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뉴스 - 디지털 저널리즘, 위기의 실체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3
박영흠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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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영흠 교수는 현재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20년에 불거진 검찰과 기자 간의 소위 부적절 관행에 대해 양자 관계를 명백히 '갑을 관계'라고 비판을 한 바가 있는데요. 저는 이런 검찰과 일부 언론의 밀착 관계가 민주주의에 어떠한 긍정적 영향이 있는지 명백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박교수 역시 기성의 한국 언론이 얼마나 권력과 자본에 유착되어 있는지 그동안 끊임없이 발언을 해왔습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여온 언론과 민주주의 그리고 언론 윤리에 대해 저 역시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박교수의 이 글은 최근의 언론 지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론이 디지털 시대에 어떠한 변화를 맞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19년 2월 출간되었습니다.

다소 이른 결론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언론과 시민 간의 건강한 파트너십"이야 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정리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인들이 오로지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친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 일각도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기 보다는 돈벌이와 자신의 얄팍한 권력을 위해 앞선 두 가지를 망각해 왔습니다. 아마도 많은 시민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있어 돈을 추구하고 이익을 우선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심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런 고심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언론과 기자들 역시 과연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가감 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박교수의 이 글은 일관되게 기자들의 윤리관에 대해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언론,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 개념의 형태를 유지하는 이론적 가지들이 어떻게 시장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약간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의 지배적 논리화 과정에서 이 언론도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런 사회적 이익화에 따라 언론 사주들도 돈을 벌고 싶어하고, 그런 측면에서 언론의 독립성이 크게 흔들리고 또한, 자본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생산해, 이를 답습하고 시민들에게 강고한 인식으로 주입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글의 4장인,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자원의 배분을 오로지 시장 논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시장 물신적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되었다"는 주장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헌법적 기초에서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항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에서 만큼은 그저 이상주의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언론이 시민의 권리를 위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제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당위는 그저 책에서만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사들이 환자의 건강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언론인들 역시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겠는데요. 여기에서도 인용된 아마존닷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의 공격적인 워싱턴 포스트 인수를 자본과 언론과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로 뽑고 있습니다만, 더 엄밀히 현재의 언론 기반이 비정상적으로 변화된 것에는 1장과 2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기득권의 권력 강화와 사회 전반에 대한 자본의 물리적 지배력 확대 그리고 이러한 이행들 속에 시민들이 정치 감시와 같은 본연의 의무에 더욱 멀어진 결과가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저자는 이 부분과 있어, 5장에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불신과 회의,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고 뼈아픈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글의 앞선 2장은 '시장이 우선이냐, 광장이 우선이냐'라는 해석으로서 마누엘 카스텔식의 초기 인터넷 공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더 함양하고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어떻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자본의 물리적 지배는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언론은 기존의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보루로서의 역할이 요구되었으나 실상은 자본의 논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정치를 시녀로 만들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하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지배'가 '시장과 경제 전반이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이유로 죄를 지은 경제인들이 풀려나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사법체계-언론-시장'을 삼각 구도로 본다면, 결정적으로 시장이 사법제도와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현실적으로는 통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뭐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정하겠지만 실상은 어떠한지 시민들은 이미 충분히 분석 가능한 수준일겁니다.

따라서, 노무현 시대의 언론들의 광범위한 디지털 진행화가 결국은 민주주의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언론의 사적 지배 뿐만 아니라 자본의 지배 역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정치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너의 밥벌이나 먼저 해결하던가 하라"는 왜곡된 사회적 논법들이 시민들에게 언론과 민주주의를 더욱 멀어지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5장의 맥락을 아우르는 "저널리즘, 민주주의와 분리되다'는 문장은 이처럼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상 대다수 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된 언론을 통한 당리당략을 위한 사적 이익 추구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건전한 공적 토론장'으로서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에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 정치는 18세기 이전의 '교육 받은 남성들에게만 투표 권리를 부여한 영국의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처럼 시민이 노예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직업 정치인이 국민과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정치를 하는 정당성으로 주장들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저들 역시 스스로의 사적 이익에 충실해, 민주주의 자체를 부차적으로 만든 주범이기도 합니다.

클로드 르포르를 포함해,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안에 집 나간 도덕주의를 되찾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덕을 상실한 자본주의'가 과연 시민들에게 '시민 본연의 시민 다운 삶'을 보장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과연 언론과 시민들간의 진정한 파트너 십이 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앞선 분석과 동일하게 회의적입니다. 저자의 강조대로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이 "투명한 증거를 기반으로 진실을 숭배"해야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기사의 독립성 역시, 사주나 언론사 고위층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진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아예 언론 기업 자체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매우 고약한 사정이 있습니다. 자본가의 이익, 자본의 이익추구는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조지 스티글리츠는 한국에 대해, "여느 서구 국가들보다 짧은 시간 내에 신자유주의화가 급속하게 이뤄진 국가"라고 논평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를 위해 언론 자체가 자본에 대해 독립성을 갖고 있어야만 하고 언론인들 역시, 자신의 직업이 어떠한 의무를 갖고 있는지 한번쯤은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이 부유한 지배 계급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또한 주권자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시민들이 생업에 바빠 미처 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임무를 수행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형 규범적 모델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지향성과는 달리 자본 권력으로부터 사회 평등을 보호하려는 노력에는 소홀했다

이러한 재화나 서비스가 무차별적으로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은 사회 정의와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

시민 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 엘리트 집단과 대자본 중심의 지배 연합이 오랜 권위주의 정권 기간 유지해 온 기득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보수 헤게모니는 여전히 강고했고, 디지털 대안 언론의 인기와 영향력은 아직 인터넷이라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변화는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신자유주의 경제 프로그램과 무관하지 않다.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더 깊숙이 결합하고 신자유주의화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시장 논리와 자본의 성장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쳤다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자원의 배분을 오로지 시장 논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시장 물신적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 되면서 한국인의 생활 세계는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다

