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가슴으로 말하라 - 손님을 대하는 의사인가 사람을 돌보는 의사인가
황진복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학, 역사, 철학을 아우르는 인문학을 의학의 교과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북소리] 코너를 통하여 다양한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얻은 느낌을 소개해온 것처럼, 책읽기를 통하여 무언가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싶지만 한발 더 나아가 의학과 연관을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습니다.

 

황진복교수님의 <의학, 가슴으로 말하라>는 바로 그런 인문학공부의 좋은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좋은 의사’가 되기를 꿈꾸지만 자신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어 앞날에 대한 안목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의학도를 위한 자기계발강의록입니다. (…) 어딘가에 숨어있을 능력을 찾아 이를 흔들어 깨우고, 지나치게 웃자란 오해와 편견을 가지 쳐 없애 당신이 보다 ‘좋은 의사’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이 책을 집필한 목적입니다.(11쪽)” 라고 적으신 집필의도에 공감하게 됩니다.

 

제가 의과대학에 들어갈 때와는 달리 수능시험에서 상위권 성적으로 얻은 학생들이 의과대학으로 몰리고 있는 현상이 꽤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머리가 좋은 분들이 연구와 진료 등의 의학분야에서 들어오셔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내면 우리나라의 의학수준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재들이 모두 의학에 쏠리는 현상은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의학은 수재형보다는 근면성실하고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황진복교수님 역시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요즈음 분위기에 대하여 이미 졸업한 의사들이나 의과대학생들 모두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볼멘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의학이 홍수처럼 쏟아내는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도 벅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순간 잠시 멈추어 서서 마음의 평안을 준비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고 저자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의학, 가슴으로 말하라>는 인문학적 감수성으로 의학에 접근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근대의학이 시작될 무렵 있었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살펴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반으로부터 비판적인 시선을 받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25세 여자 백혈병으로 사망, 오전 5시 45분’이라는 글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치 사망선고를 듣는 느낌입니다. 자신의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전하는 일은 어느 의사에게나 마음이 무거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의사는 ‘의사’라는 이유로 ‘사람’이 알아야 할 환자의 스토리에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닐까?(23쪽)”라는 저자의 질문이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백혈병으로 사망한 25에 여자는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시체도둑, 야반도주, 아동노동’이라는 제목의 글은 의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뼈아픈 자기반성이라 하겠습니다. 요즈음에는 의학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숭고한 정신으로 시신을 기증하신 분들 덕분에 기초의학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장례를 치른 시체를 훔쳐서 해부를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멜라니 킹의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6588>에서 시체도둑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습니다. 중세에 사체가 질병을 치료하는데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체를 훔쳐 약제로 팔았다는 이야기도 다루고 있는데, 이런 황당사건이 현대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요즘 우리사회에서 은밀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의학교육에서 인문학 교육이 빠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현대의학을 교육하면서 조선인의 정신적 계몽이나 진보를 일깨울 인문학 교육을 배제한 것이 시초인데, 조선인은 단순 지식만을 배워 일상에서 보조하는 역할에 그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안덕선교수님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사가 차갑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견제장치가 미흡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인문학이라는 비판자를 배제하자 과학과 기술의 힘은 더욱 거세졌으나 점점 그들의 속성을 빼닮아 차가워지고, 대학이 양산한 사람들은 기술자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48쪽)”고 설파한 것처럼 과학적 방법론을 차용하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의학 역시 과학의 행보를 뒤쫓게 된 것입니다. 즉 환자로부터 얻는 정보의 비중은 점차 낮아지고 환자로부터 얻는 숫자정보에 의존하는 진료가 되다보니 환자의 교감이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저자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보니 의학의 본질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 시각을 가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저자의 해석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현재 사람의 수명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비하면 거의 두 배나 길어졌는데, 인간의 평균수명을 늘리는데 의학이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주장(50쪽)은 지나쳐 보입니다. 근대에 들어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농업 및 유통의 혁명으로 먹거리가 풍부해진 것이 평균수명의 연장에 기여한 바가 의학의 기여보다 획기적이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으나, 항생제의 개발로 감염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고, 소독법 및 분만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모성사망과 신생아 사망을 극적으로 줄인 것은 분명 의학이 인간의 평균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린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밖에도 불치병이라 여겼던 암질환 가운데 상당수를 만성질환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 것 역시 평균수명의 늘린데 대한 의학의 기여라고 하겠습니다.

