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100자평] 자유론

북플에서 3년 전에 읽었다고 알려줬고 100자평을 간략히 남겨놓긴 했는데, 따로 밑줄을 긋는다거나 리뷰 글을 남겨 놓지 않아서 그런지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었었다는 기억만 있을뿐 실질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서 내 자신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차라리 이럴거면 이 책을 아예 안 보고 이 책 볼 시간에 다른 의미있는걸 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반성하게 된다.

이렇기에 어떤 책이든 읽으면서 특별히 마음에 와닿거나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밑줄을 그어 놓거나 다 읽은 후에 내용을 상기시킬 수 있는 리뷰를 남겨 놓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시간이 지나고 그 책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들을 다시 봤을 때 기억이 떠오르면서 내용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것 같다.
재작년 말쯤부터 북플을 시작하면서 밑줄 긋기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리뷰 쓰는 거는 이게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인듯 하다. 물론 나도 리뷰를 아예 안쓰는 건 아니지만, 리뷰를 쓰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한 작업만은 아니다. 시간도 적지 않게 걸리고 생각도 해야 하기에 머리도 써야하고.. 아무튼 북플에 리뷰 잘 쓰시는 분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리뷰 잘 써주시는 분들 리스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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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박 2024-01-05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대도 무척 잘 쓰시던데요~~님이 쓰신 글을 보며 전 자책을 하게 된답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05 17:11   좋아요 0 | URL
아 과찬이십니다 저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고자 애쓸 따름입니다. 이 바닥(?)에 글잘쓰시는 분들이 부지기수라 저도 많이 보고 배우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 스스로 자책할 때도 많은걸요ㅠ 그래도 힘이 되는 좋은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럭셔리박 2024-01-05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바닥에 글 잘 쓰시는 분들 너무 많더라구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05 17:36   좋아요 0 | URL
예 저도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다른 분들이 쓰신 글들을 보고 배우면서 어떤 내공같은 것도 쌓이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ㅎㅎ
 

부득이하게 일부만 인용하였지만, 작품의 해설을 통해 좀 더 깊이있는 이해와 감상을 할 수 있었다.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를 통해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를 넘어서 좀더 다양한 감정들을 느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에 작가 인터뷰도 따로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님이 표현하고자 했던 의미와 그 뒤에 숨어 있던 생각들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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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또다른 작가님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이 우붓이라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관광지인데 여행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 아셨던 분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몰랐던 곳이라 새롭고 이국적인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가 승규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해왔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나‘에게 살인혐의를 씌우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비극적인 것은 ‘나‘의 엄마 역시 이 의심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엄마는 아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기기 위해 아들이 그동안 부당하게 당했던 고통마저 부정하고 만다.

결국 ‘나‘에게 승규 죽음의 책임을 물으려는 쪽도, 반대로 그 책임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쪽도, 모두 승규의 죽음이 아닌 ‘나‘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않는 ‘나‘의 진실이란 무엇일까.

곧, 승규의 폭력은 ‘게임‘의 형식을 띠고 있음으로써
‘나‘에게 신체적 고통을 줄 뿐 아니라, 정신적인 굴종도 요구하였다.

같은 오답이라도 결과는 달랐다. 관성에서 벗어난 ‘나‘는 그 전과 똑같이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애도(mourning)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을 일컫는다.

‘성공적인‘ 애도란 상실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실감의 비애 속에 함몰되지 않고 남은 삶을 지속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죽은 이와의 분리는 공유했던 기억을 내면화하고, 죽은 이를 향했던 사랑의 에너지를 거두어 새로운 대상에 쏟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수상작가 모두가 자기 내면의 질문을 무형으로 조각하기 위해 전심을 갈아넣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소설들은 질문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앞장서서 너무 많이 이야기하려고 하면 세계가 오히려 닫혀버리는 것 같아요.

자신의 안으로 침잠하면 절망과 죄책감,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기 때문에 애써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거죠.

