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여행하다 - 공간을 통해 삶을 읽는 사람 여행 책
전연재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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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미국을 두서없이 여행하면서 남겼던 메모를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사진과 같이 읽다보면 지금은 곁에 계시지 않은 선친 그리고 아내의 외조모님과 함께 했던 그때 생각이 납니다. 당시와 상황은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때의 여행지를 회상하는 글을 써보려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여행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행에 관한 책을 읽게 되면 글쓴이의 관점에서 여행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효과를 통하여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집을. 여행하다>는 건축가의 눈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들여다보는 독특한 여행기입니다. 어쩌면 우리네가 생각하는 집은 금전으로 환산되는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삶을 영위하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살고 있는 곳을 떠나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집들은 그 외관을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는데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간혹 유명인사들이 살던 집들을 공개하여 그들이 살던 분위기를 볼 수 있기도 한데, 역시 사람 사는 온기가 없는 단순한 구경거리에 불과하여 진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집을. 여행하다>에서 저자의 놀라운 경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형편이 넉넉지 않은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였던 친절을 통해서 현지인의 집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발견하게 된 것 같습니다. “현지 사람들의 집에 머무는 여행을 택하는 것은 (중략)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들이 먹고 자고 생각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흥미롭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취향과 삶에 대한 이해를 한 뼘씩 넓혔다.(265쪽)” 나아가 새로운 즐거움을 하나씩 더하게 되면서 가급적 여행지에서 묵을 수 있는 집을 늘려나가게 된 것 같습니다. “현지인의 집에 머무는 여행을 하면서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는 함께 요리하여 나누어 먹는 것이다. 새로운 요리법을 배우거나 특별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식사를 함께 한다는 행위에 들어 있는 의미 때문이다.(270쪽)”

 

이탈리아 카타니, 시라큐사, 파나레아, 피스토이아, 포르투칼 리스본,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벨기에 브뤼셀, 네델란드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함부르크 등, 유럽 8개국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면서 모두 열 세 곳의 집에 머물면서 느낀 점을 적고 있는데,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그녀와 그녀를 맞은 집주인들의 열린 마음입니다.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를 받은 경우도 있고, 친구의 친구집을 방문한 경우도 있으며, 방문하였을 때 친구가 여행을 떠나게 되어 친구의 남편과 같이 지내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집주인 남성과 둘이서만 지낸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작업을 거는 듯한 멘트를 듣기도 했다고 하는데 범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이런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집은 머무는 곳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진 것이 적으면 그만큼 삶은 자유로워진다. 언제 어디로건 마음 내킬 때 자리를 털고 길을 나설 수 있다. 영혼에는 매임이 없다.(219쪽)” 즉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는 점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미치 엘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http://blog.joins.com/yang412/4706383>에 나오는 “타인이란 아직 미처 만나지 못한 가족일 뿐이에요.”구절에서도 같은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건축을 전공하는 분답게 밖에서 보는 집을 담은 사진은 물론 집안의 분위기를 잘 살리는 사진들을 다수 곁들이고 있어 마치 저자와 함께 그 집에 머무는 듯한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열 세 곳의 이야기를 함축하는 책 속의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아주 재미있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저자를 유혹하던 남편을 둔 친구의 집을 방문한 이야기에서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스먼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가 구혼을 할 무렵에도 그녀처럼 본심을 간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의 본성의 반쪽만 보았으며, 그것은 마치 지구의 그늘 때문에 일부가 가려진 달의 표면을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만월(滿月), 즉 인간 전체를 보게 된 것이다.” 지금 받아둔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친지의 집에 머물면서 조금은 불편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런 경험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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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교육 1 펭귄클래식 89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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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 읽은 책입니다. 유예진교수님은 <프루스트가 사랑한 작가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11784>에서 프루스트가 평생 동안 플로베르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쓴 프루스트의 편지에서도 플로베르의 <감성교육>의 주인공에 자신을 비유하는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엄마의 어린 프레데릭은(사실은 엄마의 하나뿐인 마르셀이에요. 엄마가 저와 프레데릭을 혼동하지만 말이지요.) 기침을 심하게 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답니다.(120쪽)” 더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감정교육>과 닮은 점이 많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감정교육>은 프루스트의 소설보다 반세기 전인 1840년부터 1867년까지 30여년 동안 프레데릭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파리의 사교계를 무대로 활동한다는 점, 주인공이 여러 여인들을 거쳐서 사랑이 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 등입니다. 다만 각각의 주인공이 도달하는 결론에서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정교육>의 주인공 프레데릭은 젊어서 가졌던 야망은 결국 실현할 수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는 점을 깨닫고 단순히 추억거리로 간직하는 다소 비관적이면서도 염세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반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은 역시 사교계에, 그리고 사랑에 실망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산화하는 것으로 끝나는 개인의 기억을 모아 예술로 승화시키는 창조적 활동을 보인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라고 하였습니다.

