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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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국 통계국은 미국의 전체 인구는 2010년의 3억 1천만 명에서 2050년에는 4억3천9백만 명으로 42%가 늘게 될 것으로 전망하였습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인구 4천만 명에서 8천8백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면서 상자형으로 된 연령별 인구구성이 보다 고연령층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노인인구의 주류를 이루는 연령층도 60대 초반에서 점점 높아져 80대 후반으로 옮아가는 경향을 보일 것이라고 합니다. 초고령화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과 맞서고 있는 의료인으로서도 치료를 통하여 환자의 삶을 연장하는 것으로부터, 치료를 통하여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http://blog.joins.com/yang412/8944844>,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72224>, <체크, 체크리스트; http://blog.joins.com/yang412/12773144>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툴 가완디교수가 새로 내놓은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노인들을 진료함에 있어 삶의 질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체크, 체크리스트>는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바 있어 저자가 그리 낯설지만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툴 가완디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일반외과를 전공한 분인데, 앞서 쓴 책들을 통하여 의료 현장에 숨겨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진솔하게 밝히고 개선방향을 제시하고 있어 의료계는 물론 일반인의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현대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요약한 것처럼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서 의학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점은 없는지 돌아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의과대학의 교육목표가 생명을 구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지 꺼져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데 있지 않았다.(8쪽)’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은 자신의 환자가 죽음을 맞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해오면서 의사들의 생각 역시 변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셔윈 눌랜드박사가 쓴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합니다. “우리 전 세대까지는 자연이 결국 이기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예상하고 받아들였다. 의사들은 패배의 징후를 훨씬 더 기꺼이 인정하려 했고, 그것을 부정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덜 오만하게 굴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오늘날의 의사들은 어려운 질환을 기술적으로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만족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 의사로서의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지금 시대에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존재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의학이 이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또 변화시키지 못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유한성에 대처하기 위해 생각해낸 방법이 현실을 어떻게 왜곡시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학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자주 실망시키고 있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의사인 저자가 생의 종말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조망하는 책을 쓴 셈입니다. 저자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친가와 처가의 어른들의 삶을 많이 인용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 최인호 작가 역시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담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에게 전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나이 들어 변화가 일어나는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독립적인 삶, 무너짐, 의존, 도움, 더 나은 삶, 내려놓기, 어려운 대화, 용기 등의 제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목의 의미를 종합적하여 정리해보면 독립적인 삶을 꾸려나가다가도, 모든 것은 결국 허물어지게 마련이라는 진리대로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의학적 치료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고,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저자는 먼저 현대사회에서 노인의 위치를 고찰합니다. 평균기대여명이 길지 않던 시절에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전통과 지식, 역사의 수호자라는 특별한 기능을 할 수 있어서 조직의 원로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령이 더 이상 희귀한 현상이 아닐 뿐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축적되던 지식과 지혜에 대한 독점적 지위 역시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유통기술의 발전으로 노인들의 입지는 날로 좁아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것처럼, 원만하던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관계가 갈등을 빚는 관계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부모는 어린 자식이 안정된 삶을 확립할 때까지 조언하고 경제적으로도 지원을 하였고, 자식은 부모의 노후를 책임졌습니다. 하지만 기대여명이 길어진 만큼 부모 역시 스스로를 챙겨야 할 부분이 늘어나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 부을 수만은 없게 되었고, 자식 역시 스스로를 챙겨야 하기 때문에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일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족의 형태 역시 농경사회에서는 적합하던 대가족제도가 산업사회에 적합한 핵가족제도로 변하게 되면서 자식들이 장성함에 따라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처럼 부모 역시 나이가 들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독립적으로 생활하던 부모가 언제까지나 독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 듦에 따라 건강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도래합니다. 필자 역시 최근 들어 느끼는 바입니다만, 나이가 들면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경을 써서 몸을 움직이면 문제가 없지만 점차 신경을 써도 넘어지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런 순간이 언제인가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결국은 누구나 당하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넘어지면 골절을 비롯한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서울 시내에서도 싱크홀이 자주 발생해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발밑의 땅이 꺼지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 병을 앓아서 갑자기 생길 수도 있지만, 조금씩 일어나는 노화현상으로 인해서도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대비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학과 공중보건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전보다 더 건강하게, 더 오래, 더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지 발밑의 땅이 꺼지는 일을 겪는 시기를 늦춰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명제에는 변화가 없는 셈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즉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방식을 잃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조금씩 잃어가는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잃어가는 것에 대하여 분노만 하다 보면 삶이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편이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혹은 사회적 약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하여 구빈원을 설치하였습니다. 구빈원 가운데는 과연 이런 시설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곳도 있었던 것을 보면 후자에 가까운 개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20세기 중반에는 공적 개념의 부조에 해당하는 구빈원과는 달리 사적 개념의 부조 혹은 사업적 측면을 고려한 요양원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구빈원에서 병원으로 집중되는 환자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정책적 배려가 곁들여지면서 요양원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요양시설이 먼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요양병원으로 환자가 이동하는 현상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어 보건당국이 주목하고 있기도 합니다.

