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 승규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해왔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나‘에게 살인혐의를 씌우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비극적인 것은 ‘나‘의 엄마 역시 이 의심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엄마는 아들에게 씌워진 혐의를 벗기기 위해 아들이 그동안 부당하게 당했던 고통마저 부정하고 만다.
결국 ‘나‘에게 승규 죽음의 책임을 물으려는 쪽도, 반대로 그 책임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쪽도, 모두 승규의 죽음이 아닌 ‘나‘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 아무도 들으려 하지않는 ‘나‘의 진실이란 무엇일까.
곧, 승규의 폭력은 ‘게임‘의 형식을 띠고 있음으로써 ‘나‘에게 신체적 고통을 줄 뿐 아니라, 정신적인 굴종도 요구하였다.
같은 오답이라도 결과는 달랐다. 관성에서 벗어난 ‘나‘는 그 전과 똑같이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애도(mourning)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을 일컫는다.
‘성공적인‘ 애도란 상실한 대상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실감의 비애 속에 함몰되지 않고 남은 삶을 지속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죽은 이와의 분리는 공유했던 기억을 내면화하고, 죽은 이를 향했던 사랑의 에너지를 거두어 새로운 대상에 쏟음으로써 가능해진다.
수상작가 모두가 자기 내면의 질문을 무형으로 조각하기 위해 전심을 갈아넣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소설들은 질문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앞장서서 너무 많이 이야기하려고 하면 세계가 오히려 닫혀버리는 것 같아요.
자신의 안으로 침잠하면 절망과 죄책감,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기 때문에 애써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거죠.
시의적절하다는 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버리거나, 퇴색해버린다는 의미도 되잖아요.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면 또 다른 문제와 교묘하게 얽히고, 많은 경우 같은 문제가 더 진화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어요.
지금 필요한 이야기는 어쩌면 늘 필요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소설의 얼개를 대부분 잡아두고 쓰기 시작하는데, 쓰면서 상당히 많이 바뀌곤 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으로 끝날 때도 있고요.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쉽게 어울리고 쉽게 헤어졌다. 지금처럼 남을 의식할 필요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우붓에서 이런 게스트 하우스를 찾는 사람들ㅡ한창 나이의 백패커들과 돈을 아껴야 하는 장기 여행자들ㅡ은 여간해선 싱글룸에 묵지 않는다.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이런저런 단체들을 옮겨가며 일하던 시절 나는 현실이 갑갑할 때마다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끊었다.
애나 패서디나는 이제 막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어가고 있는 요가계의 구루였다. 그녀가 창시한 패서디나 요가는 한국에도 마니아가 많았다.
패서디나 요가의 근간을 이루는 수련은 몸으로 하는 명상, 즉 움직임을 동반한 동적 명상 프로그램이었다. 빗소리, 파도소리, 폭포 소리 등 자연의 다양한 물소리에 반응해 즉흥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내 안의 숨은 충동을 발견하고, 나아가 단체 명상을 통해 타인의 움직임까지 사심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수련의 목적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 아마 내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을 것이다. 정확히 그 단어는 아니어도, 겉으로는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정작 본인은 아시아 국가에 발도 들이지 않는 애나 패서디나의 위선에 대해 한 번쯤 이야기했을 것이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내는 것은 그 시절 현오와 나 사이에 통용된 은밀한 놀이였다. 우리는 습관처럼 그들을 의심하고 분류하고 비판했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옷, 음악, 책, 가구, 미술, 요리, 영화, 스포츠, 모든 것이 판단 대상이 되었다.
미술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서적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는 현오는 다른 면에서는 진보적이고 균형잡힌 사람이었지만 미술에 대한 취향만큼은 은근히 보수적이었다.
구매자의 취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도 작품이 주류 미술사의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시장의 흐름을 의식하는 기미를 보이면 내심 질색했다.
자세히 보면 그 또한 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현오는 점점 ‘시장‘이 되어가는 현대미술판을 못마땅해했고 업계가 전반적으로 품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런 현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곧 여러 사안에 있어 그와 뜻을 같이 하기에 이르렀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뒤섞는 건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작가가 자신감이 없을 때 쓰는 마지막 카드라고요.
요즘 같은 시대에 잡식문화를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요.
세속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창조성을 생계와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삶. 그런 삶이 세상에 그렇듯 흔하다는 걸 나는 현오와 만나며 알게 되었다. 우리 같은 사실혼 관계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이는 사람이 한국에 그렇게 많다는 것도.
현오의 친구들은 언제나 예술을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고, 정상가족 형태의 평범한 삶이 부럽다고 말하면서도 실은 우습게 여겼다. 그들에게 결혼은 세상에서 가장 시시한 이벤트였다.
오 반장이 어떤 부류인지 알 것 같았다. 게스트하우스라는 작은 사회에서 어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사회에서 낙오되어 물가 싸고 춥지 않은 나라를 떠돌고 있을 뿐인, 여행이 곧 삶이 되어버린 중년 남자. 여행하던 시절 숱하게 봐온 스테레오타입이었다.
현오의 깍듯한 때도는 예의나 존중의 표현이라기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을 슬며시 밀어내는 기교에 더 가까웠다.
세 사람은 적극적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음식값을 계산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에 가는 등 노골적으로 딴청을 피웠다. 나는 머지않아 그것이 그들의 오랜 생존 방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들이 스쿠터를 빌리고 기름을 채워 나를 먼 곳까지 데려왔으니 밥값 정도는 내가 감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우리가 그날 방문한 장소의 정확한 명칭은 ‘낀따마니‘였다. 반세기 전에 폭발해 아직도 김이 피어오르는 휴화산과 거대한 칼데라호가 있는 곳이었다.
"루왁도 다른 커피처럼 아라비카가 있고 로부스타가 있을 거 아녜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며 말했다. 또다시 말이 말을 낳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약속들이 꼬리를 물었다.
문명에 염증을 느낀 고갱이 타히티의 원시적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 했듯, 그들 역시 자신을 문명인의 위치에 두고 발리의 원시성을 예찬하고 있었다.
"어려울게 뭐 있어요. 자기가 봐서 좋으면 그만이지."
발리의 풍경과 동물 따위를 그린 유화 그림을 파는 가게였는데 캔버스가 하나같이 손바닥만 했다. 여행자들이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동적 명상은 장소가 실내일 경우 조명을 모두 끄고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 환경이라면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패서디나 요가의 동적 명상이 갖는 의의에 대해 설명했다. 이 수련의 목적은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확장을 경험하는 것이다.
단체 명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움직임을 사심없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이다.
기존에 배운 요가 동작은 잊으세요.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흘러갑니다.
내 발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보세요. 물의 에너지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물살의 흐름을 온 몸으로 의식합니다.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 내는 것은 여전히 우리만의 은밀한 놀이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이제 일시적인 위안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마지막 작품은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슈에 대한 식상한 오마주였지만 편집이 날렵하고 출연진이 놀랄 만큼 매력적이어서 보는 내내 눈을 떼기 어려웠다.
여자의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내 인생의 작은 모험정도로 치부해왔던 그 시간이 여자에게는 그보다 더 축소된, 작은 모험의 전주곡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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