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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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초상화의 비밀’전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태조 어진」과「윤두서 자화상」을 비롯하여 이명기, 김홍도 등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국보급 초상화는 물론 중국과 일본, 멀리는 유럽에서 온 루벤스의「안또니오 꼬레아」로 불리는 한복 입은 조선 남자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200여점에 달하는 초상화 작품을 볼 수 있었던 대규모 전시회였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작품에 담긴 깊은 의미를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림 역시 아는 만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던 우리 옛 그림에 대한 아쉬움을 채워줄 기회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북소리]에서 소개했던 이진숙님의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에서 독립된 장으로 구분한 ‘한국미술사’편에서 오주석의 옛 그림 감상법을 담은 책들을 소개받게 된 것입니다. ‘선인의 눈과 마음으로 느끼는 옛 그림의 깊은 맛’이라는 제목으로 옛 그림 감상법을 요약한 이진숙님은 오주석님의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과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를 읽어볼 것을 권하였습니다. 저자 오주석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 및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중앙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고, 간송미술관 연구 위원 및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그는 조선시대의 그림, 특히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21세기의 미술사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생전에 그는 우리 옛 그림의 맛을 제대로 느끼는 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토록 원대한 꿈을 품었던 그가 백혈병을 얻어 불과 49살의 나이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생을 마감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백혈병 치료는 세계가 알아주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안타까운 일이 있었는지 싶습니다.

 

‘전통 미술 전반에 대한 좋은 입문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오주석의 한국미 특강>은 저자가 공무원교육원에서 가졌던 강연녹취를 책으로 꾸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옛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을 총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반면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2>은 대표적인 옛 그림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각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강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옛 그림을 보여드리기 전에 우선 옛 그림 감상의 원칙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선인들의 그림을 잘 감상하려면 첫째,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둘째,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오주석의 한국미 특강; http://blog.joins.com/yang412/13488647 17쪽, 솔, 2003년)”라고 옛 그림을 감상하는 원칙을 요약합니다. 이어서 옛 그림 감상법 설명에 들어가는데, 우선 미술관 혹은 박물관에서 그림을 감상하기 좋은 거리는 그림의 대각선 길이를 기준으로 1~1.5배 정도가 좋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우리의 옛 그림은 옛 글씨를 쓰는 원칙대로 우상좌하(右上左下)의 법칙에 따라 읽어야 하는데, 과거에는 서화일률(書畵一律)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글쓰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가로쓰기로 하고 있습니다만, 옛날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는 세로쓰기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옛 그림을 읽을 때는 옛 사람들 방식대로 오른쪽 위로부터 왼쪽 아랫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림은 가능한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주마간산 식으로 휙 하니 지나가면서 중요한 점을 제대로 붙들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본 원칙을 설명한 다음에는 김홍도의 풍속화첩에 실려 있는 「씨름」이라는 소품을 놓고 옛 그림 감상법을 꼼꼼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전체를 개괄하고 이어서 그림의 세부적 요소를 따로 들어내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물두명의 등장인물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분석하여 그의 출신성분과 성격까지도 유추하는데, 필요에 따라 세부를 확대한 여덟 장의 도판을 별도로 실어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이진숙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작품을 뜯어보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엮어 보는 재미가 꿀맛이다(이진숙, 위대한 미술책 270쪽, 민음사, 2014년)”. 이처럼 오주석님은 그림의 미학적 요소 뿐 아니라 그림을 통하여 그 시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까지도 유추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등장인물의 모습에서 씨름의 승패까지고 예견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그림을 꼼꼼하게 읽었으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 옛 그림 읽기의 각론에 해당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자가 생전에 출간한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http://blog.joins.com/yang412/13502373>에서는 김명국의 「달마상」,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윤두서의 「자화상」,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김정희의 「세한도」, 김시의 「동자견려도」,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 이인상의 「설송도」, 정선의 「인왕제색도」등 열두 점의 그림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그림과 관련된 수많은 일화 그리고 저자가 그림을 해석하기 위하여 다양한 고사와 시문을 언급하고, 나아가 이 그림들이 화가의 삶이나 당대의 정치와 사회상황, 그리고 선, 불교, 주역, 유학 등 조선시대의 철학사상과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에 곁들여, ‘옛 그림의 색체’, ‘옛 그림의 원근법’, ‘옛 그림의 여백’, ‘옛 그림 읽기’, ‘옛 그림 보는 법’, ‘옛 그림에 깃든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된 글들은 옛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익히는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주옥같은 작품 설명을 하나라도 건너뛰면 안 될 것 같지만 지면관계상 한 작품만을 고른다면 서양화와 우리의 산수화의 중요한 차이점을 깨우칠 수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어느 여름날 밤의 꿈속에서 노닐었던 도원을 그린 그림입니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된 무릉도원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이라고 묘사한 것처럼 선비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안평대군은 당대의 화가 안견에게 꿈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고, 작품을 제작하게 된 연유를 손수 적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일본 천리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몽유도원도」의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간 우리는 대뜸 펼쳐진 황홀한 무릉도원의 전경(全景)에 압도된다.