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생기는 기분
이수희 글.그림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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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다. 세 살인데도 사춘기와 이십대는 무지하게 싸웠던 것 같다. 내가 거의 시키고 때리기만 했던 게 동생의 덩치가 커지면서 역전되었다. 어느 순간 내가 맞았고(ㅋㅋ) 그 후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도 동생이랍시고 챙기고 보살폈던 윤색된(?) 기억이 떠올랐다.

 

《동생이 생기는 기분》은 그런 나의 소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만화 에세이다.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동생이 생기는 기분'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열 살 터울인 자매 중 언니가 동생이 태어나면서 느낀 감정과 추억을 그림으로 그렸다. 내 기준에서 동생의 아가 시절이 기억나지 않기에 내 동생의 아가(조카)를 떠올리며 많이 웃고 공감했다. 아가들이 목을 가누지 못하다가 힘차게 들어 올렸을 때의 뿌듯함이 다시 생각났다. 생각만 해도 귀엽고 기특하다.

 

 

귀엽고 소중한 시간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열 살 터울이라 예뻐해 주다가도 서로의 사춘기와 방황기가 오면서 멀어지는 관계가 꼭 나 같아서 웃어넘겼다. 저자의 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집을 나오면서 완성되었고, 아무리 가족이라도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돈독해짐을 매우 공감했다.

 

 

그래도 언니가 있는 기분은 좋을 것이다. 내가 언니여서 그런지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항상 했다. 맏이라는 책임감, 동생이 따라 해서는 안되기에 삐뚤어지지 못하는 중압감. 이수희 저자는 그런 무게감보다 자유롭게 동생과의 에피소드를 그려 넣었다.

 

 

둥글둥글한 그림체와 간간이 등장하는 짧은 에세이가 유년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10년간 외동이었던 저자에게 "수희가 외로웠을 텐데 잘 됐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외동으로 자란 아이는 버릇없고 이기적이라는 사회적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거의 외동인데 그렇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의 세계의 왕따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런 말은 이제 좀 삼가자. 남의 자식을 낳든 말든 더 낳든 말든 이래라저래라 하는 분위기는 넣어두자.

 

그래서 "엄마한테 동생 만들어 달라고 해"라는 말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되기도 하다. 동생을 만들면 다인가. 키우는 건 누가 키우라고. 국가가 키워 준다고? 그런 아니지 말이다.

 

 

아무튼 저자는 동생이 생겨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네 컷 만화로 옮기며 생각할 거리를 준다. 단순히 개인의 경험을 다루지 않고 사회적 메시지도 힘주어 말한다. 그중 하나는 유모차라는 말에 깃든 사회적 함의였다.

 

 

독립출판물로 먼저 나왔던 책을 인쇄소에 넘겼을 때였다. 유모차의 '모'가 어미 모를 쓰기 때문에 평등 육아에 어긋난 성차별적 단어라는 글을 본 저자. 집에서 안절부절 이불킥을 했단다. 나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말이다. 어찌 단어의 뜻을 되새겨 보면 엄마만 몰아야 하는 차로 인식되기 쉽다. 육아는 엄마의 몫이라는 관행이 또 한 번 적용된 단어란 말이다.

 

그러나 이미 인쇄가 들어갔기에 어쩔 수 없었고, 민음사에서 출간되며 '유아차'의 모습으로 수정되었다. 여류작가, 처녀작, 여선생, 여배우 등의 단어는 직업이나 행위에 소수자를 붙인다. 분명 이제는 이런 말들을 많이 쓰지 않지만 동생 수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쓰이지 않기를 희망한다.

 

 

자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둘도 없는 연대자이자 평생 친구다. 부모님이 누누이 강조했다. 우리가 없을 때 서로 의지해야 할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맞는 것 같다. 형제나 남매보다 자매의 말 할 수 없는 비밀과 미묘한 신경전, 따라 하고 싶은 판타지, 친구처럼 막 대하는 편함이 있다고 본다. 자매를 가진 언니로서 저자의 마음에 많은 위안과 공감을 얻었고, 너와 나의 특별한 인연을 잘 이어가길 희망한다.

