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라는 도시는 118개의 섬이 약 4백 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베네치아는 로마 시대 때 해안지방을 통칭해 부르는 단어였다고 한다. 이 도시는 우선 물 위에 있다는 상황 자체가 흥미롭다. 동남아시아에도 물 위에 지어진 집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도시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베네치아는 도로 대신 수로가 주 교통망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골목과 광장도 있어서 도시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 P187
어떻게 이러한 도시가 만들어졌을까? 그 역사를 살펴보자. 기원후 2세기부터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로마 제국은 기존의 로마에 기반을 둔 서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으로 나뉘게 된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관할에 있던 지목이다. 이후 이 도시가 성장한 것은 5~6세기경 로마인들이 이민족의 침략을 피해서 베네치아로 탈출해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들은 외부인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석호 위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와서 공격하는 훈족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말이 들어올 수 없는 물 위에 공간을 만드는 것이 최적의 방책이었다. - P188
이렇게 발돋움한 베네치아는 7세기부터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해 자치적인 도시 국가로 성장했다. 이후 조선업과 해외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벌었고 그 흔적은 고스란히 건축으로 남아 있다.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다 보니 수로나 골목길은 미로가 따로 없다. 베네치아의 길을 완전히 외우기는 불가능하다. 덕분에 도시 구석구석에 숨겨진 보석 같은 공간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 Carlo Scarpa가 설계한 ‘퀘리니 스탐팔리아 Fondazione Querini Stampalia‘다. - P188
베네치아의 기후는 특이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여름 장마철에 한강이 불어서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가 잠기는 일이 생기는데, 베네치아는 그런 침수 현상이 겨울에 생긴다. 11월쯤 되면 해수면이 올라가고 밀물이 들어오는 만조에 도시의 1층이 물에 잠기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럴 때면 집마다 현관에 차수벽을 설치하고, 큰 광장에는 간이 다리를 만들어서 그 위로걸어 다닌다. 다리가 없는 골목길에서는 사람들이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걸어 다닌다. - P189
베네치아는 주요 교통수단이 배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좋은 건물들은 현관에 배를 직접 댈 수 있는 선착장이 있다. ‘퀘리니 스탐팔리아‘도 이러한 선착장 현관이 있었는데, 문제는 만조에 물이 넘치면 사용이 어렵고 건물의 1층은 물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단은 건축가 스카르파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건축 리모델링을 의뢰했고, 장장 4년에 걸친 리모델링 공사로 지금의 ‘퀘리니 스탐팔리아‘가 완성되었다. - P189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 너무 느리거나 너무 미세하기 때문이다. 계절은 언제나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너무 천천히 변하기 때문에 오늘과 내일의 계절 차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의 위치도 시시각각 변하지만 10분 사이에 이동한 해의 위치 차이는 너무 미세해서 알아채기 어렵다. 지금도 한강수위는 계속해서 높아지거나 낮아지면서 변화하지만 우리는 멀리서 보았을 때 그 높이의 변화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강 수위가 바뀌는 것을 눈치챌 때가 있는데, 다름 아닌 ‘잠수교‘가 물에 잠겼을 때다. - P189
