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다가 좀 지루해진 나머지 상대적으로 읽기 수월한 책들로 잠시 외도(?)했다가 간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지난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네이피어와 클러비라는 두 과학자가 태양계 행성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고리들과 소행성, 위성들의 기원이 어디서 왔는지에 관한 어떤 주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고 소개했었고 이를 간단히 검증도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얘기도 나왔었다.

오늘은 검증과 관련된 내용들로 시작한다.(꾸역꾸역 읽고는 있지만 비전공자라 그런지 참 쉽지 않은 부분이다. 문득 이 쪽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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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오늘 포스팅의 중간지점부터 ‘도플러 효과‘라는 것이 나온다. 이것은 우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본문을 읽으면서 감탄을 금하기 힘들정도로 꽤나 논리적인 설명들이 이어져서 비전공자라 개인적으로는 처음 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흥미롭게 본문 내용들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동위 원소는 핵에 들어 있는 양성자의 개수는 같은데 중성자의 수가 다른 원소들을 말한다. - P500

동위 원소들의 상대 함량은 그 원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겪은 일련의 핵융합 반응이 무엇이었으며 근처에서 발생한 초신성 폭발이 얼마나 오래전에 있었느냐 등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동위 원소들의 상대 함량을 알면 그 원소가 만들어진 배경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추적 작업에 마그네슘의 동위 원소들이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 P501

우리 은하의 한구석에서 물질이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다른 곳의 상황과 반드시 같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마그네슘 동위 원소들의 상대 함량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분석하여 태양계를 구성하는 물질들이 단 한가지 특성의 분포를 보이는지 아니면 여러 가지 분포를 보이는지를 면밀하게 조사한다면 태양계에 현존하는 마그네슘 원소가 태양계가 탄생할 당시라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온 것인지, 아니면 그 기원이 여러 곳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 P501

우주의 대폭발과 은하의 후퇴 운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도플러 효과라고 알려진 자연의 간단한 원리 덕분이었다. - P501

도플러 효과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상이다. 택시 기사가 우리 곁을 지나며 경적을 울린다고 하자. 택시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경적이 일정한 높이의 소리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택시가 지나는 길가에 서 있는 사람은 음높이가 변함을 느끼게 된다. 택시가 다가올 때에는 경적이 고음으로 들리다가 택시가 자기 앞을 지나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점점 저음으로 변한다. - P501

경주용 차들은 보통 시속 20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달리는데 이 속력은 음속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 P501

소리는 공기 밀도의 변화에 따라 만들어지는 일련의 파동 현상이다. 이러한 파동 현상이 우리에게 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 P501

음파의 마루와 골 사이 간격이 가까울수록 우리에게 들리는 소리는 점점 고음이 되고 그 간격이 멀수록 저음이 된다. - P501

달리는 차의 관점에서는 비록 일정한 음조의 경적을 울린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멀어지면서 그 소리의 골과 마루의 간격은 넓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지나는 차의 경적이 점점 저음으로 변하는 것같이 들리는 것이다. 경주용 차가 우리에게 접근할 때에는 음파의 골과 마루 사이 간격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점점 높아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 P503

정지한 차에서 나는 경적 소리의 높낮이를 미리 알고 달리는 차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높낮이를 측정하여 이 둘을 서로 비교하면 그 차의 접근ㆍ후퇴 여부와 속력까지도 바로 알아낼 수 있다. 높낮이의 변화 정도가 상대 속력과 음속의 비와 간단한 비례의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 P503

빛 또한 파동 현상이다. 소리와 다르게 빛은 진공에서도 전파된다. 그렇지만 도플러 효과는 빛에서도 나타난다. - P503

달리는 자동차가 경적 대신에 전후사방으로 노란색의 빛을 방출한다고 하자. 차가 관측자에게 접근할 때에는 주파수 (파장)가 증가(감소)하고 관측자에게서 후퇴할 때는 주파수 (파장)가 감소(증가)한다. - P503

파동에서 인접한 두 골이나 두 마루 사이의 거리를 파장이라 하며, 단위 시간에 일어나는 골에서 골, 또는 마루에서 마루까지의 변화 개수를 주파수라 한다. - P503

주어진 매질에서 파동의 전파 속도는 일정하므로, 파장이 길어지면 주파수가 감소하고 파장이 짧아지면 주파수가 증가한다. 주파수가 많은 파동이 고음을 낸다. 다시 말해서 고음은 파장이 짧다. - P503

빛의 파장과 주파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음파의 경우 주파수의 고저가 음조의 고저로 나타나는데, 빛의 경우에는 주파수의 높고 낮음이나 파장의 짧고 길음이 색깔로 나타난다. 빨강에서 보라로 갈수록 빛의 파장(주파수)은 감소(증가)한다. - P503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게 되는 차의 속력으로는 빛의 주파수(파장) 변화량이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작지만 빛의 속도에 비해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력이라면 그 변화량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따라서 빛의 색깔이 변한다. - P503

차가 관측자에게 접근하는 경우에는 빛의 파장이 감소하여 색깔이 노란색에서 파란색 쪽으로 이동한다. 이것을 청색 편이 또는 청색 이동이 일어난다고 한다. 반대로 관측자에게서 멀어지면 노란색이 빨간색 쪽으로 변하여 적색 이동 (편이)이 생긴다. - P504

청색이다 적색이다 하는 표현은 단지 파장(주파수) 변화의 방향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다. 물체 자체의 색깔은 사실 어느 색깔이라도 좋다. 적색 이동이 관측된 은하라고 해서 그 은하의 색깔이 붉다는 뜻이 아니다. - P504

파장의 변화 정도는 물체의 이동 속도에 비례한다. 파장의 변화량을 정지 상태에서의 파장으로 나눈 값이 관측자와의 상대 속도를 빛의 속도로 나눈 값과 같다. 그러므로 적색 이동량을 측정하여, 그 천체가 우리에게서 얼마나 빠른 속도로 후퇴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 P504

도플러 효과. 정지하고 있는 물체가 내는 소리나 빛은 ...(중략)... 일련의 구면파를 이루며 멀리 퍼져 나간다. 먼저 나온 소리나 빛이 만든 구면파의 반지름이 나중에 나온 것보다 클 것이다. - P502

만약 그 물체가 아래 그림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면, 구면파들의 중심도 1에서 6으로 점차 이동할 것이다. 그러므로 B에 있는 관측자에게 구면파와 구면파 사이의 거리가 본래 거리보다 길게 느껴지고, A에 있는 관측자에게는 반대로 짧게 느껴지게 된다. 따라서 관측자로부터 후퇴하는 물체가 내놓는 소리나 빛의 파장은 정지했을 경우보다 길어진다. 즉 후퇴하는 물체는 적색 이동을 보인다. 물체가 관측자에게 접근하는 경우 파장은 정지 상태의 경우보다 짧아진다. 즉 접근하는 물체는 청색 이동을 나타낸다. - P502

멀리 있는 은하들에서는 도플러 효과에 따른 빛의 적색 이동이 주로 관측됐다. 이 도플러 효과가 현대 관측 우주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 P504

나선 모양의 성운들이 "섬 우주 island universe"라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인물이 바로 (에드윈) 허블Edwin Hubble이다. - P505

섬 우주는 우리 은하와 같이 수많은 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인데, 허블은 어떤 부류의 별들의 절대 광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이 먼 은하들의 거리를 측정했다. 거리 측정에 쓰이는 이런 부류의 천체들을 우리는 ‘표준 초 standard candle‘ 라고 부른다. - P506

은하 하나에서 오는 빛은 그 은하를 이루는 수십억 개의 별들이 방출하는 빛의 총합이다. - P506

별에서 비교적 온도가 낮은 외곽부의 대기는 별 내부에서 나오는 특정 파장들의 빛을 흡수하여 스펙트럼 사진에 여러 개의 흡수선을 만들어 놓는다. 이 스펙트럼의 파장을 측정하면 별의 대기를 구성하는 화학 조성을 알아낼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별들도 우리 태양과 같은 성분의 물질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P506

휴메이슨과 허블은 자신들도 깜짝 놀랄 발견을 했다. 먼 은하들의 스펙트럼이 모두 적색 이동을 보이며, 더욱 놀라운 것은 적색 이동의 정도가 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사실이었다. - P506