 

 

ps. 근데 너무 기어오르지는 말아 줄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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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7인 7색 연작 에세이 <책장 위 고양이> 1집 책장 위 고양이 1
김민섭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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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지우 작가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책장 위 고양이>를 일곱 명의 작가가 모여 일주일간 매일 새벽 6시, 구독자에게 짧은 에세이를 보내는 형식 말이다. 그렇게 최강문학팀이 만들어졌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백반 맛집의 요일 메뉴처럼. 다양한 주제로 7인 7색으로 쓴 에세이를 엮었다. 김민섭,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이은정, 정지우가 만났다. 일곱 명의 작가들이 만들어 낸 다양한 주제와 글을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은 독자들을 만족시켜 줄 것이다. 더불어 그들의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까지 훔쳐볼 수 있다는 것은 덤이다.

 

63편의 이야기는 한 권의 책이 되었고, 더운 여름밤을 시원한 청량감으로 충족시켜 줄 것이다. 차례대로 읽기보다.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부분부터 쏙쏙 빼내어 읽기를 권한다. 마치 살얼음이 낀 아이스크림을 입맛대로 먹는 즐거움이랄까. 주의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작가로 시작해도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흔들리는 출근길, 잠시 집중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화장실 타임, 자기 전 짧은 독서로 안정을 취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주제는 고양이, 작가, 친구, 방, 그 쓸데 없는 이다. 각 주제와 작가의 성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문체다. 단편 소설 같기도 하고, 일기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일종의 고해성사처럼 들리기도 했다. 짧은 에세이가 주를 이루는 형식에서 저마다의 장단점과 특색을 뽐내고 있다. 책의 디자인과 색감도 훌륭해서 보색대비의 핑크와 그린이 서점 가판대에 쉽게 눈에 밟힐 것 같다. 요즘은 모든 예쁘고 봐야 하는 시대인 만큼 내실만큼 디자인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본격적으로 책을 탐독했다. 오은 시인은 책방 주인답게 책을 사고 싶게 만드는 마케팅적 묘미가 느껴지는 듯했다. 정지우 작가는 말미에 글과 어울리는 곡을 추천해 주는데, 굳이 찾아 들으며 글과 매칭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김민섭 작가는 사회문제를 자신이 직접 겪으며 쓴 글을 읽어서 인지, 에세이라기 보다 문득 르포르타주의 느낌이 강했다.

 

소재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나의 진정한 친구 뿌팟퐁커리'였다. 뿌팟퐁커리를 먹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타이 음식을 주제로 한 부분이 고역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기우였다. 일곱 작가들은 기가 막히게도 글을 완성했고, 낯선 음식이지만 먹은 것처럼 식감과 맛이 돌았다. 이 느낌을 되살려 다음엔 꼭 타이 음식점에 가봐야겠다. 그들의 백일장의 나도 끼어 보고 싶어서다. 오늘 뭐 먹지라는 인류의 공통 고민에 과감히 '나의 진정한 친구 뿌팟퐁커리'라고 말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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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디테일 -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한 끗 디테일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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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후 기억이 오래될수록 순간 받았던 감정이 떠오른다. 그 순간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기념품이나 입장권을 보면서, 혹은 짧은 글이나 업로드한 SNS를 보면서 곱씹어 보기도 한다. 그땐 그랬구나 싶은 기억 속에서도, 유독 신기하거나 처음 접했던 것들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처럼 좋았던 공간의 경험은 특정 물건이나 추억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떠올릴 수 있는 삶의 활력이다.

 

 

 

 

이 책은 서비스 기획자로 일하는 저자가 여행을 하면서 느낀 작은 서비스, 태도, 맥락을 기록한 책이다. 굳이 따지면 전편은 일본 도쿄에 관한 것(2017)이었고 이번은 교토(2019)를 여행하며 쓴 것이다. 보고 느끼고 배웠던 소소한 기록이 하나의 콘텐츠로 사랑받았던 경험을 토대로 교토 편을 완성했다.

