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이듦에 대하여 - 여성학자 박혜란의 10년 간 더 느긋하고 깊어진 생각모음
박혜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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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 박혜란님의 나이 듦에 대한 두 번째 에세이라고 합니다. 10년전인 2001년에 <나이 듦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내셨다고 했으니, 5학년 5반에 나이 듦에 대하여 고민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사실 웰 에이징, 즉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관하여, 젊어서부터 고민하고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40도 되기 전부터 멋있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을 구하여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작업은 회갑을 목전에 둔 지금도 시작할 무렵 정리한 것이 전부일 뿐, 엄청나게 쌓아둔 자료를 흐뭇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나이 먹는 일이 겁나서 자꾸 외면하려는 생각이 강해졌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자께서는 아주 용감하셨던 모양입니다. 50줄에 나이 듦을 고민하고, 60줄에서 다시 나이 듦을 고민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저자는 들어가는 말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 참 자기중심적이다. 10년 전, 50대 초반에 <나이 듦에 대하여>라는 좀 건방진 제목으로 책을 냈을 때만 해도 난 내가 꽤 나이가 든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 나이의 사람들을 보니, 새파랗다. 무얼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이다.(8쪽)” 일부 남들 먹는 나이를 저 혼자서 먹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는 비아냥거림도 있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만, <다시 나이 듦에 대하여>를 읽어보면 글빨이 참 좋아서 혀에 착착 감기는 것이 저자께서 공연히 멋쩍어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나이 들어가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고 그것들을 친숙한 필치로 써내었으니, 읽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겠습니까? 글을 이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것도 참으로 재주가 아닐 수 없으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가끔은 바깥 분을 덤덤하게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40년을 넘게 살아온 내공이 쌓여 서로 편하게 느껴지는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는 어떤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남자들이 착해졌다’는 글을 읽으면 이 세상 남자들 참 불쌍타는 생각이 여전히 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저는 저자로부터 따끔한 시선을 받게 될 것만 같기도 합니다. “요즘 남자들, 참 착해졌다. (중략) 젊은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 든 남자들도 몰라보게 착해졌다. 착해지고 싶어서 착해진 것이 아니라, 착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괴로워질 것이라는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된 덕분이다.(44쪽)” 하지만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강요받은 착해짐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뒷이야기를 읽다보면 더욱 공감이 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들어서 밥 한 끼를 얻어먹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축되는 것이 아닐까요? 밥 한 끼 먹는 문제인데 왜 얻어먹는다고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여자들은 나이 들수록 독립적으로 되어 가는데 반해 남자들은 나이 들수록 의존적으로 되어 가니까.”라는 대목에 해답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외출하는 아내 치맛자락을 붙잡지 마시고, 그 시간을 오롯하게 즐기는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처럼 나이 들어서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따로 또 함께 하는 나이듦”이 정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혼자 노는 법을 터득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필수조건이라는데 공감합니다. “특히 나이 들어가면서 혼자 놀 줄 모르면 공연히 주위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잦다 보면 젊은이는 점점 더 멀어지고 노인은 점점 더 야속해한다. 나이 들수록 혼자 놀 줄 알아야 인생이 그나마 덜 외롭다. 덜 삭막해진다.(88쪽)”

 

