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
나카무라 진이치 지음, 신유희 옮김 / 위즈덤스타일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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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의사들이 병을 만들어내고 있고 심지어는 환자들의 죽음을 앞당긴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의료에 관심을 가진 기자가 관련 문헌들을 분석하여 근거로 제시하고 있어 신빙성이 높다는 주장입니다. 이처럼 병원 그리고 의사들이 돈벌이에만 급급한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내용을 담은 책들이 가끔씩 발표되곤 합니다. 의학컬럼니스트 린 맥타가트가 쓴 >의사들이 해주지 않는 이야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7144>, 강주성님이 환자입장에서 쓴, <대한민국 병원사용설명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9154961> 등을 읽은 기억이 있고, 백신접종의 문제점을 파헤쳤다는 팀 오시의 <백신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9621637> 제니 매카시의 <예방접종이 자폐를 부른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71623> 등도 같은 부류의 책들입니다. 이들 책들의 공통점은 의학논문들을 통하여 현대의학의 문제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고답적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만 역시 의학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의학논문에 담긴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학의 발전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보니 의사라고 하더라도 새로 쏟아져 나오는 의학관련 정보를 꾸준하게 따라가지 못하면 제대로 이해하기는커녕 엉뚱한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자 역시 1950년대 말에 의학공부를 시작한 셈이니 아주 옛날 식이라서 최신의학을 제대로 이해하고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벤트를 통하여 일본에서 노인요양원의 부속 진료소에서 일한다는 나카무리 진이치씨의 최신작 <편안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를 멀리하라>를 읽고나서 리뷰쓰기를 망설이게 됩니다. 책에 담은 저자의 생각들 가운데는 동의할 부분이 있지만, 적지 않은 부분에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정리를 해보면, 제 4장 ‘죽음에 대한 생각이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주제로 모은 글들은 품위있는 죽음을 맞기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다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제5장 ‘건강이란 이름의 환상이 병을 부른다’는 주제에서 ‘의사에게 노인은 소중한 밥줄’이라는 식으로 자신을 제외한 의사들을 비윤리적인 돈벌레처럼 매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밖에도 ‘생활습관병은 낫는 병이 아니라 친해져야 하는 병이다.’라는 주장 역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식습관을 비롯하여 운동 등을 적절하게 병행하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약물치료와 같은 적극적인 개입치료를 늦출 수 있고, 병증의 진행을 더디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도 시립병원에서 근무를 해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은) “죽는 그 순간까지 온갖 의료조치 때문에 고통스럽고 불편한 순간들을 겪으며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병원은 ‘자연스러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5쪽)이라고 적었는데, 뒤에 다시 정리하겠지만 말기암 환자의 경우 암으로 인한 극심한 통증으로 고통받기 때문이 이러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하여 적절한 의료처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가 개입된 죽음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6쪽)“이라는 저자의 확신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야마자키 후미오 박사 역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http://blog.joinsmsn.com/yang412/5738927>에서 적고 있는 것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지는 의료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의 병원 의사들은 모든 치료행위를 환자의 동의 아래 시행하고 있고 환자의 상태에 맞춰 치료를 하는 경향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노인연령의 의료비가 폭증하고 있어 보험재정을 책임지고 있는 건강보험공단에서는 연명치료에 대한 의료처지에 대한 개념을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가 시민단체의 극렬한 반대에 부딛혔던 최근의 경험을 기억한다면 저자의 주장에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암에 걸려 죽음을 맞는 것이 최상의 죽음이라 예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아는 암치료전문가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죽음을 앞두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자신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3장의 ‘암은 내버려둘수록 아프지 않다’는 주제는 거의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암검진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고, 검사를 받는 동안 우발사고가 일어나거나 검진 자체가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조기암으로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더라도 일정기간마다 고통이 뒤따르는 검사를 되풀이해야 할 뿐 아니라 나머지 인생동안 재발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 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암검진을 받지 않고 살다가 우연히 말기암이 발견되면 운명으로 알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진정 환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것일까요? 대한 대한 암학회에서 주관하여 암에 걸렸지만 꾸준한 치료를 받고 암이 소멸된 환자들의 투병기를 공모하여 엮은 책 <나는 행복한 암환자입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823976>을 보면 암에 걸린 환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도 인용한 구절입니다만, 100년 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이 한 “건강에 관련된 책을 읽을 때는 주의하라, 오타로 죽을 수도 있으니까”라는 말을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에 관한 정보를 잘 못 이해하여 건강을 위협에 빠트릴 수 있다는 경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자와는 달리 ‘건강을 오래 유지하고 우아한 죽음을 맞으려면 의사와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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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 -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본 생명현상 한울과학문고 2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서인석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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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원주 오크밸리에서 열린 한국독성병리학회 학술대회에서 원주 연세의대 병리학교실 박광화교수님께서 발표하신 <면역학 개론> 가운데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것이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항원과 접촉한 B세포의 일부가 기억세포로 변환하여 그 정보를 갈무리한다는 것인데, 이처럼 다양한 항원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B세포가 면역글로블린 유전자를 재조합과 재배열하는 방식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48매의 화투장을 들고 고스톱을 칠 때 같은 패를 쥘 확률도 매우 낮을 뿐만 아니라 판이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꼭 같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울 정도인 것처럼 B세포의 면역글로블린 유전자의 재조합과 재배열을 통하여 엄청난 숫자의 항원의 정보를 갈무리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아주 일부에 불과하지만 생명현상이란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화론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생명의 기원이 무기물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과연 무기물로부터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어렴풋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였습니다. 자외선이 넘치고 전기 방전이 잦던 원시지구에서 단순한 구조의 화합물이 서로 작용하여 복잡한 분자들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유기물이 들어있는 원시수프에서 어느 날 스스로를 복제하는 능력을 가진 분자, 즉 자기 복제자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58쪽) 최초의 자기복제자는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DNA가 되었다는 것인데, 후쿠오카 신이치교수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 http://blog.joinsmsn.com/yang412/10012343>에서 바로 DNA가 생물인가 혹은 무생물인가를 아주 흥미롭게 논의하고 있습니다.

