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듈(module) : 건축물이나 그 구성재의 설계나 조립에서 기본이 되는 치수 - P487
일반적으로 건축에서 복도와 같은 공용 면적을 최소화하고 전용 면적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호텔처럼 복도가 가운데 있고 집이 양측으로 들어가는 ‘중복도‘ 형식을 취해야 한다. 우리나라 호텔과 오피스텔은 대부분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경우 각 세대는 맞통풍이 안 되는 구조가 된다. 중복도형 원룸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은 집과 복도에 음식 냄새가 빠지지 않는 불쾌한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 P127
도시 안에 더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편리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르 코르뷔지에는 좁지만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사람의 몸은 팔, 다리, 몸통, 머리로 나누어져 있고, 각각은 각종 관절로 연결되어있다. 르 코르뷔지에는 앉은 키, 선 키, 손을 들었을 때의 높이 등을 고려해 적절한 크기의 공간을 디자인하려 했다. 이를 ‘모듈러‘라고 부른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천장 높이는 226센티미터인데, 이는 183센티미터 키의 성인 기준으로 손을 들었을 때 손끝 높이가 226센티미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아파트 천장고 2.3미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 P130
르 코르뷔지에가 모듈러를 적용하려고 했던 이유는 좁은 공간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전쟁 후 제한된 물자로 더 많은 혜택을 만들어야 했던 건축가의 고민이라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 개념이 세상을 바꿀 만한 연구라는 호평을 하기도 했다. - P130
몬드리안은 사물의 근원을 찾기 위해 세상을 단순화시키다 보니 형태는 수직과 수평의 직선만 남기고 색상은 삼원색인 빨강, 파랑, 노랑만 사용했다. 색의 삼원색은 빨강, 파랑, 노랑이지만 빛의 삼원색은 빨강, 파랑, 초록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구성된 입면에 색의 삼원색과 빛의 삼원색을 합쳐서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을 적용했다. 이처럼 컬러풀한 색상을 칠한 이유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평면으로 된 세대에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 P131
같은 평면이라도 네 가지 색깔로 다르게 칠하면 네 가지 다양성이 나온다. 가장 손쉽고 저렴하게 개성을 만드는 방법이 다른 색의 페인트를 칠하는 것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는 각 세대에 다른 색상이 주어지기 때문에 건물 밖에서 보더라도 수백 세대가 획일화된 집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다양한 색상 덕분에 거주자는 다른 집과 구분되는 ‘내 집‘의 개성을 느끼게 된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몇 가지 색상의 페인트를 사용했을 뿐이지만 거주자의 자존감에는 큰 차이를 가지고 온다. - P132
우리나라 아파트들도 콘크리트로 짓고 페인트칠을 한다. 그런데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페인트칠 방식은 우리나라 아파트와는 다르다. 우리나라 아파트는 브랜드별로 같은 색을 칠한다. 건설사는 달라도 평면도와 모양이 같으니 페인트 색으로라도 차이를 주는 것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우리나라 아파트는 콘크리트 외관 표면에 페인트칠을 하지만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입면의 안쪽 벽체와 일부 난간에만 칠을 했다. 따라서 정면에서 바라보면 페인트 색보다는 노출 콘크리트가 주로 보인다. 그러다가 측면으로 움직이면 컬러풀한 색채가 더 많이 드러난다. 외부 관찰자의 움직임에 따라 건물의 색상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건축물이 관찰자와 좀 더 역동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 P132
거주자 입장에서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색이 칠해진 날개벽은 집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부 풍경을 프레임하는 액자 같은 기능을 한다. 따라서 각각의 세대는 같은 풍경을 바라보지만, 그 풍경을 프레임하는 액자의 색깔이 다른 것과 같다. 마치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 보이는 단청의 다채로운 색상이 창문 밖의 자연 풍경을 상단에서 프레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에서 다양한 색상으로 칠해진 입면의 날개벽들은 마치 단청처럼 각기 다른 분위기로 바깥 풍경을 프레임한다. - P132
날개벽: wing wall, side wall. 외벽, 보 등 주요 구조체 혹은 구조물에서 연장되거나 부착된 부속 벽체로, 큰 벽이나 구조물에 붙여서 설치하거나 인접해 설치한 짧은 벽이다. - P487
