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윤복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단체로 관람하는 내내 다른 친구들 몰래 눈물을 감추느라 꺽꺽 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내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상상도 해보면서 그렇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깜찍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대구가 배경이 된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현대의 미국 어느 지방도시가 배경이 되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주인공이 남자 어린이와 여자 어린이로 각각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어느 날 아빠가 25센트짜리 동전꾸러미 세 개와 1달러짜리 지폐만 가득한 마요네즈 통만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고물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열한 살짜리 소녀가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아들과 딸을 재울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 잡을 뛰어가며 정신없이 일하는 엄마가 아빠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켜주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조지아는 몇 일째 샤워를 못해서 떡진 머리와 몸에서 나는 냄새를 친구들이 눈치 채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아빠와 엄마를 원망하면서 해결하라고 졸라대는 철부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가 졸지에 직장에서 해고되자 자신이 나서서 집세를 마련할 길을 모색하는 깜찍한 면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잣집 개를 훔쳤다가 돌려주고 사례금을 받는 별로 권장하지 못할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순진한 남동생을 범행에 끌어들이는, 사회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할 언니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짓까지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개를 훔치는 전체 과정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단계별로 처리해야 할 상황을 목록으로 만들어 검토하는 것을 보면 조지아는 꽤나 주도면밀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남동생까지도 범행에 끌어들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때로 부모가 생각하지 못하는 면모를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장기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은 반발심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조지아의 범행모의가 잠시 생각에 그치는 정도였다거나, 아니면 산뜻하게 성공했더라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우선은 거리 하나를 소유한 부자로 생각했던 개주인이 사례금조차 마련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훔친 개를 숨겨둔 장소에 낯선 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이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을 원치 않은 작가께서 구원투수를 투입한 셈입니다. 구원투수는 경찰이나 개주인에게 조지아의 범행사실을 알리기보다는, 조지아가 저지른 일이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우회적으로 교훈을 주기까지 합니다. 사회의 어른으로서 본받을만한 점이 많은 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와 마무리는 책을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번역의 차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옮긴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266쪽)”라는 <안나 까레리나>의 첫구절을 소개했는데, 연진희님이 옮긴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이 더 실감이 나는지는 읽는 분들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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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바바라 오코너 지음, 신선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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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윤복 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단체로 관람하는 내내 다른 친구들 몰래 눈물을 감추느라 꺽꺽 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몰린 주인공이 그래도 살아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내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상상도 해보면서 그렇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깜찍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의 대구가 배경이 된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현대의 미국 어느 지방도시가 배경이 되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시대와 문화가 다르고 주인공이 남자 어린이와 여자 어린이로 각각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든 어느 날 아빠가 25센트짜리 동전꾸러미 세 개와 1달러짜리 지폐만 가득한 마요네즈 통만 남기고 사라지는 바람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고물차에서 잠을 자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열한 살짜리 소녀가 당신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린 아들과 딸을 재울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서 투 잡을 뛰어가며 정신없이 일하는 엄마가 아빠처럼 도망가지 않고 지켜주고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조지아는 몇 일째 샤워를 못해서 떡진 머리와 몸에서 나는 냄새를 친구들이 눈치 채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아빠와 엄마를 원망하면서 해결하라고 졸라대는 철부지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엄마가 졸지에 직장에서 해고되자 자신이 나서서 집세를 마련할 길을 모색하는 깜찍한 면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잣집 개를 훔쳤다가 돌려주고 사례금을 받는 별로 권장하지 못할 방법을 생각해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순진한 남동생을 범행에 끌어들이는, 사회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할 언니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짓까지 저지르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부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개를 훔치는 전체 과정을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단계별로 처리해야 할 상황을 목록으로 만들어 검토하는 것을 보면 조지아는 꽤나 주도면밀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남동생까지도 범행에 끌어들이는 바람직하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그리고보면 우리의 아이들은 때로 부모가 생각하지 못하는 면모를 보일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장기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은 반발심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조지아의 범행모의가 잠시 생각에 그치는 정도였다거나, 아니면 산뜻하게 성공했더라면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러 가지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우선은 거리 하나를 소유한 부자로 생각했던 개주인이 사례금조차 마련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훔친 개를 숨겨둔 장소에 낯선 이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이 나쁜 길로 빠져드는 것을 원치 않은 작가께서 구원투수를 투입한 셈입니다. 구원투수는 경찰이나 개주인에게 조지아의 범행사실을 알리기보다는, 조지아가 저지른 일이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우회적으로 교훈을 주기까지 합니다. 사회의 어른으로서 본받을만한 점이 많은 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와 마무리는 책을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번역의 차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옮긴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266쪽)”라는 <안나 까레리나>의 첫구절을 소개했는데, 연진희님이 옮긴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이 더 실감이 나는지는 읽는 분들마다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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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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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부산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일을 마치면 바람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평소와는 달리, 국제시장 좁은 골목길에 있는 어묵집에서 유부전골을 먹고 광복동으로 가서 씨앗호떡을 먹고 작은 카페에서 꿀자몽을 먹는 등, 여유를 가지기로 하였습니다. 세밑이 가까워진 탓인지 국제시장이나 광복동거리에도 오가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처음 가보는 국제시장에서는 다양한 생활용품이나 구제품을 정말 싼 가격으로 팔고 있었고, 광복동 거리는 휘황찬란한 전등으로 장식되어 있어 벌써 연말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흔히 걷는다고 하면 복잡한 도시의 거리를 떠나 한적한 시골길을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소요자’라는 별명을 얻은 발터 벤야민은 한가로이 거리를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소요(逍遙)는 공원과 같이 자연 속을 걷는 산책(散策)과는 달리 도시의 거리를 걷는 것을 말합니다. 이날 우리는 빛과 연말분위기로 넘쳐나는 광복동 거리를 ‘소요(逍遙)’했습니다. <걷기예찬; http://blog.joins.com/yang412/12935107>에서 “도시 안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은 혹시 뭔가 유별한 것이 눈에 띄지 않나 싶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숲속을 지나가듯이 길을 걷는다.(192쪽)”라고 적었던 다비드 르 브르통처럼 가게에서 파는 물건이나 빛의 장식은 물론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두루 구경하면서 천천히 걸었습니다.

