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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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을 찾다 눈에 띈 단편집입니다. 제목에 이끌렸는데, 작가는 여기 담은 단편들에는 웃는 장면을 넣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주인공들이 웃는 동안만이라도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웃음은 감염성이 있다고 하던데 읽는 이도 주인공을 따라 웃다가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까요?

 

열 개의 단편을 읽고 나서야 웃음에 관한 저자의 말을 발견했고, 과연 주인공을 따라 웃었던 이야기가 있었나 되짚어 보았지만, 기억에 남은 웃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리뷰를 쓰려면 웃음 사냥에 다시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사냥에 나서기 전에 전체적인 느낌을 먼저 정리해보면 귀신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작가 역시 매년 서너편의 단편을 쓴다고 했는데, 그것들이 모두 귀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지는 분명치 않고, 왜 귀신 이야기를 쓰는지를 밝히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등장해서 산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것인데 마치 살아있는 날처럼 적고 있어서 읽다보면 살았을 때 이야기인지, 아니면 죽었을 때 이야기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작가는 단편들을 이어서 써내려갔다고 했는데, 그래서 인지 앞의 이야기에 등장했던 사람이 다시 등장하기도 합니다. ‘영화 오래보기’라는 이벤트 참가기를 다룬 ‘공기 없는 밤’에 마지막 부분에서 알듯 모를 듯한 묘사가 나옵니다. “친구의 관을 들고 화장장까지 걷던 친구들이라면, 저렇게 소파를 들고 길을 걸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영희와 영희가 길을 걷다 소파를 들고 가는 청년들을 만난다면 뭐라고 물어볼까? 관절염을 앓는 영희에게 청년들은 잠시 소파에 앉도록 해주겠지.…(118쪽)”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른 이야기에서는 카메오로 등장하는 기법을 영화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그 점을 분명하게 해주는 대목은 이렇습니다.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첫 번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 영화를 보고 나니 첫 번째 영화와 두 번째 영화가 다르게 이해되었다. 그런 식으로 열 편의 영화들이 겹쳐졌다.(119쪽)”

 

어떤 독자는 비극 속에서 웃음을 찾아낼 줄 하는 작가라고 리뷰에 적었습니다만, 비극과 웃음에 관하여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극을 더욱 비극답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웃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에 웃음을 제대로 끼워 넣을 수 있는 작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가가 한 꼭지의 웃음을 삽입한 이유일 것입니다. 단편마다 담겨 있는 웃음이 책읽는 이들에게 어떻게 전해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읽은 이들마다의 감성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열편의 단편 가운데 나름 인상에 남는 웃음 코드를 꼽아보았습니다. 첫 번째 작품 ‘어쩌면’은 수학여행길에 버스사고로 죽어 귀신이 된 여학생들이 귀신의 집에 놀러간 장면입니다. “우리들은 귀신의 집에 들어갔어.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천장에서 떨어지자 거울과 압정이 소리를 질렀어. 손을 잡고 있떤 연인들이 귀신 인형의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면서 깔깔거렸어. 우리는 좀 쪽 팔였어. 가짜 귀신에게 놀란 진짜 귀신이라니. 누가 알아차릴까 봐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어.(24쪽)” 요즈음 처녀귀신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만, 이 단편에 등장하는 처녀귀신들을 인간도 놀라지 않는 가짜귀신을 보고 놀라는 순진파인 것 같습니다.

