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코의 유쾌한 암투병 일기 - 괜찮아, 잘 될 거야!
자오따비 지음, 은송희.정선옥 옮김 / 넥서스BOOKS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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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약중독 투병기 <해독일기>에 이어 읽은 책입니다. <왕코의 유쾌한 암투병 일기>는 타이완의 젊은이가 호지킨 림프종으로 진단받고 항암치료가 끝날 때까지의 과정을 담았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투병일기는 대부분 의사 등 의료인이 쓴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의학적인 내용들이 중심을 이루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이나 타이완의 자오따비와 같이 의료인이 아닌 사람의 투병기에서는 치료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가 중심이 되는 경향입니다.


자오따비군은 25살 난 젊은이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가장 힘들다는 해군 의장대에서 복무를 하던 중에 목에 땅콩만한 결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위내시경검사를 한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위내시경을 할 때 진정제를 맞고 수면내시경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타이완에서는 진정제 없이 그냥 하는 모양입니다. 자오군은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고 적었는데 겪어보지 못했을 강간에 비유한 것은 과장이 지나친 듯합니다. 저 역시 아주 오래 전에는 진정제를 맞지 않고 내시경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견딜 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식도내시경검사를 받았을 때도 마취주사를 맞았다면 조직검사를 하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었을 텐데 마취에서 깨어날 때 숨을 쉴 수가 없었다는 것도 과장이 지나친 듯합니다. 어쩌면 저자의 이런 호들갑이 독자들에게 먹혀 인기를 끌게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럭저럭  하다가 두 달이 훌쩍 지나갔는데 목에 생기 결절이 갑자기 훌쩍 자라서 골프공 크기가 됐더랍니다. 그때서야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아서 암센터를 찾게 되었답니다. 어떻든 그렇게 찾아가 병원에서 당장 입원하라 해서 16일 동안 입원하는 사이에  두 차례 수술을 포함해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 반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는 강제로 입원을 당했다고 합니다만, 정신질환도 아닌 일반 질환을 강제로 입원시키는 나라는 없을 듯합니다.


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조직검사결과를 듣고 자오군은 '청천벽력'  무언지 알게 됐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틀에 한번 씩 아침에 일어나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저 역시 건강검진의 결과가 수상하게 나왔을 때부터 일기를 썼습니다.


치료과정을 보면 2주일에 한번 꼴로 항암치료를 받고 후반에 가서는 방사선 치료도 받게 되는데 중간에 한 차례 외박을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도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점입니다. 열두 번의 항암치료 과정 가운데 절반인 여섯 차례를 마치는 동안 109일이나 입원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항암치료를 입원이 아니라 낮 병동에서 받고 바로 퇴원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든 자오군은 입원해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대학에 다니는 애인과 부모님 등 가족즐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게 됩니다. 그런 점에 자오군의 낙천적인 성향이 어우러져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지 싶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오군은 일기를 쓴 것은 가족들이 읽고 치료과정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남습니다. “글 속에서는 일부러 더 재미있게, 별일이 아니라는 듯 잔뜩 여유를 부린다. 부디, 이 글을 읽고 가족들이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길 바라면서...(34)”라고 일기를 쓰게 된 이유를 적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기특하기만 합니다.


젊은이의 감각적인 글과 사진 만화 등이 듬뿍 들어있어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암질환은 중년 이상의 나이든 환자가 많은 점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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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 일기 안온북스 사강 컬렉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백수린 옮김 / 안온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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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수술을 받게 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투병에 관한 심경을 써놓았지만 경과가 안정되면서부터는 초등학생들처럼 일상적인 일들을 적었습니다. 우연히 프랑수와즈 사강의 <해독일기>을 읽으면서 일기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와즈 사강은 1957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875라고 하는 모르핀 대용약제 팔피움을 매일 처방받았다는 것입니다. 통증이 불쾌할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을 것입니다만, 뒤에는 견딜만했음에도 약을 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석 달 뒤에는 약물중독 증세가 심해져서 전문의료시설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해독일기>는 이 기간에 썼던 것인데 뒷날 발견하고 출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기간에도 일기를 썼을까요?


