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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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시집을 리뷰할 때면 빼놓지 않고 인용할 것 같습니다만,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집 <오월의 밤>을 붙들고 씨름했다는 한 독자가 리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긴 하지만...나에게도 시를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요즘은 詩 읽기가 힘들까,” 그리고 보면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는 선생님께서 분석해주시는 내용을 참고해가며 시를 외웠던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합니다.

 

모처럼 시집을 열어보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다산북스의 리뷰어클럽 나나흰이 되어서 첫 번째 읽는 책이 바로 클럽의 이름이기도 한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타이틀로 한 동명의 시집입니다. 고전을 느리게 읽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데이비드 미킨스는 “가장 적은 수의 낱말로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하는 가장 진정한 시”로 구약의 「시편」을 들었습니다만, 꼭 필요한 낱말에 함축적으로 메시지를 담아 전하는 시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킥스는 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을 때와 달리 시를 읽을 때에는 시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인내심이 있어야 하고(규칙 1), 시의 분위기와 논지를 이해하려면 문체를 감지해야 하며(규칙 4), 다른 장르를 읽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사전을 뒤적이고(규칙 7), 핵심 단어들을 추적해야 한다(규칙 8). 마지막으로 메모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규칙 12). 시를 읽은 감상을 적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의 성격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시에 대한 느낌을 분명히 표현하면 시를 더욱더 즐길 수 있다.(데이비스 미킥스 지음, 느리게 읽기, 303쪽)

 

시인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다보면, 출판사에서 독자를 위하여 많은 배려를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인이 살았던 시절과 지금과는 다른 언어적 괴리, 특히 시인이 일부러 사용했다고 하는 평북지방의 사투리를 주석으로 처리하여 사전을 뒤적이는 동안 시로부터 떠나 있어야 하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덕분에 80여년의 세월의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 투박해 보이는 사투리에 담긴 의미를 새겨볼 수도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께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에게」라는 시에서 “나타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백석은 당신한테 대체 어떤 사내였나요?”라고 물었는데, 저는 오히려 ‘나타샤는 누구인까?’하는 궁금증을 풀길이 없었습니다. 안 시인은 나타샤가 누구인지 알고 계신 듯합니다만.... 눈이 내리는 날 백석은 소주를 마시면서 세상을 등질 생각을 하는데, 나타샤는 이런 백석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백석을 위로하고 동행하러 올 것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O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라고 위로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곁들여서 말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노왕(老王)으로부터 석상디기 밭을 얻어 귀농을 꿈꾸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보면 백석은 80여년의 세월을 앞서 살아간 예언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 헝겊심지에 아주까지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잠자리 조을든 무너진 성터 /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 오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정주성(定州城)」의 일부, 94쪽)라고 읊어 비어가는 오늘의 시골을 예언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이들을 이렇게 달래기도 합니다. “촌에 와서 오늘 아침 무엇이 분해서 우는 아이여 / 너는 분명히 하늘이 사랑하는 시인이나 농사꾼이 될 것이로다(「촌에서 온 아이」의 일부, 170쪽)”.라고 말입니다. 시집 말미에 붙인 ‘백석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정철훈 기자는 “현재의 문학사가 남북한 모두의 불구적 성격에 구속돼 있다고 할 때 그 불구성을 극복하는 데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존재이다. 그는 남과 북이라는 체제적 성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가장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이었다. 남북 언어의 통일과 조탁을 꾀하는 길라잡이로서 백석의 현재성은 두드러진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실감할 수 없습니다만, 언젠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통일의 그날 빛을 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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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꾸는 글쓰기 - 이제 당신도 시작하라
송준호 지음 / 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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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그 느낌을 쓰는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도 책읽기와 글쓰기를 권하게 됩니다.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고 답변하시는 분에게는 책읽는 시간을 따로 낼 필요 없이 그저 자투리 시간이라도 책을 붙들고 읽다보면, 머지않아 늘상 책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책을 꽤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는 느낌을 글로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한 줄이라도 좋으니 일단 책을 읽고 얻은 느낌을 적어보라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사실 저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독후감을 적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블로그를 만들면서 책을 읽은 느낌을 글로 남기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적은 독후감은 원고지 3매 정도에 불과하였습니다만, 이내 12매로 늘어나게 되고, 라포르시안에 연재를 시작하는 리뷰의 경우는 원고지 40매 정도를 매주 써내고 있습니다.

