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리나
닉 드르나소 지음, 박산호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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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과장하지 않은 단순함과 여백이 주는 공허함이 공포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에 무엇을 채워야 할 때의 공포, 사위가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의 두려움을 느껴 본 적 있는가. 인간의 탄성 회복력은 제각각이라 감당할 수 없는 우울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기도 하다.

 

맨부커상 그래픽 노블 최초 후보작인 《사브리나》는 사람이 어떻게 미디어와 SNS로 서서히 미쳐가는지를 체험할 수 있다. 되도록이면 기분이 좋을 때 읽기 바란다.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 책장을 덮고 나면 멋모를 찝찝함이 당신을 잠식할지 모른다.

 

 

사브리나는 한 달 전에 실종되었다. 남자친구인 테리는 친구 캘빈을 찾아간다. 실은 둘 사이가 동창이긴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다. 아무렴 어떤가 아내와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는걸. 누가 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테리는 전혀 연고가 없는 친구를 통해 사브리나 실종의 아픔을 극복하고 싶었을지 누가 알까.

 

 

 

 

군인인 캘빈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친구를 위해 최대한 따스한 보살핌을 준다. 하지만 출근을 해야 하는 통에 제대로 끼니를 챙겨주지 못해 안타깝다. 캘빈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내와 딸 씨씨와 재결합을 원하지만 아내는 자신의 무관심에 몸서리치며 떠났다. 직장에서는 위험한 임무에 1순위 추천서가 들어와 있는 상태다. 캘빈 또한 누구를 위로해줄 처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무력한 나날들을 보내던 중 사브리나의 소식을 전해 듣는다. 뜻밖에도 언론사의 기자들에게 말이다. 그들은 수상한 비디오를 보고 신고한 것이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잔인한 살해 과정이 담겨 있다. 그렇다. 사브리나는 잔혹하게 죽었다. 범인은 다른 곳에서 이 영상을 보냈고, 삽시간에 영상은 퍼진다. 

 

 

 

 

 

 

이 책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조용히 잠식하는 분위기에 있다.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가짜 뉴스가 SNS를 통해 퍼진다. 시청률 올리기에 급급한 언론은 최소한의 윤리조차 지키지 않는다. 왜곡된 사실, 루머, 음모론, 카더라 통신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타고 급속도로 커진다. 이러한 사건 하나하나가 켜켜이 쌓여 확증편향으로 번진다.

 

우리는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 되묻고 있다. 믿음을 빌미로 누군가를 상처 내고, 자신도 상처받고 있는지를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 정신병의 실체를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이는 미국 내 뿌리 깊은 불신과 합세하여 마녀사냥에 나서기도 한다. 집요하고 괴팍한 행동들이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발현될 수 있는지. 악의 평범성도 들여다보게 한다. 익명성이란 커다란 가면은 평범한 사람도 악마로 만들어주는 힘센 존재다.

 

 

 

 

 

《사브리나》는 등장인물들의 무표정, 말을 아끼는 적막, 단순한 그림체, 모노톤, 여백이 주는 무한함을 보여주며 독자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단순히 사브리나를 해친 범인을 찾는 일차적인 방법보다 이를 통해 주변인인 사브리나의 동생 산드라, 애인 테디, 테디의 친구 캘빈까지. 그들의 삶이 서서히 파괴되고 있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과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과장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서히 상대방의 잠식하는 가운데 고요한 불친절이 기분 나쁘다.

