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에 이 책을 처음 읽고나서 그 전부터 읽던 다른 책들을 읽느라 우선 순위에서 약간 뒤로 밀려 있었는데 9일이 지난 오늘 다시 이어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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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3에 밑줄 친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없이 쩔쩔매야 겨우 살아남는 것이 기업의 현실‘이라는 말이 굉장히 와닿게 느껴진다.

저자가 직접 출판사를 경영하고 실패했던 경험을 통해 처절하고 뼈저리게 배웠던 것들을 읽어보면서 회사 경영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을, 철저한 계획과 디테일이 필요한 일임을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책에 제시한 다양한 사례들을 읽어나가면서 뭔가 나타해져 있던 정신력이 다시금 무장되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을 느껴야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바빠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 할 정도로 무언가를 성취해나갈 때, 사람들은 비로소 보람을 느낀다. 자기가 가진 것의 120%를 꺼내 그것으로 성과를 만들어내고, 주변의 인정도 받을 때 보람을 느낀다. - P62

직원이 회사를 떠나지 않고 행복감을 느껴 고객을 더 성심껏 대하기 때문에, 대외적인 성과나 고객의 평가도 좋아진다. 조직의 선순환이다. 단,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영자인 내가 실무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일들을 내가 다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 P62

경영자라면 어떤 산업에서 일하건, 인건비의 무서움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될 수 있으면 더 많이 일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가 편해지려고 직원을 고용하거나 폼을 잡기위해 고용한다면 무조건 망한다. 직원이 많아 너나없이 시간이 남아돌고, 일이 편하다 못해 잡생각마저 드는 상황이 되면 절대로안 된다. 사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야 된다. - P63

직원들이 시간이 남아돌아 사내정치가 횡횡하면 볼장 다 본회사가 되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미친 듯이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없어 쩔쩔매야 겨우 살아남는 것이 기업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역시 실패하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 P63

결국 회사가 친목단체와 같은 분위기가 되서 ‘일‘보다 ‘관계‘ 중심의 기업문화가 형성되었다. 출근 시간에 늦는 직원이 정시에 오는 직원보다 많아졌다. 회사의 분위기도 놀이집단처럼 되어버렸다. 시무식, 종무식, 회식 같은 각종 ‘식‘들은 모두 챙겼다. 그 결과 복리후생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결국 분위기 좋던 직원들을 잘라야 하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 P64

이때 나는 출판사의 맥을 정확히 짚었어야 했다. 출판사는 ‘제대로 된 기획이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능력 있는 기획팀을 만들어 안을 내게 하고, 나는 정확한 판단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출판사의 실무는 단 몇 명만으로도 운영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했다. 직원을 뽑더라도 철저히 실무 위주로 뽑되, 기획과 관리에서 각 1명 정도만 뽑았어야 했다. 직원에게는 ‘회사란 돈을 버는 곳‘이라는 인식을 정확히 심어주었어야 했다. 관계보다는 ‘일‘ 중심으로 회사가 운영되어 효율과 결과로 말하는 출판사를 만들었어야 했다. 전체 관리는 총무에서 맡되, 나는 재정만 제대로 확인하면 됐다. 재정 관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나름대로의 깐깐한 기준을 세워두면 된다. 그렇지 않고 안이하게 대처하다가는 거래처 부실이나 과다 재고 등 여러 문제로 또 다른 위험에 처할 수있기 때문이다. - P65

결론적으로 나는 이상주의, 혹은 과도한 자신감에 빠져 합리성을 잃은 결과로 직원 채용에 실패했다. 내가 이 인사 실패에서 배운 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신의를 최우선적으로 보되, 능력까지도 철저하게 검증을 해야 한다.
2. 이유 없는 채용은 필패만을 부른다.
3. 현실주의자가 아닌 이상주의자를 채용하면 망한다.
4. 신념이나 출신 배경이 같다는 이유로 아무런 검증 없이 믿으면 절대안 된다.
5.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우선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
6. 추천 채용을 할 때는 반드시 재검증을 거쳐야 한다.
7. 회사는 친목단체가 아니라 경제전쟁터라는 것을 인지시켜야 한다.
8. 회사는 관계보다는 일이 우선이다.
9. 사업의 본질을 꿰뚫고 본질에 적합한 채용을 해야 한다.
10. 직원을 채용한 뒤에도 지속적으로 전투적 마인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11. 직원이 잘못을 하면 즉시 지적을 해서 잘못을 고치도록 해야 한다.
12. 내가 모든 직원들 중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해야 하고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 P66

우리 인생은 길게 보면 전쟁과 같다. 이상에 빠져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만년의 저작인 《여록과 보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갖 협잡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강철 같은 기질을, 운명의 일격을 막아낼 갑옷을, 사람들을 밀치며 나아가기 위한 무기를 지녀야 한다. 인생은 하나의 기나긴 전투다. 인생의 매 단계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공할 때는 칼날 바로 끝에서 성공하며, 우리가 죽을 때는 손에 든 그 무기로 죽는다." - P67

성공이라는 이상을 품되,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의심해보고 또 의심해보았을 때 더 이상의 의심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때에 가서야 비로소 믿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경영에 임해야 한다. 직원 채용도 마찬가지다. 합리성을 잃고 이상에 빠진다면 누구라도 나처럼 반드시 실패를 하고 말 것이다. 누구보다 처절하게 실패해본 내가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다. - P67

요즘 내가 탐독하고 있는 책은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중조(日本中祖)라는 파격적인 칭호까지 받은 관상가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가 지은 절제의 성공학이다. 이 책에서는 ‘음식 절제‘를 해야 성공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술과 고기‘는 가급적 삼가고 ‘아침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전하고 있다. 나는 요즘에 와서야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실패를 예약해두고 있던 그때. 나는 이것을 실천하지 못했다. 꽤 부지런한 편에 속하긴 하지만, 절제가 부족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회사 내에서 술을 절제하지 못했다. - P68

