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 소속감과 자신감은 급강하했다. 그리고 그 분야에 계속 남아 있게 해준 것은 이런 느낌ㅡ성적 등급이 아니라ㅡ 이었다.

다스굽타는 이런 내용을 롤 모델이 ‘사회적 백신‘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호라고 설명한다. 즉 롤 모델은 평균보다 대표를 적게 배출한 집단 출신 개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 고정관념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예방접종‘ 해주는 존재인 것이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존재가 되라고 부탁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실 세계의 롤 모델은 편견의 대상을 곤경에서 구해줄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인지를 변화시켜 그 곤경을 없애기도 한다.

내가 페코 호소이에게 롤 모델의 영향력에 대해 물어 보았을 때 그녀는 수학의 비유를 들었다. 수학에서는 가끔 어떤 과제를 진행하기 위해 수학적 대상이 존재함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존재 증명‘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 대상물이 존재할 수 있다는 논증이다. 실제 사례는 그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좋은 논리다.

호소이는 학생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삶의 패턴을 따올 인물을 보여줄 필요는 없고 존재 증명, 즉 특정한 종류의 삶이 가능하다는 증거면 된다.

"누군가가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당신이 그곳에 있고 대화할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개척자라고 하면 참 이상적으로 들리지요"라고 앨리스는 말했다. "그렇지만 누가 개척자가 되고 싶어 하겠어요? 전 아니에요 개척자 뒤에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게 좋아요. 이런겁니다. ‘여기 괜찮아! 뛰어 들어와!‘"

어느 부서나 분야나 어느 조직에서 최초이거나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모두가 원하거나 어울리는 역할이 아니다. 우리는 개척자들에게 환호를 보내지만 그들이 걷는 길은 외롭고 낯설다. 개척자들은 항상 ‘타자성他者性‘과 직면한다.

그들은 타인들의 스테레오 타이핑, 불편함, 노골적인 공격성과 싸워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타인보다 자신에게 더 가혹한 환경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배타적 문화를 지닌 수많은 조직에서 이런 개인들이 제 몫을 하기 위한 그림자 요구 사항shadow requirements 이 있다. 그것들을 ‘개척자 요구 사항pioneer requirements‘ 이라 부르자.

예를 들어 공학에서 그 직업에 필요한 기량은 최고 수준의 기술적 통찰력, 창의성, 팀 활동 능력, 뛰어난 소통 능력 등이다.

하지만 공학의 개척자는 이런 기술은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고, 그와 함께 고독을 감내할 능력도 있고, 공격적이거나 비하적인 발언에 영향받지 않을 정신력도 있어야 하며, 솔직하게 적대적일 수도 있는 문화를 헤쳐나갈 능력도 있어야 한다.

환영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남기위해 개척자들은 반드시 소속감을 느끼지 않고도 헌신할 필요가 있다. 직업 기술과 개척자적 기술은 상반될 수도 있다. 연구에는 팀워크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개척자는 고독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개척자는 그림자 요구 사항이 없는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수행하면서도 그림자 요구사항을 완수해야 한다.

자신은 ‘괴짜‘ 이고 사회적 규범에 눈을 감았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둔감함 덕분에 적대적인 환경에서 잘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일을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지적한다.
그것은 가외로 감당해야 할 필수 조건이었다.

힘든 싸움을 해온 경험이 그의 성향을 ‘무자비한 힘‘을 발휘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호하게 만들었다.

더 복잡한 세계에서 전통적 학술적 과목의 인위적 경계를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진다.

한 분야를 다양화하는 것 자체로는 편향을 지워버리거나 어떤 환경에서 그것이 낳을 피해를 막지 못한다.

