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신령집단축고선淮新嶺摯萬縮高鮮, 중얼거리듯 여덟글자를 뱉어놓고 숨을 고른 그는 곧 또렷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다이아치 백 년 저주를 풀어낸 것을 진심으로 경하드리오."
"본래 후대의 누구도 해내기는커녕 짐작할 수조차 없었을 일이거늘 젊은 사람이 수월하게 풀었으니 이 기미히토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오." "우연입니다."
"이 기미히토가 평생 수련을 하고도 닿지 못한 일을 우연이라 여기면 이 사람의 삶을 너무 보잘것없이 만드는 것이오!"
이어 기미히토는 법장을 내려놓고 일어서 테이블 옆으로 한 걸음 비켜 물러서더니 급기야는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어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사방의 관심이 쏠릴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바라보는 이 하나 없었고 형연 또한 제지하지 않고 가볍게 합장하며 마주 고요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예, 막혔던 물꼬에 불과합니다. 터져서 새 물길을 만들면 다시 흐르다, 다시 막히면 어떻게든 터지고, 또다시 흐르고."
"물길이 되어 흘러가게 두었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흐르든 막히면 또 차고 넘치겠지요."
"사과를 받아 주시오. 이제는 두 나라가 은원을 풀고 함께 할 때도 되었잖소."
모자를 쓰고 탑차에서 내려 짐을 내리고 있는 남자, 좋지않은 화질이나마 크게 당겨서 보여주는 체격과 얼굴은 틀림없이 그녀가 아는 사람이었다.
요녕성의 철령과 신고산의 철령이 번갈아 올라오며 역사학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문구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전부 다 너였어. 어떻게."
오만 감정에 몸서리치던 은하수는급히 핸드폰을 꺼내 형연의 번호를 눌렀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답이 들려옴에도 아무 이유 없이 또, 또. 거듭 네다섯 번을 연달아 전화를 걸었던 그녀는 팽개치듯 핸드폰을 내려놓고 양팔에 머리를 묻었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왜 네가." 속았다는 배신감같은 것이 아니었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궁금한 의구심도 아니었다.
그만한 범죄들을 저지르고 잠적해 버렸다는 걱정, 당분간 보지 못할거라고 말하던 목소리, 거기서 오던 이상한 불안감.
머리를 팔에 묻은 채 쥐어뜯던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뭐라도 해야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뭐라도 있을 거야.
"저를 납치한 그 납치범은 이 나라 교육을 책임지는 그 어느 교육자보다도, 이 나라 역사를 탐구하는 어느 학자보다도, 애국과 조국의 번영을 외치는 그 어느 정치인보다도! 진실되이 이 나라를 걱정하고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야 이 개자식아! 이 미친놈아!" 음식 그릇이 아무렇게나 엎어진 가운데 일어선 은하수의 입에서는 욕설이 흘러나왔지만 문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자와 경찰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예, 예?" "지금 막, 야스쿠니 신사에 불을 지르려는 참입니다."
메가폰 소리가 깨울 때까지,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듯 그는 과거 일본 전쟁의 상징 아래에서 무의식의 표면에 그저 부유하고 있었다.
"제 이름은 이형연. 한국인입니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상황을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는 방송국들이나 경찰의 비상 데스크를 당연하게 내놓은 극렬 테러리스트라는 예상과 달리 과거 일본의 침략을 꾸짖는 이야기나, 반성을 촉구하는 등의 강경한 어조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옛날이야기들. 조선 철령의 이야기, 다이이치의 이야기, 왜덕산이나 코 무덤이총의 이야기 등.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편히 걸터앉은 채로 흥미롭게 짜낸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었다.
그간의 이야기에 더해 한국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선동하던 관동대지진의 이야기나, 여러 다른 풍수와 미신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이상한 이야기지요?" 형연은 웃었다.
"말 몇 마디, 글자 몇 개로 실제 있었던 일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그 때문에 의식이 바뀌고. 믿기 어렵겠지만 여러분 조국은 그렇게 한국을 지배했습니다. 잔재, 일제강점기의 잔재. 아마 잔재라는 말을 한국보다 많이 쓰는 나라는 세계에 또 없을 거예요."
