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 - 더 나은 삶을 위한
뤽 페리 & 클로드 카플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더퀘스트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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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철학분야의 책을 소개합니다. 2002년부터 장 피에르 라파랭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프랑스 현대철학자 뤽 페리(Luc Ferry)교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입니다. 뤽 페리는 알랭 르노, 질 리포베츠키 등과 같이 루이 알튀세르, 장 보드리야르,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자크 데리다 같은 프랑스 68혁명 세대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소장학자로서 주로 종교와 분리된 인문주의를 주창해 왔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은 철학 강사이자 작가로 활동하는 클로드 카플리에가 묻고 뤽 페리교수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철학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진리는 어느 학문의 영역에서도 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점에서는 철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시적으로 보면 그 변화의 폭이 작은 것 같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눈에 띄게 변하는 변곡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류가 삶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와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흥미진진한 사연, 그게 바로 철학의 역사다’라고 요약하고 있는 저자들은 역사를 통하여 철학의 흐름이 크게 바뀐 변환점에 따라서 철학의 흐름을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철학의 흐름을 구분하기에 앞서 저자들이 철학에 대하여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근본적인 질문을 내놓은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으며, 철학을 무엇에 ‘써먹을’ 수 있나? 아직도 철학이 필요한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조건이 끊임없는 기술혁신과 경제 전략에 지배당하는 이 시대(하이데거가 말하는 ‘기술시대’)에, 인간이 바랄만한 ‘목적’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이 ‘수단’만을 불려나가는 이 시대에 철학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6쪽)” 이 질문은 프랑스의 유명한 정치 철학자이자 언론인 장 프랑수아 르벨의 소책자 <왜 철학자들인가?>에서 제기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는 우선 ‘터무니없다고 할 수만은 없는 답이 존재한다’라고 변죽을 올립니다. 그리고는 ‘합리적 사유라는 완전히 인간적인 수단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하였는데 생각해면 동문서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의 역사를 다섯 시기로 나눈 저자들은 ‘각 시대마다 전에 없던 실존적 관건들이 등장해서 철학자들이 기존에 널리 수용되었던 사상들을 밀어내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7쪽)’라고 보았고, 당연히 그와 같은 변화를 이끌어낸 철학자를 앞서 소개합니다. 그리하여,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작업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됐는지를 충실히 보여주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을 확인하면서 더없이 아름다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8쪽)”라고 기대를 부풀리도록 만듭니다. 철학의 역사를 읽어가다 보면 앞서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다섯 시기를 각각 한 개의 장으로 구성하고 있는데, 다섯 시기를 따라가기 위한 준비운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아 ‘첫머리에’에서 철학의 대모험에 나서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첫머리에’가 이 책의 정수를 요약한 부분이라서 완독이 어려운 분들이라면 이 부분만 읽어도 저자의 생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들은 우선 철학의 정체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즉, ‘철학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뤽 페리는 철학의 정의를 논하는데 있어 우리의 삶이 도덕적 가치와 영적 가치(혹은 실존적 가치)라는 두 가지 가치영역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영적 가치라 함은 종교적 의미가 아니라 헤겔이 이야기한 ‘영(정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라 함은 인간관계를 평화롭게 하는 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잘사는 삶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도덕적 가치에 따라 철학을 정의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중요한 철학사조들은 예외 없이 ‘좋은 삶’ 문제에서 정점에 이르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신을 경유하고 신앙에 기대어 잘 살아보자는 것이 종교적 접근입니다. 사실 종교는 인간에게 ‘지고선(至高善)’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시도라고 본다는 점에서 철학이 추구하는 바와 다소 거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철학이 좋은 삶의 조건을 정의한다는 점에서는 종교와 공유할 바가 있지만, 자율적 이성과 명철한 의식으로 그러한 정의에 도달하려는 철학과 신에 기대려하는 종교와는 분명 차별되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철학은 종교가 아니라 ‘세속의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삶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인간은) 뭘 하는 게 좋을까’를 생각해야만 하는 것으로, ‘좋은 삶’이란 “명시적으로든 암시적으로든 죽음, 곧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일과 맞닿아 있다(25쪽)”라고 철학을 정의한다고 읽었습니다.

