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의 금기를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36
강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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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백과사전에서 ‘금기(禁忌)’란 민간신앙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적 의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접촉이나 언행을 제한하는 관습”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기는 사회적으로 전승되면서 그 사회 속에 깊이 뿌리내려 일종의 속신(俗信)으로 자리 잡았다. 금기가 끈질기게 전승되는 이유는 금기를 범하면 해당 신령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거나 재앙을 받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금기란 단어의 용례가 확대되면서 어떤 집단에서 기피하는 말이나 행동을 이르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 경우는 그 집단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이 재앙을 내리는 신령의 역할을 대신하여 금기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단이나 금기가 있는 것처럼 학계 역시 금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는데,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처럼 먼저 나서서 금기를 언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학계의 금기를 찾아서>에서 방울을 달겠다고 나선 저자 역시 학계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학계의 소식을 다루는 기자입니다. 결국 금기를 공론화하지는 않지만 끼리끼리는 주고받는 무엇이 있었던 것이고, 저자 자신은 단지 이것들을 묶어서 책으로 엮어냈다는 설명입니다. 다른 영역은 차치하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학계의 금기는 학계의 ‘구조적인 한계’와 ‘무의식’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학문이 미세하게 쪼개지고 전문화되고 있어 학계 나름대로의 독특한 금기를 모두 수집해서 다룰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총론에 해당하는 몇 가지와 아마 저자에게 친숙한 각론에 해당하는 몇 가지의 사례를 들어 학계의 금기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스승 비판이나 전공불가침의 법칙, 혹은 학문의 주제와 같은 총론적인 문제제기 같은 경우는 쉽지 않은 일이나 생각에 따라서는 옳지 않은 점에 눈을 감는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할 것이며,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공감할 수 있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논문의 형식이나 생태학계의 비생태성과 같은 주제는 각론에 해당하지만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서 공감 여부를 표시하기가 어려워 다만 참고할 따름입니다.

 

문화비평에 ‘문화’와 ‘비평’이 없다는 글에서는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분야라서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글쓰기에는 ‘문화비평’만큼 그 정체성이 흙탕물인 분야도 드물다. 글 좀 쓴다는 이들이 모두 문화비평을 쓰고 있다.(71쪽)”라는 글머리에 이어지는 “이 많은 문화 비평가들이 쏟아내는 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비평으로서의 정체성을 전혀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비평이라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전문성’이 ‘제로’에 가까운 글들이 많으며, 약간의 새로운 시각과 글맛을 내는 에세이들이 대부분이다.(72쪽)” 는 공감하기에 충분합니다. 간혹 새롭다는 느낌이 드는 글을 읽다가도 느닷없이 논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념적 주장을 섞어넣는 바람에 글쓴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 논객의 하나라고 하는 분에 대한 날세운 비판도 읽을 수 있습니다. “진중권은 글쓰기를 이원화시키고 있다. 겉으로는 문화 비평과 정치 비평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미학적 글쓰기와 정치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 비평이 문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의 급진 좌파적 당파성을 띤 상대방에 대한 논리적 공격이 주조를 이룬다. 그는 과연 문화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일까?(74쪽)”

 