 

 

 

 

예술은 모두 행복하고 즐거운 것만이 아니다. 불편한 일을 굳이 입에 올려 공론화하는 일이 예술이 가진 힘이요. 궁극적인 목적일 수 있다. 때문에 그래픽 노블 최초로 맨부커상 후보에 오를 정도의 통찰력을 그림이라는 매체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영상이나 텍스트가 주는 울림과도 또 다른 상태의 자극을 《사브리나》를 통해 느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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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 1 펭귄클래식 101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유수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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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여성은 아름답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꿈을 이루고 싶은 모든 여성들은 아름답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존경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개봉을 앞둔 영화에 앞선 원작 선택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감독 '그레타 거윅'이 리메이크한 영화 <작은 아씨들>에 대한 열기가 심상치 않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6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어 있기도 할 뿐만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감독과 여성 캐릭터들의 여성 서사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5년 작과 2020년 작은 분명 25년의 차이처럼 원작을 해치지 않으면서 진보한 여성 캐릭터를 만나볼 것으로 기대한다. 현 가장 주목받는 청춘 남녀의 캐스팅으로 개봉을 앞두고 원작을 읽어보았다.

영화는 시간 제약 안에 원작을 영상으로 압축해야 하기 때문에 생략하거나 새롭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이나 영화를 보고 난 후 풀리지 않는 의문, 캐릭터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필요하다면 원작을 꼭 읽어 볼 것은 권한다. 1권에서는 소녀들의 유년시절을 2권에서는 성인시절을 다루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다양한 출판사의 버전이 존재하지만 번역가, 출판사에 따라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펭귄클래식코리아의 《작은 아씨들》 을 선택했다.

이유는 첫째, 방대한 이야기를 한 권으로 만나보는 양장본도 좋지만 이동하며 읽기에 불편하기 때문에 1,2권으로 나뉘어 있는 책을 택했다. 현재 영화 개봉과 함께 띠지나 표지 갈이를 했거나 새롭게 일러스트 버전도 있다.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대략 출판사는 알에이치코리아, 윌북, 인디고,펭귄클래식코리아 등이 있다.

둘째, 무엇보다 펭귄클래식은 오리지널 한 느낌을 최대한 살려 명화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때문이다. 클래식한 삽화 때문인지 소장 가치 또한 충분하다.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자전적인 소설

 

 

원작자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은 실제로 19세기 미국 네 자매와 어머니와의 유대관계를 반영한 자전적인 소설이다. 아버지 '에이머스 브론슨 올컷'은 초월주의 사상가이자 활동가의 역할이 자녀들 교육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네 자매 중 둘째 '조'는 '루이자' 자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2년에 입대, 야전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얻은 경험으로 《병원 스케치》를 쓴다.

성(性), 결혼, 사랑에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 루이자는 서른세 살에 본격적으로 프로 작가에 입문하게 된다. 직업 선택이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 파격적인 행보다. 처음으로 성공을 안겨준 작품은 《병원 스케치》다. 가족들은 루이자를 착한 딸이면서도 반항적인 공상가였다고 말하는데 《작은 아씨들》에 묘사된 조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루이자는 결혼으로 여성의 삶이 결정되는 때에 태어나 작가가 되기란 쉽지 않았다. 루이자가 글 쓰는 가장 중요한 동기는 경제적인 자립이었다. 여성의 집필을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와도 일맥상통한다.

1868년 첫 발표 이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작은 아씨들》 은 네 자매의 다양한 성격에 자신을 투영하며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소녀들을 위해 썼지만 다양한 분야와 세대에서 사랑받고 있다.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어 성공적인 작가로 안정적인 생활을 안겨주었다.

21세기에도 유효한 여성들의 워너비 모델

 

 

추측건대, 크리스마스 아침 이 도시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편안함을 선사하고 돌아서던 이 네 명의 굶주린 소녀들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들의 아침을 나눠주는 바람에 빵과 우유로 만족해야 했지만, 뿌듯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아침을 열었으니 말이다.

P 69

 

 

《작은 아씨들》 은 여성 성장소설이다. 성평등이란 판타지를 이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경제적인 부족함 없이 화목한 가정이지만 아버지의 군 복무로 가세가 기운 가정은 겨울, 크리스마스 풍경으로 시작한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세상을 온 예수의 생일. 일 년 중 가장 풍족하고 즐거운 날이지만 청빈한 기독교 집안에서 사치란 없다.

