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소도시 여행 - 예술가들이 사랑한 마을을 걷다
박정은 글 사진 / 시공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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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한다는 김별님은 SNS을 마케팅에 활용하자는 사내방침에 따라 트위터 계정을 만든 것이 계기가 되어 소셜을 화두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던 것이 스페인을 세 차례 찾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나온 책이 <스페인을 여행하는 세 가지 방법; >입니다. 내용을 보면 영국여행사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가이드와 함께 전용버스로 움직이는 단체여행이 있고, 카우치서핑과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자유여행,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공정여행이라는 생소한 방식입니다.

 

단체여행과 자유여행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사 상품으로 단체로 여행하는 경우에는 잘 짜여진 일정에 따라서 움직이기 때문에 입장권이 필요한 곳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도착하면 바로 입장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빡빡하게 짜인 일정 때문에 원하는 장소에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점이 단점입니다. 자유여행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되겠지요. 얼마 전에 다녀온 스페인 여행이 그랬습니다. 12박 13일 동안 19곳을 방문하다 보니 정신이 없는 가운데 방문지에 대하여 미리 공부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동하는 중간에 조형진 가이드의 해박하고 잘 요약된 설명을 들으면서 볼거리를 미리 챙겨볼 수 있었지만, 때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는 책을 만났습니다. 스페인 여행기를 준비하면서 찾게 된 여행작가 박정은님의 <스페인 소도시 여행>입니다. 프롤로그를 보면 출판사의 기획으로 책을 쓰기 위한 목적의 여행이었던 만큼 방문지에 대한 자료를 모아 정리하고 여행에서 느낀 점을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내용이 쉽게 읽히고 이해되는 것을 보면 출판사에서 여행을 의뢰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번 여행을 통하여 스페인의 크고 작은 마을 서른한 곳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스물한 곳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물한 곳이 스페인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한 번에 모두 돌아보는 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해서, 기획하신 분이나 저자의 의욕이 지나쳤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에 담긴 곳들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 그리고 대도시라 할지라도 그곳을 찾았을 때 막상 놓치게 되는 예술가나 작품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사실 여행사 상품은 다양한 장소를 엮고 있지만, 볼거리가 많은 대도시의 경우라도 대표적인 장소 한 두 곳만을 찍고 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여행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책을 읽는 내내 방문한 도시에서 꼭 보아야 할 곳들을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감상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셀로나, 몬세라트, 그라나다, 론다, 세비야, 톨레도, 마드리드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어 제가 준비하고 있는 스페인여행기에서 인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해외여행에 나서겠습니다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맛집에 꽂히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지에서 유명한 음식을 먹어보는 것은 당연히 여행에서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자 역시 방문지에서 빠트리면 아쉬울 관광명소에 대한 느낌에 이어 음식문화를 두 번째 포인트로 둔 것 같습니다. 풍부한 사진을 곁들여 관광지와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일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유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하여 여행 메모란에는 대중교통으로 접근하는 방법, 주요 관광자원, 식당 그리고 숙소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스크 지방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까지 찾아간 것은 대단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의 스페인 여정에서는 스페인의 북부지방은 완전히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이 있었는데, 나중에 산티아고 가는 길을 따라 걸어볼 요량을 하고 있어 그때 방문해보려고 합니다. 김별님은 스페인으로 가면서도 ‘왜 스페인이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그냥 가보고 싶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굳이 ’꽃보다 할배‘가 아니었더라도 스페인은 제일 먼저 가보고 싶었다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그냥 그곳 사람들이 따뜻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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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가겠다 - 우리가 젊음이라 부르는 책들
