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창업가 바이블 - 전 세계 창업가들의 27가지 감동 스토리
다니엘 아이젠버그 & 캐런 딜론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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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벤처기업 돌풍이 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주변에서도 벤처기업을 일구느라 젊음을 바친 친구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벤처기업들 가운데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벤처기업이 성공할 확률은 2%에 불과하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습니다만, 실제로도 미국의 벤처캐피털이 벤처기업에 투자한 4건 중 3건이 실패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안철수 의원은 카이스트교수시절, “벤처창업의 성공확률을 높이려면 좋은 사람들로 팀을 만들고, 좋은 제품과 서비스로 경쟁하고, 점진적인 플랜을 세워서 실행하라”라고 조언하였다고 합니다.

 

창업을 하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접어야 하는 불운을 맛본 분들이라면 실패한 창업과정을 복기하여 재기를 꿈꾸기도 하겠습니다만, 실패를 겪지 않고 성공에 이르는 길이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창업가정신을 연구하고 강의하고 있는 다니엘 아이젠버그교수의 <하버드 창업가 바이블>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업에 필요한 것은 오직 창업가 자신의 고된 노력, 야망, 지략, 파격적인 사고방식, 영업 능력, 리더십 등인데, 정작 창업에 성공하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것은 이미 서가를 채우고도 넘치는 창업 매뉴얼이 아니라 창업가의 통찰의 깊이, 즉 기존의 가치를 깨고, 비틀고, 도약하는 창업가정신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창업은 누구나 열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창업 자체보다 ‘가치창조’와 ‘가치획득’의 관점에서 창업가정신에 대한 개념을 분명하게 하는데 두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눈에 띄지 않고 무시당하고, 하찮게 여겨지거나 폄하된 곳에서 기회를 발견하여 비범한 가치를 창조하고 획득한, 바로 그런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24쪽). 저자는 이 책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1부는 창업가가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 만큼 수준 높은 전문성을 지닌 ‘혁신적인 젊은이’라고 간주하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2부에서는 대중의 기대를 거스르는 것이 창업가정신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내재되어 있는 이유를 살펴본다. 3부는 창업가가 직면하는 다양한 종류의 역경을 알라보고, 어떤 역경이 창업가정신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또 어떤 역경이 그와 반대로 되는지 보여줄 것이다. 4부와 결론에서는 창업가들의 이야기를 발판으로 창업가정신의 의미가 비범한 가치를 인식하고, 창조하며, 획득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다.(27쪽)”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눈길을 끈 아이템은 캡슐 내시경을 개발한 가비 머론의 이야기입니다. 캡슐내시경은 우리나라에서도 금년 9월 1일부터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게 되어 130만원이나 들던 비용이 11만원으로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내시경으로 관찰할 수 없는 소장을 관찰하는데 유용한 점이 있습니다. 길이가 7미터나 되는 소장은 대장보다 가늘고 대장의 안쪽으로 여러 차례 접혀져 있기 때문에 내시경으로 소장 전체를 보는 것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창업가정신이란 비범한 기회를 인식하고, 창조하고, 획득하는 세 가지 요소로 정의되는데, 이러한 창업가정신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창업가정신이라는 것 자체가 조금은 이론적인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많은 사례에서 이와 같은 요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공부문의 리더들은 예외적이고 불연속적 특성이 있다는 창업가정신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절한 정책의 방향성을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도 창업 전에 다른 사람 밑에서 10년 이상 현업의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으며, ‘엄청난 금전적 리스크를 기꺼이 견딜 수 있습니까?’를 비롯한 열 가지 체크리스트를 통하여 자가진단해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의 저자 역시 성공한 창업가가 설립한 벤처기업에 투자했다가 투자금을 몽땅 날리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창업과 투자는 또 다른 과정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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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정
