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양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7
앙드레 지드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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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읽기 위하여 공부하고 있는 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대비가 되는 <좁은문; http://blog.joins.com/=yang412/13192256>의 저자 앙드레 지드를 더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상의 양식>은 1897년에 발표되었는데, 작가가 1927년판 서문에서 “나는 문학의 견딜 수 없을 만큼 인공적 기교와 고리타분한 냄새로 찌들어 있던 시기에 이 책을 썼다. 당시 나는 문학이 다시금 대지에 닿아 그저 순박한 맨발로 흙을 밟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12쪽)”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을 쓸 무렵 결혼하여 생활의 안정을 이룬 저자는 예술작품으로 승화될 작품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학의 일반적인 형식과는 달랐던 이 작품은 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프랑스 문학계의 분위기를 지드는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프랑스 문학, 특히 이상하게도 낭만주의 문학은 슬픔을 찬미하고 배양하고 전파해왔다. 가장 영광스러운 행동에 나서도록 인간을 부추기는 저 능동적인 슬품이 아니라 이른바 우수라고 일컫는, 시인의 이마를 창백하게 만들어 돋보이기 하고 눈빛에 향수가 깃들게 하는 일종의 물렁물렁한 영혼의 상태 말이다.(266쪽)” 오직 당시 열아홉 살이던 비평가 에드몽 잘루만이 이 책의 가치를 볼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다음처럼 평했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책들 중 하나이다. (……) 우리가 가장 초조하게 기다려왔고 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다. (……) 금세기가 베르테르와 르네의 영향을 받았듯이 아마도 다음 세기의 문학은 이 책의 주인공인 메날크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지상의 양식>을 읽으면서 먼저 눈에 띈 단어는 ‘선택’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무수한 선택의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생각해보면 선택이란 어떤 것이든 무서운 것이다. 의무를 인도해 주지 않는 자유란 무서운 것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낯설기만 한 고장에서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거기서 ‘자신만의’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 발견이란 오직 자기 만을 위한 것이다.(20쪽)” 그래서 선택을 신중해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선택이 내게는 고르는 것이라기보다는 고르지 않는 걸 버리는 것으로만 보였다. 시간이 좁다는 것과 시간이 하나의 차원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끔찍한 마음으로 깨달았던 것이다.(76쪽)”

 

“대낮인데도 켜놓은 등불 앞에서 나는 시간을 잊은 채 행복감에 잠겼다.(85쪽)” “욕망들이여! 아름다운 욕망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짓이겨 터진 포도송이를 가져다주리라.(111쪽)” “존재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히 쾌락적인 것이 되었다. 삶의 모든 형태를 나는 맛보고 싶었다.(127쪽)” ‘지상의 양식’을 통하여 저자가 바라보는 세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새로운 인생’에 담긴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하여 태어났음을 물론, 자연의 모든 것이 가르쳐주고 있거늘’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런 점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뜻하는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이라는 개념에 관한 이야기도 읽을 수 있습니다. 노마디즘은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1968년 발표한 <차이와 반복>이라는 저서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여 철학용어로 쓰이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이들은 나의 에고이즘을 비난했다. 나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힐난했다. (…) 한 사람에게 사랑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결과가 될까 봐 나는 나 자신을 줄 뿐이었다. (…) 자연에 대하여 그랬듯이 여기서도 유목민인 나는 어디서도 멈추지 않았다.(86쪽)”

 

