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포스팅들에서 전문직의 유래와 역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을 살펴봤었다. 독자인 내가 느낀 본문의 흐름을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전문직군이라는 것이 최초로 발생했던 초기에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사회 전반에 대한 어떤 소명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발전하다가 자본주의 사회가 들어서면서 어느순간부턴가 사회와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훨씬 더 우선시하는 그런 추세로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소위말해 공익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돈 되는 일에 집중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시대 흐름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는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문직들이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직접 겪은 일은 아니지만 주변 지인 중에 금전적인 채권채무 관계로 인해 변호사를 써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분이 계셨는데 그 금액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지만 또 딱히 크다고 하기도 좀 애매한 그런 정도의 사건을 변호사 사무실에 맡겼던 일이 있었다. 이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했으니 계약금 명목으로 몇 십만원 정도를 요구했고, 지인은 일단 그 금액을 송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그 금액의 규모가 변호사 기준에는 그닥 큰 금액이 아니었는지 해당 사건에 대해 상대측에 내용증명을 한 번 보낸 후로는 딱히 이 사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고 한다. 연락을 해도 해당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딱히 적극적이지 않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하니 뭐 말 다했다. 결국 지인은 내용증명 이후에 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조치들을 받지 못한 채 그냥 채권채무관계가 흐지부지 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계약금 몇 십만원만 날린 셈이다.

뭐 쓰다보니 얘기가 길어졌는데,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전문직들이 어떤 사건을 맡았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는 결국 그 사건에서 얼마나 많은 금전적 이득을 챙길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뭐 어찌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해당 사건에 걸린 금전적인 규모에 따라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추가로 생각을 덧붙여보자면 이거는 전문직 얘기와는 논외이긴 한데, 애초에 위와 같은 일들을 만들지 않도록 평소에 신경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법적으로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물론 해결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각종 소송 등으로 인해 받는 부담해야 하는 적지 않은 금전적 부담,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을 생각해본다면 사전에 이를 방지하는 게 가장 최선이 아닐까 싶다. 경영학의 품질관리 분야에 나오는 내용 중에도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비용(예방 비용)이 가장 적게 들고, 사건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비용(외부 실패 비용)이 가장 크게 든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뭐 결론은 금방 나온다.

전문직은 경제, 기술, 심리, 도덕, 품질, 그리고 이해 불가함 등 여섯 가지 측면에서 실패했다. 이런 결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결합되어 더욱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 P58

대부분의 사람들과 조직이 최상급 전문가의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 P58

부자 또는 보험을 충분히 든 사람만 의사, 변호사, 회계사, 경영컨설턴트 같은 일류 전문직을 다수 고용할 수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극소수가 지닌 전문성이 소수에게만 공급되는 것이다. 예컨대, 재력 있는 소수는 롤스로이스급 서비스를 받고, 나머지는 모두 걸어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 P58

대부분의 국가가 학교, 법률 제도, 의료 서비스 등 기존의 전문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한다. - P58

공공지출액이 삭감되면서 심각한 문제를 겪는 전문직 분야가 많다. 물론 모든 시민이 가장 뛰어난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 이는 비현실적인 기대임에 분명하다. 전문성이 희소자원이라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문성 자체의 공급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희소한 것은 전문가다. 현재 전문가 업무를 조직하고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직접 만나 소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제약이 발생한다. - P59

꼭 일류 전문가가 아니어도 된다고 눈높이를 낮춰도 비용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의료비용은 계속 치솟고, 학교는 한탄스러울 만큼 자원 부족에 시달리며, 중간급 변호사를 고용하는 비용은 다른 분야의 중간층 전문가마저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영세 기업은 힘이 없다. 소기업 소유자는 경영컨설턴트, 세무 전문가, 회계사를 확보할 만한 자원이 없다.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조직도 전문 서비스가 엄청나게 비싸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CEO와 CFO들이 전문 서비스(특히 법률, 세무, 회계, 컨설팅) 비용을 크게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9

경제 문제는 전문직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 문제보다 시급하지는 않다. 경제 문제는 접근성 문제로, 서비스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일어난다. - P60

전문가의 전문성은 불균등하게 분배된다. 전문성의 불평등 문제는 다른 불평등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다른 사회적배제 문제에서는 비교적 소수가 피해를 입는 반면, 전문 서비스에서는 절대다수가 배제된다. 이제까지 쌓아올린 인간의 전문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성채에는 극소수만 입장할 수 있다. - P60

전문직 서비스는 마치 정의가 그렇듯, 그리고 최고급 호텔이 그렇듯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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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서로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었다. 또한 두 분야가 철저히 나뉘어 있다보니 오해와 충돌이 반복되는 현실에 대해서도 지적했었다.