조정우 지음 / 청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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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맞붙던 조선 숙종 시절, 내명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권력싸움의 이면사인 만큼 희빈 장씨의 삶은 소설, 드라마 그리고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곤 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다양하다 보니 누구를 주인공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를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해나갈 수 있어, 볼 때 마다 흥미를 돋우곤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작품으로는 드라마 <동이>에서는 궁인에서 19대 숙종의 후궁에 오르고 그의 아들 연잉군을 21대 영조로 등극하게 만든 숙빈 최씨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그동안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의 갈등을 주요테마로 했던 전작들과는 다른 맛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이순신 불멸의 신화; http://blog.joins.com/yang412/13475791>에서 이순신 장군이 23차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략에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전개로 주목을 끌었던 조정우 작가의 <장옥정>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 미모를 바탕으로 자신의 야심채우기에만 급급하던 요부의 이미지가 강했던 장옥정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요부의 이미지가 강조되던 장옥정과는 다른 인간 장옥정의 모습을 그려냈다고 할까요? 그리고 요즘 막바지에 이른 드라마 <유혹>에서 여자라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아진그룹의 사장처럼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그리고 영빈 김씨와 숙빈 최씨 등 적지 않은 여인네들 사이에서 갈팡질팡 줏대없는 숙종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희빈 장씨의 삶은 천인출신 궁인에서 숙의 희빈을 거쳐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숙종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는 경종을 출산하기에 이르렀지만, 남자를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이 과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사약을 받고 스러지는 비운의 주인공으로 요약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옥정은 역관으로 날리던 아버지 장경이 죽고 사촌형 장현에 의탁하고 있었던 것인데 장현이 역모에 휘말리고, 역시 역모에 휘말려 노비로 몰락했던 어머니 윤씨의 신분 때문에 천인으로 굴러 떨어진 신세가 된 것입니다. 역경에 굽히지 않는 사람은 새로운 경지로 나가는 법입니다. 양반의 첩실로 가느니 중인의 정실이 되고자 했던 옥정은 신분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천인이 된 자신의 처지를 바꾸기 위하여 궁인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이토록 천대받고 사느니 차라리 궁인이 되자! 내 반드시 임금의 총애를 얻어 마음의 한을 풀고 가문의 누명을 벗기고야 말리라!(47쪽)” 그야말로 목적의식이 뚜렷한 신여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옥정은 궁에 들어가자마자 중전 인경왕후의 죽음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숙종의 승은을 입기에 이르지만, 백부의 역모사건의 배후인 대비의 농간으로 궁에서 퇴출되고 맙니다. 서인과 남인의 힘겨루기가 진행되면서 옥정의 환궁이 불투명하지만 남자 숙종의 마음은 여전히 옥정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대비가 고른 민유중의 여식 인현왕후가 나이도 옥정보다 어리고 현숙하고 더 아름다워 숙종의 마음이 기울고 있음에도 옥정을 잊지 못하는 것은 작가가 따로 드러내지 못한 무언가 비술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숙종이 부탁하는 거문고연주만으로는 숙종의 마음을 훔쳐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재주를 작가는 “(옥정이) 사내의 마음을 홀리는 재주가 탁월하다.”라고 표현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생략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옥정의 재치는 탁월한 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궁에서 쫓겨나 숭선군의 집에 의탁하고 있을 때 찾아온 숙종의 편지를 읽다가 왕이 지금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대목입니다. “옥정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서찰에 떨어졌다.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던 옥정은 문득 서찰의 글씨가 눈물에 많이 번진 것이 쓴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46쪽)” 이런 장면은 옥정의 재치가 뛰어났다는 사실을 제대로 표현한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작가의 의욕이 너무 앞선 것 아닌가 싶은 대목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과정입니다. 사약을 마시고 숨이 끊어져가는 옥정을 껴안고 울부짖는 장면이나 옥정의 사후 십수년이 지난 다음에 인장리에 있다는 옥정의 무덤을 찾아 옥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의 처분을 후회하는 장면이야말로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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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계 살림지식총서 85
강유원 지음 / 살림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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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번역된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통해서만 만나본 강유원님을 저서로는 처음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3쪽)”라고 쓴 첫 만남에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분이구나 싶습니다. 언제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책의 기준을 어디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설마 절대 다수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을까요?

