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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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님은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에서 수전 손택을 사진예술분야의 대표적 저술가로 지목했습니다.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일은 세상과 만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라고 서문에 적은 것처럼 어쩌면 저자의 생각이 손택과 공명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진숙님은 수전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 http://blog.joins.com/yang412/13505861>가 ‘사진이 어떻게 근대적 시각을 만들어 갔는가, 또 자본주의 사회와 공모했는가?’에 천착하고 있다면, <타인의 고통>은 ‘어떻게 사진이 전쟁 미학을 위해 복무하게 되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진숙님의 이러한 시각이 불편하시다면 1826년 최초의 사진으로부터 현대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사진예술의 발전과정을 뒤쫓고 있는 진동선님의 <사진예술의 풍경들; http://blog.joins.com/yang412/13251174>을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위대한 미술책>에서 소개를 받은 ‘꼬리를 무는 책읽기’로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북소리]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로버트 베번의 <집단 기억의 파괴; http://blog.joins.com/yang412/13514470>와 함께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사진에 관하여>처럼 사진을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만, 9․11사건 이후에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지전쟁과 테러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담고 있습니다. 포르노그래피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테러와 같이 잔혹한 상황을 담은 사진 역시 중독성이 있어서 반복될수록 시시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과대학생들의 해부학실습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에는 해부학실습실이 옥상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컴컴하고 우중충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부실습을 시작하는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습니다. 과거에는 실습 첫날 졸도한 학생도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주고받으면서 우리 반에서도 그런 사람이 나올까 내기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습이 끝날 무렵에는 이미 무거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실습시험을 앞두고는 밤늦게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시험을 준비하느라 무섭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손택은 일생동안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를 일관되고 추적했으며,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베트남전쟁이 한참 진행되던 1966년에 <파르티잔 리뷰>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대량학살 위에 세워졌다’, ‘미국적 삶의 특성은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향한 모독이다’, ‘백인은 역사의 암이다’와 같은 날선 구절로 미국의 은폐된 역사와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 등을 폭로했다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서 저자는 전쟁과 테러로 점철되고 있는 지구촌에서 끝 모를 잔혹함을 보이는 인간들로 인한 연민이라는 알리바이를 페르소나로 하여 타인의 고통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하여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압도될 만큼 엄청나고 굉장한 상황)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14쪽)”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저자가 <타인의 고통>에서 인용하고 있는 자료들은 중세에서 현대까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만, 저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은 보스니아 내전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발칸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보스니아내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대규모학살이 벌어진 치명적 전쟁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탈퇴로 촉발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과정에서 정작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장소는 힘없는 보스니아였습니다. 보스니아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그리고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보스니아의 독립선언이 계기가 되어 유고연방의 전 지역에 걸쳐 서로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모두 27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2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전쟁이었는데, UN은 전쟁 초기에 군사개입을 주저하였을 뿐 아니라 3만 명이나 투입된 평화유지군의 역할 역시 미미해서 휴전과 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는 것입니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잔악한 행위는 사진에 담겨 외부에 알려졌는데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던 것은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도 않으며, 자국의 지도자들이 이 전쟁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153쪽)’이었다고 합니다.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로 싸우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고 한다면 강 건너 불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로버트 베번은 세르비아군이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대규모 포격이 있고서야 유엔과 유럽연합 그리고 서구 언론은 이를 세계의 집단건축유산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포격을 멈출 것을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고 적었습니다. 