 

요양원이 난립하면서 환자를 묶어놓는다거나, 향정신성 약물을 과도하게 처방하는 요양원이 문제가 되고, 환자의 안전에 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화재로 환자들이 생명을 잃는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살고 있는 곳 가까이에 요양원이 많이 들어서고 있음에도 노인들은 여전히 가족들 가까이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를 희망하는 경향이 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가족들이 충분하게 돌볼 수 없는 처지라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을 선택해야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요양원에 이어 등장한 어시스티드 리빙시설은-굳이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생활지원시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독립주거시설과 요양원의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시설로서 거주민이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요양원과는 달리 서비스 제공자가 거주민의 삶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어 거주민의 독립적인 삶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1991년에 뉴욕주 북부의 작은 도시 베를린에서 빌 토머스라는 젊은 의사가 주도하여 요양원 운영에 있어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였다고 합니다. 가정의학 전문의 갓 딴 토머스는 무료함, 의로움, 무력감 등 ‘요양원에 존재하는 세 가지 역병’을 치유하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요양원에 살아있는 생명을 들이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요양원의 모든 방에 초록빛 식물을 들이고, 잔디밭 대신에 채소와 꽃을 심은 정원을 만들고, 개, 고양이, 앵무새와 같은 동물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결과는 놀라웠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치매가 심한 노인들마저도 더 의미 있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삶을 정리하는 단계에 이르면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말기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 역시 내려놓음에 대한 관념을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나이든 환자를 진료함에 있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혁신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환자나 가족들 역시 변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90세가 넘어 거동이 불편한 분이 슬관절 치환술을 받고 대장암으로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적극적 치료가 환자의 삶의 질을 확실하게 개선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시술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시술로 인하여 제한받게 되는 삶의 부분도 충분히 고려가 되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잘 죽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죽는 기술, 즉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를 익힐 필요가 있겠습니다. 말기 암환자에서 호스피스치료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습니다. 호스피스를 선택한 환자는 삶의 마지막을 가족들과 보낼 수 있으며, 오히려 적극적 치료에 매달린 환자에 비하여 더 오래 살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마지막 순간에서의 치료방향에 관한 결정을 미리 내려두는 것도 의료진이나 가족들 모두의 고민을 덜어줄 수 있는 길입니다. 삶의 마지막 단계를 완전하게 제어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름대로 정한 기준을 만들고 지켜나가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저자는 나름대로 판단하기에 가치 있게 삶을 마무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고하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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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벌판
응웬옥뜨 지음, 하재홍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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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이희인님은 <여행자의 독서; http://blog.joins.com/yang412/13651913>에서 베트남여행에서 읽은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책읽기라고 생각합니다만, 베트남에서 성장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http://blog.joins.com/yang412/13669117>과 베트남 작가 응웬옥뜨의 <끝없는 벌판>입니다. <연인>이 근대 베트남을 지배한 사람들의 뒤틀린 삶을 그렸다면, <끝없는 벌판>은 이들의 식민지배가 남긴 베트남 사람들의 굴곡진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관계는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독립전쟁이 북부베트남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열강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면서도 독립전쟁의 주도한 호치민의 좌파정권을 북위 17도를 경계로 하여 북쪽에 두고 남쪽에는 우파정권이 들어서도록 분할한 것입니다. 