젠더 편향이 이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은 젠더 편향을 실행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다양성의 증가는 편향적 환경을 시정하기 위한 한 걸음일 뿐이다. 그것은 공정성을 보장해주지도, 장기적인 성공의 연료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잘 살아가고 자리 잡을 수 있게 보장해주는—그리고 그들이 각자의 유능함에걸맞은 수준으로 올라가려면ㅡ데는 하향식 구조적 변화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문화가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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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초반부라 전체적인 그림이 머릿 속에 그려지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내용들을 통해 마치 흰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은 몇 년전에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작품을 읽어본 게 전부인데,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에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예전의 그 감성이 얼추 비슷하게 느껴졌다. 참 담백하고 수수한 문장이라고나 할까. 문장이 참 정갈하고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 하다. 한문장 한문장 읽으면서 그냥 본능적으로 밑줄 긋기를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오는 문장들에 밑줄을 쳐보았다.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놓치면 아쉬울 것 같은 문장들이 종종 보였다.

그 땅에서는 성스러운 알프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굴을 빠져나가 땅 아래 암흑의 바다로 흘러갔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쿠블라칸」

Where Alph, the sacred river, ran Through caverns measureless to man Down to a sunless sea.

Samuel Taylor Coleridge, Kubla Khan」 - P5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 P12

"그래,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 P13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 P15

"아니야, ‘꿈 읽는 이‘가 직접 꿈을 꿀 필요는 없어. 도서관서고에서, 그곳에 보관된 수많은 ‘오래된 꿈‘을 읽기만 하면 돼.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 P16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할 수 있어. 네게는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나는 너의 그 일을 도와. 매일 밤 네 곁에서." - P16

"나는 ‘꿈 읽는 이‘이고, 도시의 도서관에서 매일 밤 수많은
‘오래된 꿈‘을 읽는다. 그리고 내 곁에는 언제나 네가 있다. 진짜 네가." 나는 제시된 사실을 소리 내어 되뇐다. - P16

"맞아. 그런데 하나 기억해줘. 만약 내가 그 도시에서 너를 만난다 해도, 그곳에 있는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 P16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에.
내 손안의 어깨는 무척 매끄럽고 따뜻해서, 나는 진짜 너의어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 P17

‘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 라고 너는 말한다. "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아." - P19

하지만 그런 것들은 좀더 나중으로 미뤄도 되리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한 달에 한두 번 너를 만나 얼굴을 보고, 단둘이 긴 산책을 하고, 여러 가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서로의 정보를 친밀하게 교환하고, 보다 깊이 알아가는 일이다. - P20

그렇게 근사한 시간에 그 외의 요소를 성급하게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거기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망가져서,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신체적인 건 나중 일로 남겨두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혹은 직감이 내게 그렇게 일러준다. - P21

주로 네가 도시의 큰 틀을 말해주면 내가 그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을 하고 네가 대답해서 보충하는 식으로 도시의 구체적인 세부가 결정되고 기록되어갔다.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눈에 보이는 것,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구축해내는 데는 나도 적잖이 힘을 보탰다고 생각한다. 네가 말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적는다. 고대 철학자나 종교가 저마다 충실하고 면밀한 서기를, 혹은 사도라고 불리는 이들을 배후에 거느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유능한 서기로서, 혹은 충실한 사도로서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작은 전용 공책까지 마련했다. 그 여름, 우리는 그 공동 작업에 푹 빠져 있었다. - P21

짐승들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이클과 질서속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은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질서는 그들자신의 피와 맞바꾸어 주어진다. 격렬한 일주일이 지나고 보드라운 4월의 비가 핏물을 씻어낼 무렵, 짐승들은 다시 원래대로 정밀하고 온화한 존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광경을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너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 P26

너는 그런 사정을 띄엄띄엄 조각내어 들려준다. 오래된 코트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해진 무언가를 하나씩 꺼내놓는 것처럼. - P29

너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어째서인지 항상 자기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마치 줄거리를 따라가려면 그 위에 새겨진 손금(인지 무언지)을 꼼꼼히 해독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듯이. - P29

학교에서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장소는 도서실이다. 그곳에서 혼자 책을 읽고 공상하며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 읽고 싶은 책은 대부분 학교 도서실에서 독파했다. - P29