정말 창피한 얘기지만, 당시 나는 학원 간부들과 룸살롱엘 자주 갔다. 한 번 가면 2~300만원은 우습게 썼다. 내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동류의식, 즉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수단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남자들 사이에는 여자 종업원이 나오는 술집에 갔다가, 다음날 해장을 하고 같이 사우나엘 가야 비로소진짜 신의가 싹튼다는 묘한 미신이 있다.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가장 솔직하고 원초적인 모습‘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상대의 약점을 쥐는 일종의 의식인 셈이다. 나 역시 이런 ‘의식‘이 임원들의 사기를 올려주고 단합을 강고하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나에 대한 감사함으로 승화돼 더 일을 열정적으로 해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순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 P69

그들은 냉정하게 말해, 나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회사에 온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이다. 나를 통해 돈을 벌면 그만이다. 더 나은 돈벌이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나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술은 단지 즐기기 위한 여흥거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을 통해 내게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자리에서는 웃고 즐기며, ‘우리 이사장님, 우리 이사장님‘ 하지만 뒤돌아서면 침을 뱉으며 욕한다. - P69

나는 그들에게 생활을 해결할 도구와 미래를 만들어갈 무기를 주기는커녕, 절제와 경건이 아닌 타락으로 이끌어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방향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더군다나 ‘이사장은 돈을 쉽게 쓰고 해달라는 건 척척 다 들어주는 맹목적 굿 보이‘라고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술은 임원을 타락의 늪으로 이끌었고 그들 자신의 본업인 경영과 강의에 더 소홀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돈, 시간만 버린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업무 능력까지 지속적으로 떨어뜨렸다. - P70

기강이 해이하고 실적이 나지 않을 때, 그들에게 술을 사줄 것이 아니라 해고 통지서를 주었어야 했다. 실력이 검증된 실무자를 선발해 그와 함께 새벽 6시에 업무 회의를 했어야 했다. 열정적인 분위기가 될 수 있도록 나 스스로 가장 먼저 나오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모범을 보였어야 했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모였으니, 인맥이나 인간관계 혹은 술자리에서 오는 신뢰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일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싹트는 신뢰와 존중이 넘쳐나도록 했어야 했다. 임원의 사기진작은 술이나 회식이 아니라 수익에 따른 일정 비율의 인센티브로 할 수 있도록, 근로계약조건에 명기했어야 했다. - P70

‘우리는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여기 모였다‘는 잊을 수 없는 냉엄한 목적을 상기시키면서도, 자연스럽게 절제와 경건이 묻어나는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 속에서 동료 선후임으로서의 신뢰와 존중이 생겨나 제대로 된 관계가 정립되도록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실패 이후에야 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 - P71

학원 못지않게 출판사는 한술 더 떴다. 나는 출판업을 ‘문화 자선사업‘ 쯤으로 생각했다. 내가 가진 종교적 이상에 더해, 가족과 같은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흡사 종교단체 내지는 친목단체 같은 묘한 분위기의 회사가 만들어졌다. - P71

임원과 직원은 모두 같은 종교인 위주로 뽑았다. 직원들과 평일에도 종교적 모임을 가졌다. 관계를 중시하다 보니 회식 횟수가 잦았고 생일이나 기념일, 각종 경조사를 ‘업무 마감 기일‘ 보다 더철저하게 챙겼다. 시무식, 종무식 같은 각종 ‘식‘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직원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 같이 영화를 보거나 책을 보고 대화를 하는 시간도 많이 가지려고 했다. 한마디로 대학 동아리 같은 회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 P71

그러나 이는 철저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회사는 절대 친목단체나 종교단체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P71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는 ‘위대한 기업의 기업문화로 흡사 유사종교단체‘와도 같은 열정적인 분위기를 꼽았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디까지나 선후가 명확해야 한다. 창의적인 조직은 놀 때 잘 놀고 일할 때 피 터지게 일한다. 어떤 경우에는 놀다가도 업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그것이 곧 신규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하지만 안 되는 조직은 어떠한가? 일할 때는 남의 눈치만 보고 놀 때도 뜨뜻미지근하다. 과거만 답습하고 튀는 아이디어를 내면 밟힌다. 군대와 같은 숨 막히는 위계질서와 쓸데없이 딱딱한 규율이 창조성을 가로막는다. - P72

하지만 반대로 가도 너무 반대로 갔다. 본질을 망각한 채, 무조건적인 ‘자유‘가 곧 ‘자율‘을 가져올 것이라 막연히 믿었던 것이다. - P72

제대로 일을 하고 크고 작은 성공 경험을 하면서 진정한 신뢰는 싹튼다. 술판을 벌이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끈끈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노는 와중에 풀어지고 방만해지면서 서로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한다. 제일 심각한 문제는 느슨해진 머리로는 업무에 대한 감을 잃기 십상이고,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다는 긴장감을 잃게 되어 성공의 가장 핵심 주춧돌인 ‘강철 같은 정신력‘이 흐트러져 버린다는 점이다. - P72

식당엘 가보면 잘 되는 곳과 안 되는 곳의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바로 종업원들의 표정과 몸짓이다. 잘 되는 식당엔 파이팅이 넘치고 행동이 일사불란하며 종업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듯 보이지만 질서가 있고, 누가 무엇을 맡을지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반면, 안 되는 식당은 청결 상태부터 불량하다. 직원들의 눈은 풀어져 있고 손님이 뭔가를 요구하면 짜증 섞인 표정으로 응대한다. 동선은 엉망이고 실수도 잦다. - P73