 

이메일을 통하여 혹은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 짧은 글을 써 올리는 분들은 적지 않은 요즈음입니다. 그런 곳에서 활발하게 글쓰기를 하시면서도 스스로는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디지털 매체를 통하여 써 올리는 글도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소리를 읽으시는 독자 중에도 글쓰기에 부담을 가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이번 주에는 송준호교수님의 <나를 바꾸는 글쓰기>를 소개합니다. 소설가이신 송준호교수님은 대학에서 ‘소설창작’과 ‘글쓰기 지도법’을 강의하고 계시고, <좋은 문장, 나쁜 문장> 등 글쓰기와 관련된 여러 권의 저서를 내셨습니다. 저는 요즘도 가끔 손편지를 주고받기도 합니다만, 편지를 써 본 기억이 가물거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도 필력이 달리는 젊은이는 글 잘 쓰는 친구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편지쓰기는 좋은 글쓰기 훈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메일이 손편지를 대신하게 되면서 전하고 싶은 내용만 간략하게 요약하면서 사람들은 이메일을 포함한 인터넷매체에서 글을 읽을 때 F패턴으로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말씀을 데이비드 미킥스의 <느리게 읽기; http://blog.joins.com/yang412/13364964>를 통하여 지난주에 소개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터넷 매체의 특성에 맞게 글을 쓸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한계가 없다는 디지털 매체의 특성상 아날로그 글쓰기보다 더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디지털매체에 글을 쓸 때 ‘출처를 정확히 표기하자.’와 ‘그 일을 한결같이 하자’는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한다고 <디지털 시대의 글쓰기; http://blog.joins.com/yang412/13367187>의 저자 이강룡님은 강조한 바 있습니다.

 

자 그러면 <나를 바꾸는 글쓰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된 네 가지의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먼저 ‘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글쓰기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답하였습니다. 텅 빈 백지상태로 태어난 인간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다양한 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통하여 자신을 가다듬고 키워가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내면을 다듬어 키우는 방식으로는 ‘글쓰기’만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구요? 대체적으로 잘 쓰는 사람들을 보면, 독서량이 풍부한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즉 독서를 통하여 타인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의 글쓰는 방식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글쓰는 사람은 늘 쓸거리를 찾아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버릇이 생기게 됩니다. 다양한 독서를 통하여 대상의 가치를 주관적이고 독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이견이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글재주가 신통치 않다고 지레 포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자는 ‘안 쓰고 못 쓰면 나만 손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태어날 때부터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죠. 글솜씨도 갈고 닦는 대로 늘고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글쓰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들어보셨을 것 같습니다만, 북송(北宋)의 문인 구양수(歐陽脩)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삼종 세트가 좋은 글을 쓰는 핵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그리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권하는 ‘행복한 글쓰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세히 관찰하고, 그 대상에 자신만의 생각을 불어넣자. 그리고 다양하게 상상해보는 습관을 갖자. 그러면 나도 쓸 수 있다.(44쪽)”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쓸거리는 어느 곳에든 있다.’입니다. 글감은 바로 당신의 곁에 있다는 저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파랑새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쓴 6막 10장의 희곡 <파랑새; L'Oiseau bleu>는 1908년 9월 30일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한 이래 수많은 영화와 소설로 제작되었습니다. 틸틸(Tyltyl)과 미틸(Mytyl) 남매가 꿈속에서 요정과 함께 파랑새를 찾으러 추억의 나라와 미래의 나라 등으로 여행을 하지만 파랑새를 찾지 못했는데, 정작 파랑새는 자신들의 새장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즉 ‘행복은 손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라고 말하는 몽상극(夢想劇)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글쓰기에서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글감은 바로 당신의 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찾아내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바로 누구나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연탄재를 글감으로 놀라운 시를 뽑아 올린 안도현 시인처럼 말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시(“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읽으면 저절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75쪽).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읽는 맛이 나야 글이다’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김용택 시인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2814013). 어렸을 적에 4형제들 가운데 유독 심부름을 저에게만 시키시던 어머니께서 언제 그랬냐고 하시더라는 내용을 담은 글(http://blog.joins.com/yang412/12805886)을 읽으신 김 시인께서는 먼저 잘 쓴 글이라고 칭찬을 해주시면서도 사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재미가 있는데 그런 점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글쓰기를 중도포기 할까봐 용기를 북돋워주시려는 배려에서 하신 말씀이겠거니 싶었습니다. 역시 읽는 맛이 나야 글이라는 저자의 말씀을 듣고서 제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아도 아주 건조하고 사무적인 느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글은 일단 읽는 맛이 나야 하고,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 맞습니다.