발칸반도의 이슬람 유산파괴에 상대적으로 미온했던 것에 비하면, 이 도시에 들어서 있는 후기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들이 서구 시청자들의 눈에 친숙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먼 곳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와 전쟁을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과거에는 사진, 더 이전에는 그림 등을 통해서 그 끔찍한 현장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46쪽)’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즉 ‘카메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말 그대로 렌즈 앞에 놓인 그 무엇인가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사진은 사라져 간 과거와 떠나 간 사람을 추억케 해주는 데 있어 그 어떤 그림보다도 탁월했다.’라는 것입니다. 카메라 이전에 그림으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걸작으로 저자는 자크칼로의 『전쟁의 비참함과 불운(1633년)』와 고야의 『전쟁의 참화(1820년)』를 꼽고 있습니다. 자크칼로는 1630년대 초 로렌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대가 민간에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18장의 동판화로 제작하였으며, 고야는 1808년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봉기한 스페인에 진주한 나폴레옹의 군인들이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83장의 동판화로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전쟁 사진이 태어난 최초의 전쟁은 크림전쟁(1853~1856)이었습니다. 로저 팬턴은 영국정부가 파견한 이 전쟁의 ‘공식’ 사진작가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인쇄매체들이 영국군이 겪고 있던 위험과 결핍을 부각시키고 있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쟁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사진기술상의 문제에 더하여 정부의 이런 요구가 있어 사진작가의 연출에 따라 포즈를 취한 장병들의 모습만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터의 참상이 사진에 처음 담은 것은 영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세포이 반란(1857~1858)에 참전한 펠리체 베아토였습니다. 인도 군인들의 도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영국군의 승리를 찬양한 것이지만 영국군의 포격으로 산산조각이 난 럭나우의 시칸다바그궁전의 안마당이 반란자들의 뼈로 뒤덮여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은 것입니다. 전쟁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사진에 담기 시작한 것은 남북전쟁(1861~1865)에 참전한 매튜 브래디가 이끌던 북부의 사진작가들이었습니다. 분명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진들을 찍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리는 기록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다”라고 말한 것도 브래디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의 사진들, 심지어 걸작이라고 칭송을 받는 것들까지도 대부분 연출되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점령한 이오섬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유명한 사진 역시 시간이 지난 뒤에 더 큰 성조기로 재현하도록 해서 찍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오섬은 우리식으로는 유황도라고 읽어 유명한 섬입니다. 전쟁사진들이 연출되지 않은 채 찍히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부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손탁은 “이 점이야말로 한 세대의 의식에 아로새겨지게 된 이미지들이 지닌 도덕적 진정성의 핵심이다.(90쪽)”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사진작가들이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적 성실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 배경에는 텔레비전이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매체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사진작가들은 텔레비전 스태프들과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연출된 장면이 사진에 담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 사례로 저자는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학살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올 초에 갔던 캄보디아의 왓트마이 사원에서 희생자들의 유골과 함께 전시하고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417431). 사진에 찍혀 있는 희생자들은 마치 저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손택 역시 이 사진들에 대하여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으며,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직전에 처해 있고, 영원히 학대받고 있다.(96쪽)”라며 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을 찍은 사람과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셈으로 정말 구역질나는 경험이었다고 했습니다.

 

전쟁터의 참상을 어떻게 전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사(戰史)를 통하여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습니다. 죽은 자들을 전장에 효수하는 일이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군의 사기를 떨어트린다고 해석하지만 때로는 적이 복수의 칼을 가는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전쟁터와 후방의 개념이 모호해서 전쟁 지휘부가 고민하는 대중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미묘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피해자의 가족들에게는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는 이미지들이 지나치게 구체적이거나 메스꺼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야드바셈,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그리고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관>과 같은 전쟁 기념관들이 집단학살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자료들이 기록한 범죄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고 재현될 수는 있지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함께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집단의 기억으로 전해질 수는 있겠습니다만, 사진이야 말로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정신으로 챙겨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135쪽)”라고 지적하는 것처럼 사진 이외의 형태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퇴색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하겠습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작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쟁에 매혹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있을까?