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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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살면서 나름대로 정한 원칙을 지키려 노력을 하지만 때로는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주 드물지만 원칙을 고수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면 한편으로는 고지식을 탓하면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이 부럽기도 합니다.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베크만의 <오베라는 남자>를 읽으면서 원칙을 고수하는 멋진 모습을 만나서 좋았고, 그러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가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인공 스크루지 영감처럼 세상과 담쌓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드물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얼어붙었던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교감을 이룬다는 식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역시 더불어 사는 모습이 보기에도 좋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베라는 남자>에서는 생각에 빠져들게 하는 대목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내몰리는 상황, 아내가 죽었을 때도 일터를 지켰던 남자가 일터를 잃자 죽음을 모색한다는 상황, 그리고 주민들마다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지침에 따라서 업무를 집행하는 공무원 등등...

 

모두 마흔 개의 에피소드에 달려있는 제목들은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오베라는...’, 그리고 ‘오베였던...’. 그렇습니다. ‘오베였던...’이라는 제목의 글들은 오베의 과거사입니다. 성장해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그리고 아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합니다. 그런가하면 ‘오베라는...’이라는 글은 지금의 오베가 겪는 일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오베의 과거와 현재가 교대로 등장하며, 때로는 현재와 과거의 일이 선후가 뒤바뀌기도 해서 헷갈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집중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일까요?

 

이야기를 되돌려서 아내의 장례를 치루고 바로 출근했던 오베가 일터를 잃은 뒤에, 아내의 빈자리를 절감하면서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 죽어야 하겠다고 마음먹는 과정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주변사람들에게 무언가 미심쩍은 행동을 보인다고 하는데, 오베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런 전조증상을 깨닫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오베의 죽음을 방해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 조금은 아쉬운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충분히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점’을 저자가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베의 과거를 돌아보면 세상과 담을 쌓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온갖 세상일에 간섭하면서 살아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을 자치회장을 맡아 마을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써온 것이라든가, 공무원들의 말도 안되는 행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끈질기게 투쟁하여 소신을 관철시키는 모습 등이 그렇습니다. 그의 소신 가운데 ‘남을 고자질하지 않는 일’은 정말 따라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가슴에 품음으로 해서 자신이 도둑으로 몰리는 상황이 되어도 오베는 남을 고자질하는 일은 할 수 없다는 소신을 지켰던 것입니다. 이런 오베를 알아본 그의 아내 소냐 역시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읽어가면서 깨닫게 됩니다. 친구들이 그녀의 선택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했을 때도, ‘정의와, 페어플레이와, 근면한 노동과, 옳은 것이 옳은 것이 되어야 하는 세계를 확고하게 믿는(206쪽)’ 오베가 역시 오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혼해 줘요’라고 오베에게 말한 소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융통성이 없는 남자, 오베가 주인공인 탓인지 옮긴이도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고 원고에 충실하였던 것 같습니다. BMW로 차를 바꾼 루네를 다시는 보지 않았던 오베가 새차를 사려는 아드리안을 위하여 딜러와 협상하여 도요타를 살 수 있도록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나마 이런 조건으로 도요다 정도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 빌어먹을 꼬마는 현대차를 보던 중이어서, 하마터먼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422쪽)’라는 장면을 곧이곧대로 번역을 해놓은 것입니다. 만약 제가 번역을 맡았더라면 거꾸로 옮겼을 것 같습니다. ㅋ

 