 

표제작품인 ‘웃는동안’에 숨겨둔 웃음코드는 초등학교 6학년생이 엉덩이를 좌우로 비트는 우스꽝스러운 체조를 하면서 환하게 웃는다 해서 교장선생님이 단상으로 불러 올렸는데, 소년은 마이크에 대고 “죄송해요. 체조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조카가 태어나서 웃은 거예요(69쪽)”라고 말해 전교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새로 태어난 조카에게 ‘이 삼촌은 이제부터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 될 거란다’라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늘 웃으면서 살게 되었다는 소년이 깜찍하지 않습니까? 작가가 나머지 작품들에 숨겨둔 웃음코드가 무엇인지 한번 찾아나서 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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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명탐정 사건기록부
오카모토 기도.노무라 고도.히사오 주란 지음, 김혜인.고경옥.부윤아 옮김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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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덥다보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사건을 다룬 소설을 읽다보면 더위가 저만치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에도 명탐정 사건기록부>도 그런 이유로 읽게 된 책입니다. 이 책은 에도 시대 일어난 강력사건을 해결한 탐정들의 활약상을 다룬 작품들을 모은 일종의 선집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세기 초반 활동한 오카모도 기도, 노무라 고도, 히사오 주란 등 세 명의 작가의 추리소설 작품을 각각 세편씩 수록하고 있는데, 작가들마다 주인공으로 내세운 탐정들이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노무라 고도는 오캇피키인 제니가타 헤이지가 주인공으로, 오카모토 기도는 한시치가 주인공으로, 히사오 주란은 아고주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건의 사건기록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참고로 에도시대에는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마치부교를 정점으로 하는 경찰조직이 있었는데, 마치부교 아래 요리키-도신으로 이어지는 무사 관직이 있고, 그 아래로 오캇피키, 메차카시, 고요키키-데사키-시탓피키로 연결되는 평민탐정을 고용하여 사건을 맡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면 강력사건을 민간이 맡아 해결하는 묘한 구조였다고 하겠습니다. 의금부라는 행정조직이 전적으로 맡아하선 우리와는 다른 체제였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강력사건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는 기술 역시 같이 발전해왔을 터입니다. 최근 들어 과학적 수사기법들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어 한 방울의 피나 체액에서 얻은 정보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건을 추리해들어가는 재미가 많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현대의 발전된 수사기법에 익숙해진 시각으로 보면 에도시대의 탐정들이 사건을 뒤쫓아 가는 방식이 왠지 허술해 보이거나, 저래도 되나 싶은 대목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읽는 재미는 쏠쏠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20세기 초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보면 추리소설의 작법 역시 지금처럼 치밀하지 않았을 터라 다소 허술해 보이고, 사건에 대한 서술이 축약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라 고도의 작품 가운데 ‘은비녀의 저주’에서처럼 당시 여성의 장신구였던 은비녀로 눈을 찔러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수법이 실재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눈을 찔러 단숨에 절명시키려면 괴력의 소유자여야 가능했을 범죄가 여성에 의하여 저질러졌다는 점이 수긍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금빛 여인’이나 ‘일곱 명의 신부’ 등을 보더라도 작가가 여성이 간여하는 작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심지어 ‘일곱 명의 신부’에서는 아내가 될 여성을 미끼로 해서 사건을 해결하러드는 탐정을 보면서 굳이 인륜을 거론하지 않더라고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반면 오카모트 기도의 작품들은 충분히 가능한 사건들이며, 사건을 다루는 탐정의 접근방식도 충분히 가능하지 싶습니다. 다만 ‘간페이의 죽음’에서 보는 것처럼 증거를 모아 분석해서 범인을 압축해가는 방식보다는 탐정의 직감을 바탕으로 추정한 범인을 심리적으로 압박함으로써 범행을 실토하게 하는 어찌보면 전근대적 문제해결방식이라서 다소 허탈한 느낌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많이 순진했기 때문에 수사관들이 쳐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었던 것 아닐까요? 조선 시대에 이미 <무원록>이라고 하는 책자에 정리된 과학적 수사기법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했던 것과 비교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세기 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에도라고 하는 이국적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좋은 읽을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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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 - 박상우 단막소설
박상우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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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짬뽕을 자주 먹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날씨도 더운데 왠 짬뽕이냐구요? 조리를 하느라 불을 피우는 것은 불편해도 매운 짬뽕으로 이열치열하는 맛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짬뽕하고 박상우 작가의 <짬뽕>을 읽게 된 것은 전혀 다른 이유입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반디 펜벗에서 8월에 내건 주제가 ‘웃음’이라서 웃음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골라보았던 것입니다. 일단 ‘짬뽕’하면 무언가 웃음이 담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웃음에 둔감한 편인지, 요즘 잘 나가는 개그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사람들이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어쩌면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들이라서 다른 웃음코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짬뽕>에서 웃음을 발견해낼 수 있을지 미심쩍은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작가가 서문에 적은 것처럼 <짬뽕>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우리네 삶의 언저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원고지 30매 분량의 짧은 분량으로 된 ‘단막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은 형식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쉽게 읽히고 공감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소재에 따라서 얼척 없는 이야기, 쓴 웃음이 나는 이야기,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르는 이야기, 설마 이런 일이? 싶은 이야기 등등 다양한 내용들을 늘어놓고 ‘맘에 드는 대로 즐겨보시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청춘남녀가 출연하여 짝을 짓는 방송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기억에 남는 영어 문장을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출연자가 ‘Hm, Hm..... She is beautiful.’이라거나 ‘Take me home country road’라고 했을 때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는 지문은 솔직히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장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웃음 코드의 문제일 듯합니다. 다른 출연자가 한 말도 엉뚱하기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거든요.