‘유니테 다비타시옹‘이 위치한 프랑스 남부의 도시 마르세유는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데 인구는 80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부산이 300만 명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프랑스 대도시의 작은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다른 유럽의 도시와는 다르게 약간은 ‘여긴 한국 도시 같은데?‘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곳곳에 위치한 거대한 아파트 건물 때문이다. 원조 아파트 ‘유니테 다비타시옹‘의 영향 때문인지 마르세유 곳곳에는 거대한 아파트 건물들이 솟아올라 있다. 아쉬운 점은 그 많은 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 ‘유니테 다비타시옹‘이라는 점이다. 후배 건축가들은 르 코르뷔지에만큼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진화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후퇴한 기분이다. - P134
‘라 투레트 수도원‘과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공통적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하나의 건축물 안에 작은 도시, 작은 사회를 만들려고 시도한 작품이다. 그가 꾸었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사회일 것이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하며 르 코르뷔지에는 경제성을 생각하면서 당대 최신 기술을 이용해 제한된 공간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개성을 가지고 화목하게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곳을 창조하려고 노력했다. 스마트하고 창의적인 건축가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집을 만들 수 있는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보면 알 수 있다. - P134
건축은 그 나라의 국격을 보여 준다. 건축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 준다. 건축은 그 나라 국민의 성숙도도 보여 준다. - P139
돔은 예부터 교회나 왕 같은 종교적 혹은 정치적 권력을 상징하기 위한 건축적 요소였다. 이유는 돔 건축에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돔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돔 모양으로 나무를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나무 구조체 위에 콘크리트나 돌로 돔을 쌓아 올리고 공사가 완료되면 나무틀 구조체를 철거한다. 이렇게 비용이 들다 보니 당대 사회의 최고 권력자가 아니면 가질수 없는 건축 공간이 돔이었다. - P141
돔의 도시로 유명한 로마에는 ‘판테온‘의 돔과 ‘성베드로 성당‘의 돔이 있는데, 고대 로마의 황제나 르네상스 시대 교황 같은 당대 최고 권력자들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후 시대가 바뀌었으나 돔은 계속해서 국회의사당 같은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에 사용되었다. 여의도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도 돔이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 P141
원래 최고 권력자의 시선은 가장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가장 높은 곳에서는 가장 넓은 공간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넓은 공간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공간을 시각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골프장 티박스에서 넓은 잔디밭을 바라보면 비어 있는 1만 평 정도 되는 자연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비싼 돈을 내고 골프를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올라가면 도시 건물 위의 빈 공간을 모두 시각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그래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은 권력자의 시선이다. - P141
두 번째 이유는 정보의 비대칭 때문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노출하지 않고 아래에 있는 사람을 감시할 수 있다. 반대로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은 그대로 노출하지만 정작 위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펜트하우스가 가장 비싼 것이다. 펜트하우스에서는 원할 때 언제든 내려다볼 수 있지만 낮은 층에 사는 사람은 높은 층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된다. - P143
정보의 비대칭은 권력의 비대칭을 뜻한다. 그런 면에서 ‘에펠탑‘은 근대 사회의 상징이다. ‘에펠탑‘은 당대 신기술인 철골 구조를 이용해서 만든 3백 미터가 넘는 높은 탑이다. 그리고 그 꼭대기까지 시민이면 누구나 엘리베이터라는 신기술을 이용해 올라가게 했다. ‘에펠탑‘은 최고 권력자의 시선을 일반 시민에게 선물한 것이다. 근대 프랑스 사회가 시민 사회라는 것을 공간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에펠탑‘이다. - P143
‘독일 국회의사당‘의 돔을 전망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그곳에 올라가는 시민들에게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보는 시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에펠탑‘처럼 시민이 주인인 사회라는 것을 선언하는 공간이다. 그뿐 아니다. 전망대에 있는 사람들은 도시만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층에 있는 국회 회의장도 내려다볼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다. 국회의원들을 감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치 편의점 주인이 아르바이트생이 일하는 카운터 위에 CCTV 카메라를 설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국회의원이 졸거나 허튼짓을 하기 정말 어려울 것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을 보여주는 통쾌한 건축 디자인이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 - P143
