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 웰니스 삶을 위하여
오길창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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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꿈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재난을 겪으면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의문에 대한 저자의 깊은 사유를 담은 <인간탐구>가 시선을 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쓴 오길창교수님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의미 있게 사는 삶인가는 주관적이므로, 철학과 심리학, 종교가 무지를 깨우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시면서 여기에 ‘인간탐구’의 목적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책에 담은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것은 서울 남산에서 도를 닦는 과정에서 논의된 내용과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인간탐구의 편린들을 모아가는 과정이다. 기본적으로는 ‘몸이 마음을 만들고, 마음이 몸을 만든다’는 큰 틀 안에서 몸과 마음을 최상의 상태로 올려 나가는 과정이다.” 이 책의 주된 화두는 ‘건강과 행복’인데 궁극적인 목표를 웰니스(Wellness)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웰니스에 도달하는 과정을 우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 탐구한 결과를 1부에서 설명하고, 2부에서는 특히 한국인의 체질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건강을 추구하는 일은 개인마다 다른 체질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겠습니다. 3부에서는 웰니스이 개념을 설명하고 이렇게 다듬은 건강한 몸을 바탕으로 어떻게 지혜로운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4부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5부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경구들을 분야별로 구분하여 모아두었습니다.

 

저자의 인간탐구는 자못 심오해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습니다.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서양철학 혹은 다양한 종교적 개념이 버무려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프롤로그에서 통섭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존재의 의미로 이해하고 전체에서 개체가 쓸모 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존재의 의미는 존재의 틀과 밖의 틀과의 관계 속에서 생기고, 삶의 의미는 삶 밖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삶은 시작과 끝이 있고, 끝은 시작에 맞물려 돌아가게 되며, 삶의 흐름은 늘 오르내림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삶과 그러하지 못한 삶은 각 삶의 흐름의 국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는 심신시스템을 움직이는 에너지체계가 원활하게 운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한편 인간탐구에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9가지 성격이라거나 11가지 비합리적 신념, 11 가지 자기보호 수단으로서의 방어기제, 기력 활성화를 위한 6단계 훈련 등에 관한 설명은 특정한 수련과정을 통하여 얻게 된 내용으로 보이는데, 일반화시켜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근거는 분명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2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체질이야기는 사상의학에 바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벌써 오래되었습니다만, 게놈지도를 해독하는 일이 시작될 무렵 개인별 맞춤의학의 개념으로 사상의학을 소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사상체질이라고 하는 것이 분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에 도달한 전문가라면 모든 사람들을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막상 전문가들마다 분류가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체질의학을 바탕으로 분류를 하면서 현대의학의 진단에 의한 질병을 맞추어 넣는 것이 적절한 지도 생각해볼 일입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만, 저자는 웰니스가 건강과 행복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지금으로부터 50년도 넘은 1961년에 미국 국립 인구통계청의 감독관 덩(Dunn)이 처음 사용했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제안된 용어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웰빙이 나와 가족을 중심으로 한 협의의 건강과 행복 개념이라면 웰니스는 나와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 우주를 통할하는 광의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공부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자께서 말씀하시는 도의 수련이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 구체적인 앎이 없는 탓에 저자의 주장을 평가하기에는 이른 듯하여 앞으로 관심을 두고 더 공부를 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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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 세상의 이치를 담은
변원종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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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조난사고의 실종자를 찾는 작업이 한계에 이르면서 사고원인을 찾는 조사작업에 관심이 옮겨지는 것 같습니다. 역시 모든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인재라는 쪽으로 무게가 실리는 것 같습니다.

 

윤찬원교수님의 <한비자, 바른 법치의 시작; http://blog.joins.com/yang412/13373971>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입니다. 인간 사회가 조화를 이루는 것은 ‘도의 실현’으로 가능해질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만,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현실적으로는 엄정한 법치가 필연적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윤교수님은 <한비자>에서 얻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을 읽으면서 한비자의 내용을 직접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고른 ‘세상의 이치를 담은’이라는 부제가 달린 변원종교수님의 <한비자>입니다.