하지만 ‘머리에 검은 봉지를 쓰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경로당에 모인 할머니들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검은 비닐봉지를 머리에 화투를 치는 장면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법도 합니다. 다만 ‘훈수 들지 말어. 잘못하면 저승 가는 마차에 함께 실려가는 수가 있어(169쪽)’, ‘(검은 비닐 봉지) 그걸 벗기면 우린 모두 죽어.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한단 말여(170쪽)’라는 말씀에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미묘한 상황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구 차례야?’라는 말씀에 ‘아 잔소리들 하덜 말고 빨랑빨랑 좀 쳐. 기다리다 못해 숨이 넘어가겠어’, ‘장의차 올 때 꺼정 기다려봐. 어차피 황천 가는 길인데 뭘 그리 서두누’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면 무슨 사연인지 가늠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눈 내리는 밤’도 허탈할 수도 있지만 웃음이 절로 나는 장면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니까 쌍팔년 코미디에 등장하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에 관한 이야기를 닮았습니다.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순찰하던 경찰이 담장을 넘어오는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고 뒤쫓으면서 ‘서지 않으면 쏜다’라고 경고를 하고 권총을 발사했고, 쫓기는 사람은 ‘으악’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내달리는 것입니다. ‘탕’ ‘으악’ 도망자는 주택가 계단에서 쓰러졌지만, 정작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 아니라 발목을 접질렸던 것입니다. 결국 김순경은 경찰이 과잉대응했다는 핀잔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찰을 열세 살짜리 소년을 뒤쫓으면서 권총을 뽑아 발사했지만 실탄은커녕 공포탄을 쏜 것은 아니고, 그저 입으로 ‘탕’하는 공갈탄이었던 것인데, 도망하던 소년은 ‘으악’ ‘으악’하고 변죽을 울려주면서 쫓고 쫓기는 코미디가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자잘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짬뽕을 만들듯이 지지고 볶아 먹을 만하게, 다시 말해서 짬뽕의 매운 맛처럼 느낌이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냈고, 스무 개의 이야기들 가운데는 쓴 웃음이 나는 이야기도, 빙긋 웃음이 나는 이야기도, 허탈한 웃음이 나는 이야기도 들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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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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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스페인 여행길에 돈키호테의 무대가 되었다는 콘수에그라 마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돈키호테를 미리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공사에서 나온 <돈키호테 1;  http://blog.joins.com/yang412/13513137>을 선택해서 읽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열린책들에서는 <돈키호테 1&2>를 모두 내놓았던 반면 시공사에서는 <돈키호테 2>를 내지 못하고, 금년 5월에서야 내놓았던 것입니다. 일단은 열린책들에서 나온 <돈키호테 1&2>를 같이 읽었어야 했습니다. 시공사의 <돈키호테>는 박철교수가 번역을 맡았고, 열린책들의 <돈키호테>는 안영옥교수가 맡았습니다. 두 책 모두 읽는 호흡이 좋은 번역입니다. 두 번역자 모두 <돈키호테>의 번역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바로 속담이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속담은 사람들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는 탓에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않으면 엉뚱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전편에 나오는 돈키호테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보면 맛이 살짝 간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편력기사소설이 세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지만, 편력기사가 과거에 존재했는지 분명치 않고, 다만 당시에는 편력기사가 실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력시사가 등장하는 소설에 빠지다 못해 스스로 편력기사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분명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무협소설이 인기몰이를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을 날고 칼과 창을 가지고 대결을 펼치고, 표창을 던지는 등 어린 생각에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두워진 뜰에서 목검을 들어 휘두르던 기억이 있습니다. 