 

거리의 구경거리 앞에 붙들리는 단순한 구경꾼과는 달리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와 군중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요소들을 서로 중첩시켜가면서 생각하였고, 종국에는 그 가치를 전복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도시의 거리를 즐겨 소요한 벤야민처럼 많은 철학자들이 걸으면서 사유하기를 즐겼기에 ‘걷기’를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 같습니다. 걸으면서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지, 또 걷기를 즐겨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본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 걷기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소개하려고 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파리12대학과 파리정치연구소의 정치철학 담당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셸 푸코를 연구해왔다고 합니다.

 

‘걷는 것은 스포츠가 아니다’라는 첫 글부터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자는 ‘걷는 사람은 자기가 무슨 길을 걸어왔는지, 어느 산책길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지, 어떤 곶(岬)에서 내려다본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얘기한다.’라고 하면서 ‘느리게 가는 데 걷는 것만큼 좋은 건 일찍이 없었다(10쪽)’라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산책을 마치고는 ‘오늘은 시간이 얼마나 걸렸나’하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체중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걷기를 시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집근처 산책길을 벗어나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걸을 때에는 주변을 살펴보는 여유를 가지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책을 살펴볼까요? 모두 스물일곱 꼭지의 글을 담았습니다. 그 가운데 열하나는 비트 제너레이션, 프리드리히 니체, 아르튀르 랭보, 장 자크 루소 등 걷기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글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도시의 소요자’ 발터 벤야민은 대도시 파리의 아케이드를 소재로 자본주의와 모더니티의 근원에 대하여 탐구한 미완의 대작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남길 정도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도시를 천착하였습니다. 벤야민이 고독과 속도, 투기욕 그리고 소비 등 자본주의가 도시에 남긴 문제점을 짚어냈다면, 저자는 도시를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군중들은 서로의 무관심 속에서 고독이 깊어지는데, 소요하는 사람은 도시의 군중 속으로 숨어들면서 관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익명의 대중으로부터 분리해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오직 빨리 가기만을 원하는 군중들이 정신줄을 놓고 있는 것과는 달리 소요하는 사람은 자기 몸의 속도를 늦춤으로서 정신이 보다 많을 것을 생각하도록 만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통해서 저자는 산책의 의미를 정리합니다. “산책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일과 작별하는 것이다. 책과 서류를 그냥 놓아두고 나가는 것이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걷는 사람의 몸은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가고, 정신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즉 한가하다고 느낀다.(237쪽)”라고 정의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네 집 쪽으로 1;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에서 프루스트는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 두 개의 산책길을 소개합니다. 사실 그 책을 두 번 읽었지만 ‘두 개의 산책길이 마르셀에게는 다른 느낌을 남겼구나’ 정도로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프레데리크 그로는 두 개의 산책길이 어린 마르셀에게는 두 개의 완벽하게 다른 세계였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산책은 하나의 완전한 정체성이자 얼굴이며 인격이기 때문이다. (…) 오솔길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어린아이는 조약돌의 모양과 나무들의 윤곽, 꽃향기 등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234쪽)”라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로는 어린아이들의 몽상적인 성향, 상상력이 풍부한 성향을 어른들의 현실적 객관성과 대립시켜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마르셀이 홍차에 찍어먹는 마들렌과자의 촉감으로부터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서, 프루스트 역시 어른의 시각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남습니다. 그래도 프루스트가 어린 마르셀의 눈에 비치는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의 산책길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다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걷기에 대한 그로의 생각 가운데 ‘느림’의 의미를 새겨보기로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느림;  http://blog.joins.com/yang412/12858261>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걷기’야 말로 느림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피에르 쌍소는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쫓겨 몰리는 법 없이 오히려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피에르 쌍소 지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41쪽, 동문선, 2000년; http://blog.joins.com/yang412/12264918) 그런데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는 시간을 충분히 차지하되 느릿느릿 차지하는 일이며, 삶의 의욕을 꺾는 현대의 그 절대적인 필요성들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다.”라고 해서 쿤데라와 쌍소를 절묘하게 배합한 느낌을 받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 느리게 걷는 즐거움 62쪽, 북라이프,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499319).