나는 특별히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다. 책 읽는 건 어릴 적부터 무척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손에 잡고 살았지만, 직접 글을 쓰는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어 시간에 우리 반 모두가 대회에 낼 에세이를 의무적으로 써야 했고, 그중 내가 쓴 글이 뽑혀서 심사위원회에 보내졌으며, 최종심사에 남더니 생각도 못한 높은 등수로 입상까지 했다. 솔직히 내 글의 어디가 그렇게 뛰어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읽어봐도 특출난데 없이 평범한 작품으로만 보인다. 그래도 몇 명쯤 되는 심사위원이 읽고서 상을 줘도 되겠다고 생각한 이상, 뭐라도 괜찮은 구석이 있었으리라. 담임이었던 여자 선생님은 나의 입상을 무척 기뻐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학교 선생님이 내가 한 어떤 행동에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토 달지 않고 감사히 상을 받기로 했다. - P30

그녀의 동생은 고양이털 알레르기다. - P32

네 목소리가 네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목소리와 다르다. 아니면 이 방에서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소리가 보통과 다르게 울리는지도 모른다. - P37

"무슨 일로 오셨나요?" 네가 묻는다.
내가 찾는 것은 ‘오래된 꿈‘이다.
‘오래된 꿈‘ 말이군요." 너는 작고 얇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나를 본다. 물론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시겠지만," 너는 말한다. "‘오래된 꿈‘은 ‘꿈 읽는 이‘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없이 진녹색 안경을 벗고 눈꺼풀을 들어올려 네게 보여준다. 누가 봐도 명백히 꿈 읽는 이의 눈이다. 한낮의 눈부신 빛 속으로는 나갈 수 없는.
"알겠습니다. 당신에게는 그 자격이 있군요." 너는 말하고 눈을 살짝 내리깐다. 아마 내 눈의 상태가 네 마음을 동요시켰을 것이다. 별수없다. 나는 이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눈을 그렇게 변질시켜야만 했다. - P37

"어디서 그쪽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묻고 만다. 무익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 P38

(그렇다. 너는 왼손잡이다. 이 도시에서도 이곳이 아닌 도시에서도) - P38

"아뇨. 뵌 적 없는 것 같습니다." 너는 대답한다. 말투가 깍듯한 건 아마 너는 아직 열여섯 살 그대로인데 나는 열일곱 살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너에게 나는 이제 훨씬 나이 많은 어른 남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시간의 흐름이 가슴을 찌른다. - P38

너는 테이블 너머에서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손으로 만든 약초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나는 너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문제없어, 라고 말하듯이. 그러자 너도 입가에 안도의 미소를 띤다. 그리운 미소다. 나는 오랫동안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 P39

시계가 없어도 무음 속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 위를 걸어가는 야윈 고양이처럼. - P39

너를 상대로는 무슨 말이든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신기할만큼 고스란히 글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막힘없이 글이 써지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전까지 스스로 글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몰랐던 능력을 네가 훌륭히 끄집어내준 것일 테다. 너는 내 글에 담긴 소소한 유머를 늘 좋아해주었다. - P41

당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세계에 매달리고 싶었던 것 같다ㅡ가능하면 어느 정도의 유머를 함께 담아서. 사랑이나 연애 같은, 요컨대 내면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대놓고 글로 쓰기 시작하면 나 자신이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 P42

나와 반대로 네 편지에는 구체적인 신변잡기보다 내면의 생각 같은 것이 많았다. 혹은 꿈의 내용이나 짧은 픽션 같은 것. 특히 꿈 이야기 몇 가지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너는 곧잘 긴 꿈을 꾸었고 세부까지 선명히 기억했다.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듯. 나로서는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고, 꿨다 한들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 P42

"난 머리맡에 공책과 연필을 챙겨두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지난밤 꿈을 기록해, 시간에 쫓겨 바쁠 때도 마찬가지야. 특히 생생한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깼을 땐 아무리 졸려도 그 자리에서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둬. 그것들이 중요한 꿈일 때가 많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거든."
"소중한 것들?" 내가 묻는다.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것." 너는 대답한다. - P42

