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로 가는 길 - 이슬람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적 가르침
무함마드 아사드 지음, 하연희 옮김 / 루비박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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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나라가 중동국가들과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해오고 있어 이미 이슬람과 친숙하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만, 필자는 그런 인연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카타르 등 중동국가들과 보건의료관리체계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관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최근 터키에서 실종된 우리나라 젊은이가 이슬람 무장단체에 가입한 정황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중동지역과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해 말 우리말로 번역된 <메카로 가는 길>은 1954년에 출간된 대표적인 이슬람교의 안내서입니다. 이 책은 유럽 출신의 저명한 무슬림 작가 무함마드 아사드(1900-1992)가 이슬람에 매료되고 무슬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자전적 기록입니다. 1900년 오스트리아령이었던 폴란드의 르보프(지금은 우크라이나령이라고 합니다)의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레오폴트 바이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저자는 대를 이어 유대교 랍비가 되는 가풍 덕분에 일찍 유대교의 경전을 공부하게 되었지만,그 결과는 오히려 유대교에 대하여 회의였다고 했습니다. “경전 전반에 걸쳐 강조되는 도덕적이고 올바른 삶, 예언자들의 신심 등에는 물론 경의를 표했지만, 구약이나 탈무드에서 말하는 신은 너무 과도하게 의례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히브리인 외에 다른 민족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71쪽)”

 

모험과 사건에 관심이 크던 10대 후반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나이가 어려 참전이 불가능했고, 결국은 종전 후에 빈대학에서 2년간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서구의 종교가 말하는 ‘신의 뜻’이란 인간의 독단적 판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신을 ‘정의’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종교수호자들의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세상이 혼란에 빠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그만두고 기자의 길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권위 있는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의 외신부 기자로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곳곳을 누비면서 중동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중동의 문제들을 기사로 송고했고, 그의 기사는 유럽사회는 물론 중동국가의 유력자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유럽인이 이슬람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을 묘사한 <메카로 가는 길>은 이슬람과 서구 사이의 높은 장벽을 조금이라도 낮추어보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그리하여 실체를 드러낸 이 책은 인도로 가기 위해 아랍을 떠나기 전까지 리비아 사막과 눈 덮인 파미르 고원, 보스포루스 해협과 아랍 해 사이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를 여행하며 보냈던 시간을 기록하고 있으며, 1932년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 메카로 향했던 마지막 사막 여행의 시점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15쪽)”고 요약하였습니다. 저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국왕의 요청으로 나즈드와 이라크 사이 국경지대에 위치한 카스르 아타이민에 가게 되었는데, 임무를 마치고 메카로 돌아가는 길에 네푸드사막을 지나 고대 오아시스 타이마에 들러 메카로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낙타 두 마리가 저마다 한 사람씩 태운 채 터덜터덜 앞으로 나아간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타오르는 듯한 붉은빛 모래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숨 막히는 침묵이 주위를 감싼다. 휘청휘청 걷는 낙타 등에 올라타고 있노라면 최면에 걸린 듯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태양도, 뜨거운 바람도, 사막도 모두 뇌리에서 사라진다.(18쪽)’라고 시작하는 사막여행에 대한 기록 사이사이에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이슬람에 귀의하게 되는 과정은 물론 진정한 이슬람정신이 무엇인지, 서구와 이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각의 차이가 무엇인지 등을 적고 있습니다.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 사람의 그림자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막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그와 같은 만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가 이끌려 나오고 있습니다. 토끼 한 마리가 만들어낸 작은 사건은 저자를 사막폭풍으로 몰아넣고, 사막의 지형을 바꾸어놓은 폭풍 때문에 길을 잃은 저자는 물 한 방울 없이 사흘 동안 사막을 헤매기도 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저자는 “공포와 굶주림, 궁핍과 실패로 반드시 너희를 시험할 것이다. 그래도 굴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고난 앞에 ‘보라, 우리는 신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38쪽)”라는 코란의 한 구절을 떠올립니다. 사막은 텅 비어있지만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고, 그런가 하면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납치된 일본인 기자들을 처형하겠다고 하는 이슬람국가(IS)의 위협은 결국 인질을 처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고 합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의 이슬람지역이 이방인들에게는 위험천만한 곳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지역을 누빌 때만하더라도 사막의 베두인족들까지도 이방인들에게 우호적이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슬람국가(IS)는 수니파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라고 합니다. 지중해지역원이 <지중해의 전쟁과 갈등; http://blog.joins.com/yang412/13580816>에서 이슬람원리주의에 대하여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1300여년 이상을 아랍민족에게 보편적 삶의 방식을 자리잡아온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지도이념으로 강력한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 부상한 서구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서구문명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하여 내세운 아랍민족주의와 같은 세속적 정치이념 역시 실패로 귀결되면서 결국은 이슬람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라는 인식이 태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통이슬람이 정치현실에 무관심해지고 부패하면서 무슬림 공동체가 쇠락해진 것이라고 생각한 이슬람사회가 초기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즉 이슬람부흥의 단초를 전통에서 찾아내겠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인데, 세계문명의 용광로 역할을 했던 초기 이슬람의 ‘열린 인식’과는 맥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서구의 발전된 문명을 수용하여 이슬람국가를 개혁해야겠다고 행각한 집권자들의 세속적 정책에 대항하기 위하여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행보를 택한 이슬람원리주의가 1970년대 말에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면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일부 급진적 성향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과격한 무장활동은 대다수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테러리스트로 오해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세계가 문화적 쇠락에 빠져있는 원인에 대하여 저자는 카이로 알아자르대학의 신학자 무스타파 알 마라기의 설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미 몇 세기 전부터 진정한 학자들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 과거 추동력은 거의 소멸됐어요. 발전이 있으려면 남의 생각을 반복하기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저 암송이니 하고 있으니....(218쪽)”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이룩한 이슬람공동체는 다음 세기에는 동으로는 인도북부, 북으로는 카스피해 북쪽, 서로는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까지 영역을 넓혔습니다. 이토록 광대한 영역을 다스리기 위한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문명은 물론 페르시아, 인도, 멀리는 중국의 문명까지도 받아들여 의학, 응용수학, 천문학, 점성술, 연금술, 논리학 등 다양한 부문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것입니다.(정인경 지음, 동서양을 넘나드는 보스포루스 과학사 106~121쪽, 다산에듀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72745) 그런데 수백 년에 걸쳐 번창했던 이슬람과학은 정치적으로는 십자군전쟁으로 사회가 분열되고, 종교적으로는 보수화되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입니다.

