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 발생 이후 과학수사의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렇다. 우선 사건을 접수한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범죄현장에서 얻은 증거물에 대한 감정을 의뢰한다. 경찰은 이 감정 결과를 토대로 수사한 뒤 용의자에게 혐의가 있다고 판단할 경우 검찰에 기소의견을 보낸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되고나면 검찰은 경찰의 수사기록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기록을 토대로 수사해 법원에 기소할지 여부를 판단한다. - P89
그런데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후에 간혹 잃어버린 퍼즐이 한두개 씩 보이곤 한다. (중략) 이럴 때 검사는 대검찰청 과학수사부를 찾는다. 과학수사부에서는 증거물을 더 면밀히 촘촘히 살펴보며 수사의 마지막 퍼즐을 채운다. - P89
DNA에는 여전히 그 주인에 대한 아주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김종식 연구사는 그중에서 ‘메틸화 패턴‘에 집중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심장, 뇌, 근육등 조직은 모두 하나의 DNA에서 온 정보를 가지고 만들어진다. 같은 DNA를 보고 다른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내는 비법이 바로 DNA 메틸화다. - P90
DNA 메틸화는 DNA 속 사이토신 염기에 메틸기를 붙여 그부분의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진핵세포가유전자 발현을 조절할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다. DNA 메틸화패턴은 같은 사람의 체내에서도 조직에 따라 달리 분포한다. 나이에 따라 메틸화 패턴이 달라지기도 한다. 김종식 연구사는 "사람의 조직마다, 나이마다 달라지는 DNA의 메틸화 패턴을 찾고, 이를 토대로 수학 모델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 P90
그 결과 탄생한 DNA 감식 기술로는 살인을 입증할 시신이발견되지 않은 경우에도 피해자의 사망 사실을 간접적으로증명할 수 있다. 범행도구에 묻어있는 아주 작은 조직의 DNA감정을 통해 해당 조직이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 확인하는 식이다. 만약 뇌, 심장 등 주요 장기의 조직임이 판정된다면 대상자가 사망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DNA의 메틸화 패턴을 통해 조직 주인의 나이도 ±5년의 오차로 맞출 수 있다. - P90
김종식 연구사가 DNA 메틸화 패턴 연구를 시작한 건 작은 증거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얻기 어려워 버려지는 DNA가 아까웠습니다. 어떻게든 조금 더 쓸 수 없을까 고민했던 거죠." 담백한 그의 말에서 과학수사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 P90
타액, 피, 질액, 정액 등 체액은 몸 밖으로 배출되면 그때부턴 미생물의 먹이다. 따라서 시체에 꼬이는 벌레의 수와 종류등으로 시체 유기 장소를 특정하는 법곤충학과 비슷한 원리로 미생물의 종류와 수를 이용해 체액의 종류를 특정할 수 있다. - P91
"법생물 DNA 감정은 인간 이외에 다른 생물을 감정하는 분야" (중략) 양귀비, 대마, 환각버섯처럼 인터넷에 유통되는 마약생물의 원료를 감정하는 것부터 성폭행, 폭행 등 사건에서 찾은 체액을 감정하는 것까지 모두 법생물학 DNA감정의 영역이다. - P91
"혈흔의 경우 다양한 미생물 중에서도 슈도모나스(Pseudomonas)가 우세하게 나타나고, 질액의 경우 락토바실러스 (Lactobacillus)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등 미생물 분포에 차이가 있다" - P91
"체액에서 추출된 DNA를 분석해 체액의 종류와 체액의 주인이 누구인지 신원확인을 한 번에 할 수 있다" - P91
체액 식별을 위해 기존에 활용하던 방식의 경우, 시료량이 많이 요구됐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환경 미생물 DNA 분석기술을 적용하면 극소량의 증거물로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P91
김성민 연구사는 이번에 개발된 환경 미생물 DNA 분석기술을 활용했다면 풀어낼 수 있었던 사건에 대해 회상하며 말을 맺었다. "실제로 검사가 감정을 요청한 사건 중에 창틀에 묻은 혈흔의 주인이 누구인지 추적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피해자는 자신이 치질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 자신의 치질 환부에서 나온 피를 몰래 훔쳐다 묻힌 게 아니냐고주장했죠. 당시엔 이 주장을 검증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합니다. 혈흔을 통해 이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낼 수 있고, 혈흔 속 미생물의 분포를 분석해 이 피가 항문 근처에서 나온것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이게 (이 일을 하는) 재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엔 ‘못합니다‘ 했던 일도 이젠 ‘네, 됩니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 P91
