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7,314,264개의 건축물이 있다. 2021년도 국토교통부 통계 자료다. 5천만 인구에 이 정도의 건물이 있으니, 80억 인구에 대비해 보면 전 세계에는 대략 11억 개의 건축물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다. - P5
이 한권의 책 속에 내가 건축을 공부하면서 감명받은 서른 개의 근현대 건축물을 모아 보았다.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은 건축물들이다. 이 건축물들을 통해 독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 - P6
지역별로 묶어 소개하면 독자들이 여행할 때 찾아가기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유럽, 북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지역별로 목차를 구성했다. - P6
건축물은 인간의 생각과 세상의 물질이 만나 만들어진 결정체다. 건축물은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할 때만 완성되기에 그 사회의 반영이자 단면이다. 건축물을 보면 당대 사람들이 세상을 읽는 관점, 물질을 다루는 기술 수준, 사회 경제 시스템, 인간을 향한 마음, 인간에 대한 이해, 꿈꾸는 이상향, 생존을 위한 몸부림 등이 보인다. 건축은 이렇듯 그 시대와 사회의 반영이다. 하지만 동시에 건축은 어느 한 사람이 상상해야만 시작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건축만큼 한 개인의 상상력이 중요한 일도 없다. 역사 속 대부분의 건축물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거래되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중 아주 드물게 남다른 영향력을 가진 건축물들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장 높은 건축물이 큰 의미로 다가오고,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것, 누군가에게는 가장 비싼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에게 큰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새로운 생각‘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라는 충격을 주는 건축물이다. - P7
벽, 창문, 지붕, 계단, 문 등은 만 년 전부터 있었던 인간의 발명품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주변 환경과 필요에 맞게 모양과 크기를 변형시켜 서로 붙이고 떨어뜨리고 배치하는 일이 건축 디자인이다. 건축가는 발명가다. - P8
새로운 생각이 들어간 건축물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크게는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기발한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재가 되기 위해 필요한 1퍼센트의 영감 말이다. - P8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이라는 책을 보면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그림에 그림자를 그려 넣고 원근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유가 관점의 전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신神‘ 중심의 사고를 했기에 그림자가 필요 없었는데, 인간을 실존적인 존재로 보면서부터 해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지는 그림자를 그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신분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다면 원근법이 나오면서부터 가까이 있는 사람은 크게, 멀리있는 사람은 작게, ‘사실‘에 근거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 중심의 중세를 벗어나 사람 중심의 시대가 되었음이 그림 하나로 설명된다. 그림 속 그림자나 원근법 같은 변화는 눈치채기도 어렵고 별것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 작은 변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엄청나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 P9
르네상스 시대에 최초로 그림자를 그린 마사초 Masaccio 의 그림, 바라보고 느끼는 대로 그린 세잔Paul Cézanne의 사과 그림, 2차원 평면에 4차원 시간의 영역을 포함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의 그림처럼 건축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만한 작품들을 모아 봤다. 이들의 공통점은 건축을 그저 멋있고 예쁜 것을 만드는 일로 생각하지 않고 각자가 실존적인 질문을 하고, 이를 고민하고 건축으로 답했다는 점이다. - P10