결국 북쪽이 주도한 통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닫게 되면서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형세였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북부베트남이 공산정권이 남부베트남을 통합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는 당시 미국과의 관계를 비롯한 산업발전에 필요한 자금 등 다양한 점들을 고려하여 베트남전쟁에 파병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북부베트남의 집요한 공세 끝에 미군이 철수를 결정하면서 베트남은 통일을 이루게 되었고, 우리 군 역시 철수를 하면서 베트남과의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전후 베트남이 사회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국가발전을 고려한 국제관계를 수립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와도 수교를 하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 중의 어두운 과거사를 덮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베트남의 개방과 사회발전에 우리나라 역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결혼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 편입되는 베트남여성들이 늘고 있어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관계가 긴밀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을 본다면 베트남 사회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합니다. ‘메콩강 거친 벌판에서 피어난 감동의 성장소설’이라는 카피가 붙어 있지만 <끝없는 벌판>을 읽으면서 내내 너무 처절한 그들의 삶에 안타까움이 커지면서 결국은 주인공마저도 그 사회에 쳐진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마무리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설마 이럴까 싶은 의문까지도 들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메콩강 지류들이 복잡하게 얽혀드는 들판에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만 하는 모양입니다. 쌀농사가 년간 다모작으로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농사를 지을 논이 없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입니다. <끝없는 벌판>의 주인공 가족은 벌판에 오리를 방목하여 키우고 있는데 오리가 먹을 것을 찾아 거룻배로 이동하는 뜨내기 삶입니다. 가끔씩 들이닥치는 조류독감으로 키우는 오리들을 살처분해야 하는 횡액을 당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벌판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성에 대한 관념이 우리네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의 가족도 어느 날 어머니가 눈에 맞은 남자를 따라가 집을 나가면서 떠돌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 주인공의 아버지 역시 오가다 만난 여자와 관계를 맺었다가 버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삶에 도덕이라는 관념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커가는 주인공이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은 나락의 길로 빠져들어가도록 방치한 작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그 벌판에서 세 명의 어린 무법자들에게 유린당하고 마는데, 주인공은 한 차례 저항을 하는 것을 끝으로 포기하는 모습도 낯선 듯합니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에 답이 될 듯한 구절이 있기는 합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우리 남매는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직접 몸으로 시도해보면서 결과를 얻었다. 그것이 앞날을 살아가기 위한 우리만의 학습방식이었다. 남녀가 몸을 섞는 일은 내가 좀 전까지 겪어보지 못했을 뿐이다. (…) 처음에는 갈기갈기 찢기듯 아프더니 그 다음엔 날개미가 허물을 벗듯 살점이 한 꺼풀 벗겨지면서 쓰라린 고통을 안겨주었다.(156쪽)”

 

끝없는 벌판

옹웬옥뜨 지음

하재홍 옮김

163쪽

2007년 9월 30일

아시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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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후기 시집 문예 세계 시 선집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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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를 많이 알지 못하는 필자도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 들에다는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로 시작하는 「가을날」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라이너 마리아 릴케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시인도 드물 것 같습니다.

 

폰 에코노모뇌염의 후유증으로 생긴 파킨슨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페니 마셜감독의 영화 『사랑의 기적(1991); http://blog.joins.com/yang412/4271286』의 한 장면을 보면서 릴케에 대한 필자의 관심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뉴욕 알버트 아인슈타인의대 신경과교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가 뉴욕시의 변두리에 있는 갈멜산 요양원에서 만난 환자들에 대한 기록을 적은 『깨어남; Awakening (1973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환자를 진료하는 세이어박사역으로, 로버트 드니로가 파킨슨병환자 레너드 역을 맡아 소름 돋는 연기를 보였습니다.