 

일면으로는 무슬림 세계가 쇠락한 원인을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두고 있는 서구의 시각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나 유대교에 비하면 이슬람은 종교라 부르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이슬람에는 사막 특유의 광신, 미신 숭배, 어리석은 운명론이 뒤섞여 있어 인간을 우민화의 사슬로 옭아매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사회에 들어가 직접 체험한 저자가 보기에 서구의 이런 시각은 왜곡된 것으로 코란은 신의 창조물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지적인 욕구와 육체적 충동, 영적인 갈구와 사회적 필요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슬람세계가 퇴보하고 있는 것은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무슬림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서구문명 역시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필요, 그리고 영적 욕구의 조화를 실현하는데 실패했다고 보았습니다. 자신들이 발전시킨 문명이 세상에 행복과 빛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오만한 서구인들은 18~19세기에는 기독교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매몰되어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이제 그들의 종교는 동력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종교를 대신해서 과학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서구식 라이프 스타일’을 전파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신께서 주신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고 그 자체로 숭배의 대상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331쪽)’는 것입니다. 순수함이나 자연과의 교감 따위는 잃은 지 오래이며 스스로를 고립시키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방향성을 잃었기에 기계와 기술에 의존하여 실존을 증명하려 애를 쓰게 되었는데, 기계는 새로운 욕망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기계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심화되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기계를 발명했다는 목적은 사라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기계를 탐욕스러운 신으로 탈바꿈시켰고, 기계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들이 사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세계의 매력에 빠져들던 저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프가니스탄을 여행할 때였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자는 눈덮힌 힌두쿠시를 넘어 헤라트에서 카불로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한 신앙심이 먼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타고 있던 말의 편자가 벗겨지는 바람에 쉬게 된 하자라자트에서 만난 하킴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믿음이 확고했던 무슬림들이 불과 한 세기만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서구의 이념과 관습에 쉽게 물들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명확하고 단순한 예언자의 가르침이 억측과 말장난에 가려지고, 이슬람의 가치관을 모두 부정하는 아타튀르크 같은 가짜 무슬림이 중흥의 상징이 되어 버린 이유를 묻자, 하킴은 저자에게 ‘당신도 무슬림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저는 무슬림은 아니나 이슬람의 아름다움을 무슬림들이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런다’고 대답하였는데, 하킴은 ‘당신은 무슬림이 맞습니다. 아직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요’라고 개종을 촉구했다고 합니다. 1926년의 일입니다. 베를린으로 돌아와 미루던 결혼을 한 직후에 아내와 함께 전철을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번영의 물결을 타고 있던 시절임에도 전철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지옥 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 펼친 코란에서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탐욕은 계속 커진다. 아니다. 그대는 결국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날이 오면, 귀중한 인생을 무엇에 썼느냐는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347쪽)”라는 구절을 읽고는 바로 베를린의 작은 무슬림 공동체 지도자를 찾아가 ‘신 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가 그의 전령임을 증언한다.’라고 선언하여 개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슬람을 미화하고자 하는 의도나 이슬람교를 포교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고, 다만 이 책을 통해 무지와 편견으로 가려져 있던 안개가 걷히며 이슬람의 정신과 문화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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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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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진숙은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에서 ‘곰브리치에서 에코까지’라는 부제에 걸맞게 <미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3508185>, <추의 역사> 그리고 <궁극의 리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3493806>까지 에코의 책들을 꼽았습니다. 