네 자매와 어머니는 전쟁 중인 상황과 '너 자신보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다. 작지만 먹을 빵을 나누고, 최소한의 선물로 마음을 전한다. 지금까지 보아온 소설 중에 가장 따뜻한 오프닝이다. 《작은 아씨들》 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보다 마음의 풍요를 말하고 있다. 영혼을 살찌우는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눈과 목소리를 투영한다는 점이 고전으로 불리는 이유라 하겠다. 네 자매의 뚜렷한 캐릭터성은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 자체라 할 수 있다. 4인 4색의 인물들은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꾸려나가고 있다.

첫째 메그는 결혼을 통해 안락한 가정을 꿈꾸는 19세기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연기에 관심 있고 네 자매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하고 있다. 둘째 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이 허락되지 않아 자매들이 즐겨 하는 연극 시나리오를 쓰며 습작을 이어나간다. 다혈질에 말괄량이이며 연극에서는 늘 남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옆집에 이사 온 소년 로리와 친구가 된다.

셋째, 베스는 피아노 치길 좋아하고 집안일을 즐긴다. 조용하고 섬세하며 착한 성품을 지녔으며 희생적인 성격을 가졌다. 넷째 에이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돈 많은 부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가장 어리지만 자신의 의견이 분명하다. 돈이 가진 물질만능주의가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훗날 부유한'마치' 숙모 할머니의 후원으로 그림을 공부한다.

어머니 마치 부인은 모두 자신만의 짐을 짊어지고 산다는 말을 한다. 남북전쟁의 종군목사로 복역 중인 남편의 대신해 집안의 가장이 된다.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솔선수범하는 선행은 네 자매를 올곧게 키워낸다. 살아가면서 때로는 등에 진 짐이 버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겠지만 모두 각자의 혜안으로 짊어지는 방법을 터득하길 바란다. 그야말로 밥상머리 교육의 산실이다.

 

 

 

원작으로 만나 본 《작은 아씨들》 은 19세기에 쓰인 시대상이지만 21세기에 읽어봐도 전율을 느낄 정도로 '조'에게 푹 빠져버렸다. 1995년 영화는 조를 아예 화자로 세워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소설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네 자매와 주변 인물을 바라보고 있다. 조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것도 좋지만 어떤 사람은 베스의 관점으로 서술되길 바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원작에서는 영화에 다 담지 못한 자매들의 사소한 성격과 행동마저도 알 수 있어 각각의 매력이 뚜렷이 발산된다.

더욱 풍성하고 세밀한 인물 묘사 덕분에 조와 이탈리아 귀족 출신인 '로리'와 왜 이어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지날 날이 정리되었다. 세상을 알게 된 어른이 되고 보니 결혼을 선택한다면 꾸준히 쓸 수 없었던 조조에게 공감했다. 《작은 아씨들》 은 단순한 성장소설 이상이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향해 나가아고 싶은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 소설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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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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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들》은 마거릿 애트우드가 1985년 발표한 《시녀 이야기》이후 34년 만에 내놓은 후속작이므로 2019 부커 상을 수상했다. 살아 있는 전설이자 여성 인권의 대모이기도 한 마거릿 애트우드는 전작 《시녀 이야기》를 통해 성과 권력의 어두운 상관관계를 드러냈었다.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 도구나 하층 계급으로 전략한 디스토피아의 날섬이 언어적인 폭력으로 그려져 있다.

 

 

 

 

"거짓 증언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통상적인 관행이었어요. 미덕과 순수의 외면 밑에서 길리어드는 썩어 가고 있었지요. " p438

 

 

 

 

계급 사회인 '길리어드'에서 오로지 아이를 낳기 위한 씨받이 시녀들은 빨간 옷과 얼굴을 가진 챙이 큰 모자를 쓰고 파란 옷을 입은 아내들의 증오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다. 인권이란 건 없다. 남성들에게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보일 테면 유혹의 원인 제공자가 된다. 오로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사령관의 관계에만 이용되고 아이를 낳는다.

