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면을 쓴 사람이 인정받을까 - 사람을 얻으며 이기는 10가지 가면 전략
무거 지음, 류방승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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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나온 직장내 처세술에 관한 책까지 소개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직장이란 어디나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아무리 작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조직문화라는 것이 있고, 그 조직문화는 그 나라의 전통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기 마련입니다. 중국이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깝고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고는 하지만, 분명 차이가 존재할 것입니다.

 

저자는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사관리 전문가이자 경제경영·자기계발 전문 작가라고 합니다. 비교적 생소한 중국 직장에서 사람들이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천지방의 전통극인 변검(變瞼:중국 전통극에서 배우가 신속하게 얼굴 표정 가면을 바꾸는 것)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배우가 움직임으로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끌면서 순간적으로 다른 얼굴표정을 나타내는데, 분장용 도랑이나 가면을 이용하여 얼굴색과 표정을 바꾸기 때문에 관객들의 놀라움을 이끌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직장이라는 작업무대는 공연무대보다도 훨씬 더 방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가면을 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가면을 쓴다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읽어가다 보면 저자가 말하는 가면이은 항간에서 유행하는 후흑학(뻔뻔함과 음흉함을 처세의 덕목으로 삼는 학문)이 아니라 직장 내 처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침묵, 칭찬, 약세, 거절, 용인, 능동, 후퇴, 유머, 추종, 과시 등 모두 열 개의 가면을 준비하면 좋다고 했습니다. 의미가 겹치는 부분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만, 분명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열 개의 가면에 따라 장을 구분하고 몇 개의 사례를 들어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맞은 직장인이 선배 혹은 동료로부터 가면에 관한 조언을 듣고 대응방식을 바꾸어 성공에 이른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명에 맞추어 사례를 만들어낸 것 같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연기자가 아닌 다음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행태를 금방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직장생활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직장인이 저자가 생각하는 대로 쉽게 생활태도를 바꿀 수 있다면 천편일률적이 되어 새로운 전략을 내놓아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저자가 추천하는 열 가지 가면 가운데 각자 제일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보다 강화하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직장 초년생이라면 자신이 일하는 곳의 분위기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여 스스로의 생활방식을 만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실패 사례가 먹히는 직장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직장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만, 자신의 타임과 맞지 않는 직장에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것보다는 직장을 바꾸는 편이 훨씬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각 장의 말미에 둔 가면의 사용설명서와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부분 중국사람인 것을 보면 중국내 회사에서 인사관리 혹은 직장인 심리를 연구해온 저자의 경험을 녹여서 창조한 인물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추종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렁 이사의 사례인데, 상품의 질이 떨어지고 생산량이 하락하고 있어 몇 개월 간격으로 이사를 갈아치우는 회사에 부임한 이사가 이틀도 안되어 회사의 산적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틀이면 업무보고도 끝나지 않았을 시점 아닐까요? 그래도 서양에서 나온 처세술 원리 뿐 아니라 중국의 고사에서 가져온 처세술의 원리들도 두루 인용하고 있어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후퇴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뛰어난 부하직원과 그를 알아보고 발탁하는 상사의 이야기를 ‘천리마는 어디에나 있지만, 이를 알아보는 백낙은 드문 법’에 비유한 것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는 여전히 가면보다는 진심이 통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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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 테오의 13일
로렌차 젠틸레 지음, 천지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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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계속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던가? 아이가 내게 무언가를 물었을 때 진지하게 답변을 해주었던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덟 살 난 테오가 불과 13일 동안 겪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또래의 아이가 이렇게 심각한 일을 생각할까 하는 생각도 역시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테오가 열하루 째 되는 날, 자신의 죽음만이 가족들의 문제, 특히 매일 싸우기만 하는 부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는 시점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테오는 부모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전투라고 보고, 전투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나폴레옹만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하긴 여덟 살 때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입니다.

 

테오의 부모는 달걀을 익히는 사소해 보이는 일까지도 싸움거리가 됩니다. 날선 비난을 한 마디 던지면 받아들이는 법이 없이 곧바로 반격이 날아갑니다. 그런데 남이 볼 때는 항상 웃는 이중적인 모습이 테오는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테오의 부모는 가벼운 언쟁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소한 말다툼은 심각한 위기상황을 피하게 하는 완충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인데, 테오가 그런 것까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습니다.