인간은 주광성 동물이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는 본능적으로 빛을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는 밤이 되면 본능적으로 달을 올려다본다. - P152
사냥을 했던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주로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사냥을 나갔을 때 거대한 동물이 나를 내려다본다면 나는 도망쳐야만 살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올려다봐야 하는 동물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쳐 살아남은 사람의 후손이다. 그러니 우리의 본능에 따르면 올려다보는 것은 곧 두려움을 뜻한다. 이런 이유에서 무언가를 올려다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경외감이 생긴다. - P152
‘판테온‘은 이름 자체가 ‘모든 신을 섬기는 신전‘이라는 뜻인데, 이 건축공간의 디자인은 태양신, 달신 등 하늘에 떠 있는 여러 신을 섬기는 자들을 위한 곳으로서 완벽하다. 핵심원리는 고개를 들어 빛을 바라보게 하는 데 있다. - P152
파빌리온(pavilion): 이동이 가능한 가설의 작은 건축으로, 주로 박람회나 전시장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임시로 만든 건물 - P487
우리가 최초로 경험한 공간인 엄마 뱃속을 상상해 보자. 그공간은 바닥도 벽도 천장도 나누어져 있지 않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보자기처럼 연결되고 재료도 동일하다. - P155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처럼 벽과 천장의 재료가 하나로만 연결되어도 우리는 좀 더 원초적인 공간으로 돌아가는느낌을 받는다. 이 벽은 세로로 골이 파여 있는데 그러한 수직성의 강조가 더욱 성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 P159
이 예배당의 이름인 ‘브루더 클라우스Bruder Klaus‘는 15세기의 스위스 수호성인의 이름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농부들이 직접 2년간 시공해서 예배당을 만들었다. 제작 과정도 감동이다. 마을 주민들의 봉사 활동으로 지어졌기에 시공은 조금씩 천천히 이루어졌다. 이런 배경 때문에 거대한 기계와 레미콘을 사용하지 못했고 거의 수작업으로 지어졌다. 그렇다 보니 콘크리트의 재질도 한 번에 레미콘을 부어서 지은 것과는 사뭇 다르다. - P159
일반적으로 노출 콘크리트를 만들 때는 철근을 넣고 거푸집을 짜고 그 안에 액상 콘크리트를 부어서 굳으면 다시 거푸집을 뜯어내는 방식을 채택한다. - P159
우선 외관상 이 예배당의 콘크리트 표면은 퇴적층 같은 느낌이 난다. 그 이유는 이 콘크리트는 철근을 넣지 않고 진흙, 자갈, 석회 등을 넣고 다져서 만든 ‘램드 콘크리트 rammed concrete‘이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모여서 건축하기에 좋은 휴먼 스케일 방식이다. 강도를 확보하기 위해 한 층을 한 번에 붓는 게 아니라 수십 센티미터씩 붓고 사람들이 위에서 다지는 방식이다. 그래서 실제 흙이 쌓여서 만들어진 퇴적층이나 대리석 같은 느낌이 난다. 이 건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내부 곡면의 벽과 거친 표면의 비밀은 거푸집 자체의 구성 방식이 다르다는 점에 있다. - P161
휴먼 스케일(human scale): 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척도, 건축, 인테리어, 가구 등에 필요한 길이, 양, 체적의 기준을 인간의 자세, 동작, 감각에 입각해 적용한 것 또는 적용한 단위 - P487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푸집을 합판 같은 판재로 짠다. 혹은 아름다운 곡면을 만들기 위해 컴퓨터로 재단한 다음 철판을 휘어 거푸집을 짜기도 한다. 하지만 춤토어는 이 예배당을 건축할때 112그루의 통나무를 세워서 안쪽 거푸집을 만들었다. 이때 통나무를 기울여서 서로 마주 보게 했기 때문에 실내 벽체가 기울어진 형태인 것이다. 내부는 통나무를 기울이고 밖은 거푸집을 수직으로 세운 다음에 둘 사이의 공간에 램드 콘크리트를 채워 넣었다. 기울어진 벽이 만나면서 동굴처럼 되기 때문에 지붕은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내부의 거푸집을 제거할 때 통나무를 태웠다는 점이다! 이 예배당에는 거푸집으로 사용했던 통나무를 떼어서 가지고 나올 만한 입구나 창문이 없다. 건축가는 그 통나무를 태운 다음 숯으로 만들어 부숴서 가지고 나오는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이런 창의적인 방법은 금시초문이다. - P162
실내에 들어가면 거푸집을 구성했던 통나무의 모양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서 거친 표면의 실내마감을 완성한다. 게다가 통나무 거푸집이 타면서 생성된 타르와 재가 벽체에 남아서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색상을 연출한다. 춤토어가 왜 건축 재료 물성의 마스터인지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다. - P163