독자인 나는 여기서 서로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을 때 오해와 충돌이 반복된다는 얘기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와닿았다. 인간관계에서도 서로간에 어떤 오해가 있을 때 이것을 대화나 기타 방법 등을 활용하여 그때그때 해결하지 않으면 그 오해는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불어나서 그 오해가 점점 커지고 그러다가 마치 풍선이 빵하고 터지듯이 서로간에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와 같은 원리로 갈등을 겪었다가 결국엔 대화를 통해 관계가 호전되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기에 더 그러지 않았나 싶다. 해당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까지는 하기 힘들지만 그때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보자면 초반에는 대화가 오가기는 커녕 서로간에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가 쌓이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자 결국 내 쪽과 상대방 쪽 모두 심리적으로 힘들어졌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특정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대화의 물고가 터졌고, 오해를 품과 동시에 악화되었던 관계가 좋은 쪽으로 개선되었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겪었던 사건이긴 하지만 결국 오해를 키우지 않기 위해선 가만히 있으면서 시간을 지체하기보다는 한시라도 빨리 상대방을 만나서 서로 대화하고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잠시 곁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오늘 시작하는 포스팅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두 분야가 서로 이해하기 힘든 근본 원인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나온다. 가장 먼저 저자는 두 분야 간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공통된 언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의 언어가 너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어느 한 쪽이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바를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는 작업이 1차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사례는 아니지만, 이와 관련하여 그냥 개인적으로 문득 떠오른 사례 중 하나는 세종대왕이 한자를 어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을 만들어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한자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우니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만든 것이다.

이 사례를 오늘의 본문 내용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면, 과학자들이 자신들은 잘 알지만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과학분야의 내용들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작년에 읽었던 유시민 작가의《문과 남자의 과학공부》라는 책을 보면 그저 난해하게만 느껴지는 과학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과학 커뮤니케이터‘ 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요즘으로 치면 과학 유튜버로 유명한 ‘궤도‘ 같은 사람이 해당될 수 있겠다.

어쨌든 이런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을 통해 과학을 낯설고 어렵게만 느끼던 사람들이 과학에 좀 더 관심을 갖고 그 내용들을 이해해보려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조금은 오지랖일수도 있는데 여기서 좀 더 생각을 확장시켜보자면 자기 분야 이외의 것들을 이해함으로써 단지 자기 혹은 자기 분야만 생각하던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나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과 생각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사회가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이런 노력들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학문의 분야를 막론하고 그 경계가 허물어져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통섭‘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모든 학자들, 즉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가 하나의 공통된 창조적 정신에 따라 활기차게 활동한다는 해묵은 만병통치약은 계속 이야기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들은 창조적인 자매들일지는 몰라도 공통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 P231

학문의 커다란 가지들을 통합하고 문화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과학 문화와 인문학 문화 간의 경계를 국경으로 보지 않고 양쪽의 협동 작업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미개척지로 보는 방법뿐이다. - P231

오해는 미개척지를 무시할 때 발생하는 것이지 정신구조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 P231

우리 인류가 유전적 진화에 병행하여 문화적 진화를 덧붙였으며 이 두 진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견해(유전자-문화 공진화, gene-culture coevolution) - P232

문화는 공동의 마음에 의해 창조되지만 이때 개별 마음은 유전적으로 조성된 인간 두뇌의 산물이다. 따라서 유전자와 문화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결은 유동적이다. 얼마나 그런지는 불명확하지만 말이다. 또한 이 연결은 편향되어 있다. 즉 유전자는 인지 발달의 신경 회로와 규칙적인 후성 규칙(後成規則, epigenetic rules) 을 만들어 내고 개별 마음은 그 규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직한다. - P232

마음은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성장한다. 물론 자기 주변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성장한다. 하지만 그런 성장은 개체의 두뇌를 통해 유전된 후성 규칙들의 안내를 받아 이뤄진다. - P232

뱀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매혹을 이끌어 내는 선천적 경향은 후성 규칙이다. 문화는 은유와 서사를 창조하는 그 공포와 매혹에 의존한다. - P232

문화는 유전자·문화 공진화의 부분으로서 각 세대 구성원 개인의 마음 속에서 집합적으로 재구성된다. 구전 전통이 글쓰기와 예술을 통해 증보되면 문화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고 세대를 건너 뛸 수도 있다. 그러나 후성 규칙이 주는 영향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유전적인 것이며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된다. - P232