 

테오의 여덟살 생일날 평소와는 달리 테오의 부모님은 <나폴레옹의 모험>이라는 책을 사주었고, 그 책에서 주인공 나폴레옹이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폴레옹은 워털루전투에서 지는 바람에 유배를 가게 되지요. 어떻든 테오의 소박한 소망은 ‘엄마아빠가 천장까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대화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에게 해결방법을 물어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책의 끝부분에 ‘나폴레옹은 1821년에 죽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절망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아빠가 오르페우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면서 죽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하여 저승까지 갔다고 한 말을 기억해냅니다. 오르페우스도 했는데, 내가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테오는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깜찍한 아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테오의 부모님은 테오의 깜찍함을 몰랐던 모양입니다.

 

어떻든 테오는 나폴레옹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천당에 있는지 지옥에 있는지부터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에 갈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인지도... 누나의 컴퓨터를 잠깐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친구들의 생각에 많이 의존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구요. 아빠나 엄마는 테오가 궁금해 하는 것에 답변을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또래 아이들은 대부분이 그렇지요? 하지만 결정적인 정보는 엄마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화가 랭보씨로부터 얻게 됩니다. 랭보씨는 테오를 데리고 국립도서관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다양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랭보는 그것들은 나폴레옹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의 초상화가 다양하듯 진짜 나폴레옹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주면서 진짜 나폴레옹의 몸은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으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바람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처럼 말입니다.

 

랭보씨 덕분에 죽어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테오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테오반의 외톨이 시엔은 나폴레옹이 진적이 한 번 있다는 사실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지하철역에 열차가 들어오는 순간 뛰어들 생각을 한 테오가 역 앞에 앉아있는 거지에게 5유로를 적선하면서 벌어지게 됩니다. 고등학교 역사 선생을 하셨다는 거지를 이곳에서는 나폴레옹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테오는 드시어 나폴레옹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이기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너무 작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216쪽)”입니다. 테오는 드디어 해답을 얻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테오가 해답을 얻는 동안 테오의 가족은 별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막을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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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의 마지막 여름
마이클 셰이본 지음, 이선혜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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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에 대한 기억은 철강도시라는 것, 제니퍼 빌즈가 주연한 영화 <플래시 댄스>의 무대였다는 것, 그리고 동부를 여행하는 길에 외곽도로를 지나갔다는 것 정도입니다. <플레시 댄스>에서는 낮에는 제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에서 플로어 댄서로 일하는 여주인공이 어려운 여건을 뚫고 무용수로 성공을 일궈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 피츠버그의 여름은 어떨까 싶어 고른 책입니다. 특히 격동기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고 해서 관심이 갔습니다.

 

출판사에서는 이 책의 내용을 “대학을 갓 졸업한 주인공 아트. 그는 리포트 제출 때문에 마지막으로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자신과 이름이 같은 멋있는 청년 아서와 독특한 매력을 지닌 여인 플록스를 만나게 되고, 아서의 친구 클리블랜드와 제인 등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찬란한 청춘의 마지막 여름을 보내면서,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넘나들고 고통스럽게 자아를 찾아 나간다.”라고 간단하게 요약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인공 아트의 아버지와 친구 클리블랜드가 속해 있는 갱스터 사회나, 아트와 그를 둘러싼 젊은 친구들 사이의 관계는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라서인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라던가, 그들이 좋아하는 영화, 소설, 음악 등이 비교적 생소하였기 때문에 친절한 주석에도 불구하고 금방 와 닿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아트가 한눈에 반한 아서, 그리고 아서가 소개해준 플록스와 금세 친해지면서 삼각관계에 빠져드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트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입해서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이성에 눈을 뜨기 전까지 동성 친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하지만 유전적 요인 등 다양한 소인으로 이성보다는 동성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을 동성애자라고 부르고 있고 성소수자라고 하기도 합니다. 동성애자는 역시 동성애 성향의 상대와 관계를 맺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서는 이성에는 관심이 없는 동성애자로, 아트는 양성애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동성애자 역시 이성애자보다 질투가 심한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서가 아트와 플록스 모두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트의 아버지는 뉴욕에 근거를 두고 있는 전국구 갱스터 두목으로 가끔 피츠버그에 와서 조직을 관리하고 아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분명하게 설명은 하지 않고 있지만, 아트가 어렸을 적에 있었던 어머니의 죽음이 아트에게 정신적 충격으로 잠재되어 있고, 아버지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고, 아버지의 도움으로 살고 있음에도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을 애써 외면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즉, 아트를 둘러싼 환경은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는데 장애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물론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너 명의 여자를 사랑했고 섹스를 하기도 했지만, 나의 유약했던 어린 시절과 당시에 경험한 성(性) 정체성의 혼란, 힘센 남자아이들로부터 ‘계집애’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당한 모욕과 주먹질(78쪽)”을 당했다고 적고 있지만 아서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실 성장하면서 약해보이기 때문에 여자아이 취급을 당하는 남자아이들이 적지않지만 그들이 모두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6월에 플록스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7월에는 그녀와의 사랑이 안정적인 상태가 되지만, 도서관에서 같이 일하는 아서와 플록스는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아트에 대한 권리를 두고 심적 갈등을 빚는 것 같습니다. 플록스는 아서와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지만,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는 법이지요. 클리블랜드로 인하여 아버지와 충돌이 있었던 날 아트는 아서와 관계를 맺고, 플록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트와 플록스의 관계를 파경에 이르게 됩니다. 과연 아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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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사 장기려 -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 개정판
손홍규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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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대학동아리 후배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듣고는 감개무량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가톨릭의대 진료봉사 동아리 성우회가 제14회 MSD청년슈바이처상의 사회활동 의대생부문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료윤리학회와 청년의사신문이 주최하는 <MSD청년슈바이처상>은 ‘한국의 의대생 및 전공의들이 슈바이처 박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치료자 및 연구자로 성장토록 하고자’ 제정된 것입니다. 2년 전에는 작은 아들이 사회활동 의대생부문을 수상하여 같이 기뻐해준 적도 있습니다.

