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 나는 무엇이고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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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 남자인 저자가 과학관련 서적들을 읽으며 공부한 것을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인문학 지식들과 잘 조화시켜서 과학이 낯선 독자들에게 먹기좋게 제공한 요리같은 책이다. 내가 과학에 무지한 바보라 읽는데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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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막판에 수학자인 하디라는 사람이 수학을 ‘하찮은 수학‘과 ‘진정한 수학‘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눴다는 말과 함께 각각에 해당되는 수학 분야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봤었다.

오늘은 하디가 나누었던 두 부류의 수학 간에 일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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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저자는 하디가 분류한 ‘하찮은 수학‘ 중에 그래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한 예로 초급 기하학을 든다. 초급 기하학을 이용하여 지구의 크기를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이 에라토스테네스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하디가 말했던 ‘진정한 수학‘이 아닌 ‘하찮은 수학‘에 속하는 초급 기하학과 발품(?) 등을 팔아서 지구가 구형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것의 크기까지도 구해냈다고 한다. 저자는 칼 세이건의 책인《코스모스》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여 자신의 책에서 요약 서술하고 있다. 독자인 나는《코스모스》책도 함께 구해서 해당 부분을 잠깐 살펴봤는데, 그 책에는 그림도 그려져 있어서 좀 더 이해하기가 수월해 보였다. 하지만, 유시민 작가의 책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쓰여있었기에 내용을 이해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저자가 아름답다고 느낀 ‘하찮은 수학‘의 또 다른 예로 데카르트의 원에 대한 정의가 소개된다. 독자인 나는 이 산식을 보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원의 방정식 공식이라고 하면서 그냥 외워서 숫자 대입해서 풀어재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저자가 데카르트의 원의 정의(원의 방정식)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이유를 살펴보자면, 유클리드의 정의가 인간의 언어인 반면 데카르트의 정의는 인간의 언어와는 뭔가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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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소위 말하는 신계新界에 있다고 여겨지는 천재적인 수학자들에 대한 얘기들이 쭉 이어진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수학자인 유클리드나 가우스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생년 처음 알게 된 수학자들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읽으면서 든 생각은 세상은 넓고 똑똑한 사람도 정말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괜히 중간에 ‘나는 뭔가‘ 하는 자괴감(?)같은 것도 들었었는데 저자는 이런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기라도 하는 듯 자신은 이러한 수학자들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다는 말로 나의 쓸데없는 자괴감을 박살내주었다.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유명한 수학자들의 생애를 저자가 간략히 정리해 놓은 문단이 있었는데, 그 문단을 보면 수학사에서는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몰라도 그 안의 삶을 들여다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수학자들이 많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 일부는 평범하게 살다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수학을 못한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세상에 수학만 있는 것도 아니고 분야가 얼마나 많은데 수학이라는 벽 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각자 자기가 재능있는 분야에서 행복을 찾고 살면 그만이라는 게 저자의 마인드인듯 하다. 나 또한 이러한 마인드에 동의하는 바이다.

저자는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분인데, 후기를 읽다보니 과학에 대해 어릴때부터 공부했다면 자신을 이해하는데 좀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독자인 나 또한 이 책의 막바지에 와있는 시점에서 저자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물론 책을 읽어나갈 때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꾸역꾸역 천천히라도 이해하면서 읽고나니 과학에 무지했던 내 자신에게 살짝 미안한 감정도 생기고, 한편으로는 지금부터라도 과학관련 지식들의 범위를 조금씩이라도 넓혀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폭과 그 깊이를 더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생긴다.

저자는 후기 마지막 부분에서 인문학의 가치와 한계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인문학의 한계를 넓히려면 과학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가치를 키우려면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해 더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과학과 인문학을 다 공부해야 우리 자신을 더욱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을 완독한 현 시점에서 독자인 나도 이러한 저자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고,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과학 분야를 조금이나마 친숙한 분야로 바꿔준 저자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이 책을 계기로 하여 과학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관련 분야의 독서도 병행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하디가 전적으로 옳지는 않았다. 우리는 하디가 말한 ‘진정한 수학‘의 일부가 선과 악을 행하며 전쟁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안다. 군대와 민간이 모두 사용하는 현대의 암호시스템은 정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상대성이론 덕분에 항공기 위성항법장치와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쓸 수 있다. 핵폭탄을 만들기까지 실험물리학자들이 사용한 모든 수학이 ‘하찮은 수학‘이었던 건 아니다. 진정한 수학도 선과 악에 쓰이며 인간의 일상 안에 들어와 있다. - P265

진정한 수학과 하찮은 수학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없다. 진정한 수학이 인간 세상으로 들어와 선악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장벽이있는 것도 아니다. - P265

‘태양은 아주 멀리 있기 때문에 빛은 지면에 수직으로 떨어진다. 땅이 평평하다면 그 시각에 어디서나 막대 그림자가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으니 땅이 둥글다고 볼 수밖에 없다.‘ - P266

유클리드: 원은 한 선으로(즉 곡선으로) 된 평면도형으로, 원의 내부의 한 점(그 점은 중심이라고 한다)에서 원위로 그은 모든 선분이 서로 같다. - P267

데카르트: 원은 다음을 만족시키는 모든 x와 y이다:x^2+y^2=r^2, 이때 r은 상수. - P268

데카르트의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평면 위의 모든 점을 수직축에서 떨어진 수평거리 x와 수평축에서 떨어진 수직거리 y라는 두 수의 순서쌍 (x, y)로 나타낼 수 있다. 둘째, 선을 점의 집합으로 간주하면 직선이든 원이든 타원이든 모든 선을 ‘대수적‘代數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가. - P268

직교좌표계는 페르마 Pierre de Fermat(1601~1665)가 발명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데카르트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직교좌표계를 활용했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지만 책임은 페르마한테 있다. 페르마는 연구 결과를 출간하지 않는 고약한 습관이 있었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로 인해 후세 수학자들을 무척 힘들게 했다. - P268

하디 덕분에 나는 수학자가 아름답지만 쓸데없는 학문을 연구하는 이유를 알았다. 하디는 학문 연구의 일반적인 동기를 세 가지로 보았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 성과를 이루려는 직업적 자긍심, 명성과 지위에 대한 야심이다. 그는 수학만큼 여기에 잘 들어맞는 학문이 없다면서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수학은 진리가 기묘한 장난을 치는 분야다. 정교하고 매혹적인 전문기술을 발휘할 기회를 준다. 수학의 성과는 다른 무엇보다 오래간다. 문명과 언어와 권력은 사멸해도 수학의 아이디어는 불멸한다.‘ - P269

여기서 핵심은 수학적 진리의 불멸성이다. 하디를 다시 봤다. ‘영원한 것에 집착한다니, 신계의 수학자도 인간임이 분명하군!‘ 그렇다. 인간은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영원한 그 무엇을 추구한다. - P269

수학은 한 번 진리로 판명되기만 하면 영원히 진리로 남는다. 이것이 바로 수학의 매력이다. 논리와 공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에서 창의력을 발휘하면 난공불락의 진리를 찾아낸다. 수학적 증명은 영원불멸이다. 피타고라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평면에 그려진 모든 직각삼각형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한다. 수학자는 산을 오르거나 사막을 헤매거나 지하 동굴을 탐험하지 않는다. 책상 앞에 앉아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만으로 영원불멸의 진리를 선포한다. 얼마나 매력적인가. - P270

수학은 무엇인가? 수학적 진리는 수학자가 발견하든 말든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서술한 것인가? 그런 수학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만약 수학적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수학은 현실과는 무관하게 수학자가 창조한 추상적 관념의 복합물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학은 적절하게 선택한 정의定義(definition)와 공리公理(axiom) 를 바탕으로 논리 규칙에 따라 증명한 정리의 집합이다. 우주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도구가 아니다. - P270

진정한 수학자는 ‘수학적 실재‘를 서술하는 게 아니라 논리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수학을 창조한다. 그들이 새로운 정리를 세울 때마다 수학의 영토는 넓어진다. - P270