 

‘재미만 있으면 될까?’하는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저자의 비유대로 음정과 박자가 노래의 기본이듯이 글의 기본은 단어와 문장인데, 음정과 박자를 제대로 맞춰서 노래를 불러야 들어줄만 한 것처럼 좋은 글 역시 단어와 문장을 올바르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은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한글 프로그램이 좋아서 맞춤법에 어긋나는 글쓰기를 바로 잡아 주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 단어의 용례와 맞춤법 등에 관심을 기울여 익히는 것이 옳은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저자는 다양한 용례를 인용하면서 첨삭지도 하듯 좋은 글을 쓰는 요령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문장의 골격인 주어와 서술어를 올바르게 호응시키고, 우리말 고유의 특성을 살린 문장을 쓰는 것, 그리고 단어와 구절을 제대로 연결하되 가급적 짧게 끊어서 뜻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야말로 글의 혈관을 시원하게 뚫는 길인 것이다.(171쪽)”

 

자, 이제는 글솜씨를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정적 한 방은 바로, ‘당신의 상상력이 필력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요즈음 얼마 전에 다녀온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여행기를 쓰고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364707). 재미있게도 저자는 수학여행을 다녀온 학생들에게 각자 보고 느낀 점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스무 장도 넘게 써온 학생(A)이 있는가 하면 한 장도 채우지 못한 학생(B)이 있더라는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어떤 점이 이런 차이를 가져왔는지 비교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대목입니다. 그대로 인용하기에 부담스러운 분량이라서 요약을 해보면, A학생은 여행을 앞두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중요한 점을 미리 메모해두었고, 여행을 하면서 인상적인 장면을 스마트폰에 담고, 그날 보고 들은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두었던 것입니다. 반면 B학생은 출발에 앞서 들떠 있는 바람에 별 준비가 없었고, 여행지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을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열을 올렸으며, 저녁에는 선생님 모르게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 흥겨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별로 기억에 남을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여행은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여 모든 것을 검토하고 챙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지에서는 미리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고 온전하게 느끼도록 하며, 느낀 점은 바로 메모해두어야 합니다. 결국 좋은 여행은 좋은 준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행지에서의 느낌을 적을 때는 자신의 상상을 보태는 것도 좋겠고, 책에서 읽은 좋은 대목을 인용하여 비유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앞서 디지털시대의 글쓰기 요령을 이야기 하면서 ‘정확한 출처 표기’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한 것은 글에서 진실성이 담겨야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글을 읽는 독자는 이내 관심이 시들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허구를 실제인 양, 짜 맞추는 테크닉도 필요하다는 역설을 내놓고 있어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모든 글을 허구다.(212쪽)’라고 전제하면서 실제로 벌어질 수 없는 이야기를 잘 꾸며 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겪지 못한 일이거나 사실과 다른 이야기라도 읽는 이가 납득할 수 있도록 그럴싸하게 꾸밀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읽는 이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일이라고 강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에 입각해서 적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글쓰기, 이제 시작하자’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숙제로 일기를 써본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방학일기라도 말입니다. 저는 학교에는 제출하지 않았습니다만, 중학교 2학년 무렵 시작한 일기쓰기를 예과를 마칠 무렵까지 꾸준하게 썼습니다. 어쩌면 저의 글쓰기에 밑거름이 되었을 일기쓰기였는데, 결혼하고서 장롱 속에 간직해둔 그 일기들을 읽다가 어찌나 치졸해보였던지 내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짓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과 2년 반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해오고 있는 [양기화의 북소리]코너는 라포르시안의 창간을 축하하는 의미로 서평을 하나 써줄 것을 요청받았던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일과성의 서평에 그치지 말고 고정코너를 마련해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진 덕분에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양기화의 북소리]가 인연이 되어 KBS 1TV [TV 책을 보다]에 패널로 출연하기도 하였습니다. 2월에 이 코너에서 소개했던 영국 작가 조조 모옌의 <미 비포 유; http://blog.joins.com/yang412/13348505>의 내용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녹화에 초대받았는데, 4월 5일 혹은 12일 오전 10시 반에 방영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많은 시청을 부탁드립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저자는 “글을 쓴다고 누구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적어도 우리를 각자의 삶을 충실히, 그야말로 사람답게 살아가게는 해준다.”고 적었습니다. 즉, 글쓰기는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이끄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작하십시오.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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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와 덕이 실현된 삶 살림지식총서 467
임헌규 지음 / 살림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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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의 이벤트 덕분에 오강남교수의 해제로 된 노자의 <도덕경; http://blog.joins.com/yang412/11957739>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도덕경>은 모두 81편으로 이뤄진 책으로, 37편까지는 주로 도(道)에 관하여 그리고 38편부터는 주로 덕(德)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의 책이름은 <도덕경>이 아니라 <노자>였는데, 도와 덕에 대해 쓰여진 책이라는 이유로 '도덕'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졌고, 그 내용에 대한 후세 학자들의 경외가 더해져 <도덕경>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덕경>을 저술한 노자의 삶과 그의 사상을 정리한 임헌규교수님의 <노자>를 읽게 된 것은 <도덕경>의 이해를 보다 더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읽게 되었습니다.

