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 - 정신분석적 심리치료를 만든 역사적 만남들 휴먼테라피 Human Therapy 34
이준석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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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언급하는 책을 읽다보면 프로이트를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막상 정신과 영역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리 넓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게 됩니다. 정신과를 전공하신 이준석박사님의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를 만나게(?)된 것은 제목이 주는 말랑한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의와 음악가의 만남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이 책의 성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정신분석학이 탄생하고 현대의 심리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서 변곡점을 만들었던 프란츠 메스머(1734~1815),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그리고 하인즈 코헛(1913~1981), 세 사람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만난 특별한 사건들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메스머의 메스머리즘은 ‘심리학 없는 심리치료’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심리학 위한 심리치료’로, 그리고 코헛의 자기 심리학은 ‘심리학 너머 심리치료’라는 제목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 세 사람은 활동한 시기나 활동무대는 달랐어도 비엔나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였고, 하나같이 비엔나에서 쫓겨나 타국으로 망명하는 신세였다고 합니다. 자신에 닥친 고난을 극복한 이들의 열정에 힘입어 현대의 정신분석적 심리치료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사용했던 최면이나 정신분석이라는 방법론을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앎이 많지 않아 깊이는 부족하겠지만 그동안의 공부를 소개하기로 합니다.

 

18세기 의학을 공부한 메스머의 학문적 뿌리가 16세기 초반 활동한 의사 파라켈수스(1493~1541)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외라고 할 만합니다. 그만큼 저자의 자료추적의 집요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8세기 의학이 그렇겠습니다만, 16세기의 의학 역시 과학적 방법론이 세워지기 이전의 경험적 혹은 관념적 이론에 바탕을 둔 의학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적 지식이 없는 자는 의술에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23쪽)”고 한 파라켈수스의 주장에 공감할 의사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집니다. 파라켈수스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이란 우주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원소들로 이루어진 소우주라고 여긴데서 나온 것으로 당연히 우주는 소우주인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유추한 것입니다. 그 결과를 의학으로 가져온 것이 자석치료였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자석이 질병치료에 유용할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적지 않아 16세기의 관념적 의학의 뿌리가 참 깊고도 질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파라켈수스는 전통 가톨릭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다수의 저작을 남겼는데, 이 저작들이 메스머와 파라켈수스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15살이 된 메스머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입학한 바이에른 지방의 딜링엔 예수회 대학에서 만난 파라켈수스의 사상에 빠져들어 결국은 신학을 포기하고 비엔나 의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비엔나 의대의 졸업논문이 ‘행성의 영향에 대하여’였던 것만 보아도 메스머가 파라켈수스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메스머는 처음에 광물자석을 치료에 적용하다가 이를 동물자기설(動物磁氣說)로 발전시켰는데, 건강한 자신의 자기를 불어넣어 흐트러진 환자의 자기를 바로 잡는다는 치료개념이었습니다. 치료과정을 살펴보면 메스머가 미리 자신의 동물자기를 불어넣은 유리조각이나 쇳조각을 집어넣고 물을 가득채운 오크 욕조통에 꽂아놓은 쇠막대를 붙들고 앉아 있는 환자에게 “내 눈동자를 바라보세요!”라고 말하면, 메스머의 눈동자에 집중하던 환자들이 얼마 후 심한 경련이 일어나면서 증상이 호전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런 치료를 행하다가는 당장 돌팔이 사이비 의사로 몰리기 십상일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 파라디스 등을 치료하면서 당시 비엔나에서 유명세를 탔던 메스머는 그의 인기를 시기한 의사들의 질시를 받게 되는데, 전기에 관한 실험으로 유명한 벤자민 플랭클린이 참여한 실험에서 메스머의 동물자기의 허구가 드러나면서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스머는 자신의 자기요법에도 치료되지 않는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환자가 치유되려는 갈망을 가지지 않으면,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치료적 유동물질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라포르 이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한 안전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과학이 발전하면 동물자기가 입증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메스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치료법을 굳게 믿었던 것 같은데,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이런 황당한 치료법의 진실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샤스뜨네 퓌세귀르 후작은 메스머의 자기요법을 자기수면요법으로 개량하게 되었는데 근대적인 의미의 최면요법의 원형(原形)이라고 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뇌성마비 아동의 신경병리를 공부하고자 파리의 살페트리에르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신경과장 쟝 마르텡 샤르코교수가 히스테리환자를 최면으로 치료하는 과정을 만난 것이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면치료의 효과에 몰입해가던 프로이트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치료성과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최면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최면치료를 받던 환자가 성적 이상행동을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서 최면치료와 결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면치료의 효과를 검증한 현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최면을 정상과학과 비정상과학의 경계지대에 걸쳐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과학이 아닌 것이 확실한 최면의 신경생리학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셔머, 변경지대의 과학 49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