 

무표정하고 자극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뇌염후 파킨슨병 환자들이 나름의 세계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세이어박사는 글자판을 이용하여 환자들과 대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때 레너드가 써낸 글자가 바로 ‘표범’이었고, 세이어박사는 릴케의 시 「표범」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지나치는 창살들로 그의 눈길은 / 너무 지쳐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 오직 수천의 창살만이 있는 듯하고, / 그 수천의 창살 뒤에 세계는 없는 것 같다. // 탄력 있고 힘찬 소리가 나지 않는 걸음걸이는 / 아주 작은 원을 그리며 맴돌고 있다. / 크나큰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 하나의 중심을 도는 힘의 무도와도 같다. // 오직 때때로 눈동자의 꺼풀이 / 소리 없이 열린다-그러면 한 가지 모습이 그 속에 비쳐들어 / 고요한 사지의 긴장을 뚫고 지나간다. / 허나 다음에는 그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세이어박사는 그 무렵 개발된 엘-도파를 처방하여 뇌염후 파킨슨병 환자들의 증상을 호전시킬 수 있었지만, 이내 부작용이 발생하여 치료를 중단하면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이 마치 릴케의 시 「표범」의 느낌을 닮아 있습니다. 즉, 주변의 변화는 알고 있지만 그런 변화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환자의 심정이 우리에 갇혀 있는 표범과 같은 신세라는 것을 레너드는 나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많은 릴케의 시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데, 최근에는 릴케의 후기 시작품들을 묶은 시집이 나왔기에 [북소리] 독자 여러분들께 소개합니다. 『릴케 후기 시집』은 릴케의 전기 시작품을 묶은 『릴케 시집(2014)』에 이어 릴케의 후기 시작품을 묶은 것입니다. 영화 『사랑의 기적』을 본 다음에 샀던 시집 『릴케(1991)』을 번역한 송영택교수님이 번역을 맡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할 점들이 있었습니다. 송영택교수님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의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릴케의 시세계를 정리한 글에서 릴케의 시작품들을 이렇게 구분하였습니다. (1) 낭만적인 동경과 꿈에 집중한 『제1 시집』과 『초기 시집』, (2) 신의 탐구, 그러면서도 인간보다 신의 우위성을 인정치 않는 범신론적인 신앙 고백서인 『시도집(詩禱集)』, (3) 존재 양식의 형상화에 성공한 『형상(形象) 시집』, (4) 자아와 사물과의 사이에 하나의 차원을 이룩하는 『새 시집』, 사랑과 고독의 독자성을 해명한,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산문인 『말테의 수기』, (6) 이상의 것들을 모두 종합하면서 동시에 삶과 죽음을 극복하는 찬가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 릴케, 140쪽, 천우펴냄, 1991년)

 

