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의 보물선
이은상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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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다녀온 이야기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포르투갈로 건너가고 있습니다(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 유럽이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던 진기한 물품에 빠져들 무렵 근동지역에 자리한 이슬람제국이 세력을 키워가면서 무역로는 차단하자 동양에 닿는 해로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항해시대가 열린 것인데, 그 첫 번째 주자는 운 좋게 이슬람세력을 밀어낸 포르투갈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이상훈작가의 <한복 입은 남자; http://blog.joins.com/yang412/13561516>는 루벤스의 그림 <한복 입은 남자>에 등장하는 조선남자가 입은 의복에 착안하여 그 사람이 세종조에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진 장영실일 수 있다는 추론을 세우고 있습니다. 장영실을 이탈리아까지 데려간 사람은 역시 동시대 인도양항로를 주름잡았던 정화일 수도 있다는 정황을 들추어내었습니다. 작가가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에서 착안한 점은, 1)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입던 철릭 위에 팔소매 밑단이 없는 답호를 덧입고 있다는 점, 2) 그림의 하단에 그려진 한 척의 배는 당시의 서양에서 만든 배가 아니라 동양의 선박이라는 점입니다. 또한 1402년에 조선에서 그려진 현존 최고(最古)의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에는 조선 주변국은 물론 아랍, 인도,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까지 표시되어 있고, 특히 아프리카의 경우 사하라 사막과 킬리만자로산, 빅토리아호수와 나일강까지 선명하게 그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1763년에 제작된 천하전여총도는 1418년에 정화가 만든 천하제번식공도를 모사한 것인데, 이 지도가 유럽으로 건너가 콜럼버스는 물론 마젤란, 쿡선장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항해가들이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장영실은 세종 24년(1442년) 5월이후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아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여섯 차례에 걸쳐 인도양 항로를 누빈 정화는 영락제가 죽고 난 다음 아들 홍희제의 핍박으로 10여년간 공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그 아들 선덕제가 들어선 1431년 7차 항해를 떠났다가 선덕제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는 함대를 분리하여 분리된 함대는 부하가 이끌고 명나라로 돌아와 정화가 항해 도중에 죽었다고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했던 정화도 항해를 계속할 수 없어 다시 명나라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며, 세종의 후원으로 장영실을 태우고 8차 항해에 나섰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지난한 항해 끝에 포르투갈을 거쳐 나폴리공국에 도착한 정화와 장영실은 교황의 핍박을 예감하게 되고, 정화는 배를 띄워 먼 세상으로 나서고, 장영실은 피렌체로 피신하게 되며, 결국은 루벤스와도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몇 조각 남을 자료를 바탕으로 꾸며 맞추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노릇이라서, 정화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인은상의 <정화의 보물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저자는 영락제가 정화에게 명을 내려 서쪽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라 명한 배경으로부터 일곱 차례에 걸친 정화의 항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영락제는 명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점을 과시하고 주변국가들을 복속시키기 위하여 항해를 명했던 것입니다. 정화의 1차 항해는 2천톤급 함선 62척으루 구성되어 27,870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 서남부의 캘리컷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시아 제국에 들러 영락제의 즉위를 알리고, 인도양 무역로를 다시 활성화시키려는 의도가 담겼다고 합니다. 저자는 정화가 7차 항해를 마친 1435년 난징에서 사망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아랍상인들을 통하여 유럽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정화의 함대는 유럽에 갈 생각이 없었다고 판단합니다.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교역품이 별볼일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정화의 항해가 있은 다음,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캘리컷에 도착한 이후, 아시아국가들, 특히 중국과 유럽 사이의 교역의 변천을 다루고 있습니다. 명조에서 청조로 바뀌면서 비단과 자기, 그리고 차 등으로 주력 교역품목이 바뀌어간 과정과 무역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사회에 퍼트려 무역역조를 개선하려는 술수를 썼고, 청나라의 중앙정부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은 중국이 외세에 밀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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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
김재원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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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스페인여행의 초반이 그라나다와 코르도바를 거쳐 모로코까지 이베리아반도를 오랫동안 지배한 이슬람문화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이었다면, 모로코에서 돌아와 세비야, 톨레도 그리고 마드리드에 이르기는 여행 후반은 주로 가톨릭문화의 영향을 살펴보는 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당을 중심으로 한 건축과 그 성당이 소장하고 있는 엄청난 규모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을 그저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훑어볼 수밖에 없는 일정과 안목이 아쉬웠습니다. 특히 그저 두어 시간 머물렀던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이 가장 아쉬웠던 곳입니다. 심리학자 폴 퀸네트는 “우리는 자식들에게 속독(速讀)을 가르친다. 아이들이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나절에 다 읽기를 바란다. 대문호의 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은 스미소니언박물관에서 조깅하는 것이나 루브르 박물관 안을 롤러브레이드를 타고 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폴 퀸네트 지음,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 320쪽, 바다출판사, 2014년)”라면서 속독법의 문제를 지적하였지만, 오히려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을 보는 우리의 태도를 나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미술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만난 수많은 교회들에서 스치듯 만난 작품들을 다시 새겨볼 수 있을까 싶어 고른 책이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입니다. 인천 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부설 그리스도미술연구소가 기획한 ‘초기 그리스도교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를 관통하여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 책입니다. 