김탁환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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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작가님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라 할 만합니다. 소설을 그리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닌 저도 <혁명>을 비롯해서 읽어본 그의 작품만 해도 몇 가지나 됩니다. 이번에 나온 <읽어보겠다>의 서문에서 저자는 라디오에 관한 추억을 한 자락 펼쳐놓고 있습니다. 저 역시 라디오를 끼고 살았던 세대입니다만, <쌍뻬의 어린 시절>에서 “라디오와 더불어 나는 멀리 도망칠 수도, 꿈을 꿀 수도, 다른 것을 생각할 수도, 몇몇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라디오가 나를 구원해주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6쪽)”라는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김작가님 역시 그랬던 모양입니다. 저도 라디오 대담프로에 몇 년을 나가보았습니다만,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방송시간에 맞추어 대본을 모두 써가지고 가야 마음이 놓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김작가님은 대본도 없어 15분 동안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무려 5년 동안이나 말입니다. 15분이 아주 짧을 것 같습니다만, 혼자서 이야기를 한다면 만만한 시간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처럼 방송에서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내놓은 책이 바로 <읽어보겠다>라고 합니다. 젊음에 잘 어울릴 것 같은 23편의 소설을 마치 방송에서 다루듯이 깊이 천착해보겠다는 것이 이 책의 기획의도라고 합니다. 이 소설들의 특징은 ‘열망’과 ‘덧없음’이라고 합니다. 결국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책읽기가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것들까지 포함해도 여섯 편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밑천이 들통나는 것도 잠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작가님께서 좋은 작품들을 소개해주셨구나, 또 제가 읽은 작품들은 어떻게 보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책읽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마치 청취자들에게 작품의 중요한 논점을 조곤조곤 들려주듯이 글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읽힐 뿐 아니라 느낌이 잘 맺어지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한 대목을 직접 인용해서 들려준 다음 그 대목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 정리하고 있는데, 물론 간혹 읽기를 멈추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저자의 설명에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읽으면서 영화 <살아한다면 이들처럼>에서 뜨거운 사랑의 절정에서 여자 주인공이 갑자기 자살하는 대목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행복의 정점에서 생을 마감함으로서 사랑이 깨졌을 때 당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결정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은 정리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공감하는 분위기로 느꼈습니다. 저는 <미 비포 유>를 떠올렸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안락사를 선택하는 남자 주인공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주장을 대하게 되면 그들은 정말 사랑한 것이 맞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고 누구에겐가 보여주기 위한 사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존 버거의 소설집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책읽기를 멈추었습니다. 이 작품에 실린 「리스본」에서 존 버거는 엄마를 리스본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리스본에서 나를 기다렸냐”라고 묻는 존 버거에게 엄마는 “리스본에는 전차가 다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정말 리스본에는 100년 된 전차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고색창연한 나무로 된 전차도 있었구요. 그리고 존 버거는 전차의 위층 맨 앞자리에 않고 싶어했다고 하는데, 모퉁이를 돌 때 불꽃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스본의 전체가 2층으로 되어있었던 것 같지는 않구요. 맨 앞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불꽃이 날리는 것을 볼 수 있는지도 분명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23편이 작품들 모두 주옥같다고 하겠습니다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품들 가운에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만큼은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작가가 치매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삶을 관조하듯 써내려갔다고 해서 말입니다. 어머니의 임종 직후에 관하여 ”그 주 내내 아무 데서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벌어졌다. 잠에서 깨어나다가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내곤 했다.(99쪽)“ 그렇습니다. 평소에 퇴근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곤 했기 때문에 지금도 퇴근하다가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드는 제 버릇이 바로 이 책을 꼭 읽어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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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석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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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반 동아리에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유로의 도피>로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1941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을 기억한지는 아주 오래되었지만, 막상 읽어보기는 처음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지금 자유로운가?’, ‘언제부터 자유로웠는가?’하는 질문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보편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저자가 ‘자유’를 화두로 삼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1941년에 나온 초판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이 아직 완결하지 못한 근대인의 성격구조에 대한, 그리고 심리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의 상호작용이라는 문제에 대한 연구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대중들과 공유에 나선 것은 개인성과 인격의 독자성이라는 근대 문화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새롭게 등장한 전체주의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65년판 서문에서는 이 책이 “중세 사회의 붕괴로 생겨난 인간의 불안이라는 현상을 분석한 책”이라고 했습니다. “중세 사회에서는 많은 위험이 존재했지만, 인간은 그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꼈다. 