과연 잘 되는 식당은 사장이 무조건 잘해주어서 그런 것일까? 백발백중 아니다. 오히려 더 엄격하고 냉철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직원들 사이에 규율이 분명하고 이른바 ‘성공경험의 전수‘가 확실히 이루어진다. 잘하는 선임이 새로 들어온 후배를 확실히 가르친다. 후배는 선임을 믿고 따르며 ‘제대로 해내야 한다‘는 의지로 충만하다.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은 바로 도태된다. - P73

모름지기 사업가라면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직원들에게 쩔쩔매기보다는, ‘우리는 냉혹한 현장‘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강조해야 마땅하다. 우리가 여기 모인 목적, 즉 ‘이윤 추구‘가 제대로 안 되면 회사는 공중분해된다. 당장에 생계가 막막해지면 모두들 막노동을 하거나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하러 가는 수밖에 없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런 ‘바늘‘ 같은 이야기를 통해 직원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여 몸속에 있는 ‘게으른 독, 안이한 독, 낭만적 독‘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 P74

같이 영화나 책을 볼 기회가 있다면, ‘오늘 당장 살아남기 위한‘ 공부가 되는 것을 보고 읽어야 한다. 종교의 자유는 인정하되, 회사에서 종교모임을 갖거나 전도를 하는 행위는 철저히 금해야 한다. 오히려 회사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종교 활동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라 해도, 그러려면 우선 기업으로서의 우리가 바로 서야 하기 때문이다. - P74

제대로 일이 돌아가지도 않는데 장밋빛 이상을 말하는 것은 사치이고, 우리가 먹고 살 것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면서 ‘남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허세다. 그런 사치와 허세가 조직에 자리잡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경건과 절제의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도 개인적 인맥을 관리하는 일에 몰두하며, 메신저나 스마트폰의 SNS를 붙잡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경건과 절제와는 거리가 멀다. - P74

회사는 절제와 경건의 자세로 치열한 전쟁터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다. 취미생활을 하는 곳도 아니고 사람들과 친교를 쌓는 친목활동을 하는 곳도 아니다. 회사가 성공하려면 개개인이 단단한 사상적 바탕 위에 발을 딛고 정신적으로 무장이 되어 있어야한다. 그 핵심이 바로 ‘현실주의‘다. - P75

회사 기물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면서 ‘나는 회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10분 지각 정도는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 역시 도덕성과는 거리가 멀다. 작은 것 하나에 느슨해지면 큰 것에도 어느새 느슨해지게 마련이다. 하물며 임원들과 룸살롱엘 가거나 자주 회식을 하는 일이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니, 내가 내 발등을 찧고 싶을 뿐이다. - P75

회사는 철저하리만큼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고, 그 바탕은 바로 절제와 경건의 자세다. 개인이 성공하려면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강한 정신력을 가져야 하고, 회사가 성공하려면 이것이 전체의 기업문화가 되어야만 한다. - P75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폼을 잡게 돼 있다. 괜한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명예를 추구하려 들기도 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사업을 할 때 폼을 잡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솔직히 나는 처음 사업을 할 때 돈을 벌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명예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강했다. 학원강사라는 직업은 돈은 많이 벌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돈이 생기면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해야 한다고 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게 엄청난 독이 되고 말았다. - P76

당장에 큰 쓸모가 없는데도 임원을 여럿 채용한 것 역시, 내 안에 있던 ‘있어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있어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그들의 연봉으로 쏟아 부었다. 학원 이름도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A학원에서 ‘A학원그룹‘으로 바꿨다. 차도 고급 차로 바꿨고, 비서까지 따로 뒀다. 무려 120여 명의 직원들을 거느리게 됐다는 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소위 잘나가간다는 사람들도 이때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A학원그룹 이사장‘이라는 명함을 건네면 왠지 모르게 으쓱해졌다. - P77

폼을 잡는 순간은 달콤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내가 부렸던 허세들은 모두 ‘돈 몽둥이‘가 되어 나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부담해야 될 비용으로 다 돌아왔던 것이다. 괜한 폼만 잡다가 그동안 애써 쌓았던 실리들을 모두 잃어버린 격이었다. 결국 2년 사이에 20억 원을 날리고, 나는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 P78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이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나는 사업을 할때 폼 대신 실리를 추구했어야 했다. 간부는 정말 현업에 필요한 딱 한 명만 고용해서 비용 지출을 최소한으로 줄였어야 했다. 무엇보다 사장실을 간소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비서를 뽑으려면, 정말이지 나의 업무가 너무 과중해 혼돈이 생겨나고 정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을때 채용했어야 했다. 쓸데없이 이 사람 저사람 만나는 일을 자제하고 본업에만 전념했어야 했다. - P79

고객의 주머니에서 내 주머니로 돈이 들어와, 그 ‘돈‘이 존재해야 누구라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돈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잘 들어오다가도 어느 순간 수도꼭지를 잠근 것처럼 확 줄어들거나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여유자금이 있다면 최대한 비축을 해두어야 한다. 꼭 필요한 곳, 수익과 연결되는 곳에만 쓴다는 생각으로 리모델링, 과도한 신문광고, 브랜드 인수 비용 따위에는 단 1원도 쓰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간부 연봉 4억 4천만 원, 리모델링비 3억 원, 신문광고비 4억 원, 브랜드비 3억 원, 과도한 임대료, 품위유지비, 교제비 등을 절감해 약 15~17억 원을 아낄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를 넘은 숫자의 강사와 직원을 채용하지 않았더라면 여기서도 많은 돈을 아낄 수 있었다. 단적으로 연봉 2천만 원인 직원 20명만 덜 채용한다면, 2년간 무려 8억 원을 아낄 수 있다. - P79

물론 필요한 인력, 필요한 비용이라면 얘기는 다르다. 그 사람이 정확히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몫을 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몇 사람 몫을 하는 ‘일하는 문화와 습관‘을 만들었다면, 같은 비용을 훨씬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을 것이다. - P80