 

철학의 역사는 인간으로서 ‘좋은 삶’을 정의하는 방식의 변화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철학이 매달려온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다섯 가지의 대답을 내놓았다고 저자들은 정리합니다. 최초의 대답은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이었고, 두 번째 나온 대답은 유대-그리스도교 원리를 토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답변은 르네상스의 등장과 더불어 인문주의에 기반하여 제시된 것이며, 네 번째 답변은 19세기 들어 부상한 해체의 원리에 기반하여 만들어고, 지금 우리의 시대에 들어 도래한 두 번째 인문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의미의 원리로 도출한 ‘사랑’이 다섯 번째 답변입니다. 이렇듯 새로운 답변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기존의 답변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이 새로 제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초의 답변, ‘우주적 조화에 부합하는 삶’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도출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고대에는 완벽한 삶이란 신적인 존재라야 가능할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도토스는 신화로부터 철학을 이끌어냈던 것입니다. 신들의 조화 속에서 인간들 역시 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신화에서 합리적인 핵심들을 가져와 이론화된 철학적 지식을 만들어냈고, 플라톤은 인간이 경험해온 주요 영역들을 아울러서 처음으로 철학적 인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현상을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보편적 우주론을 나름대로는 일관적으로 조화시켜냈다고 평가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두려움이 지혜의 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남들을 사랑하고, 개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삶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5세기 들어 몰락한 그리스 철학의 자리에 들어선 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적어도 믿는 이들에게는 개인적인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시대에 이끌어낸 우주적 조화는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성(神性)으로 회귀하는 셈입니다. 나아가 신성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을 통하여 인격화되었기 때문에 그리스 초기의 모호한 신의 세계와는 차별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3대 유일신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이븐 시나와 아베로에스, 유대교의 마이모니데스, 그리스도교의 토마스 아퀴나스 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봉했으니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속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그리스도교의 원리에 따른 ‘좋은 삶’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그리스 철학보다도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노릇에 머물러야 한다고 인식했던 것입니다. 철학은 성서를 설명하고, 교회의 해석과 교호의 중요한 개념들에 주석과 논평을 다는 정도에서, 눈부신 신성,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 그리스도가 즐겨 사용했던 비유들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종교에 도움을 주어야 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삶의 의미를 코스모스나 신성에 두지 않고 인간에게,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방법론적 회의를 사유의 토대로 삼았던 데카르트에 의하여 기초가 탄탄하게 다져졌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던 데카르트는 과거로부터 온 것, 즉 선입견을 버리고 의식 외부 세계의 존재마저도 의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여겨서 내버리고, 그다음에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내 신념에 남아 있지 않을까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45쪽)”라고 말했습니다.

 

저자들은 “르네상스시대에 문을 연 인문주의 초기에는 주로 그리스․로마 문명에 근거하여 철학․종교․사회의 편견을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고, 그 후 데카르트를 거쳐 계몽주의에 이르렀으며, 칸트가 좀 더 견고한 토대를 닦았고, 마지막으로 헤겔과 마르크스가 집단적 역사의 법칙에 대한 사유를 전개함으로서 토대를 한층 더 넓혔다(164쪽)”라고 이 시기의 철학적 특성을 요약하였습니다. 새로운 철학의 지평에서 좋은 삶을 바라보는 데 있어, 근대 인문주의는 다음 두 가지 특성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첫째, 이 시각에서는 지식, 문화, 문명화․인간화 교육이 중요하다. 둘째, 문학이나 예술 쪽의 재능 또는 위대한 행위로 역사에 기여한 사람의 삶은 의미가 있다.

 

근대 인문주의는 인간적인 근거와 목표로 삶의 의미를 고찰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에게 대체 불가능한 위치를 부여하는 획기적인 생각까지 끌어냈는데, 그럼으로 해서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인간의 능력, 자유와 이성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었다(50쪽)”라고 저자들은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고양된 인간 역시 불완전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관점에서 좋은 삶을 고찰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것이 바로 해체의 원리를 적용하게 된 이유입니다.