수백 년 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인간은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물질적 부를 쌓아올리는데 성공했다. 인간은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했고, 최근에는 전체주의의 새로운 책동에 맞서 자신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인은 아직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불안한 인간은 온갖 부류의 독재자들에게 자신의 자유를 넘겨주거나, 스스로 기계의 작은 톱니가 되어 호의호식하지만,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되고 실은 유혹에 사로잡히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프롬의 이와 같은 예견이 과연 반세기가 지난 지금 맞아떨어지고 있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프롬은 프로이트 등에 의하여 전개된 심리학을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의 차원에 적용하는 사회심리학적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만합니다. 그는 먼저 자유의 의미와 중세로부터 종교개혁을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자유가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근대 유럽과 미국의 역사는 인간을 속박해온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줌심으로 전개되어왔다고 했습니다. 오랜 투쟁 끝에 자유를 얻어내고 이에 따라 지켜야 할 특권도 얻어내게 되었는데, 어느 시점에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억압에 맞서 싸우던 계급들이 자유의 적의 편에 서게 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프롬은 자유의 궁극적인 승리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보았습니다. 민주주의는 강화되어 낡은 군주정치를 대치하게 되었던 것인데, 이런 결과를 부정하는 새로운 흐름이 등장한 것입니다.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체제는 사람들이 얻어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인간의 사회적, 새인적 생활 전반을 사실상 지배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체제의 본질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권위에 복종하기에 이르렀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5장 도피의 메커니즘에서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을 관찰하여 얻은 결과가 집단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데 적용될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하여 단호하게 긍정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보면, 당시만 해도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프롬은 스스로 향유해야 할 자유를 포기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일어나는 원인으로 인간이 개체적 자아에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타인이 가진 권위에 기대려는 경향으로 생기는 피학적-가학적 충동을 들었습니다. 이로서 개인은 고독감과 허무감으로부터 탈피하는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학-피학성과 혼동하기 쉬운 파괴성은 분명 구분되는 개념으로 역시 무력감과 외로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전으로 자동인형적 순응을 들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피하기 위하여 그에 순응하는 길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애써 얻은 자유로 인하여 오히려 고독감과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이로부터 탈피하기 위하여 타인과의 유대를 맺기 위한 방편으로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 기전을 통하여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역설적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계문명의 발전이 극에 이르고 있는 현대에 들어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는 사회적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사람들과의 유대를 맺기 위하여 꼭 자신의 자유를 속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적합한 답이 무엇인지 더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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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닿는 거리, 17년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 지음, 서민아 옮김, Ensee(최미경) 일러스트 / 놀(다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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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두 장소 간의 가장 먼 거리다’라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말을 발견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이야기하는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구분하는 작은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합니다. 2011년 10월의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애나라는 이름의 여성이(몇 살인지는 밝히지 않았네요. 다만 ‘우리 사이에는 16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라는 구절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열여섯 살 된 베넷이라는 청년(?)에게 편지를 전합니다. 여성은 청년을 아는 것 같은데 청년은 여성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순간을 위하여 몇 년을 고민했던 터라 이제는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나는 또 다시 그가 그립다.(12쪽)’라는 애나의 심정은 이야기 전체의 맥을 흩어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들었습니다.