 

의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보면 과학의 한 분야라는 사실에 대하여 찬반양론이 있으나 분명 응용과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학의 논리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한계가 있으니 그 이유는 과학과는 달리 인간이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학이 과학분야에서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어 현재의 위치에 도달하기까지 환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점차 빛을 잃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바로 지금이 변해야 할 시점이라는 점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에도 혁신을 통해 변화해왔지만 변화의 폭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폭도 점차 커지고 있어 거부하는 반응이 생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혁신의 부작용 사례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병원진료의 적정성평가에 관한 내용을 심각하게 읽었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업무가 바로 병원진료의 적정성평가이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의 환자사망률을 공개하게 되자 병원들이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상태가 위중한 중환자를 진료하기 않는 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고, 병원의 진료의 질을 높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혁신적으로 시작한 적정성평가는 진료의 차별성이 없는 병원진료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옮겨보면, “평가는 진료 프로토콜을 표준화된 방식으로 유도하여 의료과실을 줄일 수 있는 여건 조성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각 병원의 차별성을 없애고 진취적인 진료를 봉쇄해버리는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89쪽)”

 

하지만 적정성평가의 기본틀에 대하여 다소 오해하고 계신 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수술사망률을 공개하면서 병원계에 커다란 파장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평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환자진료에 소홀함이 없도록 중환자를 진료하는 병원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적절한 보정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치료법을 적용하는 경우에는 적정성평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어 의학발전에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오해가 없으면 합니다. 다만 표준프로토콜을 적용한다는 점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시한 표준치료가 아닌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치료법을 차별된 치료라는 주장이 과연 환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가 1부에서 의학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인문학적 시각에서 조명했다면, 2부에서는 인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좋은 의사’가 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수재보다는 근면성실한 사람이 환자의 아픔을 같이하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앞서도 드렸습니다만, 저자 역시 의사가 되는데 필요한 요소를 의학지능이라고 부른다면 의학지능은 다중지능의 요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성찰지능, 대인친화지능, 논리수학지능의 논리지능, 언어지능은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며, 논리수학지능의 수학지능, 신체운동지능, 공간지능, 실존지능 등은 활용가능성이 높은 지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좋은 의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의학지식은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지식이며, 여기에 다양한 능력을 더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그 종류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의학지식의 습득에만 매달리다 보면 의사로서의 갖추어야 할 인성을 연마하지 못한 채 의업에 나서게 될 수밖에 없고 이런 의사들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주제를 소통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일반이 잘 모르는 의학지식의 권위에 기대어 환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대해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건강과 관련된 정보에는 일반인의 관심이 크기 때문에 건강정보가 가장 빠르게 대중화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요즈음에는 의학정보의 불균형이 많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의학지식의 권위는 종이호랑이가 된지 오래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은 진심을 담은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의료과오로 소송을 당하는 의사의 스타일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참고하도록 귀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처럼 적절한 사과는 슬픔에 잠겨 있는 환자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다는 점을 소개하는 다양한 책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책으로는 정재승과 김호교수의 <쿨하게 사과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47514>입니다.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맞는 불행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가족들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 자신이 특별한 과오가 없다하여 사무적으로 대하다 보면 상황이 꼬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환자와 가족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왜 있는지 생각해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의료과오가 있는 경우에도 때를 놓치지 않는 진심을 담은 사과는 상황을 부드럽게 이끈다는 것을 <쿨하게 사과하라>의 ‘쏘리웍스! 