원래 종교는 신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기존의 교회 디자인은 너무 거대한 집단을 만드는 데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의 작은 공간에서는 조용하게 혼자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다. - P166
왜 옛날 사람들은 달빛 아래에 정화수 한 사발을 떠 놓고 기도했을까? 왜 달빛이 있는 어두운 밤에 기도했을까? 추리를 한번 해 보자. 주광성 동물인 인간은 빛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고, 시선을 집중하며 마음을 모았을 것이다. 사방에 빛이 있고 바라볼 것이 있는 낮에는 주변에 시선을 빼앗겨 집중하기 어렵다. 밤이 되면 사방은 어두워지고 하늘의 달빛만 남는다. 기도하는 자는 오롯이 달빛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어차피 낮의 태양은 눈이 부셔서 쳐다보지도 못한다. - P166
기도할 때 정확수 한 사발은 무슨 의미일까? 우선 정화수는 깨끗한 물이다. 물은 몸을 씻을 때도 사용하고 살기 위해 마시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물은 항상 종교적으로 구분된 성스러움과 생명의 상징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 물을 떠서 앞에 두었을 것이다. 모세가 만든 성막의 성소 앞에도 물두멍이라고 하는 거대한 물 항아리가 있었다. 성당에서는 지금도 예배당 입구에 성수를 배치한다. 마찬가지로 정화수를 떠 두는 것은 지금 이 공간이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가진다는 것을 천명하는 행위다. - P167
그렇다면 ‘한 사발‘은 무슨 의미일까? 한 사발은 공간적으로 가장 작은 단위를 규정하는 장치다. 사방 천지에 빛이 있을 때보다 어두운 밤에 작은 한 곳에 빛이 모여 있는 달에 마음을 집중하기 좋듯, 작은 한 사발의 공간은 마음을 집중하기에 더 유리하다. 이때 사발에 담긴 물은 하늘의 달빛을 비추기도 했을 것이다. 내 앞의 정화수 한 사발은 크기는 작지만 달빛을 비추는 호수가 된다. - P167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도 정화수 한 사발처럼 작지만 집중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곳에 가면 검은색 동굴 사방에 은하수가 있고 위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에는 신과 나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는 작은 우주가 만들어져 있다. - P167
건축을 하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땅이다. ‘건축‘이라는 단어는 한자로 ‘세울 건‘에 ‘쌓을 축이다. 쌓아서 세우려면 밑에 받쳐 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땅이다. 그래서 땅이 없으면 건축도 없다. - P169
페터 춤토어는 스위스 건축가로, 완성도 높은 건축을 한다. 여기서 완성도란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하나는 재료의 물성을 잘 이용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공의 정밀도다. - P170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게 뭔가? 알프스 경치와 손목시계다. 알프스의 춥고 긴 겨울에 집에 들어 앉아 돈을 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내 수공업이었다. 그래서 덴마크나 핀란드 같은 추운 북유럽 사람들은 겨우내 집에 박혀서 가구를 만들었고, 덕분에 가구가 유명한 나라가 되었다. - P170
스위스는 집에서 만들기 좀 더 어려운 손목시계를 만들었다. 롤렉스, 파텍 필립, 오메가 등수 많은 세계적인 명품 시계 회사가 스위스에 있다. 이런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건축주라고 생각해 보자. 국민들이 건축에 기대하는 완성도의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안 된다. - P170
나는 최근에 자동차 만드는 엔지니어를 건축주로 맞은 적이 있다. 엔지니어들의 오차 한계는 100분의 1밀리미터다. 웬만한 건축에서의 정밀도는 그분 성에 차지도 않는다. 스위스에 시계 산업 종사자 건축주가 많아서인지 스위스에는 유명한 건축가가 많다. 르 코르뷔지에도 스위스 태생이고, 헤르조그 앤드 드 뫼롱Herzog & de Meuron 이라는 세계적 건축설계 사무소도 있고, 춤토어도 있다. - P170
춤토어가 시계 장인들의 나라 스위스의 건축가라는 점은 춤토어가 말한 건축의 정의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건축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비밀은 세상의 서로 다른 사물들을 수집한 다음 그것들을 결합해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계는 수천 개의 개별 부품이 모여서 완성된다. 춤토어에게 건축은 시계처럼 다양한 요소를 합쳐서 하나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다분히 기계 문명 패러다임을 만든 유럽적 세계관이면서도 동시에 시계의 나라 스위스 출신다운 생각이다. - P171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은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다. 서울 강북이 아파트를 지을 때 경사진 땅에 거대한 축대를 세워서 평지를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짓는다. 경사지라는 자연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토목적 방식이다. 두 번째는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원형 극장을 보면 자연의 기울어진 땅을 이용해서 극장 좌석을 만들었고 낮은 쪽에 무대를 설치했다. 상당히 스마트한 방식이다. 세 번째는 자연을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는 자세다. 이 경우에는 자연과 건축물 사이에 거리를 둔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정자를 지을 때 물 가운데 두는 경우가 있다. 주변 자연 경관과 건축물 사이에 빈 여백의 공간을 두기 위해서다. 그 빈 공간이 있기에 건축물과 자연의 대화가 가능해진다. - P174