포털에 이르러 디지털 기술은 비로서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이용자들의 정치적 열정은 포털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전유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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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구하기 - 어떻게 미디어는 '생존'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보루가 될 것인가
줄리아 카제 지음, 이영지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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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카제는 프랑스에서 근래 각광받는 여류 경제학자로, 개발 경제와 정치 경제학, 경제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파리 1대학과 파리 경제 대학 수학한 후, 도미해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여 받습니다. 그녀는 하버드에서 다니엘 코헨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2012년에는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을 공개지지 했던 9명의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2017년 대선에는 사회당 후보인 베노이트 하몬을 지지했습니다. 그녀의 개인사와 관련해. 한가지 유명한 점은 현재 전세계 경제학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은 2014년에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원제, "Sauver les Médias"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7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줄라이 카제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데요. "진정한 민주주의는 극소수 부유층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만으로는 유지되어서는 안 되고, 양질의 민주적 토론을 책임지는 미디어는 부호의 독점적 영향력 아래 있어서도 안 된다"는 서론의 주장입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미디어 전문가, 언론학자들의 입을 통해 언론이 어느 정도로 자본주의의 영향력 하에 있는지 설왕설래에 가까운 평가가 지속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 재벌들 가운데 꼭집어 언급되는 루퍼트 머독의 행적에 있어, 그와 코크 형제와의 긴밀한 관계는 보수주의자들의 단순한 연계를 떠나 정치 자체에는 해악이 될 만합니다. 더욱이 머독은 과거 대처 영국 총리와 긴밀한 관계이기도 했는데요. 이들이 단순히 함께 커피나 마시자고 가까이 지냈던 것은 분명 아닐겁니다. 또한, 아마존닷컴의 설립자이자 CEO인 제프 베저스가 2013년에 미국 저널리즘의 기반인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한 일은 그러한 과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자본에 의한 언론지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만합니다. 이미 미국 정부는 꽤 오래전부터 언론의 소위 경제적 독립을 위해 세금 감면을 비롯한 적잖은 지원을 하고 있기도 한데요.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독립적인 기능은 무척 중요하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카제는 이러한 명시적인 전제 뿐만 아니라, 1장에서 "실제로 기자의 일이란 부분적으로는 지식경제의 다른 주역들이 생산한 지식과 문화재화를 최대한 많은 이가 접할 수 있도록 보급하는 것"라고 첨언하고, 오늘날의 언론의 위태로움이 각 언론사들의 경영 문제로 인한 기자들의 대폭적인 해고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아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부분의 언론 사주들은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앞선 문단에서 인용된 아마존닷컴의 거부 제프 베저스는 보유자산이 대략 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그의 사례는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사주의 존재는 언론사를 보유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것보다는 저자의 언급대로 약간은 취미 생활로 혹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언론사 사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급격한 광고 수입의 하락과 기존의 신문 영향력의 축소로 상당히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단순히 언론사를 일반 사기업처럼 설정해 본다면, 소모되는 각종 부대 비용이 마찬가지로 상당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래서 최근에 언론사들이 거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과 같은 '네이티브 광고'의 제공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느 언론사나 전혀 돈이 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용이 소모되기 마련입니다. 특히, 공익을 위한 목적의 기사들은 기자들에게 거의 돈이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기자들이 견고한 윤리관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현실은 또 이런 이상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과거 전통적인 언론의 책무와 사명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을정도로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물론 기자들과 비교하여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의 경제적 보장에 있어 사회적 동의가 부족한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언론사들이 각종 공적 자금을 지원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그러한 독립적인 위치를 견지할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를 떠받칠 수 있게 되는 맥락일겁니다. 더욱이 기자들 스스로 시민의 이익과 권리에 힘써야 하는 것은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의 1장에서 "미디어 한 곳이 탐사보도 전문기자 한 명을 고용하고 업무를 지원하려면 연간 25만 달러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002년에 미국 보스턴글로브지가 가톨릭 성자의 성추행 사건을 8개월 동안 취재하면서 100만 달러를 지출했다"는 점은 기사 자체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세간의 선입견을 날리기도 하는데요. 현재 우리의 탐사보도만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언론사의 경제적 자립이 왜 중요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앞선 미국의 사례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듯합니다. 특히, 사회의 각종 비리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언론사일 경우 경제적 자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사주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는 소위 독립 언론사의 존재는 작게는 사회 안전과 크게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독립 언론사들은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록 이들에 대한 시민들의 지원은 마땅히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자인 카제는 3장에서 '비영리 재단'에 의한 언론 설립을 지지하고 있었는데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방안이라고 여겨집니다. 국민주를 모집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방법도 한 방안이 될 수 있고, 시민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그에 따라 소규모 계좌 지원을 하는 것처럼 언론사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얼마 없는 그런 소규모 독립 언론의 존재가 얼마간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끝으로, 개발 경제와 경제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경제학자가 그다지 고유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론 독립의 명료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은 꽤 귀담아 들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관련해,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프랑스 언론계의 상황이 상당히 우려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현재 러시아의 푸틴이 자신의 권력으로 언론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있는 것처럼 사실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보장은 언론 자유와 독립 경영일 겁니다. 지난 역사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제일 먼저 언론을 제압하려했던 부분은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에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자라는 직업군의 다수가 돈벌이에 치중하고 있고, 어떤 부류는 정치 권력에 너무 닿아 있어 한 사람의 기자가 언론의 독립을 보호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면 현재 우리의 현실은 아무래도 낙관적인 기대를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요. 저는 기자들에게 전문직에 준하는 보수를 보장하여, 이들이 어느 이익 단체나 어느 정권, 어느 경영자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스스로 원하는 기사를 쓸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약간의 극약처방으로 기자들의 경제적 독립성이 시급하다는 요지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언론에 대한 여러분들의 많은 의견 개진과 관심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의식하는지 못 하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미디어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뉴스 자체에는 늘 관심이 많지만, 프랑스인의 약 4분의 1은 이제 더 이상 미디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미국의 부호들이 점점 쇠약해지는 신문사에 거액을 내놓는다는 이유로 미국 미디의 새로운 ‘도금 시대‘가 도래했다고 환호할 수 있는가?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는 자기자본의 안전성과 투자의 영속성을 통해 미디어의 품질을 보장할 것이다

