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문학 -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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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7일 뉴스매체들은 유서 깊은 보스턴 마라톤의 결승선 부근에서 폭발물이 터져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보스턴 마라톤하면 1947년, 막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참석한 서윤복선수가 1위로 골인한 것을 시작으로 19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세 선수가 1위부터 3위를 독식하면서 우리 국민들에게 친숙해진 경기이기도 합니다.

 

보스턴 마라톤에는 직접 참여해보지 못했지만, 지난 해 마침 보스턴마라톤 결승점이 위치한 보일스톤 거리 근처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덕분에 역사적 현장에 서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소에 서서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남달랐고, 휴일 보일스톤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행렬을 지켜보면서 보스턴시민들의 뜨거운 마라톤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대중을 상대로 한 테러의 주체가 오리무중에 싸인 채 미해결사건으로 남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무렵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전자시대를 맞아 수사정보의 원천이 다양해진 덕도 있었겠지만, 시민들의 적극적인 수사협조가 크게 기여했다는 것 같습니다. 범인은 러시아의 체첸에서 이주해온 형제인데 체포과정에서 형은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동생 역시 총상을 입은 상태라 범행동기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격단체가 개입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 모양입니다만, 혹시 미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쌓인 심리적인 불안감 등이 범행의 원인(遠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부 국가에서 구성원들의 불확실한 삶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인적 유동성이 증가한다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을 생각합니다. (모두스 비벤디;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12980). 바우만은 최근 들어 국가 간의 거리가 좁아지고, 구성원들의 유대가 빠른 속도로 해체되어 소멸되어 감에 따라 사회적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지는 집단들이 더 나은 환경을 찾아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 난민이 폭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면 역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일상의 인문학>의 서문에서 장석주님은 이처럼 불안과 공포와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이야말로 위험한 사회가 아니겠느냐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우리 모두는 사냥꾼이다. 또는 사냥꾼이 되라는 말을 들으며, 사냥꾼처럼 행동하도록 요구받거나 강요당한다.(모두스 비벤디, 160쪽)”는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세상은 사냥꾼들의 정글이 되고 있기 때문에 사냥꾼의 무리에서 이탈해서 사냥을 그만두는 순간, 우리는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짚었다면 해답도 찾았을 터. 장석주님이 제시하는 해답은 바로 책읽기입니다.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지음, 책으로 천년을 사는 법)’는 구절을 인용하여 “살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죽지 않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일상의 인문학, 7쪽)”고 하였습니다. 자신 역시 책읽기와 더불어 사유의 싹이 트고 풍성하게 자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당장 밥이 나오는 것을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삶을 살찌우고 풍요하게 만드는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깨닫게 해주려는 말씀입니다.

 

앞서 안상헌님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이 문학, 역사, 철학을 묶는 인문학 분야의 책을 어떻게 읽어 삶의 본질을 찾아들어갈 것인가를 안내하는 안내서였다고 한다면, 오늘 소개하는 장석주교수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게 생각하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주제의 중심이 되는 책과 함께 관련이 있는 몇 권의 책을 읽어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인문학적 책읽기의 심화과정을 안내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일상’이란 일상범백사(日常凡百事)를 줄인 말입니다. 즉 그날이 그날 같은 평범한 하루가 쌓여가는 일상이기에, “흔하고 하찮은 것, 더러는 의미를 머금지 못한 채 날것의 덧없음으로 뒹구는 그 무엇이다.”라는 저자의 정의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 속에서 남들과 다른 무엇을 길어 올리고 있습니다.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생명의 기하학이 역동한다.(8쪽)” 하루하루의 의미가 달라져 보이지 않습니까? 삶의 기본단위가 되는 일상이 없다면 당연히 삶도 없을 것이며 존재의 의미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50개의 주제에 대한 생각을 책을 꼬투리로 펼치고 있습니다. 자연히 특정한 책의 리뷰가 아니라 특정 주제에 관련된 책에서 건져낸 화두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생각을 에세이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부끄럽게도 저자가 주제를 이끌어내는 쉰한 권이나 되는 책들 가운데 김훈의 <칼의 노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만을 읽어보았을 뿐입니다. 작가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관심이 가는 주제를 이끌어내고 있는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이클 폴란의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주문했습니다.