물리학과 화학을 비롯한 과학은 정의가 내려져 있다. 이견이 있다고 해도 다수의견 또는 통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학이 어떤 학문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처럼 분명한 합의가 나와 있지 않은 것 같다. 수학은 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P271

아리스토텔레스에 연원을 둔 사고방식에 따르면 수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언어유희일 뿐이다. 수학의 공리는 논리 법칙에 따라 일관된 이론을 구축하는 데 쓰는 규칙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해서 얻은 수학의 결과가 현실에서 유용한 것은 그렇게 되도록 공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 P271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하찮은 수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진정한 수학의 일부이다. 진정한 수학자는 현실과 무관하게 수학적 진리를 추구하고, 과학자와 엔지니어는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유용한 수학적 도구를 필요한 방식으로 가져다 쓴다.‘ - P272

유클리드는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수학적 증명의 규칙을 정립함으로써 무의식적 가정과 부정확한 추측을 기하학의 세계에서 추방했다. - P273

공리는 자명하기 때문에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인정하는 명제다. - P273

평행선 공리를 부정해도 일관성이 있는 기하학이 성립한다 - P274

비유클리드기하학은 휘어진 면의 기하학이다. 농구공의 표면처럼 볼록한 면이나 말안장처럼 오목한 비유클리드평면은 유클리드기하학에 없는 성질이 많지만, 평행선 공리를 제외한 유클리드기하학의 다른 공리를 모두 만족한다. 이런 평면은 구면기하학과 쌍곡선기하학으로 서술할 수 있다. - P274

휘어진 공간도 비유클리드기하학을 요구한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공간은 휘어질 수 있으며, 공간의 곡률은 중력이 결정한다. 공간이 달라지면 공간을 서술하는 기하학도달라진다. 유클리드기하학이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완전한 평면에서는 진리다. 공간의 곡률이 작아서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인간 세계 규모에서도 잘 작동한다. 그러나 광대한 우주의 구조와 운동을 서술하려면 비유클리드기하학이 필요하다. - P275

수학은 참인 모든 명제를 증명할 수 있고(완전한 complete), 모순이 없으며(일관된 consistent), 어떤 명제가 참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존재한다(결정 가능한 decidable)는 것 - P275

‘우리는 알아야 하며 알게 될 것이다.‘ - 힐베르트 - P276

괴델 Kurt Gödel(1906~1978)은 바로 그 시기에 ‘불완전성 정리‘를 제출함으로써 힐베르트의 희망을 무너뜨렸다. 그는 수학이 기호로 하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완전하고 모순이 없는 게임은 아님을 증명했다. - P276

괴델은 이 명제가 참인지 여부를 그 논리체계 안에서는 증명하거나 반박할 수 없고 논리체계 밖에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참인데도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하나라도 있다면 수학은 완전한 논리체계일 수 없다. - P277

괴델은 또 수학의 어떤 논리체계도 자체 수단으로는 모순이 없다는 것을 보일 수 없다는 것도 증명했다. 스스로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면 수학을 일관된 논리체계로 인정할 수 없다. - P277

괴델은 ‘나는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하는 공식이 참임을 수학의 논리체계 밖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초감각적인 ‘수학적 직관‘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불완전성 정리를 제출했다고 한다. - P278

수학은 객관적 실재를 서술하는 우주의 언어이기도 하고, 기호와 논리를 가지고 노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이기도 하다. 기하학을 보라. 피타고라스 정리는 직각삼각형 자체의 성질을 서술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신계의 수학자가 만든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다. 지구 표면의 곡률이 인간의 감각으로는 0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클리드기하학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비유클리드기하학은 중력으로 공간이 휘는 우주의 객관적 실재를 서술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지만 그것을 찾아낸 것은 기호와 논리를 가지고 노는 신계의 수학자들이었다. - P278

수학은 수학자들이 창조한 추상의 세계다. 수학자는 수학적 실재를 서술하려고 수학을 연구하지 않는다. 수학의 아름다움과 수학적 진리의 영원성에 끌려 추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자신들이 창조한 것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도구가 되어 현실의 선악과 관계를 맺을지는 그들 자신도 모른다. - P278

정리해 보자. 수학은 어떤 학문인가? 힐베르트에 따르면 기호와 논리로 하는 천재들의 지적 유희이고 갈릴레이에 따르면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는 우주의 언어다. 나는 갈릴레이의 수학이 힐베르트가 말한 수학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둘 모두 옳다고 했다. 하디의 말로 옮기면 하찮은 수학은 진정한 수학의 부분집합이다. - P279

수학의 역사를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수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수학자 중에 ‘노력형‘은 없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수학 천재는 천재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노력할 수도 없는 학문이 수학이다. 수학 천재는 ‘발명왕‘과 달리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 수 없다. - P279

다른 천체의 중력때문에 태양계 행성의 궤도가 달라지는 섭동攝動 - P281

디오판토스는 기하학이 유행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정수론과 대수학을 연구했는데, 묘비에 자신의 수명을 미지수로 한 방정식을 문장으로 새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 P283

페르마가 죽은 후 아들이 아버지의 메모를 정리해 《페르마의 주석이 붙은 아리스메티카(Arithmetica, 산학算學》 를 출간했다. 거기에는 새로운 수학 정리가 여럿 있었는데 증명 과정을 생략한 경우가 많았다. 후대 수학자들은 페르마가 메모해둔 정리를 모두 증명했다. 그런데 하나는 300년이 지나도록 증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라고 한다. - P284

피타고라스 정리 (x²+y²=z²)를 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x와 y는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만드는 두 변의 길이이고 z는 빗변의 길이다. 피타고라스 정리를 말로 표현하면 이렇다. ‘직각삼각형의 빗변 길이를 제곱한 값은 나머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더한 값과 같다.‘ 페르마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제곱수를 3 이상의 정수로 바꾸면 방정식을 충족하는 정수해가 없다고 했다. - P284

n이 3 이상의 정수일 때 x^n+y^n=z^n를 충족하는 정수해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 - P284

n이 2일 때 이 방정식을 충족하는 정수해 (x, y, z)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예컨대 (3, 4, 5) (5, 12, 13) (8,15,17)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3 이상의 정수이면 방정식을 충족하는 정수해 (x, y, z)가 없다. 이것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다. 간단한 내용이라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않다. - P284

페르마는 ‘놀라운 증명 방법을 발견했지만 여백이 부족해서 적지 않았다‘고 써두었지만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와일스는 현대 수학의 최신 방법론을 동원해 증명했는데, 증명 과정이 책 두 권 분량이 될 만큼 길고 복잡했다. 17세기 중반의 수학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고 보는게 합당하다. - P284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선망하는 경향이 있다. 수학을 못해서 학교생활이 힘들었고 수학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고생한 사람일수록 수학자를 더 우러러본다. 수학 천재는 확실히 다른 분야의 천재보다 더 천재 같다. - P285

수학자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계의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연구한다. 우리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을 흉내 내지 못하며 그들이 쓴 논문을 읽을 수 없다. 중간계에서 활동하는 전문작가들이 최선을 다해 설명해도 극히 일부를 겨우 알아듣는다. 수학자는 우리와 다른 차원에 있는 존재다. - P286

그렇지만 수학자의 삶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꼭 존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그렇듯, 그들도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뇌의 특수한 영역이 특별히 발달했기에 수학자가 되었을 뿐이다. - P286

나는 수학자들의 재능과 성취를 인정하고 존중하지만 열등감이나 자괴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이 노력만으로 수학자가 된 것도 아니고 내가 노력하지 않아서 수학을 못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P287

수학을 몰라도 행복하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수학 천재라고 해서 삶이 남보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인격이 더 훌륭한 것도 아니다. - P287

신계의 수학자라고 해서 인간계의 보통 사람보다 행복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지는 않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나는 그들이 부럽지는 않다. 나도 그들처럼 내가 가진 것으로 인생을 산다. 수학을 못해도 내 인생을 나름의 의미로 채울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부정하진 않겠다. 수학을 잘하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을! - P288