김성민 연구사의 연구 분야는 ‘인간을 제외한 전부‘다. 매머드부터 식물, 어류, 버섯, 그리고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유전정보를 분석해 다양한 생물을 감정해야 하는 그의 무기는 인공지능(AI)이다. "특히 식물의 동정은 한 가지 유전자 표식으로만 하기 어려워요. 분류군 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죠. 이럴 때 AI가 활용됩니다. 앞으로 AI를 활용하면 유전자 속 패턴을 더 잘 구별할 수 있게 될겁니다. 그 기반이 될 연구가 이번 (체액 속 미생물 분포)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91
씨스피라시는 해양오염의 원인이 되는 플라스틱 폐기물 중 플라스틱 빨대는 단 0.03%에 불과하며, 그보다 더 주요한 요인은 46%를 차지하는 대기업들의 어업 폐기물이라고 지적한다. 빨대가 가리고 있는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의 주된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 P94
국내 통계도 씨스피라시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린피스가장용철 충남대 환경공학과 교수팀과 함께 2023년 3월 발표한 보고서 ‘2023년 플라스틱 대한민국 2.0‘을 살펴보자. 2021년 기준 전국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 1193만2000t(톤)56.2%인 670만 t이 사업장 배출시설계 폐기물이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발생하는 플라스틱 폐기물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생활 속 플라스틱 폐기물 또한 무시할 수 없다. 2021년 생활계 폐기물의 발생량은 468만 2000t으로 전체의 39%를 차지한다. 적어도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의 39%는 생활 속 작은 변화로 줄일 수 있다는 뜻이다. - P94
종이 빨대가 플라스틱 빨대의 친환경적인 대체재로 떠오른가장 큰 이유는 썩는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따질 땐 그 밖에 생산, 이용, 치리까지 전 과정을 고려해야한다. 이런 분석을 전과정평가(LCA-Life Cycle Assessment)라 한다. 제품의 원료 채취부터 가공, 수송, 사용, 폐기 등 모든 과정에 걸쳐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평가하는 것이다. - P95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2022년 발표한 일회용 빨대 LCA보고서를 살펴보자. 이 보고서에서 다룬 일회용 빨대는 플라스틱 빨대, 생분해성 플라스틱 빨대, 그리고 종이 빨대다. 연구팀은 빨대가 재료, 생산, 유통, 사용, 폐기되기까지 환경에 미친 영향을 상대적인 수치로 환산해 더했다. 이 수치를 상대적 환경 영향 지수(REI)라 하며, 숫자가 클수록 환경에 대한 영향이 크다. - P95
REI를 계산할 때 고려한 요소는 총 8가지다. 향후 100년간지구온난화에 기여할 잠재력, 산화될 확률, 부영양화 확률, 오존 고갈 확률, 담수에 독성 영향을 끼칠 확률, 인간에게 독성 영향을 끼칠 확률, 토양에 독성 영향을 끼칠 확률, 화석 연료를 고갈시킬 확률이다. - P96
연구 결과, 폐기 단계에서 빨대를 소각할 경우 생분해성 빨대의 REI값이 6.8로 가장 컸다. 이어 종이 빨대(4.9), 플라스틱 빨대(3.2)가 뒤를 이었다. 빨대를 매립할 경우에도 이 순서는 달라지지 않았다. 생분해성 빨대(6.4)가 가장 큰 값을 나타냈고, 그 뒤를 종이 빨대(5.1)와 플라스틱 빨대(2.4)가 이었다. 플라스틱 빨대의 친환경적 대체품으로 여겨지던 생분해성플라스틱 빨대와 종이 빨대가 오히려 더 환경에 유해했다는아이러니한 결과다. 연구팀은 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플라스틱 빨대의 대체품으로 종이 빨대나 생분해성 빨대를 사용하도록 독려하기 전에 실제 환경부담과 이득을 보다 통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P96
카루나 라나 당시 미국 미시건대 환경 및 에너지정책학과 연구원이 석사학위논문으로 발표한 연구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라나 연구원은 플라스틱 빨대, 생분해성 플라스틱빨대, 종이 빨대, 금속 빨대가 사용 전과정에서 지구온난화에 기여할 잠재력을 온실가스 배출량을 토대로 계산했다.