 

 

전작과 같은 디자인인 사철누드제본이라 읽는 맛, 펴는 맛이 살아 있다. 인플루언서인 저자가 교토를 다니며 얻는 에피파니(epiphany)가 있다. 에피파니란 일상에서 갑자기 감각이 트이고, 깨달음이나 통찰이 반짝이는 찰나를 말한다.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도시답게 느렸다가 빨리지는 다양함의 공존 속에서 저자는 카페에 들러 그곳의 일상을 관찰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쉼을 택하기도 했다. 내가 해보고 싶은 느릿한 여행의 컨셉을 대리 경험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관광지를 둘려보며 핫스폿을 소개하는 기존의 관광 책도 아니고 새로운 곳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철저히 비즈니스 관점으로 바라본 시각이 서비스, 마케팅, 디자인 분야의 독자에게 영감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키워드를 골라 글을 분류하고, 직업군에게 필요한 정보를 인덱스로 나눠 첨부했다. 시간의 흐름이나 두괄식 독서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아 읽고 확장해 나가는 독서다. 거기에 교토가 주는 전통과 현대의 매력을 잘 살려 다양한 관광지와 가게들을 소개하고 있어 마치 여행하고 온 기분까지 든다.

 

 

 

디테일, 소비자를 생각하는 한 끗 차이

 

감독 봉준호의 별명은 봉테일이다. 관객이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작은 것 하나까지도 지나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봉준호+디테일의 의미 있는 조합이다. 책에서는 관광객이자 업무차 온 저자의 입장에서 느낀 디테일의 힘을 기록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또다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고, 물건을 다시 사도록 만들고,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파악한 작은 배려를 모아두었다.

 

기요미즈데라의 사계절을 표현한 입장권, 명함 크기로 제작된 일본식 정원 무리안의 입장권, 하나의 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긴카쿠지의 입장권과 워밍업 로드는 관광지의 첫인상을 바꾸고, 스토리텔링으로 기억되는 마법을 부린다.

 

 

 

외관에서 풍기는 평범한 네오 마트는 손글씨로 상품 하나하나에 적어 놓은 메모가 인상적인 가게였다. 디지털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에게 아날로그의 회기를 상기해 주는 반면, 단순히 상품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상품 소개를 누군가의 다이어리를 훔쳐보는 것처럼 꾸며 오프라인 매장만의 강점을 극화했다.

 

 

결국 모든 디테일은 사람에게서 나온고 저자는 말한다. 물건을 소비하는 상황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사용 후의 상황까지 예상한 고민. 구매 고객 후의 행동까지 관찰해 제품에 신경 쓴다면 분명 만족스러움이 배가 된다. 그게 바로 사람을 향한 고민과 노력의 흔적이다.

 

 

여행지에서 겪은 사소한 것들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정리한다는 것은 내가 놀러 온 건지, 일하러 온 건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아무렴 어떠냐는 저자의 마인드에 따라 유유자적 교토를 여행한 기분이다.

 

 

특히 전편에 영감받아 우리나라 카페에서 발견한 '짐바구니'나 영감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지하철 2호선의 혼잡도 표시 열차, 페트병에서 비닐을 쉽게 제거해 재활용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 등. 콘텐츠의 가치를 새삼 실감한다고 털어놓았다. 일을 배우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사례가 마케터이자 기획자의 눈으로 본 여행지라는 독특한 콘셉트로 다가온다.

 

 

때문에 지금 시국에 일본 관광이라니 하는 생각이 아닌, 철저히 이 나라에서 어떻게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소비자의 이목을 끄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특히 고객 서비스에 고심하는 기업에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비슷한 한국의 사례도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살아가는 데 있어 디테일이 강한다면 어디든 쉽게 스러지지 않고 적응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방법인 여행을 통해 영감을 얻고 생각하며 쉬는 '인사이트 여행'이다. 다음번에는 이런 유형의 여행도 해보고 싶었다. 빨리 모든 것들이 안정화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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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집 청소
김완 지음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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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본에서 죽은 이가 남긴 것과 그 자리를 수습하는 일에 관심을 갖는다. 동일본대지진을 겪고 귀국해 특수청소 서비스 회사 '하드윅스'를 설립한다. 그의 직업이 뭐냐고 묻는다면 유품정리사, 죽은 사람의 집을 청소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들고난 자리를 청소해 다시 사람을 들일 수 있게 만드는 일. 그러니가 흔적을 지우는 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 그 언저리에 속하는 기록이 담담히 담긴 에세이다. 초반부는 죽은 자의 집에 들어서서 마치 영화를 보듯 상황을 적고 후반부는 자신의 일상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엮었다. 그래서일까. 글을 읽고 있으면 강렬하게 삶의 의지가 피어오른다.