 

프로이트가 40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신분석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이 따뜻했던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이해하기 위하여 프로이트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그 의미를 찾는 자기분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결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가 내게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런 현상이 아동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소포클레스의 희곡으로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왕의 사례와 연결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어린이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에 대한 질투로 이어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이런 현상이 아동기의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에서 그려내려 한 것은 신에 의하여 예정된 일은 인간의 힘으로 뒤집을 수 없다는 한계를 말하고자 함이지, 아버지를 질투하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극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이는 점도 있어,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차용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 받은 신탁 때문에 어린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를 질투할 틈도 없이 버려지는데,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새로이 아버지가 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이런 감정이 향하는 것이 순리적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철이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오이디푸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부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그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은 프로이트의 아동기 성적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프로이트가 성경 창세기에 착안하여 도출했다는 <꿈의 해석>을 통하여 정신분석을 하는 것 역시 검사자의 주관에 의하여 꿈이 해석되는 것이며 꿈의 해석이 안고 있는 보편성이나 꿈을 꾼 자의 특수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꿈의 해석이 과학적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인데, 여기에 대하여 “나는 전혀 과학적인 사람이 아니며, 관찰자도 아니며, 실험가도 아니며, 사상가도 아닙니다. 나는 기질로 볼 때 정복자일 뿐이고, 호기심, 과감성, 집요함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탐험가일 뿐입니다.(137쪽)”라는 프로이트의 고백이 꿈의 해석을 통한 정신분석의 과학성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비과학, 즉 엉터리에 속한다고 분류하고 있습니다.(마이클 셔머, 과학의 변경지대 41쪽, 274~280쪽) 프로이트는 자신을 불필요한 가설 없이 순수한 데이터만으로 연구하는 19세기 과학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많은 이론이 사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1885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논문, 노트, 편지, 사적인 일기, 초고의 주요 부분들을 파기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산도르 페렌찌가 자기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정신분석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자기성찰을 통해 얻는 자료들을 과학적으로 정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실험을 통해 수집된 외적 자료를 이용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처럼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224쪽)” 사변이 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통계적 검증과 실험적 기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왜들 그렇게 눈이 멀었을까요?”라면서 정신분석 고유의 지식과 방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서도 정신분석학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심리학으로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을 새롭게 자리매김한 하인즈 코헛은 학문적 뿌리를 프로이트에 두고 있지만, 심리치료에 공감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치료자 중심이었던 기왕의 정신분석과 차별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에서도 크게 화두가 되고 있는 ‘공감’에는 1) 마음을 읽는 도구, 2)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매듭, 3) 마음의 영양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헛은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어느 순간 모순되고, 근거가 희박하며, 종종 모호한 이론적 추론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다가 임상현상들을 직접 관찰하는 자세로 되돌아가서 자신이 관찰한 바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공식을 발견할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자기의 회복’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이드-초자아로 구성된 전통 정신분석학의 구조와 결별하고 자기심리학을 세우게 되는데, 인간의 파괴적 성향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대상‘ 사이의 공감적 반응에 실패했기 때문에 파생된 이차적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유아기 성욕은 인간의 마음을 만드는 근본적인 핵심이 아닙니다. ‘자기’와 공감적인 ‘자기-대상’ 사이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과정이 마음을 만드는 근본적인 핵심입니다.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충동이 두드러진 아기는 ‘자기-대상’으로부터 상처를 입거나 오랫동안 공감적 반응을 얻지 못했던 아기입니다.(276쪽)” 어떻습니까? 상당히 공감이 가는 이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프란츠 메스머의 ‘최면치료’에서 시작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거쳐 하인즈 코헛의 ‘자기 심리학’으로 대표하는 현대심리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세 사람의 심리학자들이 어떤 학문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는가를 살피는 독특한 설명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익숙한 만큼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합리성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는 과거의 이론을 인용하는 것은 “모든 심리학이 실제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런 심리학 이론들 사이에 경계나 우열을 가리는 것 또한 무의미한 짓(296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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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6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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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2부의 후반부와 에필로그를 담고 있습니다. 2부의 전반부에서 집을 나간 레피크가 철도부설공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참여하고 있는 친구 외메르가 지내고 있는 건설현장에 몇 달동안 머물면서 나름대로의 꿈을 담은 농촌부흥 프로젝트를 완성해서 외메르의 장인이 될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아 농림부를 통하여 프로젝트의 실행을 추진하지만 이상주의적인 그의 프로젝트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출판되는 선에서 끝나게 됩니다.