<지상의 양식>에는 지드가 젊은 시절 발표한 ‘지상의 양식(1897)’과 그로부터 38년이 지나 발표한 ‘새로운 양식(1935)’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을 옮기신 김화영교수님은 작품해설을 통하여, ‘지상의 양식’에서 우리는 저자인 지드 자신, 다시 말해서 그가 만난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사건들이 만들어낸 한 인간의 다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리하였고, ‘지상의 양식’의 흐름과 영감에 잇닿아 있는 ‘새로운 양식’에서는 전작의 역동성과 함께 희열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와는 달리 지드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245쪽)”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 법칙에 좀 더 고분고분 따르도록 해야 해. 그러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거야.(248쪽)”라고 말하는 신을 소개하는 것을 보면, 신학자들이 궤변으로 신의 말씀을 왜곡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신은 나를 붙잡고 있다. 나는 신을 붙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한다.(251쪽)”고 고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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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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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습니다. 니체는 1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있는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라는 글을 “나는 모든 글 가운데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63쪽)”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63쪽)”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허접스러운 글에 정신을 팔지 말라는 경고로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피로 썼다는 차라투스트라는 1부에서 3부를 각각 열흘에서 보름 정도, 그야말로 신들린 듯이 썼다고 하고, 마지막 4부는 여섯 달에 걸쳐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작가가 신들린 듯 쓴 글을 역시 저도 단숨에 읽어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포함하여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을 단 제1부에서는 산에서 내려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차라투스트라가 방랑을 떠나는 과정을, 2부에서는 도래할 인간인 '초인'을 찾아가는 여정을, 3부에서는 '영원회귀'의 오솔길을 더듬어가는 차라투스트라의 고난을, 그리고 마지막 4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를 깨닫게 되는 자들과의 만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서른에 입산해서 십년의 세월을 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이해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11쪽)”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산을 내려와 시장에서 군중을 만난 차라투스트라는 “신은 죽었다. (…)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15쪽)”고 선언합니다. “초인(超人; Übermensch)은 '영원회귀‘의 진리를 체득하고, ’힘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을 가리킨다.”고 각주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니체는 <반그리스도교>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성서를 사제들이 왜곡하여 서술하여 신도들을 구속하려 들었다고 통박하였던 것(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동서문화사;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을 고려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우리말로 옮기신 장희장교수님이 작품해설에서 이전의 신의 율법은 인간의 선악을 규정하는 고정불변의 절대 명령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니체는 도덕을 특정한 시대, 특정한 조건 하에 주어진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고 보았고, 그 결과가 주인노릇을 하면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킨 것이라고 보았다는 설명에 일면 수긍이 가는 것 같습니다.

 

죽은 신을 대신하여 인간사회에 ‘힘의 의지’를 실현시킬 미래의 인간, 즉 초인의 세상을 준비하는 일이 차라투스트라가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가 이룬 대로 가장 정직한 존재인 자아가 정직하게 말하는 것을 배우고, 몸과 대지를 찬양하고 경의를 표하게 되도록 안내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대중을 이끌어갈 초인은 누구일까요? 읽어가다가 생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될 수도 있는 구절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또한 초인이라는 말을 길 가다 주웠으며,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인간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고, 새로운 아침놀에 이르는 길로서 행복에 겨워 자신의 정오와 저녁을 찬양한다는 것을 알았다.(351쪽)”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시인으로서, 수수께끼를 푸는 자로서, 그리고 우연을 구제하는 자로서 나는 그들에게 미래에 창조적으로 관여하고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을 창조적으로 구제할 것을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꾸준하게 정진한 자아가 종국에는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를 극복하는 단계에 이르면 초인(超人)이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대중은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닫도록 안내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의 역할이 아닐까요?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를 구원하고 일체의 그러했었다를 개조하여 의지가 마침내 ‘나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게 되기를 나는 바랄 것이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352쪽)”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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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뇌 - 당신의 위장이 스스로 생각한다
마이클 D. 거숀 지음, 김홍표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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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뇌>라니, 머리 안에 담겨 있는 뇌 말고도, 우리 인간은 모두가 제2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2의 뇌는 우리 몸의 소화 기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의의 소화기관이라고 한다면 음식물을 받아들이는 입에서부터 소화가 다되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항문에 이르는 경로를 포함할 수 있겠습니다. 소화 기관을 따라 약 100미터에 이르는 신경계가 존재하고 위장관을 조절하는 신경계는 제2의 뇌라고 부를만하다는 것이 <제2의 뇌>를 쓴 마이클 거숀교수입니다. 거숀교수는 컬럼비아대학 해부학과에 재직하면서 신경생물학을 전공하고, 특히 신경위장관학의 대부로 통한다고 합니다.