각설을 하고, 읽다보면 슬그머니 웃음도 나오고, 가슴이 짠한 장면도 나와 다양한 감정을 연주하게 만드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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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눈물 철학 스케치 5
올리비아 비앙키 지음, 에두아르 바리보 그림, 김동훈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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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를 시작하고 두어 달쯤 지나서 김선희교수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com/yang412/12474996>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따로 적어둔 한 줄 요약을 보니,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적 배경인 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유가 어떻게 결실을 맺게 되었는지를 뒤쫓고, 이를 바탕으로 현대철학이 현대인의 삶에 기여할 방도를 도출하고 있습니다.”라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김신영교수님은 “울고 있다, 우리 시대는. 울고 있다, 나는. 현대인의 눈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고여 있다.”라고 프롤로그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눈물이 보이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삶이 너무 고단해서 울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김신영교수님은 철학자야말로 이처럼 울고 있는 세상을 치유할 사람이라고 합니다.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사유를 통하여 물음을 던지는 일이자 던져진 물음에 답을 구하는 일이며, 철학적 탐구의 목적은 지식과 진리, 현실, 이성, 의미, 가치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있기 때문이라도 합니다. 그래서 “삶이 고달플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달픈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다. 마치 쇼펜하우어가 그랬고 니체가 그랬듯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의 눈물은 ‘고통의 근원’을 찾는 그리고 니체의 눈물은 ‘고통의 치료제’를 찾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헤겔의 눈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헤겔을 전공한 올리비아 비앙키가 쓴 <헤겔의 눈물>에서 같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키백과사전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관념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철학자이다.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정신이 변증법적 과정을 경유해서 자연·역사·사회·국가 등의 현실이 되어 자기 발전을 해가는 체계를 종합 정리하였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헤겔철학은 비판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우선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나치가 헤겔철학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한 것을 두고 헤겔철학의 본질이 전체주의적 세계관과 맞닿아있다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후대의 철학자들이 자신의 철학을 세우기 위하여 헤겔 철학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헤겔의 철학은 난해한 바 있어 선뜻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던 면도 있었습니다. “헤겔은 어렵다. 헤겔로 철학 공부를 시작하느니 라흐마니노프로 피아노에 입문하거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는 편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출판사가 소개하는 농담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이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의 눈물>은 헤겔철학의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입문서들이 긍정적인 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헤겔 철학의 난점이나 모순까지도 비판하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눈물>에서 보는 또 다른 특징은 에두아르 바리보의 그림입니다. 모두 61개의 글에 곁들여진 71개의 도판은 올리비아 비앙키의 헤겔철학에 관한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것들입니다. 때로는 난해하지만, 텍스트의 개념이 금방 머릿속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헤겔의 눈물>을 기획한 ‘철학 스케치 시리즈는 저자와 삽화가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공동으로 참여한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핵심 철학을 개성 있게 포착하는 일종의 시각적 실험으로, 난해한 용어와 개념 사용을 피하는 동시에 재치와 깊이가 공존하는 글과 삽화로 즐기는 철학, 보는 철학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보려는 의도라고 합니다.

 

‘헤겔철학’하면 정반합(正反合)의 개념으로 요약되는 변증법이 우선 떠오릅니다. 세상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변증법은 본질적으로 내부에 포함되어 있는 자기부정 즉 모순에 있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만물은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를 정(正)이라 하면 모순에 의한 자기부정이 반(反)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합(合)의 상태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의 결과물인 합(合)이 다시 정(正)이 되면서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합이라는 표현은 하인리히 샬리베우스(Heinrich Moritz Chalybaus)가 헤겔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하며, 헤겔은 ‘즉자-대자-즉자대자’, 혹은 ‘긍정-부정-부정의 부정’이라는 표현했다고 합니다.(위키 백과사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에서 인용)

 

올리비아 비앙키는 헤겔의 철학을 ‘자기실현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개인에게 자기실현이란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의존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전적으로 온전한 자유를 실현하고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정신을 확인할 수 있게 보여 주려면, 영원히 기계적으로 윙윙거리며 작동하기만 하는 직접적인 자연적 실존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16쪽)”라고 합니다. 헤겔에게 자연은 정신이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기반이지만, 극단적인 기후조건에서는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찌는 듯한 열기는 너무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어 이를 극복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의미로 트레오레(아프리카 흑인을 지칭하는 개념)의 눈물을 말합니다. 헤겔의 이런 생각은 당시 유행하던 유럽 밖의 세상은 열등하다는 서구중심의 사고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예수 수난의 이야기들을 그리면서 너무 큰 감동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안젤리코의 경험을 인용하면서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이 묘사하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를 일치시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안젤리코의 그림에서 보는 화가의 천재적 재능은 화가의 것이 아니라 종교에 자신을 맡긴 결과로서 기독교의 천재성이라고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프라 안젤리코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로서의 삶을 살면서 신앙과 회화예술을 성공적으로 접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에서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임을 알려주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14세기에 그려진 작품임에도 채색이 선명한 것은 나무판에 그려진 템페라방식으로 그려진데다가 금과 청금석이라는 보석을 갈아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종교는 신적인 정신의 산물이지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 인간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125쪽)”라고 헤겔은 말했습니다. 인간이 신과 화해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신 자신이 인간들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적, 시간적 존재가 된 신은 인간과의 화해를 최종적으로 확정한 것이라고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흘린 눈물은 하느님의 아들이 겪고 받아들인 고통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본받아 신과 자신의 화해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기독교를 완결된 종교로 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적인 것에 대한 서로 다른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종교가 각각 존재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교를 자연종교, 정신적 개별성의 종교 그리고 계시된 종교로 분류했습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역사에 관한 헤겔의 철학 역시 저자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역사는 이성의 지배를 따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파악할 것이며, 직업적 역사가들에 의해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헤겔은 경고합니다. <역사철학강의>에서 역사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하는데, “첫째 단계에서는 외부의 앞선 문명으로부터 지식과 문화를 흡수하여 내부에서 일어나는 힘과 융합되며 민족이 차근히 발전해 나간다. 그 끝 무렵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유입과 내부로부터의 분출이 성공적으로 융화되어 선행하는 문명과 대결할 수 있는 독자적 역량을 북돋운다. 둘째 단계에서는 마침내 선행 문명에 대한 승리를 거두어 행복의 시기를 구가하나, 이렇게 민족이 외부를 향하게 되면 내부의 정치기구가 느슨해지고 긴장이 이완되어 내부 분열이 생겨난다. 그러한 단계를 거쳐 마침내 마지막 단계에서는 좀 더 고도의 정신을 소유한 민족과 충돌하여 몰락하게 된다. 헤겔은 이러한 과정을 세계사의 모든 민족에게서 동일한 양상으로 발생하는 보편적 과정이라고 주장한다.”라고 요약합니다.(위키백과, ‘역사철학강의’에서 인용)