 

공자와 달리 노자의 삶의 궤적은 분명치 않다고 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노자열전」에 나오는 기록과 1972년 중국 장사 마왕퇴한묘에서 발굴된 다량의 백서(帛書) 가운데 포함된 두 종류의 <노자> 사본을 조사한 결과,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의 실존 인물이며, <노자>는 그의 저서라고 보이며, 다만 전국시대에 들어 후계자들에 의하여 가필되거나 첨삭되고, 주요 개념어가 변형되어 현존하는 통행본 <노자>로 이어져왔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삶이 분명치 않은 것은 주나라가 쇠퇴하자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노자>는 기독교의 성서와 더불어 인류에게 가장 많이 읽힌 저서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노자와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 중국의 사회상을 보면 한마디로 힘을 가진 자가 세상을 주도하던 혼란기였던 까닭에 당시의 사상가들은 이상적 사회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고 하겠습니다. 노자 역시 혼란기의 사회와 위정자들,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강도높게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노자> 18장을 인용하여 이런 점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대도가 행해지지 않다 인의가 생겨났고, 지혜가 나오자 큰 거짓이 생겨났다.(20쪽)” 노자는 제자백가들처럼 사회를 평온하게 만들어 백성을 인간답게 살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뉴스는 “남극에 설치한 망원경 ‘바이셉(BICEP)2’를 이용해 우주가 급팽창할 때 생긴 중력파(gravitational wave)의 패턴을 발견했다”라고 전해 우주물리학이 빅뱅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흥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앙일보 3월 19일자 기사, 138억년 전 '빅뱅' 비밀 … 남극 망원경이 풀었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66697). 그런데 놀랍게도 노자는 ‘도’를 설명하는 가운데 우주만물의 시원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해제한 <노자> 21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라는 것은 오직 황홀할 따름이다. 홀하고 황하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다. 황하고 홀하다! 그 가운데 무엇이 있다. 그윽하고 아득하여라, 그 가운데 알맹이가 있다. 그 알맹이는 심히 참되니 그 가운데 믿음직스러움을 갖추고 있다. 예로부터 지금가지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으므로 뭇 존재의 창시를 본다. 나는 무엇으로 ant 존재의 창시가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에 의해서니라.(39쪽)” 저자에 따르면 우주발생론적 차원에서 도의 작용을 상호 모순되지만, 같은 곳에서 나온 다른 이름인 무와 유의 개념을 가지고 다음처럼 규정하였다는 것입니다. “무(無, 無名)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며, 유(有, 有名)는 만물의 모태다.(42쪽)”