부호 (또는 대기업)들이 미디어에 쏟아부은 거액은, 독립된 양질의 뉴스를 최대한 제공하는 것에 기반하는 미디어의 기능마저 악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언론사들의) 수익성 증가는 민주주의를 대가로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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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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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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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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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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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작한 미래 - 기후재난과 인공지능, 대학과 강의실, 민주주의와 기본소득, 그리고 코로나19
강남훈.송주명.안현효 지음 / 다돌책방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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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국민 기본 소득'과 관련해, 제안과 설계를 맡은 학자인 한신대 강남훈 교수와 최근인 2월에 경기도 교육감 출마를 선언한 같은 대학의 송주명 교수, 그리고 오늘날 대학 교육의 위기 상황에 있어 언론을 통해 꾸준히 의견을 피력한 대구대 안현효 교수가 모여 아주 얇은 분량의 글을 출판했습니다. 여기 이 책은 최근 전세계의 큰 고통을 안겨준 펜데믹 사태와 더불어 그동안 전지구적 위기로 경고등을 밝혀온 지구 온난화와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독자가 보다 이해하기 쉬운 논법과 대안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총 3장의 분량의 이 책에서 공저자들이 어떻게 글에 관여하고, 어느 정도의 분량을 개인의 역량으로 채웠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글은 평이하면서도 논점은 얕지 않은 수준을 답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의 펜데믹 사태로 인한 사회 변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이 일말의 이해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 글은 지난 2020년 6월 19일 출판 되었습니다.

이 글은 초입에서 케이트 레이워스의 '도넛 경제학'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레이워스의 이 글은 전반적으로 설득력이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신자유주의화로 악화된 '시민들의 경제적 불평등'과 그에 따른 사회 구조의 변화 등을 담고 있지요.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상황에서 갑자기 촉발된 펜데믹은 그동안 이론적으로만 인지하고 있었던 경제적 불평등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요. 우리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들을 통해 인식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천국인 미국이 그리 인간다운 국가가 아님을 극명하게 알게 되었고,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불합리한 의료 보건적 차별은 펜데믹 사태로 말미암아 더욱 두드러지게 됩니다. 이 글에서도 역시 펜데믹 상황에서 미국의 주요 카운티 별로 흑인과 백인, 유색인의 인구 10만명당 사망자 비율을 현지 자료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거의 압도적인 흑인 인구의 사망률은 현재 미국이 어떠한 지경에 있는지 깨닫게 되는데요. 물론 이 자료를 보고 백인이 흑인에 비해 바이러스 면역력이 월등히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은 분명 없을거라 믿습니다.

미국은 우리와는 달리 극명하게 자유와 공동선 즉, 공동 안전에 대한 관념에 있어 이념적으로 혹은 선동적으로 아귀 다툼을 벌인 국가입니다. 물론 중요한 사실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은 둘 다 중요하다는 관점이죠.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스크를 쓸 필요는 없다고 방송에서 일갈한 전직 대통령의 전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공동체 이전에 자신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자유 지상주의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파행은 장 자크 루소가 개념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화주의에 큰 타격이 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공화주의 3.0이나 민주주의 3.0을 대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무슨 소설적 언급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 3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역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사실상 침해한 것이 미국의 사례로 보아 거의 사실로 판명되었다는 점이죠. 일전에 대니 로드릭은 민주주의의 기본적 관념과 가치를 그저 자신의 위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고 언급했었죠. 시장에 대한 민주주의의 역할에 대해서도 로드릭의 관점은 그와 같습니다. 파리드 자카리아 역시 현재의 전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제도의 방만한 운영 혹은 제도의 본질을 무시하고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멋대로 자의적인 해석을 취하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푸틴을 비롯한 권위주의의 대두가 이러한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부패'라는 것은 어느 정도 어불성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민주주의가 그 속성이 부패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방만한 시장 자유가 민주주의에 강요 되면서 발생하는 '견제의 원리' 자체가 소멸된 것으로 봐야겠죠. 더욱이 오늘날 강화된 능력주의적 관점도 이에 한 몫을 했을 겁니다. 하여튼 이렇게 진행된 민주주의의 위기,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이기도 할 텐데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경제적 불평등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 문제는 거의 사회 안전망을 뒤흔드는 원인으로 심화되어 왔습니다. 저는 일전에 작금의 부동산 거품은 언제든 꺼지게 마련이고 호주와 스페인과 더불어 부동산 거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우리나라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었는데요. 아마도 강남훈 교수의 의견으로 여겨지는 부동산 문제의 실질적 해결 방안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여러 기사를 통해 '토지 기본 소득'에 대한 개념을 접할 수 있었는데요. 이 책에서는 "토지 보유세를 늘리는 것이 부동산 문제를 한번에 잡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지만 국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은행 대출 제한이 돈 없는 사람들의 부동산 투기만 제한하는 것에 그치고 있기에 풍부한 여유 자금을 갖고 있는 중상위층의 견제는 사실상 실효가 없었던 것이죠. 이미 미국 알라스카 주는 석유 수입에 대한 주민 기본 배당제를 실시하고 있는데요. 앞선 사례를 토지세에 적용한 것이 강남훈 교수의 제안입니다. 어차피 정기적으로 정부가 전국 토지 조사를 하고 있기에 토지세 부여는 꽤 객관적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한 토지세 수입을 바로 국민 배당으로 하자는 강교수의 제안은 크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다만 이렇게 하려면 기존 경제학계의 이념적 공격을 물리쳐야만 하지만 충분히 불평등한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있었을 겁니다.