 

첫 번째 화두 ‘기다린다는 것’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대학시절 연극부 활동을 할 때 몇 차례 공연을 통해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는 (…) 늘 오늘의 괴로움이 끝나는 내일을 기다린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13쪽)”고 적어 기다림을 인간이 타고난 숙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딱히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느라 앙상한 나무 한 그루만 서있는 시골길 위를 떠나지 못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주고받는 의미없는 대사를 끌어왔을 것입니다.

 

저자와 겹치는 책읽기가 별로 없었던 탓에 정확한 비유가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04741>에서 저자가 추출해낸 사유는 같은 책을 읽고 제가 느낀 점과는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고생을 사서하는 여행에서 환희를 느낀다는 보통의 설명과 함께 “우리는 사막에 있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우리 자신의 결함을 보고 스스로 작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굴욕은 인간 세계에서는 항상 마주칠 수 있는 위험이다. 우리의 의지가 도전받고 우리의 소망이 좌절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따라서 숭고한 풍경은 우리를 우리의 못남으로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익숙한 못남을 새롭고 좀 더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준다. 이것이야말로 숭고한 풍경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이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여행은 장소들의 숭고함을 들이키는 문화적 행위다.(140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직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간단하게 적거나, 책내용을 요약하여 전하는 수준의 리뷰에 머물고 있는 저와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인문학공부의 심화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책읽기는 궁극적으로 글쓰기로 이어져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책읽기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에세이는 제가 가야할 글쓰기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을 인용한 서평쓰기에 대한 에세이에 주목하게 됩니다.

 

다양한 방식의 서평쓰기가 있습니다. 서평을 저널리즘의 한 형태로 보는 경향도 있는데, 독자들에게 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만 해도 과거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서점을 찾아 진열되어 있는 책들을 살펴 책을 고르곤 했습니다만, 요즈음은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소개되는 서평이나 인터넷 리뷰어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서평을 읽고 책을 고르게 되면서 누군가의 서평을 참고하여 책을 고르게 됩니다.

 

저자는 월터 카우프만의 책에서 “서평은 정치다.”라는 문장에 꽂혔다고 합니다. 이유는 “서평은 어떤 책이 그 책값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주고, 그 책을 어떤 사람들이 읽어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108쪽)”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대개의 서평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갖는 문화적 신뢰성에 비해 그 내용이 부실하다. 그런데도 그 부실함이 들춰지지 않거나 추문이 되지 않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서평만 읽고 정작 그 책은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109쪽)”고 잘라 말할 정도로 일반적인 서평에 대한 저자의 인식은 가혹하다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칭찬의 관용구를 남발하는 서평가 보다는 까칠한 태도로 저자를 신랄하게 꼬집고 괴롭히는 서평가의 글을 읽을 때가 훨씬 더 즐겁다는 고백도 서슴치 않는 것을 보면 작가로서 저자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임이 분명합니다. 저의 책에 대한 비판적인 서평을 읽으면서 작가의 본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된 리뷰를 적었다고 생각한 저와는 분명 다른 차원에 사는 분 같습니다. 저 역시 제가 판단하기에 오류투성이의 내용을 담은 책이란 생각에 정치적(?)으로 톤을 상당히 낮춘 서평을 쓴 적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서평에 대하여 해당출판사가 서평을 내려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경우도 있었고, 작가 자신이 서평을 올린 저의 블로그에 스토커 수준으로 덧글을 달면서 비난하던 경험도 있으니 역지사지(易地思之)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전복적 사유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살피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삶에 대한 작가의 단상에서 제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일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열광적인 독서광이었던 발터 벤야민은 문학․정치․영화․미술․철학 어느 하나에 고착하지 않고 그것들 사이를 종횡으로 누비면서 중심에서 현대성의 의미를 건져 올렸는데, 예를 들면 철학과 시를 뒤섞고, 정치와 형이상학, 신학과 유물론이라는 재료를 비벼 독자적인 사유세계를 펼쳐냈다는 것입니다.(238쪽) 하지만 그의 글들은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가운데 1940년 불과 48세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철학적 사유들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스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때이른 죽음으로 파리에 대한, 파리를 위한 철학적 대기획은 미완으로 그치고, 남은 것은 지식 유목민의, 변화하는 20세기 사회와 문화 지형에 대한 사유의 균열과 협로, 포식의 흔적들뿐이다.(239쪽)“고 적어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의과대학시절 면역학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했던, 의학에 대한 저의 꿈은 지극히 한국적인 장애를 만나 병원병리학으로 궤도수정을 하고, 신경병리학, 특히 퇴행성 뇌질환으로 좁혔던 관심은 너무 일렀던 탓에 기획을 펼칠 곳을 찾지 못하고 접어야 했으며, 대안으로 시작했던 독성병리학 역시 아직 뿌리내리기에는 척박한 우리나라의 상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지금까지의 제 삶은 의학의 노마드로 살아온 셈이라고 자위해야 할까요?