 

노자의 사상에서 주목할 점은 “형상 없는 도(道)가 작용하여 만물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도는 천하에 존재하는 만물의 어머니이므로, 도와 만물을 같이 아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도를 체득하는 이념에 대하여 노자는 인위적인 유위정치를 부정하고 도에 의한 무위정치를 역설하였던 것인데, 도에 이르기 위하여 덕을 거듭 쌓다보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사사로운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허정(虛靜)하게 하여 검약함을 견지하면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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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리고 전쟁 : 게412
문창범 지음 / 중앙생활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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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세상사가 묘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난 연말 즈음해서 주변에서 유방암으로 진단받은 분이 몇 분 계셔서 진료에 도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유방암으로 꽤 긴 세월을 투병하신 끝에 다시 일자리로 돌아오신 보건복지부 주정미국장님께서 투병과정을 담은 <암이래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http://blog.joins.com/yang412/13362478>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의 리뷰에는 암환자가 늘고 있는 현실에서 전문가들이 내놓는 책에서는 읽을 없는 내용을 담은 책들도 다양하게 있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암과 싸워 이긴 분들의 경험담을 비롯해서 암과 싸우고 있는 환자를 간병하는 분의 경험들이 암으로 진단받고서 황망한 상황에 빠져 있는 분들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핵물리학실험을 전공하신 문창범교수님이 유방암으로 투병하시는 아내와 함께 하는 암과의 전쟁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하신 <암 그리고 전쟁>은 역시 소중한 유방암 투병의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암과 투병하고 있는 분과 가장 가까운 남편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서도 작은 제목을 ‘남편이 암에 걸린 아내를 위해 쓴 320여 일간의 투병 일기’라고 뽑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암으로 투병하느라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은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내가 암선고를 받던 순간의 황망한 느낌으로부터 투병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까지도 담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는 평소에 일기를 꾸준하게 써오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아내와 함께하는 암과의 전쟁 뿐 아니라 사회의 암적 요소들에 대한 강렬한 투지를 보여주고 계신 점도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께서 한시를 자주 인용하고 계신 것을 보면, 핵물리학을 전공하시는 한편 한시에도 조예가 깊은 것 같습니다. 암을 의미하는 cancer라는 영어단어는 히포크라테스 시대에 쓰던 ‘게’를 뜻하는 그리스어 카르키노시스(karkinosis)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저자는 그 의미에다가 아내가 처음 암진단을 통고받은 4월 12일을 조합하여 만든 ‘게412’라는 부제를 달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히포크라테스가 부푼 혈관들에 움켜쥐듯이 둘러싸인 종양을 보고, 모래 구멍에서 다리를 원형으로 펼치고 있는 게를 떠올렸다고 적었습니다만, 사실은 혈관들이 암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커가는 암종이 살아남기 위하여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을 새로 만들어내도록 유도한 결과로 암종 주변에 굵직한 혈관들이 많아진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만...

 