비단 사업가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 당장 당신의 통장 지출 내역을 열어보라. 그중에서 꼭 필요한 비용은 얼마나 되는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12개월 할부로 산 명품 가방, 쓸모도 별로 없는데 스펙만 과다한 각종 첨단기기들, 남들이 다 사니까 장만해야 한다고 생각해 리스나 대출을 끼고 산 자동차나 아파트, 폼을 잡기 위해 쓰는 비용과 정말 필요하기에 쓰는 비용을 나눠서,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는 것이 좋다. 펑펑 벌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벌 수 없을 때가 온다. - P80

달콤한 폼을 무작정 추구한다면 평생 빚더미 속에서 회한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처절하게 실패를 맛본 내가 지금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 중 하나다. - P81

기업 활동은 냉정하다. 망하면 끝이다. 망하고 나면 누구도 내게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일했건 안했건 관계없이, 결과를 묻는 순간은 어김없이 다가온다. "너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 여기 네 성적표 있어, 받아가." 나는 결과가 내게 건네는 이 냉정한 일갈에 뭐라 답할 말이 없었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는 업무 중 많은 시간을 인터넷 뉴스를 보는 데 할애했다. - P83

신문기사를 보면 ‘기업들이 직원들로 하여금 업무시간에 개인 홈페이지 관리나 메신저, 인터넷 쇼핑 등을 하는 걸 막느라 애쓴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인터넷 서핑 조금 하는 것이 사업의 승패에 영향을 얼마나 주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P84

그러나 비즈니스에서의 승패는 종이 한 장 차이에서 결정될 때도 많다. 매일 정치기사를 읽고 댓글을 다는 일이나 여타의 업무와 관계없는 다른 일을 하는 데 30분씩만 사용한다 해도, 1년이면 1,095분, 무려 182 시간이다. 하루 8시간 일을 한다고 가정할 때, 무려 23일이 낭비가 되는 것이다. 주 5일 근무라면 거의 한 달이 날아가는 셈이다. 결국 나는 일 년 중 한 달을 인터넷 정치뉴스를 클릭하며 휴가를 보낸 꼴이었다. - P84

비행기를 타보면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은 흔히 정치나 스포츠신문을 본다고 한다. 그런데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들은 주로 경제신문을 본다고 한다. 전자는 정치나 스포츠에 관심이 많고, 후자는 경제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결국 사람이란 관심을 쏟는 것에서 결실을 보기 때문에, 전자는 정치나 스포츠의 달인이 되고 후자는 경제의 달인이 된다. 그런데 전자의 경우 실제 정치인 스포츠인,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스타들이 승승장구하는 것만을 지켜보고 박수만 칠 뿐, 그들 자신이 성공하고 잘 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스타들이 그들의 응원을 받고 성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신문을 보는 이가 열심히 달리는 사이에 뒤쳐져 패배의 쓴잔만을 삼키게 될 뿐이다. 실제 정치나 스포츠 혹은 연예인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서 그 업종에 종사하는 자가 아닌 한, 자기 본업에서 성공하는 경우는 단언컨대 5%도 안 된다. 성공이란 그렇게 한눈을 팔면서 얻을 수 있는 손쉬운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 P85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배가 고프기 때문에 죽어라 하지만, 나중에 어느 정도 배가 부르게 되면 골프 같은 취미생활이나 이성, 술 등 유흥에 빠져 패가망신 하는 경우가 많다. 본업이 자리를 잡게 되자 안이한 마음이 생겨 본업 이외의 일을 프로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한 결과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 뒤늦게 취미 삼아 한 일에서 프로가 되기란 쉽지 않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은 인간사에서 극히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 P85

그러므로 성공을 하려면 본업 이외의 일에는 가급적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설령 내가 관심을 기울이는 이가 성공한다 해도, 그것은 내가 성공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오히려 시간과 돈과 열정만 낭비하여 본업에서 실패를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돈없는 쓸쓸한 노후를 맞게 될 가능성만 많아진다. - P85

"에이, 하루 30분~1시간 정도, 대충 다른 일에 관심 가지는 것도 어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가랑비에 당신의 옷은 젖게 되고, 냉혹한 경쟁이 벌어지는 추운 겨울 속에 남겨진 당신은 결국 그 가랑비 때문에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직접 체험한 일입니다." - P86

시간이 흐르고 보면 가장 후회되는 때가 바로 ‘무언가에 완전히 올인 하지 못하고 소홀히 했던 순간‘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하지 않고 뭘 했을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박고 싶을 때가 있다.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공부할 수 있을 때 못한 것‘, ‘직장이 있을 때 성실하지 못한것‘, ‘조금만 더 갔으면 원하던 걸 이뤘을 텐데 마지막 순간에 게올러지거나 쓸데없이 어영부영하며 흘려보냈던 것‘ 등 후회의 순간들이 불 꺼진 방구석에서 바퀴벌레 기어나오듯 스멀스멀 나를 괴롭힌다. 후회할 때 후회할 게 아니라, 닥쳤을 때 해냈으면 됐을것을. - P86

후회는 누구나 한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다시는 동일한 후회의 순간이 오지 않도록 하는 사람만이 그 후회로부터 무언가를 배운 사람이다. 본업을 할 수 있을 때 본업에 소홀한 것이 얼마나 뼈아픈 것인지는, 실패한 내 과거가 지금 내게  알려주는 엄중한 경고다. - P86

당신은 포기를 잘하는가? 거절을 잘하는가?
흔히 ‘거절‘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성공하는 사람의 필수요소로 꼽히지만, ‘포기‘라니 의아한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경험상 이 둘에 능하지 못하면, 사업에서든 일에서든 실패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내 경우도 둘 다 잘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실패했다. - P87