 

1권의 느낌을 적을 때도 잠깐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레피크가 집을 나가 외메르에게 가는 과정이 극적으로 설명되지 못하고 마치 아내와의 갈등이 원인인 것처럼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레피크의 사례처럼 갈등을 극적인 상황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여러 상황들, 예를 들면, 제브데트씨의 큰 아들 오스만과 네르민의 관계에서도 오스만의 외도에 아내 네르민 역시 외도로 맞서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동생 레피크나 아이셰가 이를 덮는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고 이들의 결혼생활은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의외로 가출(?)에서 돌아온 레피크가 아내 페리한과 화해하고 순탄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가 느닷없이 에필로그 부분에서 레피크의 아들 아흐메트와 그의 여자 친구 일크누르의 대화를 통하여 두 사람이 이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출판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한 레피크가 어느날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나라의 90퍼센트가 굶고 있고 가난하고 비참한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죄”라고 떠드는 것을 들은 페리한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밖에 없어. 가방을 싸는 것!’이라고 답하고서는 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한 부부가 헤어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죽어가던 형이 부탁한 조카 지야와의 관계 역시 뭔가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만 불러일으키고는 용두사미가 되고 만 경우입니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이 된 지야는 1차 세계대전이 예상되는 시점에 전역을 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자금을 내놓으라고 제브데트씨를 압박하지만 거절당하고 돌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못살게 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제브데트 가족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끝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레피크의 두 친구 외메르와 무히틴 역시 전편을 통하여 등장하는 이유가 석연치 않는 구석이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외메르는 자신이 파티흐-정복자라는 의미를 가진 터키어로 영웅이 되고 싶다는 외메르의 꿈을 담은 단어라고 생각됩니다-가 될 것이라는 거창한 꿈을 내세우지만 어떻게 파티흐가 될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의 딸과 약혼을 하는 등 야심찬 행보를 보이던 외메르는 철도부설공사장에서 자본을 투자한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잡아놓은 결혼식날 식장에 나타나지 않는 이해되지 않은 행보 끝에 시골에 토지를 사들여 커다란 농장을 세우고 그곳에 머물고 마는데 이런 행보를 파티흐라고 할 수 있는지....

 

아이셰의 경우도 학교에서 만난 가난한 교사의 아들과의 교제에 반대하는 오빠 오스만에 굴복하고 집안에서 정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등.. 전반적으로 보면 터키 사회가 아주 가부장적인 사회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대가족제도의 해체가 터키에서는 1930년대부터 시작되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데, 가출에서 돌아온 레피크가 니갼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가하는 것이나 오스만 역시 니갼부인의 반대에도 살던집을 부수고 아파트를 지어 아들 부부와 어머니 그리고 조카가 각각 생활하도록 가옥구조를 변경하는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빠르게 서구화 되어가는 터키사회의 구조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작품을 옮기신 이난아교수님은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가족 구성원들의 심리와 정신상태를 심도있게 파헤쳤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작품해설에 적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읽는 저의 독해능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후속작품들을 읽으면서 되돌아볼 기회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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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5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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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와 책쓰기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담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를 읽고서 오르한 파묵의 전작을 읽어보지 않겠느냐 하는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사실 터키라는 나라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경계면에 있는 나라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고, 2002년 월드컵 당시 3,4위전에서 맞붙으면서 6.25동란 당시 참전한 혈맹국가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면서 나름대로는 가까운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아는 것은 여전히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설과 소설가>를 읽으면서 그의 작품세계를 조금이라도 엿보아야 그의 말이 이해될 것 같아서 그의 소설 <순수박물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1>을 읽게 된 것이었습니다. 소설의 경우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작가가 생각하는 바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쉽게 다시 말씀드리면 <순수박물관>을 통하여 작가가 독자에게 주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르한 파묵의 전작읽기는 저에게는 터키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파묵의 첫 번째 소설작품으로 그의 문학세계의 시발점을 알려주는 신호탄과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파묵이 말한 것처럼 첫 작품이 그의 문학세계의 시발점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습니다. 저 역시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 <순수박물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퓌순을 발견했으니까요...