 

저자는 거울을 매개로 하여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도(道)를 기준으로 자기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삶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주인의식을 한비자의 사상을 통해서 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적었습니다.

 

모두 25꼭지의 글은 대부분 한비자에 담긴 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모두에 있는 ‘법가를 집대성한 한비자’와 ‘천하통일에 기여한 한비자’, 그리고 마지막에 둔 ‘한비자가 남긴 역사적 의의’ 등은 한비자의 철학이 성립하게 된 배경과 그 철학이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있기도 합니다. 윤찬원교수님의 책에서도 짚었습니다만, 한비자는 제자백가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실천성이 강한 이론을 주장함으로써 진 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가와 묵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옛 성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이상적일 수 있겠지만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는 점에서 적용이 어렵다는 제한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한비자가 법치를 내세우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한비자는 이렇게 인간의 본성이 각자 자신을 위하는 이기적인 계산 때문에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질서로 혼란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61쪽)” 중요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자의 철학이 중요하다는 단서입니다. “집에 일정한 생업이 있으면 기근이 들어도 굶주리지 않으며, 나라에 일정한 법이 있으면 비록 위태로울지라도 망하지 않는다.(86쪽)”라는 옛말을 인용하면서, 그 일정한 법을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군주가 일정하게 정해진 법률을 버리고 사사로운 견해를 따른다면 신하는 지혜와 능력을 꾸밀 것이며, 신하가 지혜와 능력을 꾸미면 법률과 금령은 확립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취하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는 방법은 사라질 것이다.(87쪽)” 엄한 규정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면 세월호 전복사고 같은 인재는 반복될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한비자가 활동하던 시절은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였던 만큼 그가 제시하는 법치라는 것이 사실은 군주를 위한 통치철학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한비자>는 ‘군주가 지켜야 할 엄격한 준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리더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비자>를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비자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서 사회를 다스리는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또한 ‘통치술’이라고하는 일 종의 술법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군주가 술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쓰면 대신들은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할 것이며, 가까이 있는 신하들도 감히 방자하게 세도를 부리지 못할 것(257쪽)‘이라고 하여, 혼란한 시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왕의 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법․술․세에 의한 통치방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비자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 일컫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한비자>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례들을 만나게 되는데, 원전없이 우리말 번역만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원전을 밝히지 않고 있는 점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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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집에서 치료할 수 있다 - 혼자 집에서 쉽게 할 수 있는 파킨슨병 자가운동방법
미즈시마 타케오 지음, 조기호 옮김 / 부광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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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크티님께서 주관하셨던 예스24블로거들의 릴레이 이벤트에서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책을 받은 지가 꽤 되었는데 읽기가 늦은 셈입니다. 제가 신경계통의 질환을 공부하였기 때문에 읽어보기를 청했던 책이기도 합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면 적지않게 실망했다고 해야하겠습니다.

 