시의적절하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버리거나, 퇴색해버린다는 의미도 되잖아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문제와 교묘하게 얽히고, 많은 경우 같은 문제가 더 진화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어요.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어쩌면 늘 필요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소설의 얼개를 대부분 잡아두고 쓰기 시작하는데, 쓰면서 상당히 많이 바뀌곤 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끝날 때도 있고요.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쉽게 어울리고 쉽게 헤어졌다. 지금처럼 남을 의식할 필요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우붓에서 이런 게스트 하우스를 찾는 사람들ㅡ한창 나이의 백패커들과 돈을 아껴야 하는 장기 여행자들ㅡ은 여간해선 싱글룸에 묵지 않는다.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이런저런 단체들을 옮겨가며 일하던 시절 나는 현실이 갑갑할 때마다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끊었다.

애나 패서디나는 이제 막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어가고 있는 요가계의 구루였다. 그녀가 창시한 패서디나 요가는 한국에도 마니아가 많았다.

패서디나 요가의 근간을 이루는 수련은 몸으로 하는 명상, 즉 움직임을 동반한 동적 명상 프로그램이었다. 빗소리, 파도소리, 폭포 소리 등 자연의 다양한 물소리에 반응해 즉흥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내 안의 숨은 충동을 발견하고, 나아가 단체 명상을 통해 타인의 움직임까지 사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수련의 목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닌 마음가짐이다.

인종차별주의자. 아마 내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을 것이다. 정확히 그 단어는 아니어도, 겉으로는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시아 국가에 발도 들이지 않는 애나 패서디나의 위선에 대해 한 번쯤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내는 것은 그 시절 현오와 나 사이에 통용된 은밀한 놀이였다. 우리는 습관처럼 그들을 의심하고 분류하고 비판했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옷, 음악, 책, 가구, 미술, 요리, 영화, 스포츠, 모든 것이 판단 대상이 되었다.

미술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서적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는 현오는 다른 면에서는 진보적이고 균형잡힌 사람이었지만 미술에 대한 취향만큼은 은근히 보수적이었다.

구매자의 취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도 작품이 주류 미술사의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시장의 흐름을 의식하는 기미를 보이면 내심 질색했다.

자세히 보면 그 또한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오는 점점 ‘시장‘이 되어가는 현대미술판을 못마땅해했고 업계가 전반적으로 품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런 현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곧 여러 사안에 있어 그와 뜻을 같이 하기에 이르렀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뒤섞는 건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작가가 자신감이 없을 때 쓰는 마지막 카드라고요.

요즘 같은 시대에 잡식문화를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세속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창조성을 생계와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삶. 그런 삶이 세상에 그렇듯 흔하다는 걸 나는 현오와 만나며 알게 되었다. 우리 같은 사실혼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이는 사람이 한국에 그렇게 많다는 것도.

현오의 친구들은 언제나 예술을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고, 정상가족 형태의 평범한 삶이 부럽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우습게 여겼다. 그들에게 결혼은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이벤트였다.

오 반장이 어떤 부류인지 알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라는 작은 사회에서 어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사회에서 낙오되어 물가 싸고 춥지 않은 나라를 떠돌고 있을 뿐인, 여행이 곧 삶이 되어버린 중년 남자. 여행하던 시절 숱하게 봐온 스테레오타입이었다.

현오의 깍듯한 때도는 예의나 존중의 표현이라기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슬며시 밀어내는 기교에 더 가까웠다.

세 사람은 적극적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음식값을 계산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에 가는 등 노골적으로 딴청을 피웠다. 나는 머지않아 그것이 그들의 오랜 생존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스쿠터를 빌리고 기름을 채워 나를 먼 곳까지 데려왔으니 밥값 정도는 내가 감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우리가 그날 방문한 장소의 정확한 명칭은 ‘낀따마니‘였다. 반세기 전에 폭발해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는 휴화산과 거대한 칼데라호가 있는 곳이었다.

"루왁도 다른 커피처럼 아라비카가 있고 로부스타가 있을 거 아녜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며 말했다. 또다시 말이 말을 낳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약속들이 꼬리를 물었다.