그런데도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무모한 희망만 바라보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계속했다. 변화의 흐름도 읽지 못했고 본질 중심의 경영도 하지 못했으며 폼만 잡는 총체적 난국 속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때, 바로 그 순간 신속하게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는 포기전략을 택했어야 했다. 하지만 ‘사나이 뚝심은 죽어도 한 곳에서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사업을 밀어붙인 결과, 2년에 걸쳐 20억 원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 P88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 될 일인지 안 될 일인지 판단을 잘해야 한다. 이 사업을 할까 말까. 이 시험에 도전할까 말까, 심지어 이성을 사귀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조차, 가부 여부를 신속 정확하게 판단해야 기회비용과 매몰비용을 적게 치를 수 있다. 그러지 않고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심정으로 목숨 걸고 끝까지 매달리다가는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 - P88

‘포기‘에 능하지 않은 사람은 사기에도 잘 속아 넘어간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내게 돌아올 기회‘가 아니고 ‘현실 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닌데 결과에 대한 달콤한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화투판의 도박사기, 하루 서너 시간만 투자해 월 수백만 원을 벌 수 있다는 각종 취업사기, 곧 용도변경이 될 토지에 대한 정보를 당신에게만 준다는 떴다방의 부동산 사기까지, 넘어가는 사람의 심리를 가만 살펴보면, 다 ‘포기‘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고 포기해야 하는데, ‘본전을 건지겠다.‘는심정으로 계속 매달린다. 그래서 더 큰 손해를 보고 나중엔 발을 뺄 수 없게 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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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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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내용 구성이 굉장히 짜임새 있게 느껴졌다. 또한 동일한 시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앞에서는 린샹푸의 관점에서 뒤에서는 샤오메이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내용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에서 몰랐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뒤에서 퍼즐처럼 맞춰지는 전개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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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겨울. 시진에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의 눈이 계속 내리자 사람들이 성황각에 모여서 눈이 그치고 햇빛을 보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낸다.

원래는 제사를 지내는 실내장소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개인적인 기도까지 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자 뒤늦게 온 사람들은 장소가 뭐가 중요하냐면서 티격태격 대다가 그냥 밖에서 기도하기로 한다. 그 중에는 아창과 샤오메이 그리고 계집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린샹푸는 때마침 그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지나다가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다. 다만, 거기에 샤오메이가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이후 샤오메이는 구이민이 이끄는 상인회의 주관하에 시산의 어느 후미진 곳에 묻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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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전환되어 소설 앞부분에 나왔던 토비와 싸우다가 전사한 린샹푸가 톈다 형제들에 의해 관에 실려서 이동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운명의 이끌림인지는 몰라도 린샹푸는 샤오메이가 묻혀 있는 장소로 옮겨진다.

딸의 이름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끊임없이 부르는 동안 샤오메이는 마음속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바깥에서 끝없이 내리는 눈송이를 잊을 수 있었다.

그날 누가 문을 두드리면서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타인의 숨결이 집으로 돌아왔다.

상인회에서 파견나온 그 사람은 성황각에서 눈을 그치고 햇볕을 내려달라는 천제를 올리려 한다고 알려주었다.

집 밖에서 소리가 들릴 때마다 안에 있는 아창과 샤오메이, 계집종은 햇살이 조금씩 비쳐드는 기분이 들었다.

제사가 사흘 째로 접어들었을 때 샤오메이가 성황각에 가자고 하자 아창이 고개를 끄덕이고 계집종도 끄덕였다. 그들 모두 성황각에 가고 싶었다.

샤오메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날씨를 위해 기도한 뒤 린샹푸를 위해 빌었다. 린샹푸가 딸을 안고 그 먼 길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 아프고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린샹푸에게 말했다.
‘다음 생애도 당신 딸을 낳아주고 그때는 아들도 다섯을 낳아줄게요..... 다음 생에 당신 여자가 될 자격이 없다면 소나 말이 되어, 당신이 농사를 지으면 밭을 갈고 당신의 마부가 되면 마차를 끌게요. 채찍질해도 돼요.‘

샤오메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린샹푸가 자기 앞에서 말하는 걸 보고 있었다.

그때 샤오메이의 눈에 입을 벌린채 자신을 향해 방긋방긋 웃는 딸이 보였다. 하얀 앞니가 두 개 자라나 있었다. 샤오메이는 눈물을 흘렸다. 그 두 줄기 눈물이 그녀 몸에 남은 마지막 열기였다.

성황각 천제가 사흘 째 진행되던 날, 린샹푸는 딸을 안고 그곳을 지나가다가 바깥 공터에 꿇어앉은 100여명의 남자와 여자를 보았다. 그들은 성황각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린샹푸는 처음으로 천융량 집에 찾아가 한참을 머물렀다. 평생에 걸친 그와 천융량의 우정이 그때 시작되었다.

천융량 집을 나와 다시 성황각을 지나갈 때 린샹푸의 눈앞에 재난이 펼쳐졌다. 공터에 꿇어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이 동사한 거였다. 망자들은 여전히 꿇어앉은 상태였지만 그들 입에서 나오던 입김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숨결도 움직임도 없었다. 린샹푸는 묘지를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얀 눈에 뒤덮인 그들의 꿇어앉은 몸이 빽빽하게 서 있는 묘비 같았다.

성황각 공터에 시신 여섯 구가 남았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아 무척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휘날리는 눈발 속에 서있던 린샹푸는 저 멀리에 있는 그 망자 여섯 명 중에 샤오메이와 아창이 있는 걸 몰랐다. 휘날리는 눈송이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멀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샤오메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샤오메이는 그때까지도 눈을 뜨고 있었다. 단지 눈빛만 잃었을 뿐이었다.

린샹푸는 마지막 시신을 도사 두 명이 들고 얼어붙은 공터에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그녀의 두 다리를, 다른 사람은 어깨를 들었는데 머리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텅 빈 허탈감이 휘날리는 눈송이처럼 린샹푸를 감쌌다.

린샹푸는 샤오메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은 두껍게 쌓인 눈에 거의 닿을 정도로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조각난 샤오메이의 아름다운 얼굴은 눈밭 위에서 떠다니듯 멀어졌다.