적색 이동을 가장 쉽게 해석할 수 있는 방편은 이것이 도플러 효과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하들이 모두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력으로 후퇴한다는 추론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 P507

우주 자체가 팽창하는 듯하다는 생각은 지워 버릴 수가 없다. 우주가 팽창하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은하들은 서로 멀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고, 과거에는 은하들 사이의 간격이 지금보다 훨씬 가까웠을 것이다. - P507

은하의 후퇴 운동을 택시가 관측자에게서 멀어지는 식의 이동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현실의 왜곡이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 역시 서로 멀어질 것이다. 팽창의 한 결과가 은하의 후퇴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은하에서 관측되는 적색 이동을 달리는 택시가 방출하는 파장 5000옹스트롬의 노란색 빛이 도플러 효과 때문에 약간 긴 파장으로 옮겨가는 바로 그런 식의 적색 이동이라고 단순히 이해한다면, 이것도 오해의 소지를 안고 있다. - P507

우주의 팽창은 은하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의 간격을 체계적으로 늘려 놓는다. 빛의 파장도 공간의 팽창과 더불어 늘어난다는 말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이 통상의 적색 편이와 다를 바가 없을 뿐이다. - P507

휴메이슨과 허블의 발견은 우주의 기원이 대폭발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은하들의 적색 이동을 발견할 당시에는 이것이 우주의 기원과 관련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건드리는 문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돌이켜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두 사람이 은하의 스펙트럼에서 우리를 우주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갈 이론적 터전을 찾아냈던 것이다. - P507

현대 우주론의 거의 대부분, 특히 우주의 팽창과 대폭발 이론은, 은하들의 후퇴 운동을 도플러 효과에 따른 흡수 스펙트럼의 적색 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해석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 P507

자연에서 적색 이동은 도플러 효과 이외의 요인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중력으로 인한 적색 이동이 그중의 한 가지 예이다. - P508

빛이 강력한 중력장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갖고 있던 에너지의 일부를 잃는다. 그렇게 되면 긴 파장의 빛으로 바뀌게 되고 멀리 있는 관측자에게는 원래의 색깔보다 더 붉게 보인다. - P508

중심에 질량이 매우 큰 블랙홀을 갖고 있는 은하들이 우주에 많이 존재하므로 외부 은하의 적색 이동을 중력으로 인한 적색 이동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강력한 중력장이 지배하는 지역이라면 밀도 역시 당연히 높을 것이며, 빛도 더 많이 흡수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흡수 스펙트럼의 흡수선들은 그 폭이 매우 넓게 마련이다. 그런데 관측된 흡수선들의 폭은 반대로 매우 얇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점이 은하의 적색 이동을 강한 중력장의 효과로 설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P508

은하에서 관측된 적색 이동을 그 은하가 후퇴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은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폭발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다면 우리에게서 후퇴하는 부분만 아니라 접근하는 지역도 있을 것이므로, 폭발 때문이라면 적색 이동과 함께 청색 이동도 관측돼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은하수 은하가 속해 있는 국부 은하군의 은하들을 제외하면 외부 은하들이 모두 거리와 방향에 상관없이 적색 이동만 보여 준다. - P508

천문학자들 중에는, 은하의 적색 이동 현상을 도플러 효과의 결과로 해석하여 우주의 팽창을 유추해 온 일련의 사고 과정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홀턴 아르프 Halton Arp가 그 좋은 예이다. - P508

물리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퀘이사와 은하, 또는 은하 한 쌍의 분광 사진을 찍어 보면 쌍을 이루는 두 천체의 적색 이동이 판이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 P509

적색 이동이 우주의 팽창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두 은하에서 측정된 적색 이동의 정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둘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이다. 적색 이동을 통해 밝혀낸 거리의 차가 심지어 10억 광년인 경우도 있다. 물리적으로 연결돼 있는데, 어떻게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멀 수 있단 말인가? - P509

어떤 이들은 아르프가 찾아낸 쌍들은 순전히 통계적 우연에 불과한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가까이에 밝은 은하가 하나 있고 그 은하의 방향으로 먼 곳에 퀘이사가 자리한다면, 동일한 시선 방향에 보이기는 하지만 둘의 적색 이동은 크게 다를 것이다. 물리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단순한 기하학적 연결이 주는 착각에 불과하다. 천체를 관측하다 보면 이런 경우와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아르프가 찾아낸 개수가 통계학적 예측보다 과연 얼마나 더 많으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 P509

아르프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예로 우리의 관심을 불러 모았다. 적색 이동의 값이 작은 은하의 양옆에 퀘이사가 하나씩 있는데 그 둘의 적색 이동은 크기가 거의 같고 은하에 비해 무척 큰 값이었다. 아르프는 이 관측 결과를 근거로 퀘이사들이 우주론적 거리에 있는 천체가 아니라, "전방에있는 은하"에서 좌우로 분출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은하에서 관측되는 적색 이동은 단순한 도플러 효과의 결과가 아니라, 아직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종의 메커니즘에 따른 것이라고 추론했다. - P509

아르프의 생각이 옳다면 퀘이사의 에너지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초신성의 연쇄 폭발이니 거대 블랙홀이니 하는 이상한 가정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퀘이사가 우주론적 거리에 있지 않다면 그들의 광도가 매우 높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P510

아르프가 제시한 예들의 거의 대부분이 기하학적 쌍인 것으로 나중에 판명됐으며, 일부는 중력 렌즈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은하의 적색 이동 현상을 우주 팽창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 P510

적색 이동이 우주 팽창의 유일한 증거는 아니다. 적색 이동과는 별도로 우주 배경 복사도 우주의 팽창을 설명하는 중요한 관측 사실이다. - P510

하늘의 어느 방향을 보든 미약한 세기의 전파 신호가 잡힌다. 잡힌 전파 신호의 세기가 파장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조사하면, 이 신호를 내는 물질의 온도를 추정할 수 있다. - P510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대폭발 순간의 화구는 우주의 팽창과 더불어 점점 식어 왔다. 그런데 우주 배경 복사에서 측정한 온도가 식어 버린 화구 온도의 추정값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우주 배경 복사 역시 우주 팽창의 훌륭한 증거가 된다. - P510

정밀한 전파 망원경을 U-2 비행기에 실어서 지구 대기의 최상부로 올려 보내 하늘의 모든 방향을 세밀하게 관측하고 거기서 얻은 결과를 1차적으로 근사 분석했더니, 우주 배경 복사의 세기가 완벽에 가까운 대칭적 분포를 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우리는 대폭발 순간에 화구가 모든 방향으로 일정하게 팽창했다고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는 완전 대칭의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 P511

관측 결과를 좀 더 정밀한 방법으로 분석했더니 우주 배경 복사에 약간의 비대칭성이 드러났다. 우리 은하수 은하가 자신이 속해 있는 국부 은하군의 다른 은하들과 함께 처녀자리 은하단 방향으로 초속 600킬로미터 이상의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다면 앞에서 드러난 이 비대칭성은 대부분 깨끗하게 설명된다. 이 정도의 속력이면 우리는 100억 년 이내에 처녀자리 은하단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가 오면 외부 은하의 연구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 P511