여기에 공저로 참여한 세 명의 학자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간의 펜데믹 사태로 인해 무엇보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존재 위기를 겪었던 점은 모두가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던 반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의견'이라는 미명 하에 정권을 쟁취하는 등의 권위주의화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폴란드 우익이 헌법 재판소를 손에 넣으려는 시도나 헝가리의 의회 장악 기도,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사례 역시 우리의 정치가 위중한 상황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의견대로 대다수의 시민들은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신 본연의 삶을 영위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이념적인 의견 따위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맥락 하에 정치인들과 언론 모두는 '공공선'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그런 충분한 의지를 피력해야 하며, 자본주의가 우선이냐 공공선이 우선이냐 이런 문제에 자신들의 이익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펜데믹 사태가 종료되고 나서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실시된 마땅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지속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광범위한 안전 사회라는 분명한 가치를 위해, 민주주의의 정당한 부활을 강조했던 많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 펜데믹의 종말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견제, 그리고 민주주의의 확대가 왜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찰이 무엇보다 중요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58페이지에 인용된 영화 엘리시움에 대한 영문 철자가 오기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 136페이지에는 조사 하나가 탈락 되어 있었습니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이런 편집 오류는 정말 실망스런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신자유주의로 비롯된 불평등은 코로나19 전보다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이 불평등은 다시 미완의 민주공화국, 우리의 역동적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심각하게 침식할 것이다

그런데 제도적 민주주의가 여전히 약하고, 가장 신자유주의화되어 있는 한국에서, 권위주의적이고 강제적인 통제가 아닌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코로나19 방역에 독보적인 성과를 냈다

민주적 시스템과 시민성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곳에서 집행권력이 지나치게 과도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으면서 함께 막히는 개인의 권리, 단호한 방역 전문가의 처방과 이에 대한 민주적 합의, 어제까지의 민주주의에서 당연했던 것들과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감염병이 더 자주,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 방어가 성공해 자본주의의 덩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 보유세와 토지 기본소득은 불로소득을 걷어내고,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며, 불평등을 줄여 한국 경제에 오랜 부담이었던 큰 숙제를 풀어줄 수 있다

공식에서 부동산 소유 수익을 줄이는 효과적인 대책은 보유세를 늘리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3년 만에 20억 원 가까이 자산이 늘었다면,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정도의 부동산 불로소득은 사회를 분열과 붕괴에 빠뜨릴 만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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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공부 - 개나 소나 자유 평등 공정인 시대의 진짜 판별법
얀-베르너 뮐러 지음, 권채령 옮김 / 윌북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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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바트 호네프 출생의 얀-베르너 뮐러는 정치사상사와 정치이론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그는 베를린 자유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는데요. 또한, 그는 최근 베를린에 설립된 바드 자유 예술 대학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이에 독일 같은 경우는 2차 대전 당시 파시즘의 영향으로 현재까지 독일 학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으며, 미국보다도 더 사회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한데요. 이와 관련해, 뮐러 역시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위기, 즉, 우익 포퓰리즘의 선동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내고 이를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주의와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해 학자로서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정치학자로서의 풍부한 인용과 더불어 정확한 논증과 결말로 마무리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는데요. 그저 제법 잘 쓴 학술서로서가 아니라 이 책은 모든 시민들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떻게 건강한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훌륭한 해답이 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글은 원제, "Democracy Rules"로 지난 202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2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국역된 것으로 보이는 책의 부제에 대해 저렇게 자극적인 표현으로 정했어야 했나 의문이 듭니다. 아마도 출판사의 책 판매고를 위해 저리 쓴 모양인 것 같지만 책을 구입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미 책 내용은 저런 묘사가 없어도 너무나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아직도 저를 포함한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하는데 있어 적잖은 어려움을 느낄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동안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 샤츠슈나이더 등과 같은 훌륭한 정치학자들의 글을 통해,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인류에게 정지체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규명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지 파파차리시가 언급한 민주주의의 대한 명료한 정의로서, "모두가 평등하게 자유를 누릴 권리"라는 문장을 계속 되내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이 글의 저자인 뮐러 역시 2장에서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는 문장에서 파파차리시와 거의 동일하게 이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평등한 자유'라는 단어의 울림은 꽤 오랫동안 제 마음속에 기억될 것 같습니다.