『릴케 후기 시집』에서 뽑은 시들은 릴케의 『새 시집』에서 32편을, 『새 시집』 이후의 시에서 25편을, 『두이노의 비가』에서 첫 번째와 여섯 번째 비가를,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에서 22편을 그리고 후기의 시들 가운데서 27편입니다. 『두이노의 비가』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이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간에 해당되는 시들을 ‘후기의 시’라고 묶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릴케는 ‘장대한 넓이나 깊고 무거운 세계가 아닌, 그동안 그가 도달한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밝고 순수한 새로운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송영택교수님의 번역으로 소개한 시집 『릴케(1991)』은 그의 전기 작품에서 많이 뽑았던 것 같습니다. 61편의 시를 담은 『릴케(1991)』와 108편의 시를 담은 『릴케 후기 시집』에 같이 실린 시는 오직 「표범」 한 편 뿐입니다. ‘파리 식물원에서’라고 주석이 달려 있는 것처럼, 이 시는 1902년 릴케가 로댕에 관한 글을 쓰려고 찾은 파리에서 생활하면서 쓴 『새 시집』에 담긴 것입니다. 옮긴이가 『릴케 후기 시집』을 위하여 번역을 새롭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릴케(1991)』에 담긴 「표범」과는 달리 『릴케 후기 시집』에 담긴 「표범」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나가는 격자 때문에 지쳐버린 표범의 눈은 /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그의 눈에는 수많은 격자가 잇는 것 같고, / 그 격자 뒤에는 세계가 사라지고 없는 것 같다. // 더없이 작은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 유연하고 늘름한 발로 자늑자늑하게 걷는 걸음새는 / 하나의 커다란 의지가 마비되어 서 있는 / 하나의 중심을 둘러싼 힘의 무용 같다. // 다만 때때로 눈동자의 장막이 소리 없이 열리면 / 그때 하나의 형상이 들어가서 / 사지의 긴장된 정적 속을 지나 / 심장에서 문득 사라진다.” 필자에게는 생소하다 싶은 ‘자늑자늑하게’라는 시어를 채용하였는데 뜻을 찾아보니, ‘움직임 따위가 가볍고 부드러우며 차분한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합니다. ‘창살’ 대신 ‘격자’를 사용했는가 하면 ‘무도’대신 ‘무용’을 사용한 것을 보면 세월의 흐름에 따른 우리네 언어생활의 변화를 반영하였구나 싶기도 합니다만, 시 전체의 흐름은 전작이 간결한 느낌입니다.

 

언젠가 독일어를 전공한 분과 함께 독일어 논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같이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독일어를 구문적으로만 번역해서는 의미가 헷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표범」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눈동자의 꺼풀’ 혹은 ‘눈동자의 장막’이란 눈꺼풀을 말하는 듯한데, 눈꺼풀은 각막은 물론 결막을 포함하여 밖으로 드러나는 안구 전체를 덮고 있는 것이지 각막의 안쪽에 자리한 눈동자만을 덮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지나치게 의학적 사실을 강조하는 ‘아는 체’가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요즈음 쓰고 있는 스페인 여행기에서 인용하기에 적절한 시를 여러 편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일 뿐 아니라 관심을 두고 있는 눈물에 관한 시를 여러 편 발견한 것도 역시 커다란 수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물, 내 몸을 뚫고 나오는 눈물”이라고 시작하는 「눈물」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드러내주는 언어적 기능을 다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듯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눈물을 담는 눈물항아리를 노래하는 시가 두 편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아 대지여, 눈물 항아리를 만들 깨끗한 점토를 / 나에게 다오. / 나의 존재여, 너의 내부에 막혀 있던 / 눈물을 쏟아내라”로 시작하는 「아 대지여, 눈물 항아리를 만들」이라는 시와 ‘떨어지는 눈물을 위하여 속을 비운다’라고 노래한 「눈물 항아리」입니다.

 

사실 눈물은 안구 위편에 있는 눈물샘에서 만들어져 안구표면을 따라 흐르면서 안구가 마르지 않게 하고, 눈 안쪽에 있는 누공을 통하여 비강으로 빠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양파나 최루가스와 같은 물질이 안구를 자극하거나 감정적으로 북 바쳐 눈물샘이 눈물을 많이 만들게 되면 누공이 감당하지 못하여 눈물이 밖으로 흘러내리게 되는 것인데, 이렇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담기 위하여 점토로 눈물항아리를 만든다는 생각은 참으로 참신한 것 같습니다. 오래되어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09년에 ‘엣지있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드라마 『스타일』이 방영되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마지막 회에서 패션잡지 ‘스타일’의 에디터 심균이 동료 차지선에게 프러포즈할 때 들고 나온 소품이 바로 눈물항아리입니다. 그동안 너를 위해 남몰래 흘린 눈물을 담은 눈물항아리라면서 이제 그 눈물을 마셔버리는 것으로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보이겠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오글거리는 프러포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릴케의 눈물항아리가 내부에 막혀있던 눈물을 쏟아내 담을 그릇을 마련하는 것으로 마음을 옥죄고 있던 굴레를 벗어내 느낀대로의 감정을 풀어낼 수 있기를 노래한 것과 통하는 무엇이 있는 듯합니다.