(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62쪽, 솔, 2005년)’라고 했습니다. 한편의 장대한 교향시와 같은 그림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른편 위쪽에서 왼편 아래쪽으로 가로지르는 대각선을 기본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특히 「몽유도원도」에는 우리 옛 그림의 원근법이 갖는 장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옛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원근법으로는 “첫째 깍아지른 높은 산을 아래서 위로 치켜다본 시각[고원법(高原法)], 둘째 엇비슷한 높이에서 뒷산을 깊게 비껴본 시각[심원법(深遠法)], 셋째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폭 넓게 조망한 시각[(평원법(平遠法)]이 있어, 이를 통틀어 옛 그림의 삼원법(三遠法)이라 하는데(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77쪽, 솔, 2005년)”,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이 세 가지를 모두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풍경화는 르네상스시대를 거치면서 풍경 밖의 한 곳에서 전체를 조감하는 원근법을 적용하고 있어, 풍경을 보고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의 산수화는 풍경 자체를 주인공으로 하고, 주인공을 치켜보고, 내려다보고, 비껴보고, 휘둘러봄으로써 산수의 다양한 실제 모습을 담아내려고 한 것(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79~81쪽, 솔, 2005년)이라고 합니다. 이진숙님에 따르면 오랫동안 원근법에 익숙해온 서구인들은 세잔에 이르러 비로소 원근법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데이비드 특히 데이비드 호크니는 ‘원근법을 절대시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서구의 특정 관념을 맹신하는 폭력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호크니의 설명에 따르면 “오랫동안 서양미술을 지배해온 ‘선원근법은 인간의 눈의 법칙이 아니라 렌즈 사용에 근거한 광학의 법칙일 뿐’이라는 것입니다(이진숙 지음, 위대한 미술책 405쪽, 민음사, 2014년).” 그리하여 사람은 사물을 카메라처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본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동양회화가 표현하는 원근법이기도 합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인용한 편지에 “대개 서울에 있을 적부터 이 일을 포기한 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남쪽으로 돌아온 후로는 더더욱 적막하게 지내면서 눈의 시력 또한 흐리고 뿌예졌습니다.(101쪽)”라는 대목을 보면 윤두서가 백내장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윤두서의 <자화상>에서 눈 둘레에서 안경에 눌린 자국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윤두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긴 노안으로 안경을 사용했음을 의미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흐리고 뿌옇게 변했다고 한다면 렌즈에 혼탁이 생기는 노인성 백내장으로 인한 증세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렌즈를 교체하는 수술을 받아 밝은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의 의술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는 저자 생전에 마무리를 하지 못한 유고를 정리하여 책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1권과 같은 형식으로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김홍도의「마상청앵도」, 정선의 「금강전도」, 정약용의 「매화쌍조도」, 민영익의 「노근묵란도」 그리고 작가 미상의 「이채 초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옛 그림의 표구’, ‘문인화, 옛 선비의 그림의 아정한 세계’ 그리고 ‘조선과 이조’라는 제목으로 정리된 글은 옛 그림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너도 나도 금강산 관광을 나서는 것이 왜 못마땅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금강산을 구경해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리운 금강산>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서 정선의 「금강전도」가 반갑기도 합니다만,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에서는 역시 김홍도의 「마상청앵도」의 해설에 더 마음이 끌리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옛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서 일 것입니다. 봄날 나들이에 나선 선비가 문득 들려오는 꾀꼬리 우는 소리에 말을 멈추고 꾀꼬리를 뒤쫓는 모습을 넉넉한 여백을 곁들여 담백하게 그려낸 「마상청앵도」는 문인화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는 저자는 선비의 뒤쪽에 아무 것도 그려 넣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둔 것은 ‘꾀꼬리 소리에 정신을 빼앗겨서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아득한 심사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문인화의 정신과 본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 문인화는 선비의 그림이다. 2. 문인화에서는 작가를, 그리고 한 인간을 본다. 3. 문인화에서는 미태가 떠도는 점을 꺼린다. 4. 문인화에서는 형상을 극소화하고 상상은 극대화함으로써 감상 행위가 살아 숨 쉬게 한다.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서문에 “문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라고 적을 만큼 저자는 2002년 월드컵의 감동이 문화와 예술이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모양입니다.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리려면 먼저 우리가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인데, 그 꿈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그가 남긴 책들은 분명 ‘조상들이 이룩해낸 문화와 예술이 참으로 훌륭하고 격조 높은 것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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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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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님은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에서 ‘현대미술작품들은 미(美)라는 글자를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엽기적이고 흉악하며 추하다(위대한 미술책, 169쪽)’라고 전제하고, ‘이제 추는 미의 부정이 아니고 미의 다른 얼굴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와 추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시기마다 혹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미학에서의 미와 추의 개념이 잘 정리된 텍스트로는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 <추의 역사> 그리고 <궁극의 리스트>를 추천하였습니다. 