세상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나이 먹었으니까~~’라는 토를 달 이유가 없습니다. 나이를 잊고 살면 젊게 사는 것입니다. 꼭 나이를 먹은 티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께서는 너무 일찍 나이든 티를 내신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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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 반띵
김승일.김엄지.박성준 지음 / 멘토프레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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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소울 반띵’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은 외국에 있다는 김승일작가의 친구가 밀었던 유행어라는데, 돌아오면 또 “소울 반띵 하자”고 그럴 것 같다는데.... 반띵이라는 말은 10대들이 잘 쓴다는 속어 같은데, 다음 사전에는 “물건이나 시간, 돈 따위를 반으로 나눔”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소울’은 또 뭐람... 설마 ‘1) 영혼 2) 마음 3) 정신 4) 소울 5) 아무’라고 설명되는 soul? 영혼을 반으로 나누자구요? 속시원하게 설명하고 있을 줄 알고 <소울 반띵>을 열심히 읽었지만 놓쳤는지 어땠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소울 반띵>은 김승일·김엄지·박성준 등 3인의 젊은 작가들이 ‘청춘’을 주제해서 쓴 산문집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삼인삼색이라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요약한 것처럼 김승일(시인, 1987년생)은 중학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온통 지배했던 홍대 ‘인디밴드’에 대해, 김엄지(소설가, 1988년생)는 오후 네 시에 아침을 먹는…… 소소한 일상생활의 ‘치열함과 무의미’에 대해, 박성준(시인, 1986년생)은 사색공간 ‘시인의 방’에서 끄적거린 ‘잡글’을 시처럼 문학처럼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읽어가면서 이들은 ‘왜 그랬을까?’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는 답을 얻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 애들이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지대 문창과에서 한예종 연극원을 거친 김승일은 왜 홍대 부근을 헤매고 다녔을까 싶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생긴 습관 때문이었을까요? 종로에 있는 대학에 다닐 적에는 학교 앞보다는 혜화동에 자주 갔던 것 같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명동을 거쳐 강남에 있는 직장을 다녔는데, 홍대 앞하고의 인연은 시험준비를 한다고 한달 정도 선배님 처갓집에 처박혔을 때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 간혹 스치듯 들르기도 하지만 홍대 앞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김승일작가의 이야기가 두서없이 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스물 전후에 어떤 모습이었었을까?’하는 생각도 해가면서 말입니다.

 

김엄지 작가의 어머니는 “엄지 참 잘 썼다. 쓰느라고 수고 많았다. 한 번에 읽어서 즐겁고 편했어. 모르는 너를 많이 안 것 같기도 했고. 왜 그렇게 혼자 힘들게 살았을까 생각도 했고. 그래도 네가 참 너그럽다는 걸 알았어. 사랑스러운 여자야. 너는.”라고 읽은 느낌을 적으셨는데, 낮잠을 자는 친구의 긴머리를 가위로 싹뚝 잘라냈다는 작가의 고백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랬더라면 아마 엄청 야단을 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걸어가는 개미의 등에 촛농을 떨어뜨려 죽였다는 이야기가 공감이 되는 것은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봄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지나치던 배추밭에 날아다니는 흰나비를 회초리로 떨구던 기억이 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날아다니는 나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공명심 때문 아니었을까요? 결국은 지나가시던 선생님 눈에 띄어 크게 야단을 맞고서야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는 찜찜한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김엄지 작가의 어머니 말씀처럼 편하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참 부러운 노릇입니다. 쉽게 참 잘 썼다. 잘 읽힌다. 남은 느낌은? 글쎄요....

 

박성준 시인의 글은 시작부터 으스스한 느낌입니다. 그림까지도 말입니다. “저수지 속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깔깔거린다.”라고 시작해서일까요? 물론 귀신이 있다는 말은 절대로 믿지 않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니 무속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작가의 배경이 글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래서 시인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시를 쓰지 않으니 행복하지 않다. 술을 먹고 술을 먹고 술을 먹고 행복하려고 술을 먹는 것이 아니다. 술을 먹으면 견딜 수 있을까봐 술을 먹는다. 무섭다. 무서워서 시를 쓰고 술을 마시고 불행하게도 행복해진다. 시를 쓰지 않는다. 아니 시를 쓰고 있다.”라고 적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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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사이 2 밤과 낮 사이 2
빌 프론지니 외 지음, 이지연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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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사이> 1권에서는 16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습니다만, 2권에서는 12편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긴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 되겠지요? 2권에 나오는 단편들은 무대가 국제화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특히 서울 근처 팔당 기지촌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 마틴 리먼의 「오양의 정반대」도 있어 반갑기도 하면서 왠지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다시는 그 둘이 만날 일 없으리(309쪽)”라는 현자의 말이 동서양을 두고 한 말이라고 적었습니다만, 정말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작가의 장담에 저도 한 표를 던집니다.