그러면 느리게 걷는 비법이 따로 있을까요? ‘한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에 놓기’라는 단순해 보이는 걷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걷는 사람에게 있어 느림이란 빠름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로는 “잘 걷지 못하는 사람은 이따금 속도를 내어 빨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곧 걸음을 늦춘다. 그의 움직임은 단속적(斷續的)이며, 두 다리는 파각(破角)을 만들어낸다.(58쪽)” 그리하여 ‘느림은 무엇보다도 조급함의 반대’라고 정의하면서 느리게 걷는 비결은 우선 발걸음이 보여주는 극도의 규칙성이자 일률성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잘 걷는 사람이 이 정도로 걸으면 미끄러져 간다고 말해도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마이클 잭슨이 <스릴러>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문워크처럼 보인다는 것이겠지요? 저자는 천천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천히 걸어야 할 날들은 무척 길다. 이런 날들은 걷는 사람을 더 오래 살게 만든다. 매 시간을, 매분을, 매초를 억지로 서로 잇고 가득 채우는 대신에 그것들이 숨을 내쉬도록, 더욱 심오해지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59쪽)” 느리게 걷기, 즉 느리게 산다는 것은 장수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걷기는 활동의 조건이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니체의 걷기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는 책 사이에서, 책에 자극을 받아 비로소 사상으로 더듬어 가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문밖에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걸으면서, 뛰면서, 오르면서, 춤추면서, 우리는 즐겨 적막한 산이나 바닷가의 길을 사색하며 걷는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비극의 탄생/즐거운 지식 409쪽, 366. 어떤 한문적인 책을 앞에 놓고, 동서문화사, 2009년; http://blog.joins.com/yang412/13023753)”라는 구절을 인용한 저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고 그것만을 토대로 하여 자기 책을 썼으며, 너무나 많은 책들이 도서관의 곰팡내를 풍긴다.(33쪽)”라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즉 남의 생각을 베낀 책은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책을 가지고 써낸 책들을 인용문으로 포식하고 주석을 과식해서 ‘뚱뚱한 거위’처럼 무겁고 뚱뚱해서 느리고 권태롭게 읽힌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북소리]의 독자 여러분께서도 크게 공감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갑자기 키보드 치는 손길을 머뭇거리게 됩니다.

 

