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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방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3
다니자키 준이치로 외 지음, 김효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다이쇼(大正) 시대(1912년~1926년)들어 메이지(明治)시대(1868년~1912년) 말 유행하던 자연주의 문학이 쇠퇴하고 탐미주의 문학이 대두되면서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사토미 돈(里見惇), 기쿠치 칸(菊池寬) 등 순문학 작가들이 주도하여 예술적 경향의 탐정소설이 창작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추리소설이 활발하게 창작된 것은 신청년이 창간되고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 등이 등장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살인의 방>은 다이쇼 시대에 활동한 다니자키 준이치로, 아쿠타가와류노스케, 기쿠치 칸 등 탐미주의 문학가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학계열의 히라바야시 하쓰노스케(平林初之輔)가 발표한 9편의 탐정, 추리소설을 담았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에드거 앨런 포나 코난 도일의 작품들을 읽고 괴기, 환상, 신비적 분위기의 작품들을 발표했는데, 훗날 추리소설의 대표작가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지(横溝 正史)등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살인의 방>에는 표제작인 ‘살인의 방’, ‘길 위에서’, ‘도둑과 나’ 등 세 편이 실려있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추리소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기념비적 작품집 <봄날의 밤>을 냈습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 ‘봄날의 밤을 비롯하여 11편의 추리, 탐정, 괴기소설을 담았습니다. <살인의 방>에는 ‘개화의 살인’, ‘의혹’, ‘덤불 속’ 등 세 편이 실려있습니다. ‘살인의 방’은 평범한 도락에는 싫증이 난 친구가 살인이 예고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현장에서 지켜보자는 제안을 받은 화자가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현장에 갔다가 살인사건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런데 친구는 살인을 저지른 여성에게 매혹되더니 그녀의 손에 살해당하게 되었다면서 그 장면을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해옵니다. 결국 친구의 살해장면을 지켜보게 되고, 범인들로부터 친구의 유언장을 전달받게 된 화자가 친구의 집을 방문하게 되는데....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 탐정소설적인 요소가 풍부하고, 에드거 앨런 포, 코난 도일, 오스카 와일드 등 서구작가의 기법을 다양하게 녹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덤불 속’은 ‘라쇼몬’과 함께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이 영화 『라쇼몬(羅生問)』의 원작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내용은 헤이안 시대에 무사 부부가 산길을 가다 도적을 만나 남편이 덤불 속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둘러싸고 나무꾼, 스님, 포졸, 노파, 도적 다조마루, 아내 마사고, 그리고 죽은 무사의 영혼이 서로 엇갈리는 진술을 내놓고 있습니다. 결국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고 범인이 누구인지 미궁에 빠진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내 마사고가 기요미즈테라(淸水寺)를 찾아 참회하는 형식으로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참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쿠치 칸은 문예춘추사를 설립하였고,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여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소개하거나 창작하였는데, 이 책에는 ‘어떤 항의서’가 살려 있습니다. 강도가 들어 누나 부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뒤따라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사건이 발생하고 1년이 지난 뒤에서야 범인 사카시타 쓰루키치가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경찰의 추적 끝에 잡힌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범행 가운데 부부 살해사건도 저질렀다고 실토하는 바람에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하여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사형을 당하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화자가 법무부 장관에게 항의서를 보내 유족의 고통을 생각하면 범인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받아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히라바야시 하쓰노스케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이론가로 알려졌지만 실은 신청년에 참여하여 많은 추리소설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예심조서’, ‘인조인간’ 등 두 편이 실려있습니다. ‘예심조서’에는 과실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수한 아들을 구하려고 예심판사를 찾아간 노교수가 아들의 정신이상을 주장하다가 받아들이지 않자 사실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백하는 반전이 있고, 결국은 노교수와 그의 아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반전이 거듭되는 본격 추리소설의 형식을 볼 수 있습니다. ‘예심조서’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고리키의 『세 명』 등이 인용되는 것을 보면 당시 일본의 추리소설작가들은 해외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