잠시 말을 멈춘 형연의 눈길이 흘깃 야스쿠니의 전경을 훑었다. 전쟁에 나가 죽은 말, 개, 하다못해 비둘기까지 동상으로 만들어져 늘어선 침략 전쟁의 기념. 그리고 거기 아무렇지도 않게 선량한 소원을 비는 쪽지들이 붙은 에마라는 이름의 목판.
전범을 기리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위에 덧씌워지는 초상들이 있었다. 철령의 저주를 펼치는 다이이치, 조선사를 써 내려가는 이케다, 관동의 조선인들을 학살하라 외치는 승려들, 왜덕산을 파헤치는 이케마츠. 그것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정신과 의식의 세계에서 한국을 찢고 부수려는 전쟁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었다.
"이웃한 두 나라의 역사에 전쟁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많은 일을 겪고도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한국에 일본은 끊임없이 저주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반드시 함께 나아가야만 하는 이 시대에."
형연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것은 한국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겪어도 줄곧 잊고, 용서한 적도 없으면서 스스로 용서했다 믿고,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당하지 않은 척 체면치레를 하며 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온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내가 야스쿠니를 불태우러온 까닭입니다. 일방향으로만 흐르는 두 나라의 관계가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정신과 의식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국이 다만 비겁하여 당하고만 있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고자 나는 이곳에 왔습니다."
"일본이 이 광경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의 나라에 내리는 저주입니다."
툭. 손을 떠난 초가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질끈 눈을 감아버린 형연은 한마디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한 점 아쉬움이 없었을까? 물어오던 다소 촉촉했던 목소리.
감로사 우거진 나무 사이로 내민 얼굴. 그 말을 해 오던 목소리도, 순간의 감정도, 그 감정을 갖도록 살아온 삶도, 나아가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본질의 모든 것도 온전히 떠올렸다. 이렇게, 영원토록 기억 속에 남아 있잖아. 그때 그는 그렇게 답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불길은 오직 형연의 주위만을 일렁이며 야스쿠니의 목조에 옮겨붙지 않은 채 고요하게 춤을 추었다. 불꽃 속 가부좌를 튼 그림자는 당당하게 등을 곧추세운 채 미동도 없었고 지켜보던 모두는 어느순간 움직임을 멈춘 채 굳어있었다.
어째서. 야스쿠니를 불태우지 않고 스스로를 불태운 이유가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민손을 거두지 않은 한국을 기억하라는 것일까. 그 양심의 빚을 기억하고 살아가라는 이 저주일까. 정신나간 테러리스트의 소행일까, 소신공양燒身供養 으로 화해를 기원하는 공덕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저 야스쿠니의 방화에 실패한 것뿐일까.
수많은 추측이 겹쳐가는 가운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본인은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수사나 추리의 결말도 논리적 귀결도 아닌 그저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었다.
말로만 수없이 회자되던 용서라는 단어, 나아가 화해라는 단어. 이총, 왜덕산, 관동대지진, 야스쿠니, 그런 거북하고 괴로운 키워드들이 모여 기울어진 저울의 반대편에 혼자 조용히 불타오르던 형연의 모습이 올라 있었다.
마치 모든 은원을 사그라 트리듯, 세상에 흩뿌려진 저주와 귀신을 한데 모아 불태워 버리듯, 모든 것이 불로 정화된 정토를 거기 비추어내듯.
야스쿠니에서 불타오르던 한 사람의 모습은 그렇게 세상에 새겨졌다.
나는 이렇게 태어난 사람인가보다. 누군가,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인가보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나라는 사람이 살아간 흔적을 더 남기고 싶다. 너와 함께 있었던 증거를 조금 더 남기고 싶다.
"야! 나랑 친구하자 - !" 메아리가 울릴리 없는 곳에서 메아리가 울리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 사이사이 그녀를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이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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