순서대로 읽어보는 것이 옳았을 터이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추의 역사>가 제일 늦었습니다. 아마도 미에 대한 관점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것은 있어도 추한 것에 대한 관점을 역사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하는 의구심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한 가지는 <미의 역사> 나아가 <궁극의 리스트>를 읽으면서 많은 인내심이 필요했던 기억 때문에 읽기를 미루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진숙이 ‘에코의 대단한 기획은 현실논리에서 끝내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176쪽)’라고 적은 것은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한 작품들은 대부분 일반적인 미술사에서 보기 힘든 작품들이다. 그림으로 말하면 현기증이 날 만큼 많은 사물들의 이미지가 집적되어 있고, 문학으로 마하면 마침표를 찾기 힘든 기나긴 문장의 나열로 이루어진 것들이다.(176쪽)’ 물론 인용하고 있는 작품들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간간이 자신의 생각이 섞여들기는 하지만 그 인용한 원전의 일부를 모조리 나열하고 있는 열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적었던 것 같습니다만,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라서 관심있는 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경우는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전혀 설명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미의 역사>의 편집방식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에코는 미에 대한 관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그 변화를 뒤쫓을 수 있는 반면 추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뒤쫓아 정리한 결과물을 찾기는 어렵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가 괴기스럽고 추한 이미지를 신화의 한 부분으로 창조해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게 창조된 신화는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면서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지옥과 악마 괴물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가 점차 정교한 이론을 정립하면서 종교와 관련하여 천국에 반대되는 지옥, 천사와 대립하는 악마의 존재를 표현하게 되었고, 악마의 꼬임이 넘어가 고통 받는 인간들의 모습을 추하고 잔혹하게 표현하기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사탄과 마녀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역시 괴기한 분위기가 강조되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질병에 의하여 변형되어가는 인간의 모습 역시 보기에도 추하였을 것입니다.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들이 쇠락하거나 어지럽게 나뒹구는 모습도 역겹고 추한 것이 되고 말았고, 그런 것들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미적인 것을 패러디하여 미에 대비된 추한 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면 추한 모습을 상상하던 방식에서 추한 것들을 보이는대로 그려내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다시 추한 모습을 재창조하여 초현실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으니 추에 대한 관념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모해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에코가 집대성한 것들을 두고 이진숙은 ‘추라고 쓰고 미라고 읽다’라고 개념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추를 통해서 미를, 거짓을 통해 진실을,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선과 미의 공고한 관계가 무너지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아름다운 악마’는 ‘아름다운 천사’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게 된 것입니다. 에코의 대단한 기획의도를 파악하기에는 아직 미학에 대한 저의 공부가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마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또 다른 시각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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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그녀에게 - 서른, 일하는 여자의 그림공감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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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는 일부러라도 미술에 관한 책들을 읽을 기회를 만들려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요약정리는 하지 못하고 있지만, 꾸준하게 읽다보면 선무당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일보의 곽아람기자의 <그림이 그녀에게>도 같은 맥락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전문적인 미술사 서적도 아니고, 세련된 커리어우먼의 멋들어진 명화감상기는 아니지만, 이십대를 보내면서 만났던 그림들에 대한 이야기를 같은 또래의 여성들과 공감하기 위하여 수다를 떨 듯이 적어보았고 하였습니다.