 

새벽에 대뜸 전화를 걸어 자신의 청소 견적을 에둘러 물어 본 중년 남자, 자살 직전 전화를 걸어 착화탄 세 개로 세상을 떠나면 많이 고통스럽겠냐고 묻는 전화. 수많은 죽음의 흔적을 보고도 계속해서 일하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몹시도 궁금해진다.

 

삶이 끝난 자의 집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은 경험일 것이다. 온갖 잡동사니로 뒤덮여 있거나 죽음의 흔적을 마주하고 상상하며, 미약한 혹은 강렬한 냄새에 적응하는 것. 늘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는데 죽음 뒤의 숭고함을 뒤늦게 깨닫는다. 죽은 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알 길이 없다. 다행히 뒷정리를 해주는 산 사람이 있어 죽은 자는 떠날 수 있을 거다. 살아있던 흔적을 지움으로써 영원히 이 세상과의 인연을 끊어버리는 거다.

 

"자살 직전의 분리수거라니,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이전에 다른 자살자의 집에서 번개탄 껍질을 정리해둔 광경을 본 적은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본격적이다. (중략) 얼마나 막강한 도덕과 율법이 있기에 죽음을 앞둔 사람마저 이토록 무자비하게 몰아붙였는가. "

p25

 

문득 책 속에서 인상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하는 시간에도 그에 쓰인 도구들을 일일이 분리수거한 어느 죽은 자. 그 사람의 시간을 역추적하는 글을 읽는 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교차되었다.

 

"힘들지 않다고는 말하기 힘듭니다" 흔히 힘들지 않냐는 말을 묻는다면 그가 으레 하는 대답이다. 그는 살림과 쓰레기로 발 디딜 틈 없는 공간을 완전히 비우고 텅 빈 집으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다. 청소를 업으로 삼기 가장 이상적인 성격이 아닐까. 그가 보고 써 내려간 글로 상상하는 죽음. 그 과정과 끝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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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지음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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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인증샷이 대세를 넘어 필수가 되었다. 한 것, 먹은 것, 산 것들을 SNS에 인증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시대다. 그러나 인증 사진도 조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직접 동영상을 찍거나 글로 후기를 남기며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책은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가 직접 체험하며 쓴 기사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이름하여 체험+저널리즘의 합성어 체헐리즘이다. 직접 경험한 것만큼 생생한 후기도 없다. 해봤냐는 말에 당당히 해봤다고 할 수 있으려면 남기자처럼 이란 선례를 남기는 것 같다. 참 다양한 분야를 직접 겪어보고 글로 풀어 냈다. 발로 쓴 기사, 발로 직접 걷고 뛰며 얻은 기사다. 값지고 진정성이 묻어 난다. 이런 게 바로 언론이란 생각이 든다.

 

 

첫 챕터부터 세다. 남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쓴 기사다. 브래지어를 고르고 찾는 것부터 웃음이 터져 혼자 킬킬거리면서 읽었다. 남기자의 맛깔스러운 글맛과 직접 찍은 사진의 캡션(사진 설명)은 혼연일체를 이룬다. 사진 밑에 글도 춤을 추고 있는 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 후로 하루 200킬로그램의 폐지를 주워 1만 원 남짓 한 돈을 버는 최 씨와 동행하는 기사는 마음이 짠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일거리를 동행하며 세상은 아직 살만함을 확인했다. 가정의 폐지를 리어카 모아두고, 따스한 믹스커피 한 잔을 대접하는 동네 사람들의 온기가 글에 담겨 있다. 과로사가 많은 집배원들의 하루를 따라가 봤고, 직접 유기견 구조에 동행했다. 환경미화원, 소방관, 무연고자 장례식에서 삶과 죽음을 체험했다.