처녀자리 은하단은 여태껏 알려진 은하단들 중에서 구성원이 가장 많은 초대형의 은하단으로서 나선 은하, 타원 은하, 불규칙 은하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우주의 보석 상자이다. - P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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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세다, 나대다‘ 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온다. 외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간의 성격이나 스타일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고정관념 같은 것이 뿌리깊게 남아있는 듯하다. ‘남자다운 건 이러한 것이고 여자다운 건 저러한 것이다‘ 같은 것 말이다. 얼마든지 남자도 여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고 여자도 남성스러운 면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주어진 성性과 반대되는 모습들을 보면 뭔가 특이하다는 식으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은연중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역사적인 또는 문화적인 혹은 기타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급속도로 변하는 사회에서 특정 성에 대한 어떤 고정된 스타일이 존재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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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읽다가 ‘한계에 부딪히다‘ 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여기선 저자가 자신이 속한 업계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는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인 나 자신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였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내 경우 문득 한 예로 떠올랐던 것 중의 하나가 쉬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걸음 수 였다. 요즘 스마트폰 어플에 보면 걸음 수를 카운트해주는 것들이 여러가지 있다. 내 경우 ‘구글 피트니스‘ 를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두 지표가 걸음 수와 이동한 거리다. (물론 이것 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지표는 아니기에 생략한다.) 스마트폰에 이 어플을 설치한 후 비교적 자유로운 주말이나 공휴일같은 때 운동도 할 겸 무작정 걸었던 적이 있는데, 거의 쉬지 않고 최대로 걸었던 걸음 수가 25,000보에서 30,000보 정도 되었다. 거리로는 대략 25km 내외 정도로 측정되는데 이 정도 걸으면 거의 내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게, 일단 내 다리가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와 달리 움직임이 확실히 둔해진다.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마치 모래주머니를 양 다리에 차고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렇게 한계를 몸으로 경험해보면 나의 역량이 어느정도까지 인지 가늠이 되고 그에 맞게 컨디션을 조절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긴다. 이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절대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득 소크라테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이 참 단순해보이지만 괜히 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위의 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분수에 맞게 활동하며 살 수 있는 것이지 나 자신의 한계도 모른채 무작정 의욕만 앞서서 살아간다면 머지않아 낭패를 볼 위험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 내용과는 별개로 소크라테스가 왜 유명한 철학자인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오늘은 소크라테스의 말에 ‘한계‘ 라는 단어를 덧붙여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너 자신의 한계를 알라‘ 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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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이어 나오는 글 중에 ‘겁이 많다‘ 라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조금 놀랐지만,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읽다보니 저자의 생각에 수긍할 수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볼 줄 아는 저자의 시각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상하다‘ 라는 말에 대한 얘기도 이어지는데 이것을 ‘특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저자의 관점을 보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들도 어찌보면 특별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전보다 좀 더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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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어 나오는 ‘살아남다‘ 라는 글에서는 한 일화를 통해 이 말에 대해 저자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더불어, 시간이 지난 후 저자의 생각이 기존과는 달라지는 것들을 보면서 독자인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와서 읽는 내내 뭔가 흐뭇하고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저자가 젊었을 때는 업계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이 왠지 모르게 비참하고 억지로 뭔가를 꾸역꾸역 해나가는 느낌으로만 다가왔다고 한다. 하지만 업계에 장기간 있다보니 소위 말하는 ‘감感‘이라는 게 떨어지는 시기가 언젠가는 반드시 온다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자 예전에 부정적으로만 느껴졌던 그 말이 이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되었다는 게 저자의 고백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를 들어가면서 저자도 젊을 때와 같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아서 이런저런 고민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고민 속에서 저자는 자신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찾아보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다고 한다.

또한 가급적이면 인성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도 덧붙이는데 독자인 내가 느끼기에 이는 롱런을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업할 때 좀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간혹 예민해질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에는 가급적 상대방을 배려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실제로 저자가 업계에서 장기간동안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성적으로 훌륭한 분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국가대표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인 손웅정 님이 쓰신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에서도 보면 월드 클래스인 선수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얘기를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당연히 실력이 기본적으로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인성이 훌륭했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곳에 적용되는 진리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한 인성은 그 가치가 좀 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분야이든 간에 사람이라면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성들이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사회에서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생각외로 이런 기본적인 인성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교만해서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뭐 세상이라는 게 결코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뭐 그러려니 해야지 어쩌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는데 어쨌든 살아남는 것은 간혹 폼나지 않을 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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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창작하다‘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영감靈感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저자는 영감이 어디서 오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체력에서 온다는 답을 하는데, 이는 결국 우리 ‘뇌‘의 활동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더 다뤄보도록 하겠다.

여자는 부드럽고 온화하지 않은 정도만 되어도, 한국에선 쉽게 ‘쎈언니‘, ‘걸크러쉬‘ 호칭을 얻을 수 있다. 그만큼 여성의 기본값이 은연중에 책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나는 환경이 아니었다면 남녀가 각각 똑같은 기본값의 성질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성향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그러나 성별에 따른 ‘모범 성향‘이라는 게 없는 이상, 어떤 성향도 유년기에 ‘잘못된 점‘으로 치부되지 않을 테고 그것이 잘 자라 한 사람의 고유한 강점 또는 질감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소극적인 남자 또는 적극적인 여자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특별함을 발견할 수도 있다.

성향의 기본값은, 나의 사회적인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기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나는 세상은 방구석에서 뭐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모든걸 바치는 덕후들과 무리에서 늘 튀어가며 소리쳐준 나대는 이들로 인해 변해왔다고 믿는 사람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자아가 있다 ...(중략)... 결이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내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나‘임에 틀림없지만, 세포분열을 하듯 수많은 상황 속에 각기 다른 ‘역할‘로도 존재한다.

심지어 꼭 집단에서뿐만 아니라 누구의 앞이냐에 따라 우리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온전히 이해받기 힘들다.

모두에게, 모든 곳에서 온전한 나로서만 존재한다는 건 아주 이기적이어야 가능하다. 배려하기에, 사랑하기에, 책임이 있기에, 히스토리가 있기에 우리는 종종 다른 모습을 한다.

어떤 이유로든 내게 소중한 누군가의 앞에서, 그에 맞는 나의 역할 또는 모습이란 건 분명히 있다. 가면과는 분명히 다르다. 중요한 건 내가 팀장임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모든 팀원들은 결국 나라는 줄기에서 뻗어난 가지라는 걸 잊지 않는 거다.

A&R(Arists & Repertoire) : 아티스트 발굴, 육성, 음반제작을 하는 직무

A&R은 프로듀서의 손발 역할을 한다. 프로듀서가 앨범의 방향을 정하면, A&R은 이에 맞는 곡과 가사를 수급하고 작곡가를 매칭하기도 한다.

일이 순조로울 때는 실무자의 공이 빛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그것이 A&R의 책임이 되진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프로듀서나 제작자의 몫이다.

내가 한 일의 경우 어떤 ‘결정‘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최종적으로 그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하는 일은 프로듀서의 역할이고, 어떤 통찰과 계산이 필요한 일이며,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질 능력과 강단은 없는 사람이란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쉬웠다. 지시한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패닉이 오고 결국 팀원들은 할 일이 없고 나만 일을 떠안는 경우가 허다했다.

작은 부분의 디테일을 잘 보는 나의 장점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은 될 때까지 해보는 노력 끝에 할 수 있는 말이다. 해보고 또 해보다 결국 인정하게 되는 쓸쓸한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어떤 부분에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의 ‘벽‘에서 뒤돌아봐야 알 수 있는 나만의 가능성이 있다. 즉 한계에 부딪힌다는 건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도 된다.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알아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이 말은, 스스로는 깨닫기 힘든 부분이 잠재력 그리고 가능성이라는 뜻도 된다. 땅 끝에 닿아본 사람만이 지도를 그려낼 수 있듯, 한계치에 닿아본 사람만이 스스로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다.

무모한 자들은 뼈아픈 실패를 겪지 않았거나, 그 실패들이 남긴 데이터를 망각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지켜야 하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다. 또 자신과 얽힌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일에 대한 신중함이 있는 자들이다.

삶에 있어서 충동보다는 지구력으로 대처하는 이들, 그중에서도 ‘나는 겁이 많은 편이야‘ 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더욱 호감이다. ‘겁이 없음‘을 매력적인 무기로 휘두르지 않는 그들은, 결과적으로 늘 강했다.

‘가나다라마바사, 너와 나의 암호말‘

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인물들은 대체적으로 남성성이나 여성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만 보면 슈퍼스타들이 대개 그렇다. 마이클 잭슨이라든지, 마돈나라든지.)

‘동작‘은 유행을 타지만, ‘표현‘은 그렇지 않기 때문

가사를 표현하는 몸짓을 취하는 것이 무대라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도 사랑받는 작품은 결국 그런 본질에서 탄생하는가 보다.