지나친 전문주의와 엘리트주의는 삶과 학문을 결별시켜 별개의 것으로 만들어왔다고 전제한 저자는 대중적 글쓰기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저의 전공분야를 쉽게 풀어 일반에게 소개하려는 시도를 해오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낙담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도 “대중적 글쓰기란 어려운 전문 용어와 한자, 논리의 구조물을 해체해서 우리말 속에 생각이 잘 용해된 쉬운 글, 독특한 예시와 문체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글쓰기를 의미한다.(79쪽)”라는 정의에 따라서 쉬운 우리말을 더 많이 발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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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행복 - 귀농실천에서 현명한 자녀교육까지
송인하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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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은퇴를 앞두고 공로연수 중인 분을 만났습니다. 최근에는 주말농장에 나가 농사를 짓는 재미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은퇴 후 생활이 될 것 같습니다. 귀농을 주제로 한 리얼다큐멘터리 방송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귀농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결심을 하지 못하는 것은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는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은데다가 준비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 쉽지 않은 탓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변현단님의 <자립인간; http://blog.joins.com/yang412/13352911>의 경우는 ‘낮에는 농사를 짓는 농부, 밤에는 글을 짓는 작가.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면 바로 실천하는 자유로운 영혼이며, 사람이든 생활이든 틀에 박힌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개인의 자립’을 우선순위에 두고, 곡성 산골로 터를 옮겨 특별한 작위적 공동체가 아닌 ‘자립적 개인의 협력’으로 꾸려나가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귀농을 꿈꾸는 분들 역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을 터라서 어느 한 분의 사례가 모범답안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송인하 선생님의 <귀농행복>은 다소 딱딱한 학술서 같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귀농에 관한 알파에서 오메가를 망라하는 책입니다. 모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은퇴후 노후생활을 즐기려는 귀촌인은 별도로 하고, 저자는 귀농을 꿈꾸는 분들을 ‘생태가치 귀농인’과 ‘경제 목적 귀농인’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목표에 맞는 귀농설계가 가능하도록 내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서문에 적은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보면, 1장에서는 서양과 우리나라에서의 귀농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읽는 이가 귀농을 생각한다면 어떤 타입일지 평가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3장에서는 귀농준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4장은 각자에 맞는 귀농지역을 고르는 방법을, 5장에서는 귀농후 적응하는 방법을, 6장에서는 어떻든 농촌에서는 영농활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7장에서는 도시의 소비자와의 연결망이 중요하다는 점을 설명하였고, 8장은 귀농인이 지역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는 논하였습니다.

 