유럽의 문화가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헬레니즘문명과 이어진 그리스도교문명을 따라 형성되어 왔기 때문에 유럽의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리스도교 미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김재원, 윤인복 교수(전, 현 연구소장)와 김정락교수가 필진으로 참여한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술사>는 초기-로마제국-비잔틴-중세-로마네스크-고딕-초기 르네상스-전성기 르네상스(-북유럽 르네상스)-매너리즘-바로크-19세기 전반-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으로 이어지는 연대기적(年代記的) 구조를 기본 뼈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두 번째 특징은 그저 그리스도교 미술의 흐름만을 뒤쫓은 것이 아니라 미술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두루 살피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교회사적 배경, 철학적 배경 그리고 미술사적 현상을 기본으로 하여 그리스도교미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유일신을 신봉하고 그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Messiah)로 믿는 종교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구약을 통하여 구세주의 재림이 예고되어왔는데, 그리스도교는 신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 예언을 이룬 존재라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세레자 요한 등과 같이 여전히 예언자의 하나이며 구세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믿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원 원년에 당시 로마제국의 총독령이었던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하지만 역사적 연구에서는 기원전 3년경으로 보고 있다고 합니다) 30세가 되던 해에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대중 설교를 시작하였고, 33세가 되던 해에 유대교의 제사장들로부터 고발을 당하여 십자가형에 처해졌습니다. 하지만 3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현현했다고 하며, 선교의 의무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그의 제자 12명과 예수 사후에 그리스도교의 포교에 참여한 바오로는 로마제국와 그 변방에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해나갔습니다. 특히 베드로와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선교의 핵심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중심으로부터 확산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흡수한 다양한 민족들을 포용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를 관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역시 선교초기에는 자유롭게 세력을 확산시킬 수 있었지만, 로마제국이 혼란기에 들어서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교는 로마 당국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비밀결사조직처럼 종교활동을 유지하고 선교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선교활동은 신분이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하다가 점차 상류층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재위 284~308년)가 재위하던 시절 그리스도교의 탄압이 절정에 달했지만, 이어진 콘스탄티누스황제(재위 306~3376년) 시절에는 이미 제국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자가 많아졌습니다. 제국의 안에서 여러 세력들과 권력을 나누어 야 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그리스도교 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생겼고, 결국은 밀라노칙령(313년)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도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종교가 되었고, 황제가 임명하는 주교가 관할하는 교회를 중심으로 종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미술은 2세기에 들어 등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교의 성상금지의 영향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밀교(密敎)의 형태를 유지했으며, 무엇보다도 미술을 실천할 경제적인 근거가 그다지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16쪽)”이라고 저자들은 설명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당시 공존했던 고대 종교들이 사실적 혹은 자연주의적 표현에 주력하던 것에 반하여 보다 상징적으로 표현적인 조형성을 선호하고, 장식적 요소가 부각된 형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건축은 가정교회와 카타콤의 형태로 남아있고, 초기 카타콤에는 단순한 형태의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혹은 비둘기나 물고기와 같은 상징물을 그려 넣었다가 점차 프레스코형식의 벽화를 남겼습니다. 양팔을 벌려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선한 목자와 같은 인간형상을 재현하다가 3세기 말경에는 최후의 만찬이나 제자들 앞에서 설교하는 예수와 같은 역사적 소재를 그렸다고 합니다.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은 뒤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의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2세기경에 등장한 교부-사도들에 이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8세기 무렵까지 그리스도교의 이론을 세우고 이단과의 논쟁을 통하여 교회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공인된 그리스도교는 긴 신랑을 가진 장방형의 평면구조를 가진 바실리카형식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교회는 ‘노아의 방주에서 유래된 배’라는 개념으로, 신국 혹은 하늘의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대리적 장소이자 전시장이며, 신앙의 능력이 발생하는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초기 교회에는 회화보다는 벽이나 바닥을 장식하는 모자이크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리스도의 현현과 사도파견과 같은 주제들을 황제의 의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냈고, 사도나 성인들은 로마의 원로원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기원 400년경 콘스탄티누스황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천도함에 따라 로마제국은 동서로 나뉘었습니다. 476년 서로마제국이 이방민족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갈등으로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로마제국은 그리스의 고전주의와 인본주의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리스도교 문화를 접목하여 발전시켰고,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천년이 넘도록 이어졌습니다. 헬레니즘 미술을 계승한 비잔틴미술은 동방적 요소인 소아시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미술전통이 융합되어 만들어졌습니다.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대표되는 비잔틴건축은 로마교회의 장방형의 내부와 중앙집중형 건축의 특성을 결합하고, 중앙에 거대한 돔을 얹었습니다. 돔의 아래로는 40여개의 창문을 띠처럼 둘러서 빛의 고리를 만들었고, 둥근 원반으로 보이는 돔의 내부천장이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의 띠에 의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수평적 위계를 드러낸 바실리카교회와는 달리 수직적 위계를 강조한 것이며, 그리스도교 건축이 추구한 상징적이며 초월적 분위기를 드러내려한 것이라고 합니다.