 

성우회는 필자가 의과대학에 다니던 1977년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맡았던 진료봉사 동아리입니다. 가톨릭의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하지만 이화의대, 경희대 학생들이 참여한 바도 있습니다. 진료봉사활동을 하는 동아리는 많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졸업을 하면 동아리와 연계된 활동이 뜸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필자가 졸업을 하고 34년이 된 지금까지도 연회비를 거르지 않고 내고 있는 것처럼 이백 명에 가까운 성우회 졸업선배들은 회비는 물론 진료봉사에 참여하여 후배들의 봉사활동을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성우회가 출범할 당시만 해도 이렇도록 면면히 이어져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수상은 성우회의 맥을 이어온 후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라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진료봉사활동은 주로 종교를 가진 의과대학생들이나 학생회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주된 활동에 더하여 부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성우회는 진료봉사를 주요 활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선후배 사이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계봉사활동은 졸업한 선배들이 대거 참여하는, 그러니까 선배와 후배가 한솥밥을 먹으면서 마음을 터놓는 기회가 되곤 했습니다. 출범할 당시에는 서대문구 구산동에 있는 시립갱생원에서 매주 일요일 진료를 하다가 구산동, 도화동, 명일동 등으로 옮겨가면서 진료봉사활동을 이어갔고, 지금은 개포동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보장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진료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고 있지만, 의료의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의료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런 분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좋은 자세라는 생각을 합니다.

 

의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치료하는 학문이기에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학의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의료계에도 타인을 위한 선행을 베푸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려 할 뿐 아니라, 그와 같은 미담을 발굴해서 사회에 전하는 역할을 하는 분들도 제 몫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비리와 비행만을 발굴하여 전하고 있기에 의료계는 세인들의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아픈 사람들을 위한 삶을 실천하신 장기려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손홍규작가의 <청년의사 장기려>를 소개합니다. 평전이나 위인전이 아닌 소설이라서 딱딱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젊은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기려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되고 있어 그분의 정신이 의료계에 면면히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장기려선생은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습니다. 졸업 후에 백인제교수를 사사하여 외과를 공부하였으며,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백인제교수의 뒤를 이어 경성의전에서 교수직을 맡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평양에 있는 연합기독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장기려 선생의 청장년기는 일제 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우리사회가 격동하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충돌을 빚기까지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환자를 우선 생각하는 그의 원칙은 변함이 없었고, 그런 모습은 때로 좌우의 오해를 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 역시 쉽지 않았을 이야기를 잘 정리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은 학문적으로도 진료와 학문을 병행하여 1940년 나고야제국대학교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943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간암환자에서 간의 일부를 절제하여 간암을 수술로 치료하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역시 간암 환자에서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했습니다. 1947년에는 평양의과대학에서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외과 교수를 맡았지만, 1950년 12월 한국동란의 혼란 중에 처자를 두고 차남 장가용(張家鏞)과 함께 월남하였고,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습니다.

 

의료를 통하여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1951년 1월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우면서 그의 봉사는 꽃을 피웠다고 하겠습니다.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인술을 베풀면서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진료해주었습니다. 1968년 한국 최초의 사설 의료보험조합인 부산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설립하였으며, 1976년 청십자의료원을 설립하여 환자 진료를 계속하였습니다.