1931년은 산업 혁명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바뀐 세상이었다. 일자리를 찾아 많은 사람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면서 어느 때보다 많은 건축물이 필요해졌다. 19세기부터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백신 기술로 인구가 더 늘었다. 산업 혁명이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증기 기관차를 이용해 출퇴근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증기선을 이용해대서양을 며칠 만에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자동차와 비행기라는 새로운 교통수단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높은 곳도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밭일이 끝나면 집에 가서 잠을 자던 사람들이 도시에 살게 되면서 퇴근 후 가스등으로 밝혀진 거리를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기계가 만든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맞이했다. 사람을 감싸는 공간과 그 공간의 의미가 기계로 인해 바뀌고 있었다. 기계는 사람을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하는 도구였다. 이 시기에 스위스 태생의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라는 건축가는 ‘건축이 기계가 될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건축이 기계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 P18
건축은 야외 현장에서 제작되는 반면 기계는 공장에서 제작된다. 건축이 기계가 되려면 우선 공장에서 만들어진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기존의 건축 재료는 나무와 돌 같은 자연에서 구하는 재료였다. 벽돌이 그나마 조금 더 인공적인 가공이 들어간 재료였다. 나무나 돌 같은 전통적인 건축 재료들은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현장에서 깎고 쌓고 조립해야 하는 재료였다. 반면 철근은 공장의 뜨거운 용광로에서 나오는 인공 재료다. 시멘트 역시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재료다.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기계 같은 건축을 하려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철근이나 시멘트를 사용해야 했다. 시멘트가 물과 만나서 완성되는 콘크리트는 화학적인 변화를 통해 완성되는 재료다. 이 재료들은 이전과는 다른 과학적 건축 재료였다. - P18
철근과 콘크리트는 열에 의한 팽창 계수가 동일하다. 이 말은 수축과 팽창을 할 때 같은 비율로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는 것이다. 만약에 철근와 콘크리트의 열팽창 계수가 달랐다면 함께 사용할 경우 온도 변화에 따라 다르게 수축과 팽창을 하면서 부서졌을 것이다. 하지만 두 재료는 다행히 같은 열팽창 계수를 가지고 있어서 함께 사용해도 시멘트에 균열이 가지 않는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다. 덕분에 인류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높은 건축물을 빠르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철근 콘크리트는 과거 어느 재료 보다도 과학적 기술에 기반을 둔 건축 재료다. - P18
이러한 재료의 변화는 디자인의 변화를 가져온다. 철근 콘크리트로 벽을 만들 수도 있지만 르 코르뷔지에는 그보다 더 효율적인 콘크리트 기둥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둥식으로 건물을 만들면 철근 콘크리트의 양을 줄여 건축 비용을 낮출 수 있다. 서양은 전통적으로 돌이나 벽돌을 이용해서 벽을 구조체로 하는 건축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기둥 중심의 건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비로소 서양 건축은 벽이 주는 한계와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게 된 것이다. 기둥으로 건축해서 건물의 1층을 땅에서 띄운 것을 건축 용어로 ‘필로티pilotis‘ 구조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빌라 같은 다세대 주택의 1층에있는 주차장이 대부분 이런 식이다. - P19
기둥식 구조로 건물을 만들면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자유로운 평면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기둥만 남겨 두고 나머지 벽체는 구조와 상관없이 평면상에서 직선과 곡선 어떤 모양으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 P19
세 번째 특징은 자유롭게 건축 입면을 디자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콘크리트 기둥이 구조를 책임지면서 건축물의 입면 벽체는 지붕을 받쳐야 하는 구조의 부담이 없어졌다. 이제 입면 벽에 어떤 모양으로 구멍을 뚫어도 되었다. 건축 입면의 디자인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 P19
네 번째 특징은 자유로운 입면 설계가 가능해지니 가로로 긴 창을 뚫을 수 있다는 점이다. 벽이 지붕을 받치는 기존의 서양 건축은 벽에 창문을 가로로 길게 뚫으면 무너진다. 따라서 큰 창문을 내고 싶으면 세로로 길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지붕을 받쳐 준 덕분에 이제 벽에 창문을 가로로 길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바깥 경치를 파노라마 뷰로 즐길 수 있었다. 가로로 긴 창문은 실내에 빛을 더 많이 유입해서 더 밝은 방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 P20