 

신이치교수가 “생물이 살아있는 한 영양학적 요구와는 무관하게 생체고분자든 저분자 대사물질이든 모두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란 대사의 계속적인 변화이며, 그 변화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이다.”라고 한 쇤하이머의 <신체 구성 성분의 동적인 상태>라는 생명관을 인용하고(후쿠오카 신이치, 생물과 무생물 사이 143쪽) DNA보다는 세포내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실제적인 생명현상이라는 자신의 관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이러스를 생물이라 정의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생명이란 자기 복제를 하는 시스템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본 생명현상’이라는 부제가 달린 <생명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바로 신이치교수의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서 적지 않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인용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쓴 에르빈 슈뢰딩거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로 위키백과는 “원자 구조론, 통계 역학, 상대성 이론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이론 물리학적 연구 업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드 브로이의 전자의 파동 이론을 발전시켜 슈뢰딩거 방정식을 수립함으로써 파동 역학을 수립했으며, 하이젠베르크의 행렬 역학과의 형식적 동등성을 1926년에 증명하여 양자 역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길을 텄다. 이러한 업적으로 1933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1962년 의학생리학부문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모리스 윌킨스 등이 모두 생명의 비밀을 탐구해보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책이 바로 에르빈 슈뢰딩거가 쓴 <생명이란 무엇인가>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물리학이나 화학이 그러한 생물학적 사건들을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앞으로 이들 과학이 그 문제들을 해명할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점이다(28쪽)”라는 슈뢰딩거의 예언에 필이 꽂혔던 것이었을까요?

 

이 책을 옮기신 서인석, 황상익교수님들께서도 “(책의) 내용적 의미는 5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많이 퇴색하였고 그의 여러 가지 오류에 대해서도 이미 많이 지적된 바 있지만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대한 슈뢰딩거의 끝없는 관심과 사랑, 그리고 세계를 총괄하여 설명해보려는 그의 치열하고도 야심에 찬 탐구정신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다.(12쪽)”고 적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이 책을 중판하면서는 “(이 책의) 발간 이후 지난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생명에 관해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고, 또 실험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러나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새롭게 발견된 사실에 파묻혀 더욱 미로(迷路) 속을 헤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6쪽)”고 아리송한 느낌을 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치매와 같은 신경계의 퇴행성질환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느 해 참가한 국제학회에서 치매라는 분야의 연구성과를 설명하면서 화면을 가득 채운 블랙박스를 제시하면서 “치매에 관하여 무지한 상태였는데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하여 이 박스를 열 수 있었습니다.”라면서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는데, 다음 슬라이드는 처음의 블랙박스보다 크기가 작아진 세 개의 블랙박스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치매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재치있는 표현이었지요.