다른 다리와는 다르게 낮은 ‘잠수교‘는 한강 물이 조금만 불어나도 물에 잠겨서 건너갈 수가 없다. 이때 ‘잠수교‘는 미세한 자연의 변화를 공간의 변화로 치환해서 우리가 알아채게 해 주는 장치다. 만약에 ‘잠수교‘가 아주 높은 교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런 역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낮은 높이의 교각 디자인이 자연의 변화를 공간적으로 변환시켜주는 기능을 만들어 냈다. 나는 이런 ‘잠수교‘ 같은 건축을 ‘건축 공간을 통해서 자연과 대화할 수 있게 해 주는 건축‘이라고 말한다. 일종의 ‘공간 통역사‘다. ‘퀘리니 스탐팔리아‘도 그런 종류의 건축이다. 베네치아의 물 높이는 항상 변화했다. 이런 변화를 공간의 변화를 통해 좀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건축물이 ‘퀘리니 스탐팔리아‘다. - P190
베네치아의 다른 건축물들은 홍수가 나면 물에 잠기느냐 안 잠기느냐 두 가지 경우만 생긴다. 그런데 ‘퀘리니 스탐팔리아‘ 는 바닥에 구역마다 다르게 미세한 높낮이 차이를 두었고, 일부 구역에는 경계부에 댐처럼 높은 턱을 주변으로 둘렀다. 이러한 디자인 덕분에 ‘퀘리니 스탐팔리아‘ 에서는 수위에 따라 물에 잠기는 바닥 면이 바뀌면서 다양한 공간적 변화가 생겨난다. 베네치아의 자연이 만들어 내는 물 높이의 미세한 변화는 사람들이 눈치채기 어렵다. 하지만 ‘퀘리니 스탐팔리아‘의 특별한 디자인 덕분에 물 높이가 달라질 때마다 사람들은 공간적 변화를 통해 미세한 자연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 P191
아마 독자들 중에는 왜 쓸데없이 그렇게 나누어서 복잡하고 비싸게 만들까 의아해하는분도 많을 것이다. 이건 가치관의 차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노력이 의미 없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가치를 준다. 스카르파 같은 건축가는 디테일을 세밀하게 기능에 따라 나누고 그 기능에 맞게끔 각각 적절한 재료의 부품을 선택한다. 손이 닿는 쪽에는 따뜻한 나무를 사용하고 단단해야 하는 부분에는 쇠를 사용한다. 그리고 그 다른 재료들을 제3의 재료인 볼트로 잇는다. 왜 이렇게 할까? - P194
건축물은 사람의 몸보다 크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재료로 만들 수 없고 여러 개의 다른 재료를 이어 붙여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이 다른 재료들을 어떻게 이어 붙일 것이냐가 중요하다. 이를 건축에서 ‘텍토닉tectonic‘이라고 한다. 번역하자면 ‘구축‘이라고 할 수 있다. - P194
스카르파의 디자인에 적용해 보자. 단어 사이의 띄어쓰기는 금속 부품과 목재 부품같이 난간을 구축하는 부재들끼리의 분리라고 할 수 있다. 금속 부품끼리 조여서 붙이는 볼트는 문장 속 ‘을‘ 같은 ‘조사‘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목재 손 스침 끝부분에 부착된 황동 부품은 문장의 끝에 달린 물음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각각의 단어를 나누고, 그 단어들에 각기 다른 기능을 부여하고, 그것들을 일정한 규칙으로 조합했을 때 우리는 ‘문법에 맞는다‘ 고 말한다. 스카르파의 디자인은 일반인의 눈에는 지나치게 복잡한 디테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복잡한 구축 방법이 ‘건축구법에 맞는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디자인을 하는 것이다. - P195
손스침: 난간 기둥 위나 끝부분에 가로로 덧대는 나무 - P487
물론 이렇게 복잡해야만 좋은 디자인은 아니다. 안도 다다오나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ån 같은 미니멀한 건축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은 아주 단순한 디테일을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도 기능이 다르면 다른 부품으로 나누어서 사용한다. 단 그 개수가 적을 뿐이다. 이들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된 것처럼 만들고 싶어 하는 건축가도 있다. 예를 들어 동대문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Zaha Hadid 의 경우에는 모든 건축물이 하나의 밀가루 반죽같이 한 덩어리로 보이는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 P195
스카르파는 다른 요소들이 더 분절되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 대리석 벽에 문을 만들 때도 경계부의 선을 복잡하고 다르게 디자인한다. 우리는 보통 문을 만들 때 네모진 형태로 경계부를 설정한다. 그런데 스카르파는 문짝을 복잡한 요철 모양으로 만들어서 문이 열릴 때 특별한 공간감이 느껴지게 디자인했다. - P196
