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도 마찬가지다. 초당 2백 장 이상의 2차원 사진들을 망막으로 모아서 3차원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4차원 혹은 5차원의 존재가 파악하는 완전한 3차원 공간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어렴풋이 공간을 파악할 수는 있다. - P30
우리의 인식 방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는 회전하는 자전거 바퀴의 휠을 보면 알 수 있다. 제자리에서 있는 자전거의 바퀴를 돌리고 난 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 시계 방향으로 돌린 바퀴가 어느 정도 돌아간 다음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러한 착시 현상은 우리의 뇌가 그림을 초당 2백 장 정도로만 인식하는 불완전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뇌신경이 돌아가는 바퀴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전체를 다 감지하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감지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조합한 그림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으로 인식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거나 바퀴의 회전 속도가 더 느려지면 다시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조합되어서 보인다. - P32
인간은 초당 2백여 장의 망막 위에 맺힌 이미지 외에도 음향과 그림자 같은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더 많은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인지 능력이 발달해 있다. - P32
우리가 깜깜한 우주 공간을 보면 아무런 공간도 느껴지지 않지만, 멀리 밝은 달이나 별이 있으면 그때부터 공간의 깊이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보이드라고 하는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체가 필요하다. 물체가 있어야 빛을 반사시킬 수 있고, 그래야 우리 눈이 비어 있는 부분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32
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림자가 필요하듯, 빈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물체가 필요하다. 역으로 추론해 보면, 물체가 만들어지면 동시에 빈 공간도 부산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P32
인간의 건축 행위는 일차적으로는 물체를 만드는 것이지만, 최종 목적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단순히 물체만 만드는 것은 조각이다. 건축이 조각과 다른 점은 건축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물체를 만드는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건축물이라는 물체를 만들고 그 물체가 만든 빈 공간을 인간이 사용한다. - P34
빈 공간을 프레임하기 위한 물체를 만드는 일은 엄청나게 큰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하고, 크게는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 P34
이 책은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융합되고 어떻게 생각의 ‘새로운 종‘ 이 만들어지는지 추리해 보는 책이다. 이 추리의 과정에서 건축의 빈 공간의 특징은 중요한 물질적 단서와 증거가 된다. - P34
서양 문화에서 기하학적인 형태의 보이드 공간을 만드는 성향은 시대가 바뀌어도 지속된다. - P35
자연 생태계는 태양 에너지를 유기체 형태로 전환시켰고, 인간은 그 유기체를 소비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태양 에너지를 소비하며 살았다. - P39
바람은 대기의 온도 차이가 만들어내는 공기의 이동이다. - P39
강한 바람은 유기물을 날려 버릴 뿐 아니라 땅 표면의 수분을 앗아가기 때문에 농사에 결정적인 해가 된다. 그런 바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지금도 농사지을 때 땅에 돌을 뿌린다. 땅에 뿌려진 작은 돌들은 바람을 막아 주고 그림자를 드리워서 수분이 빼앗기는 것을 줄여 준다. - P40
전 지구적으로 바람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비로소 농사지을 만큼 기후 조건이 좋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 P40
보통 수렵 채집을 통해서 한 사람이 먹고살려면 가로 세로 각각 1킬로미터 정도의 면적인 100만 제곱미터의 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을 하게되면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5백 제곱미터의 땅만 있으면 된다. 수치상으로는 한 사람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땅의 면적이 2천 분의 1의 면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이는 과거 수렵 채집 때 1명이 사냥을 하면서 먹고살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2천 명이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농업은 좁은 땅에서 더 많은 사람이 먹고살 수 있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배가 고팠던 인간은 수렵과 채집보다는 인공적으로 수확량을 늘릴 수 있는 농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최초의 문명인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 P41
그런데 특이하게도 농업은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곤충인 개미 중에서 중남미 열대 지방에 서식하는 잎꾼개미 Leafcutterants들은 잎을 잘라서 버섯을 키워 먹는 농업을 한다. 이파리를 잘게 잘라서 효소 성분이 있는 자신들의 배설물과 섞어 버섯균류를 재배하는 것이다. 버섯균류는 잎꾼개미의 주 식량원이다. - P42