사과는 반드시 먹힌다’에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환자를 진료하는데 있어서도 원활한 소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제롬 그루프먼의 <닥터스 씽킹; http://blog.joinsmsn.com/yang412/8719292>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통이라 함은 의사는 열린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것이며, 환자 역시 자신의 질환에 관한 모든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하고 의사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다양한 영역에 걸친 저자의 방대한 책읽기에 놀라게 되고, 책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책에서 얻은 주옥같은 내용을 엮어서 의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참고서로 꾸며낸 저자의 글쓰기에도 역시 놀라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라고 오르한 파묵은 말했다고 합니다만, 엄밀하게 말하면 고요한 집에 등장하는 파룩이 <하얀성>의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 <고요한 집;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57187>과 <하얀성>이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오히려 첫 작품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을 완성하고서 구상을 시작했다고 <하얀성>의 작품해설에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구상을 <고요한 집>에 일부 반영한 것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얀성>은 그의 엄청난 독서편력의 결과가 집대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하얀성>에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베네치아 학자 출신 노예, 그리고 그와 닮은 터키 학자 호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을 비롯하여 쌍둥이가 등장하는 문학작품을 참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서 오스만인 호자는 나의 고향 베네치아로 건너가고 나는 호자로 변신하여 터키에 잔류하는 반전을 보이는데, 저자가 이런 반전을 유도한 이유는 오랜 세월을 통한 담론을 통하여 두 사람이 서로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 즉 동서양이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저자의 이런 문학적 경향은 2006년 스웨덴 한림원이 파묵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파묵은 고향인 이스탄블의 음울한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 간 충돌과 복잡함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216쪽)”고 한데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밖에도 아드난 아드와르의 <오스만 터키의 과학>, 아서 케스틀러의 <몽유병자들>, 쉬헤일 윈베르의 <이스탄블 천문대> 등의 책에서 얻은 영감을 <하얀성>에 녹여냈다는 것입니다. 특히 몽유병자에서의 독일 천문학자 케플러의 해석 ‘나는 왜 나인가?’는 <하얀성>에 등장하는 나와 호자가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향하던 중 터키함대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터키로 끌려간 주인공은 평소 읽어둔 의학지식을 활용하여 의학자 행세를 하면서 노역을 피하였을 뿐 아니라 터키의 학자 호자의 노예로 주어지면서 구속이 풀리고 호자와 함께 천문학, 생물학, 점성술, 의학, 무기제조 등 과학전반에 걸쳐 토론하고 연구를 계속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파디샤를 중심으로 한 파샤들 사이의 권력다툼이 그려지고 있고, 두 사람 역시 파디샤의 관심을 끌어 연구활동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받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가 멸망하면서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이 로마로 건너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오히려 터키 등 중동지방으로 많은 학문적 성과가 넘겨져 번역되어 연구되고 발전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파묵의 작품 곳곳에서 읽을 수 있는 유럽문화를 동경하는 터키의 분위기가 사실 이해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읽어가면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7세기의 중반으로 되어 있음에도 흑사병이 퍼져서 터키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장면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다음 백과사전에 따르면 “중국과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흑사병은 1347년 킵차크 군대가 크림에서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의 시체들을 노포(弩砲)로 도시를 향해 쏘아보냄으로써 유럽인들에게 전파되었다. 흑사병은 지중해 항구들로부터 퍼져나가 1347년 시칠리아, 1348년 북아프리카·이탈리아·스페인·영국·프랑스, 1349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독일, 베넬룩스 3국, 1350년 스칸디나비아와 발트 해의 국가들에 영향을 끼쳤다. 흑사병은 1361~63, 1369~71, 1374~75, 1390, 1400, 1664~65년에 다시 유행”했다고 합니다. 14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약 2,500만명이 죽었다는 것이고, 영국의 경우 1300년과 비교하면 1400면에는 인구가 절반에 불과하였다니 유럽인들에게 흑사병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1664년의 유행은 런던을 중심으로 영국에 유행한 것이기 때문에 17세기 중반에 터키에서 흑사병이 대유행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17세기 중반으로 했지만 그 전후에 있었던 작은 삶의 단편들도 반영했다고 한 저자의 설명을 참고하면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얀성’이라는 제목에 대하여, 파디샤는 폴란드를 공략하기 위하여 출전하면서 호자가 개발한 무기(아마도 장갑차로 보입니다)를 가지고 가는데 역시 날씨와 전장의 상황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전투에 실패하고 마는데, 당시 공략하던 성이 바로 하얀색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빛이 반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존재는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180쪽)” 결국 하얀성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의미하는 것, 나아가 동서양이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닐까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린행정실무 - 저탄소 녹색도시구축 방법과 사례
이순영.신범석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10월 21일 국제녹색기구기금(Green Climate Fund; GCF)의 사무국을 인천 송도 유치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녹색기후기금은 UN의 산하기관으로, 전세계적 과제인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막대한 재원을 총괄하는 기구입니다. 녹색기후기금은 자체 자금조성이 어려운 개발도상국이 온실가스를 감축하고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하여 선진국이 UN 기후변화협약(UNFCCC)을 중심으로 만든 기후변화특화기금을 지칭합니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연간 1,000억 달러, 총 8,000억 달러(904조원)의 기금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금의 규모는 국제통화기금(IMF)의 8,450억 달러에 버금가는 규모로서 사무국을 우리나라에 유치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동안 정부가 녹색정책을 꾸준하게 개발하고 이를 발전시켜온 노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물이나 공기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인간문명이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 근대들어 화석연료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 까닭에 자연이 파괴되고 온실가스가 급속하게 늘어나 일어나고 있는 지구온난화 등으로 병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을 지구의 위기상황으로 규정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으로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입니다.