 

동로마제국이 비잔틴미술을 발전시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의 유럽은 크고 작은 국가들이 난립하느라 문명이 쇠퇴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를 중세 암흑기라고 합니다.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교는 유럽으로 이주해온 이방 민족에게도 전파되었기 때문에 세속의 권력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에도 교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6세기경부터 세속과 분리되어 영성을 쌓는 장소로 세워지기 시작한 수도원은 중세문화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8세기 경 메로빙거왕조를 폐한 카롤링거왕조의 카를대제에 이르러 유럽이 다시 통합되었고, 800년에는 교황에 의하여 카를대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봉해졌습니다. 카를대제는 혼란기를 거치는 동안 피폐해진 유럽의 문화를 재건하였습니다.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하기보다는 민속적이며 사실성과 묘사력이 결여된 당시의 민속미술행태를 지양하고, 고대 미술과의 접목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카를 대제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고대 예술품을 모사하던 수준을 넘어 본격적인 미술사조라고 할 로마네스크양식이 등장한 것은 936년 오토왕조가 성립되면서입니다. 무거운 반원통형의 아치와 표현주의적이며 고졸한 형태의 조각 그리고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받은 회화와 스테인드글라스 혹은 필사본 삽화를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으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교육도시 살라망카에서 만난 성당은 고딕양식의 신성당과 로마네스크양식의 구성당이 같이 있어, 한 장소에서 고딕양식과 로마네스크양식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건물을 높이 쌓기 위하여 창문이 아주 적고 벽이 두꺼운 것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징이라면, 건축술의 발달로 벽이 얇아지고 창문이 많아지며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장식이 들어가 있으면 고딕양식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습니다. 16세기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에서 중세를 비하하는 의미를 담은 용어로 사용한 것으로 시작된 고딕, 즉 고트족의 미술과 문화는 야만적이고, 무지하고, 고전적인 미감이 결여된 낙후된 미술로 자리매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풍을 따르려 했던 로마네스크와는 달리 고딕예술은 독창적으로 창조된 자생적 예술이라는데 의의가 있다고 합니다. 고딕예술은 물질을 통해 신의 섭리와 원리를 체감하고 신의 존재를 실감하려 했는데, 특히 빛을 통해 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발전된 건축기술은 닫혀있던 벽을 열어 더 많은 자연광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벽이 있던 공간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신비함을 더하여 전성기의 비잔틴 회화에 버금가는 다채로운 색감을 되찾아내었던 것입니다.