옆집에서 건너보았다면 달밤에 체조를 한다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목검을 들고 강호로 나서지는 못했던 것은 사부를 만나지 못했거나 비급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칼을 들고 나서서 싸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돈키호테는 사회적 약자들을 돕고, 악인들을 물리쳐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겠다는 숭고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전편에서 돈키호테는 두 차례에 걸쳐 집을 떠나지만, 돌아올 때는 모두 볼썽 사나운 모습입니다. 첫 번째 출정에서는 멋진 성이라고 착각하는 객줏집에서 미친 사람을 놀리듯 하는 주인으로부터 기사로 서품을 받고서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일단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만난 톨레도의 상인들로부터 비아냥과 매질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도 마을 사람의 눈에 띄어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르반테스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두 번째 출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돈키호테> 하면 객줏집을 성으로, 객줏집 주인을 성주로 제멋대로 이해하거나, 돌아가는 풍차를 괴물이라고 하면서 처단하겠다고 뛰어드는 무모한 모습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두 번째 출정에서는 돈키호테가 주인공이 아니라 돈키호테가 만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는 또 다른 이야기, 즉 삽입소설에 추임새를 넣는 조역으로 한발 비껴있는 모습입니다. 가끔씩은 황당 사건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미 삽입소설에 빠져든 독자에게 돈키호테의 황당한 모습은 그리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짤막하게 구성되어 구미를 당기게 하던 삽입소설은 후반부에는 복수의 등장인물을 내세워 대하소설을 만드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하소설 규모의 삽입소설이 해피앤딩으로 마무리되면서 우리의 주인공 돈키호테에 관한 이야기도 마무리를 짓게 되는데, 불행하게도 돈키호테를 걱정하는 고향사람들에 의하여 우리에 갇힌 채 소달구지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돈키호테>는 출간 후 3만여 권이 팔려나가는 유명세를 탔는데도 속편을 바로 내놓지 않은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원작만한 속편은 없다는 진리가 그때도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이 잘 나가면 속편을 생각하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떻든 돈키호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400년 넘게 쟁점이 되어 왔을 것입니다. 앞선 리뷰에서도 지적을 했습니다만, 술, 약물, 도박, 게임 등 다양한 것들에 빠져드는 것을 중독이라고 싸잡아 말하는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돈키호테 역시 편력소설이라는 분야에 빠져든 중독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로 포장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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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5-08-0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 나간 괴짜`는 형식이자 겉모습 혹은 배경일 뿐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2편까지 마저 다 읽으신 후에도 이런 견해를 계속 견지하신다면 `돈키호테에 대한 지독한 오해`일 수도 있다고까지 감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혹시라도 2편을 아직 안 읽으셨다면 마저 다 읽으신 후에 이 글과는 사뭇 다른 생각을 피력하시길 기대해 봅니다.(저로서는 2편이 아예 나오지 않았거나, 전혀 읽지 않은 독자라도 돈키호테를 정신나간 괴짜, 혹은 광인으로 단정하는 견해에는 결코 쉽사리 동의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꿈과 이상을 향해 끝없이 전진하려는 돈키호테가, 그의 앞에 놓인 온갖 난관들은 `눈꼽만큼도 안중에 두지 않고` 자신이 마음에 둔 목표를 향해 곧장 돌진하는 용감무쌍한 인물이 곧 돈키호테이고, 작가는 바로 그런 인물을 끝없는 모험과 웃음을 곁들여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봅니다. 그런 주인공을 두고 `정신 나간 괴짜`로 못박는 건 너무나 아쉬운 해석이자, 소설가가 주인공에게 불가피하게 입힌 겉모습인 갑옷과 투구에 너무 시선이 빼앗긴, 쉽게 말씀드리자면 `겉으로 드러난 형식`에 너무 치우친 해석이라 여겨집니다.