 

질투의 힘은 참 무섭습니다. 기지촌의 스타 오양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면서 그녀를 쫓아다니던 미군이 혐의를 받게 되면서 미군 조사관이 투입되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단서가 애매한 상황인데 두 조사관은 진범을 추리하여 압박해 들어가는 과정이 조금은 긴박감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도 진범이 공개된 장소에서 특별한 이유 없이 군용대검으로 노인을 위협하다가 몰려든 군중에 몰매를 맞아 숨지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 같습니다. 어쩌면, “지역 주민들이 무리 지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에서 연장자는 고이 받들어지지 이렇게 학대당하는 법이 없다. 군중으로부터 웅성웅성 욕설들이 일어났다.(343~344쪽)” 우 고유의 경로사상으로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만, 아무리 군중이라도 흉기를 들고 있는 범인에게 다가든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경로사상이라는 우리의 풍습을 되새기게 된 것 같습니다.

 

에디트 피아프가 출생한 파리의 벨르빌 가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도미니크 메나르의 「장밋빛 인생」은 두 가지 관점에서 흥미를 끌었습니다. 첫 번째는 누구나 에디트 피아프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피아프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레일라는 피아프처럼 노래로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지만 세상이 녹록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레일라의 재능이 부족한 탓인지 제대로 된 기회를 붙들지 못한 채 어느날 살해된 채로 발견됩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은 흥미롭게도 수사관이 아니라 글쓰기를 해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지망생 아르노입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살인현장에 끌려가서 등 떼미는 친구 덕분에 우연히 만나게 된 목격자로부터 죽은 여자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르노는 “아무 말씀 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146쪽)”라고 당부를 하는데, 정작 노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아무 말 하지 말라고요? 왜지요?” 이 장면에서 얼핏 ‘이 노인이 왜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선생이 거기 서서 나에게 하는 그 말, 그 말은 내 야이기가 아니에요. 나는 선생이 뭘 하자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147쪽)”라면서 아르노를 처음 본 듯 자꾸만 뜯어보았는데, 마치 자기 집 주방에 어쩌다 이 낯선 사람이 들어와 있는 건지, 어쩌다 사이에 커피포트를 놓고 마주 앉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을 빼꼼히 열고 아르노를 집으로 끌어들인 것은 노인이었거든요. 그런 노인이 “가세요, 선생. 가요, 부탁이니까”라고 아르노를 밀어냈다는 작가의 설명을 듣고서 떠올린 소설이 바로 치매환자가 저질렀다는 살인사건을 다룬 김영하의 장편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http://blog.joins.com/yang412/13208200>입니다. 그책의 리뷰에서도 적었습니다만, 치매환자가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는 많이 있어도 치매환자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건을 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치밀한 사고체계가 필요한 살인사건을 치매환자가 저지른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억들이 손상되어가고 있는 치매환자가 「장밋빛 인생」처럼 우발적 상황이라고 해도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습니다.

 

