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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마술사
데이비드 피셔 지음, 전행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전쟁'과 '마술'. 좀처럼 어울리지 않은 것 같은 의뭉스러운 책. 검은 모자에 망토..마술봉을 든 마술사를 상상했던 내게 마술사란, 멀린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해리 포터로 그려지는 이미지가 강했던 겁니다. 마술사가 2차 세계대전에 활약했다는 마법과도 같은 실제 이야기. '위장술 실험단'으로 지정되어 전장에서 맹활약하다니.. 대단하고 흥미로운 실화 소재에 흥분되는데요. 히틀러의 블랙리스트 였던 천재 마술사 '재스퍼 마스켈린'의 눈부신 활약을 담은 팩션입니다.
총과 칼 대신 마술로 적장을 농락시킨 숨은 전쟁 영웅은 무기도 없이 75명의 생명을 구한 비폭력주의자 '데스몬드 도스'를 연상케 하는데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무기 없이 전쟁에 참여한 숨은 영웅들의 후일담은 늘 우리들을 설레게 하는 것 같습니다.
"자율권만 주신다면, 제가 전장에서 만들어낼 효과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대포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유령선이 바다를 항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드넓은 평원에 군대가 꽉 차게 할 수도 있고, 전투기가 눈에 안 보이게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수백 미터 상공에 떠가는 구름에 히틀러가 화장실에 앉아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을 투사시킬 수도 있습니다. "
P22
오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마술사 집안 출신인 마스켈린은 역사상 가장 사악한 적을 상대로 마술의 힘을 겨루기를 마다하지 않았는데요. 중년의 나이로 영국군에 자원입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승리를 이끄는데 이바지합니다.
키 190센티미터를 넘는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와 정리된 콧수염을 한 갈라진 턱을 가진 미남. 양쪽 볼에 깊이 팬 보조개와 짙은 녹색 눈동자와 낙천적인 성격. 광학기술, 응용역학, 전자공학, 위조 등에 전문가였던 재스퍼는 다양한 자격증을 보유한 과학자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마술사 집안이란 배경과 뛰어난 실력 덕분에 재스퍼는 런던의 가장 유명한 마술사 중 한 명으로 빠르게 성장해 나갑니다.
하지만 1939년 , 돌연 쇼 비즈니스를 접어두고 무대 위의 마술 기술을 전쟁에 이용할 수 없을지 고민하게 되는데요. '상상력과 지식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할아버지의 조언을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재스퍼 마스켈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장술 장교로 탱크 부대를 트럭으로 위장하고, 가짜 병사를 제작해 적군을 속이고, 이집트 최대 항구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를 통째로 옮기며 수에즈 운하를 숨기는 등 마술 공연을 전장에 투입합니다.
"우린 아무것도 옮길 필요가 없네. 그게 바로 이 계획의 묘미라고 할 수 있지.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있는 것과 비슷한 지상 조명과 구조물의 네트워크를 마리요트만에 구축하기만 하면 돼. 독일 폭격기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린 항구의 조명을 모두 끄고 마리요트만의 조명을 켠 다음 미리 심어놓은 폭발물 몇 개를 터트리면 되는 거라네. 놈들은 꿀을 찾아가는 벌처럼 그 불길에 끌려갈 거야. "
P173
그가 활약한 ' 마술단'은 다양한 전문가로 꾸려졌는데요. 화가, 만화가, 목수 등 개성 넘치는 마술단원이자 끈끈한 전우애를 보인 군인이었던 그들의 인간미를 발견하는 재미도 빠질 수 없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낙타 똥으로 만들어진 페인트 프로젝트, 탱크를 트럭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장치 일명 '선실드', 항구와 비슷한 조명과 구조물을 설치한 유인용 항구 건설 등 기상천외한 발상의 전환법이 소개되어 있죠. 영화화된다면 독특한 아이디어로 적을 속이는 위장술과 다양한 캐릭터들의 캐미스트리가 빅재미를 선사하리라는 기대감이 커집니다.
이들은 1941년 '배틀액스' 작전부터 시작해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라이트 풋 작전)'에서 대활약합니다. 북아프리카 사막 전쟁이라 불리는 희대의 라이벌, 독일 '로멜 장군'과 영국 '몽고메리 장군'의 대결에 투입되어 영국군에 승리를 안겨 줍니다.

당시 마술 같은 일들이 쇼가 아닌 실전에 투입될 수 있었던 배경은 히틀러가 점성술사의 말을 참고했다는 추측들과 더불어 신빙성을 부여받습니다. 마술과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은 독일 역사의 일부였습니다. 히틀러는 국가 사회주의 운동을 창설할 때 독일 국민이 초자연적 현상을 맹신한다는 점을 활용해 나치의 상징 문자와 색깔, 악마의 두개골이 대퇴골 두 개를 깔고 있는 휘장을 착용합니다.
히틀러 뿐만 아닌, 루돌프 헤스, 요제프 괴델스, 하인리히 힘러 등은 선전에 이용한다는 이유였지만, 스스로 초자연적 현상에 오히려 도취되게 되는데요. 잘못된 믿음은 가혹하고 우매하게 모두를 나락으로 떨어트린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전쟁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