처음처럼 2015-08-05 20:56   좋아요 0 | URL
2편에서 돈키호테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슬람과 중동 문제의 모든 것
서정민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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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스페인을 다녀오면서 이슬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과거 이 지역을 다스렸던 이슬람제국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하여 개방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는데, 예를 들면 1125년 아틀라스 산맥에서 반란을 일으켜 22년에 걸친 오랜 전쟁 끝에 알모라비데 왕국을 무너뜨린 알모아데(Almohade, ‘신의 일체성을 주장하는 자들’이라는 뜻)족은 이슬람근본주의를 추종하였습니다. 이들이 코로도바를 점령하면서 후기 우마이야왕조와 알모라비데왕국에 이르기까지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서로를 인정하던 공존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알모아데왕조가 들어선 다음 이슬람 사회에서 벌인 종교탄압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자크 아탈리의 역사추리소설 <깨어있는 자들의 나라; http://blog.joins.com/yang412/13553678>에서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알모아데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이슬람근본주의는 오늘날 화두가 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초기 이슬람으로의 회귀’를 내세우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등장한 것은 무슬림 공동체의 쇠락과 연관이 있습니다. 초기 이슬람은 정교일치의 지도이념으로 강력한 정치체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 서구가치의 정치이념 혹은 아랍민족주의와 같은 세속적인 정치이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슬람이 정치와 분리되어 종교적 범주에 머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랍민족주의가 실패했다는 결론에 이르자 이슬람원리주의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슬람원리주의는 종교부흥과 사회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대체적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나타냈다고 합니다(지중해지역원 지음, 지중해의 전쟁과 갈등 290-300쪽, 이담북스, 2012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80816)

 

이슬람 원리주의를 설명하고 나선 것은 최근에 극단적인 행동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IS (Islamic State, 이슬람국가)를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달 초에 [북소리]에서 소개했던 <100년의 기록>을 우리말로 옮긴 서정민교수가 IS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원리주의의 진면목을 소개한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를 제대로 읽기 위한 몸풀기라고 할까요? 중동문제 전문가인 서정민교수는 IS가 이라크나 시리아 등의 주근거지를 넘어 북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도 동시다발테러를 일으키면서 세력을 무한 확장하고 있으며, 특히 이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하여 전 세계의 청소년들을 동조자로 끌어들이는 등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금년 초에 터키여행 중에 사라진 김모군이 IS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충격을 준 바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저자는 현재 중동과 유럽 등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슬람주의 과격단체와 그들이 일으키는 테러공격의 이념적 배경을 설명하여 이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우리의 젊은이들이 이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들을 과격 이슬람주의자로 규정하고, 이들의 행동은 이슬람율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잘라 말합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영향력과 권력을 강화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이슬람의 가르침을 극단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살 폭탄 공격은 이슬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슬람이 자살을 금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의 생명을 거둘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창조주 알라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중동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고 있는 IS를 포함한 과격 이슬람주의가 태동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이어서 근세 이후에 등장한 무장조직들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21세기 테러의 전형, IS를 설명합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을 창시하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한 무함마드와 그의 뒤를 이어 아부 바크르, 우마르 이븐 알 카탑, 우스만 이븐 아판 그리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립이 이슬람 사회를 영도하던 정통 칼리파시대가 가장 이상적인 이슬람사회 혹은 이슬람국가로 무슬림들은 간주합니다. 정통 칼리파 시대에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와 지금의 중동 지역 전체를 정복하여 거대한 이슬람제국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기반을 닦았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이슬람 제국에 편입되면서 이들과의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슬람제국에 편입된 피정복 주민에게는 세 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졌습니다. 이슬람을 수용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유지하되 지즈야(jizya)라는 인두세를 내거나, 아니면 싸우거나 떠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면에서 보면 상당히 관용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통 칼리파시대에 광대한 영역을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이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게도 좋은 논리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즉, 이슬람 세계가 약화되어 유럽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지금까지도 서방에 뒤처져 있는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초심이란 선지자 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전하면서 빈부격차, 지나친 물질주의, 상류층의 부도덕성, 개인주의, 권력남용 등의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여 사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통 칼리파 시대에 이어 등장한 왕조들, 특히 압바스왕조가 이슬람제국의 영역을 서쪽으로는 이베리아반도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인도북부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점령한 지역을 포용하였을 뿐 아니라, 다양한 지역에서 꽃피웠던 학문적 문화적 성과들을 모아 정리하고 재해석하는 한편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역사는 시대적 상황이 꼭 같지 않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없으며, 지금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접근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 들어설 때는 영원토록 이어질 것 같던 왕조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침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지기도 하며, 중앙권력에 대하여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결국 제국은 와해되어 소왕국으로 분할되거나 이웃의 제국의 침략을 받아 지배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제국 역시 이런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이슬람제국과 오랜 세월에 걸쳐 충돌해온 기독교 세력은 유대교와 함께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비극의 시초가 되었던 셈입니다. 