(178쪽)”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줘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도록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저자는 의외로 전장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캐나다의 사진작가 제프 윌이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어진 전쟁을 주제로 스튜디오에서 찍은 『죽은 군대는 말한다(1992년)』를 반전(反戰)의 이미지로 인용하였습니다. 전장에서 죽어 쓰러져 있는 병사는 말하지 않지만,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말한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뭔가를 고발하는 듯한 이미지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사진 속의 병사들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려 말을 거는 듯한 상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이 어떤지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결국 사진은 우리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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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뇌는 착각에 빠질까 - 뇌과학이 들려주는 속임수의 원리
스티븐 매크닉 & 수사나 마르티네스 콘데 지음, 오혜경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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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여기 있던 사람이 ‘펑’하고 사라지거나, 사람이 들어가 있는 상자에 칼을 푹푹 찔러대도 갇혀 있는 사람은 웃고 있는, 그런 마술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언제가 그런 마술의 원리를 설명하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쉽게 버릴 수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손 안에 없던 동전이 갑자기 나타난다거나, 텅빈 모자 속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등, 그런 마술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착각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뇌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인데, 신경과학을 연구한다는 제가 마술과 사람의 뇌가 나타낼 수 있는 착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기만 합니다. <왜 뇌는 착각에 빠질까>를 읽으면서 속상하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진즉 착안했더라면 나도 이런 책을 써낼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뇌과학이 들려주는 속임수의 원리’라는 부제가 의미하는 것처럼 마술의 원리를 뇌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보는 카드 마술, 동전 마술, 배니싱 마술 등이 어떤 트릭으로 이루어지는지, 또 우리 뇌가 어떤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트릭이 먹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전문마술사 조직에 가입할 때 마술의 비밀을 일반인에게 폭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폭로보다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마술사의 테크닉을 배우고 그들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하자는 연구를 통해서 인간의 마음이 속임수에 그토록 취약한지 근본적인 수준에서 설명해보려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가 주의를 기울이는 고유한 방식이 속임수를 가능하게 하며, 뇌가 우리를 그렇게 속여야 인간이 뇌의 자원을 더 알뜰하게 이용하고 더 잘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훌륭한 과학자일수록 속이기가 쉽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정직하고, 마술사가 어디까지 치사해질 수 있는지 모르며, 고의적인 기만에 대비하는 훈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술사는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사회적 조종기술을 현란하게 구사해서 주의, 기억, 인과추론과 같은 매우 정교한 인지과정을 통제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나온 책들은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해치우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문자를 보내기, 편지를 쓰면서 트위터 하기처럼 말입니다. 이미 운전하면서 통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처럼 멀티태스킹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잘못된 통념이라고 저자들은 잘라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데이비드 맥레이니의 <착각의 심리학; http://blog.joins.com/yang412/12899785>에서 ‘인지적 편견’, ‘발견적 학습’ 그리고 ‘논리적 오류’의 주제에 속하는 모두 서른아홉 꼭지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카드 마술, 동전 마술, 배니싱 마술 등 다양한 마술 39가지가 성립하는데 필요한 뇌의 착각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일어나는지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숫자의 일치에 불과하였을까요? 저자들은 대부분의 심리학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고릴라 인식게임과 같이 유명한 심리실험들의 결과를 통하여 우리 뇌가 작동하는 기전을 설명하고 그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 마술의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술사들이 자신의 비법을 공개하는 것이 뇌과학분야에서 새로운 발견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발견된 부주의맹이나 변화맹은 인지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고 하였는데, 마술사들이 설계하는 트릭을 바탕으로 판단해볼 때, 마술사들은 분명 이러한 현상을 수 세기 동안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현대마술에서 보는 대부분의 기술은 19세기 이전의 마술사들이 개발한 것으로 현대 마술사들은 그저 동일한 원리의 트릭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온 것에 불과하다기 때문입니다. 결국 마술사들이 발견한 것을 일찍 뇌과학자들이 알았더라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은 마술사가 어떻게 우리 뇌를 해킹하는지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그와 동일한 인지트릭이 광고전략, 기업협상, 기타 다양한 대인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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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래