 

이 작품은 그림을 공부하던 파묵이 소설쓰기로 방향을 바꾼 다음 5년에 걸쳐 완성한 첫 소설이라고 하는데,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05년부터 1970년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터키가 극심한 변화를 겪던 시기라고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네 인생으로 따지면 1갑자 즉 환갑을 넘기는 세월에 걸친 터키 식자층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의 제 1부에는 1905년 7월, 자수성가한 상인 제브데트 씨의 하루를 담고 있습니다. 폐결핵을 앓고 있는 형과의 갈등, 그리고 결혼을 약속한 니갼의 아버지 파샤와의 만남 등이 줄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당시 터키사회는 술탄이 지배하는 왕정이 오랫동안 이어져 오면서 이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의 혁명의식이 꿈틀대던 시기로 제브데트의 형은 아버지를 이어 상업에 투신한 젊은 제브데트의 삶을 경멸하지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은 병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세월을 훌쩍 건너뛴 1936년 2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약 4년간에 걸쳐 제브데트씨와  그의 두 아들과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2부에 담고 있습니다. <제브데트 씨의 아들들 1권>에서는 2부의 중반까지를 담고 있는데 2부의 중반에서 제브데트씨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으면서 가족의 중심축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권에서 읽을 수 있는 20세기 초반의 터키사회는 우리의 과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가족이 한 집에서 사는 대가족제도나, 술탄의 오랜 실정에 대하여 젊은 식자층이 반발하고 있는 점이라거나(실제로 1905년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술탄에게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모슬렘이 상업에 종사하는 일을 천하게 여기는 사회풍조 등이 그렇습니다.

 

제브데트 씨는 형이나 주변의 시각 따위는 무시하고 착실하게 장사에 몰두하였고, 유럽에서 발생한 1차 세계대전을 틈타 무역에서 성공하여 부를 일궈내고 두 아들과 딸을 제대로 교육시키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작가의 첫 작품인 까닭인지 에피소드별로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상황을 설명하는데 치중하는 느낌이고 등장인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쉽게 흥분하는 듯한 터키인의 품성을 엿볼 수 있는데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는 애매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3부 에필로그에는 제브데트 씨의 손자인 화가가 보내는 1970년 12월 12일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부의 후반과 함께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2권>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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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 스완네 집 쪽으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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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스완네 집 쪽으로’의 2권에서는 프루스트가 경험한 당시 파리 사교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파리의 사교계는 유력한 집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거나 작은 음악회를 열거나 혹은 대화를 하는 살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살롱끼리 드러내놓고 경쟁하는 분위기였던 모양입니다. 첫장면에 등장하는 베르뒤랭의 ‘작은 패거리’라고 하는 살롱은 베르뒤랭 부인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가입이 가능하며 눈 밖에 나면 초청받지 못해 강제 탈퇴되는 신세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교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다른 살롱에 눈길을 주는 경우도 신도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추방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사이비교단의 교주처럼 신도들을 좌지우지하려 들었다고 하는데, 신도인 코타르 의사가 급한 환자 때문에 일어나려 할 때, “오늘 저녁 환자를 방해하러 가지 않는 게 환자를 위해 더 좋을지 누가 알아요? 선생님 없이도 오늘 밤 잘 지낼 거예요. 내일 아침 일찍 가 보면 병이 다 나을 거예요.(12쪽)”라고 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이 주무대가 된 것은 1권에서 등장했던 스완씨가 부인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화자가 스완씨의 딸 질베르트를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헤어진 다음에도 후반부에서는 절친한 친구 생 루와 결혼하기 때문에 관계가 이어지는 주요 등장인물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즉 1편의 2부 ‘스완의 사랑’에 등장하는 스완씨는 아버지의 연배에 해당되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화자가 삼자를 통하여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마치 본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의 흐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는 점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분위기상 1편 스완네 집 쪽으로는 분위기로 보아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연령일 때의 이야기라고 보았습니다.

 

다시 살롱이야기로 돌아가서 당시 살롱에서는 남녀가 만나 관계를 맺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관계가 적절하거나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에 골인하거나 배우자가 있는 남녀가 만나는 장소도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살롱의 주인이 남녀를 엮어주기고 하고 갈라놓기도 했다는 것인데, 바로 베르뒤랭부인이 스완씨가 부인 오데트와 엮이게 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스완씨가 탐탁하지 않자 갈라놓으려 든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한편 스완씨의 아내가 되는 오데트는 화류계 출신으로 베르뒤랭부인의 살롱을 통하여 스완씨의 마음을 낚아 결혼에 성공한 이래 몇 차례의 결혼을 통하여 귀족의 칭호를 갖게 되는 대변신을 하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1편 2부의 스완의 사랑에서는 “그는 오데뜨가 자신이 욕망하던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렸다.(71쪽)”고 할 정도로, 오데뜨가 처음 만났을 때 덤덤했던 스완씨의 마음을 낚아채고 자신에게 매달리게 만든 다음에 자신의 화류계 생활에 대한 풍문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성공하게 되는 과정을 구구절절하게 풀어놓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스완씨에게 오데트가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정부였으며 자주 사창가에도 드나들었다는 제보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288쪽)