저자는 전형적인 농촌사회인 전북 남원군과 전북 진안군에 정착한 열여덟 명의 귀농인 가족을 대상으로 귀농의 이유와 과정, 정착 후의 생활 등에 걸쳐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하여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열 명의 생태가치 귀농인들은 도시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귀농을 결정한 경우를 말합니다. 도시문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겪은 경우가 많아서 생태계를 지키는 귀농활동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부류입니다. 경제 목적의 귀농인은 기존의 농사방식과는 다른 농촌경제활동을 통하여 고소득을 기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만, 은퇴후 귀농인은 대체적으로 은퇴 후에도 경제활동을 지속해야 하는 경우로서 농촌이 도시보다 유리한 점이 많을 수 있다는 정도로 설명을 약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귀농인들이 농촌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기 위하여 고려해야 할 점들을 콕콕 짚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제가 보기에는....) 예를 들면, 귀농인이 농촌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누구와 어떤 일을 도모하며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하는 등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농사일을 쉽게 생각하고 오는 귀농인의 경우는 귀농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을 떠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귀농의 이유에 따라 차이가 나는 생활방식에 대하여 주위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생태가치를 추구하는 귀농인의 경우에는 ‘영농기술에 익숙하지 못하고 농산물의 소출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는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하고, 반면에 경제목적의 귀농인을 ‘농촌에서 돈을 버는 기계’라고 단정하고 그럴 바에야 도시에서 돈을 벌면 도 좋지 않겠느냐고 못마땅해하는 생태가치 추구 귀농인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각자의 철학에 따라서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점은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귀농인의 행태가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같은 지역사회에서 부대끼며 살 것이라면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인데 대부분의 경우는 이주민의 노력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귀농행복>은 귀농을 생각하고 계신 분들이나 귀농 초기의 분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주민이 줄어 고민하고 있는 농촌지역의 지자체에서는 귀농을 꿈꾸는 분들을 유치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의 들어 일독을 권해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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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끈이론: 아인슈타인의 꿈을 찾아서 살림지식총서 126
박재모.현승준 지음 / 살림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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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스 교수가 우주의 시원에 대한 설명을 담은 <우주의 풍경; http://blog.joins.com/yang412/12797504>에서 끈이론이라는 용어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점같이 생긴 입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매우 가느다란 끈이라는 이론입니다만, 1960년대 소립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수학적 함수와 관련된 물리학적 모형으로 1차원의 끈이라는 것을 래너드 서스킨스와 난부 요이치로에 의하여 제시된 것입니다. 이렇게 입자물리학에 들어선 끈이론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시켜 양자중력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우주의 시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마이클 셔머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탐구한다는 목적으로 저술한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com/yang412/12502415>에서 과학적 타당성을 나타내는 퍼지비율 0.4인 카오스와 복잡계 이론을 정상과학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반하여 퍼지비율 0.7인 초끈 이론을 정상과학과 비정상과학의 경계에 결쳐 있는 변경지대의 과학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이론을 뒷받침할 과학적 근거가 충분치 않아서 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삼차원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이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끈 이론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혹은 우주가 10차원 혹은 11차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5차원에서 10차원에 이르는 세계에 적용할 좌표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여 단순화하여 적용할 단순한 법칙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물리학을 전공하시는 박재모교수님과 현승준교수님이 어렵게만 느껴지는 초끈 이론을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여 <초끈 이론>에 담았는데,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초끈 이론은 일반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하는 이론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앞서도 간략하게 줄였습니다. 뉴턴에 의하여 정립된 중력이론은 물체의 속도가 광속보다 훨씬 느린 거시세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물체의 속도가 충분히 광속에 가까운 경우에는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합니다. 또한 1930년대 완성된 양자역학은 물체의 운동이 광속보다 매우 작은 속도로 움직이는 미시의 세계를 기술하지만, 역시 물체의 속도가 광속에 가까운 경우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입니다. 미시의 세계에 존재하는 소립자들의 생성과 소멸은 양자역학과 중력의 결합을 요구하는데, 이는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결합된 양자장론의 범위 내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체계가 요구되었고, 일방상대론과 양자역학을 결합한 초끈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은 1980년대에 모두 다섯 가지 종류의 초끈 이론이 밝혀졌다고 하는데, 1990년대 중반에 두 가지 관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초끈에는 D-브레인(D-brane)이라라 불리는 다양한 차원을 가지는 물체가 존재한다. 둘째, 다섯 가지 초끈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모두 11차원에 존재하는 M이론으로부터 나온다. 저자들은 초끈 이론은 초대칭성의 개수와 초끈의 종류에 따라 다섯 가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적었습니다. “이중 초대칭성이 가장 큰 것으로 IIA련돠 IIB형 두 가지 이론이 있으며, 이들은 원래 닫힌 끈만 존재하는 이론으로 알려진 것들이었다. 열린 끈과 닫힌 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던 것은 I형 초끈 이론이라는 것(67쪽)”입니다. 이 부분의 설명이 분명하지 않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초끈 이론은 중력을 성공적으로 양자화하고 모든 종류의 입자와 그들 간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모영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초대칭성이라거나, M이론의 구축, 블랙홀의 정보손실 문제, 우주론에서의 우주상수에 관한 난제들은 앞으로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초끈 이론에 대한 보다 분명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는 아무래도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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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위험특성과 한국인의 위험인식 스펙트럼 위험커뮤니케이션 총서 3
송해룡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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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말이 있습니다. ‘재앙은 혼자 오는 법이 없이 항상 겹쳐서 온다.’라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같습니다. 안전할 것으로 믿은 여객선이 속절없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은 그렇다고 쳐도,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승무원들이 구명(求命)의 기회가 사라질까봐 승객들을 객실에 방치한 채 몰래 먼저 탈출하는 비윤리적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바람에 수학여행길에 들떠 있던 꽃 같은 젊은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온 국민이 충격에 빠져있는 상황에 이번에는 많은 시민들 태우고 달리는 지하철이 추돌한 사고가 발생했고, 이어서 달리는 지하철에서 불을 질러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살상하려는 방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요양병원에서는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수십 명의 입원환자가 졸지에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1993년 군산 위도의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1994년 성수대교의 붕괴사고나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그리고 얼마 전만 해도 경주 마우나 리조트 강당붕괴사고 등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이런 대형사고의 공통점은 원칙을 지키고 사전대비를 철저하게 했더라면 많은 생명이 희생되지 않았을 사고라는 것입니다. 즉 인재(人災)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재해가 겹치는 것은 지독한 불운이라고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인재(人災)가 겹쳐 일어나고 있다면, 그 사회가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송해룡교수님과 김원제 교수님의 <한국사회 위험특성과 한국인의 위험인식 스펙트럼>을 골랐습니다. 전문서적의 냄새가 진한 느낌을 받습니다만, 위험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위험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과, 위험관리에 대한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한 책읽기였습니다. 이 책은 한국학술정보가 우리 사회의 위험관리체계 수립을 위한 자료를 축적하려는 기획으로 시작한 위험커뮤니케이션 총서의 세 번째 책이기도 합니다.