데이비드 와인버거 지음, 이진원 옮김 / 리더스북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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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체격이나 운동능력만을 고려하면 인간보다 월등한 생명체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가 지구별에서 최우세종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개체가 습득한 지식을 후세에 전달하는 방식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여타 생명체들도 언어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발성기관의 진화로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게된 것이 첫 번째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보조장치에도 불구하고 찰나에 머무는 것이 언어의 단점입니다. 그래도 자식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주로 언어를 통해서 전달되는 지식의 양은 대를 이어가면서 확대되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하여 집단으로 확산되어 집단의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집단을 떠나 홀로 생존하게 되는 인간은 인류가 남긴 어떠한 지식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 지식은 유전을 통하여 후대에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은 물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하여 후세에 전달되는 것으로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com/yang412/12583563>에서 제안한 밈(meme)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류가 공유의 개념을 통하여 축적하는 지식의 양이 한 단계 발전하게 된 계기는 문자의 발명일 것입니다. 먹을 것을 따라 떠돌면서 수렵과 채취를 통하여 먹거리를 해결하던 시절에도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하기 위하여 표시를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비옥한 초승달지역에 정착하여 채취경제에서 농업경제로 전환하면서 잉여농산물의 유통이 가능해졌고, 그 과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문자와 그 문자를 기록하는 수단을 발명한 것입니다. 점토판에 돌에 나무쪽에 기록된 문자들은 정보의 정확성을 높이고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인류가 보유하는 정보의 양과 질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종이의 발명입니다. 종이가 발명되면서 인류에게 유용한 정보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책이라는 행태로 유통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활자의 발명은 책의 유통량을 늘리는데 기여하였으며, 여기에 더하여 인쇄술의 발전은 정보의 유통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이미 인류가 쌓아올린 정보의 양은 어느 개인이 종합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자산업의 발전은 정보의 저장 공간을 획기적으로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보의 보존기간 역시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개발된 인터넷을 통하여 정보의 유통의 범위가 무한대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류는 새로운 지식의 축적이라는 과제에 더하여 이렇게 쌓아올린 지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안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지식의 인프라가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식의 형태와 본질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하게 될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데이비드 와인버거의 <지식의 미래>는 인류의 지식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정리하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 산하 ‘인터넷과 사회 연구소’인 버크만 센터(Berkman Center)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는 저자는 인터넷이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이 책의 원제목 <Too Big Too Know>는 정보산업의 발전으로 정보가 넘쳐흐르는 현실에 걸맞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은 다 알기에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지식의 네트워크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대로 전 세계는 빠르고 복잡하게 연결되고 있는 네트워크로 인하여 좁아지고 있습니다.

 

과거 특출난 천재에 의하여 주도되던 기술의 개발은 이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어떻게 엮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가에 따라서 성과의 수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일러 집단지성효과라고도 하는데, 집단지성이란 ‘다수의 개체들이 서로 협력 혹은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적 능력에 의한 결과로 얻어진 집단적 능력을 말한다’라고 위키백과사전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중지(衆智, 대중의 지혜)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제대로 평가받기에 이른 것입니다. 집단지성이 적용되어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는 앞서 인용한 위키백과를 비롯하여 크라우드 소싱, 그리고 오픈 소스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만든 리눅스의 예가 있습니다. 이처럼 집단지성이 긍정적 효과를 불러온 경우도 있지만, 구성원에 따라서 정보의 정확성이나 산출물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과 참여자들의 협동을 총괄하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 특정 세력의 선동이나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전문가들의 영역이었던 지식이 일반화, 대중화되면서 지식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인터넷은 소문, 험담, 거짓말이 무편집 상태로 뒤섞여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면서 생겨난 복합적인 두려움 속에서 위기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전제한 저자는 ‘지식의 위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터넷은 우리의 관심을 쪼개놓고, 천천히 오랫동안 숙고하지 못하게 막는다. (…) 네트워크의 발달은 어떤 멍청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 떠들어댈 수 있도록 큰 확성기를 제공했다. 그래서 우리는 온라인에 일종의 반향실(反響室)을 만들어 사실상 방송 시대에 접했던 것보다 더 우리의 사고의 폭을 좁게 가두고 있다. 구글은 우리의 기억력을 저하시키고 멍청하게 만든다. 인터넷은 열정적인 혹은 광신적인 아마추어들을 중심에 세우고 전문가들을 몰아낸다. 인터넷은 짐승 같은 인간들의 부상, 표절주의자들의 승리, 문화의 종말을 불러왔다. 그리고 진실을 오로지 올라간 손가락 숫자로, 지혜는 클릭 횟수로, 지식은 가장 재미있게 믿을 수 있는 것에 따라 판단하는 멍한 표정의 자위 행위자들이 거주하는 어둠의 시대의 발단이 되었다.(13쪽)”

 