 

이 책의 주제는 “물리학으로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물리학자와 생물학자 양쪽 모두에게 근본적인 것이면서도 생물학과 물리학 사이에서 해결 안된 개념들을 분명하게 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라고 한다면, 슈뢰딩거는 최근에 화두가 되고 있는 학문간의 통섭 혹은 융합에서의 전형적인 모형을 이미 60년 전에 제시한 셈입니다. 스스로를 낮춰서 ‘유기체에 대한 물리학자의 소박한 개념’이라고 하면서도 유기체가 행동하고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하여 자신이 공부한 것(물리학), 즉 단순하고 명백하며 그리고 변변치 않은 자기의 과학적 관점이 그 문제해명에 어떤 적절한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았는데, 결론은 “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31쪽)”고 과감히 고하고 있습니다.

 

1부의 ‘주제에 대한 고전물리학자의 접근’에서는 생명현상을 설명하는 물리학적 방법론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원자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독자들을 일깨운 다음, 유기체의 작용은 물리법칙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 물리법칙들은 원자통계학에 의존하고 있으며 다만 근사적일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상자성(常磁性), 브라운 운동과 확산 그리고 정확한 측정의 한계를 보기로 들고 있습니다.

 

이 책에 부록으로 더해진 영국의 철학자 로버트 올비교수에 따르념 슈뢰딩거는 이 책을 통하여 생명현상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생명은 스스로의 구조를 파괴하려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저항하는가? 둘째, 생명체의 유전물질은 어떻게 불변인 채로 유지되는가, 셋째, 이 유전물질은 어떻게 그리도 충실하게 그 자체를 재생산해낼 수 있는가? 그리고 넷째, 의식과 자유의지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입니다.

 

저자는 원자의 크기를 예시하면서 유전물질은 원자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라는 점, X선 조사 등에 의하여 생기는 돌연변이가 구성원자의 변이로 나타날 것이라든가 단일사건 혹은 국소성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전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의 상호작용은 양자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수정란의 핵과 같이 그렇게 작은 물질 속에 어떻게 유기체의 발달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는 정교한 부호가 들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자주 제기되어왔다.(129쪽)”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르스 부호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25개 기호의 조합만을, 그리고 가정한 다섯 가지 유형들을 각각 정확히 5개 갖는 5점, 5선 등의 조합만을 채택하면 조합의 수는 62조 330억이 된다.(130쪽)” 엄청난 경우의 수가 되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고 특수한 발달계획에 정확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처음에 예를 들었던 B세포의 기억세포가 다양한 항원에 대한 정보를 유전자 재조합과 재배열방식을 통하여 갈무리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의 설명입니다.

 

