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제로 - 분노와 폭력, 사이코패스의 뇌 과학
사이먼 배런코언 지음, 홍승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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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충동적으로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치밀하게 준비하여 불특정 다수를 연쇄적으로 살해하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던지기도 합니다. 과거 싸이코패스(psychopath; 정신병질자) 혹은 소시오패스(sociopath; 사회병질자)가 벌이던 이런 사건들을 최근에는 반사회성 인격장애라는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저지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있는 사람은 사회적 규범이 없는 사람으로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침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의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의 가능성이 검토되어 왔습니다. 충동적 행동을 억제하는 세로토닌 호르몬의 수준이 낮은 선천적 이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명도 있고, 사회적 규범을 배우지 못하여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물에 떠있는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는 것이라는 후천적 요인에 관한 설명도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유년기의 불우한 환경이 심리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환경적 요인만으로 반사회성 인격장애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무게가 옮겨지고 있습니다. 반사회성 인격장애에 의한 범죄는 선천적 요인과 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신의학적 견해가 발전해오면서 이런 범죄는 범인이 앓고 있는 질환의 영향으로 생긴 점을 감안하여 처벌을 경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건의 피해자를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는 법의 관용성을 악용하는 사례까지도 있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분노와 폭력이 충동적으로 표출되는 반사회성 인격장애, 싸이코패스의 본질을 뇌과학과 심리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해부한 사이먼 베런코언교수의 <공감 제로>를 소개합니다. 베런코언교수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실험 심리학 및 정신 의학부의 발달 정신 병리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자폐증을 연구하고, 자폐증 아동들이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왔습니다.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공감능력을 연구하기 위하여, 설문을 통해 공감 능력을 자가 측정할 수 있는 공감 지수(Empathy Quotient, EQ)와 체계화 정도를 측정하는 체계화 지수(Systemizing Quotient, SQ)를 개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에게서 공감 능력이란, 단지 있거나 없는 두 가지 상태가 아니라 공감이 완전히 바닥난 공감 제로(0단계)에서 충만한 6단계까지 연속되는, 총 7단계의 종형 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는데, <공감제로>는 공감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싸이코패스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감사의 글에서 <공감제로>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이제 <공감제로>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잔인해질 수 있는지와 정서적인 공감의 상실이 필연적으로 이러한 결과를 낳는지를 조사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공감의 신체적(뇌) 기반을 파헤치고 사회적, 생물학적 결정 요인들을 조사하며 예전보다 훨씬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생각이다. 또 공감의 상실을 초래하는 질병들 몇 가지를 면밀히 조사하며 더 광범위한 부분까지도 다룰 예정이다.(12쪽)” 특히 저자는 공감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폐환자들이 장애에도 불구하고 잔인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하고, 잔인성이 몇 가지 공감장애의 특징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공감부족과 잔인성이 결합한 형태의 사이코패스를 사회적 요인과 생물학적 요인이 같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악(evil)이라고 하는 인간의 잔인함의 극한 상태를 공감의 침식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악마라 불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에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의 만행을 비롯하여, 24년 동안 딸을 감금하여 강간하고, 딸에서 태어난 손자를 살해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리츨 사건(1984년 밝혀짐), 1994년에 콩고 반란군이 저지른 만행 등을 인용하여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개인이 저지른 범죄와 전쟁을 치루는 동안 인간이 보이는 잔인성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전쟁이나 권력집단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대규모 제노사이드에 대하여 다카노 가즈아키의 소설 <제노사이드; http://blog.joins.com/yang412/12853780>에서 정리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제3의 침팬지; http://blog.joins.com/yang412/12920729>에서 설명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의 원인은 그 정의만큼이나 어렵지만 이데올로기적 혹은 심리적 동기가 작용하는 경우와 이데올로기 대립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현실적인 이해대립이 있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공감은 타인이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의 사고와 기분에 적절한 감정으로 대응하는 능력이다.(32쪽)”라고 정의한 저자는 “공감은 우리가 관심사에 외골수적으로 집중하기를 중단하고 대신 이심적으로 집중하는 방식을 채택할 때 일어난다.(32쪽)”고 하였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여행을 떠나려고 기차를 탔는데 키가 작은 승객이 선반에 무거운 가방을 올리려 낑낑거리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선뜻 일어나 도와주십니까? 아니면 간섭하는 것 같아 내버려 두십니까? 물론 그 사람은 무거운 가방을 올리지 못해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누군가 도와주지 않을까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자존심이 센 그가 스로로 해결하겠다는 투지에 불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도와주고서도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불쾌하다는 반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잡한 사회를 같이 사는 사람들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감능력을 측정할 수 있다면 사회생활을 잘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저자의 공감측정도구를 이용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특히 연령에 따라 성인의 경우 40개의 항목으로, 아이의 경우 27개 항목으로 된 설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조사할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공감 지수(Empathy Quotient, EQ)를 바탕으로 공감기제의 수준을 0에서 6까지 일곱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레벨 0의 사람은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데, 그 중 일부는 살인, 폭행, 고문,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낄 뿐이지 타인에게 해를 끼치길 원하지 않는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고 지적을 받아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 합니다. 레벨1의 사람도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어느 정도는 되돌아보고 유감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가진 공감능력은 충동적 행동을 제어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레벨2의 사람들은 아직 공감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렴풋이 눈치를 채기 때문에 물리적 공격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레벨3의 사람은 자신의 공감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그 사실을 감추거나 보상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레벨4의 사람은 평균이나 그 이하의 공감능력을 가지는데, 그들의 무딘 공감능력이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레벨5인 사람들은 공감능력이 평균보다 아주 조금 높은데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다고 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기를 삼가는 편이고 다양한 관점을 참고하거나 고려하기 위해 결정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레벨6인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집중하고 그것을 살피고 지원하려 애를 쓰는 놀라운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감지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공감능력을 다양한 수준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를 활용하여 뇌 속에 있는 공감회로라고 하는 특정 부위의 작용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덕분입니다. 어쩌면 <공감제로>를 읽는 분들이 신경과학에 기본적 지식이 없다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 같습니다. 공부를 조금 한 저도 최근에 바뀐 의학용어집을 참고하여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읽기에 다소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공감회로에 참여하는 뇌 부위로는 안쪽앞이마겉질(내측전전두피질), 눈확이마겉질(안와전두피질), 이마덥개(전두판개), 아랫이마이랑(하전두회), 꼬리쪽이마띠겉질(미측전두대상피질)과 앞뇌섬엽(전측뇌섬엽), 관자마루이음부(측두두정접합부), 위관자고랑(후측상측두구), 몸감각겉질(체감각피질), 아래마루소엽(하두정소엽)과 마루엽속고랑(두정엽내구), 그리고 편도체 등 모두 열 곳입니다.