이처럼 지식의 위기시대의 해결방안은 결국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네트워크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지식의 미래>는 그와 같은 똑똑한 방을 만들어줄 수 있는 네트워크를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가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모두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된 책의 전반부는 지식 과부하시대에 전문가의 영역이 파괴되고 있는 등 문제점들을 설명합니다. 이어서 지식을 둘러싼 과학의 본질 그리고 사고와 추론의 형식이나 지식이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설명하고 마지막 제9장에서는 지식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요약해보면, 인류는 역사적으로 항상 정보의 과부하를 겪어왔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도서관에는 수십만 개의 두루마리로 된 양피지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최근에서야 과부하를 논의하게 된 것은 정보를 여과하는 기능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과부하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터넷이라고 하는 무한정의 정보유통체계는 다양한 모습의 정보를 담아낼 수 있는 반면 서로 일치하지 않은 정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때로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전통적인 매체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자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학자와 훈련받은 언론인들과 같은 강도로 떠들어내는 것을 불평한다.(132쪽)” 과거의 지식 전달매체는 때로는 전략상의 이유로 정보를 감추기도 하였던 것인데, 이제는 그런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전문가 집단마저도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해서 비전문가들을 혼란 속에 빠트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2008년 광우병파동에서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답을 구한 저자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정리해냈습니다. 첫째, 모든 지식과 경험은 해석이 중요하다. 둘째, 해석은 사회적이다. 셋째, 특권적 지위는 없다. 넷째, 해석은 담론 가운데 존재한다. 다섯째, 담론 내에서는 몇 가지 해석들이 특권을 갖는다.(167~168쪽) 이러한 저자의 생각은 인터넷 지식미디어가 이용자의 집중력과 사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다고 주장하는 니컬러스 카의 생각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혁명과 인간 사고의 확장, 그리고 인터넷의 발달이 인간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정리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86966>에서 니컬러스 카는 오늘날 많은 문명화 질병이 과거의 생활방식과 현대의 생활발식 사이의 부조화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미디어가 진화와 신경생물학적 부분에서 우리의 정신적 프로세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니컬러스 카 지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19쪽, 청림출판, 2011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카의 주장에 대하여 저자는 지식의 네트워크화는 카가 주장하는 장문 형식의 사고가 지식과 지식 내에서 하는 역할과 성격에 몇 가지 근본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권위는 더 이상 차지할 자리가 없다는 것, 주제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하이퍼링크가 매혹적인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다는 것 등입니다. 특히 전자책에서 하이퍼링크를 통해서 필요한 지식을 바로 찾아들어갈 수 있는 것이 강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이퍼링크를 뒤쫓다보면 정작 본문을 읽어가는 호흡이 끊어져 가고자 하는 방향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맞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지식을 둘러싼 과학의 본질이 변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과학이 대중과 충돌을 보이는 상황은 그동안 과학적 사실에 대하여 완고하던 믿음이 무너진 결과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전 <플레이보이지> 모델 제니 맥카시가 백신에 의한 자폐증 위험을 강조하는 활동을 해온 것에 대하여 그녀의 무지로 인하여 자폐증을 피하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 병에 걸려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생길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백신과 자폐증이 무관하다는 것이 정통의학계의 일관된 입장이지만, 맥카시의 잘못된 믿음의 출발점 역시 백시과 자폐증이 연관을 가질 수 있다는 의문을 제기한 의학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제니 매카시 지음, 예방접종이 자폐를 부른다, 알마 펴냄, 2011년; http://blog.joins.com/yang412/12171623)을 고려한다면 <네이처>의 사설대로 과학자들끼리 한바탕 붙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토론의 장으로 나선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위기에 봉착했다고 주장하는 지식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저사는 인터넷에 넘쳐나는 정보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첫째, 데이터가 풍부하다. 둘째, 더 많은 정보들이 하이퍼링크로 연결되어 있다. 셋째, 따로 허락을 받지 않고 이용할 수 있다. 넷째, 공개적이다. 다섯째, 궁극적으로는 해결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지식을 과연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에 대하여 저자는 인류의 기술혁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해결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인터넷이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담겨 있는 도전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식 네트워킹을 위기에서 축복으로 만드는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하였습니다. 첫째, 접근을 개방하라, 둘째, 지능을 연결해줄 고리를 제공하라, 셋째, 모든 것을 연결하라, 넷째, 기관의 지식을 뒤에 남기지 마라, 다섯째,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 등입니다. 