 

 

 

 

길리어드에서 여성들은 철저히 계급화되어 있고, 누구도 운명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이후 미드 '핸즈메이드 테일'로 만들어져 활자가 주었던 상상력을 멋지게 시각화하기에 이른다.

 

 

 

 

《증언들》은 길리어드 이후의 이야기로 30여 년간 독자들의 질문에서 탄생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에서는 세 여성의 화자가 등장하게 된다. 길리어드 최고의 권력자 '리디아 아주머니'와 길리어드에 사는 '아그네스', 길리어드와 반대되는 세력인 메이데이에 사는 '데이지'가 등장한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자신이 어떻게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와 길리어드의 다양한 인물은 기록하는 화자이다. 이는 '아르두아 홀 홀로그래프'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증언 녹취록 369A, B로 나뉘어 두 소녀의 이야기도 함께 풀어 낸다.

 

초반에는 이 세 인물의 이야기가 따로 진행되지만 중반부터는 한 시점으로 합쳐지며 드라마틱 한 구조가 완성된다. 그 과정을 따라가는 힘은 무엇보다도 상당한 분량의 촘촘한 이야기다.

 

 

판사 출신의 50세 여성 리디아 아주머니와 창설자들이라 불리는 아주머니들과의 알력, 길리아드에서 메이데이로 빼앗겼다는 신성화된 '아기 니콜', 종교를 빌미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길리아드의 부패가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리디아 아주머니는 길리어드의 체계를 만든 창설자 중 하나이며 여성들을 교육하는 계급 아주머니들의 최상, 길리어드의 최고 권력자로 올라선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빌어 보고 들을 것을 쓰기 시작한다. 독자는 숨겨진 이야기를 듣는 재미와 하나씩 드러나는 관계의 스릴을 만끽하게 된다.

 

 

"네 시녀가 네 침대에서 죽으면

그녀의 피가 네 머리에 걸린다.

네 시녀의 아기가 죽으면

네 삶은 눈물과 한숨.

네 시녀가 출생 중에 죽으면

저주가 세상 끝까지 너를 따라다니리라."

p156

 

 

또한 길리어드의 소녀 아그네스는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며 헤쳐나갈 험한 여정과 친구들의 희생을 감내하는 성장을 겪게 된다. 아버지뻘 되는 저드 사령관과 조혼하게 될 위치에 놓이기도 한다. 진짜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그네스는 상황을 거부할 수 없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기 보다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고군분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드라마틱 한 인물인 데이지는 부모라고 믿었던 닐과 멜라니의 죽음으로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길리어드 난민단체 생추케어를 지나 진주 소녀 제이드로 위장해 길리어드에 위장 잠입하게 된다. 이로써 만나게 되는 뜻밖의 인연은 이 소설의 큰 반전 중 하나다. 이 관계의 시작도 여성 마지막도 여성이란 점이 페미니즘적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 p147

 

 

 

 

《증언들》의 가장 큰 수확은 여성이 한낱 권력의 시종을 전락한 디스토피아에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할 희망으로 성장한다는 데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도 고무적인 성과이면서도 이들의 거친 생존 과정을 함께 하며 진정한 전우애를 느낄 수 있음이다.

 

 

 

 

아이들에게 성적 관심 있는 가진 남성, 조혼으로 아내들은 액세서리로 쓰다 버리는 잔혹한 남성들의 척결은 통쾌한 대리만족을 준다. 신의 대리자로 불리는 아주머니들이 권력의 상층부에 있다는 점 또한 현 권력 전복의 카타르시스를 안겨 준다.