미술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지만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분석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미도 추도 아닌 것들을 묶어서 <궁극의 리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3493806>에 담은 것이라고 이진숙님은 말씀하였지만, 궁극의 리스트를 읽으면서 인내심을 시험하는 책읽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미의 역사> 역시 동일한 구조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점에서 역시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미의 역사>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예술의 특정 영역이 발전해온 과정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미에 대한 관념이 발전해온 역사를 담고자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미와 예술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역시 이진숙님의 생각처럼 에코 역시 “아름다움이란 절대 완전하고 변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가질 수 있다(미의 역사, 14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시대에 따른(물론 유럽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만) 변화를 비교하는 표를 먼저 제시합니다. 누드의 여성과 남성, 옷을 입은 남성과 여성, 성모, 예수, 왕과 여왕 등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고대 그리스로부터 중세, 르네상스시대를 거쳐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만 시기를 분명하게 나누고 있지는 않으며, 같은 시기에서도 주제별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는 ‘이상적인 미’, ‘아폴론적인 것과 디어니소스적인 것’, ‘비례와 조화’를 주제어로 선택하였지만, 이어진 중세에서는 ‘빛과 세계’, ‘괴물들의 미’를 주제어로 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추의 역사>를 별도의 책으로 묶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는 <미의 역사>에서 추에 관한 이야기를 시대별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제어에 속하는 보다 세부적인 사항으로 화제를 나누고 있는 것도 특징인데, 그러다 보니 시대적인 흐름의 연관성이 흩어지는 아쉬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저자가 택한 세부적인 사항이 가지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양치기 소녀에서 천사 같은 여인으로”라는 주제어 아래 적고 있는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귀부인과 음유시인’, ‘귀부인과 기사’, ‘시인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등이 저자의 관심을 끌게 된 배경이 어디에 있는지 붙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궁극의 리스트>에서는 적절한 자료를 인용하여 주제어를 설명하고 인용한 자료의 해당부분을 병치하여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미의 역사> 역시 같은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미에 대한 개념의 역사적 변천을 설명하는 본문 가까이에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미학적 개념을 담고 있는 인용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개념을 담고 있는 인용문을 소개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어, 독자의 입장에서는 해당 개념에 대한 저자의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남는 것 같습니다. <궁극의 리스트>에서도 언급을 했던 것 같습니다만, 본문의 내용을 뒷받침할만한 예술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해당 작품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생략되어 있고 제작자와 작품 이름 그리고 소장자에 대한 정보만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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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뒷골목 수프가게
존 고든 지음, 김소정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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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조직관리에 관한 노하우를 전하는 책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집필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제목 같습니다. 저자의 생각이 완벽하게 담긴 원제목 <SOUP: A Recipe to Nourish Your Team and Culture>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하겠습니다. 자기계발로 되어 있는 책분류 역시 조직관리로 해두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뉴욕에 관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책을 고른 저 역시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 줄로 정리해보면 맛있는 수프는 좋은 재료만으로 끓여지는 것이 아니라 끓이는 사람의 노하우, 우리말로 하면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팥죽을 끓여보신 경험이 있는 분은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좋은 팥과 잘 만든 새알심을 넣어서 팥죽을 끓이는데 중요한 것은 팥죽이 완성될 때까지 잘 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젓지 않으면 팥죽이 눌어붙기 마련입니다. 조직관리 역시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수프 끓이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좋은 인재들로 구성된 조직이라고 하더라도 조직원들 간의 사랑과 소통이 원활한, 에너지가 넘치는 조직문화가 없다면 결국은 와해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계발서나 조직관리에 관한 책을 보면 저자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핵심요령을 간추려 제시하고 그 내용을 설명해가는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입니다만, 이 책은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조연으로 나오는 컨설턴트가 꼬투리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핵심을 짚어주고 주인공이 이를 자신의 회사에 적용하여 성과를 보인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말은 될지 모릅니다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직관리의 기본원칙은 같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몇 평짜리 수프가게에서 얻은 팁을 흔들리고 있는 굴지의 수프제조회사, 느낌 같아서는 캠벨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를 살리는 묘방으로 써먹을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선입견일까요?