 

그럼에도 그녀에게 넘어간 결정적 한마디를 소개해 드린다면, 자기 집에 왔다 간 스완씨에게 다음날 “왜 당신 마음은 두고 가지 않으셨나요. 마음이라면 돌려드리지 않았을텐데.(168쪽)”라는 편지를 보내는 사례라거나, 포르슈빌씨를 경쟁자로 내세워 질투심을 유발하게 하는 전략-여기에는 베르뒤렝부인의 결정적 도움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을 구사하는 등입니다. 한 남자가 속절없이 한 여자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순진한 남자들이 여성을 사귈 때 조심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기회도 될 것 같습니다.

 

3부 ‘고장의 이름’ 편에서는 스완씨의 딸 질베르트와의 만남이 시작되는 과정을 소개하여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의 상권에서 다루는 질베르트와의 사랑이야기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는 쉽게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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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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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읽고 싶은 책 목록, 그러니까 독서부문의 버킷리스트에서 제일 첫머리에 아주 오랫동안 놓여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일독을 권유받아왔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방대한 작품의 분량때문에 선뜻 시작하지 못한 것인데, 사정이 저와 같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새끼가 새끼를 치는 책읽기’라고 해도 좋을 계기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였습니다. 시작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였습니다. 선생님은 이 책에 일상의 삶에서 느낀 점,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리고 먼저 가신 분에 대한 애달픈 마음 등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를 읽으시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227쪽)” 책을 읽으신 느낌을 어쩌면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나도 읽어봐야 하겠다는 충동이 일게 쓰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읽었고, 내친 김에 박완서선생님처럼 국일미디어판으로 나온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읽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민음사판으로 나온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다시 읽으면서 라포르시안 [북소리] 독자 여러분과 함께 느낌을 나누고자 합니다. 민음사판은 파리3대학에서 프루스트를 전공한 김희영교수님께서 옮기셨다고 합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800673). 1998년에 초판이 나온 국일미디어판과 비교해서 민음사판에서는 당연히 14년의 시차가 말하듯, 번역의 흐름이나 단어 등에서 세월의 흐름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사소할 수 있습니다만, 첫 권의 모두에 등장인물의 성격을 요약해둔 점이나 풍부한 각주를 덧붙여 당시 프랑스 문화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점도 책읽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국일미디어판은 이미 전권이 출판되어 있습니다만, 민음사판은 1부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를 읽을 때처럼 다음 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따라 읽다보면 지루하다는 느낌없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돌아가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던 프루스트가 제목에 담은 뜻은 ‘시간이 멈추는 감추어진 공간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천식이라는 고질병이 심해지면서 외출을 삼가게 된 프루스트는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던 화려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바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 집필동기였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편 ‘되찾은 시간’에서는 주인공이 노년에 이른 시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교계를 그리고 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과거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면서, “얼마간이라도 나에게 작품을 완성시킬 만한 오랜 시간(longtemps)이 남아 있다면, 우선 거기에 공간 속에 한정된 자리가 아니라, 아주 큰 자리, 그와 반대로 한량없이 연장된 자리 ‘시간(temps)' 안에 차지하는 인간을 그려보련다.(국일미디어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499쪽)”라고 적은 부분에서도 집필동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시간과 기억과의 관계는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순수박물관, 35쪽)”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쌓여진 시간을 바로 기억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동물의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심지어는 유전자에 담겨서 후손에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상당부분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기억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교수는 연구에 쏟은 자신의 삶을 적은 책 <기억을 찾아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0991633>에서 사이박사와 같이 진행한 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리온이라고 하는 세포막단백질이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프리온단백의 점변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삼차원적 구조가 변하게 되고 그 결과 뇌가 스펀지처럼 변하는 광우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끔찍한 광우병의 발병과 관련이 있는 프리온이 정작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나가다 보면 쉽게 지나쳐버리기 쉬운 사물이나 상황을 프루스트는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솔길에는 산사나무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울타리는 임시 제단 위에 쌓아 놓은 산더미 같은 산사 꽃들로 칸막이가 보이지 않는, 쭉 늘어서 있는 노천 제단 같은 모습이었다. 그 제단 밑으로 햇빛은 방금 채색 유리를 통과한 듯, 바둑판무늬 빛을 땅바닥에 그렸다. 산사 꽃향기는 마치 내가 성모마리아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 형태 안에 뚜렷이 드러나며 촉촉하게 내 주위를 감돌았고, 장식된 꽃들 역시 마치 성당의 붉은 복도 난간이나 채색 유리창살 대에 투조 세공을 한 딸기 꽃의 하얀 살로 피어난 꽃들처럼, 저마다 방심한 표정으로 섬세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 양식 잎맥 무늬 수술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몇 주 후에 작은 바람의 숨결에도 날아가 버릴 단색 붉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햇빛 아래서 이 시골길을 기어 올라갈 들장미는 얼마나 순진한 농부 아가씨 같아 보일까!(244쪽)”