 

앞서 레벨 0에 해당하는 공감제로인 사람들 가운데 일부 사람은 살인, 폭행, 고문,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타인에게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것처럼, 저자들은 공감제로가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저자는 정신의학에서 오랫동안 연구되어온 경계선 성격장애(B 유형), 사이코패스(P유형) 그리고 나르시스트(N유형)로 구분하고 각각의 대표적 임상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신병과 신경증 사이의 경계선에 걸치는 경계선 성격장애(B유형)는 초창기 아동심리학의 대상관계이론에 따라 부모가 자기 아이의 요구를 존중하지 않고 아이를 학대하거나 방임하는 경우에 생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B유형인 사람에서는 세로토닌 수용체에 대한 신경전달물질의 결합정도가 감소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연구결과 유년기의 부정적 경험들이 뇌를 변화시킨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는 사이코패스(P유형)인 사람은 처벌을 두려워하도록 배우지 못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유년기의 장기적 스트레스는 코르티솔의 증가를 가져와 종국에는 관련 부위에 손상을 입히게 되는데, 편도체의 활성이 지나치거나 이마겉질(전두피질)의 활성이 불충분해서 반응성 공격이 과민하게 나타나는 결과를 빚게 된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자기자랑과 자기과시로 타인을 불쾌하게 하는 나르시스트(N유형)은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잔인한 행동을 할 가능성은 낮다고 합니다. N유형 역시 유년기의 감정적 학대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추론하고 있는데, 그들의 외모나 재능에 대한 과대평가와 지나친 방임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지만, 구체적 연구로서 뒷받침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종영된 드라마 <굿닥터>는 자폐3급과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주인공 시온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소아외과를 공부하는 의사로서 자리잡는 과정을 다루었는데, 자폐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시온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자폐증의 일종인 아스퍼거증후군이 공감제로의 범주에 들어가면서도 긍정적인 점을 가지고 있다는데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공감에 어려움을 겪지만 정보처리 방식에서 특별한 능력을 보인다는 점과 비도덕적이라 보다는 초도덕적인 면, 그리고 인지적 공감은 평균보다 못하더라도 정서적 공감은 온전하다는 점 등입니다.