어떤 이들은 주변 문화와 환경에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하도록 해 주는 후성 규칙들을 대물림한다. 그리고 그런 규칙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이나 있어도 약한 규칙을 가진 이들은 생존과 번식에서 밀려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좀 더 성공적인 후성 규칙들은 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그 규칙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과 함께 개체군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 두뇌의 해부 생리적 구조가 진화해 왔듯이 행동도 자연선택에 의해 유전적으로 진화해 왔다. - P233

어떤 문화 규범은 경합하는 다른 규범들보다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한다. 이 때문에 문화는 유전적 진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하지만 그 속도는 일반적으로 훨씬 더 빠르다.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연결은 더 느슨해진다. 하지만 그런 연결이 완전히 끊어지는 법은 없다. 문화는 정확한 유전적 처방 없이 고안되고 전달되는 정교한 적응들을 통해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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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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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장강명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저자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구조와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심도있게 고민하고 생각해본 흔적들을 작품속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이 작품에선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젊은 세대 혹은 사회초년생의 고뇌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낸 듯하다. 완독후에도 독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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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일일이 얘기할 순 없지만 이야기 속에 숨겨져있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상황이 급속도로 전개되고 묘한 긴장감이 흘러서 읽는 맛이 느껴졌다. 간만에 몰입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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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끝까지 읽고나서 개인적으로는 뭔가 속시원하다는 느낌보다는 이래저래 생각해볼 것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마지막에 나온 작가의 말에서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라는 질문에 작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볼거리를 적절한 방식으로 던져줬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 책에 추천사를 써준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남겨줘서 독자인 내가 이 작품을 그래도 허투루로 읽진 않았구나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별도로 독서토론을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만약 이 작품을 완독한 독자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토론을 한다면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할 때는 허우적거리는 손을 잡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간

일어날 수 있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대응 계획과 백업 플랜을 준비하는 능력

별마로천문대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산봉우리에 있었다.

그 옛날 소년 왕은 이곳에서 여러 차례 ㅈㅅ을 강요당했다. 청령포에서, 나는 3년 안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퇴로가 끊겨버려 후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ㅈㅅ선언을 이기려면 세연이나 세화 못지않은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꽉 짜인 논리를 준비하고, 이벤트를 계획하고, 마케팅을 벌여야 한다.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에 언젠가는 사표를 제출해야 할 시점이 올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머릿 속이 텅 빈 상태였다. 다만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서 생활에 기반을 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먼 바다에서 공기가 태양에너지를 듬뿍 받아 힘을 키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열대성저기압은 갑자기 태풍으로 발달해 육지를 향하고 강한 비바람으로 그 존재를 과시한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힘은 이제 없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에 태풍은 곧 몇 번 들이치리라 생각한다. 그때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많은 일을. 그건 그 에너지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단 인간의 생명에 암묵적으로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연 그 가치는 얼마나 될까?

위험한 직업과 덜 위험한 직업의 임금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에 어떤 금전적 가치를 부여하는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이 임금 차이는 학력, 경력 등 임금수준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고 계산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사용한 연구들은 대체로 사람의 생명이 1000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기암 환자들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을 거쳐 마지막에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고 하는데, 재키는 자신이 아직도 부정과 분노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산만한 정신상태로 죽음을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죽음은 도피가 아닌가?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 속의 인물에게도 모두 운이 따르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시대였다. 1000년 전이거나 일제강점기거나 아니면 독재시대거나.

아무리 추잡한 것이라도 멀리서 내려다보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재키는 살아있는 모든 것이 불쌍해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녀의 마음은 평안해지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복수심도 가라앉지 않았다.

재키는 마지막 순간에도 연쇄살인마처럼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만 연민을 느꼈다.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당신들도 나처럼 상처받길 바라요.

ㅈㅅ한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베르테르 효과‘

‘언젠가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책이 다루는 가능성은 20대를 옹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위대한 과업이란 철저히 개인화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위대하다는 개념이 변질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함의 본질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고, 스토리텔링 기법으로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들에게는 과업을 찾는 일이 바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길이다.

사람은 적수가 누구인지 알 때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 게 된다. _새뮤얼 헌팅턴

20대를 정의하는 각종 담론이 대체로 공허한 이유는 그 청년세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의 과업을 찾는 것이 바로 지금의 20대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임무인지도 모르겠다.

장편소설을 쓰는 작업은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비슷했다. 처음 시작할 때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자신이 없었던 게 그랬고, 매번 3분의 1지점 쯤에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그랬다.