 

소설 <청년의사 장기려>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을 조명하는데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외과의사로 활동한 선생님의 발자취를 뒤쫓는 작업이었기에 그가 처음으로 맡은 단독수술을 성공리에 마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담석에 의한 통증을 한약으로 다스리던 환자가 급성담낭염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응급상황이 되어서야 병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당시 의료계는 “아무리 한의학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녔다 해도, 결국 이성이 결여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8쪽)”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지만, 장기려선생은 “한의학의 근본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만성적인 질병에는 효과적이지만 이런 급성환자에게는 맥을 못 춘다.(16쪽)”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근래 한의계에서도 의과의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정책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의료기기를 통하여 얻은 정보를 한의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송도고보 시절 조만식선생이 주창한 산업입국론에 마음을 두었던 선생은 여순공과대학에 입학원서를 넣었지만, 낙방을 하고 말았답니다. 이 무렵 선생 집안의 주치의였던 종기의 박의원이 전해준 함경도 영흥의 에메틴 사건은 청년 장기려의 마음에 의학에 관심을 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함경남도 영흥에서 퍼진 폐디스토마 치료에 나선 일본인 공의가 환자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투여해야 할 에메틴을 마구잡이로 주사한 결과 6명이 사망하고 93명이 심한 약물중독 증세를 보였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기로 인한 폐렴이라고 발표해서 사건을 묻으려던 총독부 위생과의 의도와는 달리 한성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파고드는 바람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선생을 결정적으로 의학의 길로 인도한 사람은 송도고보 동창 김주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의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상황이었는데, 김주필 역시 같은 상황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주필은 어머니의 죽음을 지킨 장기려선생에게 의사가 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모른 척하지 않겠다(79쪽)’는 약조를 제안합니다. 김주필에게 약속한대로 장기려선생은 의사가 되려고 작정하게 되었고, “만약 제가 의사가 된다면 의사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이 서원은 그로 하여금 경성의전의 외과학교실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백인제교수의 은근한 제안이나, 고등관에 해당하는 대전도립병원 외과과장직을 사양하고 평양의 기독연합병원 외과를 선택하게 만듭니다. 이런 장기려선생의 선택을 두고 백인제교수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열 명의 제자를 키웠으면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평생을 바치겠다는 녀석도 한 놈쯤은 있어야 정상이야. 그 녀석이 바로 자네라서 더욱 좋아. (…)좋은 자리를 내팽개치고 좋아하는 녀석도 아마 자네가 유일할 걸세.(161-2쪽)”

 