1879년 9월에 쓴 편지에서 니체는 “겨우 몇 줄만 빼놓고 전부가 다 길을 걷는 도중에 생각났으며, 여섯 권의 공책에 연필로 휘갈겨 썼다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저자가 니체의 걷기를 인용한 뜻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유럽 남부의 도시들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야외를 걸으며 생각을 가다듬어 책을 구상하였던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뚱뚱한 거위 같은 책을 쓰는 저자들과는 달리 ‘걸으면서 구상하는 사람은 얽매인 데가 없어 자유롭고, 다른 책의 노예가 되지도 않고 확인 때문에 둔해지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사유에 의해 무거워지지 않는다.(35쪽)’라고 걷기의 장점을 설파하였습니다. 곧 시작할 스페인 여행기에서 지나친 인용보다는 여행을 통하여 제가 느낀 것을 중점적으로 소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인용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글머리를 열어 자신이 생각하는 길로 읽는 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꼭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저 또한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거나 새로운 글 꼭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경험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써야 할 글이 있을 때 자연스럽게 산책에 나서는 습관이 생긴 것은 딱히 칸트나 니체의 영향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스페인 여행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 눈뜨게 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눈 아래 보이는 것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다 보면 그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된다. 낑낑대며 암벽 위로 기어 올라가 거기 앉아보라. 드넓은 전망이, 광활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때 느껴지는 도취감을 느껴보아야 한다.(87쪽)” 그런데 낑낑대며 암벽 위로 올라가는 수고조차 아끼는 여행자들도 적지 않으며, 암벽 위로 올라간 다음에 바로 인증샷을 찍고 뒤돌아서는 여행자들도 많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을 볼 때서야 그곳에서의 무엇을 느꼈던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은 사진에 압축된 광활한 풍경을 재대로 풀어낼 수 있도록 꼼꼼히 뜯어보는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인증샷에 자신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행자에게 전망은 아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증샷으로 찍은 사진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잘 찍은 그곳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자신의 모습을 포토샵으로 집어넣으면 될 일입니다.

 

뚱뚱한 거위 같은 책쓰기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 걷기에 관하여 다양한 인용문을 챙기고 있어 걷기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걷기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이라면 책읽기를 마치면 바로 걷기에 나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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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특별한 음악태교 - 피아니스트 엄마의
이노경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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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소아청소년과 개원의사회에서는 3․3․3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나도 3자녀를 낳고, 자녀도 3자녀를 낳고, 손자도 3자녀를 낳아서, 3배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자”하는 내용입니다.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노인인구가 많아지는 현상이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고용불안과 육아비용이 가파르게 늘고 있어 결혼적령기에 있는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심지어는 기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장 키우기 어렵다 해서 아이를 적게 낳으면 그 아이들은 자신이 낳을 아이들 뿐 아니라 늙은 부모들을 부양해야 하는 이중 부담이 지금보다 몇 배나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이 기르는 일이 고통보다는 즐거움이 크다는 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임신과 육아에서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꼈다는 이야기들이 보다 많이 있었으면 싶습니다. 재즈피아니스트 이노경님의 <조금 특별한 음악태교>는 그래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음악에서 원하는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매진하느라 결혼이 늦어진 이노경님은 그래도 마흔 전에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행히 좋은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고 마흔 전인 서른아홉에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전공인 음악을 태교에 활용하였는데, 그 경험을 예비 엄마들과 나누고 싶어 이 책을 내셨다고 합니다.

 