<해독일기>는 약물중독 치료시설에 입원한 다음날부터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날짜를 적은 것이 아니라 요일만 적었는데 가끔 건너 뛴 것을 보면 매일 적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입원 이틀째인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한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다음 날 퇴원한다고 적은 것을 보면 11일 동안 입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날 하늘은 파랗고, 포플러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지만 시골에 와 있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는다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요양시설이 시골에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끔찍한 밤이라고 이어 적은 것을 보면 한밤에 간호사를 찾아 그것(앰플)을 받았다고 적었습니다. 약물을 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통증에 시달렸다고 하소연 한 것 같고, 간호사는 약을 주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을 테니 더는 이런 식으로 학대받고 싶지 않다. 통증은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그리고 두렵게 만든다라고 일요일 밤 사건을 정리했습니다. 통증을 호소한 것은 마약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것인데 마치 의료진이 주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입원하던 토요일 밤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월요일에는 약물 없이 13시간을 버텼다고 적었습니다. “흔히 말하듯 심장이 쿵쿵댄다. 속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려는 마음이 시작된다. 유일한 해결책은 정말 고통스러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19)”라고 적은 것을 보면 마약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가 읽힙니다.


그리고 오로지 문학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도 중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그래도 나는 글 쓰는 게 몹시 좋다(27)”라고 이야기합니다. 화요일에도 발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약을 달라는 몸의 욕구와 이를 제지하려는 이성이 갈등하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그런 자신이 끔찍했던 모양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자신을 한탄하면서 술 또한 마약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주정뱅이 형제들, 파리의 밤을 함께 했던 사람 좋고 다정한 무리들이여, 이제는 더 이상 당신들을 이 바에서 저 바로, 이 자동차에서 저 자동차로 따라다니지 못하겠군요, 아니면 술을 조금도 마시지 않고 따라다니거나. 하지만 그건 안 될 듯해요. 그런 건 슬플 것 같거든요.(35)”라면서...


목요일에는 절반의 약물로 욕구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결국은 퇴원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하찮은 일기를 쓰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내 문학 활동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56)”라고 적은 것을 보면 입원해있는 동안 그녀를 괴롭힌 것은 소설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나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65)’라고 적었습니다.


열하루에 걸친 심경을 적은 일기는 책으로 묶어낼 정도의 분량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을 곁들인 그림일기를 만들었는데 다양한 모습의 여성의 알몸을 굵은 선으로 그려낸 그림이 글로 향하는 시선을 빼앗지만 그런 행동이 못내 민망해서 다시 글읽기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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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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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저지대>의 인연이 이어진 책읽기였습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가 상당히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읽는 호흡이 조금 수월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전작들처럼 차우셰스쿠 정권의 탄압에 시달리는 루마니아의 독일계 소수민족들의 애환을 그려냈습니다. 그 무렵 루마니아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독일계 주민들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데, 정부에서도 나서나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작중 화자인 빈디시가 방앗간의 야간경비원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저들은 닭이고, 달걀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아가고 있어. 심지어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옥수수까지 빼앗아가는 판이야. 언젠가는 자네 집과 마당까지 빼앗아갈걸.(111)”


독재정권의 횡포에 시달리던 독일계 소수민족은 서구세계로 이주를 원했고, 독일 정부도 이주민 한 명당 많게는 팔천 마르크까지 루마니아 정부에 지불하여 이들의 이주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지원금을 받아 챙기고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독일계 소수민족들이 여권을 발급받기 위하여 무슨 짓을 하는지 서술해냈습니다. 작중 화자인 빈디시는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여권발급을 도와준다는 이장에서 밀가루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구한 밀가루보다 훨씬 많이 날라다 주고 더해서 큰돈까지 건넸지만 여권을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피가공사는 여권을 수월하게 받아냈다고 합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질척거리니 더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러던 빈디시도 드디어 여권을 손에 넣게 됩니다. 딸 아말리에가 나서서 경찰과 신부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연관이 있는 직책을 가진 이들은 모두 주민들을 벗겨먹으려 드는 상황이니 주민들은 하나같이 내일이 없는 삶을 버텨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라는 루마니아의 속담을 제목으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야간경비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빈디시의 목소리로 두 차례 언급됩니다.