이런 제안이 나오게 된 것은 네트워크화된 지식이 우리를 지식에 대한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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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정원 - 제4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박혜영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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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입니다. 읽어가면서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은 최근에 개봉된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 때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먹으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마담 프루스트가 그녀의 정원에서 키우는 작물을 먹으면 과거의 상처와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는 영화입니다. 작품의 무대가 되고 있는 동해안 어느 곳에 있는 유서 깊은 고택이라는 점과 등장인물 사이에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가 드러나면서부터는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도 연상이 되었던 것도 기시감을 더해주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제가 살아온 날들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대여섯살 무렵 들판에 고립되어 있는 마을에 살던 저는 직직거리는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 4.19혁명과 5.16군사혁명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시작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유신철폐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읽을 적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소설은 프루스트적으로 시작합니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있던 화자가 고향집 노관에 돌아오면서 본 풍경은 이렇습니다. “노관의 기와지붕 물매 사이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뒤 언덕의 능선은 노란 복숭아 색으로 칠해지다가 어스름으로 경계를 지워나갔다. 나는 붓 끝에서 어둠이 묻어날 때까지 길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7쪽)” 커다란 세밀화를 그리듯 꼼꼼하게 사물을 묘사하는 프루스트와는 달리 한 폭의 작은 수채화를 그리듯 간결하게 그렸지만 화자의 고향집이 절로 눈앞에 떠오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서 “불을 켰을 때 안채 대청에는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쇠난로에 불을 피우자 낡은 연통의 이음새로 파란 연기가 새어나왔다. 데워진 공기는 대청마루의 들보 위를 돌아 바닥으로 내려왔다. 의자를 잇대어 길게 누우니 몸이 녹으면서 눈이 절로 감겼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화자의 동복누이가 되는 이안이 시간여행을 예언한 것처럼 말입니다.

 

소설의 곳곳에 숨어있는 소품들, 예를 들면 영화 <벤허>와 <엔드리스 러브>, 라디오 드라마 <저 눈밭에 사슴이>, 동화 <소공녀>, <알프스 소녀 하이디>, <어린 왕자>, <백설공주> 등은 제목 뿐 아니라 개략적인 내용도 기억이 날 듯합니다. 그만큼 책읽기에 몰입할 수 있는 요소들이 풍부하다고 할까요? 다만 60년대에서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세월을 한권분량으로 압축하다보니 책 읽는 이로 하여금 추정하도록 맡겨두는 부분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할머니-아버지-율이 삼촌-어머니-김경수의 죽음이 이어지면서 노관집 사람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간관계는 시체말로 막장 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작가께서는 어머니와 율이 삼촌 그리고 화자를 중심으로 현학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막장 드라마라고 할 이야기를 지적이고 교양이 넘치는 비극적 스토리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야 노관에 돌아온 율이 삼촌이 대학에 자리를 잡은 뒤에 고향집에 초대한 시인 손상기교수는 마르셀을 작가의 길로 인도하는 베르고트씨처럼 화자를 시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율이삼촌과 어머니 사이에 얽혀있는 오랜 비밀을 드러내는 역할을 맡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요와 이안을 연결하는 가족관계에 더하여 김경수라는 공통분모를 더하는 역할까지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47쪽에 달하는 이안의 편지는 세월의 흐름을 시사한다는 점 이외에도 화자와의 관계에 얽혀 있는 비밀을 고리를 암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안이 열여섯 살이 되는 날 백설공주 처럼 백 년 동안 잠에 빠질 것이라고 알리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러니 형제여, 잠에서 다시 깨어날 때까지 안녕(198쪽)’이라고 작별을 고하고 있어 이들이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상상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인간관계의 비밀을 만들어낸 어머니의 기구한 삶이 가능할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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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 - 이별과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는 법
안 앙설렝 슈창베르제 & 에블린 비손 죄프루아 지음, 허봉금 옮김 / 민음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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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49재를 모셨습니다. 발인하는 날이나 삼우제를 치루는 날도 그러더니 49제를 모시 동안에도 한바탕 비가 내렸습니다. 생전에 정리하지 못하신 무엇이 남아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의를 주관하시는 스님께서 눈물을 흘리거나 곡을 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누르고 있는 자식들의 슬픔을 하늘이 대신 나타내주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선친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제의를 주관하신 스님으로부터 유족들이 지나치게 슬퍼하면 영가께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제의는 근세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연종(蓮宗)의 인광대사(1862~1940)는「임종삼대요(臨終三大要)」에서 ‘절대로 임종인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움직이지 말고 또한 곡(哭)을 하지 말며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할 것’이라 했고, 남산율종(南山律宗)의 홍일대사(1880~1942)는 「인생의 최후」에서 ‘임종전후에 가족들은 곡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곡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조념염불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 망인에게 실익이 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박병규 옮김, <왕생극락의 지름길>에서).