이에 저자는 작금의 '우익 포퓰리즘의 왜곡된 선동 정치'에 따른 민주주의의 혼란에 있어 대의의 측면에서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모든 시민이 정치 체제의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입지를 누려야 한다"는 매우 중요하고 침해 당할 수 없는 테제입니다. 저자가 이렇게 강조하게 된 연유에는 "시민은 정당과 언론의 혁신 방안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논리가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앞서 제가 강조했던 대로 오늘날의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와 건전할 필요가 있는 정치체의 왜곡은 바로 '우익 포퓰리즘 내지는 극우 포퓰리즘의 발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네덜란드의 저명한 포퓰리즘 연구자이자 정치학자인 카스 무데보다 더 실용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글의 1장과 2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는다면 서두의 두 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존의 엘리트 지배체제의 소위 고인물 정치로 많은 시민의 불만으로 점철된 현재의 우리 정치는 다분히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공격 거리가 되었습니다. 저 포퓰리스트들이 정치 체제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역시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마땅히 발언할 수 있는 권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외형을 갖고 있다고 봐야할 텐데요. 여기에서 시민들이 먼저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는 부분은 우익 포퓰리즘과 그 안에 있는 포퓰리스트는 스스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을 뿐이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정치적 선명성을 갖고 양심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적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는 것인데, 표면적으로는 항상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왜곡된 보수주의와 그 맥락이 유사합니다. 이를테면 보수적 권위주의라든지 과거의 매카시즘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많은 시민들이 일종의 정치적 딜레마로 여길 수는 있겠지만 저자의 의견대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이상 건전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상 진실에 가깝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는 어처구니가 없게도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적 이익이라는 숨겨진 의도를 갖고 기존 체제를 심지어 악으로 비난하는 것으로 이들 포퓰리스트들이 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행태일텐데요. 그럼에도 저 포퓰리스트들 역시 비난해 마지 않는 소위 엘리트 지배체제와 다름없이, 저들 역시도 좋은 교육과 사회적으로 많은 인맥을 쌓아 돈과 권력을 동시에 얻은 기존의 기득권 엘리트들과 하등 다를바가 없다는 점이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도 거의 가감없이 언급되는 도널드 트럼프의 충실한 대변자였던 스티브 배넌의 전반적인 발언들을 통해 저자는 포퓰리즘 정치의 실체를 가감 없이 밝히는데 노력하고 있는데요. 트럼프는 펜데믹 초기 워싱턴의 실패와 관련해서, "이런 실책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국민에게 어떤 종류의 공감이 애도의 말도 건네지 못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었다"고 2장에서 그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일독하고 들었던 생각은, 과연 도널드 트럼프가 전염병에 희생된 국민들에게 애도를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고 느꼈는데요. 이미 여러 논저들을 통해 트럼프가 일반적인 공감 능력이 결여된 극도의 나르시스트로 그려진 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전반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듯한 1장 초입의 등장 인물들, 즉, 오르반 빅토르, 에제프 아이이프 에르도안, 야로스와프 카진스키, 나렌드라 모디, 도널드 트럼프, 베냐민 네타냐후, 자이르 보오소나루 등은 사뭇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푸틴의 이름까지 넣는 것이 마땅하겠죠. 이들 포퓰리스트들의 여러 해악들 가운데 가장 큰 해악은, "저들의 진짜 국민과 가짜 국민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 논리"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기존의 엘리트들에 비해 도덕적으로 이미 우월하기 때문에(자신들은 기존 엘리트 지배 체제에서 만연된 정치 부패와 무능과는 일절 관계가 없다는 식입니다) 마땅히 다수 시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규정하면서 이런 중차대한 상황에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은 다수의 국민들을 적이나 다름 없는 비국민 논법으로 치부하는데 이르는데요. 이 포퓰리스트들이 얼마나 카를 슈미트를 섭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 이러한 논법들은 파시즘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더욱이 여기에 증오를 더 부추겨, 이주민들에 대한 극도의 혐오 발산은 앞선 우리의 국민이 아니라는 극악의 이분법과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런 표면적인 정치적 상황 만으로 시민들이 파시즘을 지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진지하게 단언하는데요. 물론 이 글 3장에서도 짤막히 언급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철회할 생각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논리일겁니다. 이렇게 사회에는 반민주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지만 이들이 주요한 정치 세력이라고 보기에는 실상 한계가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요. 물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파시즘과 저자가 미헬스의 입을 통해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과두제는 매우 친숙한 관계라는 점은 이 글을 일독하는 모든 분들이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은 작고한 역사학자인 토니 주트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언급하고 싶습니다.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너저분하고 짜증나는 민주주의를 증오했던 카를 슈미트는 생전에 그렇게 자신을 위해 자기 변명에 나섰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극단주의자들의 사상적 매파가 되었습니다. 나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전부 적이라는 개념의 이식 내지는 확대는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의 위기에 놓여 있는지 실로 가늠하게 합니다. 일전에 많은 인용을 했던, "리버럴을 포함한 진보주의를 격멸의 대상으로 삼았던 티파티"의 존재와 현재 미국 내의 극심한 인종 차별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고 봐야 하는 BLM Black Lives Matters 운동과 이와 유사한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멸 등은 마치 "선거에 패한 패자들이 마땅히 어떠한 보복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언급하는 이면에는 어떠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있는지 대변하고 있는 듯 한데요. 이와 동일하게도 우리가 포퓰리즘을 지지하고 그것에 귀를 기울인 시민들을 절대 대적하지 않아야만 하는 당위가 바로 앞선 부분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설득력 있는 주장대로 포퓰리스트 편에 선 시민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들을 선동한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더러운 의도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선동을 당한 많은 시민들에게 결코 그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여기는데요. 어쩌면 거듭 진지한 논의로서 민주주의의 필요불가결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3장의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 인프라"는 무엇보다 시민들 서로 간에 "광범위한 토론'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서로 검증하여 토론하고 더 나아가 리처드 번스타인이 새롭게 규명했던 '가류주의'와 거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나 주장이 오류나 터무니 없는 거짓으로 판명되었을 때, 그것을 즉시 철회하고 올바른 사실과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의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시민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합법적인 불복종 운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더불어 '주민 소환제'를 추천하고 싶은데요. 저자의 강조대로, "서로 다른 두 정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는 것 만으로는 우리 대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약간의 참고로 추첨 민주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제기된 그런 민주주의가 실효성이 있기는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투표를 통해 정치 권력을 교체하는 시스템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전형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제도적 문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매개라고 볼 수 있는 언론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자유와 평등은 명문화된 헌법의 보장만으로는 이 절대 가치들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는 먼저 언론이 제 일을 다하고 있는지 견제하고, '경제적 이익을 얻고 싶어하는 언론 사주'를 어떻게 언론의 중요한 기본적 의무와 분리할 수 있을지 먼저 고심해 봐야 할 텐데요. 아마도 이 지점에 시민들의 합법적인 불복종 운동이 명분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선출 권력의 소환'이라는 주민 소환제 역시 구상해 볼 수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하는데요. 현재의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지게 된 연유에는 산업 자본주의가 근 백 년 동안 자신들이 투입한 돈으로 언론을 통제하는데 노력을 기울였기 떄문입니다. 물론 자본가들이 민주주의를 길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 보장과 안전망 구축을 위해, 그리 나섰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불행하게도 현 시점의 언론은 자본의 광범위한 통제를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부(富)로서 사회의 맨 꼭대기에 자리한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지속적인 부의 창출과 되물림을 위해, 신자유주의와 언론, 가용할 수 있는 자본의 삼위일체로 발화된지 오래인 상황입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기본적으로 사적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 마땅히 중요하지만 정치 전반이 자본주의에 종속된 상황으로서 근본적으로 시민 다수가 용납할 수 없는 불평등한 자유를 거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점이 정확한 현실 분석일 겁니다. 