 

녹색교육원이 기획하고 이순영박사님과 신범석 박사님이 쓴 <그린행정실무>에서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관련분야에서의 국내외 추진현황을 담고 있어 그린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기후관련 문제는 선진국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것으로 우리 형편에 논의의 장에 진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 머물고 있던 것인데,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저탄소 녹색성장”을 국가비전으로 선포하면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들이 소개하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스웨덴의 하마비 허스타드(Hammarby Sjostad), 영국의 베드제드(BedZED), 일본의 쓰쿠바 등의 해외사례를 읽다보면 녹색산업은 주민의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주민의 생활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효과도 거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녹색성장을 화두로 내세우면서 녹색성장위원회의 ‘생생도시’, 국토해양부의 ‘U-City’, 환경부의 ‘저탄소 그린시티’, 지식경제부의 ‘온실가스감축정책’ 등이 추진되고 있고, 강릉시에서는 ‘저탄소 그린시티 국가시범사업’을, 서울 성동구에서는 ‘저탄소 그린시티 마스터플랜’을, 경남 창원시에서는 ‘자전거도시 조성’을 추진하는 등 주민친화적인 그린행정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주제가 되고 있는 그린행정은 회색개발 위주에서 벗어나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의 생태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실천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색개발의 예를 들면, 콘크리트 및 아스팔트로 대변되는 도시개발정책, 화석연료중심으로 발전해온 에너지정책, 교통량증가를 도로건설로 대응해온 교통정책, 폐기물 매립 혹은 소각 위주로 전개해온 폐자원정책 등입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시민참여가 배제된 가운데 추진되어 온 것으로 그 한계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다양한 그린행정의 사례를 소개하고, 핵심전략 추진 로드맵, 핵심 전략별 재원조달 방안을 비롯하여 평가지표, 제도화를 위한 조례 제정 등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일선에서 그린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미제라블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3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부의 제목은 마리우스입니다. 마리우스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1831년 당시 파리의 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떠돌이 생활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파리 변두리의 성긴 모퉁이나 음산한 담모퉁이에서 얼굴이 핼쓱하고 흙과 먼지투성이의 남루한 더벅머리 소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들은 가난한 집에서 뛰어나온 소년들이라는 것입니다. 테나르디에부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딸은 귀하게 키우면서도 아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을뿐더러 어린 아이들을 남에게 주어버리는 짓까지도 하는 모습을 보면 당시 파리사회는 남존여비사상이 뿌리 깊던 동아시아 사회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파리가 우아한 도시인 것처럼 그리려 하고 있지만, 그가 스케치하고 있는 거리풍경은 민중들의 삶이 불안하여 사회가 동요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 말미에 이 긴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리의 아이 가브로슈가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뒤에 밝혀지게 되지만 가브로슈는 테나르디에의 큰 아들입니다만, 부모의 냉대를 견디다 못해 거리로 뛰쳐나온 부모가 있으면서도 고아인 소년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이 아이는 거리에서만큼 기분 좋은 때가 결코 없었다. 포도는 그에게 제 어머니의 마음보다 덜 냉혹했다.(43쪽)”고 했겠습니까? 그래도 가끔은 고르보의 누옥이라고 부르는  50-52번지의 집에 들를 때가 있는데 이 집은 바로 장발장이 파리에 잠입했을 때 처음 몸을 숨겼던 곳이기도 하며, 3부의 주인공 마리우스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작가들은 가급적이면 같은 장소에 등장인물들을 모아 사건을 전개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파리 거리의 아이들에 대하여 한바탕 설명을 늘어놓은 끝에 3부의 주인공 마리우스의 배경에 대한 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부의 첫 번째 이야기였던 워털루전투의 끝장면에 등장했던 퐁메르시 대령이 바로 마리우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퐁메르시 대령은 왕당파 질노르망 노인의 둘째 사위인데 공화주의자인 그는 장인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사이였고, 아내가 죽은 다음 아들 마리우스를 노인과 처형에게 내주고는 외롭게 살다가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할아버지의 배려로 아버지의 사후를 수습하게 된 마리우스는 퐁메르시 남작의 유언을 읽고서 공화주의자로 변신하게 되고, 종국에는 질노르망 노인에게 들통이 나면서 집을 나가게 됩니다. 이 또한 코제트와의 만남을 위한 신의 섭리라고 보아야 할까요?