 

플뢰베르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내과의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1821년 태어났는데, 법학을 공부하다가 문학으로 길을 글쓰기로 바꾸었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1857년에 출간한 소설 <마담 보바리; http://blog.joins.com/yang412/13224230>는 풍기문란죄로 기소되었고, 이국적 소설 <살람보>는 고고학적인 사항의 외형적 묘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1869년에 나온 <감정교육>은 “내가 읽어본 유일한 역사 소설(에밀 졸라)”, “이 책에 전적으로 굴복한다(프란츠 카프카)”, “슬프고 희미하고 신비로우며, 인생 그 자체와 같다.(테오도르 방빌)” 등과 같은 문학계의 찬사를 받았지만, “왜 이 책은 괴테, 바이런, 샤토브리앙과 같은 작가에 의해 주도된 화려한 낭만주의적 전통을 따르지 않는가”라는 비판도 많았다고 합니다. 1864년 시작한 글쓰기 과정에서 “나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현대적인 삶에 관한 소설에 매달렸다. 난 내 세대 사람들의 도덕적 역사를 쓰고 싶다. 정확하게는 ‘감정적인’ 역사라 함이 옳을 듯…….”이라고 플로베르가 토로한 것처럼 <감정교육>에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랑이야기를 시시콜콜하게 적는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정치적 견해의 충돌과 1848년의 혁명과 같은 극적인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에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이 플로베르 사후에서야 인정받아 <감정교육>은 플로베르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소설로서 평가를 받고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을 할 수는 있지만, 주인공 프레데릭의 사랑이 지나치게 변화무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을 꼭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법학공부를 하기 위하여 파리로 올라와서는 학업보다는 사교계를 기웃거리는 점도 이해하기 어렵고, 게다가 상대는 고향으로 가는 배안에서 우연히 만난 아르누 부인으로 오랜 기간 가슴앓이를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가 갑작스럽게 진전된다거나, 갑작스럽게 개입하는 사교계 여성 로자네트와의 동거, 그리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재계와 사교계를 주름잡는 당브뢰즈 부인과의 결혼설, 그런가 하면 고향마을의 이웃 소녀 루이즈 등등, 얽힌 여성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곡예를 하는 프레데릭의 애정행각을 뒤쫓아 가기도 숨 가쁘기만 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결국은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다가 종국에는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품에 남은 여인은 없더라는 식의 허무한 결말에 속았다는 느낌이 진하게 남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정치적 격변기에 등장인물들의 정치적 색깔이 감정 혹은 도덕적 행적과 잘 녹아들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당시의 도덕적 역사를 기록한다는 처음 생각에 집중하였더라면 읽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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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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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민족학자(民族學者) 레비스트로스의 대표적 저서 <슬픈 열대>를 읽었습니다. 적지 않은 인문서적들이 읽기를 추천하고 있어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정작 읽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슬픈 열대>의 첫 구절입니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지금 나는 나의 여행기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105쪽)” 저자가 지금은 인류학이라고 부르는 민족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던 브라질을 떠나온 것이 15년 전인데, 그동안에도 수없이 해오던 책쓰기를 미루어 온 것은 자신이 해온 민족학이라는 분야에 대하여 대중의 관심에 영합하는 시시콜콜할 모험이야기를 써야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민족학자의 시각에서 서구문명의 유입으로 왜곡되어 가는 아마존 원주민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느낀 참담함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계문명이라는 덫에 걸려든 불쌍한 노획물인 아마존 삼림 속의 야만인들이여, 부드러우면서도 무력한 희생자들이여, 나는 그대들을 사라지게 한 운명을 이해하는 것까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대중 앞에서 사라진 그대들의 모습을 대신하는 총천연색 사진첩을 자랑스럽게 흔들어내는 요술, 당신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요술을 부리는 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145쪽)” 그러면서도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여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레비-스트로스를 갈등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인류의 문화가 상호 교섭할 수 있는 힘이 생겨 그들의 접촉을 통해 서로를 부식시키는 일이 드물수록, 각기 다른 문화에 파견된 사자는 그 문화의 다양성의 풍부함과 의의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149쪽)”