예수가 탄생한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성지인데, 예루살렘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슬람이 지배해왔던 터라 중세 유럽사회의 화두가 되었던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전쟁을 시발로 하여 이슬람과 기독교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과격 이슬람주의가 등장한 것은 1258년 압바스왕조가 바그다드까지 쳐들어온 몽골에 무너진 시기로 보았습니다.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 몽골세력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들의 이슬람 해석에 따라 통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기에 태어난 과격 이슬람주의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븐 타이미야는 알라의 계시와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기득권 세력과 갈등을 빚었지만,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확립하고 집대성한 이븐 타이미야는, “몽골에 의한 이슬람 제국의 몰락을 무슬림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슬람 세계는 무지, 불의 그리고 지식과 믿음의 상실이 이슬람 사회의 후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직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 하디스에 집약된 이슬람의 본래 사상과 이념으로 돌아갈 때 이런 병폐가 치유된다고 믿었다.(73쪽)”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역사가 재현될 수 없는 것은 모든 상황이 동일하게 짜 맞추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흘러간 물이 물레방아를 다시 돌릴 수 없는 것처럼 과거에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이슬람 원리주의가 현재의 이슬람세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저 희망에 불과하거나, 혹은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책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이슬람제국이 붕괴되면서 분열된 이슬람 공동체를 다시 통합한 것은 아랍인이 아닌 소아시아 출신의 오스만터키였습니다. 1300년 경, 작은 국가로 등장한 오스만터키는 아라비아반도, 북아프리카를 거쳐 지브롤터 해협에 이르고, 시리아와 이라크를 넘어 페르시아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 초원과 오스트리아의 빈 가까이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683년 빈을 포위한 공격에서 오스트리아제국에 패한 다음 유럽세력에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이슬람 사회에 등장한 것이 이슬람부흥주의, 혹은 이슬람계몽운동이었는데, 1798년 프랑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무렵으로 점령한 것이 무슬림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나가 이끈 이슬람부흥운동은 이성을 존중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함으로써 이슬람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압바스왕조가 꽃을 피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슬람부흥운동은 무슬림 형제단을 설립한 하산 알 바나 와 같은 온건 이슬람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20세기 중반 이집트 사회에서 무슬림형제단이 최대의 사회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무슬림형제단 역시 비밀무장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유럽국가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국가를 지배하는 세력들은 권위주의적인 유럽식민통치방식에 따라 중앙집권방식에 따라 통치하기 시작했고, 억압적인 국가에 저항하는 이념과 운동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현대 이슬람 과격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란의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팔레비왕정을 무너뜨리고 이슬람혁명에 성공하면서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같은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동서냉전이 심화되면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합작하여 이슬람용병들을 훈련시켜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한 소련군을 몰아내기에 성공한 다음, 이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 알 카에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해방 이후에 알 카에다의 구성원들은 아랍 국가들로 흘러들어 대 서방 테러활동을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그 일부가 IS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이계기가 되어 시작한 이라크 전쟁을 통하여 사담 후세인의 철권통치가 무너진 다음에 사담 후세인의 진영에 있던 전사들이 IS에 가담하게 되면서 세력이 급속하게 팽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과격 이슬람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IS 역시 출범 초기부터 자신들의 활동목표는 이슬람법에 기반을 둔 이상국가를 건설하는데 있다고 천명하였습니다. IS의 지도자 알 바그다디는 이름을 아부 바크르로 바꾸고 자신을 칼리파라고 선언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 사후에 이슬람공동체를 다스린 첫 번째 칼리프의 이름입니다. 이슬람법에 따르면 칼리파는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슬림들의 정서를 교묘하게 자극하여 충성을 이끌어내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어 전 세계로부터 IS에 가담하겠다는 자원자가 몰려들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IS는 외국인들을 참수하거나 화형에 처하는 등 밖으로 드러나는 잔인성보다도 자신들의 이념에 따르지 않는 무슬림을 포함한 이민족과 타 종파에 대하여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몰살시키는 인종청소를 벌이는 범죄적 행위를 일삼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이슬람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은 점령지의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성폭행하거나 노예로 파는 등 비윤리적 행동을 일삼고 합니다. 심지어 IS의 핵심지도부는 이슬람율법이 정하는 하루 다섯 번의 예배조차 드리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이슬람 규율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에 불과하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중적 행태를 직시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에서 그들의 정체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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