현재 우리가 마주한 민주주의의 실체적인 축소화 혹은 경량화는 대의 민주주의가 내재한 정치적 한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반대만을 위한 투표가 전세계에서 횡행하고 있는 상황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텐데요. 좀 더 최악인 상황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맹점만을 교묘히 공격하여 정치적 이익화에 나서고 있는 전세계의 포퓰리즘이 저자가 우려하는 데로 오로지 반대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혹은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치를 제외하면 현질 정치에서 어떠한 것도 남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울며겨자 먹기로 권위주의적 과두제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인데요. 그럼에도 저자는 아직까진 우리의 민주주의에 희망이 있다고 역설합니다. 아마도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가 그렇게 쉽게 으스러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러한 심각한 불평등의 상황에서도 많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고 다른 건 몰라도 정당의 비민주주의화와 대의제 민주주의 전반을 어느 정도는 감시하고 있기 떄문일겁니다. 물론 버틀란드 러셀의 아주 찬란한 희망대로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정치 체제가 시민들에게 나타나는 것도 좋은 일일겁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더이상 우리 민주주의가 누더기가 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감시에 나서야 할 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동안 우리와 같이 세상을 살다가 간 사상가들이 무엇보다 정치적 분별력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존 듀이의 거친 희망대로 우리가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 이러한 논저를 정말 완벽하게 번역한 역자에게 자리를 빌어 감사하단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개 독자로서 역자들의 숱한 노고를 익히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만, 과거 일제 치하에서 대다수 노예주와 같은 일본인들은 너희와 같은 조선인들을 천황 폐하가 가엾게 여겨 제국의 신민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이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어떠했습니까. 조선인들은 대부분 이등 국민이었죠.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진짜 국민 가짜 국민의 논법이 저런 일등 국민 이등 국민의 논법과 하등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다 겉으로는 꿀을 바른 듯 사탕 발림으로 현실을 현혹하려 들지만 내포한 실상은 화자의 이익을 위해, 여지없이 휘둘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이래서 극우 포퓰리스트의 선동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증오와 분노 정치에도 결코 눈을 돌려서도 안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입니다.

그 어떤 오래된 시민교육 교과서를 봐도 ‘권력자를 잘 감시하는 것이 훌륭한 민주 시민의 덕목‘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도 요즘은 그런 행태가 바로 ‘포퓰리즘적‘이고 따라서 민주주의와 법치에 해롭다는 것을 우리 모두 끊임없이 주입받고 있다

또 항상 대비책으로 투표 억압 등의 전략을 구사하여 실질적으로 소수 독재 체제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이는 공화당이 존경한다고 주장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면서 깊이 우려했던 시나리오다

많은 이들이 적어도 오르반이나 트럼프 부류가 민주주의를 해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렇게 과두정 체제의 지배 계급이 우익 포퓰리즘 정당에서 긍정적인 점을 찾아내는 이유는 그 정당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나라 잃을 공포‘를 부추기면서 자기 생각에 ‘진짜 국민‘이 아닌 이들을 정치 체제에서 퇴출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반면 포퓰리스트는 ‘누가 국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언제나 하나뿐인 답을 이미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것, 반박 불가한 팩트라고(어쩌다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정답이라고)여긴다

우익 권위주의 포퓰리스트는 모든 시민이 진짜 국민이 아니라는 늬앙스를 풍긴다. 어떤 구성원은 아예 국민에 속하지 않고, 잘해봤자 이등 시민이라는 것이다

나쁜 점은 진정한 ‘비존중‘의 평범한 무교양보다 훨씬 더 민주 정치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거는 정부를 상대로 집단적 찬성 또는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주도해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발언이나 전례 없는 정치 조직 등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회인 것이다

스티브 배넌은 2016년 대선 당시, 혹시 상대 후보가 승리하면 "완전히 엿을 먹여서 통치 행위라고는 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백업 전략"이라 선언한 바 있다

실제로 일부 동료 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의 시민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이성적이고 식견이 부족한지를 계속해서 증명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듯 하다

평등한 자유가 실재하는지 여부는 헌법의 모호한 약속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필수 인프라, 즉 정당과 시민사회, 언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내부적으로 민주주의가 결여된 정당은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에 따라, 여러 나라의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마침내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관점부터 ‘페이스북은 파시즘‘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인터넷의 영향력에 대한 의견이 양극단을 오가는 광경은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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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선택 - 지배인가 리더십인가
Z.브레진스키 지음, 김명섭 역주 / 황금가지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폴란드계 미국인으로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의 국가안보좌관을 지낸 인물입니다. 국제문제에 있어 미국 내의 대표적인 현실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그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서유럽간의 비정부기구로 알려져 있는 삼극위원회 Trilateral Commission 의 주요 참여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브레진스키의 대해 알려져 있는 그의 정치적 견해는 진보적, 국제적 및 정치적 자유주의의 신봉자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측면에서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주요 요직을 아우른 네오콘들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국제 관계에 있어 큰 그림을 그리는데 능숙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중동과 이스라엘간의 정치적 갈등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그가 지난날의 발언들로 인해 다소 친이스라엘적인 인물로도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미국에 의한 중동 개입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비판적 의견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약간 놀랍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책이 출판된 해를 감안한다면 현재의 국제 환경과 상당히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미국의 패권과 그러한 과정에 미국이 중요하게 판단해야 될 가치들을 꼬집어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크게 일독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그는 지난 2017년 5월 26일에 버지니아에서 89세의 나이로 타계합니다. 이 책은 원제, "The Choice : Domination of Leadership"으로 지난 200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의 번역 출판도 2004년에 이뤄졌습니다. 현재 이 글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강고한 반공주의자였던 브레진스키에게 냉전 이후의 전세계 국제 환경의 변화라는 주제는 아마도 그에게 어떤 중요한 학문적 단초를 제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패권이 과거의 소련이라는 거대한 적대국을 대상으로 서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생존과 번영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 시기 이후부터는 후쿠시마가 선언한대로 미국에게는 완전히 다른 환경의 조건과 더불어 어쩌면 미국의 패권이 온전히 미치는 세상이 될 가능성도 거의 배제할 수는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러한 예측은 2001년 9. 11과 그로 인한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퇴색되었습니다. 브레진스키가 강조하고 있듯이, 세계를 선과 악으로만 보는 조지 W. 부시의 가장 큰 실책은 실제로 세계의 본질은 '온통 회색지대'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언급한 이 회색지대라는 수식이 뭔가 국제적 현실주의자들에게 잘 어울리는 인식적 배경으로도 읽혀졌는데요. 미국 내의 다수의 리버럴적인 이상주의자들에게는 이 회색지대가 결코 잘 어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따라서 브레진스키의 이 글은 앞선 중요한 관점으로 당시(2000년대 이후) 미국 패권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중요한 방향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요.