 

가수나 작가들 가운데는 자신이 부른 노래나 작품과 닮은 삶을 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릴케를 이야기하면서 작품과 닮은 삶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릴케 후기 시집』에 실려 있는 마지막 시, 「장미여, 아 순수한 모순이여」때문입니다. 이 시는 릴케가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으로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릴케는 대단한 예언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위하여 장미를 꺾다가 그 가시에 찔린 것이 곪아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니 말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가지고 있는 장미를 두고, ‘장미여, 꽃의 여왕이여’라고 노래한 릴케에게 장미는 모순으로 비쳤던 모양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즐기려다 영원한 잠에 들게 되었으니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 그저 해마다 그를 위하여 장미꽃을 피게 하라. / 왜냐하면 그것은 오르페우스니까. 이것저것 속의 / 그의 변신인 것이다, 우리는.(…)”이라고 노래한 것 역시 릴케 자신이 오르페우스라는 가객(歌客)의 후예임을 암시하는 듯한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에서 그저 해마다 장미를 볼 수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을 내비친 것 같습니다. 1912년부터 1922년에 걸쳐 「두이노의 비가」의 연작시 열편을 쓴 것에 비하면, 1922년 2월에 보름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55편을 달하는 오르페우스에 대한 헌시를 쏟아낸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오르페우스의 돌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릴케는 오르페우스의 후예일 것 같습니다. 물론 릴케 시의 정점이라고 하는 「두이노의 비가」와 단순비교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1912년 릴케가 트리에스테 근처의 두이노 성(城)에 있을 때 제2비가까지 두 편을 완성하였지만, 연작시의 일부였기 때문에 발표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러니까 릴케가 오스트리아 육군에 소집되기 전인 1915년 가을에 제4비가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두이노의 비가」를 이어간 것은 1921년 여름, 스위스 후원자의 초청으로 발레리 지방의 론 강가에 있는 뮈조의 성(城)에 머물면서였습니다. 1922년 2월 7일에서 11일 사이에 단숨에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를 전후하여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55편을 완성하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시상이 샘물처럼 흘렀다고 하겠습니다.

 

릴케의 시에는 ‘주님’ 혹은 ‘천사’와 같은 종교적 대상이 등장합니다만,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대한 니체처럼 릴케 역시 “생과 죽음, 지상과 공간, 시간의 차원 등을 모두 포함하여 통일적으로 응축된 ‘우주 내재적 공간’이라는 일원적 우주론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릴케의 시에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긍정하는 찬가라는 느낌을 얻게 됩니다. 『릴케 후기 시집』을 옮긴 송영택교수님은 “10편의 「두이노의 비가」는, 참다운 결실을 위해 끊임없이 변신해 죽음 속까지 정화되는 사람만이 참으로 인생을 영위하는 것이라 하고, 인생에서 진실한 것이라 믿어지는 사랑이 실은 고독하고 괴로운 것이며 서로가 일체될 수 없는 개별적인 것이라 노래한다.(228쪽)”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새시집』에서만 해도「붓다」 라는 제목의 시가 두 편이나 되고, 「붓다의 영광」을 노래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그의 삶에서 유일한 목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너는 느낀다, 이제는 너에게 매달리는 것이 없음을. / 너의 외피는 무한 속에 있고, / 거기에는 진한 과즙이 충만하다. / 바깥에서 한 줄기 빛이 그것을 거들고 있다.(…)”라는 시어에서 불교의 심원한 원리를 느끼게 됩니다.