사람은 본인 고유의 색깔을 가져야 한다고, 특별한 나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한다. 그러고는 정작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이것은 낯선생명체를 거부하는 동물적인 본능에서 기인한 습성이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본능을 이성으로 거를 수 있어야함에도, 자주 그러기를 실패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그 특별한 사람을 성의 없는 한 마디로 정의해버린다. ‘이상하다!‘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봐야 우리는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앞으로 살면서 우리는 아마도, 수없이 많은 ‘이상하다‘는 말을 툭 하고 내뱉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그 말을 ‘특별하다‘고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좀 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음미하며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살아남으면 돼. 그게 다야."

‘살아남는다‘는 말은 꾸역꾸역 버틴다는 말로 들렸다. ‘꾸역꾸역‘이라는 표현을 붙일 만큼 구차하고 초라한 모습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사람 많은 배에 억지로 몸을 욱여넣고 비루하게 항해를 하는 사람이 상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묘하게도, 5년 차, 10년 차가 될 때마다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살아남았고‘, 그러기 위해 많은것들을 했다. ‘살아남는다‘는 말은 단순히 존재감 없이 그럭저럭 발을 걸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살아남아보며 깨달았다.

나를 살아남게 해준 순간들이 있다. 좋은 가사를 써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고뇌하는 순간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가사가 잘 나오지 않을 때, 슬럼프가 찾아올때, 밀려 나가지 않으려 버틸 때 등의 초라한 시간들이 내가 살아남을지 아닐지를 결정해주었다.

가사가 잘 나올 때에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앉은 자리에서 서너 개씩의 가사가 쏟아져 나오던 때에는 오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 선택의 문제만 있을 뿐 고민할 게 없다. 문제는 내가 본 어느 누구도, 이런 컨디션이 늘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조차 없는 ‘감‘이라는 것이 떨어지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감이란 게 있을 때라 쳐도 그 감이 통하는 ‘때‘가 있을 뿐, 나이가 들면 새로운 세대가 보기에 낡고 촌스러워 보이는 것이 바로 이 ‘감‘으로 하는 일들이다.

시대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지표는 패션이다. 90년대 패션, 80년대 패션으로 묶여지는 스타일에는 해당 시대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패션처럼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타는 것이 바로 ‘언어‘다. 젊은 가사를 젊을 때 쓰는 것과, 젊은 가사를 쓰려고 썼을 때 나오는 언어의 질감은 확연히 다르다. (어르신들이 애써 젊은이 행세를 하며 인터넷에 글을 쓰면 모두가 알아볼 수 있지 않던가.)

돌아보면 쉬운 일이지만, 닥치면 어려웠던 모든 일들은 이 ‘인정‘이었다. 나의 한계를 느꼈을 때, 더이상 힘으로 밀어내는건 객기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되도록이면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음악도 결국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너무 잘하는데 인성 이슈가 있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낙오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실력 있는 일꾼으로 날아다닐 때 나쁜 사람이 되는 건, 그 사람의 본성 탓이 아닐 때도 있기에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일이 잘될 땐 평소보다 몇 십 아니 몇 백 배의 사람들이 꼬이고 그중에는 내게 해로운 사람이 태반이기에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워질수밖에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자신감이란 건 가지를 종종 쳐주지 않으면 오만이 되기 십상인데, 이 밸런스를 잡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한 번 아쉬웠어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한두 번 오지 않기 시작하면 영영 기회가 오지않는 곳이 프리랜서 업계의 현실이니까. 괜찮은 인간이 되고픈 마음 한편엔 생존본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존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노력

모든 일이 그러하듯 좋은 클라이언트랑만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돌이켜보면 그건 행운에 가깝다.) 작품 하나가 아쉬운 커리어일 땐 더더욱.

15년 전쯤 업계의 중심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다른 파트의 일들을 이해하기에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고 기분 좋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라는 게 공통점이다. 또 자존심은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자존감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우라를 갖고 있다.

감이라는 건 비단 창작업에서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유난히 수행능력이 빛나는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감이 좋은 때다. 감은 영원하지도 않지만 한 번 왔다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시 한 번 돌아왔을 때 그것을 펼칠 기회가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내 지난날들엔 비굴하고 비참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시선도 많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빛나는 재능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게 ‘살아남기‘라는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면 게임이 끝나는 동그라미 안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휘청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고, 아마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올 것이다. 그때 볼품없이 두 팔을 휘저어가며 다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 그 멋없는 순간 스스로 겸연쩍어 선 밖으로 나가떨어진다면 잠깐은 폼날지언정 더이상 플레이어가 될 순 없다.

기억하자. 오래 살아남는 시간 속에 잠깐씩 비참하고 볼품 없는 순간들은 추한 것이 아니란 걸. 아무도 영원히 근사한 채로 버텨낼 수는 없단 걸.

"영감은 체력에서 옵니다."

20대는 물론이요,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영감이라는 것은 여기저기서 채집한 느낌들이 나의 어딘가와 만나서 탄생하는, 그러니까 결국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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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가 되어 읽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저자를 알게 되었는데 영상이 아닌 책을 통해 좀 더 깊이 있게 저자의 생각과 가치관 등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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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끝에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 앞에 있는 각각의 단계들을 계획한 뒤 최종적으로 자신이 하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제한된 그 시간동안 집중해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막상 쓰고보니 중구난방처럼 끄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적어도 계획 수립시 순차적인 방식이 아닌 뒤에서 부터 역순으로 하는 것이 항상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만든다는 아이디어 정도만 챙겨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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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본문에서 ‘체‘ 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데, 이것은 자신만의 가치관 또는 관점을 지칭하는 말이다. 남들과 다른 ‘체‘를 가질 것을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큰 차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독자인 나는 본문을 통해 나 자신을 똑바로 볼 줄 아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는 과거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너 자신을 알라‘ 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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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에서 저자는 생각이 말과 행동을 이끈다는 말과 함께 이 말을 좀 더 확장시켜 무의식이 현실을 만든다는 저자의 신념을 독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저자가 본문에 든 예시들을 통해 독자인 나는 저자가 강조하는 신념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특별히 ‘무의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 ‘무의식‘이 씨앗이 되어 우리의 말과 행동 더 나아가 현실을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하자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가급적 좋은 것들로 우리의 무의식을 채워나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하루 두 번 5시를 보면 인생이 달라진다‘ - P5

인생은 운이고, 삶은 우연이다. - P15

책을 읽는 독자들은 프롤로그를 먼저 읽지만, 작가들은 프롤로그를 마지막에 쓰는 경우가 많다. 나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챕터를 먼저 쓰고, 중요도가 떨어지는 부분은 나중에 쓴다. - P16

사실 나는 반대로 끝에서 시작한다. - P16

끝에서 시작하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먼저, 힘이 덜 든다. 긴장감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 P17

시간에 대한 보장이 정신적 긴장을 낮춰준다. - P17

끝에서 시작하면 그 끝에 해당하는 결과물이 반드시 나온다. 벼락치기와 데드라인의 법칙이다. 시험을 앞둔 시점에서 하는 2시간의 공부는 가장 몰입도가 높다. 강의 준비를 위해 남겨 놓은 2시간도 마찬가지다. 이 시간을 위해 하루를 정리했는데,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쓰기 싫은 것이다. 벼락치기 하듯 미친 듯이 준비하게 된다. 그리고 이 2시간만 지나면 오늘 일정이 끝나게 된다. 데드라인이 있기에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다. - P17

다하지 못하면? 내일 하면 된다. 내일도 같은 방식으로 준비하면 그만이다. - P18

성공을 꿈꾸고, 목표한 인생을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3가지를 하면 돼요. 마음공부를 하고, 삶의 기본기를 다지고 즐겁고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 P18

미래에서 시작하면 된다. - P18

삶이 변하려면 먼저 현실 회로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을 출력하는 현실 출력 회로는 무의식이다. 그 무의식에 있는 생각의 씨앗이 바뀌어야 한다. 그 씨앗인 관념과 열매인 현실이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는 것이다. - P19

마음공부는 도인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 P19

삶의 기본기를 쌓아야 한다. 그 기본기가 독서, 운동, 명상이다. - P19

즐겁게 살자. 굳이 열심히 살 필요 없다. ‘열심히‘는 오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는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모습이다. 대신 ‘충실히‘ 살면 된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보내면 그걸로 족하다. 더 나아가 ‘즐겁게‘ 살면 최고다. - P19