헬스 트레이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좋은 몸은 근육과 지방이 잘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돼지 삼겹살의 지방 부분과 근육 부분이 명확하게 나누어진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안 좋은 몸은 근육과 지방이 섞여 있다고 한다. 마치 마블링이 잘된 쇠고기처럼 말이다. 그래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서 지방과 근육을 분리해야 한다고 한다. 뭐 그렇게 전문적으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 덩어리로보이는 중년 아저씨의 배보다 식스팩으로 나누어진 배를 더 선호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두근, 삼두근, 삼각근, 승모근이 나누어진 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각기 기능에 따라 명확하게 분절된 근육을 볼 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과 건축에서 분절된 재료가 잘 조합된 모습에 건축가가 희열을 느끼는 것은 비슷하다. - P196
카시오의 전자시계와 롤렉스의 기계식 무브먼트 시계는 둘 다 시간을 알려 주는 똑같은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기계식 손목시계가 훨씬 더 비싼 이유는 많은 부품이 잘 엮여서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감동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분이 건축에서 이런 디테일 텍토닉을 보게 되면 건축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스카르파의 작품은 롤렉스 시계 같은 건축이다. 아니 롤렉스 시계보다 더 명품인 파텍 필립 시계 같은 건축이다. - P196
건축 학교에서 합리적 디자인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 다른 사람이란 다름 아닌 건축주다. 건축주를 설득해서 많은 돈을 투자하게 하려면 그만큼 합리적인 이유로 설득해야 하는데, 디자인을 설명하는 건축가가 "그냥 제 유년 시절 기억 때문에 이렇게 디자인했어요."라고 하면 누가 수십, 수백 억의 돈을 내겠는가? - P202
건축가가 예술가로 인정받아서 좋은 점은 대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화가 이우환은 점 하나 찍고서 그림을 완성한다. 그 정도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나 점을 찍는다고 그림이 팔리지는 앞는다. 이우환은 예술가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점만 찍어도 고가의 그림이 된다. - P202
타이타늄은 치과에서 보철할 때나 우주왕복선을 만들 때처럼 의료분야와 항공분야에서 사용하는 고급 재료인데,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색상과 재질이 다르게 보이는 속성 때문에 게리가 즐겨 사용한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고기의 비늘을 표현하기에 최적의 건축 재료다. - P206
램프를 만들 때 사용했던 종이와 달리 금속은 임의로 건설 현장에서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정교하게 컴퓨터로 제단하고 공장에서 기계로 제작한 후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제작 방식의 기본 원리는 두꺼운 종이를 이용해 조명기구를 만들 때와 동일하다. - P206
1980년대 중반 그가 디자인한 조명 기구는 물고기나 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제작 방식은 켄트지를 손으로 찢은 후 종이 끝부분을 풀로 붙여서 곡면 형태를 만드는 것이었다. 예술 작품이라 할수 있을 정도의 장인 정신이 보이는 조명 기구다. - P203
게리의 디자인 프로세스는 모형에서 시작해서 모형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약 60개 정도의 모형을 제작한다고 한다. 디자인 초기 단계에는 다소 즉흥적이고 감성적이면서도 황당한 방식을 사용한다. 먼저 종이를 구겨서 책상 위에 던져 보면서 여러 가지 형태를 만든 후, 마음에 드는 부분이 발견되면 전자 감지 펜이 달린 3D 디지타이저를 이용해 모델 위의 표면을 한 점 한 점 찍어서 컴퓨터상의 모델링으로 재현한다. 이후 컴퓨터 내에서 형태를 조정해 최종 건축 형태를 완성한다. - P206
디지타이저(digitizer): 아날로그 데이터를 디지털 형식으로 변환하는 장치로, 컴퓨터에 그림이나 도형의 위치 관계(좌표)를 부호화하여 입력한다. - P487
최종 건축물의 컴퓨터 모델이 만들어지면 그 데이터를 가지고 프랑스 ‘미라주‘ 전투기를 디자인할 때 사용했던 ‘카티아CATIA‘라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해서 철골구조 틀을 설계한다. 이후에 휘어진 골조의 정보를 공장으로 보내어 제작한다. 이때 3차원 모형의 표면은 마치 종이 모델의 전개도를 만들듯이 2차원 평면 조각으로 나누어 그 정보를 보낸다. 이렇게 공장에서 정확하게 제작된 철골빔과 패널들을 현장으로 옮겨서 조립하여 건축물을 완성한다. - P207