 

시간여행의 고전 <백투더 퓨처>에서 <시간여행자의 아내> 등, 그 결과가 항상 해피앤딩이었던 것만은 아니지만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어쩌면 당장 해볼 수 없는 판타지에 머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해 말 방영되어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별에서 온 그대>의 경우는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내용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시간여행에 초능력까지 보태서 판타지에 살인사건이라는 미스터리까지 더했던 것이 인기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타마라 아일랜드 스톤의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은 시간여행자의 사랑을 그린 청소년소설입니다. 사랑이라는 예쁜 감정이 싹이 트고, 한창 감수성이 많은 십대 후반에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시간여행이라는 초능력이 사랑에 보탬이 될지 아니면 제약이 될지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젊은 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시간여행을 다루는 이야기에서는 흥미를 더하기 위하여 시간여행에 제약을 두고 주인공들이 그 제약을 깨야하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이야기에 굴곡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6년을 거슬러 올라간 1995년 3월부터 시작합니다.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 살고 있는 여주인공 애나는 크로스컨트리 선수입니다. 집근처 노스웨스턴 대학의 트랙에서 훈련을 하던 애나는눈쌓인 스탠드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는 청년을 발견하는데, 다음 순간 청년은 사라지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앉았던 흔적은 있지만 이동한 흔적은 없는 미스터리한 상황을 맞습니다. 이날 애나의 학급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전학생이 새로 옵니다. 아침에 트랙에서 만났던 바로 그 청년, 베넷입니다. 그런데 베넷은 애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공원에서 편두통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베넷을 발견하게 되고, 아버지의 책방에서 강도를 만나게 된 애나를 베넷이 구해주는 과정에서 베넷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베넷은 자신의 정체를 애나에게 고백하면서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간여행에는 제약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가는 경우 자신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등장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왜곡된다는 개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도 또 중요한 제약은 시간여행자가 과거의 사건에 개입하는 것인데, 시간여행을 통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저지하려는 노력을 그린 스티븐 킹의 소설 <11/22/63: http://blog.joins.com/yang412/12956549>에서는 과거를 왜곡시키려는 시간여행자의 시도를 저지하려는 무형의 힘이 작용한다고 설정하기도 합니다.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에서는 절친의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가자는 애나의 강력한 요구를 베넷이 거절하지 못한데서 두 사람의 관계에 왜곡이 생기게 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펼쳐보기에 부담스러운 부피입니다만, 단숨에 읽어갈 정도로 흡입력이 뛰어난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해 여름방학이 시작할 무렵 애나에게 찾아온 행운으로 얻는 멕시코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하여 방문한 멕시코의 어느 바닷가에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두 사람은 왜 헤어져야 했고,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만, 시간여행의 비밀을 푼다는 즐거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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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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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다녀온 스페인-모로코-포르투갈-스페인을 연결하는 여행에서 방문한 리스본 -포르투갈에는 리스보아라고 한답니다- 에 머문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처음 열었던 포르투갈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세비야를 떠난 지 10여분 만에 타호강을 건너 리스본에 들어갔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1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리스본 시내에 머문 시간이 몇 시간에 불과했던 탓에 호시우광장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벨렘탑과 바스코 다가마를 기리는 대항해탑을 거쳐 성 제로니모 수도원을 돌아본 것이 전부입니다. 리스본의 속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를 필명으로 하는 페터 비에리(Peter Bieri)는 1944년 스위스 베른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런던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 고전언어학, 인도학, 영어학을 전공했는데,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인지’ 및 ‘뇌’ 분야를 연구하면서 ‘철학적 심리학’,‘인식론’,‘윤리학’ 등에 관심을 두었다고 합니다. 독일 마부르크대학교의 철학사 교수를 거쳐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언어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학계에는 본명으로 저술한 「자유 논고―‘개인 의지의 발견에 대하여’」가 널리 알려져 있고, <페를만의 침묵(1995)>, <피아노 조율사(1998)>, <리스본 행 야간열차(2004)>, <레아(2007)> 등의 소설이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카네이션혁명의 싹이 움트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저는 다양한 이슈를 발견했습니다. 600여 쪽에 가까운 긴 내용을 읽어가는 과정은 일종의 직소퍼즐 맞추기와 보물찾기입니다. <디 자이트>의 오토 에이 뵈머는 “프라두의 족적을 따라 사유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사유의 바깥쪽에는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고 결론짓는다.”라고 하면서, “이것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일종의 ‘의식의 추리물’이다(585쪽)”라고 이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였습니다.