 

먼저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1부에서는 위장관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계가 제2의 뇌라고 할 만하다는 특별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을 그동안의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적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와서 소화되고 배설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사실상 신체의 외부환경이라고 할 위장관 내부에서 우리 몸을 위협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3부에서는 위장관에 분포하는 신경계통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질병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미경검사를 통하여 질병을 진단하는 병리학을 전공하면서 흔히 만나는 위장관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서 적지 않은 신경조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위장관을 구성하고 있는 근육층의 사이에 아우어바흐 신경총과 점막 바로 아래 있는 마이스너 신경총이 있습니다. 위장에 음식물이 들어오면 우선 잘게 부수는 작업을 마쳐서 소장으로 넘어가는데, 소장에서는 간에서 만드는 담즙과 췌장에서 만드는 소화액과 잘 섞이도록 하면서 흡수가 일어나도록 아래쪽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바로 연동운동입니다. 연동운동이 제대로 일어나려면 전체 장이 꼬임이 없이 율동적으로 운동해야 하는데 이러한 운동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위장관에 풍부하게 분포하고 있는 신경조직들인 것입니다. 위장관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계에는 뇌와 척수로부터 나오는 말초신경이 연결되고 있습니다만, 수술 등으로 인하여 절단이 되더라고 위장관의 운동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뇌의 통제를 받지 않더라도 자율적인 운동이 일어나도록 통제하는 위장관의 신경계통의 역할을 ‘생각하는 소화기관’이라는 설명을 달아서 ‘제2의 뇌’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몸을 총괄하는 뇌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추신경계에 속하는 뇌와 척수에 들어있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수용하여 분석하고 그에 맞는 반응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그 자극들을 기억하고 통합하는 높은 수준의 의식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위장관계통에 분포하고 있는 신경조직이 전체 위장관의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조정하는 기능까지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범위는 위장관 그리고 위장관과 연관을 가지고 있는 담낭이나 췌장 등 일부 기관과 연계하고 있는 정도일 것이라는 짐작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위장관 신경계) 그들은 뇌의 노예가 아니고, 종속되지도 않았으며, 독립적인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신경계의 독자적인 영역이다. 말초신경계 무리에서 그들은 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반란군이다.(21쪽)”라는 근거가 입증되지 않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2의 뇌>를 요약하면 위장관신경계에 관한 저자가 이룩해온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설명하고 있는데,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들의 이름까지도 거론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으나, 사족처럼 읽히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신경과학은 아무래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용어에서부터 연구방법 등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의 수준을 어디에 두었는지 분명하기 않습니다만 일반인이 읽기에는 적지 않게 어려울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했던 파킨슨병과 관련하여, ‘대뇌에서 볼 수 있는 레비소체(Lewy body)가 소화기관의 신경세포에서도 볼 수 있다.(323쪽)’는 언급은 좋은 참고사항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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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안식처, 에르미타를 찾아서 -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
지은경 지음, 세바스티안 슈티제 사진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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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Ermita)”는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 사이에 흩어져 있는 작고 소박한 건축물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이 말에는 ‘은둔지’,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 ‘세상과 뚝 떨어진 집’, ‘사막과 같이 황량함’ 처럼 쓸쓸함과 연관되는 모든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깊은 산속에 세워진 작은 암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제목에 곁들인 부제 ‘스페인에서 만난 순결한 고독과 위로’는 순례자들의 쉼터에서 그들의 고난의 흔적을 보면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사진작가와 작가의 환상적인 팀웍이 만들어낼 스토리에 대한 기대도 컸습니다. 어쩌면‘에르미타에 매료되어 7년째 에르미타를 찍어온 벨기에의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티제(Sebastian Schtyser)와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작가 지은경이 에르미타를 찾아 스페인 북부에서 보낸 4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다.’는 설명을 흘려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슈티제가 에르미타를 찾아 사진을 찍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파비올라 여왕 재단의 후원으로 스페인 북부에 흩어져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에르미타들을 찍고 있다.(221쪽)”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재단에서는 산재해있는 에르미타를 확인하고 사진으로 남기려는 의도에서 후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에르미타라는 독특한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보존하려고 한다면 사진작가가 아니라 건축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맡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슈티제는 오로지 청명한 계절은 다 제켜두고 겨울철에만 그것도 핀홀 카메라를 가지고 에르미타를 찍어오고 있다고 하는데, 화려하고 발랄한 파란 하늘은 에르미타를 위한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빈자를 위한 교회, 에르미타를 담아내기에는 외롭고 쓸쓸한 작업을 더욱 심화시켜주는 우울한 회색빛이 감도는 겨울날이 제격인데, 이 특별한 빛은 주변을 고요히 잠재우고 구름에 반사된 햇살을 받은 에르미타는 영롱하고 섬세하게 반짝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22쪽) 게다가 고요한 빛을 부드럽게 묘사하는 핀홀 카메라는 가장 원시적인 사진기로 몽롱한 콘트라스트를 자아내지만 에르미타의 외로움이 가진 모든 디테일을 정성스럽게 세세히 담아내는 재주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핀홀 카메라로 찍은 에르미타는 몽롱하게 보이는 자연의 배경 속에서 조금 더 선명한 모습으로 떠오르는 듯 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존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에서 기록한 ‘기억의 등불’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건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은 돌이나 금과 같은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광은 건물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에 달려 있고 말하고자 하는 바의 울림과 엄밀한 관찰의 깊이에 달려 있으며, 또한 찬성이나 비난이 교차하더라도 인간애의 물결로 오랫동안 씻긴 그 벽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불가사의한 공감에 달려 있다. (…) 우리가 기대하는 건축의 진정한 빛과 색과 고귀함은 시간이라는 저 황금의 얼룩 안에 있다.(존 러스킨 지음, 건축의 일곱 등불, 240쪽)”