 

 

 

 

600P에 달하는 상상 속의 기록을 따라가는 동안 희열과 씁쓸함의 상반된 감정이 동반되는 독서였다. 무엇보다도 연대순으로 따지면 《시녀 이야기》를 먼저 읽고 최근 그래픽 노블로 발간된 《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를 보면 좋다. 그 사이에 텍스트로 상상했던 것들의 완벽한 시각화를 미드 '핸드메일즈 테일'로 감상하는 것도 추천한다. 물론 시간이 없다면 미드나 그래픽 노블을 보고 대충의 분위기를 파악한 후 최근작 《증언들》을 읽어봐도 좋겠다. 하지만 뭐든 상관없다고 본다. 시간은 완벽하게 빨리 흘러간다.

 

 

 

《증언들》에서는 《시녀 이야기》와 드라마에 담긴 기본 정보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무엇이 먼저이든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적나라한 묘사와 상상력에 한 번, 혹시라도 이름을 달리하여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길리어드의 변주된 형태에서 두 번! 아직도 바뀌지 않은 인식의 변화, 그리고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권력의 어두운 힘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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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말들
천경우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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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때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빛나고 가치 있는 것들이 있다. 사랑, 관계, 신뢰, 미움, 슬픔 등. 표정이나 몸짓, 말을 하지 않으면 내재되어 있는 감정을 알 길이 없다. 아름다움과 추함, 시간 등도 무형화의 존재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존재하고 있지만 실체는 없는 무형의 것들을 오늘따라 생각해 본다.

 

사진과를 졸업해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사진과 퍼포먼스, 공공미술 작품 활동에 주력하고 있는 천경우의 사진 에세이를 읽었다. 전 세계로 사진을 찍고 공공 퍼포먼스를 하기 때문에 어쩌면 여행 에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업노트를 훔쳐보는 일은 어떤 활동의 찰나를 촘촘히 들여다보는 충분한 시간을 선사한다. 나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흐르는 시간 1분 1초를 사진에 담은 시간 마법사처럼 느껴졌다.

 

 

사과 한 알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천경우 작가는 사람들을 모아 두고 사과 한 알을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 오로지 먹는데만 집중하는 모습,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는 시간을 만끽할 시간을 제공하자는 취지다. 오.. 사과를 이토록 진지하고 마주한 적이 있나 싶다. 사과를 통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사과 한 알의 기쁨, 먹는 즐거움, 집중하는 시간. 당신에게 사과 한 알은 어떤 존재일까.

 

퍼포먼스 'Versus'는 서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익명의 사람 50여 명이 공공장소에서 벌이는 프로젝트다. 서울, 뉴욕, 바르셀로나, 리스본, 취리히, 괴핑겐, 로스킬레 등 7개국 7개의 도시와 대륙을 오가며 진행된 프로트는 한자 인(人) 자에서 비롯되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맞댄 모습. 대치와 양방향성은 서로의 체온과 심장의, 숨소리를 들어보는 유대 방식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기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신기한 점은 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고 고스란히 상대방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으로 봐도 알 수 있듯이 평온한 표정이다. 모르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자연스러움은 각박한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개인이며, 나 자신을 잠시 쉬게 만드는 연대다.

 

 

이는 익명성 보장과 규칙으로부터의 보호 그리고 신뢰기도하다. 나와 마주치는 사람 누구도 아니기에 더욱 편안한 것이다.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대나무 숲에서 비밀 누설의 시원함을 느끼는 때처럼..

 

 

에세이의 제목과 같은 '보이지 않는 말들'은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의도 된 설정인지 궁금하지만 적절한 위치, 탁월한 편집이라 감탄할 수 박에 없다.