 

어떻든 식품업계의 우상이었던 수프 사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고 하는데, 마케팅도 문제가 없고 광고도 문제가 없는데 오로지 독성이 잔뜩 낀 공기에 점령당해서 악화일로를 걷고 있고, 회사경영의 경험이 전무한 마케팅팀장 낸시가 회사를 구하는 잔 다르크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설정도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전문지가 수프사의 잔 다르크가 어떤 완벽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성공 확률은 0에 가깝다는 전망을 내놓은 상황에서 낸시가 뒷골목 수프가게에서 얻어들은 처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랑으로 냄비젓기, 2. 희망으로 이끌기, 3. 비전 전파하기, 4. 신뢰감 쌓기, 5. 소통으로 관계의 공백 채우기, 6. 언제나 솔직하기, 7. 참여하는 관계 만들기, 8. 영감과 격려, 권한 분산, 지도 넣기, 9. 감사하기, 10. 열정으로 뜨겁게 하기, 11. 하나 되는 통합 창출하기. 사실 이런 처방들은 평상시 조직관리 기술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와해직전의 조직을 구하는 처방으로 사용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에는 수프사의 이사들처럼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 보아도, 저자가 제시하는 이런 방법들은 평상시 조직관리의 팁으로 활용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뉴욕 뒷골목에 있다는 그 <엄마가 끓이는 수프>라는 가게는 진짜 있나요? 우리나라에서도 어머니의 손맛을 강조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만, 미국에서는 어머니보다는 할머니를 선호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제조비법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는 것처럼 잘 나가는 식당에서 수프 맛이 좋다면서 맛있는 수프를 만드는 비결을 알고 싶다는 손님을 선뜻 주방으로 모시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책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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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다 - 가톨릭 신부이자 선 마이스터, 위대한 영적 스승이 전하는 내 안의 신을 만나는 길
빌리기스 예거 지음, 양태자 옮김 / 이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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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종교와 과학의 논리가 대치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과학의 논리에 마음이 더 기울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응용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의학을 전공한 탓도 있겠고 종교와는 거리를 두어온 때문일 것입니다. 광대한 우주의 시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생물 종의 존재를 진화라는 과학적 원리로 설명이 가능해지면서 창조론은 빛을 잃어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 쌓아올린 성 안에서 무한하게 확산되고 있는 과학과의 교류를 금하고 있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 종교는 입지가 좁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베네딕도회 빌리기스 예거 신부의 <파도가 바다다>를 읽으면서 신선한 충격과 함께 그래도 깨트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거신부는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 관상에 몰두하고 있는데, 특히 일본의 가마쿠라 선방에서 선 수행을 경험하면서 동서양의 다양한 신비주의 전통에 통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비주의적 전통을 현대적인 세계관과 결합하여 잠든 인간 의식을 깨우고 꽃피우자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자는 신의 존재와 죽음의 의미 등을 지금까지 발전해온 과학적 성과와 연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파도가 바다다>는 예거 신부가 독일복음주의교회의 연구지도관이자 철학자, 그리고 유명한 출판사 헤더에서 스펙트럼 시리즈를 편집하고 있는 크리스토프 크바르흐와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원저를 우리말로 옮긴이가 붙여놓은 풍부한 주석은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신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의 개념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은 창조자로서 본체적으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의 존재와 비존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관점에서 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과 세상, 정신과 물질, 존재와 비존재는 결코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다.(20쪽)” 그리하여 저자는 신이란 저 멀리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의 될 수 있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불교에서 말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불교, 흰두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바탕으로 종교 간의 화합을 시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규정하고 있는 인간의 본질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복합적이고 생화학적인 세포구조와 조직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지성은 정신세계의 특정한 표명이고 뇌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물질적으로 응고되고 농축된 존재입니다.(75쪽)” 저자는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는 결국은 부처와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체험을 형식 안에 끼워 넣어 제도화시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신의 죽었다’라고 주장했던 니체의 해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도달해야 할 ‘저쪽세계’는 사실 없습니다.