 

문화인류학 분야의 책을 참으로 오랜만에 읽었습니다. 요즈음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정글의 법칙> 류의 연예오락프로그램들이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우리의 곁으로 끌어오고 있습니다만, 정작 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을 한낱 웃음거리로 지나치고 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인류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분야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자가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1998년에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편찬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는 좋은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임돈희교수님은 기획의도를 담은 머리말에 “인류학에서 발달된 중요한 개념인 ‘문화상대주의’란 세계 여러 문화를 우리 자신의 가치관이나 우열의 척도를 가지고 보지 않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입장으로서 세계화시대에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현대인들에게 특히 강조되어야 할 개념이다.” 라고 적었습니다. 특히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된 현실을 고려한다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적 국수주의는 우리사회를 후퇴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열대>에는 이 책을 번역하신 박옥줄교수님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된 레비-스트로스의 사상과 <슬픈 열대>에 대한 해설을 앞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 지식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나는 구조주의자가 아니다.(65쪽)”라는 레비-스트로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 창시자로 간주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레비-스트로스가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회조직이나 행위를 연구함에 있어서 구조적 분석방법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입니다. 박교수님은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조화(調和)에 대한 탐구이며, 어떤 대상들 가운데 내재하고 있는 관계의 체계를 발견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의 구조주의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의 화학적 요소처럼 과학적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는 자연이나 사회현상에는 임의적인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게 된다.(65쪽)”고 정리하였습니다.

 

<슬픈 열대>는 모두 9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레비-스트로스가 밀항선을 타고 마르세유에서 뉴욕까지 가는 선상여행을 회고하였습니다. 제2부에서는 과거로 거슬러 철학에 관심을 두었던 레비-스토로스가 민족학을 공부하게 된 배경과 브라질의 상파울루 대학의 사회학교수로 취임하는 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 이어서 3부에서는 브리질로 가는 항해과정에서 열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하고 4부에서는 브리질에서의 생활과 현지조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 5부에서 8부까지는 브라질 내륙지방에 살고 있던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카라족 그리고 투피 카와이브족에 대한 민족지(民族誌)로서,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과 각각 원주민 사회의 문화를 소개하고 분석하였습니다. 마지막 9부는 브라질에서 돌아오는 과정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의 여행기가 추가되었고, 그때까지의 개인적 체험과 현지조사의 내용을 종합정리하면서 자신이 인류학적 연구에서 부딪혔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서구문명이 원주민과 처음 접촉한 이래 그 사회를 파괴하는 침략성을 보여 온 데 대하여 분노하고, 서구문명의 침입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사라져 버린 원주민 문명, 즉 ‘사라져버린 실체’를 탐구하고 있는 민족학자라는 직업의 역설에 비통함을 토로하곤 했다는데, <슬픈 열대>에는 저주받은 원주민 사회에서 느낀 레비-스트로스의 비애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철학에 관심을 두었던 레비-스트로스는 민족학을 전공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학문의 시녀, 즉 과학적 탐색의 시녀나 보조자가 아니라,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일종의 심미적 관조였다. 철학이 수세기에 걸쳐서 점점 경쾌하고 대담한 구성을 다듬어가고, 균형과 능력의 문제를 풀어가며 논리적 세련화를 창안해가는 것을 보아왔는데(162쪽), (…) 민족학의 연구대상인 문화의 구조와 나 자신의 사고구조의 유사성 때문에 내가 민족학에 마음을 두게 된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164쪽) (…) 민족학은 나에게 지적만족을 가져다준다.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라는 양극을 결합시켜, 인류와 나 사이에 공통되는 근거를 동시에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173쪽)”