나는 문과들과 어울려 살았다. 아는 과학자가 없어서 과학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우연히 마주친 과학교양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인생을 닥치는 대로 살았는데 독서라고 달랐겠는가? 뇌과학부터 물리학·생물학·화학·수학·천문학·양자역학까지 분야와 저자를 가리지 않았다. 지나고 보니 나쁘진 않았다. 자연과 우주의 모든 것은 얽혀 있다. 책 읽는 순서가 뭐 중요하겠는가. - P289

과학과 인문학은 연구 대상과 연구 방법이 다르다. 쓰는 말과 사고방식도 같지 않다. 과학자는 현상을 관찰하는 데서 출발해 실험과 분석과 추론으로 대상의 실체에 다가선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반대로 한다. 자신이 알아낸 대상의 본질을 먼저 밝히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가 인지하는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설명한다. 소금물 이야기가 그랬다. 원자의 구조에서 출발해 공유결합과 이온결합을 거쳐소금 결정의 해체와 복원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소금 용해현상을 설명했다. 그것이 과학 ‘스토리텔링‘의 패턴이다. - P290

세상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가 결합해 분자를 만들었고 분자가 뭉쳐 세포를 형성했으며 세포가 결합해생물이 되었다. 생물은 진화했고 발달한 뇌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으며 왜 존재하는지알려고 하는 철학적 자아는 뇌에 깃들어 있다. 물리 세계의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면 그런 순서를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 - P290

나는 문과의 고충을 안다. 문과가 과학 책을 읽으려면 방정식이 없어야 한다. 인문학과 관련이 있으면 수월하다. 그래서 과학 공부 이야기를 뇌과학으로 시작했다. 뇌과학을 알면 생물학에 호기심이 생긴다. 생명 현상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싶으면 화학을 들여다보게 된다. 원소 주기율표를 이해하려다 보면 양자역학과 친해진다. 양자역학을 알면 우주론이 덤으로 따라온다. 우주와 수학이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진다. - P290

과학 공부를 시작하려는 문과 독자에게 권한다. 아무 책이나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을 읽으시라. - P291

중요한 건 ‘바보‘를 면하겠다는 결심이다. 파인만의 ‘거만한 바보‘는 자신이 바보인 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바보‘여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게 살고 죽는 것도 하나의 인생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보‘였음을 알고 ‘바보‘를 면하는 게 ‘바보‘인줄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 낫다. 부끄러움은 잠시지만 행복은 오래간다. 누구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랬다. - P291

‘운명적 문과‘가 과학의 사실과 이론을 어떤 눈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고 활용하는지, 때로는 얼마나 비과학적으로 과학을 대하는지 아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그걸 알면 문과한테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다가서는 과학교양서를 쓸 때 참고할 수 있을 테니까.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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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청년 시절에 자신이 읽었던 유물변증법 관련 책에 나왔던 명제들을 몇 가지 소개했었다. 오늘은 그 명제들에 기반하여 그 유물변증법 관련 책에 나왔던 내용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며 유물변증법에 토대를 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저자도 책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독자인 나도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어, 이거 굉장히 논리적으로 잘 들어맞네‘ 라는 생각과 함께 ‘굉장히 과학적인데‘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앞서 언급했던 명제들은 단지 과학의 사실일 뿐이라는 점을 얘기하면서 ‘자연의 사실에 부합하는 원리를 가진 철학이라고 해서 진리인 건 아니다.‘ 라는 말로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환상(?)에 잠시나마 빠져있던 나를 포함한 독자들을 착각에서 건져 올린다.

뒤이어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잠시 나오는데, 이는 책의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했던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핵심은 과학은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인 반면에 인문학은 단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최근 함께 읽고 있는 유현준 교수의 《공간이 만든 공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저자가 건축가라서 건축관련 책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책은 알라딘의 책 분류 기준으로 교양 인문학으로 분류되어 있는 책이다. 지금 대략 4분의 1정도 읽은 상태인데, 이 책을 읽다보면 물론 과학적인 것에 근거한 얘기들도 나오지만 의외로 저자께서 그럴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추론하는 내용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최근 독서를 통해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다보니, 유시민 작가가 위에서 언급한 ‘그럴법한 이야기‘라는 용어가 독자인 나의 마음에 더 와닿게 느껴졌다.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럴법한 이야기‘들을 종종 만날 수 있기에, 《공간이 만든 공간》이라는 책의 분류가 교양 ‘인문학‘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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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 열역학 법칙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제1법칙과 제2법칙이 있는데 저자는 제2법칙에서 언급되는 ‘엔트로피‘라는 것을 키워드로 글을 풀어나간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어느정도 공부에 손을 놓지 않았던 분들이라면 문이과를 불문하고 과학관련 지문에서 한 번 쯤은 접해보았을 개념인데,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비록 과거에는 난해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오랜만에 봐서 반갑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사람도 오랜만에 봐야 반갑지 맨날 보면 오히려 지겹지 않은가. 아무튼 이 엔트로피 개념으로 우주의 무질서 현상을 설명하는데, 특별히 모양이 같은 동전 100 개를 사용해서 엔트로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된 예시가 인상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예시에 나온 숫자나 확률들을 계산해가며 읽는 소소한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이후에 엔트로피와 열역학 법칙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무질서한 사회현상 같은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본문 내용에 따르면 엔트로피 현상의 끝은 결국 우주의 종말로 귀결되는데, 물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일어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영원한 건 절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살아있는 동안 각자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갈 것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권한다.

이 책의 전반적인 모토 가운데 무신론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종교가 없는 무종교인들에게는 마음에 크게 걸릴 것이 없겠지만, 종교가 있는 특정 종교인들에게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나 본문에 소개되는 과학자들의 말이 약간은 불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특정 종교가 있는 분들의 경우 그 종교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는 저자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알아서 찾아나가라는 말과는 살짝 배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저자가 말하는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나가라는 말이 굳이 종교적인 이유를 배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얘기는 좀 달라질 수도 있겠다. 다만, 저자나 과학자들의 전반적인 논조가 신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논지를 전개해 나가기에 앞서 내가 언급했던(약간은 불편하다는)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샜는데 어쨌든 인생은 각자 알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게 결국 좋은 게 아닐까 싶다. 예전에 어떤 다른 책의 리뷰에서도 썼던 말인데 결국 인생은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문득 떠올랐다. 복잡한 과학 법칙들을 얘기하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단순한 결론으로 돌아오는 걸 보니 어쩌면 나라는 인간은 단순함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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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 관련 내용이 끝나고 다음 챕터이자 마지막 챕터인 수학으로 넘어간다. 여기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영국의 수학자인 하디가 수학을 두 가지로 분류한 것이었다. 저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하나는 하찮은 수학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수학이었다. 근데 본문을 읽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하찮은 수학은 실용적인 반면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기만 할 뿐 쓸모가 없다는 내용이 나온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 가보도록 하겠다.