 

노마드(nomad)는 ‘유목민’ 혹은 ‘유랑자’로 번역되는데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철학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는 ‘노마디즘는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장석주님의 <일상의 인문학>은 ‘넓게 읽고 깊이 생각하기’라는 부제처럼 인문학공부를 심화학습하는 과정의 책으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어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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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 모먼트 - 행운과 능력이 교차하는 결정적 순간의 힘
프란스 요한슨 지음, 신예경 옮김 / 알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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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서 최근에 화제가 된 깜짝 스타는 단연 싸이가 될 것 같습니다. 아마 기획사의 치밀한 전략에 따라서 만들어지고 유튜브를 매개로한 홍보전략이 맞아떨어져서 월드 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싸이의 성공이 우연이라는 행운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그의 음악적 재능과 부단한 노력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스 요한슨의 <클릭 모먼트>는 바로 그런 우연을 붙들어 성공에 이르는 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성공은 우연히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우연을 포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분명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포괄적인 사항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이렇듯 자신을 우연히 찾아온 행운을 알아채고 이것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말콤 글래드웰의 경우 <아웃 라이어>에서 “어떤 일에서건 성공의 열쇠란 대체로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1만 시간 동안 기울인 연습의 결과”라고 주장하여 재능보다도 부단한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클릭 모먼트>을 읽는 독자들에게 우연히 찾아온 행운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즉 1부에서는 세상이 왜 예측불가능한지에 대하여 검토하고, 이어서 2부에서는 우리가 사는 인생에 우연이라는 요소를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연을 포착하기 위하여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클릭 모먼트, 즉 예상치는 못하였지만 시의 적절하게 상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둘째는 의도적인 모험,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면서도 여전히 시도하는 행동, 마지막은 복합력인데 이는 예기치도 않고 미리 예측하지도 않았음에도 성공으로 이어지는 행동결과를 말한다고 합니다.

 

저자는 클릭 모먼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사나 조직이 지나온 길을 돌이켜본다면 특정한 순간과 특정한 만남, 사건, 인상, 통찰력이 다른 것보다 훨씬 중요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이런 순간을 ‘클릭 모먼트’라 부른다.(183쪽)” 클릭 모먼트를 창조하는, 즉 우연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구체적인 설명을 늘어놓기에는 다소 장황해질 것 같아 생략합니다만, 1.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려라, 2. 교차적 사고를 이용하라, 3. 호기심을 따르라, 4. 예측 가능한 경로를 거부하라. 등을 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의도적 모험을 성공시키기 위한 다섯 가지 전략으로는 1. 모험의 횟수를 늘려라, 2. 모험의 규모를 최소화하라, 3. 실행가능한 최소한의 조치를 취하라, 4. 감당한 수 있는 손실을 계산하라, 5. 열정을 연료로 활용하라, 등입니다. 그리고 복합력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1. 의도하지 않은 결과, 2. 폭포효과, 3. 자기 강화 순환고리가 있습니다. 마지막 요약이 될 것 같습니다만, 복합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는 1. 강력한 견인력을 만들어라, 2. 뜻밖의 사건을 세밀히 살펴라, 3. 호기를 노려라, 4. 복합력의 추진력과 강도를 감지하라, 5. 더블 다운하라, 등입니다.