내가 장담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계속 쓰다 보면 끝까지 쓸 수 있다‘ 는 것과 ‘계속 쓰면 점점 나아진다‘ 는 것이다. 3분의 2 지점을 통과하면 그다음부터는 저절로 끝까지 가게 된다는 점도 글쓰기와 마라톤의 공통점이다.

‘위대함‘은 실제로는 별 중요한 의미가 없는, 고리타분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다른 뜻을 교묘하게 섞어놓은 단어에 불과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바뀔 때 우연히 해당 장소에 있을 것‘ , 그리고 ‘개인의 한계라고 알려진 선을 넘을 것‘ 입니다.

위대함은 삶의 목표로 추구하기에 적당한 가치가 아닙니다.

저는 현대에 대단히 중요한 과업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과업과 무관하게 사람이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무가치하다고 무시하는 일에 매달려 끝내 의미를 찾아내고야 마는

"꼭 랠리를 완주하세요. 어떤 숨은 선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는 마릴린 맨슨의 앨범 <메커니컬 애니멀스> 의 첫 곡입니다. ...(중략)... ‘코마 화이트‘는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입니다.

비극과 재앙은 그처럼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ㅈㅅ이 비인간적이라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팽창해 젊은이들을 궁지로 내모는 자본주의의 욕망은 인간적인 것인가?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_아도르노

문제적 작품은 모두에게 동의받기 위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가.

당대 문학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더 나은 삶의 길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요한 것은 그 좌표를 통해 방향을 설정하고 길을 만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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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이미 다 완성되어 더이상 새롭게 변할 것이 없고 그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완성된 사회‘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완성된 줄로만 알았던 사회도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부조리함과 개선해야 할 것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것들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하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위해 택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ㅈㅅ‘ 이다.

솔직히 ‘ㅈㅅ‘이라는 말의 어감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독자인 나는 이 페이퍼를 쓰면서도 모음을 제외한 초성만 쓰는 것을 양해바란다.

다만 본문을 읽다보면 이 ‘ㅈㅅ‘을 택하는 그들 나름의 논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데, 읽으면서 그들의 행위에는 솔직한 심정으로 동의하는 것이 어렵지만, 독자인 나도 그들의 생각과 의도, 취지 같은 것은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4분의 3정도 읽고 있는데, 뒤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진정으로 말하고자하는 바에 대해 좀 더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한 세대가 주도권을 갖게 됐다는 것은 완성된 사회에서 그냥 그 세대가 중장년층이 되어 각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그 세대가 사회구조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사회는 결코 정체된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은 단순히 ‘완성‘이라는 개념을 서로 달리 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맨눈으로 보면 다 굳어서 더 움직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불안정하게 흐르고 있는 물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유리죠. 그렇다고 유리를 액체라고 해야 하나요?

제 생각에 ㅈㅅ선언은 이를테면 헵번스타일이라든가, 로큰롤과 같은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주장을 펼치는 표현 방법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하기를 의도하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목표나 책임감은 없습니다.

연쇄살인범 중 일부는 자신을 신으로 착각해 자신과 타인의 목숨을 ‘관장‘해야 한다고 여긴다 ...(중략)... 그들은 남이 자신의 목숨에 손대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쇄살인범이 어릴 때 보이는 세 가지 징후가 있다고 한다. 야뇨증, 방화, 동물 학대가 그것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죽어야만 이게 고통의 회피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어."

투쟁의 수단이나 삶을 완결시키는 방법으로서의 죽음이 아닌, 자신이 맞이하려는 죽음 그 자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올라온 사람의 절반 정도가 그냥 내려간다."

육체를 의지로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사형 선고가 죄수들에게 기괴하게 삶에 대한 집착을 부추긴다고 들었다. 우리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고 태어나는 셈인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다.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겠지.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재키는 존 F. 케네디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애칭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한 선박왕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오나시스의 미들 네임이다.

하비는 케네디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의 미들 네임이다. 오스왈드는 잭 루비에게 살해당한다.

제리 헤인스는 케네디의 암살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사람이다.

메리 무어맨은 케네디 암살 목격자 중 한 사람이다.

처음부터 재키,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루비, 하비, 제리, 메리라는 이름을 영어로 구글 검색창에 입력하면 쉽게 답이 나왔을 문제였던 것이다. 위키피디아에는 ‘케네디 암살의 목격자들‘ 이라는 카테고리까지 있으니까.