‘모든 사물이 대립물의 통일인 것처럼 사회는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이다. 사회 변화의 동력은 대립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이다. 수온이 섭씨 100도에 이르면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것처럼 사회주의 혁명 투쟁이 양적 축적을 계속하면 사회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때가 반드시 온다. 자본주의 사회가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 P243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물변증법에 토대를 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과학과 비슷해서 비판할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 P243

양자역학에 비추어 보면 유물변증법은 더 과학적으로 보인다. 양성자와 전자는 양전하와 음전하를 띤 대립물이며, 원자는 그 대립물의 통일이다.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것도 그렇게 볼 수 있다. 모든 입자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고, 대립물의 투쟁이 물질의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도 옳다. - P244

그러나 이 모두는 과학의 사실일 뿐이다. 자연의 사실에 부합하는 원리를 가진 철학이라고 해서 진리인 건 아니다. 자신들이 만든 청사진대로 사회를 개조하려고 행사하는 폭력을 그 철학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다. - P244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후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고 유물변증법도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 P243

인문학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임을 다시 확인한다. 인문학의 과제는 객관적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 ‘그럴법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 - P244

인문학의 임무는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유용한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 P245

나는, 품격 있는 문장보다 뜻을 쉽고 명료하게 전하는 문장이 좋다. 취향이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 P245

열역학 제1법칙은 다들 알 것이다. 어떤 물리적 과정이 일어나도 물리계의 에너지 총량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에너지는 운동에너지 · 위치에너지 · 복사에너지 · 열에너지 등 모든 형태를 아우르며, 절대 틀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 한다. - P246

아인슈타인의 방정식(E=mc²)에 따르면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넘나들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질량까지 에너지에 포함하여 에너지 보존법칙은 항상 성립한다고 말한다. - P246

열역학 제2법칙은 제1법칙처럼 딱 떨어지는 형태가 아니지만 우리 우주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을 법칙이다. 모든 물리적 과정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아주 드물게 감소하는 경우가 있어서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 아니라 ‘엔트로피 법칙‘ 이라고 한다. - P246

엔트로피는 여러 일상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데, 나는
‘무질서도‘가 제일 이해하기 쉬웠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우주는 점점 더 무질서해져 언젠가는 어떤 질서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 P247

엔트로피에 대한 여러 정의 중에서 ‘서로 구별되지 않는 멤버의 수‘를 선택했다. 문과 감성에 그나마 와닿는 것 같아서다. - P247

엔트로피를 이야기할 때는 1번부터 100번까지 동전 가운데 몇 번 동전이 앞면이고 뒷면인지 따질 필요가 없다.
3개만 뒷면인 경우 뒷면이 나온 동전이 23.46.92번이든17.52.81번이든 상관이 없다. 의미 있는 것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멤버의 수‘뿐이다. - P248

100개 모두 앞면인 그룹의 멤버수는 하나뿐이다. 100개 모두 뒷면인 그룹도 그렇다. 이 그룹은 엔트로피가 가장 낮다. 달리 표현하면 질서가 완벽하다. 무질서가 전혀 없다. 무질서도를 높이지 않고는 배열을 바꿀 방법이 전혀 없다. - P248

뒷면인 동전의 수가 늘어나면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바꿀 수 있는 배열의 수도 늘어난다. - P248

누가 개입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전 100개 모두 앞면이거나 뒷면인 고도의 질서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그러나 앞면과 뒷면이 각각 50개씩인 그룹은 아무렇게나 동전을 쏟아도 쉽게 만들어진다. 아무도 개입하지 않으면 무질서도가 높아진다는 뜻이다. - P249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은 대체로 저低엔트로피 상태다.  - P249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다. 무질서도가 매우 낮다. 늘 보던 것과 같아서 무엇도 특별히 눈길을 끌지 않는다. - P249

도시의 질서는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에너지를 투입해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기 때문에 무질서한 고高엔트로피 상태인 것은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건물의 유리창이 깨져 있거나, 도로에 종이상자가 굴러다니거나, 네거리에 자동차가 뒤엉겨 있거나, 전신주가 기울어져 있으면 금방 알아차리고 누구한테 책임을 물어야 할지 생각한다. 높은 수준의 질서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도시의 질서는 책임을 맡은 누군가가 강력한 의지로 개입해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P250

높은 수준의 질서를 이룬 것은 그 무엇도 저절로 또는 우연히 생길 수 없다. 입자들이 우연히 뭉쳐 거미줄을 만들지는 않는다. 흙이 우연히 달라붙어 컵이 되는 일도 없다. 원숭이가 아무리 컴퓨터 키보드 위를 뛰어다녀도 베스트셀러 소설이 나오지는 않는다. 큰 자루에 부품을 넣고 흔드는 방식으로는 자동차를 조립하지 못한다. 종이에 아무렇게나 먹물을 뿌려서 난초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거미줄·컵·소설·자동차·난초 그림은 특별한 형태의 생명활동이 개입해 자연의 입자를 특별하게 배열했기 때문에 생겼다. 저엔트로피 상태인 모든 것은 강력한 힘이 개입했다는사실을 알려준다. - P250

엔트로피 법칙을 안다고 해서 크게 좋을 건 없다. 하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분명 낫다. 특정한 종류의 오류와 불행을 피할수 있기 때문이다. - P250

엔트로피 법칙은 내게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조언했다. 그 충고를 받아들이면 열정을 헛되이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 P250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확실히 천재였다. 열역학 법칙을 몰랐던 시대에 영구기관을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영구기관은 외부에서 한 번만 동력을 공급하면 스스로 영원히 작동하는 기관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포부나 떼돈을 벌겠다는 욕망을 품고 도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열역학 법칙은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 P251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어떤 기관도 외부에서 공급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열효율 100퍼센트인 열기관은 만들 수 없다. 모든 열기관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무질서도가 낮은 형태의 고품질 에너지를 무질서도가 높은 형태의 저품질 에너지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열기관은 주기적으로 에너지를 공급해 주어야 일을 한다. - P251

열역학 법칙을 알면 재산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수많은 사기꾼이 영구기관 프로젝트로 투자를 유치해 돈을 가로챘다. 영원히 혼자 작동하는 바퀴부터 물로 달리는 자동차를 거쳐 연료를 공급하지 않아도 전기를 생산하는 물 분해장치까지, 영구기관 아이템은 다양했다. 제대로 일하는 특허심사기구는 영구기관 관련 특허 신청은 아예 심사를 하지 않는다. - P251

뜨거운 커피는 마시는 동안 미지근해진다. 아무리 정리해도 집은 어질러진다. 화를 낼 필요가 없고 화내봤자 소용도 없다. ‘엔트로피 법칙 때문이다!‘  - P252

우리들 각자는 ‘질서정연하고 특별한 원자 배열‘이다. 어떤 사람과 배열이 똑같은 원자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는 현재의 무질서도를 유지한 채 원자 배열을 변경하기가 몹시 어려운,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은 원자 그룹이다. 영구기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이러한 저엔트로피상태를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화와 죽음이 필연이라는 말이다. - P252

나는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가 한 모든 말과 행위가 완전히 잊힐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 마지막 시간까지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밀어 갈 작정이다.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고 도덕과 규범을 세우는 작업을, 누구에게도 ‘아웃소싱‘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한다. - P253

혼자면 모든 것이 더 힘든 법. 피하고 싶은 일도 남과 함께 하면 두려움과 아픔이 줄어든다. - P253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죽어 없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물이 그렇다. 지구와 태양, 별과 은하, 우주 전체도 같은 운명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 P253

기차 경적은 일정한 높이로 소리를 낸다. 그렇지만 기찻길 옆 오막살이에서 들으면 기차가 다가올 때는 소리가 높고 지나가고 나면 낮아진다. 소리는 공기 밀도가 바뀌면서 만들어내는 파동 현상이다. 음파는 파장(마루와 다음 마루사이의 간격)이 짧을수록 높게 들리고 파장이 길수록 낮게 들린다. 기차 경적이 일정한 음파를 내는데도 다르게 들리는 것은 기차가 다가올 때는 파장이 짧아지고 멀어질 때는길어지기 때문이다. 경적의 높낮이 차이를 알면 기차의 속도를 계산해낼 수 있다.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도플러 Christian Doppler(1803~1853)가 이 현상을 발견했다. - P254

빛도 파동이기 때문에 도플러 효과가 나타난다. 같은 빛도 다가올 때는 파장이 짧아지고 멀어질 때는 파장이 길어진다.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노란색 빛을 방출한다고 하자. 그 빛이 관측자에게 접근할 때는 파장이 짧아져 파란색 쪽으로 이동하고 멀어지는 경우에는 빨간색 쪽으로 이동한다. 이것을 각각 청색이동과 적색이동이라고 한다. 빛의 도플러 효과다. - P254