아마도 중동과 러시아 및 중국에 이르러 별로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는 미국의 전세계에 대한 리더십의 조건은 아무래도 다소 논란을 함의하고 있는 글 3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데요. "미국의 리더십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전지구적이고 포괄적인 이익을 반영해야 하고 효율적이어야 하며 반드시 비슷한 대중적 신념과 사회적 가치를 지닌 동맹국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인용된 문장의 후자에 대한 부분은 아마도 중동 전체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서 서유럽과 미국이 보이는 극명한 정치적 인식 차이일 겁니다. 서유럽은 팔레스타인의 문제가 이스라엘의 강고한 군사적 무단 점검이 원인이라고 보고 있지만 미국은 그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에게 이 이스라엘의 존재가 이 지역의 전제적인 중동 정권들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억측일 수도 있지만 "1974년부터 이스라엘에 800억 달러의 원조를 지원"한 것은 여느 미국의 동맹국과는 사뭇 다른 대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약간 불행하게도 브레진스키는 미국에게 있어 이스라엘의 전반적인 정치경제적 효용성을 논하면서 미국에 있는 거대한 유대인 조직의 존재와 그들에 의한 미국 정치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보고 있었는데요. 이건 아주 단적으로 말하면 유대인 단체인 AIPAC의 광범위한 현금 로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 스티븐 M. 월트와 존 미어샤이머는 공저를 통해 이를 비판한 바가 있었는데요. 과거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도륙된 600만의 유대인들의 존재는 매우 불행한 역사이나, 현재 이스라엘 주변의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영국과 미국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예루살렘 인근에 박힌 이 국가의 존재는 지역 안보 불안의 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자 지구의 불법 점거라든지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고압적 태도는 이러한 맥락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물론 하마스와 같은 자들을 잊고 잇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북아일랜드에서 IRA에 의해 자행된 참혹한 테러에 맞대응을 하던 영국이 이후 관점의 전환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이스라엘도 종래의 경직된 대처에서 지역 평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나서야 하겠으나 이스라엘의 국내 정치가 복잡한 모양새도 해결의 접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종래에 조지프 나이가 인정했듯이, 중동에서의 미국의 외교적 접근법이 주로 사우디 정권과 같은 부패한 전제적 정부를 지지하며, 지역 내에 현상 유지를 강조한 쪽으로 나선 것은 대다수의 착취 상태에 놓여 있는 해당 국가의 국민들에게 도저히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서유럽과 미국 심지어 동아시아의 에너지 수입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동 산유국들의 정치적인 미국 의존성이 전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안정적인 원유 생산은 자유 진영의 경제적 번영에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사항으로, 어떻게 보면 미국 국무부가 이들 지역의 이슬람교의 종파적 문제와 정교일치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들 부분이 2003년의 패착에 주요한 원인이 되었고 지금도 중동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지속적인 현상유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에 대한 해당 지역 국민들의 반감은 극을 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맥락에서 테러리즘의 발상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결론에 가까운 관점에서 브레진스키가 색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실질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이식은 그야말로 무신론적인 사회를 의미한다"는 분석이었습니다.이 지역은 터키를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이슬람 율법이 뿌리 깊게 작용하는 사회입니다. 브레진스키의 말마따나 율법의 지배에서 점차 벗어나려고 하는 이란을 제외한다면 강고한 정교일치의 사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서 유일하게 핵무장을 하고 있는 파키스탄이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발화될 수도 있다는 저자의 경고는 섬뜩하다고 볼 수 있었는데요. 다만, 내부의 이슬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이 자신들의 제1 우호국이라고 할 수 있는 파키스탄의 교조주의적 근본주의화에 손 놓고 구경만 할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중국 당국은 북한의 핵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핵무기도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문제로 여길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크게 간과하고 있듯이, 핵전쟁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은 가까운 미래의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재래식 교전이 될 것입니다. 브레진스키도 이를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유심히 보게 될 수밖에 없었던 3장, '동맹 관리의 딜레마'는 분명 비판할 부분이 있었는데요. 세계 제1의 패권국이 국력과 그 영향력에서 비대칭적인 관계로 유지되고 있는 '비대칭 동맹'에 있어 미국의 우선주의와 이들 동맹들간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국 내 극우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이러한 경향이 더욱 고조되었죠. 물론 안 좋은쪽으로 말입니다. 다만 제가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미국이 위협당한다면 해외의 민주주의는 더 취약해질 것이다"라는 브레진스키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미국의 여러 동맹들의 정치적 상황과 지역별로 이들과 미국 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 시사점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특히, 중국의 대두에 맞서 일본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는 점이 전반적인 논증에서 읽힙니다. 중국은 일본의 재무장 자체를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일본이 800 톤이나 되는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은 아무래도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중국의 봉쇄와 그 일면에 부정적으로 잔존하는 미국의 '애매한 핵우산 정책'에 실망하게 된 일본 정부가 언제든지 핵무장에 나설 수 있는 '현실적 증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통일된 한국이 핵무기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과 더불어 일본의 핵무장 역시 관련 전문가들과 기술이 충분히 갖춰져 있기 때문에 5~6개월 내에 일본이 충분하게 핵무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해당 지역의 미국의 정책 변화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가늠하게 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이 곳의 군을 즉시 철수하게 되면 19세기의 유럽 상황과 비슷해질 것이라고 보는 브레진스키의 예측은 그만큼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다만, 우리와 관련된 정치적 분석에 있어, 기존의 저팬 핸들러들과 아주 동일하게 판에 박힌 인식은 절로 눈살을 찌푸려지기도 했는데요. 한반도에서 민족주의가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었는데요. 한국의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친미적이면서 그 이면에는 반일이 기반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현대화 된 민주주의 국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민족주의를 취급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제가 이 지점에서 반일이 터무니 없다고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반일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되었는지 저자가 일말의 고찰을 해보긴 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선 중일관계에 있어 난징학살과 같은 극악한 전쟁 범죄를 일으켜 놓고도 중국이 일방적으로 일본에게 사과만 요구한다는 식으로 읽히기도 해서 절로 한숨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역으로 만약 2차 대전 당시에 멕시코가 미국을 강제 점유해, 몇 십 년 간 인력과 자원을 빨아내면서 심지어 역사와 문화조차도 말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멕시코 당국이 움직였다면 지금의 미국인들이 과연 멕시코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실로 궁금합니다.  