 

재미있는 실험(?)도 있었다. 거절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모든 현대인에게 거절당하기 50번 두려움을 깨보기도 했다. 길 한복판에 서서 모르는 사람에게 비타민을 나눠 주기도 하고, 반려견과 뽀뽀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그 후로도 막무가내 거절당하기 프로젝트는 이어진다. 문 대통령 인터뷰, 카페에서 커피 리필하기, 미용실에서 겨드랑이 털 깎아줄 수 있냐 문의, 친구에게 5천만 원 빌리기 등등.

 

거절을 당하면 당할수록 마음의 굳은살이 쌓여 수치심이 완화되고, 거절에 익숙해졌다. 거절을 은근히 즐기게 된 남기자. '최악이래봤자 거절당하면 그만'이란 생각으로 도전하니 오히려 거절당해도 감사합니다란 말이 쏟아져 나왔다. 거절당하기 두려워 시도하지 못해 집에서 이불킥하기를 몇 번인가. 거절은 겪으면 겪을수록 오히려 부드러워진다.

 

 

현대인의 필수 능력은 멀티스태킹? 그거 사실 뇌를 속이고 있는 거라고 한다.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무언가를 검색하고, 버스에서 카드를 찍고 걸어간다면? 당신은 멀티스태킹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멍 때리기' 대회가 왜 생겨나게 되었는지 취지를 알면 오싹해질 것이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우리 뇌는 쉴 시간이 전혀 없고, 수면의 질 또한 나빠지고 있다. 뇌를 혹사 시키고 있는 통에 진화한다라기 보다 퇴화하고 있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남기자가 체험해 봤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보기' 나는 솔직히 이제 못할 것 같다. 쉬면서도 스마트폰이나 책을 들여다보는 나는 1분 1초가 아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 일중독인가?;) 그렇게 남기자는 일어나 500미리 물 한 통을 준비해 빈방으로 향했고, 그대로 대(大) 자로 뻗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뇌파 검사를 해보니 극심한 스트레스에 지쳐 있었다. 12시간이 목표였다. 천장의 벽지를 응시하면서 매직아이도 하고, 간지러운 부위를 손이 아닌 발가락으로 긁고, 졸리면 자고 정말 누워서 멍 때리는 시간을 체험했다.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며 쉬어 본 적이 있을까. 남기자는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를 보고 위로를 받은 듯했다. 현자 같은 푸가 이런 말을 한다.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를 하게 되지." 정말 현타오는 말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오후 7시에 마치고 스마트폰 전원을 켜 300개가 넘는 연락을 간단히 무시하고 맑은 정신, 밝은 표정과 피부로 리프레시 했다. 나도 뭐든 잘되지 않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이 방법을 한 번 해볼까 한다. 과연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체험한 자의 후기가 매우 좋음으로 용기를 얻었다.

 

 

그 후로도 남기자는 꾸준히 경험치를 쌓여 갔다. 애 없는 육아, 80세 노인으로 하루 보내기, 24년 만에 초등학생 되기, 자소서 써보기, 눈 감고 벚꽃축제 가기, 착하게 살기를 거부하기, 스마트폰 하지 않기, 회사 땡땡이치기, 30년 친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등등. 생각만 해봤는데 실행에 옮기기 못한 것들,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행동들을 대리 경험해 준 남기자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웃기도 많이 웃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누군가의 경험을 산다는 건 이처럼 값진거란 생각도 했다.

 

나도 직접 취재, 인터뷰, 체험, 영화관람, 독서 한 것들만 쓴다. 정확한 팩트와 자신의 생각을 엮어서 한 편의 글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부분이 오버랩되었다. 때문에 글에서 느껴지는 진정성과 진실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내가 해보니 이렇다'만큼 정확한 척도가 어디 있을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몸소 겪은 경험. 가짜 뉴스와 허세가 판치는 세상에서 생명을 담보로(?)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진정한 체헐리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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