미국 캘리포니아 윌슨 마운틴 천문대 연구원 휴메이슨 Milton Humason(1891~1972)과 허블Edwin Hubble(1889~1953)은 1920년대에 별과 은하를 관측하다가 놀라운 사실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은하들은 모두 적색이동을 보인다. 모든 천체가 우리한테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멀어져 간다는 뜻이다. 둘째, 멀리 떨어진 은하일수록 적색이동의 정도가 심하다. 먼 은하일수록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차 경적의 높낮이 차이를 파악하면 기차의 속도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빛의 적색이동 정도를 측정하면 은하들이 달아나는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 이 발견은 빅뱅과 우주의 가속팽창 가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 P255

엔트로피 법칙을 투사해 보면 우리 우주는 어떤 방식으로든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는 시나리오는? 없다. - P255

첫째는 ‘빅 칠‘Big Chill(열 죽음)이다. 우주는 끝없이 팽창하고 은하들은 더욱 빠르게 멀어져 우주 너머로 사라진다.
모든 은하가 그러하듯 우리 은하도 더 고독해진다. 별이 사라지고 블랙홀마저 증발한다. 물질은 모두 흩어져 입자로 돌아간다. 우주는 소립자만 고르게 분포한, 특별한 질서라고는 없는 곳이 된다. 우주 전체가 동일한 온도 값을 가진 최고 엔트로피 상태에 도달한다. - P255

둘째는 ‘빅 크런치 ‘Big Crunch (대함몰)다. 우주는 언젠가팽창을 멈추고 중력 수축을 하면서 빅뱅 이후 벌어진 과정을 거꾸로 밟는다. 은하들은 서로 가까워져 충돌하고 합쳐진다. 우주는 계속 수축해 빅뱅 초기의 초고온 상태가 되고자연의 네 가지 힘이 합쳐지면서 하나의 특이점으로 수렴해종말을 맞는다. - P255

셋째는 우주가 대폭발과 대함몰을 반복하는 ‘빅 바운스‘Big Bounce다. 이것도 하나 좋을 것 없는 시나리오다. 우리의코스모스는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하는 탄생과 소멸의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팽창 · 수축하는 우주에서는 어떤 정보도 다음 주기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 우주의 은하 · 별 · 행성 · 생물· 문명은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는 대폭발의 특이점을 넘지 못한다. 신이 우주의 태엽을 다시 감는다고 해도 우리 우주에 구원은 없다. - P256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묵시록이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 P256

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 P256

길든 짧든 사람한테는 저마다 남은 시간이 있다. - P256

호모 사피엔스에게 남은 시간은 더 길다. 태양이 부풀어올라 지구를 삼킬 때까지 50억 년이 있다. 우리의 후손이 혹시라도 그때까지 살아남아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태양과 지구에게 작별 인사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빅 칠이나 빅 크런치를 견디지는못한다. 죽어 없어지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니 위로가 된다. 물론 이 모두는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인식 주체인 내가 죽고 없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든 말든, 우주가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P257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계절이 돌고 화산이 터지고 땅이 갈라지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물리 세계는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물리학은 그런 물리적 실재實在 (reality)를 설명한다. - P261

수학도 물리학처럼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수학적 실재‘를 서술하는 학문이라면 수학의 정리定理(theorem)는 수학적 실재에 대한 관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수학자가 많다. 그들은 수학을기호와 논리로 하는 지적 유희로 간주한다. - P261

과학자는 수학을 우주의 언어로 여기며 물리 세계의 운동을 서술하는 데 필요한 수학을 선호한다. 그러나 수학자는 다르다. 우주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학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 P262

수학자는 논문을 쓸 때 인간의 언어를 최소한으로만 사용한다. 수학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 P262

하디는 ‘하찮은 수학은 유용有用하지만 지루하고,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무용無用하다‘고 주장했다. - P263

‘수학이 과학의 여왕이라면 가장 쓸모없는 정수론整數論(number theory)은 수학의 여왕이다‘ - P263

학교에서 가르치는 산술·대수학·유클리드기하학·미적분학과 대학의 공학·물리학 전공자가 배우는 수학은 하찮은 수학이다. 일상의 일과 사회 조직에 큰 영향을 주는 수학, 경제학자나 사회학자가 쓰는 수학도 그렇다. 현대 기하학과 대수학·정수론·집합론·함수론·상대성이론·양자역학은 진정한 수학이다. 진정한 수학은 아름답지만 쓸모가 없다. 인류의 물질적 평안에 기여할 가능성이 없다. 유용성을 기준으로 보면 진정한 수학자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그들이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 P264

하찮은 수학이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는 것과 달리 진정한 수학은 인간의 일상에서 떨어져 있다. 정수론이나 상대성이론이 전쟁 목적에 쓰인 경우는 없었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이런 특성을 지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수학자의 삶을 정당하게 여길 수 있다. -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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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서양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의 차이를 잠시 살펴봤었는데,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이 이어진다. 가장 먼저 중국 고대 철학인 ‘음양설‘에 대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음과 양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얼핏보면 상충되는 대립 관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오히려 상호 의존적이고 하나가 되기 위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 동양의 시각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는 ‘관계‘ 를 중시하는 동양의 상대적 사고에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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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어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알파벳과 한자, 체스와 바둑의 특징을 비교하면서 서양과 동양의 건축 특성을 비교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몇 달 전에 동 저자의 책인《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특별히 이 알파벳과 한자, 체스와 바둑을 비교하는 부분은 저자가《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언급했던 부분과 핵심적인 내용들이 거의 유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2015년에 출간된《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비해 2020년에 출간된《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이 주제와 관련된 설명이 좀 더 풍성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내용 설명을 위해 사례로 등장하는 이미지나 도형 양식 등 단순한 텍스트 외에도 추가적인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어서 본문의 내용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걸 보면 진짜 동 저자가 쓰는 책의 내용도 조금씩 진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이런 생각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요 근래에 최재천 교수의 책, 유시민 작가가 쓴 과학책 등 진화론과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읽어서 그런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이를 통해 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읽느냐에 따라 생각이나 의식의 흐름도 그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가급적 좋은 것, 유익한 것을 보고 읽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안 좋은 것, 유해한 것에는 되도록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쉽진 않겠지만 의식적으로 신경써서 노력해볼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서양의 사고 체계에 반해서 동양의 상대주의 사고 체계의 가장 확실한 예제는 중국 고대 철학인 ‘음양설‘에서 찾을 수 있다. 음과 양 두 개의 반대되는 ‘기氣‘는 서로 상충되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둘이 상호 의존적이면서 하나가 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고 있다. 상충되는 것을 오히려 상호 의존적이며 하나가 되기 위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은 갈등이 있더라도 함께 집단 노동을 해야 했던 벼농사 사회의 시각이다. - P100

「사신도」에서 서쪽에 그려져 있는 거북이와 뱀은 서로 싸우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실은 둘이 교미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동양에서는 서양의 절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상대적 ‘관계‘를 기본으로 한 가치 체계가 만들어졌다. - P100

상대적인 가치관 외에도 동양 문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비움‘이다. - P101

인류 역사 최초로 숫자 ‘0‘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사람은 인도인들이다. 서양에서는 ‘0‘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세상은 신에 의해서 완벽하게 창조되었고 진공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0‘은 비움 즉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데,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에 비움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0‘이라는 개념은 무신론으로 여겼고, 이는 신성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 P101

그리스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0‘을 거부한 반면 인도인들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0‘을 쉽게 받아들였다. 인도의 힌두교는 우주가 무無에서 생겨났고 그 크기가 무한하다고 믿는다. 인도인에게 ‘0‘은 창조이자 동시에 파괴이기도 했다. 그들이 믿는 시바신은 무無 자체다. 따라서 인도인들은 신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0‘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인도에서는 ‘0‘이라는 숫자가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우리가 인식하지는 못하는 수를 의미한다. - P101

동양에서 비움의 의미는 단순히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의미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양에서 비움은 창조의 시작이다. 비움에 큰 가치를 둔 동양 철학자 노자는 일단 손에 잡히는 물질적 존재가 가득 차게 되면 오히려 성장의 잠재력이 소진된다고 생각했다. - P101