끝으로 4장의 '세계화의 딜레마'에서 논증되는 브레진스키의 의견은 매우 명확해 보입니다. "세계화가 힘 있고 특권 있는 자들에게 유리하다는 점"은 반대의 근거를 위해 각계 각층에서 항변을 하겠지만 이 점은 달리 이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세계가 당면한 불평등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고착화의 문제를 넘어 수십 년간 정치에 악영향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5장에서 논의되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봉착할 도 있는데요. 브레진스키는 4장에서 반세계화의 물결이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식으로 방어 논리를 구축합니다. 분명 이 지점에서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것은 이 세계화의 이익이 서구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의 동맹국들에게 집중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지금의 중국의 번영은 신자유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끔 중국을 키워낸 결과로, 이 중국의 사례는 매우 드문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반세계화 물결과 반미주의를 도식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종래의 여러 시각과 다름 없는 것이어서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기도 했는데요. 앞선 중동의 사례처럼 브레진스키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미국에 있어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포함해 분명히 전세계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장 말미에 논의가 되는 '민주주의의 확대와 도덕적 근간의 외침'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에는 '자유 무역'과 '자본의 이동성'을 언급하며, 이것들이 그저 지도적 원리로 남겠지만 "개별적인 정치, 경제, 사회, 제도적 제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나라에 그 원리들을 무차별적으로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꽤 감명 깊었습니다. 그리고 세계화가 "인간 조건의 향상을 위한 좋은 기회로 다루어야 한다"고 언급한 부분은 이러한 논증의 전개가 실로 진정성을 답보하고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이러한 브레진스키의 후반부 논의들은 특히 미국 내의 극단주의자들이 귀를 열고 경청해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또한, 세계가 그만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이민과 같은 변화에 있어 각자가 민주주의에서 강조하는 다원주의적 원칙을 유지해야 하는 부분과 세계화에 있어 서유럽과 미국의 경험을 그렇지 못한 국가들에게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 보는 관점도 적극 동의할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식 민주주의의 매혹적인 성공이 세계화를 통해 확장되면 미국의 힘이 지닌 효율성과 정당성이 강화될 것이다"는 문법 또한 꽤 감동이었습니다. 이런 논저에 일개 독서인이 감동 운운을 언급해도 될지는 모르겠으나 글의 마지막 부분인 5장과 결론은 미국과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에 있어 꽤 훌륭한 접근과 해결책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기존의 조지프 나이의 방안들보다 좀 더 발전된 논의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45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브레진스키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서유럽의 나토와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일차적으로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는 당위로 이차적으로는 소련의 봉쇄를 위한 정치외교적 해법으로 동시에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두 지역에서의 동맹 관계의 시작은 현재의 민주주의 진영의 번영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안타깝게도 냉전 이후, 나토의 확장에 있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가입을 용인할 수밖에 없을거라는 브레진스키의 예측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주장을 예시로 들어, 그 당시의 나토 확장은 낙후된 중부 유럽 국가들을 살리고 그와 동시에 시대의 소명으로까지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불행한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또래 강국의 견제를 받지 않는 정치적 힘을 소유한다는 이유로 미국은 부러움, 분노, 때로는 강렬한 증오의 초점이 된다

국무부를 통해 다른 국가들의 행동을 인준하고자 하는 미국 의회의 경향을 보면 자국의 주권에는 방어적이고 민감하면서도 다른 국가의 주권은 점차적으로 무시해 버리는 오늘날 미국인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 16장에 묘사된 아마겟돈은 핵과 세균에 의한 전 지구적 자멸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 안보를 위한 국가의 정당한 노력이 망상증인지 신중함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미국 의회가 유럽, 극동, 페르시아 만이라는 3대 주둔 지역에서 미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결정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앞으로 몇 해 동안은 러시아와 안정적인 상호 핵 억지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 정책 결정자들의 주요한 안보 책임으로 남을 것이다

소위 ‘불량 국가‘들도 자신을 드러낸 채 미국을 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며 미사일 발사의 경우가 분명히 그렇다. 미사일 공격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의 무서운 보복을 초래할 것이며, 이러한 보복으로 미국에 대한 어떠한 2차 공격도 불가능할 것이다

의회가 북대서양 조약을 승인함으로써 미국 국가 앙ㄴ보의 의미와 범위는 근본적으로 재정의되었다

특히 국가 간의 문제에서 증오와 편견은 동정심과 친화성보다 훨씬 더 강한 감정들이다

세계를 흑백으로 보는 시각은 대부분 회색 지대로 이루어진 전 지구적 딜레마를 무시하는 것이다

북한의 위험한 핵 추구와 이를 확산시키려는 시도는 동북아시아의 지역적 맥락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이익을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고려해야만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국내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고 싶다면 국외에서도 생명과 자유의 우월함이 지닌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현대 서구 민주주의는 이슬람주의자들이 볼 때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대다수 이슬람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연방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이 미국에 계속적으로 의존하는 안보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그리고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임재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영속화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 모스크바의 노력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대신 이란의 엘리트들은 서유럽이 이란에게 지역적으로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며 조국이 성공적인 근대화와 민주화의 경로를 밟을 수 있다고 인식한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인 이유는 미국을 인권의 증진에 헌신해 온 진정한 민주 국가로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전략적 사고 방식을 지닌 유럽인들은(사담 후세인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독단적인 결정을 두고 수면 위로 떠오른 논쟁에도 불구하고)미국의 일방주의가 미국의 독특한 안보 역할의 한 부분이며, 경제적, 법적, 도덕적, 안보적 동기를 쉽게 구획지을 수 없는 세계에서 ‘할 수 있다(can-do)‘는 미국의 자세를 보존하려면 썩 내키지 않더라도 인내하는 것이 나머지 세계가 지불해야 할 대가임을 깊이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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