 

오랜 기간 유럽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봉건제도는 상공업과 무역이 발달함에 따라 도시국가들이 등장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중앙으로 집중되었던 권력이 지방으로 흩어지면서 교회 역시 쇠퇴의 기미를 보였는데, 14세기 전반에 걸쳐 로마에 있던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가면서 교황이 프랑스 국왕의 통제를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철학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시대와는 달리 인간과 자연을 부정하며 신을 중심으로 한 철학이 주류를 이루던 중세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철학이 태동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미술은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인체와 생태에 대한 이성적이고 과학적 탐구를 바탕으로 회화, 건축, 조각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미술에는 원근법이 등장하게 되었고, 중세미술의 주류를 이루던 종교미술 외에도 고대 신화와 역사를 신플라톤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사조가 등장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예로 들었습니다. “미의 여신 비너스는 신 플라톤적 관점에 따라 세속적인 것을 탈피하고, <천상의 비너스>로서 이 세상에 오기 전 인간의 영혼과 육신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를 보여주는 존재가 된다.(155쪽)”

 

르네상스시기에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절정을 이룬 그리스도교 미술은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근대에 이르러 등장하는 새로운 예술사조에서는 중심에서 점차 밀려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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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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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다시 읽었습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던 것이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가 봅니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집에 있던 헤밍웨이 전집을 독파하는 것으로 피서를 삼겠다고 작정하고 읽은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품의 무대가 되는 스페인의 내전의 성격은 전혀 아는 바 없이 그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국인 로버트 조던이 좋은 편이고 조던이 상대로 싸우는 파시스트가 나쁜 편이라는 이분법을 적용하여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스페인 내전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된 것은 스페인여행기를 쓰면서 참고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스페인 내전(스페인어: Guerra Civil Española)은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반란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입니다. 1936년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이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1939년 4월 1일에 공화파 정부가 마드리드에서 항복하여 프랑코측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소비에트 연방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으로 구성된 국제여단이 집권 공화국의 인민전선을 지원하고,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를 파시스트 진영인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 그리고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지원한 것입니다.

 

내전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은 1936년 2월 총선 결과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된 인민 전선은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시행하였고, 스페인의 지주·자본가·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은 고조되었던 것이 계기였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노동자 농민들은 시민군을 조직하여 공화파를 지원하였지만, 공화파는 시민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불안을 느껴 방관하는 바람에 반란군의 점령지역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고, 오히려 시민군이 게릴라활동을 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1937년 5월의 마지막 주에 미국 몬태나 출신의 로버트 조던이 게릴라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성공하기까지의 3박4일에 걸친 과정을 풀어가고 있습니다. 조던은 라그랑하를 거쳐 세고비야를 점령하려는 작전을 세운 골츠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에 위치한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현지에서 조던을 지원하기로 한 민병대를 지휘하는 파블로는 다리를 폭파한 다음에 자신들의 안위가 더 걱정인 것 같습니다. 조던과 협조하는 척하다가 습격당일 아침 폭약과 뇌관을 가지고 사라졌다가 결국은 다시 돌아와 습격에 참여하는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작가는 3박4일의 긴박한 시간 속에서 다리 폭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죽음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작가는 조던이 죽음을 맞는 결말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파블로의 집시아내인 필라르의 점술을 통하여 조던의 운명을 내비치는 것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변주해내고 있습니다. 특히 조던의 경우는 현장에 도착해서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깨닫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옮긴이는 조던의 이런 면을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안녕을 포기한 채 오직 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조국과는 무관한 스페인의 내전에서 조던이 이루고 싶었던 공동선은 목숨을 다할 가치가 있었을까요? 조던이 죽음을 앞두고 만난 마리아와 사랑을 탐닉하는 모습은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을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지면서 허무한 느낌마저 드는 것 같습니다.