 

5장을 시작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브라질 원주민들의 현황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브라질을 발견하였을 당시만 해도 남부 브라질 전체에는 제(Gé)라는 집합적 명칭으로 구분되는, 언어와 문화의 모양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던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해안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투피(Tupi)어를 사용하는 침략자들에 의해 몇 세기 전에 밀려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해변지역의 투피족은 유럽의 식민지개척자들에 의해 소탕되었지만, 접근이 어려운 숲속으로 물러나 있던 원주민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인데, 이는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들을 외부세계에 전혀 노출시키지 않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거주지역에서 유럽문명이 필요로 하는 자원들이 발견되면서 이를 개발하기 위하여 철도, 전신선 등을 부설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노출되고, 브라질 정부에서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별도의 지역에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구문명에 노출되었던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알려진 문화인류학적 조사결과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관찰하고, 그들과 소통하여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레비-스트로스 당시의 현지조사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조사대상 주민들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해석한 것으로 보여 심층적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원주민사회에서 관찰한 내용들을 구조적 분석을 통하여 해석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 무게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카두베오족이 사용하는 도자기나 목각상과 같은 생활미술품이라거나, 그들이 서열을 나타내기 위하여 몸에 채색하고 있는 가문(家紋)에 해당하는 문신이나 형판을 그림으로 담아낸 것 등이라거나, 보로로족의 서열을 나타내는 성기덮개나 마을의 사회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 등입니다.

 

레비-스트로스의 민족지에서 읽은, 저로서는 놀라운 사실은 20세기 초반 지구적 재앙이었던 스페인독감의 악몽이 아마존 밀림 속에 고립되어 살고 있던 원주민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지나 콜라타가 <독감; http://blog.joins.com/yang412/3963341>에서 ‘스페인 독감은 1918년과 19년에 걸쳐 맹위를 떨쳐 고립되어 있어 외부와 단절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으로 발병하지 않은 지역이라고는 없었다.’고 적은 것처럼 아마존의 밀림까지도 침투했던 것입니다. 한때 1,000명으로 알려진 남비콰라족의 사바네 무리는 1938년에 19명의 남자만이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페인독감은 호흡기를 통하는 감염성질환입니다. 환자가 기침할 때 튀어나오는 비말에 담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마신 사람이 감염되고, 잠복기를 거쳐 증상이 나타나면 곧바로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우주적 조화를 구축하려는 감각 속에서는 균형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서구의 과학적 논리와는 달리, 원주민의 원시적 사고는 동식물의 세계를 민감하게 이해하는 독특한 지식 습득의 방식일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결국은 원시적 사고는 세계를 하나의 동시적(同時的), 공시적(共時的) 전체로 파악하기 위한 무시간성(無時間性)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해온 작업들에 대한 의미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또는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 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일시적인 개화이다.(742쪽) (…)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743쪽) (…) 개인이 집단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각 사회가 여러 사회들 가운데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도 우주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여기 있고 또 세계가 존재하는 한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그 가느다란 아치는 우리 앞에 그대로 머무를 것이다.(744쪽)”

 