 

이 지역에 산재해있는 에르미타의 건축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하는데, 에르미타는 그 지방의 흙과 돌로 지어져 경관을 해치는 일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경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빨간 흙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빨간 흙으로, 검은 돌이 많은 산속의 에르미타는 검은 돌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86쪽) 기본적인 모습이 비슷한 우리네 암자와는 다른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절벽 위에 홀로 세워져 있는 코르사의 마레 데 데우 데 라 페르투사 에르미타가 절벽의 지형에 의지하여 쌓아올린 것을 보면, 절벽 위의 지형을 살려서 세워졌다는 죽서루가 연상됩니다.(이희봉 지음, 한국 건축의 모든 것 죽서루; http://blog.joins.com/yang412/13210699)

슈티제가 담은 몽환적 분위기의 에르미타들이나, 그곳에 이르는 여정을 담은 사진과 에르미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사진들은 그들의 여정에 함께 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은경작가가 정리한 에르미타로 가는 여정, 사진작가의 작업 과정에 대한 기록이나, 오랜 세월 동안 그곳을 지키며 묵묵히 자연 속에 몸을 내맡겨온 에르미타의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미 쇠락해가고 있는 에르미타들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없어서가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여행이 점점 고달파지자 ‘나는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또 애초에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엉뚱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책은 세상으로부터 믿음과 삶에 대해 다른 비전을 가졌던 수도자들과 은둔자들에 관한 이야기(7쪽)’라는 요약에 충실한 내용이었나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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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 읽기 밀란 쿤데라 전집
박성창 외 지음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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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여름, 홍대 앞에 있는 가톨릭청년회관 CY씨어터에서 열린 북콘서트 참석이 시작이었습니다. 이날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같이 진행하신 북콘서트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를 다루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47499). 오래 전에 읽은 듯 하면서도 생각나는 대목이 별로 없어 북콘서트에 가기 전에 새로 읽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새롭게 깨닫는 점들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진행하신 분들의 전공을 살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바탕으로 1989년에 만든 영화 <프라하의 봄>의 한 장면을 소개하기도 하고 쿤데라의 작품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을 낭독하기도 하면서, 무대는 두 분이 주고받는 이야기들로 끊임없이 채워졌습니다. 덕분에 책을 읽을 때는 미처 몰랐던 부분을 일깨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 읽기는 민음사의 전작출판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물론 저자가 이번 번역출판 기획에는 희곡 <열쇠의 주인들>과 에세이집 <저 아래에서부터 당신은 장미 향기를 맡을 것이다>를 넣지 말아달라는 요구가 있어 빠지게 되었다고 하니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 그의 전작을 다 읽은 것은 아닙니다.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하나의 작품만으로 어떤 작가의 작품세계를 모두 읽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경험이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오르한 파묵의 작품들을 모두 읽은 것과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오르면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헤밍웨이전집을 통독한 기억 정도입니다.

 

쿤데라의 작품을 읽은 분들은 대뜸 그의 작품들은 너무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저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아마도 작품 말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제나 작품해설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책읽는 이가 온전히 혼자서만 느껴야 만하는 것도 크게 한 몫을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쿤데라 전작출판을 기획하신 방미경님은 “쿤데라 처럼 본인의 작품에 해설이 실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잘못된 설명이나 사견이 개입되어 자신의 소설이 곡해되는 것을 싫어하기 작가(박성창 외 지음, 밀란 쿤데라 읽기, 192쪽)”라면 상대하는 것이 참 무섭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밀란 쿤데라 읽기>는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해 오신 이난아교수님께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세계와 그의 작품들을 분석한 글을 담은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126504>을 읽고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저의 경험에서 본다면 말씀입니다.