 

박정은작가는 <스페인 소도시 여행; http://blog.joins.com/yang412/13552146>에서 헤밍웨이가 안달루시아의 론다에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전하면서 론다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인용되어 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바로 민병대가 점령한 절벽 위의 작은 마을에서 파시스트를 처형하여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는 장면이입니다. 그리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황소와 겨루는 필라르의 옛남편의 모습을 통하여 투우사의 고민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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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이야기 - 그들은 어떻게 부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홍익희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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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스페인-모로코-포르쿠갈을 다녀와서 <메디칼 타임즈>라는 인터넷보건의료신문에서 ‘양기화의 이야기가 있는 세계여행(http://www.medicaltimes.com/Users4/News/NewsList.html?nSection=32)’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여행지에 관하여 궁금한 점을 인터넷을 찾거나 혹은 책을 읽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베리아반도를 점령했던 무슬림들이 유대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고대 그리스문명을 현대에 전하는 가교역할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가나안 지방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한 이베리아반도에서 활약을 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졌습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른 책이 홍익희님의 <유대인 이야기>입니다. 홍익희님은 KOTRA에 입사해서보고타, 상파울루, 마드리드, 뉴욕, 파나마, 멕시코, 마드리드 등지에서 근무하다 2010년 밀라노 무역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는데, 해외근무를 하면서 특히 세계를 움직이는 곳에는 유대인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유대인들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거슬러 추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의 많은 부분들은 드러나지 않고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했습니다만, 오늘날 그들이 쥐고 있는 막강한 힘 때문인지 유대인에 관한 저서들은 적지 않게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성서시대로부터 유대인들이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되는 과정, 로마제국의 노림수에 따라서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집단으로 몰려 가톨릭의 박해를 받게 되는 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지역에서 힘이 모여드는 곳에는 유대인이 있었고, 그들이 떠나면 힘이 스러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로마제국-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이어지는 힘의 움직임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중세 무렵까지는 동아시아 문명은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만, 이슬람문명에 이은 페르시야 문명시기에는 중동이 각광을 받았고, 이슬람시기의 이베리아반도, 그 뒤를 이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제국을 이루었으며, 이어서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힘의 중심이 이동해갔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동아시아의 무게가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힘의 움직임이 순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그 뒤에 유대인들이 숨어있었다는 것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기원전 가나안 지역에 자리잡은 유대인들이 왕국을 이루었을 때는 그 세력을 따라서 유럽과 아프리카지역으로 퍼져 살게 되었고, 로마제국에 저항하던 유대왕국이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은 유럽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슬람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자리를 틀 무렵에는 유대인들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서로 상부상조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 흩어져있던 유대인들이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이 뛰어난 활약을 벌일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교육에 있었다고 합니다. 바빌로니아왕국에 의하여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한 뒤에, 유대민족들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을 때, 유대교 성전이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모두 죽은 다음에는 종교를 지키기 위하여 시나고그를 중심으로 구약성서를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유대교도라면 누구나 열세상에 성인식을 치르면 성경을 읽어야했다고 합니다. 하스모니안왕조의 살로메 알렉산드라여왕 시절에는 세 살부터 히브리어를 배워 구약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인데,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모두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의 침략이후 각지에 흩어져 살게 된 유대인들은 지역별로 단단한 결속력을 보였을 뿐 아니라 지역을 뛰어넘어 상부상조하며 정보를 공유하는 체계가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것입니다. 일찍 학문에 눈을 뜨고, 뛰어난 결속력을 가진 민족적 특성이 오늘날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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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부의 시대 - 21-22세기 미래 예측 보고서
로버트 J. 실러 외 지음, 이경남 옮김, 이그나시오 팔라시오스-후에르타 기획 / 알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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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옛날에는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곤 했습니다. 한 해의 운수를 미리 알아본다는 것인데, 맞을 거라는 생각보다 재미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운을 기대하기보다는 조심하라는 대목에 무게를 두고 몸가짐을 다스려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역술인들이 금년 한 해 생길 것이라는 사건들을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맞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그만큼 미래를 예측한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이겠지요.

 