3차원 곡면의 화려한 형태는 바로크 시대부터 있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다. 그만큼 찌그러지고 기이하고 화려한 형태를 추구했던 시절이 바로크 시대다. 그당시 건축에서 바로크 형식을 표현하는 방식은 대리석을 찌그러진 형태로 깎아서 조각하는 방법밖에는없었다. 그렇다 보니 장식의 형태로밖에 만들 수 없었다. - P207
배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유선형의 곡선으로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바닷물이 들어오면 안 되니 방수가 철저해야 한다. - P208
콜럼버스의 달갈처럼 만들고 나니 쉬워 보이는 것이지 첫 시도는 항상 쉽지 않다. - P208
1980년대에 가정용 컴퓨터가 나오면서 컴퓨터를 이용해 여러 가지 파격적인 형태를 디자인하는 건축가가 많아졌다. 현대 철학의 해체주의를 이용해서 파격적인 디자인을 시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 자신의 파격적인 디자인을 실제 완성된 건축으로 현실화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게리가 대단한 건축가인 것은 자신이 상상한 파격적인 건축을 실제로 현재의 기술을 이용해 산업 생태계 안에서 실현하는 방법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게리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어려서부터 가졌던 물고기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누구나 생각은 했지만 만들 수 없었던 형태를 완성하기 위해 게리는 미국 디트로이트에 있는 자동차 회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 P209
게리는 건축 형태를 만들 때 비논리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예술가의 면모가 부각되었고 따라서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 - P210
게리가 그런 영향력 있는 건축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기술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게리는 발전한 새로운 IT 기술과 함께 자신의 디자인을 진화시켜서 살아남아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종을 창조해 낸 건축가다. - P212
유대인 성막의 공간은 성전 마당, 성소, 지성소라는 세 단계로 나누어져 있다. ‘성전 마당‘은 보통 사람들이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담장을 지나서 맞이하는 첫 번째 공간이다. 성전 마당을 지나면 만나는 공간은 직사각형 천막으로 만들어진 ‘성소‘로, 그 안에서 정식 제사가 진행된다. 성소까지는 제사장의 출입이 가능하다. 성소 내부의 중간쯤에는 휘장이 쳐져 있는데, 그 휘장 뒤편이 ‘지성소다. 이곳은 창문도 없고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의 1편 <레이더스>에 나오는 ‘모세의 성궤‘가 놓인 곳이기도 하다. - P220
이렇듯 신성한 공간을 구축할 때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방식은 ‘공간 안의 공간‘이라는 기법이다. 사실 공간 안에 공간을 배치해 안쪽의 공간을 성스럽게 만드는 기법은 모세의 성막 이전에 이집트 신전에서도 사용되었고, 북경 ‘자금성‘에서도 보이고, 심지어 우리나라 ‘청와대‘에서도 보이는 기법이다. 그러니 인류 보편적인 기법이라고 할수 있다. 단 유대인 성막이 ‘자금성‘이나 ‘경복궁‘과 다른 점은 성소와 지성소에 창문이 없다는 점이다. - P220
동양의 건축에서 보통 공간 안의 공간을 만들 때는 담장을 이용했다. 반면 서양에서는 벽으로 완전하게 내부와 외부를 분리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처럼 창문이 없는 벽으로 공간 안의 공간을 만드는 평면 기법이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에서 보인다. 아마도 고든 번샤프트는 미국의 러시아계 유대인이었기에 이러한 기법을 어렵지 않게 구상했을 것이다. - P221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을 설계할 때 유대인 성막을 떠올린 이유는 아마도 두 건축물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했던 여호와가 임재하는 성궤를 보관하는 건축물이 지성소가 있는 성막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전당인 대학에서 가장 중요한 희귀 도서를 보관해야 했던 곳이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이다. - P221
도서관의 서고는 일반적으로 책의 보호를 위해 햇빛에 노출되지 않는 안쪽에 배치된다. 그런데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에서 보관하는 책은 그냥 책도 아니고 아주 희귀한 책이다. 당연히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창문 없는 공간에 배치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이네케 고문서 도서관‘에 비치된 희귀 도서는 유대인 성막에 보관된 성궤인 것이다. - P222