두 편의 이야기 말고도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 열편이나 더 있습니다. 뉴욕시의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하여 뉴욕시의 옛모습을 알게 된다거나, 전편에 등장했던 마녀 이야기에 이어서 늑대인간이 벌이는 살인사건의 이야기는 공연히 주변을 돌아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바다별님께서 댓글에 적으신 것처럼 골라 읽는 재미가 쏠쏠한 단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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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사이 1 밤과 낮 사이 1
마이클 코넬리 외 지음, 이지연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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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에 빠져 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혼자 근무하는 것이라서 남아도는 시간을 적절하게 보내는 방법으로 고른 것이 가벼운 책읽기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작가의 치밀한 구성으로 만들어진 스토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법의부검을 맡아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익숙한 이름을 볼 수 없었습니다만, 이름만으로도 쟁쟁하다는 영미권 장르문학 대표주자 28인의 단편소설들을 묶은 <밤과 낮 사이>를 읽으면서 지방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경험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1권에는 모두 18편의 장르단편소설을 담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공황시절을 뚫고 살아남은 가족들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다룬 패트리샤 애보트의 <그들 욕망의 도구>를 비롯하여, 스토커에 쫓겨 뉴욕을 떠나 서부에 정착하여 글을 쓰고 있는 주인공이 조종불능상태로 떠가는 열기구를 붙들었다가 은행강도의 협박을 받게 되는 톰 피치릴리의 <밤과 낮 사이> 등은 설마 저런 상황과 마주칠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간혹 뉴스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싶다보니, 우연히라도 남의 일에 끼어드는 일을 피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장르소설이라고 해서 끔찍한 범죄 스토리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틴 에드워즈의 <책 제본가의 도제>는 장래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된 남자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서적애호가의 격려로 책제본 일을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졸리는 “기꺼이 온몸을 바칠 만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중(77쪽)”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평생을 바칠 직업을 결정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인데, 저를 포함해서 그런 사람을 만나본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참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낸시 피커드의 <심술 생크스 여사 유감>이나 메건 애보트의 <즐거운 응원단>이라는 단편 역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한이 맺힐 정도로 부딪히며 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남을 아프게 하는 만큼 그 아픔이 자신에게도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첫남편>이나, 피터 로빈슨의 <개 산책시키기>처럼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까지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여름에 밀폐된 차 속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주는 마이클 코넬리의 <아버지날>에서는 완전범죄는 없다는 사실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제레미아 힐리의 <모자 족인>도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수사기법이 날로 발전하고, 최근에 발전된 IT기술을 기반으로 한 CCTV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깔려있는지 안다면 섣부르게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외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입니다.

 