생명의 특징인 살아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열역학적 평형상태, 즉 ‘최대 엔트로피’ 상태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무생물체는 통상적으로 아주 빠르게 이런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데, 살아 있는 물체 즉 생물체는 평형으로 이행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물체는 계속해서 자체 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데 그 결과 최대 엔트로피의 위험한 상태에 접근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섭취하는 음의 엔트로피로 평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설명에 대하여 신이치교수는 슈뢰딩거의 오류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음의 엔트로피를 위해 음식물에 함유된 유기 고분자의 질서를 섭취하는 것이 아니다. 생물은 소화 과정에서 단백질이든 탄수화물이든 유기 고분자에 함유되어 있을 질서를 잘게 분해하여 거기에 함유된 정보를 아낌없이 버린 후에야 흡수한다. 왜냐하면 그 질서란 것은 다른 생물의 정보에 들어있건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는 노이즈가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후쿠오카 신이치, 생물과 무생물 사이 132쪽)” 신이치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섭취를 통하여 엔트로피의 증대를 되돌리는 기전을 설명한 슈뢰딩거의 아이디어는 훌륭한 것입니다. “질서는 유지되기 위해 끊임없이 파괴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던 루돌프 쇤하이만의 주장을 인용하여 신이치교수는 “생명이란 동적 평형상태에 있는 흐름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울문고에서 나온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독특한 점은 1943년 2월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슈뢰딩거가 행한 몇 차례 강연의 원고를 묶어 1944년에 발간된 텍스트에 더하여 영국 리즈대학교 철학과 로버트 올비교수가 1971년 생물학사학회지에 발표한 논문 “슈뢰딩거의 문제점-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부록으로 덧붙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슈뢰딩거가 논의한 내용의 의미와 의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 때문이라는데, 올리교수의 어떤 지적에는 수긍할 수 있지만 어떤 점은 지나치다 싶은 점도 있습니다. 올비교수는 엔트로피의 문제에 있어서는 신이치교수처럼 비판적인 논지를 펼치고 있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유전물질의 영속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화학적 부호를 고안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공감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이 분야에서의 발전을 보면 슈푀딩거의 착안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올비교수는 세포의 생물학을 화학과 물리학으로 환원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에 대하여 지나치게 분석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올비교수가 분석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담고 있는 슈뢰딩거의 참된 목적은 “세포의 특별한 계층적인 조건들에서 ‘질서로부터 질서’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것(233쪽)”이었는데, 와트슨과 크릭과 같은 물리학자들에게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물리학에 대한 앎이 일천한 까닭에 슈뢰딩거교수의 심오한 물리학적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고백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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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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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따로 무리를 이루어 상황이 전개됩니다. 고요한 집에서는 파트마가 레젭에 대한 평소의 불편한 심기가 점점 고조되고, 고인이 된 남편 셀라하틴이 생전에 벌인 일들이 고요한 집,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위축되는 모습이 파트마의 회상을 통해 점차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셀라하틴이 하녀로부터 얻은 아들 레젭은 파트마의 아들 도안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고요한 집에 남아 매사에 트집을 잡고 있는 파트마를 돌보는 것은 난장이라는 신체적 요인과 셀라하틴이 생전에 남긴 파트마에게 잘하라는 유지에 따르는 이외의 다른 복선은 없어 보입니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셀라하틴과 그 아들 도안이 그랬듯이 파룩은 소위 지식계층의 주류에 진입하지 못하고 낙오한 자신들의 위치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로 달랬던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 가운데 현실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고요한 집의 3대에 해당하는 메틴과 레젭의 조카 하산입니다. 메틴은 할머니 파트마의 보석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정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고요한 집을 재건축하여 아파트를 지어서 자금을 만들 생각으로 할머니를 설득하지만 주변의 변화가 싫은 파트마는 요지부동인 것 같습니다.

 

한편 어릴 적 친구들인 이곳 상류층 아이들과 어울리는데, 이들이 모여서 하는 짓들이라는 것이 술마시기, 차를 몰고 다니면서 경주하기,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를 위협하기, 바다에서도 보트를 난폭하게 운전하기 등등,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일탈한 모습을 보이는 젊은이들의 전형을 볼 수 있습니다. 파묵은 젊은이들의 이런 방종한 모습에 대하여 긍정적이지 않다고는 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이들에 대하여 제제를 가하지 않고 방임하는 모습은 의외라 하겠습니다. 작가의 방임주의는 이어서 정리할 하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메틴이 어울리는 그룹에서 제일란에게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그런 사랑을 로맨틱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접근하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하고서야 좌절하게 되고, 그 끝에 하산네 그룹과 부딪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는 하산 역시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하산은 공부에 집중하라는 아버지 이스마일의 당부는 애당초 관심 밖이고 반공산 민족주의를 앞세우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도 고요한 집에 온 닐귄에게 꽂혀 그 뒤를 쫓게 되는데,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사랑에 빠졌느냐는 비아냥을 피하기 위하여 그녀가 공산당이라는 사실을 발설하고 마는데, 이런 이념적 갈등은 그녀와의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산 역시 메틴과 마찬가지로 닐귄을 뒤쫓다가 거리에서 사랑을 고백하는데 “이 미친 파시스트, 날 놔줘”라는 그녀의 답변을 듣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메틴이나 하산이나 여성에 대하여 참 무지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터키 젊은이들은 다 그런가요? 닐귄의 답변에 놀란 하산은 그녀에게 벌을 가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녀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게 되는데, 이런 모습에서 터키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닐귄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됩니다만 구타를 당해 부상을 입은 사람에 대한 구호에 무관심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가족들 간에 관심이 별로 없는 탓일까요?