 

불교의 이런 입장을 타이완대학의 陳錫琦교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헤어지고 죽음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도 도움이 필요하다. (…) 먼저, 잠시 비통함을 참도록 인도한다. 떠날 사람 앞에서 지나친 슬픔을 표현하면 미련 때문에 편하게 최후를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어 사후 8시간까지는 시체를 만지지 않도록 인도한다. 청정한 환경을 유지하여 죽은 사람을 어지럽히지 않고 바른 생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임기운 등 지음, 죽음학 153쪽; http://blog.joins.com/yang412/12919367)” 불교의 이런 관념은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 죽은 이의 극락왕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네 장례습속에는 장례는 물론 삼년상에 이르기까지, 망인에 대한 지극한 애달픔을 호곡(號哭)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곡비(哭婢)로 하여금 크게 울도록 했다고도 합니다. 일부러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조성한 장례식장의 분위기를 통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의 죄의식이나 망자를 애도하는 슬픈 감정이 녹아내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입니다. 상실에 관한 연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상실수업; http://blog.joins.com/yang412/9264552>에서 ‘왜 애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로 잘 애도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으며, 둘째로 슬픔은 마음과 영혼 그리고 정신의 치유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 사람이 보이는 반응은 부정, 분노, 타협, 절망 그리고 수용의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퀴블러 로스는 이 다섯 단계가 상실과 함께 삶 속에서 배우게 될 것을 모아놓은 하나의 틀로서, 상실로 느끼게 되는 감정들을 선명하게 구별해주는 도구이지만, 각 단계가 순서대로 지나쳐야 하는 슬픔의 정거장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다섯 단계를 전부 겪거나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부정에서 수용에 이르기까지의 기간도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49재를 마쳐서 공식적으로는 어머님과 작별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가슴에 먹먹한 느낌이 자리하곤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심리학자 안 앙설렝 슈창베르제와 에블린 비손 죄프루아가 같이 쓴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를 읽게 되었을 것입니다. 저자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이별이었기에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고통을 가슴에 품고 오랫동안 ‘살아오는’ 실수를 했기에 그러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왔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상을 당한 사람을 위한 치유 의식’에 대한 글을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충분히 애도하고 난 후에야 고인은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게 된다. 하지만 슬픔이 우리를 파괴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보살펴야 한다.(17쪽)”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하게 되면 심리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거나, 위험한 행동을 해서 상처를 입는 등,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집중이 되지 않고 불안하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장례식에 가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별의 순간에 했어야 했던 일을 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을 때 비탄에 빠진 남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 남자는 형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음껏 울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맺혀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죽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죽음에서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저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고 그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방법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정신적 고통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신체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즉 몸이 느끼는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병으로 나타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생활 중에 겪는 스트레스 자가진단표’를 이용하여 몸이 알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조처를 취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 확실한 단 한 사람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늘상 자신을 돌보고 에너지가 넘치도록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살인사건과 관련된 상실에서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특별한 애도작업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2000년에 호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무장한 청년 3명이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한 청년을 살해하고서 감옥에 갔습니다. 1년이 지났지만 죽은 청년의 어머니는 슬픔을 삭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죽은 청년의 여자친구 역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범인들을 감옥에 보내는 처벌을 하였지만 범인들과 피해자 양쪽 모두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 호주경찰은 마오리족의 전통방식을 따라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참여하는 ‘리얼 저스티스’라는 비공식적 협의회를 만들어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피해자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을 화장한 재를 넣은 가방을 범인의 무릎에 올려놓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어쩌면 감옥에 