냇물이 1년 내내 흐르면서 오솔길마저 끊기는 그곳은 시산의 북쪽 언덕에 위치해 온종일 해가 들지 않고 이끼가 무성한 데다 수풀이 흑녹색으로 짙게 우거졌다. 선가의 선산인 그곳에 ‘선쭈창과 지샤오메이의 묘‘ 라고 새겨진 묘비가 들어서면서 묘비가 모두 일곱 개로 늘어났다.

샤오메이와 아창을 염할 때 구씨 집안의 하인들은 붉은 쌈지에 든 갓난아기의 배냇머리와 눈썹 그리고 비단 보자기에 싸인 은표를 발견했다.

하녀는 붉은 쌈지를 열어 갓난아기의 배냇머리와 눈썹을 구이민에게 보여주고는 시신을 닦을 때 복부에서 임신했던 흔적도 확인했다고 말했다.
구이민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구이민은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밖으로 누설하지 말라고 하인들에게 일렀다.

구이민은 하인에게 목수를 불러 관 두개를 짜라고 하면서 목재에도 신경을 썼다.
"목재는 버드나무 말고 송백을 쓰라고 하게. 송백은 장수를 상징하는데 버드나무는 씨를 맺지 않아 대가 끊기는 불길함을 상징하니까."

구이민은 그렇게 말한 뒤 아창과 샤오메이에게 이미 후사가 없다는 걸 떠올렸다. 그런데 무슨 대가 끊길 걸 걱정하나 싶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지만 번복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송백으로 만들게."

그렇게 샤오메이가 땅에 묻혔다. 생전에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설립을 겪었던 그녀는 죽어서 군벌의 혼전과 토비의 난무를 피하고 도탄과 파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샤오메이가 그곳에서 영면에 들어 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는 동안 린샹푸는 한번도 그곳에 가지 못했다. 그는 시산에 한두 번 간게 아니었다. 천융량과 함께 올라가 시진을 내려다보았고 린바이자를 품에 안고 갔다가 손을 잡고 가고 더 나중에는 딸을 앞세우며 여러차례 올랐지만, 그 후미진 곳까지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샤오메이는 17년을 기다린 뒤에야 그곳에서 린샹푸와 만났다.

톈씨 형제들이 수레에 관을 싣고 시진 북문을 나선 날 아침, 천융량 대오와 장도끼 무리가 왕좡에서 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톈씨 형제들은 감히 앞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을 돌아갈 길이 없는지 물었다. 그 사람은 시산으로 가는 오솔길을 가리키며 시산쪽에서 나가면 앞쪽의 왕좡을 피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관 뚜껑을 열었다가 그림자가 들어가면 혼백이 관에 갇히니까 토비도 감히 열지 못할 거예요."

톈얼은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전 다리에서 힘이 풀렸을 때 관에서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톈다가 린샹푸위로 굴러갔다가 톈싼이 건너와 도로 들어 올렸을 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듯했다. 톈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닦고 수레에 대고 말했다.
"큰 형, 도련님, 죄송해요."

잠시 쉬고 나서 네 형제는 다시 수레를 메고 영차영차 가장 좁은 길을 지나갔다. 이후에도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힘겹게 나아가다가 점심때쯤 샤오메이가 묻힌 곳에 이르렀다. 그들은 묘비 일곱개를 보았고 오솔길이 거기서 끊어지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수레를 샤오메이와 아창의 묘비 옆에 세웠다. 지샤오메이의 이름은 묘비 오른쪽에 있고 린샹푸는 관 왼쪽에 누워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좌우로 지척에 있게 되었다.

톈우가 "여기는 물이 다네요." 라고 말했다.
세 형들도 물이 달다고 생각해, 고향 마을의 우물물은 쓴맛이 좀 나는데 여기 물은 달다고 말했다.

"산을 나가면 인가에서 하얀 천을 구할 수 있는지 봐야겠어. 흰 천을 사서 길게 잘라 수레에 묶고 지붕에도 매달면 한눈에 영구차라는 게 보일거야. 그러면 토비도 강도질을 못 하겠지."

청명한 하늘과 따사로운 햇살 아래, 시산은 한없이 평온했다.

바퀴소리가 멀어지면서 톈씨 형제들의 말소리도 멀어졌다. 그들은 정월 초하루 전에 큰형과 도련님을 집으로 모셔가야 한다며 날짜를 꼽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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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즐라탄이즐라탄탄 > 신뢰성의 원천을 소비자에게 아웃소싱한 햄버거 광고 사...

1년 전 오늘 밑줄 쳤던 문장 중에 ‘시나트라 테스트‘라는 것이 나온다. 처음엔 무심코 넘겼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느껴졌다. 밑줄친 문장에도 간단히 나오지만 간략히 다시 언급하자면 이것은 ‘뉴욕에서도 성공한 것이라면 미국의 다른 어떤 도시를 가도 성공할 수 있을 거야‘와 같이 자신이 가진 어떤 능력이 큰 무대에서 성공하고 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자신감 같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스틱‘ 책에서 강조하는 6가지 개념 중에 신뢰성과 관련이 있는 내용인데, 한 예로 사업분야에 적용해본다면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한 시장에서 살아남은 사업가는 그 시장말고 다른 지역에 가서 똑같은 사업을 해도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써 신뢰감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요즘 뭐 축구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관련된 논쟁과는 별개로 예를 들어 손흥민이 세계최고의 축구리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데 거기서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한다면(이미 증명한지 오래지만..) 이 선수는 세계 어느 리그를 가더라도 톱 클래스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식의 얘기로도 풀어볼 수 있을듯 하다.