즐겁게 사는 게 충실히 사는 것이고, 재밌게 살면 적어도 열심히 사는 사람보다 뭔가를 이루게 된다. - P20

뭔가를 이루려면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의지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즐거워야한다. 그래서 의지보다는 유지고 유지보다는 유희다. 이것이 핵심이다. - P20

다이어트를 해보면 안다. 열심히 하는 다이어트는 무조건 실패한다. 먹는 즐거움이 있을 때, 다이어트는 성공하고 요요도 생기지 않는다. - P20

우리 인생이 습관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아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다. 그 습관을 바꾸면 인생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 P20

돈드는 것도 아니니 한번 시도해보자.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지 못했거나, 행복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면 오늘부터 한 번 바꿔보자. - P20

그 시작이 마음이다. 마음속 현실 회로가 바뀌어야 현실이 변한다. 그 회로가 바뀔 때,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뀌고 그것들이 바뀔 때 주변으로부터 이 말을 반드시 듣게 될 것이다. "너, 뭔가 좀 변한 것 같아." - P21

"그냥 편하게 하시면 돼요." - P14

세상의 링에는 체급이 없다. 경량급과 헤비급의 싸움이 비일비재하다. 대기업에 맞서는 중소기업이 있고, 그 중소기업에 반기를 드는 자영업자가 있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공존하고, 부자와 대중이 함께 산다. 최고급 주상복합과 판자촌이 공존하고, 그들의 자식들이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 - P30

그때 알게 되었다. 세상의 링에는 체급이 있다. - P31

수학은 나에게 생존이었고, 자습서였고, 라면 한 그릇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독서실을 다니고, 고시원에서 잠을 잘 수 있었으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가난은 나에게 시간을 빼앗아 갔지만, 수학은 나에게 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유일한 체급은 수학이었다. - P31

당신의 체급은 무엇인가? 어떤 체급의 챔피언인가? 아니 챔피언까지 아니더라도 가장 자신 있는 세상의 종목, 체급은 무엇일까?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보자. 공부, 영업, 장사, 언변, 운동, 개그, 노래, 춤 등 다양한 분야가 있을 수 있다. - P31

하지만 자신 있는 종목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도 조금하고, 저것도 조금 하니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는다. 어떤 체급에라도 속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무체급이다. 그래서 세상에 자신이 없다. 나를 드러낼 무대가 없는 것이다. - P31

성공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비슷했다. 그들도 무체급이었고 어떤 체급에 속했다고 하더라도 가장 하수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삶은 달라졌다. 대중과 다른 부자들의 삶, 1%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기준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남들과 똑같이 세상을 보고, 듣고, 평가하지 않는다. 그 차이가 바로 자신만의 가치관인 ‘체‘다. - P32

체는 가루를 곱게 치는 데 쓰는 도구처럼 세상을 거르는 필터 같은 역할을 한다. 똑같은 상황과 현상을 바라보아도 거기에 담는 의미와 가치가 다르다. - P32

‘반밖에 없는 물과 반이나 채워진 잔‘은 우리 삶의 관점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차이는 10년, 20년이 지나면 만날 수 없는 간극이 된다. 그 간극의 시작이 바로 자신의 ‘체‘다. - P32

공사장의 체는 시멘트를 거르고, 주방의 체는 계란 껍데기를 거르지만, 인생의 체는 미래를 거르게 된다. - P32

어린 시절 내가 수학을 잘한 이유는 하나였다. ...(중략)...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 P32

내가 잘하는 방식과 못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늘 똑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서 문제를 풀면 어느 순간 막혔는데, 그러면 내가 약한 방식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접근방식을 다르게 하고 문제를 보면 어느새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고, 답이 도출되었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했다. 정답을 찾은 뒤에는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 P33

수학은 문제를 푸는 과정이 아니다. 그 문제를 푸는 나를 푸는 과정이 수학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가는 과정이 수학 공부다. - P33

‘교과서‘를 보는 게 아닌, ‘교과서를 보는 나‘를 보는 시선을 만드는 것, 그것이 성적을 높여주었다. 그 시선이 성적을 높이는 메타인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높아진 메타인지는 졸업 후 내 인생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나의 ‘체‘급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 P33

돈 되는 걸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돈 되는 것이 내가 잘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못하는지 나의 체를 통해 평가해야 한다. 그 체를 통해 일하는 나의 모습도 평가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일하고 있고,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바라볼 수 있다. - P34

내가 주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떻게 말하고 어떤 표정과 몸짓으로 소통하는지도 볼 수 있다.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돈을 쓰는지도 바라볼 수 있다. 그 시선이 바로 자신의 체다. 그 체로 얼마나 넓게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멀리 볼 수 있는지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 P34

대중의 체는 세상을 본다. 눈으로 내 앞의 상황을 본다.
하지만 부자의 체는 나를 바라본다. 세상을 대하는 나를 바라본다. 이를 통해 상황을 대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습을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 P34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 - P36

‘생각이 현실을 만든다‘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생각이 현실을 만들 수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먼저 맞는 것을 알아보면, 생각이 현실을 만들 수는 있다. 이 책을 읽겠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 P37

생각은 말과 행동을 이끈다. 어떤 생각이 만들어지면 그 생각에 반응하여 말을 하고, 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한다. 물론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생각에 부합되는 미래를 향해 현실이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생각은 나도 모르게 나의 현실을 만들고 있다. - P37

과거를 돌아보면 인생은 생각의 산물이었다. 생각을 통해서 결과를 얻었고,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고스란히 삶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학창 시절에 했던 생각이 나를 공부하게 했고 내가 원했던 학교와 학과도 내 생각이 만든 결과물이다. 졸업하고 서울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나를 삼성서울병원으로 이끌었고,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개업하자는 생각에 10억의 빚을 지고 개원을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전 집필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 P37

단순한 점심 메뉴부터 인생의 큰 결정까지 선택한 모든 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삶의 궤적이었다. 생각이 만들어 낸 나의 스토리가 어느새 나의 히스토리가 되는 것이다. - P38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과연 이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것일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확신에 차서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내 생각의 주인이라는 확신이 없어서다. 나 스스로 생각 공장을 돌리고 있다는 믿음이 없어서다. 내 생각이고, 내 머릿속에 나타난 생각인데, 그 생각을 내가 만들었다는 확신이 없다. - P38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그냥 떠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떠오른 생각을 우리는 자신의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이다. 생각은 누군가에 의해 떠오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자연스럽게. - P38

내가 생각을 만드는 것이라면 하고 싶은 생각만 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싫은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온오프‘를 마음대로 조절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기 싫은 생각이 계속 떠오르고, 그 생각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 P39

‘지금부터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라는 이 한마디에 여러분은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생각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마음 구석에는 코끼리의 코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 P39

누가 이 생각을 만들고, 우리에게 이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가? 생각을 만들고 떠올리게 하는 존재는 바로 ‘무의식‘이다. 의식 가장 밑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이 생각을 만들고 있다. 그 무의식에 박혀 있는 이미지가 생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무의식에 각인된 생각의 씨앗, 바로 ‘관념‘이다. 이 관념이 생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 P39

무의식에 각인된 ‘나는 김치찌개를 먹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의 씨앗, 그 무의식이 ‘나 오늘 저녁에 김치찌개 먹을래‘ 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매우 자연스럽게 스르륵 일어나는 반응이라 우리의 의식(표면의식)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이미 김치찌개로 물들어 있다. 앞서 말한 코끼리의 코처럼 나의 무의식이 생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 P40