 

책을 읽다가 처음 부딪치는 의문은 바로 일탈입니다. 이마누엘 칸트만큼이나 정확하고 자신이 맡고 있는 고전문헌학 수업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지금까지 살아온 스위스의 베른을 떠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찾아가기로 한 것은 분명 일탈일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이 ‘여행은 이탈이다’라고 한 것(김용옥 지음, 앙코르와트 월남 가다, 통나무 펴냄, 2005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43663)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에서 떠나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일탈’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바꾸어놓은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똑같이 시작됐다.(10쪽)”면서도 출근길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미지의 포르투갈 여성과 조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이 저로서는 공감되지 않는 점입니다. 첫 장면에 등장한 이 여성은 끝내 모습을 다시 드러내지 않고 있어 더욱 그렇습니다.

 

57세가 된 그레고리우스는 왜 그녀와의 만남에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장악해야 하겠다는 인식이 들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는데 학생들을 교실에 버려두고 키르헨펠트 다리로 돌아간 것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다리를 떠나 들른 에스파냐 책방에서 여학생이 살까 망설이던 책을 집어 드는데,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쓴 <언어의 연금술사>입니다. 책방 주인은 이 책의 서문을 번역해서 그레고리우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체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27쪽)” 이 책을 사겠다는 고레고리우스에게 책방 주인은 선물로 줍니다. 결국 그레고리우스의 일탈은 우연히 만난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이름 없는 포르투갈 여자, 빛바랜 포르투갈 귀족이 쓴 책,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 때문에 한겨울에 리스본으로 도망치는 사람은 없다.(41쪽)’라고 하면서도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으로 가는 기차편을 알아보고 짐을 싸고 맙니다. 교장선생 앞으로 편지 한 장 달랑 보내는 것이 마무리의 전부입니다. 그 편지에 인용된,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44쪽)”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한 구절이 그의 심리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결정은 오래전에 페르시아의 이스파한으로 가려던 꿈을 접어야 했던 아픔이 무의식 속에남아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우연의 연속입니다. 밤 산책길에서 몸집이 큰 남자와 부딪치면서 안경이 부서지고, 다음 날 아침에 본 유혹적인 햇살이 그의 발길을 붙들었다고 적었습니다. “빛나는 광채는 지나간 모든 것을 아주 낯설고 거의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고, 과거의 그림자를 모두 지워버릴 정도로 눈부셨다.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떠나는 것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었다.(82쪽)” 기차에서 만난 실우베이라가 연결해준 마리아니 에사는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삶을 조명하는 일에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프라두는 그레고리우스의 바람대로 리스본에 머무는 이유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연줄을 타고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얻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프라두의 삶의 흔적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게 됩니다. 마치 직소퍼즐처럼 말입니다.

 