마지막 다섯 번째 특징은 옥상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물을 빠르게 흘려서 땅으로 내려보내야 했다. 그렇다 보니 비가 오는 지역의 지붕은모두 기울어진 형태였다. 지붕이 기울어져 있으니 사람이 서 있을 수없었고, 그렇다 보니 옥상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콘크리트는 기울이지 않고 평평하게 만들어도 균열이 없거나 표면에 방수 처리를 하면 비가 새지 않는 재료다. 철근 콘크리트로 집을 짓자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고 그곳을 사람이 사용하는 정원으로 꾸밀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땅에 건축물을 앉히면 건물이 들어선 만큼 녹지가 줄어든다. 그런데 옥상 정원을 만들면 건물 때문에 녹지가 줄어들지 않아서 지구표면에서 녹지 면적의 총량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철근 콘크리트 기둥이 만드는 다섯 가지 특징인 필로티,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입면, 가로로 긴 창, 옥상 정원을 ‘근대 건축의 5원칙‘이라 부르고 이것을 르 코르뷔지에가 제창했다. 근대 건축의 5원칙은 한마디로 철근 콘크리트라는 새로운 재료가 만든 건축의 특징이다. 이는 건축을 기계로 보았고, 건축이 기계가 되도록 공장에서 생산되는 재료인 시멘트와 철근을 사용하면서 만들어진 특징이다. 이러한 근대 건축의 5원칙이 총결집된 결정체가 ‘빌라 사보아Villa Savoye‘다. - P20
르 코르뷔지에가 활동하던 20세기 전반은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의 상대성 이론이 전 세계를 강타한 시대다. 아인슈타인 이전에는 뉴턴Isaac Newton의 만유인력 법칙이 전 우주의 움직임을 설명하던 법칙이었는데, 상대성 이론은 만유인력 법칙을 오래된 중고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1915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역사상 가장 똑똑한 지성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가 만든 상대성이론은 태양계에서도 적용되고 우주 끝에서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상대성 이론으로 이제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전 우주의 법칙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통일장 이론"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는 하나의 법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다. - P21
건축계의 대표 지성인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계의 아인슈타인‘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전 세계 모든 건축을 해결할 수 있는 이론을 추구했다. 그것이 ‘근대건축의 원칙‘이다. 훗날 이러한 생각은 전 세계에 모두 비슷비슷한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뉴욕, 도쿄, 상하이, 런던, 방콕, 카이로, 바그다드, 나이로비에 지어지는 현대식 건축물은 모두 비슷한 모양과 형식을 가진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모두 비슷한 디자인으로 건축되는 스타일을 ‘국제주의 양식‘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는 건축의 다양성을 파괴하여 획일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가져온다. 사실 우주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주 어디서나 통하는 중력의 법칙으로 인해 우주전체의 행성은 모두 둥그런 형태를 띤다. 행성 디자인의 획일화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원리로 만들어지는 세상의 한계다. 물론 그 안에서 대기의 상태, 온도, 질량의 차이, 그에 따른 중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다양성에는 한계가 생긴다. 르 코르뷔지에가 만든 근대 건축의 5원칙도 다양성을 억누를 수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 사보아‘ 는 근대 건축의 5원칙이 적용된 것 외에도 많은 장점을 가진 훌륭한 디자인이다. - P22
‘빌라 사보아‘는 파리 외곽에 위치한다. 주변에 보이는 것은 거의 다 자연이어서 공원 한가운데 위치한 주택이라고 보면 된다. ‘빌라 사보아‘의 디자인에는 근대 건축의 5원칙이 모두 적용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주택은 지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디자인을 추구한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주택의 형태는 건축에서 가장 기본적인 직육면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건물의 색상은 모든 색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백색이다. 마치 아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흰색 캔버스처럼 자연속에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입면이 필로티 기둥 위에 떠 있다. 이 건물이 단순하게 근대 건축의 5원칙만 적용된 디자인이었다면 이렇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건축물에는 5원칙이 모여서 만든 또 다른 가치가 있다. - P23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한 가지밖에 없는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우의 숫자가 한 가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 P23