 

어제 회의에서 통계수치를 바탕으로 연산을 해야 하는 작업에서 처리방식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적절한 예가 떠오르지 않아 고민을 했는데, 바로 그 상황에 맞는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1961년 미국의 수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에드워드 로렌츠는 훗날 ‘카오스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는 날씨의 패턴을 예측하는 기상관측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일한 숫자와 동일한 데이터, 동일한 정보를 입력해서 두 차례 시뮬레이션을 돌린 결과, 그 각각의 결과가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바로 두 번째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 소수점 세 자리만 입력하면서 사사오입이 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331쪽) 바로 나비효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복잡한 계산식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초기에 생긴 미미한 변화가 다음 단계에서는 조금 더 큰 변화로 이어지고 여러 차례의 계산과정이 이어진 최종결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통계작업을 할 때는 일정한 규정에 따라서 처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 기억해야 할 핵심사항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1.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고 무서운 속도로 변한다는 것, 2. 사람들이 인생에 우연을 끌어들이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망설인다는 점, 3. 사건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펼쳐지는 순간이 언제인지는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행운의 순간을 멀거니 바라보지 말고 적극적으로 낚아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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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의 길
유예진 지음 / 현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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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6857>을 읽으면서 문득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스24 메인에서 프루스트에 관한 도서를 검색했을 때 저의 눈길을 끈 책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주목받던 작가와 작품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는 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이 쓰신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열 갈래 길’이라는 부제가 시사하듯 프루스트가 활동했던 당시 프랑스 문단을 지배했던 작가들을 활동 시기에 따라 소개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새로운 시각에서 읽을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가, 작가, 음악가, 건축가 등 예술가 100여 명의 작품 200여 점을 인용하고 있는데, 유예진교수님은 그 가운데 허구의 인물인 베르고트를 포함하여 17세기에서 20세기까지 다양한 시기에 활동한 소설가, 시인, 극작가, 문학평론가 열 명을 골랐습니다. 이들은 프루스트와 직간접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하며, 그러한 영향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녹아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존했던 작가들과 그들의 문학 작품들이 프루스트가 창조한 허구의 인물과 스토리와 엮여있어 그 실마리를 풀어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17세기 작가인 세비녜 부인과 라신을, 19세기 작가로는 발자크, 상드,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 말라르메를 그리고 20세기 작가로는 지드와 바르트를 다루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사후에 활동했던 바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당시 프랑스 문단을 지배했던 문인들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합니다. 유예진교수님은 이들 문인들의 글과 사상,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뿐 아니라 이들이 주고받은 서간까지 인용하여, 문학 작품에 얽힌 일화, 당시 시대 상황이나 사건, 소설 밖에서의 프루스트의 삶을 알게 해 주는 전기적 내용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부록으로는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세비녜 부인의 편지, 공쿠르 형제의 일기, 상드와 플로베르, 프루스트와 지드가 주고받았던 편지를 수록하고 있는데, 이들 자료는 프루스트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귀한 것 들입니다.

 

책의 말미에는 작자가 인용한 외국의 문헌목록을 덧붙이고 있어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되는 내용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느낀 점과 차이가 있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라신의 작품 <페드르>가 미친 영향에 관하여 ‘사라진 알베르틴’편을 인용하여 질베르트가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소유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미리 한 걸음 물러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질베르트 역시 마르셀에게 우정이 아닌 사랑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꽃피는 아가씨 그늘에(1)’에서는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을 키워가다가 그녀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 사랑하는 마음을 접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질베르트는 확실히 외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두 질베르트가 있었다. 그 부모의 두 성질은 단지 그녀의 몸 안에 섞여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두 성질은 서로 다퉈 그녀를 빼앗고 있었다.(200쪽)”라고 적어, 마치 현대 정신의학에서 해리성장애로 정리되는 성격의 단면을 드러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5068).