가장 좋은 관계는 적절한 거리를 두는 관계다. 상대를 바꾸거나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성 베네딕트 채플‘에서 보이는 건축물과 땅의 관계 전략도 거리를 두는 것이다. 그 거리만큼 만들어진 빈 공간이 울림통이 되어 땅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 P174
돌을 쌓을 때는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해 적절한 불규칙성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너무 규칙적이면 지루하고 너무 복잡하면 혼란스럽다. 그래서 인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적절한 불규칙성이라고 말한다. 높이와 길이가 일정한 규격의 돌을 쌓으면 누가 보더라도 인간이 만든 건축물처럼 보인다. 그런 경우를 피하기 위해 춤토어는 세 가지 두께의 돌을 다른 순서로 쌓았다. 돌의 두께가 A, B, C 세 가지라고 하더라도, 돌을 쌓는 순서를 ABC로하거나 ACB로 하거나 CBA로 한다면 여러 종류의 줄무늬 패턴이 나올 수 있다. - P176
춤토어는 동굴 같은 빛의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최대한 절제되고 제한된 빛을 사용했다. 우리는 일상의 건축에서 주로 벽에 뚫린 유리창을 통해 빛을 얻는다. 이 유리창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도 한다. ‘발스 스파‘ 역시 바깥쪽으로 난 창은 채광과 경치를 제공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빛은 실처럼 좁은 천창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제한된 빛이다. 이 빛은 아주 가느다란 직선이어서 마치 돌에 자를 대고 면도칼로 금을 그어 빛을 들어오게 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 P177
보로 연결되지 않는 지붕을 만든다는 것은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작은 차이지만 작은 차이가 모여 엄청난 감동을 만든다. 마치 작은 톱니바퀴들이 모여서 종국에는 엄청난 감동을 주는 스위스 명품 시계가 만들어지는 것과도 같다. - P182
작은 교회는 만들어져도 풍경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눈에 띄게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이 쳐다보면서 위안을 얻어야 하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땅에서 띄워 노출되게 지었다. 반면에 목욕탕인 스파 건물은 덩어리가 커서 땅위에 지어지면 경관을 해친다. 스파는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건물이어서 창문이 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창문 없이 내부 지향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하는 건축물이다. 그렇다보니 땅속에 짓는 것이 나았고, 땅속에 짓다 보니 재료로 돌을 사용해야 했다. 건축가는 여러 가지 조건 속에서 최고의 경험을 줄 수 있는 공간 구축 방식을 찾아야 한다. 춤토어는 그런 역할을 아주 잘 해내는 건축가다. - P183
목욕탕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 중에서 물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다루는 건축물이다. 그래서 목욕탕은 물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하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태아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도 ‘양수‘ 속에 담겨 있다. 모든 포유류는 잉태되면서부터 체온과 같은 온도의 물과 접촉된 촉감을 느끼면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엄마 배 속에서 나온 이후 계속 자신을 감싸 줄 집을 찾고, 누군가 체온으로 안아주는 촉감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를 안아 줄 사람이 없을 땐 체온과 비슷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원초적인 안정감을 느낄 것이다. - P183
춤토어의 ‘발스 스파‘는 마치 "물이 인간에게 무엇인지 알려 주마."라고 말하는 건축물 같다. ‘발스 스파‘에서는 단순히 목욕한다는 느낌을 넘어서 물의 다양한 측면을 체험할 수 있다. 냉탕에 들어가면 물속에서 조명된 욕조 물 안에 파란색 꽃잎들이 소용돌이친다. 파란 꽃잎은 차가운 물의 느낌을 시각적으로도 느끼게 해준다. 반대로 온탕에는 빨간 꽃잎이 휘몰아친다. - P184
샤워장도 특별하다. 샤워장의 물은 정지된 물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모든 물은 중력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폭포처럼 크게 떨어지기도 하고, 빗물처럼 방울방울 떨어지기도 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하고 낮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발스 스파‘ 의 샤워장에는 이렇게 네 가지 방식으로 물이 떨어지는 샤워 장치가 있다. ‘발스 스파‘는 동굴같이 어두운 공간을 연출해 그 안에서 극도로 민감해진 오감을 통해 절제된 빛과 물의 촉감을 최대한 느끼게 하는 궁극적인 감각의 공간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건축물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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