 

이어서 저자들은 공감과 깊은 관련이 있는 감정인식을 담당하는 세 종류의 유전자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즉 세로토닌 수송체 유전자(SLC6A4), 바소프레신 수용체 1A 유전자(AVPR1A) 그리고 카나비노이드 수용체 유전자 1(CNR1)입니다. 물론 더 많은 유전자들이 공감에 관여할 것입니다만, 저자들은 이 세 유전자들의 유전자구성이, 뇌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 즉 공감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다른 형태의 공감제로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점을 비롯하여 공감회로의 이상을 해석하는 방법 등 뿐 아니라,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공감이 결여된 상태임을 진단하는 등 많은 영역에서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저자는 공감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자원 중 하나임을 설득하기 위하여(219쪽)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공감이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http://blog.joins.com/yang412/12128887>에서 공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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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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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독일의 유대계 철학자로 20세기 형이상학, 유대신학적 요소를 사적유물론과 결합시킨 독특한 사상가로 알려진 발트 벤야민의 저술을 처음 읽게 된 것은 생뚱맞게도 누군가 쓴 여행기에서 그가 쓴 글을 인용한 것을 읽고서였습니다. 좌파 아웃사이더로 인식되고 있지만, 문학이론, 미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한 결과물이 정신, 사회과학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폭넓게 인용되고 있다는데 오히려 저의 시야가 좁았던 것 같습니다.

 

최성만교수님이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에서 “부유한 유대인 시민 가정의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그에게 강요한 것은 몰락해가는 계급 속에 갇힌 정체성, 사회로부터 차단된 정체성으로서 이는 어린 벤야민을 소외시켰고, 이 소외감을 극복하는 길을 그는 주로 책읽기에서 찾았다.(30쪽)”고 하면서도 “유복한 시민 가정의 보호막 속에서 자라왔기에 어린 벤야민에게 빌헬름 제국의 말기 계급적 갈등들은 대부분 은폐되어 있었고 파편적으로만 경험할 수 있었다.(31쪽)”고 적고 있어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교수자격 취득에 실패하고 특별한 직업이 없을 때, 신문과 잡지 등에 산문, 여행기, 서평을 기고하던 그가 1920년대 몰락해가는 독일 시민사회에서 받은 파노라마적 인상이나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철학적, 정치적, 문학비평적 관찰과 성찰들, 꿈, 여행기, 기억 등을 몽타주형식으로 엮은 철학적 아포리즘 모음집이 <일방통행로>라고합니다. <사유이미지>는 에세이와 산문단편들을 묶고 있는데 기지에 찬 사상적 통찰들만이 아니라 문체와 아방가르드적 형식이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60편으로 이루어진 <일방통행로>는 ‘주유소’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마치 길거리를 따라 가로에 늘어선 다양한 가게의 간판, 벽보, 플래카드, 광고판, 쇼윈도, 번지수가 적힌 집들, 기타 공간들처럼 다양한 공간들의 열림과 닫힘, 멀어짐과 가까워짐의 모습들을 벤야민의 관상학적 내지는 현상학적 시선으로 ‘사유적인 이미지’로 읽어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작가의 시선이 멈추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방통행로>는 세 분의 옮긴이들이 완역을 했는데, <사유이미지>는 선집에 수록된 이야기 가운데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만 발췌하여 번역했다고 합니다. 일방통행로의 길을 거슬러 들어서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타국에서... 진입금지 표지를 보지 못했던 탓에 신호를 받아서 들어선 도로에서 마주선 차량이 놀란 표정을 짓는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도로상황이 복잡하지 않아 곁길로 빠지면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일방통행로는 복잡한 도로상황을 고려하여 차량의 흐름을 유연하게 하는 효과를 기대하여 설치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작가는 자신의 사유의 흐름이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방통행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 ‘주유소’의 첫 번째 구절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69쪽)”의 의미를 깨닫는 일부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읽어가다 보면 제목과 글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93쪽)”라는 이야기는 글을 쓰는 단계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제목은 왜 ‘계단 주의!’일까요? 하나 더, ‘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 ‘속물들에 맞서는 13가지 명제’, ‘비평가 기법에 대한 13가지 명제’로 구성된 이야기의 제목은 왜 ‘벽보 부착금지!’일까요? 혹시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소화물 운송 및 포장’이라는 제목의 글, “나는 아침 일찍 마르세유를 지나 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보관소에서 박스에 포장되어 언제 다시 이 책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140쪽)”은 주변을 잘 관찰하면 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읽었습니다.