 

서른 개의 작품을 각각, 공감, 그리움, 위로, 휴식이라는 주제어로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살면서 얻는 느낌을 맞춤한 그림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어 공감의 첫 번째 이야기는 저자가 여성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느끼게 된 ‘차별’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의학공부를 시작하던 시절 만해도 여자 동기가 10퍼센트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요즈음에는 절반이 넘어선 지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처음 공부하던 시절도 그랬습니다만, 지금도 여성을 차별하는 분위기는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들 세계에서는 답답한 무엇이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여자라서 특별한 대우를 바랐던 것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그래서 저자는 <그림 드리는 여자>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으로 알려져 왔던 이 작품은 19세기 초반에 프랑스화단에서 활동한 마리 드니즈 빌레르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는데, 처음부터 그녀의 작품이라고 알려졌더라면 이 작품이 유명해졌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19세기는 서양사회가 여성이 한 곳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을 금기로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여성들은 오히려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프릴 달릴 블라우스 증후군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서른 개의 이야기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저자가 살면서 느꼈던 생각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이 잘 어울리는 그림을 소개하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와 화가가 활동하던 시절의 분위기 혹은 작품의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그 그림을 인용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를 종합해서 전체적인 느낌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내용을 읽다보면 마치 곁에 앉아서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쉽게 읽힌다는 점입니다. 저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도치법으로 문장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그만하면 ‘예쁘장한 인생’이었다, 취직하기 전까지는.(14쪽)” 저도 가끔은 그렇습니다만, 주어를 생략하는 문장을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림을 인용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제목과 그 아래 본문에서 핵심이 되는 글을 일부 따오고, 다음 면에 그림을 실었습니다. 그런데 화가와 그림 제목은 달았지만,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오른편 쪽의 맨 위에 그림의 일부를 손톱크기로 잘라내서 실었습니다. 그 쪽에 담겨 있는 본문의 내용이 시사하는 그림 내용을 다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 내용이 더 쉽게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자의 외로움은 드라마에 빠져있기 때문에 비롯된다는 주장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외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남성이라서 외로움을 덜 타는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우울할 때, 한 점의 그림이 위로가 된다는 것을 적으면서 저자는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를 인용합니다. 그런데 저자가 런던의 테이트겔러리에서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얼어붙는 듯했다고 합니다. “그림 속 어스름은 화폭 밖으로 뿜어져 나와 전시실을 가득 채웠고, 흐드러진 백합과 장미 꽃송이들이 해질녁 대기와 어우러져 싱그러운 향기를 품어냈다. 그리고 마치 천사처럼 창백한 두 소녀들! 나는 전시실 의자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이가 먹을 것을 탐하듯 정신없이 눈으로 훑어 그림을 탐닉했다. 눈물이 흘렀다. 순간, 화재겅보기가 울렸고, 미술관에 있던 관람객들은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림은 더욱더 뇌리에 남았다.(144쪽)” 그림을 마주한 순간 눈물을 흘렸다는 감수성이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com/yang412/12435742>에서 읽었습니다만, 여기 또 하나의 사례를 더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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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원하는 인생을 살아라 - 카이스트 윤태성 교수가 말하는 나를 위한 다섯 가지 용기
윤태성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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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회사원으로 출발해서, 일본 유학생, 일본대학교수, 벤처창업 그리고 귀국해서는 카이스트의 교수로 한우물만 파고 있는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 삶을 살아온 윤태성교수께서 꿈을 찾는 청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담아 대답해준 인생설계에 관한 이야기를 모았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인생을 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른 산을 스스로 정한 것도 아니고 그 산을 내가 즐긴 것도 아니라, 그저 살다보니 그 산을 오르게 되었고 무심코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산을 내려올 뿐’이라고 하신 부분은 조금 수긍이 가지 않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살아가면서 자신이 나아갈 바, 즉 진로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결정하기 마련 아닐까요? 물론 심사숙고를 하더라도 최선이 아닌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선택할 길도 상황에 따라서는 변화를 줄 수 도 있는 것이고 삶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얻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부침이 있기 마련이니, 인생이 산에 오르는 것과 비유하는 것은 참 적절하다고 하겠습니다. 산을 오를 때도 체력이라든가, 시간, 동행하는 사람 등 다양한 요인 때문에 원하는 산을 오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상황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뿐인 인생을 원하는 대로 디자인해서 살아가는 데는 다양한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저자는 흔들리지 않을 용기,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다자인할 용기, 한 번쯤 방황할 용기, 행복을 선택할 용기 그리고 더 큰 세상을 펼칠 용기 등 다섯 가지 용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용기란 신중하게 결정해야지 만용이라고 할 정도로 터무니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계기로 자신의 본능과 능력을 끌어내 모두가 원하는 인생을 디자인해가기를 바란다.’라고 마무리합니다.