진흙을 이겨서 질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그 내면에 아무것도 없는 빈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P101

지게문[戶]과 창문을 뚫어서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빈 곳이 있기 때문에 방으로 쓸 수 있는 것이다. - P102

그런 까닭에 있는 것[有]이 이로움[利]이 된다는 것은 없는 것[無]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노자 도덕경」 11장, 남만성 역) - P102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빈 공간은 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백 퍼센트 가능성의 상태로 해석된다. 이런 노자의 생각은 동양 건축의 공간에서 그대로 반영되는데, ‘선禪의 정원庭園이나 일본의 ‘신사神社‘에 잘 나타나 있다. - P102

‘선의 정원‘은 나무로 가득 채워져 있는 정원이 아닌 비어 있는 공간으로 디자인된 정원이다. 이 정원에는 텅 빈 직사각형 모래밭에 크고 작은 돌이 열다섯 개 놓여 있을 뿐이다. 정원에서 바라볼 때 열다섯 개의 돌 중 하나는 항상 안 보이게 배치함으로써 완전히 채워지지 않음에 만족하라는 가르침을 주려고 했다고 한다. 의도적으로 ‘비움‘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 P102

일본의 ‘신사‘는 두 개의 동일한 대지를 설정해 놓고, 한쪽의 대지에 건물을 짓고 다른 쪽의 대지는 비워진 상태로 둔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반대쪽 비어 있던 땅에 건물을 짓고 이전의 건물은 철거하고 비워 놓는다. 이렇게 건축하고 부수는 것을 20년 주기로 반복한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20년 주기의 순환을 만든 것이다. - P102

일본 신사 건축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건축물 자체보다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생명의 원리를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비움은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준비라는 의미가 더 크다. - P102

마음을 비움으로써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 P103

불교는 인생의 모든 고난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유하지 말고 비우라고 가르친다. - P103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과 해탈이다. 열반은 불이 꺼진 상태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인 ‘니르바나nirvan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해탈은 벗어났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비목사vimoksa‘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열반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내가 죽기 전에도 수양을 하면 이를 수 있는 상태다. 열반에서 더 나아가면 해탈할 수 있다. - P103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고 믿었다. 계속 반복해서 수레바퀴처럼 도는 ‘윤회의 삶‘을 산다고 봤지만,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반복적인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해탈은 일종의 자유의 개념이다. 따라서 열반에 이르고 나서야 해탈이 있다고 할수 있다.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고 해탈에 이르는 것은 비움의 수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 P103

공자, 노자, 석가모니의 영향으로 동양 문화의 가치 체계는 ‘관계‘와 ‘비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특징지을 수 있다. - P103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인간 사고를 지배하는 인식 체계 - P107

서양 문화가 사용하는 알파벳 시스템의 기원은 이집트 문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집트 문자 → 시나이 문자 → 페니키아 문자 → 그리스식 알파벳→ 라틴 알파벳순으로 변천되어 내려왔다. - P107

알파벳은 26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알파벳은 변화되지 않는다. - P107

‘원자‘를 뜻하는 영어 Atom은 고대그리스어 a-tomos에서 온 것으로, ‘부정‘을 뜻하는 ‘일‘와 ‘쪼개다‘는 뜻의 ‘tomos‘가 합쳐진 말이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갤수 없는 것‘이란 뜻이다. - P107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학자 탈레스는 모든 물질의 근원은 물이라고 생각했으며, 기원전 5세기경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의 근원이 물, 불, 흙,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데모크리토스는 세상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입자인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전통적인 서양 과학에서는 물질이 분해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인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개질 수 없으며, 외부와 교류가 없는 독립된 단위로 생각했고, 이러한 원자가 모여서 분자를 구성하고 분자가 모여서 우리가 보는 세상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 P108

알파벳의 구성 역시 전통적인 원자 개념과 비슷하다.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26개의 알파벳이 일정한 순서로 붙어서 단어를 구성하고, 단어가 붙어서 문장을 구성하는 체계다. - P108

알파벳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방식은 알파벳을 하나의 축을 따라서 가로로 배열하되 그 순서만 바꾸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서 D, E, N이라는 세개의 알파벳이 있다면, 그 순서를 END로 하면 ‘끝‘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순서를 바꾸어서 DEN이 되면 ‘동물들이 쉬는 곳‘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 P108

이런 알파벳 문자 체계를 사용했기에 서양에서 유전공학이 먼저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유전공학은 A, G, T, C 네 가지 염기의 서열을 바꾸어서 만들어진 유전자 정보가 생명체의 다양한 모양을 만든다는 개념이다. 각각의 다른 모양의 생명은 네 개의 알파벳으로 만들어진 다른 스토리의 소설책인 것이다. - P108

중국 한자漢字의 경우에는 기존 몇 가지 글자들의 조합으로 새로운 의미의 글자가 계속 만들어진다. 그런데 서양의 알파벳 체계와는 다르게 글자들 간의 상대적 위치와 획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고 짧은 관계에 따라서 같은 글자 요소들로 다른 의미의 글자가 만들어진다. - P108

한자에서 글자의 뜻은 한 글자를 구성하는 기본 글자의 상호 관계에 따라서 변화된다. 그 외에도 한자의 또 다른 특징은 알파벳의 경우 모든 글자가 한 방향으로 나열되는 반면, 한자는 글자가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도 덧붙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 P110

다시 말해서 한자는 자유로운 성장 패턴을 띠게 되는데, 이와 같은 성격은 동양의 건축 평면에서도 나타난다. - P110

서양의 종교 건축이나 왕궁 등을 보면 좌우 대칭성을 가지고서 한 방향의 축을 따라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판테온‘, ‘하기아소피아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 ‘베르사유 궁전‘ 모두 좌우대칭에 가운데 축이 있다. 반면 동양에서는 많은 경우 주변 환경에 맞추어서 좌우 비대칭성을 가지고 자연 발생적인 형태로 증식하듯 평면이 구성된다. ‘경복궁‘과 일본의 각종 성들이 그렇다. 이렇듯 일방향성과 다방향성은 두 건축 문화가 각기 가지고 있는 다른 특징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 P110

서양 문화는 세상을 절대자가 만든 ‘수학적 규칙의 조합‘ 으로 보고, 동양은 세상을 ‘관계의 집합‘으로 보는 시각 차이 - P110

체스는 격자형으로 구획된 정사각형 네모 칸 안쪽에, 여러 종류의 체스 말들이 정해진 위치에 놓인 상태에서 시작된다. 체스는 각자 16개의 말을 가지고 가로 8칸, 세로 8칸의 반상에서 서로 번갈아 가며 말을 움직여서 상대방의 말을 잡아먹는 게임이다. - P111

체스라는 게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징은 왕, 여왕, 기사, 비숍, 나이트, 룩, 폰 같은 신분 체계가 있다는 점과 각각의 말은 자신만의 고유한 진행 경로 패턴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말은 항상 정해진 위계질서와 기하학적으로 정해진 경로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 P111

바둑의 법칙에서 중요한 점은 상대방 돌을 많이 가진 편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빈(보이드) 공간을 많이 만드는 편이 이기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계급 체계를 가지고 있는 체스의 말과 달리 바둑의 돌은 검은색 흰색 두 종류의 편만 나누어져 있을 뿐 같은 편 내에서는 돌들 간에 위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돌은 평등하다만 돌의 위계는 둘러싸였느냐, 아니면 둘러싸고 있느냐의 상대적 위치관계에 의해서 결정 난다. - P112

체스와 바둑의 차이점은 크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 차이점은 그대로 두 건축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 P112

첫째, 게임의 규칙과 구성이 전혀 다르다. 체스는 상대편의 말을 죽여서 없애는 힘겨루기 게임이지만, 바둑은 빈 공간을 더 많이 만드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 P112

서양의 건축물은 대부분 외부 공간을 압도하는 형태를 하고 있다. ‘피라미드‘도 그렇고 유럽의 광장에 위치한 여러 성당을 살펴보면 이들 건축물들은 외부 공간을 포용하기보다는 압도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밀라노 대성당‘이나 로마의 ‘콜로세움‘ 앞에 서 있으면 건축물에 압도되어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건물을 높게 지으려고 노력한다. - P113