누군가의 여행기에서 인용한 시작부분을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슬픈 열대>를 읽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지나간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지만, 그 기억이 글자 그대로 나타나는 한은 그렇지 못하다. 회상을 해보는 것은 좋아하더라도, 그 고된 일들과 괴로움을 다시 겪어보고자 하는 이는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인생 그 자체이기는 하나, 다른 성질을 지닌 것이다. (179쪽)”라고 적은 글을 읽으면서 제가 기획하고 있는 여행회고담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1990년대 초반 미국을 여행하면서 적어두었던 여행기를 손에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20년도 넘은 옛날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과거를 여행하는 자가 되어 내게는 거의 전부가 이해도 안 될 뿐더러 비웃음과 혐오감밖에 못 일으킬 어마어마한 광경에 접하든가, 아니면 현대의 여행자가 되어 사라져버린 현실의 흔적을 뒤쫓아 다니든가 해야 하는(149쪽)”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있었다는 고백처럼, 의미 없는 과거의 여행을 복기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때의 여행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읽을거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답은 이미 쥐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문화인류학 분야로 분류되는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의 여행기와 현지조사를 통하여 발견한 것들을 적고 있어 방대한 분량에 비하여 잘 읽히는 책입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우경화 경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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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여행을 권함
김한민 지음 / 민음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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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에서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를 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인상을 굳히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러스킨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아름다움을 제대로 소유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며, 그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스스로 아름다움의 원인이 되는 (심리적이고 시각적인) 요인들을 의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의식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에 관해 쓰거나 그것을 그림으로써 예술을 통해서 아름다운 장소들을 묘사하는 것이다.(알랭 드 보통 지음, 여행의 기술, 277쪽)”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같이 일하시는 위원님 한 분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은 화첩을 주머니에 항상 넣어가지고 다니시는데, 여행을 하면서 스케치로 그려낸 그림들을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제가 그리기에는 재주를 타고나지 못해서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권고를 제대로 실행에 옮긴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김한민님의 <그림여행을 권함>입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그림여행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나에게 그림여행이란, 대가들의 명화를 찾아다니는 미술관 투어가 아니다. 하잘것없어 보이는 낙서라도 직접 끼적거리며 다니는 여행, 그림을 그리면서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르는 여행, 여행 중 어느 날엔가는 과감히 사진기를 숙소에 팽개치고 포켓용 스케치북과 연필만 주머니에 찔러 넣고 홀연히 문을 나서는 여행....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림여행이라 부른다.” <그림여행을 권함>은 그런 여행을 통하여 남겨진 기록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여행’을 위하여 특별히 여행을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여행을 하다보면 부딪힐 수 있는 상황에 따라서 그림과 이야기거리들을 나누다 보니, 작가의 다양한 여행경험들이 뒤섞여 나오는 바람에 읽는 이가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그림그리기에 중점을 두어 읽는다면 별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읽는 이가공감하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겠습니다. 남미여행 때 공항버스를 타기 직전에 화장실 하수구에 문제가 생긴 상황을 읽다보니,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한국에서 오신 부모님을 모시고 서부로 열흘간 여행을 떠나기 전날 쏟아진 폭우에 침실로 물이 스며드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옆집에 뒤처리를 부탁하고 용감하게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물이 넘쳐흐르는 방을 놔두고 한 달간 여행을 나선’ 저자의 찜찜함이 오롯하게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그런가 하면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개인적인 기내 생활의 지혜가 있다면, ‘옆좌석에 앉은 사람과는 말을 트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조언도 완전 공감합니다. 해외여행에 나서던 초반에는 옆좌석에 앉은 사람이 한국인이건 외국인이건 말을 트고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수다를 떨다보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곤 해서, 언젠가 부터는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책에 코를 처박곤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인데, 떠든다고 주변에 앉은 사람들로부터 눈칫밥을 먹지 않아도 되니 참 편한 것 같습니다.

 

책에 실려 있는 저자의 그림들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릴려면 이 정도는 돼야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림들 가운데 글의 분위기를 완전 살리는 대목은 비에 관한 부분입니다. 사실 국내여행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외국여행에서 비가 오면 난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도 긍정적으로 보는 저자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비는 모든 관광의 적이라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고 낙담하거나 무료해하지 말자. 한 줄 한 줄 비를 그리다 보면 원치 않아도 어느 새 그쳐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여유일까요?