 

작가가 맨 마지막 등장인물로 프루스트 사망당시 일곱 살이었던 롤랑 바르트를 인용한 것은, <텍스트의 기쁨>에서 “프루스트는 나를 찾아온다. 내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라고 할만틈 프루스트를 경외한 바르트가 프루스트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논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바르트식 프루스트 읽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밖에도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인들의 작품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구체적인 구절까지 인용하고 있어, 아쉽게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들의 작품을 읽고 확인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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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무의식 -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김명남 옮김 / 까치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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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해리스박사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4786>에서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데이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의 뇌에 있는 신경세포는 이미 우리가 할 행동을 지시하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라고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온 것이 사실은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며,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뇌의 활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샘 해리스박사가 우리가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데이터에 의하여 바뀔 수도 있는 판단을 성급하게 내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조심스럽게 달아두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믈로디노프교수의 <새로운 무의식>은 역시 같은 데이터를 인용하여 무의식의 영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fMRI라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내리는 판단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실들, 특히 자신의 감정이나 행동의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생각들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이며, 의식 아래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의 영향을 크게 받는지를 과학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로디노프교수가 뇌의 이러한 기능을 ‘새로운 무의식’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프로이트에 의하여 제창되었던 과거의 ’무의식‘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의식과 무의식 양쪽에서 지각, 감정, 사고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와서 빚어진 산물이다.(26쪽)”라고 한다면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행동을 어떻게 구별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행동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정신적 과정에 의하여 지배될 때가 많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지만,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는 이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환자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드러나는 정황들 가운데 환자의 병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추출해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요법에서 추천하는 자성적 기법(self-reflection)을 통해서 뇌의 무의식적 과정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제한점이 드러나면서 정신분석학은 점차 관심을 잃어가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감각 더하기 마음이 곧 현실’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뇌에서 처리하는 과정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무의식이 작용하여 정보들 사이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보다 완벽한 모형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뇌의 데이터처리체계가 두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은 기억의 형성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건에 대한 기억을 꾸며내기 위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즉, 풍부한 상상력으로 생각해낸 속임수들로 기초적인 기억을 보완하는 과정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고 그 영향이 항상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라는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주인공 푸네스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의식을 잃었는데, 의식을 회복하고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기억까지도 명확하게 되살리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에 관한한 놀라울 능력을 가진 푸네스지만, 그의 놀라운 능력은 그저 단순한 정보수집체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믈로디노프교수는 1920년대 러시아 심리학자 AR 루리아의 연구대상이었던 솔로몬 셰레솁스키가 바로 푸네스와 꼭 같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보르헤스도 이 연구에 대하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무의식>의 제2부 ‘사회적 무의식’에서 저자는 다양한 실험들을 인용하여 사람의 마음 읽기,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 등과 같이 무의식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람들의 사회적 패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무의식은 인간의 생존을 돕는 방향으로 진화되어 온 것이 틀림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마음, 즉 무의식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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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인가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정동희 옮김 / 민음사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북소리]를 통하여 인문학을 같이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돌아보면 정작 변죽만 울려온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언가를 배우려면 개념을 정립하고, 전체를 개괄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각론을 파고드는 순서를 따는 것이 일반적인 접근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인문학의 핵심이라고 할 철학 부문은 그야말로 아는 바가 거의 없어 저 역시 철학을 다룬 책을 읽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강영안교수님은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철학을 소유하고 있는가. 어디서 철학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인용해서 철학이 어디에 있는가를 논의하면서, 정보의 가치가 중시되는 가운데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의 가치가 점차 무게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내고 있습니다.(강영안 지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2459)

 

강영안교수님은 “우리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건 사이에서, 우리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깊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의미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존재, 우리의 고통, 우리의 욕망, 심지어는 우리의 의미 추구의 근거에 관한 물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강영안 지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32쪽)”고 하고 이런 인간의 욕망에 본질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노력을 철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철학은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심이 엷어져왔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지나치게 학문적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대중의 삶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논제를 뒤쫓다보니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자초한 것이라 본 것입니다.