‘무의식이 만든 생각‘이 현실을 만들지만, ‘내 생각‘이 현실을 만들지는 못한다. 나는 생각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부자가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해도 가난한 현실이 펼쳐지는 이유다. 무의식이 ‘나는 부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궁핍한 현실이 드러난다. 무의식이 현실을 만들기 때문이다. - P40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의미로 불교 경전《화엄경》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마음은 우리 무의식에 해당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무의식 공간을 채우는 것이 생각의 씨앗인 관념이다. 이 관념이 바뀌어야 내가 사는 세상이 변하게 된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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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본능에 충실한 삶‘과 ‘우리가 의식하고 싶어하는 삶‘ 간에는 언제나 깊은 괴리가 있다는 말과 함께 그 괴리를 좁힐 순 없지만 그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를 했었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이면에는 공포 내지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살펴봤었다. 오늘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올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살펴보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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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중후반부를 보면 저자가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던 흔적들을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저자의 연보를 통해 저자의 주변 환경적인 영향 때문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독자인 나는 저자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이나 생각 등에 국한되기 보다는 저자의 주변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본문의 내용과는 별개로 환경적인 요소가 한 사람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환경과 관계없이 뭐든지 자기가 하기나름이라고 말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말에 그닥 동의하지 않는다. 환경의 중요성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옛말에 무슨 ‘맹모삼천지교‘ 같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하는 생각과 습관 그리고 환경까지 3박자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가장 최선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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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 내용으로 돌아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보면, 저자의 인도 불교와 붓다에 대한 생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관련된 내용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이름부터 생소하게 느껴지는 신들을 비롯해 인도 불교와 붓다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생각들이 무엇이고 다른 종교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해 잠시나마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미리부터 마음속의 동요를 억누르거나 ‘미친 짓‘이라는 등의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오히려 그 동요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 모든 성장은 그러한 상태와 결부되어 있으며 고난과 고통 없는 성장은 있을 수 없다.

‘망상‘이 당신을 괴롭히더라도 눈을 감지 말고 그 망상이 마음속에서 분명해지도록 애써 보라. 그렇지 않으면 여느 사람처럼 당신의 내부에 있는 혼돈과 점점 더 반목하게 될 뿐이다. 당신은 그 혼돈과 친구가 되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이 고통의 세계를 가장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

서로 반대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칸트, 피히테, 헤겔, 바그너 ...(중략)... 괴테나 횔덜린, 니체, 그림 형제, 아이헨도르프 ...(중략)... 모차르트나 바흐, 슈베르트

인내하는 것은 어렵다. 인내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고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면서 그와 동시에 유일하게 배울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 세상의 자연과 성장, 평화, 번영, 아름다움은 모두 인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내는 시간과 침묵, 그리고 신뢰를 필요로 한다.

인내는, 개인의 일생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하며, 개인의 판단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의 연관성도 고려해야 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인내‘와 더불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신앙, 지혜, 천진난만함, 그리고 소박함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우고 매듭을 풀었다가 또다시 매듭을 짓고는 한다. 그런 행위가 마침내 끝이 나면 완전한 이해와 흠 없는 조화, 그리고 완결된 미소와 긍정적인 대답을 얻을 수 있고 목표가 마침내 달성되면 우리는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둔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며 이생의 삶을 다하고 환생하기 위해 실체가 없는 곳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것이다.

여섯 줄의 선으로 이루어진 연필 스케치나 네 줄의 시와 같이 아무리 하찮은 예술 작품도 과감하고 맹목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고 단호하게 뛰어들어 호두 껍질 안에 숨어 있는 혼돈을 창조해 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고뇌다. 그들은 인내와 열성, 애정을 가지고 시나 그림, 소설 등의 작품을 형상화한다. 그와 더불어 세상은 매시간 더 풍부해지고 충만해지며 다양해지지만, 그래도 예술가는 자신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매일 그리고 매시간 홍수처럼 밀려오는 꿈과 생각들을 억눌러야 한다. 원하던 것의 천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멜로디로 창작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

창작에 대한 강박 관념은 끔찍하다. 그것은 시도를 거듭할수록, 또 작품을 많이 쓸수록 더 심각해지고 가슴은 불행과 체념으로 가득 차게 되며 정신은 광포해지고 강렬해진다.

그리고 마침내 결과가 나온다. 그 결과란 글쟁이의 평가나 시민의 박수갈채, 어느 소녀의 편지와 같은 ‘성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ㅡ그러한 오해는 우습지만 참을 만하다ㅡ 실제의 결과, 즉 마침내 예술가 앞에 놓여 있는 ‘작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토록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작품 말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완성한 작품을 사랑하는 예술가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문학 작품을 참회의 고백으로 이해한다면 ㅡ현재의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ㅡ 예술은 멀고 다양하며 꼬불꼬불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길의 목표는 점점 힘이 빠져 완전히 탈진해 버릴 정도로 개성 혹은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완전하고도 구석구석 낱낱이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더 고차원적인 것, 이를테면 개인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뒤따를지도 모른다.

예술은 평범의 차원을 뛰어넘을 것이고, 예술가는 성인聖人이 될 정도로 성숙해질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예술이 예술가에게 끼치는 영향은, 예술가 본인의 인격에 있어서만큼은 고해나 심리 분석이 할 수 있는 기능 이상의 것을 이루는 셈이 된다. 니체의 후기 작품이나 스트린드베리의 고백서, 플로베르의 글은 모두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종착지이자 목적지는 이제 더 이상 예술 행위나 작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잊고 단념하는 것, 그리고 영혼의 평온함을 누리며 기품 있게 존재하기 위하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늘 고뇌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다.

개인을 초월하는 자아, 즉 세상과 시간이 더 이상 사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정신적인 상태에서 세상의 혼돈이 음악으로 바뀌고 그로 인해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일 것이다.

다만, 예술가에서 성인으로, 고백과 참회에서 신의 품 안에 안식하는 것으로 이르는 그 길이 진정한 길인지, 또 그 길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인간은 자기 무의식이 표현하며 드러내는 의미와 그 중요성에 스스로 매료됨으로써 심리 분석을 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그것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다.

그와 동일 선상으로 예술가는 참회의 고백을 할 때 스스로를 내던지고 자신의 진심을 말하며 쉴 새 없이 자기감정을 토해 냄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자아와 점점 더 깊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문제와 고뇌, 그리고 콤플렉스에 점점 더 깊이 끌려 들어갈 수도 있다. 결국 그것은 예상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 예술가를 성인과는 정반대의 존재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내가 ‘성인‘이라고 할 때는 정의로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마음이 일치하는 경건한 사람, 자신의 감각이 전해 오는 것을 모두 신의 섭리, 즉 필연적인 것으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상반되는 두 가지를 하나로 보고 모든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을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가의 고백이ㅡ예술가가 거기에 어떤 의미를 두든 상관없이ㅡ결코 순수한 고해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순수한 고해란 단순히 억누르던 감정을 터뜨리는 것이며, 해방이자 단념 그리고 폭로다. 그에 반해 예술가의 고백은 언제나 자기변명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예술가는 고해를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애정을 쏟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고백이 솔직하고 신중하며 또 완벽하고 가차 없는 것일수록 다시 온전한 예술, 온전한 작품, 온전한 자기 목적이 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백에 몰두하고 자신의 과제와 자신이 이룬 성과 전체를 자신의 고해에 옮겨놓음으로써 늘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방황하는 경향이 있다. 어차피 예술가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룬 성과와 자기변명을 모두 자신의 작품에 옮겨 놓고, 그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지니는 의미를 과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성인의 고백을 문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금방 뚜렷해진다. 이를테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를 비교해보자. 한 사람은 신에게 자신을 내맡겼기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시키고 있는 한편, 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동기를 가지고 출발점에 섰으나 그들의 종착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 한 사람은 성인이 되고 또한 사람은 문인이 되었다. 한 사람은 자기 개인을 극복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고,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흥미로운 사람에 그치고 말았다. 내 생각에 니체는 그 두사람의 중간쯤 되고, 스트린드베리는 루소에 아주 가깝다.

숱한 경험으로 쌓아 온 자아를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단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태어나던 시각에 토성과 화성, 목성과 달이 떠 있었던 것처럼, 신앙심 깊고 경건한 부친과 개신교의 전통인 세례식이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Vedanta(베단타): 인도 6파의 하나로 그 시조는 기원전 1세기 무렵의 철학자 바다라야나이다. 《우파니샤드》를 중시하며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을 견지한다.