 

해왜여행에서 자주 부딪히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잠들기일 것입니다. 미국쪽으로 갈때는 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유럽 쪽으로 갈 때는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지고 새벽같이 눈이 떠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잘 안 되는 침대 맡에서의 독서가 여행 중엔 참 잘된다. 몇 페이지 읽다가 그대로 편안히 잠이 들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은 쉽게 공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국 쪽으로 여행하면서 잠이 오지 않아 들었던 책에 빠져서 밤을 하얗게 새운 적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 중에 잠들기 전 독서에 잘 어울리는 세 사람의 작가들 가운데 눈에 익은 분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왜 고전을 읽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094688>로 친숙해진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입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으려 하고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그림이 많은 탓에 쪽수를 표시하지 않은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제 경우는 여행에 나설 때 들고 가는 노트북에 꼼꼼하게 느낀 점을 적곤 합니다만, 그림에 다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그림그리는 여행을 한번 기획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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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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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전작 읽기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파묵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다양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파묵의 오랜 화두인 동서양 문명의 충돌이 이번 작품에서는 동서양의 종교원리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세속주의자의 갈등, 쿠르드족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들 사이의 갈등, 민간이 군부와 결탁하여 국지적 구데타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한 사회적 구조 등을 그리려다 보니, 이스탄불을 벗어나 아르메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카르스를 무대로 삼은 것 같습니다.

 

주인공 카(Ka)는 시인으로 과거 반정부운동에 연관되어 독일로 망명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12년 만에 이스탄불로 돌아오는데, 여성들의 연쇄 자살 사건과 진행 중인 시장 선거를 취재하라는 임무를 받고 폭설(Kar)을 헤치며 카르스(Kars)에 도착합니다. 카가 이곳으로 향한 가장 큰 이유는 이루지 못했던 옛사랑 이펙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보기 위해서입니다. 카르시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일어나고 있는 여성들의 자살사건들은 최근에 읽은 최수철교수님의 소설 <페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3220780>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세력과 개혁세력 모두 카르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살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원리주의자인 라지베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살은 커다란 죄악입니다! 관심을 가질수록 이 병은 확산되지요!(115쪽)” 자살한 여성들의 뒤를 쫓는 한편 이펙을 만나는 과정에서 교내 ‘히잡’ 착용을 금해 한 여학생을 자살로 몰아넣은 교육원장이 살해되고, 이어서 무대예술가 수나이가 군부-경찰을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에 휩쓸리게 됩니다. 쿠데타 세력들은 이슬람 원리주의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며 카는 두 개의 세력 사이에 끼어든 셈이 됩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선 카에서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1권이 끝나면서 정작 작가가 카의 친구로 등장하면서 잠시 혼동에 빠지게 됩니다.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접고 있던 주인공은 카르스에서 급변하는 상황을 맞으면서 시적영감이 봇물 터지듯 일면서 시를 이어서 쓰게 되는데, 정작 그 시들을 적은 시작(詩作)노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맙니다. 또한 등장인물 들 사이의 관계 역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면서 이펙과의 사랑을 완성해서 독일로 돌아가려는 카의 생각은 꼬이고 마는데... 이런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최근에 읽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http://blog.joins.com/yang412/13243912>에서 설명하고 있는 비극의 이론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파묵 역시 같은 모양입니다. “눈은 항상 도시의 더러움, 진흙, 어둠을 덮어 잊혀진 순수한 감정을 그에게 일깨워줬었다. 하지만 카르스에서 보낸 첫날, 카는 눈과 관련된 이 순수한 감정을 잃어버렸다. 이곳에서의 눈은 그를 지치게 하고, 지겹게 하고, 위축시키는 종류의 것이었다.(1권 22쪽)” 그러면서도 무신론자인 카로 하여금 “눈의 고요함은 나를 신에게 가까이 가게 만드는 것 같아.(93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파묵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교육원장의 죽음처럼 공공의 장소에서 일어난 총격사건이라든가, 2권에 등장하는 작가가 카의 유품을 챙기는 과정에서 <순수박물관>에 대하여 언급한다거나하는 등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등장인물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는 여러 차례의 반전을 보이면서 비극적 결말로 치닫고 있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파묵의 전작 읽기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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