또한 책이나 출판업계와 관련해서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유명해지면 그 작가는 그때부터 믿고보는 작가가 되어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게 되는 것도 동일한 이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이외에도 내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러한 ‘시나트라 테스트‘를 통과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아 나가는 것이 엄청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어느 분야든 간에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이러한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소위 말하는 진짜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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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포스팅에 이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샤오메이가 시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아버지는 이것도 다 운명이라며 샤오메이를 애써 위로한다.

얼마 뒤 샤오메이의 시아버지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는 죽음을 직감하고 아창과 샤오메이에게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한다.

아창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창과 샤오메이는 수선집 일을 접는다. 수선집을 접은 뒤 두 사람은 시진에서 쥐죽은듯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의 집에서 일하던 계집종이 밖에서 린샹푸가 시진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샤오메이에게 전한다. 아창과 샤오메이는 순간 멘붕(?)에 빠진다.

아창은 자신이 과거에 린샹푸의 금괴를 훔쳤던 것 때문에 처벌받는 것이 두려워 그와의 만남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 하고 있고 샤오메이는 자신과 아창간의 관계가 린샹푸에게 들통날까봐 조심하는 모양새다. 단지 자신들의 계집종을 통해 린샹푸와 그 딸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들은 계집종에게 집을 잠시 맡긴 뒤 잠깐동안 선뎬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다.

떠나기 전 샤오메이는 자신이 예전에 자신의 딸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 두었던 아이용 옷가지와 신발을 린샹푸에게 전해주고자 계집종을 시켜 전달하는데 계집종이 돌아와 말하길 린샹푸가 시진을 떠나 남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아창과 샤오메이는 더 이상 도피할 이유가 사라지자 선뎬으로 도망칠 계획을 즉각 취소한다.

한 고비를 넘긴 두 사람. 아창은 안도하지만, 샤오메이는 또다른 상실감에 괴로워한다.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딸을 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그녀안에 깊은 상처가 된 듯 하다. 아창은 그녀의 이런 속도 모르고 린샹푸가 멀리멀리 떠났을 거라며 위로하지만, 샤오메이에게 그것은 위로가 아닌 아픔이었다.

한편 시진을 지나 남쪽으로 향하던 린샹푸는 자신에게 아기옷을 주었던 젊은 여자의 말투를 곰곰이 곱씹다가 그것이 샤오메이가 예전에 했던 말투와 비슷함을 눈치채고 아창이 말한 원청이라는 곳이 시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발걸음을 시진 쪽으로 돌린다.

한편 린샹푸가 시진에서 엽전 한 닢을 주면서 100여 집이 넘는 곳에서 딸 아이의 젖동냥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샤오메이는 억장이 무너지는 쓰라림을 경험한다.

샤오메이는 과거 린샹푸와 함께 있을 때 보관해두었던 딸의 배냇머리와 눈썹을 간직한 채 자신의 딸과 린샹푸를 생각한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시아버지가 탄식했다.
"다 운명이지."

아창과 샤오메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지면서 선가 수선집 앞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떠들썩한 건 그래봐야 며칠이었을 뿐 가게는 금새 썰렁해졌다. 사실 아창과 샤오메이는 수선일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원해서 계속 가게에 앉아 있었다.

아창과 샤오메이가 돌아오자 아버지는 마음을 놓더니 얼마 뒤 침대에 드러눕고 말았다. 심지어 병세도 나날이 악화되고 기침도 갈수록 심해져 핏줄기가 입가에서 턱까지 이어지곤 했다.

그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침대 앞으로 불러 장례를 당부했다.

그래도 관에는 신경을 좀 써달라며 곧고 오래된 삼나무를 써야 쉽게 썩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들과 눈물 흘리는 며느리를 보면서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지금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니 매사에 절약하거라."

그들은 문 옆의 간판을 치우고 수선 일을 그만 두었다.

그들은 여전히 시진에 살고 있었지만 시진은 더 이상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시진으로 돌아온 아창과 샤오메이는 과거에 파묻혔다. 이제 밝아오는 새벽은 그들의 새벽이 아니었고 저무는 황혼 역시 그들의 황혼이 아니었다. 그들의 삶도 수선집처럼 휴업 상태에 들어간 듯 했다.

그래도 상처란 언젠가 아물고 슬픔도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한때 린샹푸와 두 번의 시간을 보냈고 한때 딸이 있었지만, 그건 모두 한때의 일로 다 지나가 버렸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 처참하게 망가진 시진 거리에 덩치가 큰 북쪽 출신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등에 커다란 봇짐을 메고 봉황 두건을 씌운 갓난 계집애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북쪽 사투리로 시진 사람들에게 원청이 어디냐고 묻고 다녔다.

계집종이 커다란 봇짐을 멘 북쪽 남자와 갓난 아기, 모란을 입은 봉황 두건, 원청을 이야기 했을 때 샤오메이의 표정이 돌변했다. 계집종이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그때 샤오메이는 기억 속에서 린샹푸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아득히 먼 북쪽에서의 그 밤, 린샹푸는 그녀가 또 떠나면 딸을 안고 찾아갈 거라고, 세상 끝까지 가는 한이 있어도 꼭 그녀를 찾아갈 거라고 결연하게 말했다.

아창과 샤오메이는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창의 눈에는 당혹감만 가득하고 샤오메이의 눈에는 눈물밖에 없었다. 당황한 눈은 맞은 편의 눈물을 보지 못했고 눈물 속 눈은 맞은 편의 당혹감을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우물과 강물처럼 처지가 달랐다. 한 사람은 우물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에 대해 생각했다.

한 사람은 우물의 말을 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의 말을 했다.

샤오메이는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일어났다가 앉는 아창이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느껴졌다. 반면 눈앞에 없는 린샹푸와 딸은 생생하게 와닿았다.

아창은 린샹푸에게 시진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원청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원청을 찾아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린샹푸는 시진에 왔다.