미래를 예측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일기예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가끔은 ‘기상청 공무원들이 수퍼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모양’이라고 농담을 합니다만, 한나절 뒤 기상상황도 틀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과학적 예측이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한 나절 뒤의 기상을 맞추는 일도 쉽지가 않은데 100년 뒤의 세상을 미리 예측해보는 책이 나왔습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의 이그나시오 팔라시오-후에르타교수가 기획한 <새로운 부의 시대>입니다. 1930년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00년 후 세계를 예측한 짤막한 에세이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1930년이면 전 세계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때였을 것입니다. 당연히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케인즈는 이런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무너뜨리며 ‘100년 후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지고 잘사는 법을 터득하는 시대가 들어설 것이며, 특히 생활수준이 네 배에서 여덟 배가량 좋아질 것이라 예측했고, 또한 사람들의 주당 근무 시간이 약 15시간으로 줄어들 것’이라고도 내다보았다고 합니다.(7쪽) ‘경제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문젯거리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도 2015년에 바라보는 2030년에 주당 근무시간이 15시간으로 줄어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케인즈의 에세이를 읽은 팔라시오-후에르타교수는 케인즈의 예측은 그렇다고 치고, ‘지금 시대의 석학들은 100년 뒤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드림팀을 구성하였다고 했습니다. ‘100년 뒤의 세상에 대한 의문은 어렵지만 흥미로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경제․사회학자들에게 100년 뒤의 세상을 예측해달라는 제안서를 보냈는데, 우려와는 달리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앨빈 로스교수는 ‘거절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라면서, 케네스 애로교수는 ‘확인할 수 없는 예측을,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예측하라는 제의는 단호히 거부해야 할 유혹’이라면서도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사람들과 공개적으로 나눌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혹은 ‘자신은 과거를 이해하려는 편이지 미래를 예측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완곡하게 거절한 분들도 계셨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모두 열 분의 석학들이 참여하여 쓴 미래의 예측서를 각각의 장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책 내용을 보면 원고의 분량에 제한을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반도에서 발생한 어마어마한 제도적 차이에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부국과 빈국으로 나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면서 남북한을 예로 들어 ‘왜 그토록 여러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는지’ 더 나아가 오늘날 ‘번영과 빈곤, 세계 불평등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를 간단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설명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2937488>를 쓴 MIT 경제학과의 대런 애쓰모글루교수의 예측을 필두로 하여,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과의 앵거스 디턴교수와 애비너시 K. 딕시트교수,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의 에드워드 L. 글레이저교수와 앨빈 E. 로스교수 그리고 마틴 L. 와이츠먼교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폼페우파브라대학교 경제학과의 안드레우 마스-콜레이교수, 예일대학교 정치경제학과의 존 E. 로머교수와 로버트 J. 실러교수, MIT 경제학과의 로버트 M. 솔로교수 등이 필진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시각에 따라서는 미래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한된 지면이라서 열 분의 예측을 모두 정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일부만 소개하려 합니다. 제 입맛에 맞는 예측만 고를 것 같습니다.

 

100년 뒤의 미래를 예측하는 프로젝트의 첫 번째 주자인 애쓰모글루교수를 건너 뛰면 섭섭해 할 것 같습니다. 애쓰모글루교수는 ‘사회학의 지난 예측 실적을 따져보면, 100년 뒤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우리의 능력에 별다른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미래를 예측하다 보면, 앞에 놓인 도전 과제가 구체적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고 하였습니다(19쪽). 따라서 예측은 우리의 시대상을 규정하는 트렌드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100년 뒤를 예측하기 위하여 애쓰모글루교수는 지난 100년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삶을 규정했던 중요한 트렌드를 먼저 정리했습니다. 1. 권리혁명, 2. 테크놀로지의 질주, 3. 거침없는 성장, 4. 고르지 않는 성장, 5. 노동과 임금의 변형, 6. 보건혁명, 7. 국경없는 기술, 8. 평화의 세기, 전쟁의 세기, 9. 정치에서의 반계몽주의, 10. 인구폭발과 자원 그리고 환경 등입니다. 이것들은 지난 100년간의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애쓰모글루교수는 열 가지 트렌드를 견인하는 핵심을 권리혁명으로 보았습니다. 착취적제도에서 포용적제도로 향하는 움직임, 즉 권리혁명이 지난 수세기 동안 이어져 왔지만 여전히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힘을 축적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20세기의 전반적 트렌드는 보다 포용적인 제도를 향해 나아갔고, 그것은 권리혁명과 행보를 같이 했다.(44쪽)”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분석된 과거 100년간의 트렌드가 다음 100년에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인류의 미래가 권리혁명의 향배에 달려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야 하는 여러 트렌드들을 생각할 때, 지구의 건강한 미래를 바라는 우리의 희망은 다시 권리혁명의 지속과 강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73쪽)”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디턴교수는 현 시점이 케인즈의 시대만큼 불확실하고 암울한 상황임을 지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전망을 견지하는 것 같습니다. 부정적 주장은 너무 강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틀리기도 했으며, 범위가 좁고 근거도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건강과 부의 측면에서 미래를 바라본다면, 1. 성장은 계속 될 것이며, 2. 인류는 더 건강해질 것이고, 3. 기타 사항으로, 폭력이 줄고, 민주주의는 더욱 확산될 것이며, 교육수준은 더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다만 ‘인류가 기후변화를 적절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는 낙관이 어렵지만, ‘임박한 위험에 맞서는 집단적 조치와 진보의 힘은 강력하기 때문에 기후문제에 있어서도 인류는 해답을 찾아낼 것으로 믿는다고 했습니다. 로스교수 역시 의학과 정보 분야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인류의 미래에 대하여 비교적 낙관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습니다.