르 코르뷔지에하면 콘크리트 건물을 유행시켜 건축을 망가뜨린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분도 많다. 하지만 그 장소에 가서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그러한 삭막한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공간이 하도 다채롭고 새로워서 콘크리트로 공간의 교향곡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삭막한 국제주의 양식은 능력 없는 후배들이 무작정 따라 하다 보니 만들어진 것이지 르 코르뷔지에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재료의 혁신으로 새 시대를 연 건축을 했을 뿐 아니라, 공간 디자인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기존의 주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신을 이룬 건축가다. 그의 설계를 보면 그는 당대 사람의 사고방식과 다르게 요즘 시대 사람처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르 코르뷔지에가 이 시대를 열고 만든 사람이기때문일 것이다. 그는 진정한 선각자이자 개척자다. - P28
산업 혁명 이후 시대에 건축을 기계로 바라보았던 건축가가 디자인한 주택이 ‘빌라 사보아‘다. 르 코르뷔지에가 "집은 살기 위한 기계" 라고 말한 배경에는 20세기 초반에 팽배했던 과학과 기계 문명에 대한 무한한 긍정 사고가 깔려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산업화와 기계화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지금도 유전공학, 인공지능, 메타버스, 블록체인, NFT(대체 불가능 토큰) 같은 새로운 기술이나 개념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지만, 반대로 인간성 파괴와 자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 P29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기계 문명을 인류를 구원할 희망으로 바라보던 르 코르뷔지에와는 반대의 시각으로 건축을 행했던 건축가가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땅에 뿌리를 내린, 자연에 근거한 건축을 추구했다. 그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라는 미국 건축가다. ‘빌라사보아‘는 필로티 구조로 집을 땅에서 띄워공중에 지은 것이다. 르 코르뷔지에가 이상을 가지고 공중에 떠 있는 집을 짓는 벌과 같다면, 반대로 라이트는 땅속에 집을 짓는 개미에 비유할 수 있다. - P29
건축물의 구조체와 기계 설비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스타일을 하이테크 건축이라고 한다. 철골 구조체가 그대로 드러난 ‘에펠탑‘도 큰 의미에서는 하이테크 건축이라고 할 수 있겠다. - P32
미술이나 음악 같은 다른 예술 장르와 건축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 음악에서 하모니가 중요하듯 건축에서도 조화가 중요하다. 음악에서 리듬이 중요하듯 건축에서도 창문이나 기둥의 리듬감이 중요하다. 그림에서 색상과 비례가 중요하듯 건축에서도 색상과 비례가 중요하다. 하지만 건축에 하모니, 리듬, 비례가 없다고 해서 건축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러한 요소들이 건축의 필수 요소라고 할수는 없다. - P33
그렇다면 건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명제는 무엇일까? 바로 중력을 이겨야 한다는 점이다. 중력은 우주 어디에나 있는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주 어디에 가더라도 건축을 하려면 중력을 이겨야 한다. ‘건축‘ 이라는 단어의 한자는 ‘세울 건‘과 ‘쌓을 축‘이다. 건축은 말 그대로 세우고 쌓는 것이다. 기초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쌓고 세우는 일은 모두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다. 건축물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면 무너지고 쓸모없어진다. - P33
중력을 이기려는 노력은 무척 힘들다. 헬스장에서 무거운 기구를 사용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분은 잘 아실 거다. 따라서 우리가 의식을 하든 못 하든 건축물의 중력을 이기기 위한 노력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피라미드‘나 고딕 성당의 기둥이나 ‘판테온‘의 돔 지붕을 보면서 감동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중력을 이기고 꿋꿋이 서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 이전의 건축물들이 더 감동을 주는 것은건축물의 모습 자체에서 중력을 이기는 방법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피라미드‘의 돌이 쌓여 있는 모습은 ‘피라미드‘가 중력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 준다. ‘판테온‘의 돔 지붕은 로마식 콘크리트로 만든 돔이 어떻게 중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 P34