이쯤해서 두 번째 의문을 만나게 됩니다. 은퇴한 책방주인 코우팅뉴노인은 프라두은 인기가 좋고 존경받는 의사였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인간백정이라고 부르던 비밀경찰 후이 루이스 멩지스의 목숨을 구한 다음에는 사람들로부터 기피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진료소 옆에 쓰러진 멩지스를 사람들이 진료실에 들어다 놓았을 때, 프라두는 잠시 멩지스를 내려다 본 다음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하고 강심제를 투여해서 소생시켰습니다. 프라두 역시 고문과 살인과 국민에 대한 잔인한 억압의 책임자라고 짐작하는 멩지스를 그냥 죽게 내버려두고 싶은 욕망과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었지만 의사의 사명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배신자’라고 외치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나는 의사요’라고 변명하듯 말합니다. 그리고 ‘그자는 살인자요!’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그는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인간이에요.(240쪽)’라고 또렷하게 말합니다. 대중의 시각에서 보면 프라두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간 한 인간에 대한 복수이며 앞으로 일어날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정의를 방해한 셈입니다. 하지만 프라도의 입장에서는 의사로서 구할 수 있는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프라두의 의사로서의 확고한 윤리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라두는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되면서 저항운동에 몸을 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생명에 대한 프라두의 일관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라두는 학창시절 절친했던 조르지와 마리아나 에사의 외삼촌 주앙 에사 등과 함께 하는 비밀결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모임은 대단한 기억력을 가진 에스테파니아 에스피노자가 주도하는 문맹자를 위한 학습모임형태를 가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멩지스의 부하가 이곳에 나타나고 단원 중 한 명이 체포됩니다. 에스테파니아와 연인관계에 있던 조르지는 그녀를 죽여서 단원 모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프라두는 그녀를 스페인으로 탈출시키는 대안을 마련합니다. 조르지의 주장을 읽으면서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com/yang412/11902444>에서 논한 철길에서 일하는 사람을 구하는 문제를 떠올렸습니다. 조르지는 센델의 논리대로 사랑하는 연인을 희생시켜서라도 단원들을 구하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우선 생각하는데 반하여 프라두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탈출시키는 대안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역시 생명을 중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을 다시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행적을 뒤쫓는 과정에서 <언어의 연금술사> 이외에도 그가 남긴 많은 글을 읽게 됩니다. 그 가운데는 스승인 바르톨로메우 신부가 건네준 프라두의 졸업식 연설문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쓴 연설문의 제목은 ‘신의 말씀에 대한 경외와 혐오’입니다. 프라두는 “마비시킬 듯한 그들의 잔혹한 군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도, 그들이 고양이나 비겁한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거리로 숨어들어 번쩍이는 칼날로 등 뒤에서 희생자의 가슴까지 꿰뚫어도.....설교단에서는 이런 무뢰한을 용서하고 더구나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일 가운데 하나다.(216쪽)”라며 무능한 교회를 통박하였습니다. 독재자의 잔혹함에 대한 프라두의 혐오는 아버지에게로 연장되고 있습니다. 프라두의 아버지는 대법원의 판사였는데, 독재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범법자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아버지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에게 남긴 편지에 “점점 더 너는 나에게 왜 아직도 법복을 입고 있냐고, 독재의 잔인함에 왜 눈을 감고 있냐고 비난하는 독선적인 판사처럼 보였다.(386쪽)”라고 적고 있는 것을 보면 프라두의 아버지 역시 나름대로의 고통을 안고 살아왔고, 결국은 사퇴청원을 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합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넌 나 때문에 의사가 되었지. 네가 내 고통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너에게 빚이 많구나. 내 고통이 여전하고, 내 저항이 이제 무너지는 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389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아버지가 판사직을 유지한 것도 나름대로 저항하는 길을 모색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프라두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에 그가 남긴 글을 책으로 묶은 것은 같이 살던 누이동생 아드리아나였습니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서문에서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나는 이것을 극복해야 할 단점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27쪽)’라고 한 것처럼 프라두가 포르투갈어를 다듬는 글쓰기를 했다는 점을 저자는 넌지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라두의 또 다른 누이동생 멜로디는 프라두가 잘못된 단어의 독재와 올바른 단어의 자유, 유치한 말 때문에 생기는 보이지 않는 감옥과 시의 광채에 대하여 말하곤 했기에, 그의 영혼이 언어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연금술사>에서 다양한 단어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영원한 젊음. 젊은 시절 우리는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산다. 죽을 운명이라는 인식은 종이로 만든 느슨한 끈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어 피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300쪽)”

 

‘여행은 이탈이다’라고 한 도올 김용옥이 새로운 체험의 획득이 없다면 그 이탈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전제한 것처럼 우리의 그레고리우스 역시 삶의 궤도에서 이탈해서 리스본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언어의 의미를 추구한 프라두의 족적을 뒤쫓으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현기증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베른으로 돌아옵니다만 언젠가는 리스본을 다시 찾을 것 같습니다.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즉 그냥 떠나는 것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인식, 즉 깨달음이 절대적이죠.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해주는 인식작용 말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생을 그래도 살아갈 것인지, 그게 정말 원하는 것인지 자문하는거요.(5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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