 

<사유이미지>는 <일방통행로>에 비하여 비교적 의미파악이 쉬운 편인 것 같습니다. 특히 벤야민의 작가론이라고 할 수 있는 ‘훌륭한 작가’,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글을 잘 쓴다는 것’ 등은 글쓰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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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버림 - 내 안의 위대함을 되찾는 항복의 기술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박찬준 옮김 / 판미동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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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속상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그런 경우에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끝까지 매달리는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런 집착이 때로는 스스로를 파멸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놓아버림>은 역설적으로 원하던 일에 대한 집착을 버렸더니 쉽게 이루어지더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놓아버림’이 가지는 힘을 학문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편집한 프랜 그레이스는 자아발전에 관심이 많았는데 때로는 신체적, 정서적 문제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느낀 경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킨스박사의 이론을 배우게 되면서 자신의 인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놓아 버림>은 더욱 자유로운 삶을 찾아 여행을 떠날 용의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목요연하게 지도가 되어 줄 이라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즉, “이 책에서 제시하는 틀을 활용하면 각자 타고난 능력으로 행복과 성공, 건강, 안락, 직관, 조건 없는 사랑, 아름다움, 내면의 평화, 창조성에 이를 수 있다.(9쪽)”는 것입니다.

 

호킨스 박사의 전작 <의식혁명: http://blog.joins.com/yang412/2511139>을 읽으면서, 1부터 1000까지의 척도로 인간의 의식수준을 수치화하는데 성공하여 과거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의식수준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에 회의를 느끼면서 그가 해왔다는 다양한 연구 전반에 대하여 부정적 인상을 가졌었고, 심지어는 그의 주장이 지극히 서구적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놓아버림’에 대하여 저자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듯 마음속 압박을 갑작스레 끝내는 일이다. 놓아버리면 마음이 놓이고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한결 기쁘고 홀가분해진다.(32쪽)”고 하면서 이는 부처의 가르침을 적용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전작에 비하면 저자는 종교, 철학, 의학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동양적인 것을 배워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사람이 감정을 다스리는 방식은 크게 억제, 표출, 도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억압하거나 의식적으로 억제하고, 이로서도 감당이 되지 않을 때는 표출 기제를 사용하여 감정을 분출해서 억제할 수 있는 분량으로 줄이는 것입니다. 표출이 여의치 않을 때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감정에서 벗어나는 회피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놓아버림’은 전혀 새로운 접근방식인가? 사실 놓아 버림은 타고난 능력이라고 합니다. 다만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놓아버리면 아예 그것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한 켠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아버림의 정의하고 감정의 신경해부학적 원리를 설명한 다음, 저자는 무의욕과 암울함, 비탄, 공포, 욕망, 분노, 자부심, 용기, 받아들임, 사랑, 평화 등 놓아버림과 관련이 있는 요소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례들, 심지어는 자신의 경험까지도 진솔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제가 기억해야 할 점이라면 “타인에게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했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분노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타인이 내게 보내는 감정표현을 알아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개는 주인의 가슴에 사랑을 가져와 사랑의 크기를 키우는데, 사랑은 수명을 연장한다고 합니다(220쪽).” 다만 제가 서양의학을 전공한 탓인지, 스트레스에 대한 에너지 체계의 반응과 침술 체계에 대한 저자의 주장에는 쉽게 공감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침술체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신체 에너지 청사진에 따라 육체 구석구석 필수 에너지가 흐른다고 본다.(247쪽)”는 주장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합니다.