 

정신이 보편적 역사 속에서 파악한 자기의식을 바탕으로 발전하면서 민족과 국가라는 구체적 형태를 갖추어 가게 되는데, 그 정신의 활동이 활기를 잃게 되면 정신은 그 민족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향해 떠나간다고 비유합니다. 과거의 지구상에서 꽃을 피웠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이슬람 문명의 부침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입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진보를 향한 치열한 고민이 사라지고 타성적 흐름에 맡기는 순간 개인이나 민족은 몰락의 길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했지만, 이미 멸망 이전부터 멸망에 이르는 수순을 밟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 때 본토를 지배했지만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한 민족들이 있습니다.

 

헤겔은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신이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으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역사를 이루는 개인들이나 개별적인 사건들은 이성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헤겔의 철학을 결과의 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악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기전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하는데, ‘이성이 자기 대신 열정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을 이성의 책략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 결과 피해와 손실을 겪는 것은 오직 이성이 그것을 통해 현존에 이르게 되는 수단인 열정뿐이다.(50쪽)’라고 설명합니다.

 

헤겔에 있어 국가는 최고의 이성적 실체로 인간이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의무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정신이 세계 안에서 구체화되는 계기가 바로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보다 더 높은 것은 없으며, 개인은 국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합리적 존재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분이 있다가도 외국과의 전쟁을 통하여 국내의 평화를 이룩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전쟁이 역사적인 필요악으로 보았던 칸트와는 달리 헤겔은 전쟁이 민족의 생존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보아, 절대적 악이 아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전쟁 또한 세계를 움직이는 모순의 하나로 본 것입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면, 존재하는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사유 안에서 자신의 시대를 파악하는 것이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초월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헤겔은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철학이 근원적으로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던 니체와는 다른 입장을 가졌던 것입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이야기로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철학이 회색으로만 세상을 그리게 되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낡은 것이 되며, 회색으로만 그리는 것으로는 다시 젊음을 되찾을 수 없고 오로지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날기 시작한다.(104쪽)”는 말은 <법철학>의 서문에 적혀 있습니다. 철학자는 현실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화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존재한는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회색조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하며, 실제 세계가 몰락할 때 그것에 대해 서술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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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4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인환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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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위하여 해외여행을 하신다는 이희인님께서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읽었다면서 소개한 두 권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오래 되었습니다만, 여성과 관련된 주제로 쓴 책읽기에서도 인용되었던 것을 읽은 기억이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입니다. 140쪽이 되지 않은 가벼운 분량의 책을 꼭 베트남에 가서 읽어야 하는가하는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희인님은 “인도차이나가 가진 무한한 풍요로움은 이 땅이 겪어야 할 아픈 성장통을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사내들이 가만두지 않는 예쁘장한 소녀처럼 이 축복받은 땅을 서구 강대국들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라고 날선 시각을 앞세우는 듯합니다. 그리하여 “꽤 가학적인 프랑스 통치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베트남은 미국에 의해 또다시 고난과 상처의 땅으로 변한다.”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과정을 지켜본 서구세계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던 점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14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33년 프랑스로 귀국하여 공부를 계속한 다음 결혼을 하고 작품활동을 하게 되는데, 1984년에 출간한 <연인>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였다고 합니다. <연인>은 등장인물들 모두가 비정상적인만큼 복잡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남편이 두 아들과 어린 딸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되면서 큰 아들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큰 아들은 이를 빌미로 두 동생에게 군림하면서도 도박과 마약에 빠져들면서 가족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게 됩니다. 