그 결과 플라스틱 빨대가 0.857kg CO2eq, 생분해성 플라스틱 빨대가 2.67kgCO2eq, 종이 빨대가 2.4kgCO2eq 순으로 지구온난화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금속 빨대의 경우 따뜻한 물로 씻어 쓰면 35.9kgCO2eq, 찬물로 빠르게 씻으면0.636kgCO2eq란 결과가 나왔다. 가장 좋은 건 금속 빨대를찬물로 빠르게 씻는 것이었다. 하지만 재사용하는 과정에서따뜻한 물을 사용하는 등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플라스틱 빨대보다도 지구온난화를 가속하는 효과가 컸다. - P96
CO₂eq
이산화탄소 환산량. 온실가스 배출량을 대표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로 환산한 양이다. 숫자가 클수록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 P96
환경을 위한 길은 애초에 일회용품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흔히 3R로 줄여 부르는 폐기물 문제의 해법은 Reduce(감축), Reuse(재사용), Recycle(재활용)로 구성된다. 생산량을 감축하고, 만든 제품은 여러 번 재활용하며, 폐기하게 되는 경우 재활용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금속 빨대도 재사용 방식에 따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졌다는 라나 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알고 나니 두 번째 R인 ‘재사용‘ 부문에서 의문이 생긴다. 재사용,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외려 더 커질 수 있다. - P96
캐나다의 환경보호단체 CIRAIG가 2014년 보고한 기술보고서 ‘재사용 컵과 일회용 커피 컵의 수명주기 분석‘에 따르면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카보네이트로된 컵의 경우 90회 이상은 사용해야 일회용 커피 컵보다 기후변화에 영향을 덜 미친다. - P96
다회용컵은 주로 사용이나 세척 단계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반면,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나 일회용 재생 플라스틱 컵, 일회용 종이컵은 생산 단계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 P97
정리하자면 이렇다. 전체 플라스틱 폐기물 발생량 중에서 플라스틱 빨대로 대표되는 생활계 폐기물의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정도다. 다만, 플라스틱 빨대의 대체재로 꼽히는 종이 빨대나 생분해성 플라스틱 빨대가 정말 환경에 좋은지는 폭 넓은 분석이 필요하다. 정책 방향을 정하기 전, 이 같은 과학적 검증과정이 선행됐어야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애초에 일회용품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재사용 시스템을 정책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다. - P99
규제 vs. 자유라는 오랜 쟁점에서 정부는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까. 경제학자인 홍종호 서울대 환경계획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그는 "경제학자의 눈으로 봤을 때, 아무런 규제 없이 (폐기물을 감축한다는) 바람직한 사회적 비용이 반영된 소비 형태가 나타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답했다. 생산과정과 소비과정 모두에서 정부의 간섭 내지 개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는 "이론적으로도 정부의 개입이나 간섭, 규제 없이는 일회용품의 과생산과 과소비가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 P99
기초의학이란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등 의학의 기초가 되는 학문이다. - P103
한 사람의 유전체는 백과사전 1000권 분량에 달할 정도로 방대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유전체 검사 비용은 20년 전과 비교해 약 100만분의 1 수준이다. 환자의 유전체를 통째로 들여다보는 비용이 크게 낮아진 것이다. - P103
과학자와 의사과학자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주 교수는 "관점의 차이가 가장 크다"고 대답했다. "예를 들어 미생물학자는 미생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의사과학자는 미생물이 사람에게들어갔을 때 어떤 영향이 있는지부터 신경을 씁니다." 미생물학자가 연구의 초점을 미생물의 특성에 맞춘다면, 의사과학자는 좀 더 사람에게 맞춘다는 뜻이다. 의사과학자는 미생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감염‘으로 바라본다. 이 때문에 의사과학자는 연구 결과와 임상 현장을 동시에 고민한다. - P103