일단은 강력사건을 다룬 소설들이 많은 편입니다만, 살레인 해리스의 <운이 좋아>처럼 마법사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옆 자리에서 일하는 동료의 얼굴을 힐끗 돌아보기 마련입니다. 입대할 당시 100km행군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출발할 때는 대오를 갖추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오가 늘어지기 시작하는데, 한밤중에는 앞에 가는 사람이나 뒤에 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면 옆에서 도란거리면서 같이 가는 동료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던 경험을 보면, 이런 장르의 스토리가 먹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일단 이 책에 담은 단편소설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습니다. 짧지만 기승전결이 갖추어져 있고,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있고, 짧기 때문에 책 읽는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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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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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알랭 드 보통에 빠져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양기화의 북소리]를 통해서도 소개해드린 바 있는,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http://blog.joins.com/yang412/13086857>을 통하여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보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중심으로 프루스트의 편지와 대화 등을 통하여 우리가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뽑아 올렸습니다. 그것도 아홉 가지나 말입니다. 예를 들면, 책을 읽는 방법을 제외하고서도 ‘오늘의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나 ‘사랑 안에서 행복을 얻는 방법’ 등입니다.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다보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 같습니다.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보통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했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능통하다고 합니다. 스물세 살에 쓴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데,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계기로 일상적인 주제를 철학적으로 풀어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철학의 대중화를 시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 목록을 훑어보면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장소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행이면 여행(여행의 기술, 공항에서 일주일을), 건축이면 건축(행복의 건축), 인간의 불안한 심리(불안, 철학의 위안), 사랑과 섹스(사랑의 기초 한 남자, 인생학교 섹스, 너를 사랑한다는 것), 일(일의 기쁨과 슬픔) 등등. 우리나라에도 그의 작품이 여러 편 소개되어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은 예술을 이야기 거리로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왜 이렇게 늦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철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존 암스트롱과 이 주제를 두고 나눈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보통이 집필했다고 합니다. 우리말 제목은 <영혼의 미술관>이라고 옮겼습니다만, 원제는 입니다. ‘치유로서의 예술’정도로 직역을 한다면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을 주지만,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는가’라는 부제를 보면,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담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 제목을 보면 미술관에 걸린 미술작품을 주로 소개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미술작품을 주로 인용하고 있지만, 때로는 건축물에서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인용하고 있어, 미술의 영역을 넘어 예술로 범위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하여 읽는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화두를 첫머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도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거창한 질문으로 말입니다. 인류가 처음 남긴 역사의 기록은 문자가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들은 왜 그림을 남겼을까요? 단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낀 점을 남겨두고 싶어서였을까요? 그렇다면 ‘예술을 위한 예술’ 이외의 다른 의미는 없을까요? 저자들은 신비한 영역으로 물러나려고 하는 예술의 지위에 강한 태클을 걸고 있습니다. 즉 “예술은 도구일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예술이 어떤 유의 도구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에 보다 명확히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5쪽)”고 주장합니다. 더하여 예술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를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도구들처럼 예술에도 자연이 원래 우리에게 부여한 한계 너머로 우리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예술은 우리의 어떤 타고난 약점들, 이 경우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심리적 결함이라 칭할 수 있는 약점들을 보완해준다.(5쪽)”고 단정하고, “이 책은 (디자인, 건축, 공예를 포함한) 예술이 관람자를 인도하고, 독려하고, 위로하여 보다 나은 존재 형태가 되도록 이끌 수 있는 치유 매체”라고 제언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매체로서의 예술의 기능을 ‘방법론’에서 논하고 이어서 사랑에 관련된 예술의 치유능력을 ‘사랑’에서, 자연을 마주할 때 알게 되는 심리적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예술의 기능을 ‘자연’에서, 자본주의 개혁의 길잡이로서의 예술의 역할을 ‘돈’에서, 그리고 ‘정치’에서는 정치목적으로 이용되는 예술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먼저 치유 매체로서의 예술은 일곱 가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억, 희망, 슬픔, 균형 회복, 자기 이해, 성장 그리고 감상이라는 일곱 개의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출발점은 기억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데 서툴다.(8쪽)”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기억하는데 서툰 이유를 아십니까? 탈리 샤롯은 <설계된 망각;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에서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즉 망각이라는 편리한 기능이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문제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인데, “글쓰기는 분명 망각의 결과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고, 미술은 그다음으로 중요한 방편이다.(8쪽)”라는 보통의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보통은 하자 많은 인간의 기억을 보완해주는 기능으로서의 미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하여 장바티스트 르노의 <미술의 기원: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다부타데스, 1786년>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인간이 햇빛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것으로 그림을 시작했을까 싶습니다. 본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림보다는 사진이 더 우수한 매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진찍기에 몰두하다 보면 그 장면에서 제대로의 느낌을 얻을 수 없어 기억에 새겨진 것이 별로 없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사진을 보더라도 별다른 감동이 이끌어내어지지 않게 될 것 입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장면에서 특히 눈길을 끈 포인트를 추출해서 그려내는 것이 그림입니다. 따라서 그림과 사진은 분명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여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림그리기를 추천하는 분도 계신 것 같습니다.(김한민 지음, 그림여행을 권함, 민음사,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245018)

 

예술의 두 번째 기능 ‘희망’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예술이 가진 독특한 힘을 “만일 세상이 좀더 따듯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술적 경험이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그런 순간은 괴롭거나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특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는 즉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작품과 마주칠 때 찾아온다.(16쪽)”라고 적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꼭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작품을 볼 때 눈물이 터지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눈물의 원인을 추적하는 한편, 역사를 되짚어 눈물이 마르게 된 다양한 계기를 찾아 정리한 제임스 엘킨스 교수는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435742>에서 사람들이 그저 ‘아름답다’는 등 애매한 이유로 울었다고 전했습니다만, 치유의 매체로서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조이한교수님의 경우를 보면 딱히나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합니다(조이한 지음, 그림 눈물을 닦다, 추수밭, 2012년; http://blog.joins.com/yang412/12868341)

 