"원청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 이름을 대면 집으로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샤오메이가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지은 죄니까."
아창은 샤오메이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를 쳐다보고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시진에 돌아오자는 네 말을 따르는 게 아니었어."
샤오메이가 대꾸했다.
"시리촌으로 데리러 오질 말았어야지."
그 말에 아창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가슴속에서 슬픔이 냇물처럼 흐르고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가냘픈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 옷과 신발, 모자는 딸을 위해서라기보다 그녀 자신을 위해 만든 거였다. 그리움을 손가락에 모아 한 땀 한 땀 새겨놓은 거였다. 그걸 만들 때 딸에게 입힐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샤오메이는 부엌문 앞에서 그들이 잠시 외지에 다녀오려 한다고 계집종에게 말했다.

샤오메이의 표정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샤오메이는 손에 들고 있던 아기 옷과 신발, 모자를 계집종에게 건네며 자신이 가지고 있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 그 북쪽 남자에게 주는 게 낫겠다고, 그 딸한테 딱 맞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북쪽 남자에게 누가 주었는지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얼라한테 입히세요."

린샹푸가 시진을 떠났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아창은 순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샤오메이가 수선집 계산대 위에 봇짐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 떠나지 않을 작정임을 눈치채고는 자신도 봇짐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가마가 필요 없어졌으니 돌아가라고 해."

린샹푸가 떠나자 아창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했다. 위험이 지나갔다는 생각에 이후 며칠 동안 그는 마당에 앉아 있다가 불현듯 입가에 웃음기를 띄곤 했다.

반면 샤오메이는 가슴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던 고뇌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번에는 한없는 상실감에 빠졌다. 린샹푸가 딸을 바로 근처까지 데려왔건만 그녀는 한 번도 그들을, 특히 딸을 보지 못했다. 손꼽아보니 헤어진 지 어느새 여덟 달이 넘었다.

그녀는 거리로 나가 길모퉁이에 숨어 훔쳐보지 않았던 게 후회되었다. 딸이 자신을 보고 입을 열고 웃어주는 모습을, 그런 다음 린샹푸가 자신을 발견하고 비난하는 대신 너그럽게 웃어주는 장면을 자꾸 상상하게 되었다.

아창은 샤오메이의 고민이 뭔지 모르고 여전히 걱정한다고만 생각해 말했다.
"점점 멀리 갈 거야. 원청을 찾아갈 테니까."

아창이 원청을 언급해 샤오메이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원청이 어디 있는데?"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 뜬구름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린샹푸는 점점 더 멀리 남쪽으로 내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원청에 관해 묻지 않았다. 원청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자 아창이 말한 원청이 거짓 지명일거라고 눈치채서였다. 린샹푸는 지명이 가짜라면 아창과 샤오메이라는 이름도 가짜일 거라고 생각했다.

긴 여정은 시작만 있고 끝이 없었다.

그는 툭하면 생각에 빠졌다. 앞으로 나아가는 몸과 달리 생각은 자꾸 뒤로 돌아가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시진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진에서는 아이를 얼라라고 부르는 거였다. 시진 사투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린샹푸는 남쪽으로 가면 갈수록 어투가 이상해지고 샤오메이와 아창이 쓰던 말과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되짚어보니 시진이 훨씬 아창이 말한 원청과 흡사했다. 그리고 문득, 당시 아창이 원청에 관해 말할 때 양쯔강을 건너 남쪽으로 600여리를 가면 된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시진이 양쯔강에서 거의 600여리 떨어져 있었다.

"그때면 이 옷에 얼라가 들어 있을 거예요."

린샹푸는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시진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창이 말한 원청은 시진일 듯싶었다. 지금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시진으로 돌아올 것만 같아서 그는 시진에서 1년, 2년 혹은 더 오랜 시간이더라도 기다리리라 마음먹었다.

초겨울 햇살 속에서 린샹푸는 몸을 돌려 북쪽을 향해 걸었다. 마차를 갈아타며 먼 길을 되짚어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시진으로 돌아갔다.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린샹푸가 딸을 안고 시진에 나타난 걸 아창과 샤오메이는 전혀 알지 못했다. 평소 매일 나가던 계집종도 눈이 얼어 붙으면서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진의 점포도 전부 문을 닫았다.

원래 바깥출입이 거의 없었음에도 막상 폭설로 세상과 단절돼 사람 숨결을 느낄 수 없고, 심지어 그 죽음같은 적막이 계속 반복되자 아창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무척 어지러웠다. 계집종이 말했던 광경이 머릿속에 가물가물 떠올라서였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거리에 린샹푸가 딸을 안고 나타나 엽전 한 닢을 들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 문을 두드린 뒤 젖을 먹이는 여자에게 엽전을 건네며 딸에게도 젖을 먹여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었다.

거리에서 여자들이 수다를 떨다가 누군가 이미 떠난 북쪽 남자에 관해 말을 꺼내자 다른 여자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 다음 여자들은 북쪽 남자 품의 아기가 100집도 넘는 남의 집 젖을 먹지 않았겠느냐고 떠들었다는 거였다.

샤오메이는 계집종의 말을 듣다가 아기가 100집도 넘는 남의 집 젖을 먹었을 거라는 대목에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몸을 돌린 뒤 의아해하는 계집종을 남겨두고 위층으로 올라간 샤오메이는 침대에 앉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린샹푸가 엽전 한 닢을 들고 젖동냥하는 모습과 딸이 여러 집의 여러 사람 젖을 먹는 모습은 이미 머릿속에 완전히 박혀버렸다. 샤오메이는 수시로 그 광경을 떠올리며 괴로워했고 그 비통함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처럼 그녀 안에서 잦아들지 않았다.

속옷에 주머니를 만들어 딸의 배냇머리와 눈썹을 넣고 가슴에 밀착시키자 샤오메이는 이제 딸이 언제나 함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느낌과 함께 린샹푸도 바로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게 딸과 린샹푸는 바람과 바람소리처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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