너에게 꿈이란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과 거의동급이었고, 간단히 잊히거나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꿈은 너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주는 귀중한 마음의 수원 같은 것이었다. - P43

"그런 건 훈련의 산물이야. 너도 노력하면 분명히 무슨 꿈을꿨는지 조목조목 자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을걸. 한번 시험해봐. 네가 어떤 꿈을 꾸는지 무척 궁금하니까."
좋아, 해볼게, 나는 말했다. - P43

가끔 네 꿈에 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매우 기뻤다. 어떤 형태로건 네 안에 있는 상상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 P43

너는 여러 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 P44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벽이야.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부술 수없고."
문지기는 그렇게 단언했다. - P45

아니,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란 없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형체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약점이나 사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이 벽은 누가 만들었나요?" 나는 물었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라는 것이 문지기의 굳건한 견해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 - P46

도서관 서고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이 무수히 놓여 있다. 긴세월 손을 댄 사람이 없었던 듯 어느 것이나 표면에 희뿌연 먼지가 얕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된 꿈은 달걀처럼 생겼는데, 크기와 색깔은 하나하나 다르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낳고간 알 같다. - P47

표면은 대리석처럼 딱딱하고 매끈하게 반질거린다. 그러나대리석 같은 묵직함은 없다. 어떤 소재로 이뤄졌는지,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녔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바닥에 떨어뜨리면 깨져버릴까? 어찌됐건 매우 주의깊게 다뤄야 한다. 희귀한 생물의 알을 다룰 때처럼. - P47

‘꿈 읽는 이‘는 보아하니 나 말고는 없는 듯했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내가 이 도시의 유일한 꿈 읽는 이다. 나 이전에 다른 꿈 읽는 이가 있었을까?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 읽기에 관한 규칙이며 절차가 이토록 세세히 정해져 유지되어오는 것을 보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 P48

너는 커다란 흰색 헝겊으로 오래된 꿈에 하얗게 쌓인 먼지를 주의깊게 닦아 내 앞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진녹색 안경을 벗고 오래된 꿈의 표면에 양손을 얹는다. 손바닥으로 그것을 감싼다. 오 분쯤 그러고 있으면 오래된 꿈이 깊은 잠에서 차츰 깨어나 표면이 얇게 빛나기 시작한다. 양 손바닥에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온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꿈을 잣기 시작한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듯이,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이윽고 걸맞은 열의를 담아서.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껍질 밖으로 나갈 때가 오기를 선반 위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려왔을 것이다. - P49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가냘퍼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다. 그들이 비추는 이미지는 충분한윤곽을 그려내기 전에 흐려지고 허물어져 허공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그들 탓이 아니라 나의 새로운 눈이 아직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꿈 읽는 이‘로서 나의 이해력이 자리잡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 P49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곳에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 P50

"저는 이곳 말고 다른 도시는 몰라요. 여기서 태어나 벽 바같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하다. 네가 꺼내는 말들을 높이 8미터 남짓한 견고한 벽이 빈틈없이 보호해주고 있다. - P52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다른 데서 이 도시를 찾아온 사람을 만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왜일까." 나는 말끝을 흐린다.
너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라고 털어놓을 순 없다.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전에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더욱 많은 사실을 배워둬야 한다. - P52

너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멀리 동쪽에 있는 도시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 호기심이 나와 너의 거리를 조금 좁혀준다.
"그곳은 어떤 도시였나요?" - P52

"당신이 살던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하나요?"
나는 그 질문에 그럴듯하게 대답할 수 없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을까?
너는 묻는다. "아무튼 이 도시와는 상당히 다를 테죠? 크기도 구성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도, 어떤 부분이 가장 다를까요?"
나는 밤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켜고 알맞은 언어와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살았어." - P53