 

그들이 책을 읽지 않는 이유도 평생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만 마주하고 있어 행복하기 때문인 것 맞나요? 그리고 책에 있는 글자가 죽어있는 것 맞나요? 그리고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 것 맞나요? 책을 펼치자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문에 대한 답은 어디에 있나요?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을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는 단정은 분명한 것일까요? 책을 읽는 이들은 책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얻으면 그만일진대 굳이 타인까지 책읽기에 끌어들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책으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의 음모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

 

저자는 <책과 세계>라는 주제를 통하여 책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기에 나선 모양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가 책에 앞섰다는 전제는 분명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는 주장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들의 삶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문자를 만들고, 문자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식의 분열로 해석하기 보다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자와 문자로 구성되는 컨텍스트를 창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컨텍스트가 모여 텍스트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합니다만, 저자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가 생산된 컨텍스트로서의 세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정확하게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다.(5쪽)”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고전에 대한 자극을 주면서 그것들로 직접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고, 그 책들을 읽기 전에 그 책들이 어떻게 이어져 있고 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설명하는데 한참을 에둘러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 장을 세계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를 살피기 위하여 <길가메시 서사시>, <모세 5경>, <사자의 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문자가 인류 최초의 문자기록이 남아 있는 수메르문명의 점토판에서 발견된 것으로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 알려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문자로 남겨져있는 것만이 인류 최초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세 5경>은 히브리민족의 서사시라고 보는 저자의 견해에 공감합니다. 이집트 파피루스에 기록된 19왕조시대의 <사자의 서>는 그들이 불멸과 영원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는 것인데, 그들의 문명이 무너지면서 그들이 남긴 책은 ‘죽은 책’이 되었다고 단정합니다.

 

이처럼 저자는 수메르문명, 히브리문명, 이집트문명 등 고대문명이 남긴 텍스트에서 시작하여 그리스와 로마를 거쳐 다윈의 <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텍스트의 의미들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필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극단의 시대’라고 하는 20세기에 등장하는 현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결국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책읽기가 출발점이 되어야 할 터인데, 현실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론을 세우기 위한 책읽기가 필요할 것인가에 의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冒頭)에서 책읽기를 부정적으로 정의한 이유가 알 듯 모를 듯 합니다. 반쯤 차있는 컵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생각한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시각과 반이나 남았다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으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사정이 있겠습니다만, 저라면 긍정적 사고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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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를 선물하는 남자 - 명화와 함께 읽는 나의 섹스 감정 수업 29
김진국 지음 / 스토리3.0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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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서 난감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읽은 책에서 얻는 느낌은 반드시 리뷰로 남긴다는 나름대로의 원칙을 어떻게 하나 싶어서입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지켜온 원칙을 깨고 싶지는 않아서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 책을 해당출판사의 북카페를 통하여 받았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손을 든 사람에게 제공된 것인데, ‘명화와 함께 읽는’이라는 카피에 마음이 끌려 ‘나의 섹스 감정 수업’이라는 카피를 무시했다고 변명을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본래의 목적이었던 ‘명화와 함께 읽는’은 제 생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편집자의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세상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은 어쩌면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을 것 같습니다. 일본처럼 춘화가 공공연하게 나도는 나라도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어진을 그렸다는 화가가 그렸다는 춘화가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다만 그림들이 은밀하게 나돌았다는 것에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성(性)에 대한 담론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되던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기술(?)인 면은 더욱 은밀하게 전수(?)되곤 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작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1995년에 <유라의 하루>를 써 베스트셀러작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는데, 읽어보지는 못했고, 심지어는 이 책에 대한 리뷰도 읽어보지 못해서 언급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서울의 학원가에서는 스타급 국어강사로 소문이 나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합니다. 누구나의 인생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인 듯, 학원가에서 잘 나가던 작가의 삶이 꺾인 것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유라의 하루>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을 내면서 출판업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이고, 한때 잘 나가던 출판업이 IMF를 만나면서 커다란 짐이 되면서 작가의 삶에 그늘을 드리웠던 것 같습니다. 잘나가던 분들이 좌절을 겪게 되면 새로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고 합니다만, 저자의 경우는 거리로 나서지 않고, 스타강사 시절 보여준 강의능력을 바탕으로 인터넷 방송이라는 영역에서 새로운 삶을 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저런 과정을 거쳐서 19금 성인방송으로 마니아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멀티를 선물하는 남자>에서도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작가가 진행하는 방송에 참여하는 시청자들은 참 솔직한 분들이었나 봅니다. 그런 분들의 호응 속에서 방송수위가 점차 올라가다 보니 경고를 받게 되고 결국은 방송자격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고, 그 참에 아예 방송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책으로 묶어내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출판은 방송보다는 훨씬 넓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29개의 강좌를 성스킬에 대한 내용을 모은 1부와 성풍속도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모은 2부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저자의 인생역정을 담았습니다. 성스킬의 기본은 상대여성에 대한 배려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행위로부터 얻는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으려면 남성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물은 여성이 여러 차례 절정에 이른다는 ‘멀티 올가’를 느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의 리뷰에서도 지적했던 것입니다만, 성을 통해서 얻는 여성의 느낌을 남성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저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럴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습니다. 다양한 성감대와 지스팟을 공략하면 여성이 멀티 올가에 이를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최근 이탈리아에서 여성의 지스팟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학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을 보면 우리의 성에 대한 상식은 근거없이 막연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에는 일단 공감한다는 제 입장을 밝힙니다.