 

저자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의 흐름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1831년)에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어떤 혁명적인 떨림이 은연중에 흐르고 있었다. 1789년과 1792년의 심층에서 되돌아온 숨결이 공중에 감돌고 있었다. (…) 시계 문자판에서 가고 있는 바늘은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역시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걸어가야 할 걸음을 앞으로 걸어 나아가고 있었다.(131쪽)” 그것은 1932년 혁명으로 분출되기 위하여 에너지를 축적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뮤쟁다방의 뒷방을 근거지로 하여 뜻을 모으고 있던 청년들의 모임에 들어가게 되면서도 운명은 그의 발길을 코제트와 장발장 그리고 테나르디에와 에포닌과 얽히도록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본격적인 만남이 있기 전에 우연히 조우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마리우스는 뤽상부르공원의 인적이 드문 통로에 있는 벤치에서 쉬고 있는 한 남자와 아주 어린 처녀와 반복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들이 우연히 같은 50-52번지에 살고 있는 종드레트(사실은 테나르디에가 사용하는 여러 가명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족들이 돈많은 노인과 어린 처녀를 위협하여 돈을 빼앗을 음모에 말려들게 되면서 그들이 바로 뤽상부르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것과 종드레트가 바로 아버지의 유언에 나오는 테나르디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범행도 막아야 하겠고, 아버지의 은인을 도와야 하는 갈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우스는 진행되는 음모를 경찰에 신고하게 되는데, 그 경찰이 바로 자베르형사라는 점도 우연이 연속되면 필연이라는 공식을 깨닫게 합니다. 사건현장에서 자베르형사와 조우하게 된 장 발장은 현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탈출할 수는 있었지만, 자베르 형사의 마음 구석에 의구심을 남기게 됩니다.