 

지정학적으로 보면 터키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교량과 같은 곳입니다. 당연히 상황에 따라서는 동양문명과 서양문명이 충돌하거나 교류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이 부딪히는 모습보다는, 유럽문명에 경도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도 의외라면 의외일 수 있겠습니다.

 

파트마씨는 닐귄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셀라하틴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던 장면을 떠올립니다.(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맞는 이야기인지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셀라하틴이 발견했다는 서양과 동양를 구분하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은 바로 “죽음이라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을, ‘무’를 자각한 것”이라고 하는데, 천년 동안이나 거대한 동양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셀라하틴은 주장했던 것입니다(217쪽). 사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헷갈린 것은 죽음에 서 ‘무’라는 개념을 정립한 것은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 아니던가요?

 

정리를 해보면, <고요한 집>은 전작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처럼 터키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문제를 압축하여 전하고 있는데, 전작에 비하면 극적인 갈등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차분하고 상황의 기록자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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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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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의 두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데뷔작인 <제브데트씨와 그 아들들>이 3대에 걸친 가족들과 그 친구들까지 얽혀 이스탄불, 앙카라 그리고 동부의 케마흐에 걸친 여러 곳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방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요한 집>은 이스탄블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휴양도시 젠네트히사르를 무대로 하고 등장인물 역시 오래된 3층(혹은 4층) 가옥에 살고 있는 파트마라고 하는 아흔살 된 노파와 쉰다섯살 하인 레젭을 두 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어 단출해 보이지만 사실은 터키의 복잡한 사회상이 축소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파트마는 남편인 의사 셀라하틴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이곳으로 쫓겨 올 때 같이 오게 되지만 남편은 개업보다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여 명예를 되찾겠다는 야심에 매달리는 바람에 수입이 없어 집안의 물건을 하나둘 내가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데, 그 와중에 하녀와의 사이에 난장이 아들 레젭과 절름발이 아들 이스마일이 태어나게 됩니다. 두 아들은 케마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결국은 셀라하틴과 파트마 사이에 난 아들 도안이 이들을 다시 데려오고 레젭이 살림을 맡게 되면서 결국은 아흔된 의붓어머니를 돌보는 모한 동거관계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백과사전을 편찬하던 셀라하틴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고, 그 아들 도안 부부 역시 세 아이를 두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사는 오래된 집을 마을사람들은 ‘고요한집’이라고 부릅니다.

 

등장인물의 이런 관계는 파트마와 레젭의 생각의 흐름에 따른 회상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게 됩니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의식의 흐름을 세밀하게 서술한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서 만났던 기법이기도 합니다. 그밖에 <조용한 집>에서 눈에 띄는 독특한 기법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화자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장면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화자가 되는 기법은 처음 만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장면이 시작되고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따라가야 ‘나’가 누군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1980년 7월, 여름을 맞아 파트마의 손주 세 명이 이 곳을 찾아 일주일을 머무는 동안에 펼쳐지게 됩니다. 큰 손주 파룩은 역사가로서 이곳의 관공서에 보관되어 있는 고문서들을 뒤져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여 책을 쓰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손녀 닐귄은 대학생인데 혁명주의자이며 막내 메틴은 고등학생인데 미국으로 가서 살겠다는 야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도착한 다음날 파트마와 함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 참배한 다음부터 세 명의 손주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제각각입니다. 파룩은 관공서를 찾아 오래된 문서를 뒤져 정리하는 한편 밤에는 시내에 나가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닐귄은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신문을 사들고 오는 것이 일과입니다. 이런 닐귄을 바라보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스마일의 아들 하산입니다. 하산이 어울리는 패거리들은 이지역의 하층에 속하는 청년들로 공산당과 대립하는 이상주의자 집단입니다. 공산당과 싸울 군자금을 모은다는 핑계로 시장상인들에게 성금을 강제로 빼앗기도 하고, 페인트로 공산당을 반대하는 낙서를 적고 다니기도 합니다. 하산은 닐귄이 배다른 사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편 매틴은 어렸을 적 같이 놀던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그 가운데 제일란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에 꽂혀 있습니다. 이들은 위태롭기만 합니다. 모여서 술을 마시고 그러다가 보트를 몰고 바다로 나가기도 하는데, 수영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아찔한 순간도 예사롭게 하고, 차를 몰고 나서면 지나는 차를 위협하여 도로가로 밀어붙이기도 하는 등 요즘으로 치면 폭주족이라 할 만합니다.