반면 동양 건축은 건축물을 통해서 외부 공간을 건축물의 일부로 흡수하여 부속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곳을 거닐다 보면 낮은 담장이나 작은 마당, 처마 밑 공간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건축물이 물체가 아닌, 나와 맺는 밀접한 관계로 경험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건축물은 그다지 높지 않으며 여러 개로 나누어진 건물들로 빈 공간 중정과 함께 군집을 이루고 있다. - P113

바둑과 동양 건축물의 배치 모습에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만약 바둑돌을 건물이나 담장으로 보고, 바둑돌이 만드는 빈 집을 마당으로 본다면, 바둑판의 돌이 놓인 패턴과 동양 건축물 배치의 패턴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바둑돌들이 둘러싸서 빈공간을 만들 듯이 동양 건축에서는 건물과 담장으로 둘러싸서 마당 같은 빈 공간을 만들면서 건축물이 성장한다. 혹은 검정색 돌이 건축물, 흰색 돌이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보아도 좋다. 둘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패턴이 정해지고 곳곳에 빈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바둑과 동양 건축의 공통점이다. - P113

둘째, 체스에서는 말들이 처음부터 정해진 권력의 위계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계급은 서로 다른 형태로 규정된 경로를 통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반면 바둑의 경우 권력의 위계는 상호 간 상대적인 위치에 의해서 결정된다. - P113

서양 건축사는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가고 반복하는 행위의 연속이었다. 그리스 시대에는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을 만들어서 기둥에 반복해서 사용했고, 고딕 시대에는 벽을 받치는 지지 구조인 플라잉 버트레스를 이용한 구조 양식을 만들어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했다. - P117

서양의 문화는 양식이라는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의 반복을 통해서 공간을 만들어 가는 형식이다. 이는 마치 체스에서 각각의 말들이 다른 형태의 규칙과 위계를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양식 혹은 규칙을 만들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것이 서양 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 P117

반면 동양의 나무 기둥과 보를 가지는 구조 양식은 수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다만 건물은 놓인 대지의 조건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반응하면서 건물의 배치를 변화시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상대적인 공간을 연출해 왔다. 물론 여기에도 풍수지리 같은 보이지 않는 규칙은 존재했지만, 그 풍수지리라는 규칙도 물과 산과 사람의 상대적인 관계에 관심의 초점이 있다. 이렇듯 동양 건축은 양식보다는 상대적인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왔다. - P117

셋째, 움직임의 패턴을 살펴보면 체스에서는 말이 가로 8칸, 세로 8칸의 게임 보드 내에서 계속해서 움직인다. 이 모습을 사진기의 조리개를 열어놓고 찍는다면 아마도 복잡한 기하학적인 형태의 라인들이 중첩된 모습이 될 것이다. 반면 바둑에서는 바둑판에 바둑돌이 한 번 놓이면 그 위치를 움직일 수 없다. 그리고 바둑돌이 만드는 패턴은 유기적으로 성장하고 확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 P120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가 디자인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의 돔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해 놓은 것을 보면 하나의 최종 디자인이 나오기까지 기하학의 중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서양 종교 건축에서 대부분의 건축 계획은 기하학적 패턴이 중첩되면서 그 움직임의 선들을 따라서 벽이나 지붕들이 만들어지고 그 벽들에 의해서 보이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 P120

체스판 위에서 움직이는 말들의 경로를 따라서 선을 그려 보면 기하학적 분석도 같은 그림이 나오는 것처럼, 서양 건축의 빈 공간은 주어진 공간 내에서 기하학, 패턴, 중첩, 시간을 통한 오버랩 같은 방식으로 디자인되었다. 반면, 동양 건축은 정해진 규칙이나 반복되는 패턴 없이 땅 위를 뻗어나가는 넝쿨처럼 성장하는 형태를 띤다. - P120

넷째, 체스에서는 말이 격자형으로 만들어진 네모 안에 위치하지만, 바둑에서는 돌이 격자 선의 교차점에 놓인다. - P120

일반적으로 서양 건축은 육중한 벽이 공간을 구획하고 있는 ‘벽‘ 중심의 건축이고, 동양 건축은 ‘기둥‘ 중심의 건축이다. 서양은 벽을 세워서 그 안에 만들어진 방을 사용하는 방식인 반면, 동양은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으면 그곳이 곧 건축 공간이 된다. - P120

바둑에서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둑돌로 규정된 꼭짓점들이 연결된 지점의 안쪽을 말하는 것처럼, 건축에서도 꼭짓점 위치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것이 자신의 집이 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때 만들어진 지붕 밑의 공간은 때론 벽으로 가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기도 하다. 안방은 지붕 아래에 벽으로 구획된 방이고, 정자는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경우이며, 대청마루는 네 개의 벽면 중 두 개만 막히고 두 개는 개방된 경우다. 동양 건축에서는 영역성이 건축 평면도에서 점으로 표현되는 기둥으로 만들어져서 안팎의 경계가 모호하며 빈 공간 자체의 모양이 규정되기 힘든 공간이다. 따라서 빈 공간은 성격상 내외부를 관통하여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 P121

반면 서양 건축의 빈 공간은 평면상 선으로 표현되는 벽이 만드는 공간으로, 안과 밖의 공간 경계가 벽에 의해 명확히 구분되는 딱딱한 느낌의 공간감을 가지고 있다. 벽과 기둥이 가지는 공간감의 차이는 훗날 근대 건축에서 공간의 유전적 계보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관찰 포인트가 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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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나라 독서 교육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말부터 시작한다. 좀 더 체계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게 저자의 생각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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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44부터는 ‘독서는 빡세게 한다‘는 소제목의 글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공감되는 말이었다. 나는 최근에 기존에 내가 잘 모르던 과학분야에 대한 독서를 하고 있는데, 독서 시간을 일일이 시간을 재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배경지식이 없거나 혹은 상당히 부족한 분야이다보니 한문장 한문장을 이해하면서 읽어나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p.145에 밑줄 친 부분에서 저자가 처음에 있는 힘을 다해 끝까지 읽고 난 뒤 관련 분야의 또다른 책을 찾아 읽어보면 점점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말이었다. 또한 해당 분야의 지식이 내 것으로 체화된다는 말에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다. 문득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르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닐테다. 이러한 상황에 딱 적합한 사자성어같다.

우리나라 교육은 독서를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아이가 읽는 책을 같이 읽고, "그 부분은정말 재미있지 않았니?"라고 말을 걸면서, 온종일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많았어요. 제가 읽는 책을 아들이 읽기도 했고요. 읽어야 할 책들을 잘 안내하는 체계가 우리나라 교육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교과서 중심입니다. - P136

"다 좋은거예요. 진짜 재미있어요. 어머니도 같이 읽으세요" - P137

‘공상 과학 시리즈를 쓴 이 작가들도 온갖 인문·과학·사회· 역사 책을 보며 공부를 무지하게 했을 것이다‘ - P137

‘우리 아이는 저런 것만 읽는다‘라는 상황이 ‘책을 안 읽는다‘ 라는 상황보다는 훨씬 낫고요. 그런 분야의 책을 읽던 아이는 반드시 다른 분야도 찾아 읽습니다. 하여간 많이 읽어야 합니다. - P137

저는 매우 숙독하는 사람이에요.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엄선해서 읽은 내용을 깊게 소화하는 편이라 제 글에 책 내용을 적당히 녹여내기도 합니다. - P138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고료뿐이었죠.
"얼마 이상을 주셔야 고려해볼 수 있다. 정말 죄송한데 제 글이 마케팅 차원에서 그 액수만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시면 다시 연락을 주시라. 그때 원고를 검토하겠다" 라고 답합니다. - P139