의사도 연구를 한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며 얻은 지식과 데이터로 의학 연구를 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주 교수도 "연구와 임상이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훌륭한 유전세 연구를 위해서는 뛰어난 생명정보학 기술뿐만 아니라 잘 수집된 임상검체와 환자 정보도 함께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임상 현장에서 활동하는 의사에 비해 기술 개발에 시간을 쏟는 의사가 매우 부족한 상황이다. - P103
"의사과학자는 미드필더입니다." 주 교수는 의사과학자가필요한 이유를 축구에 비유해 설명했다.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격력이 극대화된 공격수와 수비에 방점이찍힌 수비수뿐만 아니라, 그 둘을 잇는 미드필더의 역할도 중요하다. 의사과학자는 과학기술 연구와 임상 현장을 잇는 미드필더 역할을 한다. 의사이자 과학자인 의사과학자는 그래서 임상 현장에도, 연구실에도,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 P103
"지금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논문이 발표됐을 때를 기억해요." 문 전무가 박사과정 중이던 2012년 8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한 논문이 발표됐다. 제한효소 크리스퍼가 바이러스의 DNA를 절단하는 원리를 밝혀낸 뒤, 이를 원하는 DNA 절단에 활용할 수 있음을 실험으로 확인해 유전자가위의 탄생을 알린 논문이었다.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논문을 읽고, 이 기술로 유전병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자 전율이 느껴졌다. "만약 제가 당시 연구자가 아녔다면, 바쁘게 진료를 보느라 그 논문을 읽을 시간도 없었겠죠. 읽을 기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감동이 덜 했을 거고요." - P104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길도 열렸다. "임상현장에 꼭 필요한 새로운 의료기술이 윤리적인 문제없이 빠르고 신속하게개발되고 또 적용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문 전무는 2016년 잠재력 있는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됐다. 좋은 의료 연구에 필요한 돈이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길로 나아간 것이다. - P104
<의사과학자였기에 알 수 있는 투자의 가치>
임상 현장 경험은 투자의 성과로 이어졌다. 문 전무가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됐던 2016년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의료기기 개발이 붐이었다. 여러 벤처기업에서 X선 촬영, 자기공명영상(MRI), 컴퓨터단층촬영(CT) 영상을 판독하는 AI플랫폼을 개발했다. 문 전무는 "사람들은 차이를 몰랐지만, X선 촬영 영상 판독 플랫폼에만 눈이 갔다"고 말했다. 비용이 의사의 판독비보다 저렴한가, 다량의 영상을 판독할 수 있는가. AI 영상 판독 플랫폼이 임상 현장에서 쓰이기 위해선이 둘 중 한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문 전무는 임상 현장에서 MRI, CT보다 X선 촬영이 훨씬 잦다는 것을 알았다. - P104
현재 한국에서 의사 출신으로 벤처캐피털에서 일하는 사람은 총 15명. 그중 의사과학자 출신은 문 전무를 포함해 단2명밖에 없다. 의사 출신 투자자와 의사과학자 출신 투자자에게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문 전무는 "실험 데이터를 볼 줄 아는 능력이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문 전무는 신약 개발을 예로 들었다. 초기 단계의 신약 개발 기술은 박사 논문과 비슷하다. 효과를 직접적으로 입증할수는 없으니, 여러 단계의 실험 결과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면 주장에 근거가 있다고 판단한다. 박사학위 과정에서 다양한 연구를 해보고, 실험을 바탕으로 논문을 써본 적이 있었기에, 문 전무는 과거 한 스타트업에서 투자 제안서에 고의로 누락한 실험이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연구자로 보낸 시간동안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이 만들어진 것이다. - P104
암이 처음 형성된 부위에서 벗어나 혈액이나 림프계를 통해 다른 부위로 이동해 새로운 종양을 형성하는 것을 전이라고 한다. 암세포를 죽이는 항암제를 사용할 수없는 상황 등에서 종양의 성장을 막아 암의 전이를 억제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의 상태 악화를 막을 수 있다. 최근 ‘캔서 테이밍(암 길들이기)‘으로 주목받고 있는 연구 분야다. - P105