하지만 현대 건축물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중력을 이기는지 알 수가 없다. 100층이 넘는 ‘롯데월드타워‘는 엄청난 구조체지만 실제 중력을 이기는 철골 구조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은 모두 마감재에 가려서 안 보인다. ‘롯데월드타워‘에는 전기, 상하수도, 엘리베이터 같은 많은 기계 설비가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설비들도 다 가려지고 숨겨져 있다. 현대 건축에는 엄청난 기술이 담겨 있지만, 이런 본질적인 기능들이 모두 가려져 있어서 건축물이 원초적으로 전달하는 감동이 덜하다. 이러한 현대 건축의 흐름에 반기를 든 건축 양식이 바로 ‘하이테크‘ 건축이다. 하이테크 건축이란 말 그대로 높은 기술력을 보여 주는 건축이다. - P35
일반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면 우리는 그 기술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긴다. 핸드폰에 있던 키보드는 스마트폰이 발명되면서 화면 속으로 숨겼다가 필요할 때만 찾아서 사용한다. 이러한 디자인 전략의 대표는 아이폰이다. 스마트폰 초기에 삼성 갤럭시는 배터리를 분리할 수 있게 디자인했지만 아이폰은 충전이 불편해도 배터리를 내부에 숨겼다. 에너지원을 숨겨 아이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주지 않으려는 의지다. 지금은 갤럭시도 배터리를 분리하지 않고 숨겨 놓는다. 이렇듯 기술은 발전할수록 숨겨지게 마련인데 하이테크 건축에서는 반대로 이런 기술을 노출한다. 쉽게 말해 이 건물이 어떤 기둥으로 서 있는지, 어떤 상하수도 공조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지를 밖으로 노출해서 보여 준다. 그 원조가 되는 건축물이 지금 설명할 파리의 ‘퐁피두 센터‘다. 철골트러스 구조로 만들어진 이 건물은 모든 구조체가 노출되어 있다. 상수도관 파이프들은 녹색 페인트로 칠해져서 건축물의 뒷면에 모두 노출되어 있다. 또 공기를 순환시키는 공조 덕트들은 파란색으로, 전기선이 들어간 파이프들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 P35
구조와 설비를 외부로 노출한 디자인을 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전시공간인 ‘퐁피두 센터‘ 내부에 기둥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내부에 기둥같은 설비가 들어가면 추후 다양한 전시 공간을 기획할 때 제약이 된다. 그런 일을 피하기 위해 기둥과 에스컬레이터를 비롯한 각종 설비를 실내 공간에서 모두 건물 외부로 빼내는 식으로 설계했다. - P35
‘퐁피두센터‘가 하이테크 디자인의 원조라면, 하이테크 디자인의 조상은 바로 루이스 칸의 ‘리처드 의학연구소 Richard Medical Research Laboratories‘다. - P36
‘리처드 의학연구소‘의 특징은 각종 파이프, 덕트, 엘리베이터, 계단실 같은 설비 시설을 평면도 바깥으로 빼내는 방식으로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서비스를 받는 공간과 서비스를 하는 공간을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 낸 루이스 칸의 설계 방식이다. - P36
‘퐁피두 센터‘도 ‘리처드 의학연구소‘와 비슷하게 서비스 시설들을 모두 외부로 빼냈다. 이처럼 ‘퐁피두 센터‘가 ‘리처드 의학연구소‘와 비슷한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렌초 피아노가 루이스 칸의 사무실에서 2년간 실무를 익히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 P36
제자는 스승에게서 좋은 교훈을 얻고 자기 스타일대로 약간의 변형을 가했다. 다름 아닌 재료의 변화다. 루이스 칸은 콘크리트를 이용한 습식 공법을 사용했다면 렌초 피아노는 철을 이용한 건식 공법을 사용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 P37
습식 공법은 시멘트에 물을 넣고 섞어야 하는 콘크리트처럼 재료에 물을 사용하는 공법을 말한다. 콘크리트를 거푸집에 붓는 것 같은 과정은 현장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반대로 건식 공법은 물을 사용하지 않고 공장에서 제작한 것을 현장에서 조립만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조립식으로 만든 건물은 언제든지 철거하고 다른 곳에서 조립해 재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친환경을 생각하는 최근 기조에는 건식 공법이 더 알맞다. - P37
13세기 프랑스에서는 고딕 성당을 건축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크게 만들고 싶어 했다. 문제는 지붕을 받치고 있는 구조체인 벽에 창문을 크게 뚫으면 건축물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붕 하중의 일부를 밖으로 뽑아서 벽의 외부에 독립된 기둥을 만들었다. 이때 지붕과 기등을 연결하는 보가 ‘플라잉 버트레스 flying buttress‘다. 이름에 ‘플라잉‘이 들어간 이유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만 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플라잉 버트레스와 기둥은 건물 외부에 구조체가 복잡하게 노출된 형태로 보인다. 마치 구조체 트러스와 기둥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는 ‘퐁피두 센터‘ 입면과 비슷하다. - P40