 

철학이 대중으로부터 이탈하면서 대중이 역시 철학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되다보니 철학이 무엇인지 조차도 가물가물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철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다행히 철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책들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철학의 세부 분야에 관한 책들을 제외하고서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된 책도 버트런드 러셀(홍신문화사, 1995, 2008)의 것이 가장 많이 번역되어 있고, 질 들뢰즈 등(현대미학사, 1995), 에드워드 클레이그(동문선, 2003) 등 외국 철학자의 책들이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엄정식(문학사상사, 2000), 박이문(지와 사랑, 2008), 최유신(철학과현실사, 2006) 등의 국내 학자들의 책들도 나와 있습니다. 기회가 되는대로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북소리]에서 소개드린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에서 안상헌님은 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현실세계로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각하는 힘과 창의성이 강조되면서 철학공부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세계로 내온 철학의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책으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르테가는 ‘근대 유럽 지성사에 큰 획을 그은 스페인의 대표적 철학자로서, 스페인 특유의 지적 전통과 근대 유럽철학의 흐름을 접목시켜 새로운 차원의 사상적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오르테가가 1920년 3월부터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철학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강연내용을 묶은 것입니다. 2월 27일 마드리드대학 철문학부 강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오르테가의 강의는 예상치도 않게 엄청난 수의 청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연기되어 3월 초 마드리드 대학본부의 대형강의실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리베라 독재정권에 대한 반정부운동의 중심이었던 마드리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오르테가 역시 정교수직을 박탈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중단되었다가, 4월 9일 레스극장에서 속개되었고 베아트리스 공주 극장으로 장소를 옮겨 계속될 정도로 오르테가의 열의와 그의 지지자들의 호응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오르테가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철학강의는 1898년 쿠바를 둘러싼 미국과의 전쟁(미서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한 스페인의 국내정세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페르난도왕과 이사벨여왕이 1492년 8월 3일 동양을 향한 콜럼버스의 항해를 승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스페인은 400년 동안 대제국의 영화를 누리게 되는데, 미서전쟁의 패배로 제국의 영화가 스러지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스페인의 지성들은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를 통하여 국내정세를 반전시키려 한 것입니다. 오르테가는 이러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던 것입니다. 오르테가는 이 공개강의를 통하여 ‘대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예언하여 스페인 문화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첫날 강연에서 오르테가는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이라고 간주하는, 실은 진정한 삶을 감싸고 있는 껍질을 뚫고 우리에게 비밀로 남아 있는 존재 본연의 존재, 순수 내적 존재의 영토로 회귀할 것(5쪽)”이라고 강연의 전체 개요를 요약하면서 “철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내 강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6쪽)”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근대철학과 지난 시대의 철학을 구분하는 근원적 차이로 ‘사유의 변화’를 제시하였습니다. “사유의 변화들을, 과거에 진리였던 것을 오늘날 하나의 오류로 전환시키는 변화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과거의 진리와는 다른 진리로 인식하게 하는 지향성의 변화로 인식해야 할 것(13쪽)”이라는 것입니다.