 

책을 읽는 분에 따라서는 다양한 여성을 상대로 한 저자의 성경험이 은근한 자랑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는 공연한 걱정도 해봅니다만, 카사노바나 돈후앙의 성 이력이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왔고, 성에 대한 생각들이 개방된 세상에서는 기우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은밀한 공간을 통해서 확산되던 성기술에 대한 담론이 이 책을 통해서 수면 위로 올라온 만큼 검증절차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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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는 즐거움 - <걷기예찬> 그 후 10년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문신원 옮김 / 북라이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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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아내와 함께 주말을 이용해서 서울근교에 있는 걷기에 좋은 길을 찾아다닐 무렵, 다비드 르 브르통교수의 <걷기예찬; http://blog.joins.com/yang412/12935107>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걷기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이라도 받으면, <걷기예찬>의 모두(冒頭)에 나오는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라는 구절을 꼭 인용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양기화, 아내와 함께 하는 주말걷기, 신동아 2012년 12월호, 356-359; http://blog.joins.com/yang412/13036544). 브르통교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사회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몸’의 문제를 천착하여 <몸과 사회> 등 많은 저서를 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걷기예찬>은 단순한 산문집이 아닙니다. 철학적이고 진지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걷기를 통하여 몸의 세계를 회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기계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어느 새 우리 몸의 본래적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걷기는 우리 자신을 인간 본연의 차원으로 되돌려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은 ‘걷기’에 ‘느림의 미학’을 더한 브르통교수의 신작입니다. 걷기에 느림을 업그레이드하게 된 것은 걷기는 단순히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고 시간도 동원되는 행위라는 점을 깨닫게 된데 있다고 합니다. 걷기는 시간을 버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우아하게 잃는 일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며, 삶의 의욕을 꺾는 현대의 그 절대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62쪽)”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느림은 옛것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새로운 트렌드이기도 합니다. 모 통신사의 ‘빠름빠름빠름’이라는 광고카피가 빠름을 추구하는 요즈음의 추세를 잘 나타낸다고 한다면, ‘느림’은 빠름을 추구하는 트렌드에 대한 반동이라고 하겠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 http://blog.joins.com/yang412/12858261>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설파한 피에르 쌍소는 일찍이 “(느림)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를 서두르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 그리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 요구에 따르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과제이다.”라고 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12쪽, 동문선, 2000년) 그리고 ‘길은 느리게 살 수 있는 지혜와 작은 일에도 감탄할 줄 아는 지혜를 준다.’라고 적었습니다. 역시 걷기가 느림을 회복하는 좋은 방법이 되는 이유라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에 쫓기던 제가 걷기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 동기는 대책 없이 불어나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서 시작한 산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운동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그저 빠르게 걸었습니다. 체중이 적절한 수준으로 줄어든 다음에도 체중을 유지하기 위하여 산책을 이어갔고, 산책은 주말을 이용한 근교의 하이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 일간지의 주말섹션에 소개되는 걷기에 좋은 길을 따라 걷다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2825144>에 소개된 52개의 코스를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걷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고,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걷기예찬> 10년 후에 저자는 “오솔길이나 도로 지나기, 숲이나 산을 활보하기, 힘겹게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가는 기쁨을 만끽하기, 이 모든 걷기는 오로지 자신의 신체 수단 하나에만 몸을 맡긴 채 세상과 연결되는 느낌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일이다.(9쪽)”라고 다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 유용성, 수익,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요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걷기는 느림, 유연성, 대화, 침묵, 호기심, 우정, 무용성을 우선시하는 저항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저자는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길은 대학과도 같다. 단순히 지식을 나눠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정신을 다듬고 늘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 길이 가진 절대적인 힘을 돌아보기에 알맞은 존재의 철학까지 전파하기 때문이다.(11쪽)” 