건축은 역시 그 사회의 결정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 P42
고딕 양식인 ‘노트르담 대성당‘과 하이테크 양식인 ‘퐁피두 센터‘의 차이점은 재료 말고도 하나 더 있다. 이 차이는 재료의 물성 때문에 만들어진다. 돌로 만들어진 ‘노트르담 대성당‘은 압축력으로만 구조가 만들어졌다면 ‘퐁피두 센터‘는 당기는 힘인 인장력도 사용되었다. - P42
돌로 실내 공간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 발명해 낸 방식이 아치공법이다. 아치에서는 구조적으로 돌과 돌이 서로를 누르는 압축력만 존재한다. 그렇게 수천 년을 이어 왔다. - P42
19세기에 들어서 인간은 철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고 ‘에펠탑‘ 같은 철탑을 짓기 시작했다. 철은 당기는 힘에 잘 견디는재료다. 비로소 인간은 대형 건축에서 당기는 힘인 인장력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돌은 누르는 힘에는 잘 견디지만 당기는 힘에는 쉽게 깨지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돌이나 벽돌을 사용할 때는 인장력을 이용한 건축 구조가 불가능하다. - P42
오래전부터 인장력을 이용해서 건축을 하던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바로 유목민들이다. 유목민들은 텐트를 칠 때 끈을 이용한 인장력을 써서 기둥과 지붕을 지탱했다. 우리가 운동회를 할 때 치는 큰 그늘막 텐트도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천막을 덮고 끈으로 당겨서 지탱한다. 유목민이 건축 구조에 인장력을 사용했던 이유는 최소한의 가벼운 부재로 건축물을 세울 수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양이나 염소를 치며 집을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등산할 때 사용하는 텐트에 인장력이 사용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건축에서 인장력을 적절한 곳에 사용하면 건축부재의 양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대형 건축물에서는 끈으로 육중한 힘을 버틸 수 없으니 대신 강철봉이나 강철 케이블이 사용된다. - P43
부재 : 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여러 가지 재료 - P487
트러스(truss) 구조: 여러 개의 직선 부재를 삼각형 형태로 배열하고 그물 모양으로 짜서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 보통 교량이나 지붕 등을 지탱하는 데 사용된다. - P487
통일장 이론: 입자 물리학에서 기본 입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형태와 상호 관계를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장(field)의 이론이다. - P487
‘퐁피두 센터‘의 디자인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근대건축의 명제를 완전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 P43
건축물의 가치는 주변 땅의 기울기에 따라 더 강조되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퐁피두 센터‘ 앞 광장은 ‘퐁피두센터‘를 파리의 주요 랜드마크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 P46
(이오밍) 페이 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기하학을 잘 사용한다는 점이다. 고전 건축을 보면 서양에서는 기하학을 많이 이용한 반면, 동양에서는 기하학을 잘 이용하지 않았다. 벽을 사용하는 서양 건축에서는 벽 선으로 기하학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쉬웠다. 반면 동양 건축에서는 점적인 요소인 기둥을 주로 사용하여 내외부 공간의 경계가 모호했기에 기하학을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자세한 설명은 나의 다른 책 《공간이 만든 공간》을 살펴보면 좋겠다. - P51
워싱턴 DC는 도시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계획도시인데, 격자형 도로망과 방사형 도로망이 합쳐진 도로망 구조를 갖고 있다. 격자형 도로망은 뉴욕을 비롯해 상업 도시에 주로 보이는 물류에 최적화된 도로망이다. 그리고 방사형 도로망은 파리를 비롯한 정치적인 도시에서 주로 보인다. 방사형으로 도로망이 만들어지면 중심점이 생겨나고 그곳을 차지하는 사람은 권력과 상징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방사형 도로망의 중심점에 위치한 ‘개선문‘이 대표적인 사례다. 워싱턴의 경우 여러 개의 방사형 교차점 중 하나에 국회의사당이 위치한다. 워싱턴에는 격자형과 방사형 도로망이 섞여 있기 때문에 블록 모양도 직사각형과 삼각형이 섞여 있다. - P52
입면에 대각선 보를 놓으면 지진이나 바람같이 옆에서 오는 횡압력을 견디기 좋은 구조가 된다. 또 고층 건물 내부에 기둥을 줄일 수 있다. - P56
지금은 중동의 두바이에 초고층 건물이 줄지어 들어섰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세계적인 마천루의 도시로 홍콩과 뉴욕이 양강 구도를 이루었다. 19세기 대표 제국인 영국은 당시 자신들의 조차지였던 홍콩에, 20세기 대표 제국인 미국은 자국의 경제 수도인 뉴욕에 현란한 마천루를 지어 경쟁했다. - P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