Upanisad(우파니샤드): 인도 브라만교의 성전인《베다》를 운문과 산문으로 설명한 철학적 문헌들로서 기원전 1000~600년경에 활약한 힌두 스승들과 성현들의 사상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100가지 정도가 알려져 있다.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이 성전은 사람, 신, 우주의 이치를 밝히고 있으며 그 일부인 범아일여 梵我一如 사상은 모든 힌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Visnu(비슈누): 힌두교의 세 주신主神의 하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으로 후에 크리슈나로 화신化神한다.

Indra(인드라): 인도의 베다 신화에 나오는 비와 천둥의 신. 하늘의 제왕으로 몸은 모두 갈색이고, 팔은 네 개이며, 두 개의 창을 들고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불교에서는 제석천또는 십이천의 하나로 동방의 수호신이다.

Brahma(브라흐마): 인도 철학에서 창조를 주재하는 신이자 우주의 최고 원리로 ‘범梵‘이라고 번역하여 부른다.

Krsna(크리슈나):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영웅신으로 악한 왕을 죽이고 수많은 악귀와 용왕을 퇴치했으며 농업과 목축을 관장했다. 질서의 신 비슈누의 화신化神이라고 전해진다.

개혁자들로 이루어진 청교도 신앙은 소수의 사람만이 할 수 있을 법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자기희생은 그 소수의 사람들조차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욕구, 혹은 희망 사항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것은 내게는 아주 힘든 일이며, 혹여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언제나 그 희생은 불완전한 모습에 그칠 뿐이다.

개혁적인 생채가 짙은 종교는 그렇게 좋지 못한 시선을 견뎌 내야 하는 열등감을 가르치고 있다.

‘나의 행동과 삶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아무런 결실도 없이 그냥 쓸쓸하게 사라져 가고 있구나.‘

"정말 슬픈 일이군요. 살다 보면 그렇게 슬픈 일이 많지요. 저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슬픔을 견디려고 애써 봐도 아무 소용이 없으면 포도주를 한 병 마셔 보세요.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 머리에 대고 총을 쏘는 방법도 있다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Josef Englert(엥글레르트)(1874~1957): 헤세의 친구로 직업은 엔지니어. 헤세의 작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klingsors letzter Sommer》에서 ‘마술사 유프‘로 등장한다.

나는 ‘지도자‘로서의 공명심은 전혀 없지만, 예술가로서의 명예욕이나 자만심에 관한 부분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잘 알고 있다.

불교 신자들에게는 열반에 대해 논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열반이 소멸인지 아니면 신과의 합일인지, 또 부정적인 것 혹은 긍정적인 것인지, 축복인지 아니면 단순히 안식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그것을 거부하였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열반은 개개인이 완전한 전체로 회귀하는 것이며 개체화의 원리 뒤로 물러나는 구원의 단계, 즉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개개의 영혼이 만물의 영혼인 신에게로 귀의하는 것이다.

상캬라 철학은 처음과 끝이 없는 두 가지 존재, 즉 물질과 정신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몸속에 있으며 우리가 정신 그 자체로 오인하기 쉬운 가장 섬세한 기관(신경계를 말한다)이 물질과 정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변화는 오로지 물질에서만 일어나고, 모든 과정은 물질의 경우에만 진행되는 반면, 정신은 늘 변함이 없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Sankara(상캬라) (700~750): 인도의 철학자로 불이일원론파不二一元論派의 시조이며 《브라흐마수트라 주해》 를 남겼다.

나는 ‘구별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다시 말해서, 나와 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의 정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또 내가 그 체내 기관을 나의 진정한 자아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기쁨과 슬픔의 경지를 초월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면 나에게 환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육체를 떠남과 더불어 무의식 상태가 시작되어 내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나와 물질 사이에 (뿐만 아니라 나와 환생가능성 사이에) 접촉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을 정교하게 분석하며 사색하는 방법은, 가끔씩 명상을 취하는 것과 더불어 희한하게도 요즈음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Sansara (윤회: 고통을 모두 짊어진 채 영원히 생과 사를 되풀이하는 것을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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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머니, 즉 저자의 할머니를 전쟁 통에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 이로 인해 저자의 아버지가 술로 슬픔을 달랜다는 얘기도 간략하게 나마 나왔었다.

저자의 가정사가 순탄치 않았다는 것은 어느정도 알고 있었지만 저자의 할머니가 동유럽 국가인 크로아티아 내전 때 돌아가셨다는 것은 이번 독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동유럽 국가들 간의 내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다른 국가나 대륙들에 비해 동유럽 쪽 역사에 내가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동유럽 쪽 국가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새롭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듯하다.

뭐 아직 자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략적인 이야기를 살펴보니 우리나라로 치면 6.25와 비슷한 전쟁이 당시의 크로아티아에서도 있었던 것 같다. 관련된 내용들을 검색해보면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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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어어 읽다가 저자의 누나, 삼촌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는데, 가족 이야기와는 별개로 중간중간에 동유럽 쪽 관련 지명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동유럽 쪽에는 배경지식이 거의 전무한 나인지라 이렇게 새롭게 접하는 지명들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서 관련 사진들을 구경하는 시간을 잠시 가져보기도 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동유럽 여행을 직접 가봐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기존에 익숙한 서유럽이나 북미 쪽에 비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질 만한 것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러한 것들은 이 책을 통해 얻어갈 거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었는데 속된 말로 얻어걸린(?) 느낌이다. 비록 우연이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잘 몰랐던 세상을 간접 경험하는 것도 독서의 묘미라면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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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쭉 읽어 나가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다. 저자가 자신이 살던 동네에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자기 공을 빼앗는 아이에게 돈을 주겠다고 내기를 걸고 공놀이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얼핏보면 그냥 가벼운 놀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저자 본인이 공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한 훈련의 연장선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하여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그것을 놀이로 승화시켜 즐기려고 하는 저자의 태도는 가히 본받을만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힘든 일일지라도 즐겁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한다면 실력은 실력대로 늘면서 동시에 그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보스니아의 비옐리나Bijelina 지방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벽돌공으로 일했고, 가족과 친지들도 모두 그 지방에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비옐리나 지방은 유린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다시 무슬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도시에 쳐들어가 수백 명의 무슬림을 살육했다. 아버지가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이 그때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 가족과 친지들은 고향을 두고 떠나야만 했다. 비엘리나는 완전히 세르비아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비옐리나로 넘어와 빈집들을 차지하고 살았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버지 집에 쳐들어와 주인이 된 것이다. - P50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나한테 신경 쓰지 않았던 이유도 이해가 간다. 아버지는 저녁 내내 텔레비전 앞에서 고향 소식이 들려오거나 고향에서 전화가 걸려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전쟁은 아버지를 집어삼켜 버렸고, 아버지는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는 데 집착했다. 아버지는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서 술을 마시며 비통해했고, 유고슬라비아 노래를 들었다. 그런 날 나는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 집은 또 다른 세계였다. - P51

나는 이소룡처럼, 또 무하마드 알리처럼 되는 게 꿈이었다. - P52

크라구예바츠Kragujevac 시의 라드니치키 Radnicki 복싱 클럽 ...(중략)... 네레트바Neretva 강 - P53

스웨덴의 영웅, 이를테면 전설적인 스키 선수 잉게마르 스텐마르크Ingemar Stenmark 같은 선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 P53

하지만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전설적인 선수였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지껄이든 알리는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했다. 그는 절대 변명하는 법이 없었고, 그 모습은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 진짜 멋진 남자였다. 나도 알리처럼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최고다‘고 자부하는 알리의 당당한 태도를 흉내 냈다. - P53

로센고드에서는 만만하게 보이면 살기가 어려웠다. 어떤 녀석이 헛소리를 지껄이면 ㅡ 가장 심한 욕은 계집애 같은 놈이라고 놀림 받는 것인데 ㅡ 맞받아쳐야 한다. - P53

제 발등을 찍지 말라는 말 - P54

매년 11월 30일이면 ‘위대한 전사‘로 추앙받는 스웨덴 왕 칼 12세 Charles XII의 죽음을 기념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모여 행진을 하는데, - P54

로센고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으르렁거리며 살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늘 세상에 각을 세우고 살아가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 P54

내가 억누를수록 그 기억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 P54

아버지들의 세계에서 사는 남자라면,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 사나이처럼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 세계에서는 이른바 신세대 남성들의 유약함은 통하지 않는다. 배가 아플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지만, 그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P56