 

자, 그럼 느림으로 업그레이드된 브르통의 ‘신(新) 걷기예찬’을 살펴볼까요?  저자는 걷기야 말로 인간의 본질로 회귀하는 길이라고 설파합니다. “천천히 길을 걷노라면 세계 내의 존재가 관능의 극치에 도달하는 순간들을 맞이하게 된다. 받을 줄 아는 자에게는 은총이 넘쳐나는 세상의 낯익은 구성 속 작은 돌파구, 평행한 세계에서 감춰진 비밀의 천 사이로 보이는 장면들과도 같은 순간들이다.(114쪽)” 제가 주말에 다녀온 곳들 가운데 유독 기억나는 곳은 오산에 있는 마등산 솔숲으로 난 길입니다. 빽빽하지 않은 소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에는 솔가루가 수북하게 떨어져 있고, 솔향이 진하게 넘치고 있었습니다. 걷는 것에 더하여 볼거리와 냄새까지 더해진 것이 기억을 강하게 한 것 같습니다. 아! 산비둘기가 우는 소리도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역시 카프리의 정원을 걷다가 공간을 찢는 듯한 새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 울음소리가 한순간에 세상을 내면의 공감으로 바꿀 수 있더군. 우리는 새가 제 스스로의 가슴과 세상의 가슴을 구분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으니까.(126쪽)” 

 

탈 것으로 이동할 때보다 걷을 때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예리해집니다. 그리고 느리게 걸을수록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심에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사방에 널려 있고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인하여 오감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자연에 들면 오감을 뒤흔드는 소음들이 사라지면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자극을 오롯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세상은 아낌없이 선물을 주고 여행자 또한 탐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모든 여행은 감각을 통한 전진이요, 관능으로의 초대이다. 행복한 감각들은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그곳에 있음을 수없이 확인시켜 준다.(67쪽)” 

 

때로는 길이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장소로 안내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쥘리안 그라프가 프랑스 중부 트롱세 지역의 숲길을 걸었을 때의 경험을 인용합니다. 달도 없는 발 깊은 숲을 가로지르다 보니, 숲은 질서와 무질서가, 어둠과 빛이, 생기와 무기력이, 믿음과 두려움이 결합되어 뒤섞인 세계였던 것입니다. 시각은 거의 먼 곳을 보지 못하고 귀를 쫑긋하고 세워 청각을 극도로 긴장시켜도 세상의 분명한 경계를 가늠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내장산 숲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대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세상으로 안내할 길을 찾을 수 없어 당황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길은 때로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곳으로 안내한다는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는 이유입니다. 