슬래브(slab): 콘크리트 바닥이나 양옥의 지붕처럼 콘크리트를 부어서 한 장의 판처럼 만든 구조물 - P487
인간은 1만년 전부터 건축에 돌을 사용해 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돌을 빛이 투과하는 특성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고든 번샤프트는 그런 물질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건축을 보여 준 대가大家다. - P225
솔로몬 구겐하임은 미국 광산과 철강 업계의 재벌이었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선정해서 미술관을 건축했다. - P228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전체적으로 흰색 재료로 마감된 리본 같은 벽체가 빙빙 돌면서 위로 올라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을 바라본 첫인상은 뱅뱅 돌려서 만든 소프트아이스크림 같다는 것이었다. 달팽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 P228
이 미술관을 설계한 라이트는 주변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땅에서 자라난 듯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유기적 건축의 대명사다. 그런 그가 설계했다고 보기에 이 미술관의 디자인은 주변과 너무 이질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주변을 보면 그가 왜 이렇게 설계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한다. 라이트는 격자형으로 구획된 뉴욕에서 적용할 만한 자연의 특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 환경보다는 미술관이라는 ‘용도‘에 더 집중했다.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벽‘이다. - P229
그림은 태생적으로 벽이 필요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림은 18000년 전쯤에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그려진 벽화다. 바닥에 그림을 그리면 동물이나 사람에게 밝혀서 지워진다. 비가 와도 지워진다. 비가 와도 그림이 지워지지 않는 장소를 찾아 동굴 속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당시 선사 시대의 인간은 땅을 얕게 파고 나무를 기울여 세워서 지붕을 만든 움집에 살았다. 그런 집에는 그림을 그릴 만한 벽이 없다. 그래서 몸에 그림을 그리는 문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피부 면적은 너무 작다. 더 크고 많은 그림을 그릴 공간이 필요했다. 선사시대 인간은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캔버스같이 넓고, 비가 와도 지워지지 않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렇게 벽과 함께 그림은 시작되었다. 벽이 없다면 그림은 없다. - P229
이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도 회칠한 벽이 마르기 전에 완성하는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시간이 흘러 유화 물감이 발명되자 사람들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서양 화가들은 캔버스를 벽처럼 세워 놓을 수 있게 이젤을 들고 다녔다. 이젤을 세우고 그 위에 얹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그림이 완성되면 벽에 걸었다. 동양화는 종이를 바닥에 놓고 그렸지만, 그림이 완성되면 이 역시 족자에 담아 벽에 걸거나 병풍으로 만들어 벽처럼 세워 놓았다. 이래저래 그림은 벽이 필요했다. 그림이 많은 미술관에는 정말 많은 벽이 필요하다. - P230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벽이 필요하다는 미술관의 기본에 충실한 건물을 디자인했다. 하지만 네모난 방의 벽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기다란 벽을 만들었다. 관람자는 그 벽만 계속 따라가면서 보면 된다. 그건물이 넓은 땅에 위치했다면 직선으로 기다란 벽을 만들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주어진 대지는 뉴욕이라는 번잡한 도심 속의 작은 땅이었다. 따라서 건축가는 430미터나 되는 기다란 벽을 연속되게 만들기 위해 경사로를 따라 둥그렇게 위로 말아올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네모난 방을 만들 경우 생겨나는 각진 모서리 없이 연속된 벽체를 만들 수 있었다. - P231