그렇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살았다. 나도 ‘너‘도 각자의 그림자를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나는 네 그림자를 잘 기억하고 있다. 인적 없는 초여름의 길위에서 네가 내 그림자를 밟고, 내가 네 그림자를 밟았던 걸기억한다. 어린 시절 곧잘 했던 그림자밟기 놀이다. 어쩌다 시작했는지 몰라도 우리는 어느새 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길 위에서 둘의 그림자는 몹시 까맣고 농밀하고 생기가 있었다. 밝히면 그 부분이 정말로 아프다고 느낄 정도로, 물론 무해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서로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것이 무척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행위인 것처럼. - P54

네가 내 가까이 있어주었을 때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후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 P56

꿈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여기요‘ 하고 건네주는 거고, 나 혼자서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으니까(아마도). 그리고 어느 연극이나 영화에서든 조연은 중요하잖아. 조연에 따라 그 연극이나 영화의 인상이 상당히 달라지지. 그러니까 비록 주연이 아니더라도 좀 참아주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같은 걸 목표로 삼기를. - P57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날의 일상에 꼼짝없이 붙들려, 지구의 보잘것없는 표면에 어찌어찌 달라붙어 살아가고 있어. 그 중력에서 벗어나는 건 제아무리 힘이 장사라 해도, 제아무리 돈이 많은 갑부라 해도 불가능해.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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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부분에선 경찰, 의사 등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들 갖고 있는 잘못된 편견 혹은 고정관념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각종 사례를 드는데, 경찰의 경우 피의자가 백인이냐 흑인이냐 같은 인종에 따라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얘기하고 있고, 의사의 경우 환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에 따라 처방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다양한 연구 사례들과 함께 보여주면서 편향과 관련한 여러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 전부 다 밑줄치진 않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문제 제기 후에 바람직한 해결방안들도 제시하는데,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을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은 어느 한 순간에 이러한 편견이나 고정관념들이 사라질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어느정도의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씩 변화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게 단지 깨어있는 한 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될 정도의 일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수준이기에 마음 같아선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으면 하지만 실제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밑줄 친 것들 중 일부 사례는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전문적인(의학적인)내용이라 굳이 몰라도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만, 저자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참고하는 용도 정도로 보는 건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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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막판에 밑줄친 문장 중 ‘행동을 바꾸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설계다‘ 와 관련된 사례들을 읽어보니 정말로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실제 삶에서도 적용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적으로 여기서 ‘설계‘라는 단어를 비록 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단어는 아니지만 ‘시스템‘이라는 단어와 연관지어 한 단계 발전시켜보자면, 이 책의 제목인 ‘편향의 종말‘을 위하여 어떤 특정한 편향이 없는 바람직한 사고방식의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나아가야할 방향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문득 이런 것들이 어쩌면 편향없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각종 문제들을 해결해나간다는 측면에서 볼때 요즘 급부상하고 있는 A.I 인공지능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맥락에서 인지된 것을 올바른 범주로 분류하는 능력은 뉴런 패턴을 식별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한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의도적으로 길러낸 능력과 문화적 삼투osmosis를 통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능력 모두를 말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주어진 어떤 것이 다른 것과 무엇을 공유하며 무엇을 공유하지 않는지 인지하게 된다.

언어의 경우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리 역시 마음속에 뉴런 패턴을 만들어낼 수 있고, 다른 언어를 해독하는 능력은 소리를 인식하는 능력에 의존한다.

다른 뉴런 패턴에 대응하는ㅡ혹은 대응하지 못하는ㅡ 두뇌의 능력은 사람들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 집단에 속하는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개별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다른 뉴런 패턴을 구별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이런
‘타 인종 효과cross-race effect‘는 다른 집단을 별로 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특히 많이 보인다.

인종이나 민족적 배경이 같은 누군가로 오인된 사람들은 투명인간이나 지워진 존재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친밀한 집단 출신 사람들을 알아보고 분류하는 전문가다. 격리된 사회에서 그들은 자신이 속한 인종과 가장 친밀해지는 경향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다른 인종과 많이 접촉할수록ㅡ전문성을 개발하면서ㅡ타 인종 효과의 문제는 줄어든다는 것이 밝혀진다.