인공지능(AI)과 데이터공학, 전자공학 등을 의학과 의료기기 개발에 이어줄 의사과학자, 즉 의사공학자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공학은 의학과 완전히 다른 분야다. 이 때문에 의사과학자들이 별도의 공학 교육없이 연구에 투입되면 큰 어려움을 겪는다. - P109
인터넷 매체나 잡지에서 기사로 깔끔하게 정리된 연구 결과만 보는 우리는, 과학 연구가 시작되기까지의 이런 긴 여정을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연구든 돈과 시간을 포함한 자원이 든다는 사실을 쉽게 잊죠.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 같은 거대 과학프로젝트든, 한 두 명의 연구자가 소소하게 진행하는 연구든, 모든 과학 연구에는 돈이 듭니다. 하지만 돈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과학 연구를 후원하려는 단체들은,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떤 연구에 한정된 자원을 투자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를 결정하려면 매우 다양한 사안을 고려해야 하고요. 이 결정을 위해 탄생한 분야가 바로 ‘과학기술정책‘입니다. - P111
과학자들은 어디서 연구비를 지원받을까요? 국가, 기업 같은 답이 떠오르시겠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근대과학의 기반이 된 르네상스 시기 서유럽으로 가볼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크게 두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귀족이나 재력가에게 후원을 받아 연구하거나, 아니면 본인이 돈이 많아 취미로 연구를 하던가요. - P111
후원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이탈리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입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해 목성 주변을 도는 위성 4개를 최초로 발견하고, 그 위성의 이름을 자신을 후원하던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따 ‘메디치의 별‘로 지었습니다.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는 코시모 2세 데 메디치에게 바치죠. 그 결과 그는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던 토스카나 대공국의 궁정 수학자 겸 자연철학자로 임명돼 봉급은 물론 연구에 필요한 공간과 장비를 제공받게 됩니다. ‘메디치의 별‘로 메디치 가문의 위대함을 널리 알린 대가였죠. - P112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위성 4개.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 P112
재력가들은 본인의 돈으로 직접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영국의 과학자 로버트 보일이나, 만유인력 측정 실험을 수행하고 화학, 전자기학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영국의 헨리 캐번디시가 그랬습니다. 캐번디시는 사망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 중 하나기도 했습니다. - P112
이후로 과학은 점점 더 많은 잠재력을 보여줍니다. 산업혁명 이후로는 산업계에서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갖추기 위해 과학기술자를 지원하기도 했죠. 과학의 중요성이 특히 급부상한 것은 상당히 최근인 제2차 세계대전 후, 1940~1950년대의 일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모로 과학 연구에 중요한 이정표였습니다. 과학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가장 상징적인 예는 ‘원자폭탄‘입니다. 미국이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낸 원자폭탄은 일본에 투하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미국의 앞서나간 과학기술력을 만방에 보여준 사건이었죠. - P112
<20세기 거대 과학의 부흥과 쇠락>
맨해튼 프로젝트 같은 연구 프로그램은 개인이나 재력가 한둘의 힘으로는 진행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거대했습니다. 국가 단위의 도움과 힘이 필요했죠. 이른바 ‘거대 과학‘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국가는 본격적으로 과학의 후원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제조는 물론,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 같은 연구 프로그램에 엄청난 돈과 자원이 들어갔습니다. 자국이 다른 나라보다 앞선 체제라는 걸 전 세계에 보여주기 좋았죠. - P112