 

다섯 가지 용기로 나눈 각장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문제들을 주제어에 맞게 배치하고, 저자 나름대로의 답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각 장의 앞머리에는 저자가 처음 직장을 잡고 겪은 이야기들을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처음 직장을 정하게 되면 조직에 적응하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들떠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준비한 부품들이라고 하더라도 조립되어 완성된 기계를 시운전할 때는 부품들이 제 자리를 잡고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 초년생은 역시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흔들릴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저자의 제안을 옳고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처음에 하는 일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모습으로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무언가 삐걱거리는 데가 있으면 문제를 진단하고 다시 조정하는 기회를 가져야 하겠지만, 조정을 하더라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지 않으면 타성에 젖어 그냥 허송세월하지 말고 과감하게 하던 일을 정리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와는 다른 결과를 얻고 있기는 합니다만, 몇 차례 직장을 옮겨본 제 경험에 비추어도 역시 옳고도 옳은 이야기입니다. 인내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이 시점이야말로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세상에 늦은 일이란 없습니다. 늦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바로 무언가를 시작할 시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진로를 바꾸려다보면 때로는 방황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먹은대로 인생을 설계하는데 있어 필요한 조건은 아니지만, 충분한 조건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방황도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행복을 선택할 용기입니다. 누구나 행복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한 길을 선택할 때는 때로 욕심을 내도 좋습니다. 그리하여 더 큰 세상을 펼칠 수 있는 용기가 만용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꿈을 크게 가지는 것은 절대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요즈음 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것도 인터넷신문에 연재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날 때마다 정리하면 아직도 지지부진하고 있을 일입니다만, 마감시간을 정하고 원고를 보내야 하는 규칙을 정했기 때문에 제대로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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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무선)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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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에서 에코까지, 세상을 바꾼 미술 명저62’라는 부제를 단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이 소개하고 있는 미술 명저들을 찾아 읽어왔습니다. 전체의 10퍼센트를 조금 넘었으니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의 여정은 곰브리치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쪽에 가까운 두께에 질려 자꾸 순서가 밀리다가 드디어 읽어냈습니다. 읽기를 마치고서 우선 ‘제일 먼저 읽었어야 할 책을 미루었구나’하고 후회했습니다. 이진숙은 서양미술사에 관하여 10종의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 고른 것 같습니다. 어떻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베스트 가운데 베스트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피에 눌려, 그리고 작은 활자에 겁을 먹고 책장열기를 멈칫거리는 분이 계시다면 우선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책장이 날개돋힌 듯이 넘어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원시 미술부터 시작되는 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굽이굽이 넘어간다. (…) 서술은 잠시간 쉴 틈도 주지 않고 독자를 몰입시킨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이진숙, 위대한 미술책 159쪽, 민음사, 2014년)”라고 적은 이진숙은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진숙은 곰브리치가 서양문화를 기준으로 타 문화를 비교하는 서양문화 우월론자들과는 달리 각 나라와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현상을 차별하거나 서열화하려들지 않고, 서로 다른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의 흐름을 선사 및 원시미술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끝으로 모두 28개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2세기에서부터 11세기까지의 이슬람과 중국의 미술을 ‘동방의 미술’이라는 별도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기도 합니다. 199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위대한 한국의 미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이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신비로운 불후의 업적들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이 막 미술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했습니다. 책이 쉽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지만, “신참자에게 세부적인 것에 휘말려 혼돈됨이 없이 이 넓은 분야의 지세를 보여주고,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의 양식들을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써, 보다 더 전문적인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는 집필의도를 잘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나 제 아이들은 이른 나이에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손자만큼은 일찍 읽을 수 있도록 권해볼 생각입니다.