 

위험사회론을 주창한 울리히 벡은 “한국은 아주 특별하게 위험한 사회(risky society)다”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북한의 전쟁 위협을 차치하고라도, 사건․사고 없이 지나가는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은 정도로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고의 당사자가 아닌 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대단히 평화롭게 보인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만 아니면 돼”라고 소리치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는 것처럼 그 위험이 내 일만 아니면 된다는 인식이 어쩌면 한국사회를 위험한 사회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위험특성과 한국인의 위험인식 스펙트럼을 조망하기 위하여 기획하고,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라고 머리말에서 밝혔습니다. 첫째, 한국사회의 대표적 위험 현상 및 사례분석을 통한 ‘위험한국’의 특성 규명, 둘째, 전국 서베이 결과 분석을 통한 한국인의 위험인식 스펙트럼 분석, 셋째, ‘안전-안심 한국’을 위한 전략적 시사점(위험커뮤니케이션 활성화 기반 신뢰시스템 구축)을 핵심내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물론 정책당국자들 역시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책이 한국사회에서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이론적 논의를 촉발하고 그 실체적 적용을 통하여 ‘안전-안심 한국’의 조건 및 전략적 방향을 모색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들이 대상으로 삼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5대 재난 및 재해”는 2012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국민의 우려를 고려해 중점적으로 예방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이미 정한 것들입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재난과 재해를 ‘광범위한 인명이나 재산적 피해를 야기하는 자연재해와 인적․사회적 재난’으로 개념화하고, 그 파급효과나 피해규모, 그리고 발생가능성을 고려하여 ‘자연재해(태풍, 호우, 홍수 등)’, ‘원전 안전(원자력 발전 및 기술)’, ‘신․변종 전염병’, ‘환경오염 사고’, ‘사이버 테러’ 등 다섯 가지고 분류하여 제시했던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이나 장성 요양병원 화재 사건을 어느 범주에 포함해야 할까요?

 

사실 요양병원의 화재사건이 보건의료인들에게 준 충격은 어쩌면 세월호 침몰보다도 더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침 제가 요양병원 적정성평가를 자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는 2013년 7월부터 9월까지를 대상으로 요양병원 적정성평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5차 평가에서는 시설부문에 대한 평가업무를 의료기관인증평가원으로 이관하고 진로부문만 평가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10년에 모 요양원에서 화재가 일어나 인명피해를 낸 것이 계기가 되어 화재에 대한 안전점검을 평가지표로 포함시킨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발생한 요양병원의 화재사건을 통하여 화재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시설은 물론 환자 안전관리 지침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번 화재사건이 평시에도 병원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안전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1부 위험한 한국사회”에서는 우리 국민들의 안녕을 위협하는 자연재해와 인적․사회적 재난의 유형을 들고, 국가적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판단되는 다섯 가지 재난재해의 위험특성을 규명하였습니다. 이어서 위험 이슈가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맥락을 짚고 있는데, 대표적 사례로 2008년 광우병 위험과 촛불집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8년 제2차 광우병파동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른 실체적 위험의 크기를 지나치게 부풀려 정치쟁점화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사례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설치와 관련하여 갈등을 빚었던 충남 태안군 안면도, 전북 부안군 위도, 경북 경주 등의 사례는 정책당국과 지역주민들의 위험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과 함께 지역주민이 아닌 외지인들이 개입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인식하는 측면도 있어 보다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2부 한구인의 위험인식 스펙트럼”에서는 다섯 가지 위험에 대하여 우리 국민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조사한 내용으로 위험환경과 관련하여 자연, 과학, 미디어 등에 대한 인식을 분석하였습니다. 이어서 위험 일반에 대한 인식 및 태도로서, 위험별 심각서 인식수준, 위험 관여도, 위험문제에 대한 태고, 위험문제 예방 및 해결에 대한 태도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제3부 ‘안전-안심 한국’을 위하여”에서는 1부와 2부에서 진단한 ‘위험한 한국’의 모습에서 ‘안전-안심 한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시사점을 도출하고 있는데,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조망하고 있습니다.