문명에 염증을 느낀 고갱이 타히티의 원시적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듯, 그들 역시 자신을 문명인의 위치에 두고 발리의 원시성을 예찬하고 있었다.

"어려울게 뭐 있어요. 자기가 봐서 좋으면 그만이지."

발리의 풍경과 동물 따위를 그린 유화 그림을 파는 가게였는데 캔버스가 하나같이 손바닥만 했다. 여행자들이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동적 명상은 장소가 실내일 경우 조명을 모두 끄고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 환경이라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패서디나 요가의 동적 명상이 갖는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이 수련의 목적은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확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단체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움직임을 사심없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기존에 배운 요가 동작은 잊으세요.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흘러갑니다.

내 발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보세요. 물의 에너지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물살의 흐름을 온 몸으로 의식합니다.

"우리는 동물입니다!"

시도하세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 내는 것은 여전히 우리만의 은밀한 놀이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이제 일시적인 위안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지막 작품은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슈에 대한 식상한 오마주였지만 편집이 날렵하고 출연진이 놀랄 만큼 매력적이어서 보는 내내 눈을 떼기 어려웠다.

여자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내 인생의 작은 모험정도로 치부해왔던 그 시간이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 축소된, 작은 모험의 전주곡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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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일어나! 어서 일어나라니까!˝

인상이 선하다고 해서 함부로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는 p.61에 밑줄 친 말이 특별히 와닿게 느껴졌다. 쉽게 말해 겉으론 착한척 잘해주는 척 하면서 속으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뭐 그런거다. 이 소설 속 캐릭터가 그런 캐릭터였는데 비단 소설 속 캐릭터만의 얘기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것은 우리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고 지금도 현재진행중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람의 본성자체가 그렇게 이루어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나 자신도 그렇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겉 다르고 속 다른 부분들이 어느정도씩은 있기 마련이다.

뭐 이러한 것에 씁쓸함을 느끼고 기분나빠하기보다는, 그냥 사람이라는게 원래 다 그렇고 그런 것들이다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 어떤걸 기대하다 보면 실망도 더 큰 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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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1-04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사람이란 복잡한 모순적 존재...잘 읽고 갑니다 오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04 12:24   좋아요 1 | URL
예 참 알다가도 모르는게 사람이고 사람일인듯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서곡님도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꼬꼬닭 2024-01-04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씁쓸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가 봅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1-04 14:18   좋아요 0 | URL
예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겉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행동이 따뜻하지 않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사람은 정말 그 마음이나 생각 안에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온전히 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루이즈는 잘 정리된 집 안에 있는 동안 편안한 느낌을...

시간 참 빠르다. 이거 읽은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한데 벌써 1년 전이라니..

p.31에 밑줄 친 문장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인상적이다.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면 도망가고, 피하려고 하면 다가온다는 말..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부분이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본질적인 의미만큼은 너무나도 구구절절이 공감된다. 이 문장을 약간 달리 표현해보자면 ‘내가 욕망하는 것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고, 내가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 다가온다‘ 정도로 풀어봐도 될 듯 하다.

1년전 이 소설을 읽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등장인물들 간에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복수심에 불타올라 차마 말하기 힘든 비극들이 일어나고 이것들을 다시 바로잡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 등 갖가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째 이 소설 속 인간사와 현실 사회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닌 듯 하다.

사악한 인간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인간의 본성 혹은 본능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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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나오는 이야기(애도의 방식)에선 동주라는 사람이 승규라는 사람한테 이른바 학폭을 당하다가 본의아니게 발생한 사고(?)로 인해 학폭 피해자인 동주가 겪게 되는 각종 일들과 그에따른 심리 변화들이 서술되어 있다.