이렇듯 복잡한 가족구조에서 탈출하려는 욕망을 품었던 때문인지, 주인공은 열다섯 살 반이 되던 해 사이공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열두 살 연상의 중국인 사내의 유혹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마도 나룻배에 같이 실린 중국인 사내의 리무진에 홀렸던 것일 터이다. 스물일곱의 중국인 사내가 아무리 관능적으로 보였다고는 하지만 불과 열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몸을 탐하는 것을 보면 롤리타 콤플렉스 같은 성도착증이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콜롱에 있는 중국인 사내의 집에 처음 가던 날, 여자 아이는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더 좋겠어요. 날 사랑한다 해도, 당신이 습관적으로 다른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대해 주세요.”라고 도발적으로 말합니다. 그녀의 첫 경험은 고통이었지만, ‘천천히 고통에서 빠져나와 쾌락으로 빨려 들어가, 향락을 즐긴다.’라고 적은 것을 보면 그녀는 이미 뜨거운 피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중국인 사내는 그녀의 가족들을 초대해서 저녁을 사기도 하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중국인 사내와의 관계를 의심해서 그녀를 쥐잡듯 닦달을 하지만 그녀는 딱 잡아떼고는 중국인 사내와의 관계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중국인 사내와 만나기 위하여 외박을 하는 등 기숙사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사감의 지적에 대하여 “저 아이는 언제나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던 아이예요. 만약 제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면 저 아이는 도망쳐 버릴 거예요.”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녀의 어머니의 정신세계도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한편 중국인 사내는 부자인 아버지에게 프랑스 소녀와의 관계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거절당하면서 그녀는 중국인 사내와의 관계를 청산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적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아마도 중국인 사내와의 관계가 그녀 주변에 알려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그녀는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로 향하게 되고, 그녀가 배를 타고 떠나는 날 중국인 사내는 리무진 뒷자리에 몸을 싣고 작별을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중국인이기에 또 그런 종류의 연인들은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그녀가 프랑스로 귀국한 다음에 전개되는 이야기와 베트남에서 겪은 이야기들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그녀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전개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인>이 발표되고 세인들의 주목을 받은 배경에는 코친차이나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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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 - 사춘기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불온서적들
이재익.김훈종.이승훈 지음 / 시공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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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줄이나 읽는 사람치고 한창 클 때 금지된 책을 은밀하게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금지된 책의 의미는 물론 19금에서부터 이념서적까지 다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경우도 별다를 것은 없었지만, 뭐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자랑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고, 마음 한 구석에 감추어 두는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똑 같지 않아서 색다른 경험을 동무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몸살이 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빨간책>의 저자들이 이런 분들인 듯, 폭풍상장의 상징으로 그런 책들을 읽은 기억들을 남들과 공감해보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요즘 개그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한 형식으로 방청객들의 격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코너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세분의 공동저자들은 잘나가는 SBS 라디오 피디이자, 저는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화제의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세 분 중에 이재익님은 <나 이재익, 크리에이터; http://blog.joins.com/yang412/12899256>으로 저를 좌절케 만든 분이기도 합니다. 직업 탓인지 때로는 책을 분석적으로 읽기도 합니다. <빨간책>을 분해해보았습니다. 세분이 쓴 31꼭지의 글을 1부 ‘언제쯤 어른이 될까’, 2부 ‘그렇게 우리는 자란다’, 3부 ‘소년은 더 이상 울지 않는다’로 나누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김종훈님의 글은 세 가지 주제에 대하여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지만, 이재익님은 1부와 2부에 편중되어 있고, 이승훈님은 3부와 2부에 편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성장이라는 것이 칼로 무를 자르듯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서 적절하게 분류를 했더라도 눈에 띄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빨간책>을 기획하신 분께서 목차에 글쓴이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일이 찾아서 정리하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목차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생각하니 출판사로서의 시공사와 사주가 누군지를 들어가는 말에서 굳이 밝히는 자상함이 살짝 불편했다는 점하고, 첫 번째 글이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초등학교를 다니던 글쓴이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엮은 책읽기를 앞세운 것도 이 책의 대주제를 생각한다면 썩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특히 이미 몇 권의 책을 내신 저자께서 관련 업계에서 쓰는 일본어 잔재를 반복해서 쓰신 것을 보고는 이래도 되나 싶었습니다. 한글을 무너뜨리는 제1의 적은 방송계에 숨어 있는 오열(五列)이구나 하는 생각이 지나친 것이기를 바랍니다.