 

릴케의 주옥같은 후기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의 참다운 삶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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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의 겨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1
안토니오 무뇨쓰 몰리나 지음, 나송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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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반도를 다녀와서인지 제목만으로도 반가운 소설입니다. 안토니오 무뇨스 몰리나의 <리스본의 겨울>은 스페인의 북서해안 도시 산세바스티안과 수도 마드리드 그리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을 연결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먼 과거로부터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그 과거는 기억과 상상이 교차되고 있어 책읽기에 나름 신경이 쓰이기도 합니다.

 

마드리드에 있는 메트로폴리타노 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비랄보를 화자가 2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화자의 정체는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산티아고 비랄보를 객관화한 가상의 인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전체 이야기는 비랄보가 산세바스티안에 있는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의 술집에서 연주활동을 할 때 만났던 루크레시아와 그녀의 남편 말콤 사이에 벌어지는 위태로운 삼각관계가 기본 골격입니다. 여기에 미술품을 암거래하는 말콤의 사업파트너 투생 모퉁과 그의 비서 다프네, 그리고 비랄보와 함께 연주하는 트럼펫 연주자 빌리 스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오스카, 드럼을 연주하는 부비, 그리고 레이디 버드의 주인 플로로 블룸 등이 엮여듭니다.

 

옮긴이는 작품해설을 통하여 이 소설에서 도시의 밤, 서스펜스, 도망과 추적, 폭력과 죽음, 권총, 레인코트, 중절모, 우울한 호텔방 등을 그려내고 있어 마치 이 마치 누아르 영화의 장면이 연상된다고 적었습니다. 사실 부적절한 관계는 아슬아슬하기 마련입니다만, 레이디 버드에서 만난 비랄보와 루쿠레시아는 단숨에 사랑에 빠지지만, 이내 말콤이 눈치를 채면서 말콤과 루크레시아는 밀항선을 타고 베를린으로 빠져나가고 맙니다. 유럽 각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던 가운데 루크레시아와 연락이 닿아 편지가 오가면서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이야기의 주요 무대는 리스본이 됩니다. 비랄보가 루크레시아를 만날 때 리스본을 꿈꾸는 그녀를 위해서 ‘리스본’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는데, 정작 비랄보는 리스본에 가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시 본 리스본은 예뻤다기 보다는 신비로웠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그래서 “산세바스티안이나 파리만큼 안개가 많은 도시일 거라 상상했었다. 투명한 공기, 붉은 황토색이 뚜렷한 가옥들, 하나같이 똑같은 빨간 지붕들, 방금 내린 빗물처럼 영롱함이 감싸는 도시 언덕에 정적인 황금 빛줄기는 그를 놀라게 했다.(165쪽)”라고 그린 리스본의 인상이 공감되었습니다. 비랄보가 리스본에서 묵은 호텔은 꼬메르시우광장 가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광장 한 복판에 서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랐다고 하지만,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된 리스본을 재건한 주인공 주제1세의 기마상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루크레시아가 ‘리스본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끝에 도달하는 것과 같을 거야(167쪽)’라고 말한 이유를 알듯합니다.

 

루크레시아의 행적을 찾는 말콤과 투생 모퉁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 비랄보가 말콤과 열차에서 사투를 벌이고, 한적한 곳에 은신하고 있는 루크레시아를 만나 다시 사랑을 이어가는 곳도 리스본입니다. 그래서 리스본의 모습은 비교적 많이 그려지고 있는 반면, 정작 현시점에 되는 마드리드의 모습은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산세바스티안의 풍경은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만에서 조용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타마린도 나뭇가지에 깃든 장밋빛 황혼(32쪽)’, ‘암초에 부서져 만들어진 차가운 물거품이 가끔씩 튀기는 마리티모 산책로(104쪽)’ 등입니다.