 

강의 초반 오르테가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이 확장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이 위축되었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시대를 맞아 꽃피우기 시작한 과학이 정확한 추론을 통해 성취된 지식과, 동시에 사실에 대한 감각적 관찰에 의해 확증되는 종류의 인식으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인식론의 궤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이를 계기로 과학은 다른 학문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고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물리학은 인식방법을 극도로 향상시킨 제3의 특성을 가미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의 물질에 대한 지배를 위한 실질적 유용성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로서 ‘물리학의 제국주의’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물리학의 우월성에 압도당한 철학이 위축되어 버린 점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한 오르테가는 물리학의 우세가 인식이라는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리학에 대한 대중의 신념이 부풀려진 것이라는 사실을 의학의 사례로 설명한 점이 눈길을 끌어 인용합니다. “그 누구도 의학을 과학의 전형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어느 시기의 마법사들처럼, 병원에서 의사들이 받고 있는 숭배는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과 인격에 하나의 안정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을 상실할 정도로 무모한 대담성을 즐기고 있다. 우리가 볼 때 이는 참 어이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사란 과학의 성과를 이용하고 다루는 사람이지 결코 과학자도 이론가도 아니기 때문이다.(37쪽)”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의사들이 무모할 정도로 대담성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요?

 

오르테가는 철학자들이 과학자들로부터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라는 경멸적 모욕을 받았다고 하고, “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과학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40쪽)”이라고 응수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적어도 19세기 후반 유럽의 지성사회는 그러한 비유를 즐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철학과 과학을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니 철학과 과학의 비유사례를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에서도 보고 있는 것도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의학과 한의학이 대립하는 가운데, 과학적 근거를 내놓지 못하는 한의학을 국가 의료의 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료계의 입장과 철학적 배경을 가진 한의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좁은 시각이라는 한의학의 반론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르테가는 “철학은 우주에 대한 인식”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연스럽게 논지의 대상을 우주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있는 물리학은 물질이라는 가시적이며 현실적인 대상과 직면하는 반면 철학은 철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우주와 직접 대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우주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막연한 대상을 사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철학자는 존재하는 일체의 전체성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성 속에서 각 사물의 위치, 역할, 지위와 같은 각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맺고 있는 관계 양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사유대상을 우주로 확대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와의 관계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르테가는 철학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이론적 인식 행위, 즉 우주에 관한 이론에 다름 아니다. 세계의 전경을 우리에게 펼쳐주는 우주라는 단어가 중대한 의미를 지닌 ‘이론’이라는 단어의 의미론적 무게를 어느 정도 경감해 주는 듯 보일 때조차도 우리는 우리가 창조주인 양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창조하는 것은 오직 우주에 관한 이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117쪽)” 일견해서는 종교와 타협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지만, 이어서 오르테가는 세계 위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그리스나 유대의 신은 물론 기독교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이 사유의 산물이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영혼이라는 두 개의 실재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과 영혼에 관한 인식이야말로 기독교에서의 최고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신과 영혼에 대하 알기를 열망한다. 그 이상을 내가 알기를 원하는가? 나는 단지 신과 영혼만을 알기를 열망한다. (…) 더 멀리 나아가지 마라. 자아 속에서 찾아라. 진리는 인간의 내부에 존재한다.(188쪽)”라는 기독교 이념의 설립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가 인간의 내성의 기저에서 신을 발견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의 신은 얼핏 보기에 세계에 대해서는 초월적이지만 “영혼의 기저”에 있어서는 내재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 의하여 ‘나’는 일차적인 이론적 진리의 위치로 상승했고, 라이프니츠가 이것을 자기 자신 속에 감금한 채 우주로부터 분리된 단자를 창안했을 때 ‘나’는 내적인 작은 세계, 미시적 우주 혹은 라이프니츠 자신이 표현한 대로 작은 신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피히테에 이르러 관념론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운명이 최정상에 도달하면서 전체적 우주, 만물로 확장되었다.(194쪽)”고 하여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나”의 존재를 확립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르테가는 모든 시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고유의 과제, 사명, 혁신에 대한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설파하면서 변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러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청중들에게 각인시키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이 추구하는 근본적 목표라고 할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별 어려움 없이 “삶이란 우리가 행위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삶은 우리가 행위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결국 세계 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세계 내 사물들과 존재들에 전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40쪽)”라는 답에 이르게 되기를 희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오늘 날을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스페인의 대중들에게 들려준 오르테가의 조언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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