우리나라의 꿩은 날렵하게 잘도 날아갑니다만, 루마니아에서는 날개가 퇴화한 꿩은 적이 나타났을 때 날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포식자의 먹이로 전락한다고 인식해왔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쫓기는 꿩이 낙엽더미에 얼굴만 파묻는다고 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방식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여기저기에서 옛날 우리네 삶과 많이 닮은 구석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찌는 듯한 8월의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커다란 수박을 두레박에 담아 우물 아래로 내려뜨려 시원하게 만들어 먹었다는 것은 제가 어렸을 적에 여름이면 즐겼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모피가공사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터널을 여러 개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마니아가 평원인 줄 알았더니 카르파티아 산맥이 나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언덕과 저지대가 번갈아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터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책을 읽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낮과 밤이 바뀌더라니까. 배겨내기 힘들더라고. 모두 자리에 앉아서 창밖은 내다보지도 않아. 밝아지면 책을 읽는데, 무릎에서 책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야.(32-33)” 저도 기차나 차를 타고 여행을 할 때는 책을 읽는데 터널에 들어가면 책에서 눈을 떼고 언제쯤 터널이 끝나는지 앞을 바라보곤 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늙은 올빼미는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을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허망하게 죽음을 맞곤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낱낱이 까밝히기가 수월치 않은 이야기인데도 감정을 섞지 않은 담담한 필체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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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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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발칸지역을 여행하면서 23일의 여정으로 루마니아의 몇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수도 부쿠레슈티, 드라큐라의 무대가 된 마을 브란, 옛 트란실바니아의 수도였던 시비우, 그리고 작은 비엔나라는 별명이 있는 티미쇼아라 등입니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만들어낸 괴물 같은 인민궁전을 보았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난 장소이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도 보았습니다. 챠우세스쿠 독재를 무너뜨리는 움직임이 시작했다는 티미쇼아라에서는 승리광장, 자유광장, 그리고 통일광장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루마니아를 여행하면서 루마니아 출신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가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시절의 사회분위기를 소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찾아 읽은 책이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입니다. 작가는 티미쇼아라에서 남동쪽으로 36떨어진 니츠치도르푸(Nițchidorf)에서 독일계 소수민족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주로 차우셰스쿠 정권 시기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썼다고 합니다. 주로 루마니아의 독일 소수민족의 관점에서 이야기되며,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 현대사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황폐하고 쇠락한 도시의 변두리에 살면서 희망이라고는 한 줌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여교사 아디나와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절친 클라라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아디나는 학생을 토마토 수확 작업에 동원하는 것은 미성년자 노동 착취라고 말했다는 혐의로 교장에게 불려가 성추행을 당하고 비밀경찰에게도 요주의 인물로 찍힌다. 비밀경찰은 그녀의 집에 깔린 여우 모피에서 꼬리와 다리를 차례로 잘라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립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안전 면도날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안전 면도날을 싼 포장지를 풀어 무릎 옆에 놓는다. 그는 여우의 오른쪽 뒷발을 자른다. 그는 혀끝으로 검지에 침을 묻혀서 잘린 털을 바닥에서 훔쳐낸다.(199)” 언제라도 그녀의 사생활에 침입할 수 있음을 은밀하면서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지요.