저자의 투병일지를 읽으면서 뭔가 잘 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은 환자를 진료하시는 의료진이 환자와 가족들에게 질병에 대하여, 그리고 치료방향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고 있구나 하는 점입니다. 마침 각급 병원에서 하고 있는 유방암 진료의 질에 대한 평가를 제가 맡고 있기 때문에 진단과 치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평가항목에 들어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자의 아내가 이용한 병원은 치료는 잘하는 병원일지 모르지만 문제가 있는 병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은 “결과에 대해 언급을 피하는 것은 ‘전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당사자마저도 알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무시를 당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99쪽)”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유방암을 치료하고 있는 전국의 병원들을 평가해보았더니 지방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는 병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아내는 치료를 받기 위하여 서울로 왕래하는 수고를 더 했다는 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는 노력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기록에는 아내의 모습과 아내와 함께 가꾸는 텃밭, 그리고 산책하는 모습들을 담은 사진자료들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단조로울 수도 있는 책읽기에 변화를 준 것도 독특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꼼꼼하게 기록했다 싶은 대목은 아내와 혹은 아이들과 어디서 밥을 먹었다는 것까지도 적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애들이 오니 엄마인 ‘인숙’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가족의 존재가 곧 행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다.(79쪽)”라는 대목에서 역시 가족의 뭉쳐진 힘은 투병하는 환자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유방암 환자를 두고 있는 가족, 특히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환자를 돌봐야 하는지 길안내 하는 좋은 책이로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었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린다면 유방암은 다른 암과는 다른 면이 있어 재발이나 전이여부를 오랫동안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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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교회 잔혹사
옥성호 지음 / 박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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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일간지에서 목회자 아들의 교회세습에 관한 생각을 읽었습니다. 저 역시 자식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이어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개신교 목사님들 역시 아들이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 목사님이 맡고 있는 중대형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물려주는 경우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 세습도 문제가 되는 세상인데, 기업이 아닌 교회를 ‘지상의 왕국’으로 만들어 아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동아일보 3월 21일자 기사, [김갑식 기자의 뫔길]축복일까 특혜일까… 목회자 아들의 교회세습)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저는 종교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저 언론에 보도되는 정도를 스치듯 읽고 마는 수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무슨 일일까?’싶은 정도의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옥성호작가님의 <서초교회 잔혹사>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가상의 스토리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우리나라 교회에 배태되어 있을 수 있는 현실들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버무려넣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침 작가님이 사랑의 교회 설립자인 옥한음목사님의 장남이라 하셔서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 저의 직장이 있는 서초구에 ‘서초교회’라는 가상의 성전을 무대로 일어난, 한 마디로 사기극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한편의 황당사건을 읽으면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서초교회를 수만명의 신도가 모인 회상으로 키워낸 정지만목사님이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김건축목사님을 영입하여 물려준 것 까지는 앞서 말씀드린 교회세습이라는 꼴불견과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퇴장이라는 점에서 박수를 보낼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정지만 목사에 이어서 서초교회를 담임하게 된 김건축목사의 인품이 제대로 검증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일은 김건축목사님을 선정한 정지만 목사님에게 귀책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만,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교회가 신도를 확대하고 수익의 창출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장세기목사님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대학에 다니면서 인연을 맺은 서초교회에서 간사를 맡았다가 새로 부임한 청년부 담당목사와 갈등을 빚으면서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다음에 서초교회 청년부를 담당하게 된 것인데, 내세울 것이 없는 장세기 목사의 순수함을 주목하여 발탁해준 교역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타협하여 김건축목사님의 사기극에 빠져드는 그에게서 인간의 나약함을 봐야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설 속의 김건축 목사가 개인의 야심을 쫓는 사기꾼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방식에서 전통적인 방식을 떠나 현대적 감각을 입힌 신지식인인지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화려하고 거대한 성전을 짓고 수익사업을 벌이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성스러운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기 때문에 절차나 방식에서 거짓과 속임, 모략과 배신, 협박과 폭력도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용서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팩트에 기반한 르포르타주가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신도 수 늘리기에 급급한 일부 대형교회와 욕망에 사로잡힌 목회자의 위선적 태도를 비유적으로 성토하고 금기와 성역으로 무장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도전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한국 교회의 사역자들이나 신도들 가운데 공감하시는 분들도 있는 반면, 반발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께서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단 한순간이라도 도대체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지,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길 바란다.”라고 적었습니다만, 작가가 창조한 인물 장세기 목사처럼 종교란 나약한 인간이 마음을 의지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문화적 소산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 교회에 다닌다는 의미를 깊이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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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03-2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교회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처음처럼 2014-03-22 13:20   좋아요 0 | URL
정말 교회에 대하여 무언가 생각을 하는 책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