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시는 여러 가정들과 이탈된 사유들, 멀리 떨어진 영역의 개념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힘을 통해, 혹은 서로 다른 여러 개념들을 불러일으키고 그 자신과 연결시켜 그 개념들이 상호 지시하고 상호 굴절하는(마치 수정체를 통해 보이는 것처럼) 유연한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힘으로 지속한다. - P310
몬탈레는 심연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개인의 도덕성을 지지할 유일한 버팀목이 없는 디딜 어떠한 단단한 바닥도 없는, 파괴의 폭풍우가 몰고 온 소용돌이와 같은 세계를 말하고자 했다. - P318
몬탈레가 타인과 공감하고 연대의 감정을 느끼고 교감하는 것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의 시는 타인의 삶과 상호 의존적인 인간의 삶이 항상 현존하고 있음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삶이 있기 위해 너무 많은 삶들이 필요하다."는 구절은 기회의 주목할 만한 결론이다. - P320
헤밍웨이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비관주의를, 세상에 대해 개인주의적인 초연한 태도를 극도로 폭력적인 시대를 방관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헤밍웨이의 작품 속에는 그러한 것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 P323
《도박꾼, 간호사 그리고 라디오(The Gambler, the Nun and the Radio)》에서는 모든 것은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결론으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은 모든 이들이 앓고 있는 병에서 비롯된 환상에 불과한 피난처라는 것이다. - P328
어떠한 시인도 전적으로 그가 표현하는 사상 자체가 아니듯이, 헤밍웨이 역시 그가 처했던 당시 상황 그 자체로 환원될 수는 없다. - P332
인간의 행동과 인간 자체를 동일시하는 행동주의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하고 정확한 방법은 인간이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는 헤밍웨이 작품의 주인공보다 더 심화된 산업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더 설득력이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 P332
헤밍웨이는 열린 시선으로, 그리고 건조한 시각으로 어떠한 환상이나 신비주의 없이도 세계를 살아 나가는 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불안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하는 방법을, 홀로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섞여 있는 것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방법을. 그리고 특히 그는 삶에 대한 개념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체를 개발해냈다. - P333
왕들은 문에 손을 대는 법이 없다. 그들은 익숙한 거대한 판을 부드럽게 또는 거칠게 앞으로 밀어 여는, 뒤로 돌아서 그 판을 제자리에 놓아문을 닫는 즐거움을, 문을 손으로 열고 닫는 행복을 알지 못한다. - P335
퐁주의 시는 가장 소박한 사물과 일상적인 행동을 대상으로 하며, 그러한 것들을 새롭게 보고자 노력하면서 일상적인 습관으로서의 지각 방식을 버리고 닳아빠진 언어 메커니즘을 배제한 채 묘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시 자체 혹은 이질적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예를 들어, 상징주의나 이데올로기 혹은 미학), 오직 사물 그 자체로서의 사물, 한 사물과 다른 사물 사이의 차이점, 우리와 그 모든 사물 사이의 차이점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갑자기 멍하니 굳어진 일상에서보다 그러한 사물들의 존재가 훨씬 더강렬하고 흥미로우며 ‘진실한‘ 경험으로 다가옴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프랑시스 퐁주야말로 우리 시대의 위대한 현인이자, 반복적으로 순환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돌려 주목해야 할 몇 안 되는 ‘주요한‘ 작가다. - P336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 예를 들자면 과일 가게 주인들이 쓰고 버린 과일 상자에 여유롭게 시선을 돕리는 것이다. "시장으로 가는 모든 길모퉁이마다 평범한 나무 상자들이겸손한 빛을 뿜는다. 여전히 새것이지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쓰레기와 함께 버려져, 자신이 볼품없는 자세로 놓여 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란 이 대상은 사실 주변에서 가장 빛나는 물건들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나무상자의 최후를 앞에 두고 너무 오래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 결론을 주관적인 판단으로 맺는 것은 퐁주가 전형적으로 쓰는 방식이다. 우리가 사물들 중에서도 가장 낮고 가벼운 이 대상에 우연히 연민을 느꼈다고 해서, 지나치게 그 감정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한 과도한 연민은 모든 것을 망치고, 막 얻어 낸 한 줌의 진실마저 바로 사라지게 하고 말 테니까. - P336
(독자가 자신만의 해석을 창조하게 하는 데 시의 원문과 번역문을 양편에 싣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 P337
어떤 것을 수정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거기에 덧붙이는 것뿐이다. 이것은 마치 이미 쓴 글이나 출간한 글을 다시 가져와서 주석을 달아 가면서 수정하는 것과 같다. - P341
보르헤스는 간결함의 대가다. 그는 단 몇 페이지에 극도로 풍부한 개념과 시적인 요소들을 응축시키고자 했다. - P347
그가 에세이가 아닌 허구적인 산문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 준 그 방법은, 쓰고 싶었던 책을 이미 누군가가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보르헤스가 꾸며 낸 다른 언어, 다른 문화 속에서 나온 미지의 작가가 쓴 책, 그러고 나서 그러한 상상 속의 책을 다시 묘사하거나 요약, 비평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 P348
문학의 이상적인 출전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기 이전에 일어났던 신화적 사건 같은 것이 아니라 단어와 이미지와 의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조직으로서의 텍스트다. 서로 응답하는 각각의 모티프들이 이루는 구성, 하나의 주제가 그 변형들을 전개해 나가는 음악적 공간인 것이다. - P350
문자화된 글의 힘은 실제적인 경험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경험에 하나의 시원으로서, 또한 그러한 경험을 종결시키는 것으로서 기능한다. 하나의 시원으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쓰인 글이 사건과 동일한 등가물로, 그러한 글 없이는 경험적인 사건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의 종결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보르헤스에게 있어 쓰인 글이란 집합적 상상력에 하나의 강한 충격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글들은 과거건 미래건 등장할 때마다 기억되고 인지되는 것으로 상징적이거나 개념적인 형상으로 기능한다. - P351
보르헤스는 자신이 쓰는, 혹은 쓸 수 있는 모든 텍스트에서 무한한 것, 셀 수 없는 것, 시간, 영원 혹은 영원한 존재나 시간의 순환적인 성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 P352
문학 텍스트는 오직 단어들의 연속이라는 구성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보르헤스의 이러한 개념은 구조주의자들의 방법론과 가장 일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이다. - P354
현실의 시간에서, 역사 속에서 여러 다른 선택지를 마주한 인간은, 영원히 다른 것들을 지우면서 하나만을 선택한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의 시간은 (희망과 망각의 중의적인 시간과 유사한) 예술의 다의적인 시간과는 같을 수가 없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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