 

이처럼 세밀한 묘사는 프루스트 자신이 오감을 통하여 얻은 경험에 바탕하고 있음일 터인데, 아마도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특별한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이런 관념적 기술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억을 끄집어내는 독특한 장치로 프루스트는 후각과 미각을 들고 있습니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내가 찾는 진실은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가 내 속에 있는 진실을 일깨웠지만, (…)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모금을 마신 순간으로 되돌아가본다. (…)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 (…)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85~89쪽)”

 

프루스트는 이어서 미각과 후각이 깊이 잠겨 있는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90쪽)”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부드럽고 달콤한 마들렌을 특별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퇴근길에는 동네 빵집에 들러 마들렌 몇 개를 사들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옮긴이는 조가비처럼 생긴 프티트 마들렌이라고 하는 기억회상장치에 대하여 조가비처럼 생긴 마들렌의 접힌 주름이 펼쳐진다는 상상에서 기억에 숨어있는 과거의 부활을 감추었다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청각 역시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는 점 역시 소홀하게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는 프랑스의 살롱에서는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고, 그 음악에서 특별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프루스트는 음악을 넘어서 일상에서 듣는 소리를 음악으로 격상시키고 이 소리가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화창한 날씨에 태어나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서만 다시 태어나는 이 음악은, 그런 나날의 본질을 함유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 그 이미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그런 나날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제로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확인해 준다.(151쪽)”

 

음악이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라는 사실은 개인적 경험으로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조건반사와 같은 것입니다만, 제 경우는 ‘Song for Anna’라는 제목의 연주곡이 그런 장치입니다. 그 옛날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온 이 노래를 듣던 여자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지나가듯 말한 것이 조건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노래를 듣게 되면 그때 좋아했던 친구가 생각나곤 합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오감, 특히 후각과 미각이 기억이라고 하는 뇌의 기능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시사했음에도 당시의 정신의학자들은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고 조나 레러박사는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브라운 대학의 심리학자 레이첼 허츠박사의 ‘프루스트적 가설을 시험하기’라는 연구에서 우리의 후각과 미각이 특히 센티멘털하다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은 후각과 미각만이 뇌의 장기 기억 센터인 해마조직과 직접 연관되는 감각들이기 때문이다. 해마 조직에 새겨진 후각과 미각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들(시각, 촉각, 청각)은 먼저 언어의 원천이자 의식의 관문인 시상에 의해 가공된다. 그 결과 이런 감각들은 우리의 과거를 불러오는 데는 훨씬 덜 효과적.(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148쪽)”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직관력이 뛰어났음을 강조한 조나 레러박사가 책의 제목까지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라고 정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에 대하여 지루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한 프루스트는 기억의 허구성도 짚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의 부정확성을 증명하는 실험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프루스트는 기억이 현실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 대신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불완전한 복사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하버드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서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소설과 소설가, 11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책읽기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프루스트 역시 소설읽기를 통하여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합니다. “내가 독서를 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발견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중심적인 믿음 다음에 오는 것은, 바로 내가 참여하는 행동들이 주는 감동이었다. (…) 소설가가 쓴 책은 꿈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보다 선명하고 더 오래 기억되는 꿈으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153~155쪽)” 그 이유는 짧은 시간을 통하여 소설을 읽어 얻는 경험을 실제 삶에서라면 일부를 아는데도 몇 년이 걸릴 것이고 우리 기억에 갈무리되는 과정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지각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근래 들어 책읽기를 소홀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으면 싶은 좋은 경구라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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