 

글레이저교수는 인간의 도덕적 특성에 주목합니다. 좀 더 풍족한 미래에는 탐욕과 물질주의가 수그러들 것이라는 케인즈의 예측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케인즈교수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선행을 베풀며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람들과, 사물에서 직접적인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보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132쪽)”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글레이저교수는 우리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엇비슷하게 가지고 있는, 여전히 같은 유형의 피조물인 까닭에 “전통적인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부유해진다고 해서 탐욕, 시기, 나태, 폭음, 폭식, 정욕, 분노, 자만심 등 일곱 가지 대죄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133쪽)”라고 하였습니다.

 

인류번영을 위협하는 요소로는 ‘갈등’과 ‘자연재해’를 들었습니다. 강대국의 갈등으로 인한 대형 전쟁의 위험은 크게 감소하였지만 국지전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고, 불량국가나 테러리스트 집단을 이끄는 파괴주의자들의 위협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자연재해에 대한 글레이저교수의 예측에는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태풍, 지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는 국지적으로는 막대한 피해를 야기할 수 있지만, 그 영향은 오래 가지 않지만, 전염병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세 유럽을 공포에 빠트렸던 페스트와 20세기 초반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냈던 인플루엔자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아프리카에서 발생하고 있는 에볼라의 경우처럼 현대의학의 수준이나 국제적 공중보건공조체계 역시 중세는 물론 20세기와도 수준이 달라졌습니다. 따라서 저의 개인적 견해로는 과거와 같은 치명적인 상황을 초래할 전염병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다만 자연재해의 경우는 심각할 수도 있는 몇 가지 상황이 있습니다. 지구의 지배자 공룡을 전멸시킨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소행성의 충돌, 혹은 지구적 환경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는 대형화산의 폭발과 같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로머교수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마련되지 못하면 지구적 위기상황이 초래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특히 화석에너지의 지나친 사용에 따른 온실가스문제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현안임에도 미국과 중국 같이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국가들이 이를 외면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그의 미래예측은 미국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계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반면 와이츠먼교수는 화석에너지 뿐 아니라 온실효과로 인하여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였을 때 일어날 것으로 예사되는 문제로까지 확대하였습니다. 바다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나 툰드라지대에 얼은 상태로 붙잡혀 있는 메탄가스가 풀려나서 대기로 유입되는 악성순환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도 있다고 전망합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지구공학자들이 내놓은 방안에 우려도 표시합니다. 심지어는 영국왕립학회가 지구공학을 “인류가 야기한 기후 변화를 중화시키기 위해 지구 환경에 가하는 대규모의 고의적 조작(301쪽)”이라고 극단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실러교수의 미래예측을 살펴보겠습니다. 제목이 ‘다음 세기의 위험과 그 관리법’입니다. 미래에 예측가능한 위험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위험(危險)이란 일반적으로 손해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개념입니다. 위험으로부터 입을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위험관리라는 기법입니다. 위험을 관리하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먼저 위험 요소를 인식하고(risk identification), 위험한 정도를 평가하여(risk assessment), 위험요소를 관리하고(risk management), 그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risk communication)하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위험관리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위험관리를 통하여 상응하는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한 사항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시너지를 낼 수 있어야 하며, 전체의 과정이 투명해야 하는 것 등입니다. 실러교수는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활용하여 다양한 위험관리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고 장기적 계약에 따라 이행하게 되면 인간의 복지에 미치는 재앙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열 분의 필자들은 조심스럽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미래예측을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100년 뒤의 세계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누구에게나 궁금한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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