 

독일 브레멘에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삶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에너지와 일상을 모티프로 한다. 도시 거리 밑 땅속 파이프에 노동자들이 생각한 글귀를 담아 보자는 취지다.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일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시민들은 그들의 따스한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천경우 작가는 이렇게 회상한다. "사람들은 작품이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묻곤 했는데, 나는 시민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아래로 에너지 원료뿐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도 우리 곁에 함께 흐르고 있다는 상상을 하길 기대하였다"라고 말했다. 이 땅속 문구들은 파이프의 수명이 다할 50-80년 이후에나 발견돼 아카이빙 될 것이다. 타임캡슐이 생각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천경우 작가의 사진과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함께 하고 널리 공유될 때 가치가 커진다는 사실도 되새긴다. 무형의 프로젝트일 경우 휘발되어 버리는 속성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공감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있는 퍼포먼스 우연한 퍼포먼스가 있다면 주저 없이 나도 참여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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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 - 스탠딩에그 커피에세이
에그 2호 지음 / 흐름출판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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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아침잠에서 깨기 위해, 사랑하는 사랑과의 행복한 시간을 위해,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 때. 당신에게는 인생 커피가 있나 묻고 싶다. 애석하게도 나는 인생 커피를 찾지 못했다. 비슷한 경험이라면 아주 더운 날 청량한 얼음이 가득한 유리잔에 담긴 콜드브루의 쌔한 맛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전 세계의 다양한 카페, 사람들, 커피를 먹고 나누고 온 기분이다.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이처럼 가성비 높은 여행이 되기도 한다.

 

책은 뮤지션이자 카페 주인, 커피 애호가인 스탠딩에그의 커피 에세이다. 감성 어린 문구와 사진들이 커피를 마시라는 유혹, 여행을 떠나라는 유혹을 부른다. 그래서 당장 카페로 달려갔다.

 

 

비록 에세이에 소개된 카페는 아니지만 우리 동네 프랜차이즈 커피점에 아침 방문했더니 따사로유 햇살이 반겨주고 있었다. 어디가 되었든 커피 맛이 균일한 커피전문점이다.

 

 

인생 커피가 있는가? 에그 2호는 스위스 취리히의 뒷골목의 작은 카페 'MAME'에서 인생 커피를 생각해봤다. 동경하는 누군가의 SNS에서 본 적 있는 블루 보틀 커피가 인생 커피가 된 연유에 대해 깊은 성찰이 들어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 커피가 있다.

 

 

이 취향은 온전한 자기만의 것인지 누군가의 취향이 반영된 것인지 생각해 보더랬다. 유명한 커피, 누가 좋다가 추천한 커피도 인생 커피일 수 있지만. 내가 좋아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의 기분이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 주는 건 아닐까? 자신만의 확고한 취향과 당당함을 가지라는 주문 같았다.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은 어떤 순간일까. 그는 추운 어느 날 합정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던 골목의 한 카페에 들어간다. 늦은 시간이지만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바 근처 테이블에 앉아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무심히 관찰한다.

 

 

 

" '취이이이익'하는 스팀 소리와 '쿠오오오'하고 우유 끓어오르는 소리, '쪼르륵'하며 작은 샷잔에 담기는 에스프레소 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근사하게 들려왔다."

 

 

커피 만드는 소리를 이토록 생생하게 담아낸 아메리카노 만드는 소리가 근사한 음악처럼 들린다. 카페 주인장은 아메리카노를 내밀며 이런 말을 한다.

 

 

"1분만 더 있다가 드세요. 아메리카노는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에 섞는 거잖아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물과 에스프레소는 서로 다른 성분이라서, 서로에게 완벽히 섞이고 녹아들 시간이 필요해요. 그제야 진짜 아메리카노가 되죠."

 

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섞이는 시간의 고찰. 세심한 배려와 미각을 가진 주인장에게 저자는 커피를 배우게 되고,'모티프 커피바'를 처음 구상하던 때로 되돌아간다. 1분의 시간. 아주 짧고도 긴 시간이다. 진정한 아메리카노는 1분의 여유와 녹아듦이 있으면 황홀한 맛을 선사한다. 당신에게 최고의 순간, 최고의 커피는 무엇인가. 오늘 하루 바쁜 시간에서도 잠깐의 행복을 커피라는 마법과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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