인간과 개미의 특징은 둘 다 좁은 지역에 많은 개체 수가 사는, 단위 면적당 개체수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단위 면적당 개체 수가 많은 종이 모두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와 인간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농업 기술은 고밀도 군집 생활을 하지 않는 집단에서는 나오지 않는 기술인 것 같다. - P42
농업을 통해서 개미처럼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을 하게 된 인간은 개미처럼 사회 내에 신분 계층을 가지게 되었다. 개미 사회에 여왕개미가 있듯이 인간 사회에 왕이 생겨났고, 두 사회 모두 하층부에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 계급이 있다. - P42
컴퓨터의 경우, 일반적인 가정용 개인 컴퓨터(PC)도 직렬이 아닌 병렬로 연결하게 되면 슈퍼컴퓨터의 능력을 갖게 된다. 같은 원리로, 평범한 인간의 뇌도 병렬로 연결하면 집단은 개개인의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 P44
인간의 뇌는 컴퓨터처럼 전선 케이블로 연결할 수 없다. 대신 인간의 뇌 사이를 병렬로 연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케이블이 있다. 바로 ‘언어‘다. 언어가 발달하면서 인간은 주변 사람들과 고도의 의견 교환이 가능해지게 되고 집단의 두뇌 간 시너지 효과가 커지게 되었다. 언어를 통한 뇌의 병렬연결은 단위 면적당 인구수가 늘어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 P44
수십 개의 PC를 병렬로 연결하는 것보다 수만 개의 PC를 병렬로 연결한 컴퓨터가 훨씬 더 강력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수만 명이 모여 살게 되면서 집단 지능이 커졌고 자연스럽게 문명이 발생했다. 문명 발생의 필수 조건은 ‘도시‘ 형성이다. - P45
인류 최초의 도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만들어진 ‘우루크Uruk‘라는 도시다. - P45
지구 온난화는 인류가 농사를 짓게 했고, 강가에 고밀화된 도시를 만들게 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은 문명을 만들었다. - P45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우루크 같은 곳은 건조기후여서 전염병이 돌지 않는 장점이 있다. 예방주사가 없고 특별한 위생 시설도 없는 천연 상태에서 박테리아성 질병이나 바이러스성 전염병의 유행에 가장 강한 내성을 가진 지역은 건조한 기후대 지역이다. - P46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MIT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과정을 연구했는데, 비가 내리면 땅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흙과 함께 발포 상태가 되고 그것이 옆으로 이동하면서 바이러스가 전파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은 세균의 증식뿐 아니라 바이러스의 전파에도 취약하다. 반대로 건조한 기후대는 비가 잘 안 오기 때문에 전염병에 강하다. - P46
그런데 문제가 있다. 건조 기후대는 전염병에는 강하지만 물이 부족하다. 물이 없으면 인간이 모여 살 수가 없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은 특이하게도 강이 남북으로 흐르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두 문명은 남북으로 흐르는 강의 하구이면서 건조 기후대에 위치한 문명이다. - P46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같은 거대하고 긴 강은상류와 하류의 기후대가 다른데, 강의 상류에는 비가 많이 내리고 빗물이 강을 따라서 하구의 건조한 지역에 다다르게 되면 사람들은 전염병없이 그 물로 농사를 짓고 마시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자연이 만들어 준 천연의 상수도 시스템이 되었다. 덕분에 최초의 문명 도시 우루크는 남북으로 흐르는 강 하구의 건조 기후대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 P47
도시의 해발 고도가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산꼭대기에 위치한 마추픽추 같은 특별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낮은 지대에 산다. 이유는 간단하다. 낮은 지대가 물이 풍부하고 땅의 경사도가 완만하기 때문이다. - P49
도시를 만들려면 집을 짓고 도로를 만들면서 정주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땅의 경사도가 낮을수록 유리하다. - P49
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는 평지가 많고, 강의 범람 시에 퇴적되는 침전물로 인해 토질이 좋고 물이 풍부해서 거주하거나 농사를 짓기에 유리하다. - P49
남는 재화를 저장하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문자가 생겨났다. 최초의 문자인 수메르 문명의 쐐기문자(설형문자)는 곡식의 양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P50
그 당시(수메르 문명)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생각을 남기는 방식은 ‘문자‘보다는 ‘그림‘이 더 효과적이었다. 쐐기문자보다는 각종 동굴이나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에 좋은 방식이다. - P50
시간이 지나면서 문자 체계가 점점 더 정교해졌다. 주변사람들의 뇌와 병렬로 연결시키는 방식이 언어라면, 다른 시대 사람이나 먼 지역 사람들의 뇌와 병렬로 연결시키는 방식은 ‘문자‘다. - P50
최초의 문자는 회계 장부 정도의 기능을 했지만 시대를 거듭할수록 추상적인 개념들도 기록할 수 있는 문자 체계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로써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문명 발달의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 P50
흥미로운 사실은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근간을 이루게 한 위대한 사상가들은 물리적으로 엄청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시기적으로는 기원전 582년부터 기원전 300년 사이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 P52