완벽하게 균형이 잡혀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인간은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빠질 수 있는데, 예술이 균형을 회복시켜주고 열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사람들의 미학적 취향이 다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저자는 “도덕적 메시지, 다시 말해 보다 나은 자아로 거듭나라는 메시지는 애초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듯 보이는 예술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42쪽)”라는 주장에서 “이 항아리는 쓸모 있는 도구였다는 점 외에도, 겸손의 미덕에 최상의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라고 평가와 함께 조선왕조 시대의 백자 달항아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표면에 작은 흠이 흩어져 있고, 유약이 잘 발라지지 않아 표면이 얼룩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항아리를 겸손하다고 본 이유는 ‘그런 것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남다른 시각과 표현방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옛날 기억을 되살려보면, 학교수업 이외에도 학원에 다니는 이유는 핵심을 잘 요약해주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 역시 핵심요약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제시한 일곱 가지의 키워드에 따라서 인간의 취약점을 잘 요약하고 그러한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예술의 도구로서의 목적과 가치도 요약하고 있습니다. 즉, 1. 나쁜 기억의 교정책, 2. 희망의 조달자, 3. 슬픔을 존엄화하는 원천, 4. 균형추, 5. 자기 이해로 이끄는 길잡이, 6. 경험을 확장시키는 길잡이, 7. 감각을 깨우는 도구 등입니다. 또한 예술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기술적 해석, 정치적 해석, 역사적 해석, 충격가치적 해석, 그리고 치유적 해석 등이 있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치유적 해석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보통에게 있어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사랑을 잘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길도 모색해본 끝에, 예술의 사명 가운데 하나가 ‘우리에게 좋은 연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로 툭 튀어나오는 법이 없고, 연습을 하지 않으면 도움이 안되는 자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상대방 말에 예바르게 귀 기울이는 능력, 인내심, 호기심, 회복력, 관능, 이성 같은 것” 말입니다. 이와 같은 키워드를 역시 다양한 미술작품과 건축작품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보통은 긍정적 사고를 가진 철학자라고 하겠습니다. 니콜라 푸생의 <겨울(대홍수), 1660~1664년)>라는 작품에서 그는 “인생은 대개 이런 모습으로 흘러간다. 난파선에 매달리고, 아무것도 없는 바위일망정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순간의 안전을 구한다. 따라서 관계의 파탄, 그로 인한 상심은 상궤를 벗어난 일이 아니다.(119쪽)”라는 메시지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며, 나는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 미술관을 찾았을 때 명작을 모사하는 분들을 흔히 만나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답을 얻었습니다. “처음에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는 개성과 상상력이라곤 없는 방식으로 그저 충실하게 영웅의 그림들을 모사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는 자신의 감탄을 비판적인 눈으로 분석할 줄 알게 되었다. (…) 터너는 존경하는 선배의 작품에서 그를 진정으로 흥분시켰던 측면을 연구할 줄 아는 현명함과, 그에 기초해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역량을 발전시킬 줄 아는  용기를 겸비하고 있었다.(188쪽)” 그렇습니다. 요즈음 케이블에서 선배가수의 노래를 얼마나 근사하게 카피하는가를 평가하는 오락프로그램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출연하시는 분들 가운데 가수를 꿈꾸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던데, 그들이 선배의 기교를 카피하는 재주에 만족하고 자신만의 노래 부르기를 게을리 한다면 오히려 재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책의 마지막 화두는 정치미술입니다. 저자가 정치미술을 화두로 삼은 이유는 잘못 이용당할 수도 있지만, 선을 위한 정치미술의 잠재력은 이론 영역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현실 영역에서 활용법을 찾아야 할 것이며, 예술이 개인을 치유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사회를 치유하는 힘도 유용하게 쓰여야 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이 늘 아쉬운 저에게도 귀감이 될만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반복이 중요하다. 어떤 것의 정신이 우리에게 깊이 각인되려면 그것을 꾸준히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없다. (…) 일년에 한두 번 미술관을 찾는 것으로는 예술이 약속하는 근원적인 충족을 얻기에 부족하다.(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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