 

작가는 1975년 프랑코의 사망과 함께 스페인 사회에도 고립된 인간들로 채워진 불안정한 도시의 분위기가 생겨나면서 정열적인 사람들이 투우와 플라멩코로 넘치는 축제가 일상이던 스페인의 전통적 이미지를 과거로 묻고 있다고 했습니다. ‘옛것은 아름다운 것이여’라던 광고카피가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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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2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기에도 반가운 도시들이 나오군요. 특히 산세바스티안의 유명한 해변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 흐린 날에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는데 파도가 격하게 춤을 추던 광경이 ^^

처음처럼 2015-05-26 19:56   좋아요 1 | URL
우와~~~. 그 바다를 보셨군요..
그러시다면 리스본의 겨울을 제대로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장서의 괴로움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 / 정은문고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요즘이야 세부전공으로 나뉘는 추세이지만 처음 전공분야를 공부할 때는 모든 임상과목들을 커버할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전공의 특성상 특히 컬러사진이 중요한데, 비싼 원서를 구할 수 없어 많이 어려웠었다는 선배님들 세대와는 달리 화질은 조금 떨어지지만 불법복사판 책이라도 저렴하게 공급되던 시절입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쥐꼬리만큼 되는 월급은 술값과 책값으로 남아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남은 것이라고는 저질체력과 쌓여가는 책이었습니다. 책도 그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무거운 아트지로 되어 있는 것들이 많아서 이사를 할라치면 엄청 힘이 들었습니다.

 

진료현장을 떠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책들을 끌어안고 있다가 어느 해인가는 결단을 내려서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파지로 팔았더라면 적지 않은 돈이 되었을 터인데 지나고 보니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도 최근 몇 년 동안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 보니 사무실이나 집에 다시 책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책 사이로 길을 내야 하는 상황이 걱정되어 대책을 고민하다가 사무실 밖에 작은 도서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보니 500여권 가까운 책을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도 블로그 친구들과 나눈 책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고도 남은 책이 천여 권은 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규모를 가지고 장서가를 운운한 처지는 아니지만 쌓여가는 책들로 중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싶습니다.

 

남들은 이런 고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해답을 얻기 위해서 읽게 된 책이 오카자키 다케시의 <장서의 괴로움>입니다. 비록 일본의 경우라서 저자가 인용하는 책들이나 그의 저자들 대부분을 알지 못하는 아쉬움을 건너뛰면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꼈음직한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헌책방을 통하여 책을 습관적으로 사들이고 고민하는 분들인 것 같습니다. 전공과 관련된 책을 사들일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전공이 아닌 도서의 경우는 제 손에 들어온 책들은 일단 모두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관심분야가 아니면 바로바로 방출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보유하기로 결정한 책들은 나름대로 기획하고 있는 책쓰기에 필요하거나, 칼럼 등을 쓸 때 참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저자로부터 사인을 받은 책들은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도 몇 권의 책을 냈지만, 제가 사인을 해서 드린 책을 버린 분을 보면 저의 성의가 무시된 것 같아 공연히 화가 나는 편이라서 입니다.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사들인 책들을 다시 헌책방을 통하여 싼 값으로 파는 사람들의 사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저자를 보면서 왜 그렇게 사는지 정말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을 맞는 거실에 책장을 두고 화려한 장정의 전집들을 전시용으로 꽂아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웃기는 짓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박철상님의 <서재에 살다; >에서 읽으면서 실없게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결혼 전에 살던 집에 앵글로 만든 간이 책장을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밤에 자면서 책장이 넘어져 꽂아둔 책이 덮치지나 않을까 공연히 걱정한 적도 있습니다만, 지진이 많은 일본이라면 책장에서 쏟아진 책 때문에 부상을 당할 우려도 클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을 끝막음하면서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사용한 것 때문에 전승국인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에게 빚을 진 것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일본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전쟁을 일으킨 원죄를 덮으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분위기는 이 책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미공군의 공습으로 귀중한 책들이 불타 사라진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은근히 비난을 담은 듯한 느낌은 저의 오지랖일까요? 많은 책을 모아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전쟁 당시 공습으로 장서들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전한 곳에 책을 보관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지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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