당시 평양은 배급제가 시행되고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뛰고 있었습니다. 일부 일본군과 관청에 줄을 대 호의호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시 곳곳에 빈민굴이 넘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은 병원을 쉬는 날이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칠성문 밖 빈민촌과 용산면의 빈민촌을 찾아 무의촌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성 안 사람들과는 달리 줏대와 자존심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 내내 버린 자식 취급을 받던 평양사람들은 손으로 대동강물을 거슬러 떠먹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강물을 거슬러 떠먹는 사람들’이라고 일컬었던 것은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자부심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평양은 많은 것들이 부족해지면서 죽음이 일상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차원을 넘어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세상이 되어버렸던 것인데, “대동강과 보통강, 혹은 마을을 관통하는 개천에서마자 가난을 이유로 버리진 젖먹이들이 발견되었고, 늙은 부모의 봉양을 포기하고 자식들이 도망간 초라한 초가집은 곧바로 무덤이 되었다. 평양은 점점 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212쪽)”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그 무렵 간질환을 전문으로 하던 선생에게 황달이 찾아왔습니다. 신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평양을 떠나 묘향산에 머물던 중에 해방을 맞은 선생은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평양으로 돌아왔고, 소련군이 진주한 가운데 현준혁이 주도하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위생과장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평양은 이내 혼돈에 빠지고 말았는데, 추수한 곡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방 전에는 50퍼센트 많게는 90퍼센트까지 가져가던 지주에게 30퍼센트만 주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지주들로 구성된 기독교인들과 대부분 소작농과 노동자로 구성된 공산당원들이 충돌을 빚기 시작한 것입니다.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온 장기려선생이지만 그의 명성이 필요했던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선생에게 제1인민병원의 원장을 맡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도였던 선생이 병원장을 맡고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당국의 속셈대로 병원장직을 물러났는데, 이번에는 김일성대학에서 외과학 강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생이 평양에서 진료를 시작할 때부터 교류하던 함석헌선생께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월남하기 직전에 만난 것이 그 무렵입니다. 평양이 돌아가는 사정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은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사상이나 주의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세요. 인민들이 장 선생을 원하고 있는데, (…) 사람들의 가슴속이 바로 장선생의 고향이요 머물 곳입니다.(303쪽)”라고 한 함석헌선생의 조언이 의미하는 것처럼 자신을 찾는 환자들도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선생의 대범함은 북한에서 이미 권력의 입지를 다진 김일성의 충수돌기염을 수술하는 과정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태연하게 수술을 마친 선생에게 수술하는 동안 손이 떨려 죽는 줄 알았다고 고백한 김일성의 주치의에게 “그건 아마도 선생님께서 환자를 환자로 보지 않고 권력자로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318쪽)”라고 덤덤하게 답변했다고 합니다. 환자중심의 생각을 가진 선생이었기에 6.25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는 국군야전병원과 유엔 민사처병원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고, 결국은 평양에서 철수하는 국군을 따라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화나 특무대의 감시를 받던 이야기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결국 손홍규작가는 장기려선생의 삶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제가 [북소리]에서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명의식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시대의 의료인들이 그의 삶과 정신을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겠다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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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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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를 보건의료인터넷신문 메디칼타임즈에서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 자료를 찾다가 눈에 띄어 읽게 되었는데, 모두 읽고 나서 횡재를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755년 리스본을 강타한 지진에 관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진이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은 물론 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어떻게 재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덤으로 포르투갈의 역사에 관한 내용도 잘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리스본을 찾았을 때, 가이드는 당시 지진에서 살아남은 건물이라고는 벨렘탑과 성제로니모 수도원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진 후의 리스본에 서 있던 모든 건축물이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리스본을 덮친 지진은 요즈음으로 치면 진도 9에 해당하는 엄청난 강도였고, 테호강가에 위치한 리스본에 지진해일까지 덮쳐서 피해가 컸다는 것입니다. 지진 직후에는 당시 리스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0만명이 사망했을 것이라고 했지만,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이라고 보아 2만 5천명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보수적으로 보아도 1만2천에서 1만5천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희생이 컸던 것은 지진이 발생한 시각이 11월 1일 오전 9시 30분으로, 만성절 아침 미사가 막 시작된 뒤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르투갈 사회는 종교적 관례를 지키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분위기였는데, 의무를 어기는 사람, 곧 미사에 참석하지 않거나 안식일과 축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종교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종교재판소의 공개재판과 처형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대중적 신앙을 낳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지진이후에 교회는 리스본을 소돔과 고모라로 비유하면서 타락한 도시가 화를 불렀다고 회개하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하는 일을 맡은 세바스티앙 주제 드 카르발류총리였는데, 그는 앞서 말씀드린 교회의 부축임을 저지하면서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재산권을 지키려는 귀족들과의 충돌도 조정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한 일은 당시 식민지였던 브라질에서 건너온 황금을 보관하던 건물이 지진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데다가 약탈을 막아 온전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리스본은 전 세계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리스본과 연계된 사업을 하던 외국 사람들도 2차 피해를 입은 경우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리스본이 아름다운 도시라고들 말합니다만, 당시에는 ‘리스본에 가보지 않고는 제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오래된 골목길과 궁전,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성당들이 어우러진 멋진 도시였다고 합니다. 이런 리스본의 모습은 당시에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리스본 재건의 책임을 맡은 카르발류총리는 포르투갈의 수석 도시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어가 맡게 되었는데, 다섯 가지의 계획을 제시하면서 피해가 경미한 벨렘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안에 무게를 두었지만, 총리는 피해를 입은 바이샤지구에서 잔해들을 싹 밀어버리고, 잔해를 이용하여 넓은 지반을 다진 후에 ‘새로운 거리를 마음껏 조성하자’는 제안을 채택합니다. 왕실의 운명과 포르투갈의 경제 등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수도 리스본이 간직한 권위와 활기를 되살리는 재건의 기치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지진피해로 좌절한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역시 정치가의 생각은 남다른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옛 리스본 거리와는 달리 새로운 도시는 지난 번 여행 때 가본 적이 있는 호시우광장과 테헤이루 두 파수 광장을 남북축으로 한 격자 모양으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교회와 귀족들의 발발을 잠재워가면서 리스본 재건공사를 이끈 카르발류 총리의 행정능력은 근대 재난관리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주제왕이 사망하면서 카르발류 역시 실각하여 권력을 남용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처벌을 받았다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한 절대권력은 없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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