그 공간 위에는 천창을 두어 햇빛이 들어오게 했다. 마치 ‘판테온‘의 천장에서 빛이 내려오듯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의 천장에서도 빛이 내려온다. 사람은 주광성 동물이니 빛이 있으면 그쪽으로 시선이 간다. 따라서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발을 들인 사람들은 곧장 6층까지 뚫린 공간 중앙에서게 되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천장을 바라보게 된다. - P231
철근 콘크리트와 엘리베이터의 발명과 더불어 근대 이후의 건축은 여러 층의 평면이 똑같이 반복되는 구조를 가진다. 우리 주변의 모든 상가와 아파트가 그렇다. 그렇게 똑같은 평면이 층층이 쌓인 형태를 건축가들은 ‘팬케이크 평면‘이라고 폄하해서 이야기한다. 똑같은 모양으로 동그랗게 부쳐진 팬케이크를 층층이 쌓아 먹는 문화에 빗댄이야기다. 이런 공간 구성의 가장 큰 문제는 각 층에서 다른 층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P236
라이트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운데 커다란 빈 공간을 두고 전시장을 빙빙 돌려서 선형으로 배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4층 전시장에 있어도 3층과 5층을 볼 수 있는 공간 구조를 만들었다. 각 층의 공간이 분절된 디지털적인 공간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아날로그적인 공간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층간의 구분이 없어진 공간이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3층인지 4층인지는 의미가 없다. 그저 벽에 걸린 그림과 함께 산책하듯이 걷는 나만 존재할 뿐이다. 기분 좋게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미술관이다. - P237
원래 가장 새롭고 좋은 디자인은 불편함을 없애고 필요에 따라 구상된 디자인이다. 각종 발명품이 그렇게 탄생했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 덕분에 인문학 열풍이 불어서 경제 경영에 인문학을 어떻게 접목하느냐로 난리지만, 원래 인문학적 디자인의 기본은 불편함을 없애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어렵지 않다. 원래 하수들이 어려운 철학을 가져오고 구구절절 설명이 길다.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은 이런 기본에 충실한 고수의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P238
많은 사람이 높은 건물을 원한다. 특히 오피스 건물의 경우에는 더 높게 짓고 싶어 한다. 건물이 높아지면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건물 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좋다. 더 멀리 볼 수 있고 더 넓은 공간을 시각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 둘째, 높으면 주변에서 잘 보인다. 회사 입장에서 이만한 광고 효과도 없다. 그래서 ‘롯데월드타워‘도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지으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한 것이다. 서울의 웬만한 위치에서는 ‘롯데월드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 P241
어떤 건물이 눈에 띄면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 그 건물에 대한 정보가 만들어진다. 따라서 많은 사람의 눈에 띈다는 것은 그 건물에 대한 정보의 총량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량의 증가는 권력의 증가를 뜻한다. 높은 건물은 정보의 불균형을 만든다. 그래서 어느 사회든지 가장 높은 권력자들은 높은 건물을 만들었다. 고대에는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중세를 지나 근대까지 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돔 지붕이 있는 대성당들이었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높은 건물을 지으려고 한 노력의 결과물이 모여서 그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 P242
아르데코(art déco) 양식: 1910~193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서구에서 시작된 양식으로, 아르누보와 달리 기본형의 반복, 지그재그 등 기하학적인 무늬를 즐겨 사용했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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