요 근래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학교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의 내면에 있는 심리 변화를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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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나온 이야기(너머의 세계)에선 한모라는 중학생과 연수라는 수학선생님이 나오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한모와 한모의 어머니가 선생님을 너무 괴롭히는 장면들이 나와서 요 근래 있었던 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이 구구절절이 느껴졌다. 선생님을 장난감 다루듯 희롱하는 학생인 한모와 그런 한모에게 선생님이 뭐라 했다는 이유하나로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윽박지르는 한모의 엄마를 보면서 참 이게 뭔가 싶었다. 심지어 독자인 나는 당사자가 아님에도 괜히 선생님 입장에서 한모라는 캐릭터에 대한 증오심마저 들었다. 이와 더불어 선생님인 연수가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위로는 커녕 핀잔을 듣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분노가 치밀었다. ‘과연 이게 맞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문제는 이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이 실제로 학생 인권이나 교권과 관련된 뉴스 같은 데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소설을 쓴 작가도 이런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써놓진 않았지만 마치 독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부탁한다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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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나온 이야기(문장의 무게)는 이 작품집의 수상작가인 안보윤 작가님의 수상소감을 약간의 비유적인 표현을 곁들여 쓴 것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굉장히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수상소감이었다.

각자의 이유로 소란한 사람들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늘을 그렇게 잡수셨는데 왜 아직도 인간이 덜 됐을까.

마늘 까기에 몰두한 할머니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는다.

5백 원짜리 동전은 내 주머니에 넣는다. 이건 훔친 것이 아니라 버려진 것.

승규는 지나던 길에 발끝에 걸린 돌멩이를 차내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나를 후려쳤다.

나는 늘 소란의 중심에 있었다.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멸시하느라 소란해진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건 지겨운 일이었다.

승규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휘휘 걸어 자리를 벗어났다.
소란에서 멀어지기 위해 승규를 흉내 냈다.

뺨을 맞는 일. 그게 특별히 부끄럽진 않았다. 뺨이 아니라도 나는 어디든 늘 맞았으니까. 내가 죽도록 부끄러웠던 건 나의 관성이었다.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이, 오로지 뺨을 맞기 위해 발설되는 나의 대답이 죽을만치 부끄러웠다.
내가 답을 하는순간 게임이 성립됐다. 승규와 나의 수직적 위계가 거기 있었다.

말하지 마. 그만해. 나는 그 말을엄마와 변호사에게서 제일 많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중에도 그들은 내팔죽지를 꽉 눌러잡고 말했다. 네게 불리할 수 있어. 말하지 마.

소란은 소문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소문을 불신하고 누군가는 소문을 맹신했다.

매일매일이 소란했다.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문득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뭐니.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다 보니 도무지 끝이 나질 않는 거야.

나는 진심을 담아말한다. 알 리가 없다. 이미 으깨진 것을 기어코 한 번 더 으깨놓는 사람의 마음 같은 건.

사람이 잘못 알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뭔 대수라고,

그건 대수로운 일이다. 사람에 대한 말은 어떤 것이든 다 대수롭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다. 진심이야.

나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를 위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안쪽과 바깥 쪽, 앞문과 뒷문, 훈육과 학대.

손쉽게 구분되는 것 같지만 기준점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청소 일로 연수가 받는 돈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러나 누구와도 부딪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연수는 자신에게 당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것은 재물의 형태로 어떤 것은 말의 형태로 떠올랐다.

연수를 제외한 사람들이 임의로 산정한 금액과 연수만이 동의하지 못한 말들. 잃어버린 개를 찾기 위해 지불되는 사례금 50만 원과 학부모에게 머리채를 잡힌 교사에게 지불되는 위로금 50만원.

연수가 말했다.
자신에게 당도한 모든 순간에 연수는 그렇게 답변해왔다. 난 몰라요. 난 못 봤어요. 나는 정말 그런 적 없어요.

처음엔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연수는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않아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작은 현판이 붙은 교실을 떠올릴 때마다 구토와 어지럼증이 솟는다는 걸,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호흡이 가빠진다는 걸, 교탁 앞에서면 시야가 급격히 졸아들면서 머릿속에 암흑이 찾아온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수가 아무리 애를 써도 들키는 것이 있었다.

중학생이 다 그렇죠. 관심받고 싶어 하고 미숙하고 제멋대로고. 관심받고 싶어 하는 미숙한 한모가 연수에게 한 일은 그저 문을 닫는 것이었다.