케네디는 하나의 상징물이며, 오직 상징으로서만 기능하는 존재고, 그 상징은 그의 죽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박왕 오나시스와 같은 대부호도, 재클린 오나시스와 같은 명사도, 후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들과 케네디가 붙어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이브러햄 재프루더나 리 하비 오스왈드, 잭 루비, 제리 헤인스, 메리 무어맨과 같은 보통 사람들은 케네디와의 관계가 아니었더라면 후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케네디도 찰스 맨슨과 비슷했다. 별 내용도 없는 연설을 하고 강한 개인적 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켰으며, 불멸성을 얻어 현대의 아이콘이 됐다.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는 산문시를 두고 입증되지 않은 논리라든가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 선언에 맞서려면 이 선언과 같은 수준에서 직관적이고 가슴에 와닿는 반박 논리를 펼쳐야 한다. 곳곳의 빈틈을 공격해봐야 핵심을 놓친 트집 잡기처럼 보일 뿐인데, 그게 여러 언론사의 논설위원들이 저지르는 오류였다.

귀신은 함부로 마음을 열지 않는 수줍음 많은 처녀였으며,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는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처녀귀신은 꿈을 간직한 순수한 영혼이었지만, 죽은 뒤에야 그 꿈을 이룬 소망의 존재, 비운의 주인공이다.

죽음 그 자체와 아무도 자신의 뒤를 따르지 않아 자신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리는 상황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부정해오던 절대자에게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연하게 구는 것이 가장 자발적인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

‘제자들‘을 자기와 같은 결론으로 유도해 다짐을 받고, 의지를 북돋워주고 흔들리지 않게 하는 데에는 엄청난 감정적 에너지가 필요했다.

이미 결혼을 결심할 때 세연과의 약속은 저버린 거야. 세연과 한 약속만 지켜야 하고 예식장에서 한 약속은 안 지켜도 되나?

ㅈㅅ선언에 대한 내 반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세연은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무가치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잖아.

좋은 음악이나 그림, 음식을 즐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은 본능적인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만들거나 만드는 기술을 갈고 닦는 데에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는지,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애써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내는 삶에도 가치는 있는 거야.

‘인정에 대한 욕구‘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패배나 사회변혁이 없어도 적절한 수준에서 채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앞의 세대라고 해서 그 사람 중 어느 누구 한 명이 자기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것은 아니잖아. 그네들이 가진 자부심도 하나하나 쪼개놓고 보면 나도 가방 하나 들고 해외출장 나가봤다, 밤새워 일해봤다, 거리에서 돌 던져봤다, 그런 일들 아닌가.

ㅈㅅ선언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ㅈㅅ선언은 내가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다. ㅈㅅ선언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야망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얘기에는 더더구나 찬성할 수 없다. 내가 ㅈㅅ선언에 반대하는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다.

ㅈㅅ선언은 잘못됐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적절한 반론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그 선언은 역병처럼 번지고 있었고, 감염자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더더욱 야망이 없는 시시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막고 싶었다.

‘야심이 너무 큰 나머지 자기 자신이 그 야심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위대한 일을 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람들에게서 잊히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고,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애정과 관심을 바라는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어른스럽게 삶을 사는 법을 세연에게 보여줬어야 했다.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체에 그렇게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7급 공무원으로서 나는 재미없고 불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런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주거나 세상을 바꿀 업적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내가 ㅈㅅ선언을 허황된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 선언을 제대로 반박하려면 반대로 멋있게 사는 법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없음을 나는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의 생활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음은 차분한데 심장은 왜이리 뛰는 걸까. 도망치려면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어.

나는 왜 세연이 물을 그렇게 두려워했는지 궁금했다. 문학작품 속에서 물은 생명과 재생의 이미지가 아니던가? 어렸을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하기라도 했나?

"그 계획은 잘못됐어.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우습게 여기는 생각이 정말 옳은 거라고 믿어?"
"어차피 다들 시시한 인생이잖아."

"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해서 죽어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언니는 유리 같은 사람이었어. 날카롭지만 깨지기도 쉬웠지.

뭔가 함정이 있음을 직감하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건 일흔 살이 넘어서였어. 그런데 넬슨 만델라가 예순 살 때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 상황은 그냥 절망스럽기만 했어.

정말 위대한 생각은 말이지,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한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어. 그래도 위대한 정신이라면 그 고독을 견뎌내지.

지금 세상은 너희들이 결론지은 것만큼 결코 완벽한 게 아냐.

나도 따라 뛰어들었다. 망설일 것도 없었다. 이것은 내가 기다려온 죽음의 방식이다. 선로에 뛰어든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지하철에 치여 죽는 것을 내가 얼마나 바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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