 

이진숙은 곰브리치가 연대기나 사조 분류를 가급적 기피했다고 보았습니다.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의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를 중심으로 미술가들을 분류하게 되면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개별 예술가의 문제의식이 특정 사조의 공식에 환원되지 않는 불합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곰브리치 역시 연대와 사조를 전혀 무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미술가 역시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얻으려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미리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며, 후대의 미술사가들이 비슷한 경향의 예술가들을 사조라는 틀에 묶어 쉽게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쉽게 쓰려했다는 것은 전문적인 용어를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독자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을 일깨워주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닐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처럼 전문적 용어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원칙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첫째, 도판으로 보일 수 없는 작품은 가능한 언급을 회피한다. 둘째, 진정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은 배제한다. 셋째, 널리 알려진 걸작이나 개인적 기호 때문에 제외하지 않겠다. 이러한 부정적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하여 저자가 구현하고자 한 목적은 “미술의 역사를 평범한 말로 다시 한 번 설명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미술사의 전후 이야기가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장황한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에 관하여 몇 마디 암시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미술 감상을 돕고자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곰브리치가 이 책에서 인용한 첫 번째 도판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아들 니콜라스의 초상>입니다. 루벤스는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아들을 귀엽게 보아주기를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간직해주는 미술가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물과 꼭 같이 그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대상의 특징을 분명하게 잡아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는 것이 옳을 때도 있는 것(25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성을 따질 때에는 다음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29쪽)”라는 곰브리치의 지적을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저 자신도 초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미술품 감상에 입문하는 초심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곰브리치의 다음 지적도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37쪽)” 역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을 이해함으로써 미술작품을 보는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 안다는 초짜들이 흔히 저지르는 다른 형태의 실수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때로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설익은 지식과 속물근성이 안고 있는 생태적인 위험성애 대하여도 조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본격적으로 원시미술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은 마치 강물의 흐름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낙동강은 태백시에 있는 황지연못에서 시원해서 천삼백여 리를 흘러내려 남해로 흘러든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낙동강에 흘러드는 물줄기 가운데 남해에서 제일 멀리 있는 곳이 황지연못이라는 것이고, 황지연못 이외에서도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낙동강에 합쳐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류에 들어서면 삼각주를 이루면서 강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기를 거듭하게 되는데, 삼각주가 발달한 나일강 같으면 지중해로 나가는 강의 출구가 여럿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술 역시 따로 발전해오던 경향이 만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형식이 갈라져서 나중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과 영웅들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또한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도와주었다.(124쪽)”라고 적은 것처럼 곰브리치는 미술의 이런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러나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오리엔트 종교는 유태교였다.(127쪽)”라고도 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에서도 이런 흐름이 강화되어 갔는데, 6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중세 막강한 힘을 가진 가톨릭이 회화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배경입니다.

 

앞서 미술사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사조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처음 쓰일 때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딕’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 미술비평가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고트족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 이탈리아에 도입한 양식이라고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매너리즘’ 역시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터무니없다거나 기괴하다는 의미를 담은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조롱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413점이나 되는 도판 가운데 제가 알고 있는 작품이 불과 23점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알고 있는 미술가인데도 다른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는 작품을 고르다보니 유명한 작품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비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직 미술에 대한 저의 관심이 일천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12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태고지를 담은 작품을 무려 7점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미술의 기법이나 분야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별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마지막장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미술작품이 당대의 유행을 십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미술사가 유행의 변천사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가장 최근의’ 미술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최근의 유행을 표현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이런 경향이 역사로 남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조의 변화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 세대는 어떤 시점에서는 그 전세대의 규범에 반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각 예술작품은 그 작품이 한 것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으로부터도 동시대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파행하는 것이다.(9쪽)”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거 역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 발견되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새로운 사실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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