제가 산부인과를 전공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의사의 시각으로 본다면 더 젊어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엄마와 아기를 위하여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늦게 결혼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만얀 그런 마음이 있었더라면 보다 솔직하게 적어주셨더라면 금상첨화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서 그런 생각을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있었습니다. “어느 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순 없다. 오롯이 자기 선택일 뿐이다. 다만, 나의 경우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홀로 전투하듯 성공의 금자탑을 쌓은 솔로 여성보다는 멋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알고 봤더니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고 가정도 있는 유부녀더라는 찬사가 더 훌륭해보였다.(104쪽)” 그렇죠. 남 보기에 훌륭해 보이는 것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나이 들어 친구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고, 병들어 누웠을 때, 침상 곁을 지켜줄 사람은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들 밖에 없다는 것을 왜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당장 키우기는 힘들어도, 물론 노후에 아이들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단단하게 결심을 하더라도 가족들이 제일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전공을 바탕으로 임신 사실을 알면서부터 매주 단위로 어떤 음악이 아이와 엄마에게 좋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태교에 적당한 음악을 신중하게 고르고 그 음악을 고르게 된 배경까지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집하신 분은 주로 아이를 가진 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으실 것을 고려한 때문인지 꽃과 음악을 주제로 하여 책을 엄청 예쁘게 꾸몄네요. 페이지마다 음악과 꽃향기가 흘러나오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는 그 주일에 들으면 좋을 음악들을 골라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임신 4주째에는 제이슨 므라즈의 <I'm Yours>와 웨스트 라이프의 <You Raise Me Up>이 눈에 띄는군요. 꼭 서양음악만 고른 것도 아닙니다. 입덧이 시작하는 임신6주째에는 심신을 평안하게 하는 음악이 필요한데, 특히 우리의 전통음악 가운데 궁중음악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느린 템포에 감정을 절제하고 명상을 우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합니다. <영산회상>, <여민락>, <보허자> 등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저자이지만 음악을 업으로 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희생되는 심각하고 어려운 음악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듣고 있지만 듣지 못하며, (…) 여전히 내일에 집중해도 방해받지 않는 음악(52쪽)”이 태교음악으로 좋다는 것입니다. 분명 음악을 듣되 무의식에서 듣고 있는 것이지만 태중의 아이는 분명 그 음악을 듣고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산의 아픔이 있었지만, 39주 동안 품고 있던 아가를 드디어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마무리를 했군요. “가보지 않아 두렵기도 하지만, 기.대.된다~!!!(212쪽)” 이렇게 마무리한 것을 보니 일년쯤 뒤에는 음악을 활용한 육아일기를 선보이지 않을까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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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축 - 꽤 인간적인 그래서 예술적인 건축 이야기
최준석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건축물은 탄생과 더불어 소멸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과정은 하나의 삶이고, 역사가 될 것입니다. 장삼이사가 사는 집도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는데, 특별한 건물에는 특별한 이야기 거리가 많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특별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페인 여행에서 만났던 유적에 담긴 이야기들을 챙기다 만난 <어떤 건축>은 집을 짓는 분이 설명하는 집에 대한 이야기모음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밟아온 삶의 이력입니다. 스무 살 무렵 시작한 집짓는 일 이외에도 문학을 가슴에 품고 습작을 하고, 영화시나리오나 드라마 각본을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건축을 하다 보니 거리나 건축물을 돌아보기를 좋아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만난 건축물을 보면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모든 건축은 제각각 사연과 이야깃거리를 담은 즐거운 주말드라마였고 인간극장이었다. 가끔 소설도 되고 시도 되었다. 때로는 그림이나 조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6쪽)”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은 건축이라는 근엄한 성곽 부변에 흩어진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워 담은 것”라고 했지만, 건축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그림과 조작, 소설과 시,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들을 끌어오고 있습니다. 건축이라는 하나의 길만 외곬으로 파지 않고 문학과 예술이라는 엉뚱해 보이는 동네를 주유한 경험을 잘 살려내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하긴 건축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저자의 인문학적 소양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모두 스물아홉 개의 건축물에 대한 저자의 느낌들을 ‘건축, 사이를 채우다’, ‘건축, 욕망을 분출하다’, ‘건축, 과거로 회귀하다’, ‘건축, 동시대를 비추다’ 등 네 가지 주제로 나누었습니다.

 

특별한 기획의도를 가지고 건축물을 찾아 다녔다기 보다는 이러저런 기회에 만나는 국내외의 건축물을 볼 기회에 느꼈던 점들을 블로그를 통해서 소개한 것들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을지로2가에 있는 SK건물을 소개하면서 알랭 드 보통의 <동물원에 가기>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92쪽)” 리뷰를 쓰는 지금도 ‘왜 그랬을까?’하는 의문에 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종로2가 화신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종로타워의 사진을 보면서 70년대 초반 종로2가 뒷길에 있던 학교를 다닐 때와는 상전벽해가 된 느낌이 들 정도로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의 괴리가 생긴다는 의미일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게 만든 구엘공원에 관한 글에서는 엉뚱하다 싶게도 구스타프 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 <키스>를 인용하면서 클림트가 평생 갈구하던 관능과 욕망, 육체적 탐미를 이야기한 끝에 클림트가 가우디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사실과 함께 두 사람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반인이라면 쉽게 이끌어내기 어려운 점입니다. “가우디의 건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자유분방한 타일 조각들은 클림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비단티움풍의 색채 파편들과 비슷하다. 정교한 금은 세공을 막 거친 듯한 비잔티움의 세밀한 조각들ㅇ이 만들어 낸 한 폭의 모자이크 작품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둘 사이를 이어 주는 공통점은 유려한 관능미다.(37쪽)” 구엘공원에서 가우디가 타일을 깨트려서 붙였다는 주영은 가이드의 설명에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점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구엘공원의 공간들을 보면 깨진 타일을 왜 저렇게 조각조각 붙여 놓았는지 궁금하다. 일설에 의하면 이탈리아산 최고급 타일을 주문한 후, 바로 깨트려서 그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 붙였다고 한다.(38쪽)” 하긴 깨어진 타일 조각들을 재활용하기 위해서 붙인 것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가우디는 깨진 타일 조각을 붙일 때도 마음에 꼭 드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붙이고 떼어내기를 반복했다는 것을 보면 일부러 깨트렸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건축물들에 대한 저자의 재미있는 해석을 읽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덮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됩니다. 스물아홉 개나 되는 건축물에 대한 저자의 생각들을 리뷰에 모두 담을 수 없음은 제 탓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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