같은 집단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을 구별해본 경험이 많을수록 개인을 보는 능력이 더 커진다. 전문성이 커지면서 감각 입력을 처리하는 복잡한 방법도 얻게된다.

전문가란 세상의 일들이 촉발한 뉴런 패턴을 구별하고 범주화하는 능력이 잘 발달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초심자는 그 능력이 더 제한적이고 조야하다.

축구 초심자인 나는 페널티킥을 할 때 그냥 공이 골을 향해 굴러가는 모습을 본다. 반면 월드컵 수준의 골키퍼는 선수가 접근하는 각도, 선수의 발 위치, 엉덩이와 머리의 방향을 인지하고, 1000분의 1초 안에 어떤 종류의 킥이 나오고 어떤 궤적을 따라 공이 날아갈지 인지할 ㅡ범주화할 ㅡ 수 있을 것이다.

월드컵 골키퍼,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 소방수는 모두 신속한 결정을 내릴 휴리스틱을 활용한다. 그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현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구별할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은 우리가 방금 논의한 기본적인 인지적 과정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올바르게 구별하는 능력을 개발하면 뭔가의 전문가가 되면 많은 일이 가능해진다. 어떤 집단의 다양한 멤버를 더 쉽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더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차이를 신중하게 관찰하면 광범위한 고정관념의 적용이 어떤 어리석음을 초래하는지 밝혀주기도 한다고 랭거의 연구는 주장한다. 한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에게는 다른 점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런 고정관념이 적중할 확률이 낮다,

편향을 깨부수기 위한 전략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다른 집단 출신 사람과 갖는 의미 있는 접촉은 그들의 관점을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게 해준다. 실제로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고정관념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보기 때문에 그것을 머릿속에서 교체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추측할 필요도 없다. 그 상황을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집단에 대한 자신의 인지를 키우고 심화하는 방법은 그들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필틴기라이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행하는 많은 것들은 경찰의 눈에서 공동체를, 그리고 공동체의 눈에서 경찰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파트너십 경찰관들에 대해 설명한 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역사회와 교류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바뀌었어요."

의미 있고 지속적인 관계가 사람들을 바꿀 수 있다

인간적 관계가 두려움과 불신을 밀어낼 수 있다.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사랑이었어요"

여성에 대한 의학적 처치가 이처럼 열악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성이 통증과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 대개는 신뢰성없는 과잉행동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여성은 오랫동안 감정이 지나치고 고통받는 존재이며, 과장되게 반응하고, 심리적 문제가 신체적 증상으로 표출되는 ‘히스테리컬‘한 존재로 고정관념화되어왔다.

연구에 따르면 어른들은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를 보다가 그 아이가 여자아이임을 알고 나면 아이가 느끼는 실제 통증의 정도를 더 약하게 본다고 한다.

동시에 성sex 같은 차이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점을 배제한 결과 여성의 증상은 의학적으로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의사들은 여성에게는 심근경색의 ‘비전형적 징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비전형적징후가 여성에게는 전형적인 징후다. 그것들이 ‘비전형적‘ 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연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은 질환에 대한 반응성, 그런 질환이 전개되는 과정과 징후가 다르게 나타난다. 남녀는 몇 가지 약물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인다.

구체적 사례를 들자면, 여성은 위산을 더 적게 분비하기 때문에 산성 환경이 필요한 약물은 효과가 적을 수 있다. 여성의 신장은 노폐물을 더 느리게 여과하기 때문에 일부 약물이 신체에서 빠져나가기까지 시간이 더 걸린다.

큰 성공을 거둔 항히스타민제인 셀데인은 그것이 여성에게 치명적인 부정맥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음이 발견된 이후 시장에서 수거되었다.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더 긴 ‘QT간격‘을 요하기 때문이다. 즉 심장이 박동하는 사이사이 다시 뛰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길다.