 

제목이 그래서 저자들이 생각을 끌어온 책들이 모두 그렇고 그런 책은 아닙니다. 윤동주, 롤랑 바르트, 데카르트, 제레미 리프킨, 칼 세이건, 하워드 진, 리처드 도킨스 등과 같은 쟁쟁한 석학들의 명저들이 즐비하게 인용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폭풍성장기의 저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인쇄매체가 만화는 물론 판타지소설, 잡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31가지나 되는 책 혹은 잡지들 가운데 읽어본 것이라고는 겨우 6종에 불과하여 제가 자랄 때와는 사뭇 다른 성장과정을 거친 것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5종류도 다 큰 다음에 읽어본 것이 대부분이라서, 아마도 저자들과 저 사이에 놓은 세월의 간극에서 오는 차이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쪽으로 1;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을 읽다보면 어린 마르셀의 책읽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할머니께서 마르셀의 생일에 뮈세의 시집과 루소의 작품 한 권, 그리고 조르주 상드의『엥디아나』를 고르면서, “어미야, 난 제대로 쓴 글이 아니라면 저 애에게 줄 생각이 없구나”라고 한 것을 보면, 저자들의 책읽기가 별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네 정서가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저자들은 자녀들이 ‘빨간책’을 읽는다 해서 반성문을 쓰게 하면서까지 금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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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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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작가의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는 1939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비교되는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직접 전투에 참가한 경험을 서술하는 형식이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조던이 반파시스트 게릴라의 협조를 받아 파시스트군대를 저지하기 위한 후방교란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도 <카탈로니아 찬가>는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마드리드와 중간쯤에 해당하는 사라고사에서 파시스트군과 전투하는 장면과 바르셀로나 안에서 인민정부와 통일노동자당이 분열하여 서로 싸우는 과정까지 그리는 반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조던은 라그랑하를 거쳐 세고비야를 점령하려는 골츠장군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마드리드와 세고비아 사이에 위치한 과다라마 산맥에 위치한 다리를 폭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지역의 반파시스트 게릴라들의 입장과 고민을 담고 있습니다.

 

스페인내전은 1936년 2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의회를 장악한 인민전선은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좌파 공화파, 스페인 공산당 등으로 구성되어 토지개혁을 포함한 개혁 정책들을 강하게 밀어붙여 지주, 자본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불만이 고조되었던 것이 단초가 되었습니다. 정부의 식민지정책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장군이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공격했는데, 내용은 스페인 영토 안에서 일어난 내전이었지만, 전투는 국제전의 양상을 보였습니다. 소비에트 연방과 서방의 각국에서 모여든 의용군인 국제 여단이 반파시즘 진영인 인민 전선에 가담하였고,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과 살라자르가 집권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프랑코의 반란군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피아구분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 이해되지 않는 대목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웰이 소속된 의용군의 무장은 물론 군수지원을 보면 도대체 전쟁을 치루는 부대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조던이 집시 점에서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다리 폭파임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명분때문이었던 것처럼, 조지 오웰 역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 이유가 명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66쪽)”라면서,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해서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파시즘과 싸우기 위하여, 그리고 공동의 품위를 위하여”라고 답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내와 함께 가는 것도 이상합니다. 아내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조지 오웰은 의용군에 입대하여 사라고사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수행하는 한편 후방인 바르셀로나로 휴가를 나와 아내와 만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연합세력이 분열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시가전을 벌이는 극적인 상황에 몰리면서 아내와 함께 쫓기는 신세가 되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오웰의 아내 역시 전투에 직접 참여하거나 후방지원에 나선 것 같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에 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가전은 람블라스거리를 중심으로 정부군이 통일노동자당을 포함한 무정부주의자들을 제압하기에 나서면서 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적을 앞에 두고 후방에서 같은 편이 분열하여 시가전을 벌였으니 인민정부가 그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이상한 노릇일 것 같습니다. 결국 프랑코의 파시스트군이 승리를 거두고 말았던 것인데, 마드리드에서도 인민정부는 노동자계급들이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서 파시스트군에 대항하다가 패퇴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사이에 전쟁은 끝인 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적전분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병서에 다 나와 있는 것 아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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