 

파묵은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했다는데, <고요한 집>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이 누구인지 쉽게 연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파트마의 회고 가운데 조명상인 제브데트씨가 전쟁중에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정도, 그리고 니갼, 외메르, 지야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등장하는 제브데트 씨의 아내 니갼, 둘째 아들 레피크의 친구 외메르, 조카 지야와 동일인물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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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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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간여행으로 이야기를 버무린 우리 드라마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 주 종영된 <신의>를 비롯해서 <옥탑방 왕세자>, <닥터 진> 등은 재미있게 보면서 드라마 주인공처럼 어느날 갑자기 시간여행의 입구에 빠져 엉뚱한 세상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공연한 걱정을 해봅니다. 과거로의 여행이라면 그래도 드라마처럼 아는 상황을 맞게 되겠지만, <옥탑방 왕세자>처럼 미래로 날아가게 되면 정말 황당할 것 같습니다. 과거로 떠난 여행에서 당시의 상황에 개입한 결과가 후세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도 시간여행에 대하여 가지는 또 다른 궁금증입니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창의적인 해결책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신작, 11/22/63을 먼저 읽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역시 “스티븐 킹!”이란 느낌입니다. 11/22/63은 미국식으로 적은 1963년 11월 22일을 의미하고, 미국인들에게 이날은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달라스에서 암살자 오스왈드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비극적인 날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찰에 체포된 저격범 역시 이틀 후에 암살당했는데 이 사건을 두고 다양한 음모설이 제기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특정한 사건의 결과에 대하여 아쉽게 생각하는 사람은 혹시 과거로 날아가서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면 현재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작에서 스티븐 킹은 시간여행을 통해서 케네디의 암살을 막는다면 미국인들은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의>에서는 시간여행의 출입구로 고려 공민왕 초기에 원나라 모처에 있는 하늘문이 현대의 봉은사 석불과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을 만들었는데, 이 하늘문은 열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시점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스티븐 킹은 흥미로운 시간여행규칙을 만들어냈습니다. 현재의 미국 메인주 리스본 폴스에 있는 트레일러의 창고에 있는 시간여행의 입구는 1958년의 어느 날의 같은 장소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서 머무는 시간이 얼마가 되더라도 들어갔을 때보다 2분 정도 지난 현재의 시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스티븐 킹의 시간여행은 한 차례의 여행으로 완결된 상황이 다음 번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 리셋된다는 특징을 가지기 때문에 과거에서 만난 사람들은 아무리 다시 만나도 시간여행자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눈치를 채고 있는 듯한 인물은 1958년 시간여행의 출구에서 만나는 옐로 카드맨이지만 그도 결국은 예사롭지 않은 죽음을 맞기 때문에 시간여행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과거나 현재에서 주인공인 제이크 에핑과 그 친구 앨 템플턴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앨 역시 제이크가 케네디암살을 저지하기 위한 세 번째 여행을 떠나도록 압박하려고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기 때문에 제이크가 유일한 인물인 셈입니다.

 

과거가 리셋되어 반복되는 상황이 주는 황당함은 1993년에 개봉된 <그라운드호그 데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2월 2일이라는 하루의 시간에 갇히는 특별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면서 타인을 돕고 그리고 자신 역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모시키면서 시간의 덫을 탈출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11/22/63>의 1권에서는 주인공 제이크가 케네디대통령 암살저지라는 중대한 미션을 앞두고 시간여행에 적응하는 단계입니다. 저자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 과거에 일어나는 상황에 개입하는 것 역시 쉽지만은 아닌 것이라는 설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에 미치는 영향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미미할 수도 있지만, 기상학에서 말하는 나비효과처럼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이 인과관계로 얽히면서 엄청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저항은 과거의 사건이 미래에 미치는 영향의 크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깔끔한 번역으로 책을 읽는 호흡이 좋은 탓인지 흥미로운 이야기의 전개에 빠져들어 단숨에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도입부에서 만난 인연을 시간여행을 통하여 해결한 제이크가 케네디 암살사건을 저지하기 위하여 달라스로 이동하기까지 진행된 이야기의 후속편이 궁금해집니다. 그는 한번의 시간여행으로 케네디 암살을 막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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