 

놓아버림과 정신의학 영역의 심리치료와의 차이점에 대하여 저자는, “심리치료에서는 치료자에게 의존하므로,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떤 기법을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 또한 치료자와 환자가 동의하는 심리이론에 의존한다. (중략) 놓아버림의 기제에서는 환자 역할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나 이론에 의지하지 않는다.(282쪽)”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놓아버림의 목표는 모든 괴로움과 아픔의 근원 자체를 없애는 것(284쪽)’에 두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저자의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객관적 근거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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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서로돌봄 - 사랑과 섬김의 실천
성규탁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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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한 자녀를 지원하던 노부모까지 함께 어려움이 처하거나 부모와 자녀가 불화를 겪고 심한 경우에는 패륜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늙은 부모를 자녀가 모시던 옛 풍습이 대가족제도의 붕괴에 따른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고 있는 것이며, 특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자녀 세대가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줄어든 것도 원인이라고 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242660). 결국 노인 부양에 대한 사회적 부담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세대간의 갈등이나 노인복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시급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복지를 전공하신 성규탁박사의 제안을 담은 <서로 돌봄>을 통하여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우리 겨레는 일상생활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인자함을 베풀어 서로 돌보는 도리를 문화적 가치로 오랜 세대에 걸쳐 실행해왔다.”고 하고, 최근 변화된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의 개념을 확대하여 “가족을 비롯한 이웃과 사회가 서로 돌보는 공동사회를 이루는 시대적 흐름이 현저해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추구하는 서로 돌봄과 국가가 개발하는 사회보장을 효율적으로 융합하여 한국적 사회복지가 구현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서로 돌봄>은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방향: 서로 돌봄-넓은 사랑의 실현’에서는 돌봄은 물질적인 면 뿐 아니라 정서적인 면까지도 실현되어야 할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고, 2부 ‘실천: 변하는 돌봄 방식’에서는 가족 구성이 변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여 가족 바깥의 사회적 지원망과 사회복지 서비스를 활용하는 방안을 사례를 인용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마지막 3부 ‘이념: 이어지는 전통’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가족 중심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고, 서로 돌봄이 한국적 가치로 실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서구사회의 복지모델을 인용하여 사회복지가 국가적 책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보장제도가 발전된 서구 사회에서도 최근에는 복지제도만으로는 국민의 복지요구 수준을 만족시킬 수 없단즌 결론에 도달하고, 가족이 자체의 성원들을 돌보는 본래의 기능을 보다 더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여,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모시는 경우, 부모와 가까이 사는 경우,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 등과 같이 다양한 상황에 따른 돌봄의 모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관계가 소원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저자는 부모와 자녀가 서로 노력하면 지리적 거리에 상관없이 바람직한 가족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돌봄의 이론적 배경 뿐 아니라 현실적 실행방안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가족 중심의 돌봄의 유형에서도, 개인적 돌봄, 가족을 위한 돌봄 그리고 지역사회를 위한 돌봄에서 자주 제공하는 돌봄의 형식을 제시하고, 많은 자녀들이 고민하고 있는 위급할 때의 돌봄 형식도 제시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사회복지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데, 시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고, 이용할 시설을 선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 몇 가지 예를 들면, 시설의 분위기가 안락하고 가정적인가, 면허를 소지한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는가, 시설의 안전은 확보되어 있는가, 오락 등을 포함한 사회활동 프로그램은 얼마나 제공되는가 등, 쉽게 놓칠 수 있는 요소들을 정리하고 있어 참고가 될 것입니다.