 

<밀란 쿤데라 읽기>는 크게 작가에 대한 글과 그의 작품에 대한 글로 나뉘어 있습니다. 김연경, 정여울, 정혜윤, 김미래 님들이 쿤데라의 작품세계에 대한 글을 쓰셨고, 두 편의 대담을 기록한 글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담의 하나는 예술의 구성에 대한 살몽과 쿤데라의 대담과 그의 작품세계에 대하여 박성창교수님과 쿤데라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이번 전작시리즈의 번역을 맡아주셨던 분들께서 쓰셨다는데, 꼭 한 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정체성>을 번역하신 이재룡교수님을 대신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크베토슬라프 흐바틱의 글을 박진곤님의 번역으로, <정체성>은 김병욱님께서 쓰신 글을 싣고 있습니다.

 

민음사에서 기획한 밀란 쿤데라 전집은 <농담>에서 <향수>까지 열권의 장편과 단편집에 이어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소설작품들을 분석하신 김영경교수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쿤데라의 전집으로 나온 책들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라는 작가소개말이 전부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김영경교수님께서는 “아무리 문학 작품의 독자성을 고집한다고 할지라도 너무 인색한, 심지어 무례한 소개가 아닐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저 두 줄에 소설가 쿤데라의 정체성이 압축된 셈(32쪽)”이라고 정리하셨습니다.

 

프랑수와 리카르는 쿤데라의 창작도정을 세 개의 사이클로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농담(1967)>에서 <삶은 다른 곳에(1973)>로 이어지는 ‘체코 사이클’이다. 작품 소재를 주로 체코라는 국가의 틀 안에서 찾은 시기다. 두 번째는 <웃음과 망각의 책(197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불멸(1990)>로 이어지는 ‘중간 사이클’이다. 종래의 국가적 틀에서 벗어나 국제적 독자를 겨냥하여 작품을 쓴 시기다. 마지막 세 번째는 <느림(1994)>, <정체성(1997), <향수(2000)>로 이어지는 ‘프랑스 사이클’이다. 그가 애용해온 7부 구성 형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형식으로, 직접 프랑스어로 글을 쓴 시기다. 중간 사이클이 끝난 시기, 즉 <불멸> 이후 일정 시기가 그의 문학적 위기의 시기로 언급되곤 한다.(164쪽)” 작품들이 작가의 삶의 여정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본다면 그의 작품의 방향은 그의 생각이 변화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쿤데라의 삶을 보면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만 했구나 싶습니다. 학업에 정진할 무렵에는 <농담>을 통해서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반공산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것이 첫 번째 겪은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입당과 탈당을 반복하였고,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려는 순간 소련군의 침공으로 다시 위축되고 말았으며, 결국은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하는 그야말로 보헤미아적 운명에 몸을 맡겨야만 했으니, 그의 삶은 언제나 불투명했을 것입니다. 특히 프랑스로 이주한 초기에는 마치 비탈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안고 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이다! 눈길을 아래쪽으로 급전직하 하고 손은 위를 향하여 내뻗는 비탈. 여기서 마음은 자신의 이중의 의지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 눈길은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올라가고 내 손은 심연을 붙든 채 그 위에 몸을 지탱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것이 나의 비탈이며 나의 위험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53쪽, 민음사, 2004년)”

 