인류의 집단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문자의 개발로 더 많은 영역으로부터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체계적으로 세금을 걷을 수 있게 되니, 이제 문제는 영토의 크기였다. 영토가 커지고 노예가 많아질수록 지배 계급의 이익은 더 커진다. 이는 주변국과의 영토 전쟁으로 이어졌다. - P53
전쟁 중에는 이유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사람들은 ‘왜‘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위대한 사상의 싹이 텄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 P53
책을 써서 텍스트로 남기는 일은 중요하다. 텍스트로 된 생각들은 전파되거나 전승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 P53
재러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를 보면 농업 문명이 같은 위도상의 동서 방향으로는 빠르게 전파되고, 남북 방향으로는 느리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남북 방향으로 이동하면 위도가 달라지면서 기후가 바뀌게되고, 기후가 바뀌면 어렵게 발견한 농사 가능한 종자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동서 방향 이동은 같은 위도상으로 같은 기후대상에서의 이동이기 때문에 옆에서 농사가 가능했던 종자를 그대로 쓸 수 있기에 농업 전파의 속도가 빠르다. - P55
농업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인공 생태계‘다. 인간이 선택한 몇 개의 종을 대량으로 복제하여 단순한 생태계를 만들고 그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방식이 농업이다. - P61
인류 문명은 다양하게 계속 진화하는 것 같지만 사실 본질을 들여다보면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명은 단순한 인공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인터넷 가상공간 역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을 대표로 ‘인공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인공 생태계를 만드는 역사의 첫 단추가 농업이다. - P61
농업의 시작은 셀 수 없이 많은 식물 중에서 열매의 생산성이 가장 높은 품종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이때 선택된 식물 종은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의 기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중 강수량이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 P61
지구는 자전하기 때문에 행성 전체를 감싸는 대기는 지역마다 일정한 흐름의 방향에 따라 바람이 되어 분다. 이러한 바람 중 계절풍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대륙의 동쪽 지역은 계절풍의 영향으로 특정 시기에 비가 많이 내리는 몬순 기후다. 따라서 대륙의 동쪽은 벼농사를 짓는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벼를 재배한다. 반대로 대륙의 서쪽 지역은 집중 호우식의 장마철 없이비가 일 년 내내 고루 내리는 편이고 강수량도 동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 그래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인 유럽은 밀을 재배한다. - P62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이 재배 방식의 차이가 가치관의 차이를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벼농사 지역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 P62
도시 생활을 하다가 귀농한 사람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농사일 자체가 아니라 마을 주민과의 관계라고 한다. - P63
귀농한 사람들은 도시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가족의 경계가 직계 가족으로 제한적이다. 하지만 벼농사를 계속 지어 온 동네 사람들은 ‘이웃사촌‘의 경계 범위가 넓다. - P63
예부터 동네 빨래터에서 나오는 ‘평판‘과 ‘왕따는 벼농사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 따로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도 없이 어떤 사람의 행위가 사회 유지에 옳지 못하다고 하면 인민재판식으로 여론을 몰아서 처벌하는 것이다. 벼농사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이웃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는 아직도 그런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사람들은 인터넷 댓글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P63
우리 사회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다. 이 속담의 배경 의식에는 강한 평등 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인데, 오래된 벼농사 생활이 만든 사회주의적 공동체 의식이 자리 잡아서라고 생각된다. - P64
한국이 미국보다 자본주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같이 유독 동아시아에서 벼농사를 짓는 지역에 사회주의 국가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같은 벼농사 사회에 있는 사회주의적 가치관이 깔려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일찍이 서양 문화에 개방됐던 일본처럼 벼농사를 지으면서도 자본주의 산업화에 앞서 나간 경우도 있으니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벼농사와 사회주의 공산 개념은 연관성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 P64
정리해 보면, 벼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온 농사짓는 방식 때문에 결속하고, 집단의식을 키우고, 주변인과 협업하도록 가치관과 시스템이 발달해 왔다. - P64
농사 방식은 마을의 풍경도 다르게 만들었다. 노동 방식이 문명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이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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