 

봉양이라는 고답적인 의미를 돌봄이라는 현대적 표현으로 다시 해석하여 전통적 돌봄 방식이 현대에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라거나 동아시아 각국에서의 돌봄의 현황 등에 관한 논의도 더하고 있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격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기에 안정될 수 있도록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현시점에서 실질적 도움이 될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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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밤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1
알프레드 드 뮈세 지음, 김미성 옮김 / 책세상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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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집 <오월의 밤>을 붙들고 씨름했다는 한 독자는 “아주 오래 전이긴 하지만...나에게도 시를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요즘은 詩 읽기가 힘들까,”라고 리뷰에 적고 있습니다만, 저도 한 때는 시구절을 읊조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詩 읽기를 그만둔 것이 언젠가 조차 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뮈세가 라마르틴, 비니, 위고와 더불어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사실도 몰랐다는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의 밤>을 읽은 것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어보자는 의욕 때문입니다.

 

뮈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에 처음 등장합니다. 마르셀의 할머니가 설날에 마르셀에게 줄 선물로 루소의 작품과 상드의 <앵디아나>와 함께 골랐던 것인데 아버지의 반발로 상드의 전원소설들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상드와 소문난 연애와 뒤따른 실연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연작시가 어린 마르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셀이 친구 블로크와 나눈 이야기를 적고 있는 부분에서 뮈세의 「10월의 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선가 뮈세의 시를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셀의 고백에 대하여 블로크는 “뮈세 선생에 대한 네 저속한 취미 따위는 이제 버려. 아주 위험한 녀석에다 기분 나쁜 작자야. 고백하는데, 그 녀석이나 라신이란 작자는 평생 동안 운율을 잘 맞춘 시구절 하나씩은 쓰긴 했지만, 그 시구절은 내가 보기엔 절대로 아무 의미도 없다는 데에 그 최상의 가치가 있어. 예를 들면, ‘하얀 올로손과 하얀 카미르(La blanche Oloosone et la blanche Camyre)' 그리고 라신의 ’미노스와 파지파에의 딸(La fille de Minos et de Pasiphaè)이라는 구절이지.(프루스트 지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쪽으로 1, 162쪽, 민음사 펴냄;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라고 혹평했다고 합니다. 사실 뮈세는 1833년 데뷔 초기 관심을 쏟던 낭만주의적 시작에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위고와 불화를 빚고, 이어진 상드와의 세상이 떠들썩한 열애도 1835년 파국을 맞은 상황에서 쓰여진 시들이 문단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847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올린 희곡 <변덕>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시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프루스트 자신은 뮈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출판사의 리뷰에 따르면, “실연의 고통에 빠져 있던 뮈세는 ‘내 영혼 속에서 빠져나오고자 하는 무언가’를 느낀 오월의 어느 밤, 촛불로 온 방 안을 밝혀놓은 채 아침까지 쉬지 않고 시를 썼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영혼에서 빠져나온 것이 바로〈오월의 밤〉이었다. 뮈세가 무려 112행에 이르는 시를 하루저녁에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영감이 손을 움직여 시를 쏟아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연의 아픔은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눈뜨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고통 없는 시는 없으며 시인은 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그에게 시란 ‘한 방울의 눈물로 진주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프루스트가 인용한 시 ‘오월의 밤’의 한 구절를 살펴보면, 절망의 나락에서 실연의 아픔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시인을 뮤즈가 위로하는 대목입니다. “오세요. 신 앞에서 노래합시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 잃어버린 환희 속에서, 지나간 고통 속에서 노래합시다. / 입맞춤을 한 채로 미지의 세계로 떠납시다. / 닥치는대로 당신의 생명의 메아리를 일깨웁시다. (중략) 색색의 나무가 우거진 펠리온 산꼭대기와, / 푸른 티타레스와, 백조가 떠다니는 물 위로 / 하얀 올로손과 하얀 카미르가 비치는 / 은빛의 만(灣)이 여기 있습니다.(78쪽)”

 

김미성교수가 옮긴 뮈세의 <오월의 밤>은 뮈세의 <신시집>의 분량이 너무 방대해서 전체를 완역하지 못하고 발췌해서 번역했다고 합니다. 시집의 말미에 뮈세에 관한 다양한 연구서들을 종합하여 시인과의 상인터뷰를 싣고 있어 뮈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마치 대화하듯 시구절들을 배치하고 있는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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