클라라의 애인이 비밀경찰의 간부 파벨이라는 사실을 아디나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먹해진다. 하지만 클라라는 아디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쪽지에 적어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체포될 거야 리스트가 있어 넌 숨어야만 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널 찾지 못할 거야(300)” 차우셰스쿠 정권이 권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집단 체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라의 통지를 받은 아디나는 남자친구 파울과 함께 국경마을에 사는 친구 리비우에게로 서둘러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리비우의 집에서 지내는 것도 불안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도나우 강을 건너 다른 나라로 도망을 쳐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에 차우셰스쿠가 실각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본 리비우는 화면에 입맞춤을 하면서 널 먹어버리겠어라고 말합니다. 파울은 리비우와 함께 화주를 마시면서 금지된 노래를 부릅니다. “깨어나라 루마니아여 네 영원한 잠에서(334)”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라는 제목은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라는 뜻을 담은 루마니아의 속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더라도 독재자의 추종 세력과 그 체제에 익숙해진 탓에 정치나 사회적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다보니 이야기의 중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것은 독재정권의 감시와 통제를 비껴가기 위한 방식일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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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리커버 특별판)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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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를 읽은 인연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저지대>200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계 루마니아 작가 헤르타 뮐러의 등단작품입니다. 등단작품인만큼 작가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시절을 보냈던 루마니아의 바나트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적었습니다. 바나트는 세르비아와 헝가리에 접해 있는 지역입니다만, 과거의 바나트 영역의 4분의 3정도가 루마니아에 속하고 4분의 1정도는 세르비아에 그리고 서쪽 귀퉁이의 일부는 헝가리에 속합니다. 불가리아의 바나트 지역에 있는 티미쇼아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기도합니다.


작가가 그러하듯이 바나트 지역에는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 있어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이 되고 있습니다. 독일계는 1930년 무렵에만 해도 75만명으로 루마니아 전체인구의 4.1%를 차지했으나 2011년에는 불과 36천명으로 0.2%로 격감했습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독재통치에 루마니아를 등진 것입니다. 특히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주도했던 것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저지대>는 모두 19편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편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연관이 되어 있기때문에 하나의 소설이면서도 독립되어 있는 이야기라 해도 좋겠습니다. 저지대란 제목과 관련하여 "(저지대는) 내가 태어난 바나트 마을을 그린 것이다. 그곳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모든 것이 고여 있는 감옥 같은 곳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는 화자인 어린소녀의 아버지 장례식으로 시작합니다. 조문객들은 화자를 향해 욕을 하는 등 적대적이다. 아마도 고인에 대한 적의를 표출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생전에 도살자로 일하다가 전쟁중에는 아마도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모양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족들이 목욕을 하는 모습인데, 우리네와는 다른 특이한 풍경입니다. 제일 먼저 아기를 씻기고,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순서로 목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아버님이 제일 먼저 그리고 형제들이 순서대로 어머님은 마지막으로 하셨거든요. 발칸지역은 모계사회였던 모양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저지대'라는 제목으로 이 책의 표제작입니다. 무려 118쪽에 이르러 나머지 18편을 합한 부피에 가깝습니다. 내용은 화자의 집에서 부터 마을로 확대됩니다. 화자가 사는 동네는 가구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어지간한 시골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을 풍경이나 사람들 사는 모습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 동네와 많이 닮았기 때문일 듯합니다. 다만 우리네 옛 마을을 그 무렵 언젠가부터 역동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이겠지요. 이제는 닮은 모습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만....


화자가 부모로부터 거의 폭력이라 할 처벌을 수시로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왜 그런 처벌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도 없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이 두 사람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내가 어째서 이 집에, 이 부엌에 이 사람들과 함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었다.(97)”라는 화자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이야기 말미에 있는 그 당시 5월에는, 의견, 잉게, 불치만씨등 네 편의 이야기는 <저지대>가 루마니아에서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삭제되었던 것을 복원해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당대의 루마니아 사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마지막 이야기 검은 공원에서 작가는 무기력한 사회 분위기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네 눈이 공허하다. 네 감정은 공허하고 생기가 없다. 아가씨야. 안됐구나. 정말 안됐어.(235)” 하지만 그렇게나 절망스러운 과거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작가에게 영예를 가져왔다고 하니 삶을 모를 일입니다.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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