 

3부는 1,2부와는 달리 등장인물도 많고 이들이 서로 얽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 등장인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다소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의 파리의 하층민들의 삶과 공화정 이후 왕정복고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미제라블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2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부의 제목은 ‘코제트’입니다. 당연히 코제트의 삶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부의 일곱 번째 이야기 ‘여담’에서 저자는 “이 책은 무한을 첫째 인물로 삼고 있는 드라마다. 인간은 둘째 인물이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옮긴이는 원문에 쓰인 'infini'라는 단어에는 ‘무한’이라는 뜻 외에 ‘무한한 존재, 절대자, 하느님’이라는 뜻이 있다고 각주를 달아놓으셨습니다. 손오공이 재주를 부려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더라는 이야기처럼 저자는 인간사가 복잡하게 얽혀드는 것이 참 신묘하다고는 하지만 절대자의 뜻에 따라서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1부의 시작에서 디뉴교구의 미리엘주교의 성품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2부의 시작은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마지막으로 치룬 워털루 전투의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자가 워털루전쟁에서 나폴레옹의 패배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이유는 왕정을 타도한 프랑스혁명을 계승한 공화정이 나폴레옹의 패전을 계기로 하여 왕정으로 복귀하게 된 것에 대한 시대적 아픔을 바탕으로 근왕파와 공화파의 갈등을 예고하고, 코제트와 엮이게 될 마리우스의 배경이라던가, 1부에서도 등장했던 테나르디에가 이야기의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인물들과 끈질기게 엮여 있다는 점을 설명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워털루 전투의 진행과정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생각도 엿보이는데 저자는 나폴레옹의 자랑인 포병이 전투를 앞두고 내린 폭우 때문에 적기에 기동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地利)는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들었습니다만, 하늘의 뜻을 얻지 못해 패전을 피하지 못했다는 변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1부에서 마들렌으로 변장하여 시장으로 활약하던 장발장이 자신의 죄를 뒤집어쓰게 된 샹마티외의 법정에 출두하여 자신이 장발장임을 밝히고 수감되었다가 팡틴이 부탁한 코제트를 구하기 위하여 탈옥하였지만 결국은 다시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진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1부에서도 느낀 점입니다만, 빵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은 수감 중에 몇 차례에 걸쳐 탈옥을 시도하는 바람에 가중처벌된 것인데, 수감생활이 그의 삶에 탈옥을 반복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던가 하는 점입니다. 형기를 채우고 출옥하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2부에서도 다시 탈옥에 성공하는 장발장은 몽페르메유로 가서 테나르디에의 여관에서 하녀로 구박받고있는 코제트를 구출해서 파리로 잠입하게 되는데, 자베르의 추격을 받는 탈옥수가 미국과 같은 외국으로 도주하거나 한적한 시골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파리로 잠입한 것도 의외입니다. 파리로 잠입한 초기에는 허름한 집을 세내어 지내지만 정말 우연히 자베르와 조우하여 쫓기게 되고 시장을 지내던 시절에 구해주었던 포슐르방의 도움으로 수녀원에서 숨어 지낼 수 있게 됩니다. 아마도 어린 코제트가 안정적인 생활과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일까요?

 

“그런데 신은 자기의 길을 가고 있다. 수녀원은 코제트처럼, 장 발장 속에 미리엘 주교의 사업을 유지하고 완성하는데 이바지 했다. 덕의 여러 면 중 한 면은 교만에 이르는 것이 확실하다. 거기에 악마가 놓은 다리가 있다. 장 발장은 아마 부지불식간에 그 면에, 그리고 그 다리에 꽤 가까이 있었을 것인데, 그때 하늘의 뜻은 그를 프티 픽퓌스 수녀원에 던졌다. 자기를 주교하고만 비교했던 동안에는 그는 자기가 비천하다고 느꼈고 그는 겸손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그는 자기를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했고, 교만이 싹텄다. 누가 알랴? 그는 아마 마침내 아주 서서히 증오심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수녀원은 그를 그 비탈 위에 멈추어 세웠다.(449쪽)” 역시 신의 뜻이라는 것이죠.

 

악은 악을 낳고, 선은 선을 낳는 법입니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에 장발장과 테나르디에가 대표적인 극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리엘주교의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쫓기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어려운 사람들을 보듬고 선행을 베풀고, 테나르디에는 기회만 있으면 남의 것을 훔칠 궁리만 하는 모습으로 비교되고 있습니다. 장발장은 위기의 순간을 맞아서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반면 테나르디에의 가족들은 파산하여 파리로 흘러들어와 바닥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신의 뜻일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