<파킨슨 병 집에서 치료할 수 있다>는 제목에서부터 아주 위험한 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파킨슨병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뇌간의 흑질부에 있는 색소성 신경세포들이 사멸하는 난치성질환으로 증상을 호전시키는 약물치료와 수술요법 등이 개발되어 있지만 치료에 한계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신경세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재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정상으로 되돌리는 치료법은 아직도 개발단계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줄기세포를 활용한 치료법이 이 질환을 완치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킨슨병의 치료는 현대의학, 그 중에서도 운동장애질환을 전공하신 신경과 선생님과 함께 치료해야 하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파킨슨병을 집에서 치료할 수 있다고 환자들을 현혹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기는 했는데 동양의학을 다시 공부해서 현대의학과 동양의학을 접목한 진료를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일본의 진료현장에서 인정되고 있는 동양의학은 우리나라의 한의학에 해당하는 전통의학입니다. 메이지유신 때 전통의학을 폐지하고 서양의학을 국가 보건의료체계의 근간으로 한 일본에서 전통의학의 가능성을 일부 인정하여 의료체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는 있지만, 근거중심의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충분한 의학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즉 사례별로는 효과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보편적 치료법으로 인정받기에는 충분한 사례가 모아지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신경계통의 질환은 현대의학에서도 최근 들어서야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전통의학에서 건질만한 내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현대의학에서 신경계질환을 깊이 공부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다면 ‘120세가 되면 누구나가 파킨슨병이 일어난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과 같은 퇴행성 신경계질환은 정상적인 노화과정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만, 정상의 노화과정을 밟는 사람에서는 죽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질의 신경세포가 죽어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노화를 꼽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습니다. 결국은 저자가 집에서도 할 수 있다는 파킨슨병 치료법이라고 하는 것들이 과연 데이터로 증명된 것이냐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자는 자율신경의 균형이 깨지면서 뇌혈류가 나빠지는 것이 이유라고 꼽았습니다. “60세가 넘으면 누구나 뇌의 동맥경화경향이 나타나고 혈류가 나빠집니다. 뇌혈류가 나빠지면 신경세포에 영양이나 산소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고 세포기능이 떨어집니다. 당연히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도 약해지고 세포 자체도 죽어갑니다. 이것이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요.(111쪽)” 그야말로 뇌과학에 대한 작은 이해라도 있으면 이런 망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뇌혈류가 나빠져서 신경세포의 기능이 떨어진다면 흑질에 있는 색소성신경세포들만 선택적으로 죽어가는 기전을 설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뇌혈류가 감소했을 때 가장 손상을 쉽게 받는 신경세포는 해마에 있는 일부 신경세포와 소뇌에 있는 특정 세포, 그리고 대뇌피질에 있는 신경세포가 흑질의 세포보다도 더 손상을 받는다고 실험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습니다. 즉 파킨슨병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다른 증상이 더 먼저 나타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주장하는 진단법이나 한방치료법을 집에서 해보다가 파킨슨병의 진단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증상이 악화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현대의학, 특히 신경과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절대로 권할 수 없는 처방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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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란 무엇인가 살림지식총서 338
이향 지음 / 살림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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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 번역에 대한 관심도 같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송준호교수님의 <좋은 문장 나쁜 문장; http://blog.joins.com/yang412/3391769>에서 좋은 번역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하는 점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돌아보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 4종류이고, 13종의 전문서적의 집필에 참여해왔으니 적지 않은 책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문서적의 경우에는 번역서도 있을뿐더러 외국자료를 참고해야 하기 때문에 초벌 번역이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번역은 마쳤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책도 몇 권 책상 어딘가에 처박혀 있기도 합니다. 처음 번역을 할 때는 원저자의 의도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회가 많아지면서 아무래도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외국 서적을 번역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새겨 보겠다는 생각을 너무 늦게 한 셈입니다만, 이향교수님의 <번역이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1. 번역이란 무엇인가, 2.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가, 3. 번역능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4. 직업으로서의 번역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서부터 번역이 필요했을 터이니 번역가라는 직업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정의가 가능할 것 같은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번역은 일의적(一義的)으로 정의가 불가능하다’라고 답합니다. 결국 번역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 및 문화에서 결정하는 범주 안에서 번역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번역 개념은 아포리아(aporia)이다’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아포리아란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해 대화의 상대를 궁지에 빠뜨린 소크라테스에서 유래한 그리스어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17쪽)

 