 

간혹 논지가 분명치 않은 대목도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2008년 광우병 파동에서 언론의 보도자세를 지적하는 대목에서는 “요컨대 쇠고기-촛불정국 관련 보도는 가치판단을 유보하고 중립적인 입장을 다루기보다는 대립 지향적인 보도 경향이 강했다고 하겠다. 갈등의 배경과 원인 등에 대해 공정하고 적절하게 다루지 못했으며, 대부분 갈등의 전개 양상과 파급효과에 대한 부정적 성향의 보도가 압도적이었다.(71쪽)”라고 진단하여 중립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실천과제를 논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적극적 참여와 집단지성의 발휘가 필요하다고 전제하면서 촛불집회 기간 동안 “디지털 카메라와 휴대전화, 컴퓨터를 일상적으로 지니고 다니는 디지털 시민이 보수언론의 거짓을 찾아내 바로잡고 있다. 그 역겨운 왜곡을 견디지 못한 시민들이 ‘조중동 퇴출’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민들이 새 시대를 열고 있음이다.(282쪽)”라고 적었습니다. 혹여 저자들이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위험커뮤니케이션 대책을 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작은 의문이 생기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2008년 당시 언론의 보도 방향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관하여 보수언론은 가치중립적이었던데 반하여 진보언론은 위험을 지나치게 부풀리는 내용 일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광우병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 모두가 전문가로 나서 잘못된 정보를 만들고, 이를 인터넷에 유포시키는 바람에 국민적 혼란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광우병이 창궐하던 유럽이 광우병이 소멸을 선언하게 된 작금의 현황을 본다면 당시 광우병 관련 과학적 자료를 왜곡 해석하여 위험을 부풀렸던 소위 전문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통절하게 반성하고 양심선언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안전-안심 한국’을 위하여 저자들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전제하였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과정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짧은 기간을 통하여 압축성장하는 세계에서 유래 없는 변화를 밟았던 부작용으로 대형사고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되었다고 한다면,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는 다른 개념으로 대응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공감하게 됩니다. 한국사회의 위험적 특징을 진단한 선행연구들은 높은 위험추구경향, 사회적 조정과 협력의 실패, 긴급주조체계의 미비, 그리고 관료의 부패와 법집행의 공정성 결여가 핵심요소로 지적하였습니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다는 우리네 옛말이 있습니다. 위험요소들을 사전에 점검하여 차단하고, 사고 발생 초기에 빠르게 대처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의 대응방안에 관한 지침을 수립하고 지침에 따라 훈련하여 상황이 발생하면 지체 없이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위험관리를 생활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신뢰구축의 토대가 되는 위험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저자들의 주장에도 공감합니다. 2008년 제2차 광우병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사회적 혼란에 빠진 책임은 전적으로 당국에 있습니다. 사태 초반 정부당국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 토론회를 몇 차례 개최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광우병위험에 관한 괴담의 확산을 차단하고 과학적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알렸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백만분의 일보다 작은 확률이라는 등, 실감나지 않는 수사적 표현으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는 동안 광우병위험을 부풀리려는 소위 전문가들의 감성적인 비유가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광우병 공포는 이미 희미한 추억의 그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광우병 파동에서 우리는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며,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267쪽)”라고 한 울리히 벡의 주장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저자들이 “과학을 모르는 관료들만의 과학정책은 무모하고, 철학이나 윤리의식 없는 과학기술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의 자발적 대응을 통해 위험에 대한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활성화되면 과도한 이기주의와 기능주의의 폐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사회차원의 위험문제해결을 위한 진정한 공론장 형성에도 기여할 것이다”라는 김영욱의 엉뚱한 해석을 인용하는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과학에 대한 이해수준은 시민사회보다는 관료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다만 시민사회와의 공론의 장을 통하여 단박에 공감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성급함을 버리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시민사회가 과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둔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겠는데, 이는 위험커뮤니케이션의 완성이 위험관리의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늦었다고 한탄하며 자책하는 동안에, 어떻게 하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나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위험가능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한국사회의 위험인식의 수준을 높이고, 위기상황에서 대응방안이 자동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위험관리의식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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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말 걸기 - 밴쿠버에서 퀘벡까지 인문여행서 두 번째 티켓 3
최혜자 글.사진 / 이담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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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입니다만, 미국의 미네소타에서 공부를 하면서 가까운 캐나다를 돌아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때 기록해두었던 여행기와 사진들을 들추어 보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최혜자님의 캐나다 여행기를 읽게 된 것은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특히 비교문화를 연구한 저자는 다문화출신의 구성원들을 포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만들어온 캐나다의 문화적 특성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구를 마칠 무렵 캐나다의 뱅쿠버에서 출발하여 버스를 타고 동진하여 퀘벡주를 거쳐 미국의 뉴욕주에 이르는 여행을 해보기로 하였다고 하는데, “벤쿠버에서 본 다문화주의의 얼굴과 다른 부분을 찾아보고 싶었다. 나는 결국 캐나다에서 탐색자이자 여행자로서 밴쿠버에서 퀘백시티까지 훑어다녔고, 캐나다의 민얼굴을 만나려고 애를 썼다. 여행은 그러한 캐나다인들의 일상의 순순한 모습을 살펴보는 기회가 되었다.”라고 이유를 적었습니다. <캐나다에 말걸기>는 다분히 도전적으로 기획된 여행이었던 것입니다. 저 역시, 캐나다 서쪽 끝에 있는 뱅쿠버에서부터, 캐나디언 로키, 위니팩, 선더베이, 수 세인트-마리, 캐나디언 나이애가라폭포, 토론토, 사우선 아일랜드를 거쳐 오타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을 다녀보았기 때문인지 저자와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놓쳤던 부분들까지 세심하게 조사하여 캐나다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잘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후반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의 삶을 정리하고 성찰해보려는 생각에서 출발한 것인데, 더하여 캐나다에 유학 혹은 어학연수를 계획하고 있는 학생 혹은 그 가족들이 캐나다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같이 근무하시던 위원님께서 최근에 캐나다로 떠나셨다고 하던데, 조금 일찍 출간되었더라면 도움이 많이 되었겠다 싶습니다.