 

그라프가 한밤중의 숲에서 경험한 세상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느낌에 대하여 저자는 ‘밤은 어떤 이들에게는 감사와 안도감 그리고 내향성을 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인지도 모른 채 공포와 위협을 구현하기고 한다.(71쪽)’라고 밤의 양면성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인 편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삼군사관학교에서 16기로 군의후보생 훈련을 받을 때, 처음으로 100km행군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저녁을 일찍 지어먹고 학교를 떠나 이튿날 해질 무렵에 복귀하는 훈련입니다. 학교를 출발해서 어둠이 오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대오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정 무렵이 되면서 대오가 흩어지면서 앞에 가는 대원도, 뒤에 따라오는 대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동행하는 대원 하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밤길을 가다보면 곁에 가는 대원이 정말 사람일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무서운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별이 총총한 밤에 대한 낭만주의는 버려야 할 것이라고 권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존 뮤어가 요세미티 계곡에서 보낸 밤처럼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둡고 거대한 두 암벽 사이로 보이는 좁은 하늘 띠에서 맑은 별빛이 반짝였다. 내가 그곳에 누워 그날 하루의 교훈들을 마음속에 되새기는 사이에 갑자기 보름달이 염려의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내밀어 협곡을 굽어보는 듯해서 깜짝 놀랐다. 마치 홀로 있는 내가 걱정스러워 살펴보기 위해 방 안에 들어온 사람처럼 하늘의 제자리를 벗어나왔다고 말하는 듯했다.(75쪽)” 그래서일까요? 밤에 걷는 일은 시간을 기막히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그 세계, 어슴푸레한 달빛은 태초 이래로 거의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밤길이 더 낭만적이었을까요? 

 

<희망의 발견>의 저자 실뱅 테송(Sylvain Tesson)은 “장거리 보행자에게 글이란 가장 강렬한 진정의 순간이다(…). 저녁마다 글을 쓰면서 여행자는 또 다른 표면으로 길을 계속 이어가고 페이지 위에서 전진을 연장한다.(89쪽)”라고 했답니다. 걸으면서 경험하는 찰나의 느낌마저도 잊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놓는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정의 흔적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 혹은 꼼꼼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언젠가 기억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지만,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망각의 영향으로 여정의 흔적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걸을 때 느낀 감동을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뒷날 읽어보면서 그때의 감정을 되살릴 수 있으며, 이렇게 붙들어온 느낌을 다시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록은 또한 나 아닌 다른 이에게 그와 같은 여정을 뒤따르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제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을 따라간 것처럼 말입니다.

 

서울성곽을 따라 남산의 북쪽 산책길을 걸은 적이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1603555) 그때 남긴 글에 “도심에 4km 가까운 산책길을 만날 수 있는 대도시가 얼마나 될까 싶다”라고 적었습니다. 서울 도심에는 특색 있는 산책길이 산재해있습니다.(김영록, 박미경 지음,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 여행: 서울, 수도권) 도시를 걷는 일에 대하여 저자는 다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도시에서 걷는 일은 군중, 익명성과 마주치는 일이다.’라고 한 저자는 “도시의 보행자는 지나면서 서로의 삶의 사건들을 간파하고, 존재의 단편들을 주워 모으고 도시를 자신이 일등석을 차지한 극장으로 바꾸어놓는다.(179쪽)”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걸으면서 만나는 타인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 아닐까요? 

 

피에르 쌍소는 시골길을 걸을 때만큼이나 우리의 후각을 설레게 해주는, 독특한 향기를 풍기는 은밀한 길들을 도시에서도 일찌감치 발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도시 역시 우리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냄새를 풍기고, 감촉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느낌들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와 도시의 존재 사이에 교감이 일어남을 느낀다는 것이며, 도시에서 특유의 고유한 음색과 분위기를 느끼려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도시에게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2, 97-112쪽, 동문선; http://blog.joins.com/yang412/12286006) 역사가 오래된 서울은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감추고 있습니다. 초현대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북촌처럼 수백 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들은 천천히 걷지 않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느리게 걷는 즐거움>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걷기는 용어의 물질적 그리고 정신적 의미에서 땅에 발을 딛는 것, 즉 자신의 존재 속에 똑바로 서는 일이다(220쪽)’라고 정리합니다. 그리고 “모든 길은 우선은 자신의 내면에 묻혀 있다가 발길 아래 기울고, 특정한 목적지로 이끌기 전에 자신에게로 이끈다. 그리고 때로는 마침내 자아의 행복한 변화에 도달하는 좁은 문을 열어준다.(230쪽)”라고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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