저자는 결국 번역의 정의를 명쾌하게 하지 못한 채 번역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방식으로 번역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번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정리하지 못하는 가운데 ‘좋은 번역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번역문의 충돌하는 두 가지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번역문을 논할 때 ‘아름다우나 부정한 여인’이라는 비유가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원문에 충실하지 않더라도 이국의 작품을 최대한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페로 다블랑쿠르라는 번역가가 유려하고 가독성이 높은 번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당시 대학자 메나쥐가 1654년경 “그의 번역은 내가 투르에서 깊이 사랑한 여자를 연상시킨다. 아름답지만 부정한 여인이었다.”라고 비판한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린 대로 원저자와 독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번역가에게는 ‘1. 독자를 저자에게 데려간다, 2. 저자를 독자에게 데려간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선택은 가독성은 떨어지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원문에 다가서는 수고를 하게끔 하는 번역, 즉 원문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번역입니다. 두 번째 선택은 원문에 대해 충실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가독성을 살리는 방식으로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하는 번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원문의 성격에 따라서 번역자의 선택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좋은 번역이란 “다양한 변수를 적절히 충족시키며,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 내는 번역이다. 따라서 가독성과 충실성 개념을 상화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무엇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관건.(44쪽)”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호주의 번역학자 핌(Pym)은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좋은) 번역사는 첫째, 하나의 원문을 번역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을 생산해낼 수 있어야 하며, 둘째, 그중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번역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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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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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기도하는 심정으로 한 주일을 보내는 가운데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종된 탑승객들이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인재로 밝혀진 무수한 사건 사고들이 반복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안전한 사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극단 ‘산울림’이던가 무대에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본 것이 70년대 중반, 그러니까 대학 연극반에서 동아리활동을 할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통 희극을 많이 무대에 올리던 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서 꽤나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베케트는 1906년 아일랜드 더블린 근교의 유복한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초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익혔고, 트리니티 대학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전공할 정도로 어학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1933년 부친 사망 이후 유럽을 방랑하다가 1937년 파리에 정착했는데,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숨어서 레지스탕스운동을 돕는 한편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베케트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바로 1953년 무대에 올려진 <고도를 기다리며>가 성공리에 무대에 올려지면서부터라고 합니다. 영국의 연극학자 마틴 에슬린이 ‘반연극’ 또는 ‘부조리 연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사조의 등장을 알리면서 헤럴드 핀터, 에드워드 올비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무대에서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 저 역시 ‘고도’가 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희곡으로 만난 ‘고도’는 무엇이든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은 앞서도 말씀드렸던 결코 올 것 같지 않은 안전한 사회를 기다리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한적한 시골길에 서 있는 한 그루 앙상한 나무 아래서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다가 이제 그만 떠나자는 말이 나오면서 이들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떠날 생각을 접고 다시 기다리는 사이에 포조와 그 종자인 럭키가 등장하는데 그들도 고도가 아닙니다. 네 사람이 뒤엉켜 또다시 의미없는 말을 한바탕 주고받다가 포조와 럭키가 떠난 다음에 소년이 등장합니다. 소년이 모습을 나타낼 때 에스타라공이 ‘또 시작이구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두 사람이 고도를 기다린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제 오늘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해집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가 ‘너 어제도 오지 않았니?’라고 물었을 때, 처음 온 것이라고 답변하는 것을 보면 애매해지는 부분도 있지만, 두 사람이 오랫동안 고도를 기다려온 것이 분명합니다.

 

1막과 2막으로 구성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역시 시골길에 서있는 나무 아래서 두 사람이 만나 고도를 기다리다가 해질 무렵이면 잠자리를 찾아 떠났다가 다음날 이곳에서 다시 만난다는 기본구조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보아 3막이 있다면 역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구조를 가진 영화가 있습니다. 해롤드 래미스 감독이 1993년에 발표한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원제목 ‘Groundhog day’는 우리나라의 입춘에 해당하는 날로서 봄맞이 축제가 열리는 펜실베니아 펑츠토니에 나간 기상캐스터가 폭설로 도시에 갇히면서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와 꼭 같은 일이 반복되는, 즉 시간의 쳇바퀴에 갇히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하던 주인공은 결국 반복되는 하루를 이용해서 자신의 계발하고, 남을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행에 옮기면서 영원히 반복될 것 같던 시간의 쳇바퀴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때는 날짜만 바뀐 것이 아니라 자신도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남을 섬기는 만인의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주인공에게는 변화가 생기게 될까요? 1막에서는 앙상하던 나뭇가지가 잎으로 뒤덮여 있고, 포조와 럭키의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는데, ‘그럼 갈까’라고 말하는 블라드미르에게 에스트라공이 ‘가자’라고 대답하면서도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지문을 남겨놓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여전히 고도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옛날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에서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연출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이해했는데, 희곡을 읽어보니 대부분 작가가 지문으로 지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마틴 에슬린이 말하듯 작가가 만들어낸 비극 속의 희극을, 동시에 희극 속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의미를 새겨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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