갇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영원히 절망의 감옥에 갇혀서 아들 때문에 울고 있어야 하는 형벌을 받은 나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101쪽)”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제야 범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깨닫고 피해자의 어머니와 약혼녀에게 깊은 참회의 마음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후  청년의 어머니와 약혼자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오리족의 방식은 ‘처벌하느냐 처벌하지 않느냐’는 이원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제한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와는 달리 ‘회복적 정의’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나쁜 행동은 엄격하게 통제할 것을 권장하지만 사람을 통제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애도를 피하는 사람들의 사례도 소개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앞만 보며 달리고 성공하는 법만 배웠을 뿐 감정을 다스리고 깊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109쪽)” 애도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슬픔에 대하여 언급을 피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리는 사람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가 하면 죽은 사람을 절대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면 맞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죽은 사람의 방과 물건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인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려는 일념으로 일체의 애도작업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고 말하지. 아니야,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 나는 애도를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다 아내를 잊으면 어떡하겠어.(117쪽)”라고 말하는 남자가 바로 이런 형에 해당합니다. 그런가 하면 애써 슬픔을 달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저자들이 인용하는 예를 보면, “(이혼한 경우나 작은 사고를 당하고 난 뒤에) 터무니없는 위자료를 요구하고, ‘작은 보상’ 내지는 ‘자그마한 보답’이라며 스스로에게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제공한다.(112쪽)”

 

국립타이완사범대학교의 李佩怡박사는 사별하고 남은 사람들이 슬픔을 조절하는 방법과 또 그들을 돕는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임기운 등 지음, 죽음학 251-270쪽). 먼저 육체적, 심리적 영역에서 건강한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하여야 하며, 종교의 도움을 받거나 가족, 친지 혹은 전문가 등, 사회적 차원에서 도움을 얻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들을 돕는 데는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 사별자가 자신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다. 둘째, 사별자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고 표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고인이 없는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넷째, 사별자가 고인에 대해 정서적으로 재정립하도록 돕는다. 다섯째, 슬퍼할 시간을 준다. 여섯째, 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이해해 준다. 일곱째, 개인적 차이를 인정한다. 여덟째, 지속적으로 지지를 제공한다. 아홉째, 당사자의 방어기제를 찾아 대응형식으로 바꾸어 준다. 열째, 복합적 비탄반응에 대해 이해하고 전문가를 소개해준다.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진 세월호 침몰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은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사고가 안전관리체계와 재난구조체계이 총체적으로 무너진 결과 일어난 것이라면,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자숙하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이미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한 시점에서도 피해자를 수습하기 위하여 투입된 구조요원들의 희생이 생기고,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도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유족들은 국민들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사고경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 임명을 포함한 다양한 요구를 반영한 특별법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거리로 나섰습니다. 어쩌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분들은 언제쯤 고인들과 아름다운 작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될 수 있을지 역시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드러내지 않은 속셈을 채우기 위하여 이들을 제2의 희생자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차마 울지 못한 당신을 위하여>의 저자들이 내놓은 해답에서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반드시 화해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용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용서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분한 마음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복수하고 싶은 욕망이나 증오심, 원한, 반감과 같은 마음이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인 기운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런 정신 상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고 우리가 마음속에 지녔던 부정적인 기운을 상대방에게 돌려보낸다(143-144쪽).” 그래서 용서는 아주 매혹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천년을 이어갈 것 같던 로마제국도 멸망했고, 그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도 무너져 내리고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상실로 인한 슬픔도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엷어지면서 잊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애도가 끝나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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