실제로 고료 이야기를 꺼내면 많이 걸러져요. 그 방법을 고수하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소문이 좋지 않게 났더라고요. ‘최재천 교수는 돈을 밝힌다.‘ 욕을 먹더라도 내 시간을 내가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감수합니다. - P139

제 조건을 검토하고 바로 거절하면 서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습니다. - P139

말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늘 변한다는 데 있잖아요. - P141

책을 읽긴 읽었지만 깊게 사고하며 안으로 다지는 접근을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 P143

독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겁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집니다. - P144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인데, 그 책을 취미로 읽는다? 이건 아니죠. - P144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그늘에 가서 편안하게 보는 건 시간 낭비이고 눈만 나빠져요. 책은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도 최악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3차원을 보게끔 진화했어요. 책은 평면에 글자를 새겨서 만든 2차원 물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눈이 아파요. 책은 눈을 망가뜨린 원흉이에요. - P145

우리는 기획서를 작성해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치밀하게 기획해서 공략해야죠.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분야의 책을 공략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한 번도 배우지 않았는데 술술 읽힐까요? 난생처음 붙든 양자역학 책의 책장이 척척 넘어갑니까? 진화심리학이 하도 뜬다니까 ‘좀 읽어 봐야지‘라고 생각하곤 붙잡았는데, ‘와! 잘 읽히네‘ 하면 거짓말이에요.
당연히 안 읽힙니다. 그런데 그 책을 있는 힘을 다해서 끝까지 읽고, 또 비슷한 진화심리학 책을 사서 읽다 보면, 세번째 책은 참 신기하게 술술 넘어갑니다. 어느 순간 그 주제가 내 지식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요. - P145

제가 해봐서 아는 이야기 하나를 할게요. 진화심리학을 공략을 한 다음에 양자역학을 공략하겠다고 마음먹고 읽으면 어떨까요? 힘들어요. 그런데 요런 투쟁을 몇 번 하다 보면 그다음에 생판 모르는 분석철학을 읽고 문화인류학을 읽을 때, 묘하게 쉬워집니다. 독서량이 늘어날수록 완전 새로운 분야의 책을 접할 때, 전보다 덜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할 거예요. 평생 다양한 책을 읽으며 살아온 제 경험담입니다. 학문은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요. 어떤 분야를 기어올라가면서 3층에서 보려고 애써도 안 보이던 게, 다른 분야를 올라가면서 4층에서 건너다보니 저쪽 분야 3층 구조가 훤히 보이더라고요. - P146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나가다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나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오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 P146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일‘입니다. - P146

어른이 배우고 훈련받을 곳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지금, 결국 책밖에 없어요. 취미 독서는 아예 깨끗이 잊으세요. 독서는 일입니다. - P147

리더는 일단 말을 잘해야 합니다. - P148

토론을 잘하려면 말이 짜임새 있어야 하고 논리적 사고를 해야 하니 글쓰기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고요. 글을 잘 쓰려면 책 읽기가 필요한 거죠. - P148

그러니까 읽기, 쓰기, 말하기인데, 결국 말하기에 방점이 찍힙니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는이유는 말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버락 오바마 Barack Obama도 그렇고, 다들 자기 언어를 사용합니다. 중요한 연설문을 봐도 남이 써준 원고를 읽었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자기가 관여한 내용이 눈에 보이죠. - P148

결국, 말을 잘하려면 글쓰기를 잘해야 하니, 평소에 많이 읽고 많이 관찰해야 합니다. - P148

사실, 뭔가를 확실히 인식시키려면 약간의 권위적 제압이 필요하니까요. - P150

제가 선생님 말씀에서 느끼는 글쓰기와 말하기의 핵심은 자기를 솔직히 드러내는 ‘자기다움‘에 있다고 봅니다.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 결국은 ‘내가 나를 키워야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 P150

읽기, 쓰기, 말하기를 할 때는 자연스레 나를 드러내야 진정성이 담기면서 상대에게 깊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 P151

‘까짓것 해보자. 하다 안 되면 할 수 없지!‘ - P152

나를 드러낸다는 건 스스로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건데요. 물론 자신감도 있어야겠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드러내도 안전할 때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 P153

서열이 낮은 자의 처지에서는 싫은데 완곡하게 거부하는 감정적 공격을 받지 않으면서 뜻을 전달하는 방어적 표현이 필요합니다. - P153

‘에라 모르겠다‘ - P154

우리 사회는 실수를 너무 실수로 낙인찍어요. 미국사회에서 좋았던 건 실수를 실수로 인정하고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치명적 일이 벌어지지는 않더라고요. 영어를 배워서 하는 사람이니까 영어를 못해서 그런 것처럼 슬쩍 묻어갔고요. 또 누가 그렇게 말해주면서 주변에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생기니까 그때부터는 막 저지르게 됐습니다. - P154

실수하면 사과하면 된다는 생각 - P156

‘실수한 사람을 꾸짖지 않는다‘ - P156

다른 사람들은 내 실수를 별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수하면 완전히 그 동네에서 매장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더라‘가 제 결론이고요. ‘너무 겁먹지 말고 들이대라‘가 제 조언입니다. - P156

‘선과 악이 다 선생이다" - P156

더 중요한 건 재미있더라고요. 동물에 대해서 배우니 좋아서 더 잘했던 거죠. - P158

우리나라에 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안 할 수 있나? 가장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치를 뽑겠다‘라고 효율만 생각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어느 날이었어요. ‘인간은 왜 잠을 자야 할까? 나는 할 게 너무 많고 읽을게 너무 많은데 왜 이렇게 피곤하고 졸릴까? 나를 용서할 수가 없다‘라는 이상한 말을 제 마음속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 P158

새벽 2~3시인데도 공부를 끝내기 싫어서 더 읽고 더 찾고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그래도 조금 자둬야 내일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새벽 3시에 기숙사로 갔어요. 아침 8시에 다시학교에 왔습니다. 그러니 잘할 수밖에 없죠. - P159

우리나라 교육이 미국 교육에 비해 좋은 점이 참 많아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모자라는 부분이 바로 학생들이 자기 의견을 정리하고 발표하는 훈련을 거의 못받고 정규 교육 과정을 빠져나간다는 점입니다. 제 예상으로 곧 바뀔 겁니다.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 P159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죠. - P160

아직도 학습이 수동적 방법으로 진행되는 면이 짙게 남아 있는데, 이 틀에서 벗어날 기회도 토론에 있습니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훌륭한 토론을 하려고 준비할테니까 자기주도학습이 저절로 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 P161

숙의熟議란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한다.
나는 ‘토론討論, discussion‘을
‘숙론熟論‘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대의 민주주의를 하자고 뽑아놓은 정치인들은 대화는 고사하고 제대로 마주 앉을 줄도 모른다.
우리 시민이 나서서 숙론의 장을 열었으면 좋겠다.

저는 우리가 데이터를 어떻게 분석하는가만큼은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집 능력을 배우는 거죠. 전체를 보고 무엇이 맞는 말인지를 골라내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 P162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보이면서 개발한 이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죠.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한 겁니다. 하지만 국민이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반드시 간파됩니다. - P164

나무가 자라면서 1톤의 탄소를 흡수할 때마다 공기에서 3.66톤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해요. 왜냐면 대기에서는 탄소 하나에 산소 두 개가 붙어 이산화탄소로 떠 있잖아요. - P164

데이터를 잘라 부분만 말하며 호도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왜 요것만 보여줘요?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 P165

모든 현상이 시간 속에 변화하며 존재하는 본질 - P165

자연에서는 꼴찌만 아니면 삽니다. - P167

실제로 자연계가 그렇게 운영돼요. 가장 적응을 잘한 하나만 살아남고 다 죽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시대에는 아무도 안 떨어져요. - P167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무도 도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들어지면 제일 못하는 끝이 사라집니다. 1등만 남겨놓는 일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 P167

다윈은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보여줬어요. ‘내가 중요하다. 내가 변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중심이다. 내가 그 주체다.‘ 바로 이 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주신 분이에요. 서양의 2,000년 사고 체계를 뒤집어버린 사상가입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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