 

책은 모두 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선 3개 장은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시는 동안 돌아본 밴쿠버의 속살을 꼼꼼하게 살펴 정리하신 것 같습니다. 4장은 캐나다 횡단여행을 떠나게 된 사연을 적었고, 이어서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다음에 있는 앨버타주-서스캐처원-매니토바-온타리오-퀘벡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과 긴 여행에서 발견한 캐나다의 다양한 모습과 캐나다 사람들의 모습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장은 덤으로 붙인 미국 뉴욕의 모습입니다.

 

캐나다에서 살면서 느낀 영어로 말하기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영어권에 살면서 영어가 저절로 될 것이라는 환상에도 단단히 문제가 있다. (…)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며, 문화적 소산이 중 가증 으뜸이다. 언어를 배우고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한다는 것은 언어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다른 나라의 문화적 상징까지 지속적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을 의미한다.(260쪽)” 사실 이 한구절만 이해해도 이 책을 읽은 값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캐나다의 다문화주의 역사를 거슬러 남북통일이 되는 그날을 상정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다툼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못지 않은 증오의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상호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 같다. 캐나다는 현재 당시의 식민지 전쟁의 논리 속에 피 흘린 이들을 아와 타로(한글로 적었습니다만 아마도 我와 他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규정하지 않는다.L 그저 캐나다를 만든 역사라고 여긴다. 과거를 역사로 객관화하고 같이 살자는 것이 다문화주의이다. (…) 나는 캐나다의 다문화주의 역사를 보면서, 남북한에도 서로 포옹하는 날이 올까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깨알 같은 제압을 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면, 상호 인정이 가장 현명한 결정이라는 것이 캐나나가 내린 결론이다.(369쪽)” 처음 저자가 다문화출신 이주민을 위한 연구를 위하여 캐나다에 가셨던가보다는 선입견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저자는 통일 이후의 우리사회를 고민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나아가 인정과 수용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에 걸맞지 않은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것까지 포함해야 완성된다는 결론(373쪽)에 이르고 있으니,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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