나는 어릴 때도 양면적인 데가 있었다. - P59

나는 규율이 잡혀 있지만, 사나운 야성도 지니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정립한 내 신조가 있다.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까짓 게 뭐야. 나야말로 대단한 놈이야" 하고 말만 뱉으면 곤란하다. 당연히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 P59

나는 위대한 선수가 되고 싶었고, 또 그에 걸맞게 우쭐대며 살고 싶었다. - P59

발칸반도 출신 사람들은 한 번 뒤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 P60

돌에 새긴 계명을 바꿀 수 없듯이 우리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 P61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멋진 플레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 P62

들장미를 뜻하는 퇴른로센Törnrosen - P62

나는 멋진 트릭 플레이로 아이들을 놀래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그 동작이 몸에 익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야 했다. - P63

두뇌 회전과 발이 빨라야 인정을 받았다. - P63

키가 작고 몸집이 빈약한 나는 쉽게 태클로 저지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기술을 익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아이들의 탄성 소리를 듣지도 못할 것이고, 나를 시합에 끼워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 P63

나는 축구공을 껴안고 잠드는 날이 많았고, 잠자리에 누워 이튿날 보여줄 묘기를 궁리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듯 반복해서 그 동작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 P63

어머니 동네 축구장이 워낙 비좁아 나는 자연스레 좁은 공간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움직임을 익힐 수 있었다. - P67

"즐라탄을 보자마자 뭐가 돼도 될 줄 알았다" "그가 아는 것은 모두 실질적으로 내가 가르쳤다" "즐라탄은 최고의 동료였다" 어쩌고저쩌고하며 떠벌이는 사람들은 넌더리가 난다. 죄다 헛소리다. 나를 알아봐준 사람은 없었다. - P67

이랬느니 저랬느니 나중에 말들이 많았지만 그런 말들은 사실이 아니다. 빅클럽에서 나를 찾아와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허세 가득한 아이일 뿐이었다. "타고난 소질이 있는 놈이니 지금부터 잘 보이자"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보다는 ‘누가 이 촌놈을 받아준거야?‘ 하는 분위기였다. - P67

나는 약자인 만큼 이를 악물고 연습하고 분투했다. 이미 말했지만, 그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P68

살려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나는 내 처지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 P68

친구들이나 나나 앞뒤 분간 못하고 놀았고, 그저 센 놈이 되기만을 바랐다. - P68

나는 그 시절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나 같은 놈이 존중을 받으려면 다른 애들보다 다섯 배는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열 배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력도 없는데 나같은 놈에게 기회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 P71

코치들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치들의 말을 듣고 부분 전술과 전략 등필요한 축구 기술을 모두 배워야 한다. 하지만 코치들의 말을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드리블을 계속하고 발재간을 부리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코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내 신조였다. - P74

대개는 내 방식대로 행동했다. 그것이 내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처럼 허름한 공동주택 단지에 사는 녀석들이 도련님 흉내를 내는 걸 지켜봤지만, 게네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도련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정반대로 행동하기로 작정했다. 내 방식을 더 세게 밀고 나가기로 한 것이다. "20크로나밖에 없는데"라고 말하는 대신에 "땡전 한 푼 없어"라고 대답했다. 그러는 편이 훨씬 멋져 보였다. 덕분에 갈수록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 P75

나는 로센고드 출신의 불량아였고,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그게 나였고 나도 차츰 나다움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스웨덴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모범적 태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전혀 신경 쓰지도 않았다. - P75

나는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 P77

‘남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다‘도 내 신조였지만 ‘남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또한 내 신조였다. - P77

나는 공을 받을 때 가능한 한 단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했다. - P78

컴퓨터를 쓰고부터는 호나우두와 호마리우가 하는 속임동작이나 발재간이 담긴 영상을 족족 내려받은 뒤 그 기술이 몸에 밸 때까지 연습했다. 우리는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 보며 동작을 확인했다. 어떻게 한 거지? 어떻게 저런 동작을 할 수 있지? - P78

우리는 그런 동작이 몸에 익을 때까지 연습을 거듭했고, 됐다 싶으면 실전에서 써먹기도 했다. 토니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갔다. 나는 동작을 더 세분해 더욱 정교하게 기술을 재현했다. 사실 나는 미친 듯이 거기에만 매달렸다. - P78

나는 남다른 선수가 되고 싶었다. 나는 코치들의 가르침도 실천하려고 노력했고, 덕분에 날이 갈수록 실력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마음 상하는 일도 많았다. 우리집 문제도 분명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단에서 겪는 문제 말고도 내게는 골치 아픈 문제가 많았다. - P79

재미도 재미지만 뭔가 강력하게 나를 내세울 거리가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 같은 놈은 애들에게 주목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 P84

남들보다 센 척하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게 어린 맘에는 멋져 보였지만, 그런 태도는 장기적으로 보면 득 될 게 없었다. 정말 중요한 자리에는 틈만 나면 브라질 선수처럼 개인기를 부리는 다혈질 악동이나 이민자 출신을 원하지 않았다. - P87

나는 잃을 게 없었다. 그래서 내 실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밀고 나갔고, 당연히 사람들은 나에 대해 쑥덕거렸다. "저 녀석은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봐"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멋대로 지껄여라!"라고 중얼거리면서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나는 계속해서 발재간을 부렸고, 선배들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 P89

나는 멋진 선수가 되는 꿈을 꾸며 훈련장에서 춤을 추듯 공을 갖고 놀았다. - P89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보여줄 것이 더는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불공평했다. 나 같은 애들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고,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스타 선수가 될 수 없는 세상이었다. 나는 끝났다. 내 기대는 틀려먹은 것이었다. 다른 길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거기에 뛰어들 기운이 없었다. 하릴없이 축구를 계속할 뿐이었다. - P90

"즐라탄, 이제 애들하고는 그만 뛰어야지." - P91

"이젠 어른들하고 뛸 때가 되었다." - P91

공중으로 10미터는 붕 떠오른 기분이었다. - P91

조깅 시간에는 이따금 해찰했지만, 말뫼 구단 트레이닝 세션에는 단순히 참여하는 수준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했다. 그뿐 아니라 어머니 동네에 있는 축구장에 가서 하루에도 몇 시간이고 기술 훈련을 했다. - P94

내가 즐겨 쓰는 수법이 하나 있었다. 로센고드 동네로 가서 아이들에게 "나한테서 공을 빼앗는 놈 있으면 지폐 한 장 줄게" 하고 외치는 것이다. 겉모습은 놀이였지만 내게는 기술을 단련하는 시간이었다. 공을 지키기 위해 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터득할 수 있었다. - P94

동네 애들을 데리고 노닥거리지 않을 때는 축구 비디오게임을 하곤했다. 한 번 앉으면 10시간까지 게임에 몰두한 적도 있었고, 게임을 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내 실제 경기에서 써먹는 일도 많았다. 거의 온종일 축구를 하며 지낸 셈이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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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02-17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라탄이란 축구 선수를 잘 몰랐습니다.
어쩌다 가끔씩 동영상 속의 그의 모습 속에서 어렴풋이 이소룡의 흔적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역시 이소룡과 알리가 되는 꿈을 꾸었었군요..ㅎㅎ
소년들의 로망은 세계 공통이었네요..ㅎㅎ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2-17 17:23   좋아요 1 | URL
예 저도 저자에 대해 대략적으로만 알고 자세한 사항들은 미처 몰랐었는데, 다른 책들이랑 번갈아 읽느라 초반부만 살짝 읽어봤는데도 잘 몰랐던 사실들에 대해 많이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자가 어릴 때 자라온 가정 환경과 주변 환경들이 결코 순탄치 않았기에 이소룡이나 알리같이 강하고 멋진 사람이 되기를 꿈꿨던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ㅎㅎ 그리고 말씀 주신바와 같이 저자가 축구하는 스타일을 보면 이소룡의 발차기가 연상되는 듯한 모습들이 종종 나오곤 하는데 어릴적 꾸었던 꿈을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법으로 실현시킨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국적은 다를지 몰라도 동양이든 서양이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어느정도는 비슷한 로망들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