(161쪽)”라는 그의 말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시간을 배치해 설립한 신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은 살아 움직이는 진화의 과정”이라고 하면서도 명상훈련을 통하여 영성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명상훈련에는 기도 뿐 만이 아니라 명상춤, 활쏘기, 태극권 등 수련법 나아가 일상생활을 통하여 영성적 욕구를 성취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치유의 기적을 가져오는 기도의 영향력을 해석하는 것 역시 기도를 들은 신이나 성모 마리아, 혹은 천사가 하늘에서 즉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에너지 영역을 일으키는 하나의 방편으로 해석하는 것도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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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이진숙님은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의 사진예술 부문을 이야기하면서 “오늘날에는 모든 것들이, 결국 사진에 찍히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 버렸다.(위대한 미술책, 382쪽)”라는 수전 손택의 암울한 진단을 인용하였습니다. 1839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이 발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화가 폴 들라로슈는 “오늘로 회화는 죽었다.”라고 통탄했다고 합니다. 진동선님이 <사진예술의 풍경들; http://blog.joins.com/yang412/13251174>에서 폴 들라로슈의 한탄으로부터 1970년 테오도와 아도르노, 그리고 2000년 더글라스 크림프의 말까지를 종합하여, “결국 미술이라고 하는 불멸의 시각예술의 얼굴을 없앤 주인공은 사진이고, 미술을 하나의 모습으로 있지 못하게 한 것도 사진이고, 미술을 옛 모습으로 자리할 수 없게 만든 것도 사진이다. 예술이 끝없이 그 모습을 바꾸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사진인 셈이다.(사진예술의 풍경들, 7쪽)”라고 사진예술을 자리매김하고 한 것과는 상당한 의미의 괴리가 있어 보입니다.

 

사진예술의 발전과정을 잘 정리한 책들이 없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진숙님이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와 <타인의 고통>을 추천한 이유는 아마도 저자생각이 손택과 공명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끊임없이 소비를 부추기면서 전진해온 자본주의 체제가 줄곧 사진의 무한한 이미지 생산 능력과 공존해 왔다(위대한 미술책, 384쪽)”라는 손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진은 풍요롭고, 낭비를 일삼으며, 만족할 줄 모르는 사회의 본질적인 예술”이라고 단정하는데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택은 사진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 잘 못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손택은 ‘사진도 회화나 데생처럼 이 세계를 해석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또한 여행 중에 사진을 찍는 행동에 관해서도, ‘사진은 경험을 증명해주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경험을 거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26쪽)’라고 합니다. 여행 중 마주치는 것들은 앞뒤 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대는 것으로 자신의 경험을 확증하려고 할 뿐,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진은 메멘토 모리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애처로운 감정을 자아내는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 스마트폰에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동생이 찍은 어머님 사진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이 사진은 폰에서 지워버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저자가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었습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야만적인 식민전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한국 전쟁은 자유 진영이 소련과 중국에 맞서 벌이는 투쟁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이런 특성을 감안할 때 무제한적으로 화력을 퍼붓는 미군의 잔인함을 사진에 담는다는 것은 부적절한 행위라고 여겨졌다.(41쪽)” 탱크를 앞세운 기습공격으로 국군을 괴멸시키면서 단숨에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북한이나, 변변한 무기도 쥐어주지 않고 전선으로 몰아넣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의 반인륜적 행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사진에 관하여>는 저자가 197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다이안 아버스의 회고전을 보고서 사진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로 생각하고서 1973년부터 1977년까지 「뉴욕타임스 서평」에 발표한 여섯 편의 에세이가 바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20세기의 주요 기록 매체인 사진의 본성에 관하여 그동안 제기된 적이 없는 질문들을 던졌다는 데서 찬사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정리한다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또 다른 각도에서 확인시켜주기를 바라는 독자의 바람과는 달리 저자는 서로 상반된 주장, 인용, 자료들을 태연하게 병치하여 독자들을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 불편하다는 비판으로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재원님의 번역으로 소개된 <사진에 관하여>도 번역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독자들도 있었습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읽고 이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던 점이라든가, 이진숙님께서 <위대한 미술책>에서 읽어보아야 할 책으로 꼽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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