스트레스 받을 땐 단걸 먹어줘야 돼요. 선생님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 애들은 그게 재밌어서 더 짓궂게 굴거든요.

아무것도 눈치챌 필요가 없었다. 연수는 그게 좋았다.

한모가 몸을 밀어붙여 올때의 불쾌감을 참는 것과 교실에서 추방당하는 모멸감을 참는 것 중어느 쪽이 그나마 견딜 만할까. 연수는 진지하게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연수는 모든 게 다 지겹고 피로해 견딜수가 없었다. 연수는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 단순한 일상속에 있고 싶었다. 그 당연한 일이 연수에게는 왜 그렇게 힘들었나.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

자음과 모음을 낱낱이 풀어 손에 쥐고 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석으로 되어 어디든 착착 붙던 한글 놀이 자석 세트 였는데,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손안에서 조몰락대던 그 글자들이 언제든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요.

동시에 그때 이미 알게된 것도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가게 될 글자들의 세계가 얼마나 입체적이고 선명한지에 대해서요.

한글 남자들을 연이어 붙이면 글자가 되고, 그 글자들을 소리 내 읽으면 세계가 시작됩니다.

말과 소리를 수줍게 싸서 누군가에게 건네면 관계가 시작되고, 주렁주렁 얽힌 무수한 타래를 박제시키면 역사가 됩니다. 글자를 몇 개 조합하는 것만으로 와락 일어서는 세계란 얼마나 매혹적인지요.

그러나 그세계는 끈질기게 이어 붙이지 않으면 순식간에 붕괴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멋대로 기괴해지고 손쉽게 부정당하고 누군가를 틀림없이 상처 입힙니다.

어쩌자고 이런 무서운 것을, 어린 시절엔 굴리며 놀수 있었을까요. 입에 넣고 우물거리거나 냉장고 따위에 철썩 붙여둘 수 있었던 걸까요.

낱자를 더듬어 붙이던 어린 시절처럼 저는 여전히 글자들을 골라내고 있습니다. 활자를 조판하듯 백지 위에 하나하나 조심스레 올립니다.

어떤 글자들은 몰래 손바닥에 써서 삼켜버리기도 하고, 어떤 글자들은 담벼락에 휘갈긴 뒤 도망치기도 합니다. 누군가 읽어버릴까봐, 혹은 아무도 읽지 않을까 봐 늘 두려워하면서요. 수상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그 글자들의 무게를 떠올렸습니다.

정확히는 글자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소설 속 세계의 무게에 대해서입니다.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쌓아올린 세계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계속 고민해보겠습니다.

아이는 쏟아지는 질문들과 상반된 요구 속에 놓이게 되었다. 엄마와 변호사는 이렇게 경고했다. "말하지마. 그만해.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들도 그랬다. "네게 불리할 수 있어. 말하지 마."

그러나 죽은 아이의 엄마는 불쑥불쑥 찾아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요구를 했다.
"진실을 말해줘." 이 소란의 중심에 있는 아이가 바로  <애도의 방식>의 주인공 나(=동주)‘이다.

소란하다. 나는 소란한 것을 좋아하고 소란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이미 소란한 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 소란해지기 시작한 곳에서는 대부분 내가 그 중심에 있다.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멸시하느라 소란해진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건 지겹다. 나는 소란한 곳이 좋다. 타인에 의해 한껏 소란해진 상태라면 더더욱 좋다.

그 ‘사건‘ 이후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자신을 따라다니는 소문과 억측에 시달려야 했다.

종종 찾아오는 죽은 승규의 엄마는 ‘나‘를 둘러싼 소문이 잦아들 틈을 주지 않았다. 승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를 소란의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나‘는 마을을 떠나려 했으나, 먼 여정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의 작은 찻집에 머물게 된다. 부산한 대합실에 ‘나‘가 누구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않을 만큼의 소란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나‘의 진실을 억압하고 있는 이가 승규 엄마뿐 아니라, 엄마와 변호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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