살몽과의 대담에서 그의 작품의 뼈대를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책을 읽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부분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쇤베르크의 ‘음표들의 시리즈’와 유사하게 몇몇 기본 단어에 기초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는 망각, 웃음, 천사, ‘리토스트’, 경계선 같은 주된 다섯 단어들이 줄곧 분석되고 연구되어 정의되면서 마침내 실존의 범주로 변환된다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은 집 한 채가 몇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것처럼 이와 같은 몇 개의 범주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건축학적 구상’이라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작품이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 수학적 질서가 있다는 사실 역시 <밀란 쿤데라 읽기>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체코의 한 비평가가 ‘<농담>의 기하학’이라는 글을 통하여 분석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쿤데라는 “저는 소설을 부로 나누고, 부를 장으로 나누고, 장을 다시 단락으로 나누는 것, 다시 말해 소설의 분할을 명확하게 하려고 합니다. 일곱 부는 각기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입니다. 각각의 것들은 나름대로 고유한 서술 유형에 따라 특징지어지죠. (…) 또한 각기 고유한 길이가 있지요. <농담>의 길이 순서는 아주 짧음, 아주 짧음, 김, 짧음, 김, 짧음, 김이죠. (66쪽)”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특성을 베토벤의 사중주곡 <op. 131>과 비교해보이기도 합니다.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음악적 재능이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던 키치에 대한 궁금증도 풀렸습니다. 쿤데라는 이 부분을 ‘건축학적 균형의 비밀’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부분이 스토리 차원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에세이(키치에 대한 에세이) 차원에서 쓰인 것이라는 겁니다. 인물들의 단편적인 삶들은 하나의 ‘예(例)’, ‘분석되어야 할 상황’으로 이 에세이 속에 삽입된 것(57쪽)”이라고 말입니다.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의 성격에 대하여 김영경교수님은 다음처럼 정리하였습니다. “대체로 그의 소설 관련 에세이는 르네상스와 18세기(세르반테스, 라블레, 스턴), 19세기-근대(발자크, 플로베르, 톨스토이, 도스토엡스키), 끝으로 그의 스승-선배격 거장들(프루스트, 카프카, 무질, 브로흐)을 아우르며 어지간한 소설론을 무색케 할 정도로 정치하다. 이른바 쿤데라 사전이 정의하는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다. 인간 존재의 네 영역 혹은 요구(‘유희’, ‘꿈’, ‘사고’, ‘시간’)을 담아내는 장르이기도 하다.(34쪽)” 그의 에세이에 담긴 이런 힘은 어쩌면 학부에서 공부한 미학의 내공이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일단 그가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을 일독이라도 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성창교수님은 쿤데라와 대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향수>를 대비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셨습니다.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향수>에서는 프라하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향수>에서는 <농담>과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주제가 되었던 기억과 망각을 다루게 된 동기를 물었습니다. 쿤데라는 기억은 무엇인가, 기억의 능력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기억 능력은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 아닐까, 기억은 망각의 한 형태는 아닐까 하는 점을 짚어보려 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박교수님은 프루스트의 시도와의 차이점을 다시 물었고,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기억을 통해 되찾은 삶의 행복과 희열을 노래하지요. 하지만 저는 그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기억 속에 떠올리는 것은 생생한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환영(illusion)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이번 소설에서 조제프라는 인물을 통해 주로 이러한 부재, 실재의 환영, 그리고 이러한 ‘환’의 ‘멸’, 즉 환멸(dés-illusion)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86쪽)”

 

프루스트는 오감의 촉발에 의하여 돌발적으로 떠오르는 무자의적 기억은 자의적 기억과는 달리 진실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합니다. 즉 과자냄새, 수저가 접시에 부딪혀서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자동차의 휘발유 냄새 등을 통해 촉발되는 무자의적인 기억이 등장인물들을 저 멀리 과거로 이끌어가는 안내자가 되고, 등장인물들은 과거에 대한 의식에서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조각의 삶의 체험은 오랜 시간의 망각 속에서 숙성되어 그로부터 무자의적인 기억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져 변화된 상태로 기억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작의적인 기억은 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셈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조경식, 망각의 담론, 기능 그리고 역사; 최문규 등 지음, 기억과 망각, 274쪽, 책세상, 2003년)

 

정혜윤PD님은 “쿤데라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비합리적인 면, 감상적인 면, 나의 취약한 면, 나의 안일한 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는 것과도 같다. 그는 시시한 것은 시시하다고 알려 주고 하찮은 것은 하찮은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는 인간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너무나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얼마든지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44쪽)”라고 적었습니다.

 

아무리 처음 가보는 곳이라도 상세한 지도와 안내서가 있으면 문제없이 돌아볼 수 있는 것처럼, <밀란 쿤데라 읽기>는 쿤데라의 작품세계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안내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책을 먼저 읽고 작품해설을 읽는 편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 해설을 먼저 읽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밀란 쿤데라 읽기>에서 출발해서 <소설의 기술>에서 <만남>까지 네 권의 에세이집을 읽은 다음에 <농담>에서 <향수>까지 소설들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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