QT간격

Q-wave의 시작 시점에서 T-wave가 끝날때까지의 시간  간격, 즉 온몸에 혈액을 펌프질해 내보내는 좌심실이 한 번 박출한 뒤 다음 박출을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 간격을 말하는 것으로 이 간격이 길어지면 심장박동 리듬이 비정상이 되어 부정맥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신체 내 모든 세포는 생식 시스템에 속하는 것이든 아니든 XX 혹은 XY염색체를, 일부 경우에는 XXY, XXX, XO(X 염색체 하나만 있는경우) 염색체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세포의 행동 양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연구는 전형적으로 그것들을 기능상 대등한 것으로 처리했다.

가령 한 연구에서 ‘수컷‘과 ‘암컷‘으로 배양된 세포가 스트레스에 다르게 반응하며, 심지어 성호르몬을 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세포의 차이가 질환 민감성의 차이를 불러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이 다발성경화증, 루푸스, 류마티스성 관절염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 같은 것들 말이다.

심지어 대변이 연필처럼 가늘게 나오기도 했는데, 이는 종양이 대장을 막고 있다는 전통적인 신호다.

뒤센베리가 주장하듯, 의사들이 오진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문제가 악화된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서 잘못을 범했는지 절대 돌아보지 않는다.

마음 챙김과 감정 제어 같은 내면적 활동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편향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부담을 느낄 때 발생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집단과의 의미 있고 협동적인 접촉 또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혈전—세레나 윌리엄스가 출산으로 입원했을 때 생명을 위협했던 증상ㅡ은 혈액 세포가 젤라틴 공처럼 뭉친 덩어리로, 혈관을 지나가다 폐로 가는 혈류를 막을 수 있다.

혈전

움직이지 않는 혈액이 덩어리질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병원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은 위험을 키운다. 트라우마 역시 혈액의 화학 성분을 바꾸어 덩어리지기 쉽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키운다.

행동을 바꾸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설계다

어떤 강력한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선택설계 choice architecture‘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는 맥락이 우리가 선택하는 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물리적 환경의 설계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사람들이 노트북을 쓸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전기 콘센트 수를 줄이는 커피숍처럼), 어떤 절차의 설계 역시 우리의 행동을 형성할 수 있다.

핵심은 ‘실제로 이길 수 있는 경쟁에‘ 당근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프렌치프라이를 상대로 한 경쟁이 아니라 정말 배가 고프다는 상황과의 경쟁에 말이다.

학생들의 먹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비타민 A의 장점을 역설할 필요가 없다. 변한 것은 선택 설계였다.

존스 홉킨스 병원의 점검 목록도 일종의 선택 설계다. 설득이 아니라 설계를 통해 의사의 행동을 바꾸는 방식이다. 그것은 의사들에게 자신의 편향에 대해 더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끼어들뿐이다. 존스 홉킨스 점검 목록은 의사들로 하여금 의학적 결정에 개입되는 사유를 정돈하게 만든다.

어느 면에서 그것은 프리즘 같은 역할을 한다. 프리즘이 백색광선을 무지개의 일곱 색깔로 분리하는것처럼 전체적 판단을 리버스엔지니어링 reverse engineering 을 통해 구성 부분으로 해체하는 것이다.

점검 목록은 또 인간의 판단을 지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의사들이 잊어버릴 수도 있는 단계를 상기하기 위한 것이지만, 편향은 사실 잊어버리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판단하고 평가할 때, 어떤 가정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 가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의학 시나리오가 더 복잡해짐에 따라 점검 목록은 결정 과정의 대체물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안전 그물망으로 간주하는 편이 낫다.

가령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우수성은 그것을 토대로 그들이 훈련했던 자료의 우수성에 따라 결정된다. 그 자료는 어떤 집단에서는 더 많은 표본을 추출하고, 다른 집단에서는 더 적은 표본을 추출해 만든 것일수 있다.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사람을 고립시킬 수 있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학생들은 주류 학교 문화에 맞지 않았고, 흔히 무자비하게 놀림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해해줄, 자신들을 받아들이고 도와줄 교사를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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