냉전 기간 수없이 추진됐던 거대 과학 프로젝트는 그러나 생각보다 효율적이지 않았습니다. 기초 연구에 돈을 투자한 만큼 원하는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았죠. 타당성을 의심받던 거대 과학 프로젝트들은 소련이 무너진 1991년 이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되거나 예산 삭감을 당합니다. 유명한 예가 미국 텍사스주 사막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초전도 초중돌기(SSC: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입니다. SSC는 둘레만 약 87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가속기가 될 계획이었습니다. 물리학의 표준모형이 품고 있는 궁금증을 풀어줄 것이란 기대를 한몸에 받았죠. 10년 동안 약 44억 달러(약 5조 7000억 원)의 비용을 들여 건설하기로 계획됐습니다. 그러나 1991년부터 건설이 시작된 SSC는 거대한 지하 터널을 파는 작업 중이던 1993년,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예산이 전액 삭감되고 급기야 취소되기에 이릅니다. 사막 지하에 터널만 남겨두고 말이죠. - P113
참고로 알아두셔야 할 점은, 이 시기 거대 과학 프로젝트가단지 냉전이 끝나고 경쟁자인 소련이 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산을 삭감당하거나 취소된 건 아니란 지점입니다. 이전부터 SSC 계획을 두고 설왕설래가 많았습니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가들은 의료,복지, 경제 분야 등 자금 지원이 더욱 긴급한 분야를 두고 연구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SSC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상황을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과학자 사회에서도 비판은 거셌습니다. 물리학자들은 SSC를 운영하는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이 오랫동안 예산을 독점적으로 썼다고 공격했습니다. SSC 덕분에 다른 유망 분야인 레이저, 응집물질, 초전도 과학 쪽으로는 예산이 돌아가지 못했다는 거죠. SSC 계획 취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과학 프로젝트의 예산 배분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P113
<과학을 돕는 과학, 과학기술정책>
한국의 과학정책 방향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오랜 과학의 전통이 없었던 한국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국가의 경제 성장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연구에 투자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시작으로 여러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세웠고, 개발한 기술을 기업에 이전했습니다. 이런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 지원 방식은 경쟁국을 따라잡기에 적합했죠. 산업에 바로 적용 가능한 응용과학기술 연구지원은 한국 정부의 지원 방식을 대표합니다. - P113
냉전 이후로도 국가는 과학의 중요한 후원자로 남았습니다. 군사기술 분야는 물론 첨단 산업까지, 과학이 국가경쟁력의 지표가 되는 중요한 척도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자료에 의하면 2023년 한국 정부가 과학기술 개발에 투자한 예산은 31.1조 원입니다. 이 돈을 어떤 연구자에게, 어떻게 지원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과학정책 연구자들은 여러 사안을 고려해 ‘어떤 연구가 더훌륭한가‘, ‘어떤 연구가 더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 최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정책은 ‘과학을 돕는 과학‘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P113
고생대에서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 P113
‘DNA의 이중나선 구조 발견‘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 업적을 뽑을 때 빠지지 않는다. DNA의 구조는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둘만큼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 물리화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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