 

해체의 원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려는 생각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태동한 인문주의는 19세기에 영국의 민주주의, 프랑스의 공화국 사상 등에 영감을 주었지만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들은 종교나 인문주의의 원리에 기초한 이상들을 끊임없이 해체하려 들었다고 합니다. 즉, 이데올로기의 족쇄에 묶인 인간을 풀어주고 지금까지 간과되거나 짓눌리고 억압당했던 실존을 다양한 차원으로 풀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자들은 그 사상가들 가운데 니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앞서 해체의 개념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사유는 이른바 ‘계보학’, 다시 말해 우상들이 은밀히 전하는 허상들의 숨겨진 뿌리를 파헤치는 학문의 형식을 취합니다(52쪽).” 즉, 그리스의 우주론, 종교가 내세우는 영적인 삶, 계몽적 인문주의가 주장하는 해방된 인간 등을 허무한 것으로 치부한 니체에 따르면 이들은 이상을 명목으로 현실을 부정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현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삶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생의 심오한 가치는 ‘선악을 넘어’ 생의 강렬한 힘에 있다고 믿은 니체철학에서는 우리 안의 다양한 생명력들을 조화시켜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목표를 두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혁명’을 앞세운 두 번째 인문주의 시대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랑’에 대하여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공포, 분노, 억울함 따위와 달리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잇다는 점에서 새로운 형이상학적 원리입니다.(64쪽)” 앙리 뒤낭 이후 현대 인도주의의 탄생과 발전에서 가까운 이들을 향한 사랑은 이웃사랑이 아니라 낯선 이까지 포함한다는 뜻에서 새로운 집단적 이상을 낳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새로 등장하는 화두이군요.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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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두고 읽는 서양철학사
오가와 히토시 지음, 황소연 옮김, 김인곤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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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도 참 묘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최근에 서양 철학사를 정리한 프랑스 현대철학자 뤽 페리(Luc Ferry)교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철학의 다섯 가지 대답>을 읽고 리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시 서양철학의 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정리한 서양 철학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법학을 전공하고 종합상사에 근무하다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오가와 히토시 박사가 쓴 <곁에 두고 읽는 서양 철학사>입니다. 공공철학과 정치철학이 전공분야이지만, 시민을 위한 철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왜 서양철학을 배우고 익혀야 할까?’라는 시작하는 글의 제목에서 벌서 저자의 집필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출발한 서양철학이 3천년에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오는 것은 보편적인 내용과 지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정리한 저자는 서양철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앎을 추구하여 최고의 지혜를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서양철학자들의 지혜를 배우고 익히면서 더욱 앎을 추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서양 철학자 50명을 고르고, 각자의 철학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저자가 요약한 이 책의 얼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1장은 그리스철학부터 중세 신학까지 다루고 있는데,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제목처럼 세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지혜를 모은 시기입니다. 2장은 르네상스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로, ‘나는 누구인가’,‘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풀려고 노력하던 시기입니다. 3장은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의 대립에서부터 독일의 관념론까지 격돌하던 시기로서, 인간의 이성이 철저하게 탐구되었던 철학의 최고 전성기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4장은 19세기로부터 20세기의 독일, 프랑스 철학이 중심이 되던 시기로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인간의 삶을 화두로 삼던 시기입니다. 5장은 현대 사상의 주요개념을 개괄하는데, ‘세계를 움직이는 새로운 규칙’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마지막 6장은 사회와 정의를 생각합니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사회를 구현해야 하는지, 과연 정의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저자가 어떤 기준을 적용하여 50명의 서양 철학자를 골랐는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의 철학자들에 더하여 인도의 아아르티아 센이 포함된 이유도 따로 설명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6개의 장에 배분된 철학자의 숫자도 차이가 있습니다. 뤽 페리교수가 서양철학을 다섯 시기로 구분하는데 있어 철학의 흐름이 커다랗게 변하는 변곡점으로 구분했다는 설명에 비하면 다소 모호한 점이 없지 않은 듯합니다.

 

저자는 선택된 철학자의 대표적 개념을 설명하였지만, 사실상 철학적 개념이라고 보기 어려운 주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제일 먼저 언급한 소크라테스만 해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주제를 먼저 설명하고 이어서 대화법을 적고 있습니다. 대화하는 방법은 철학적 개념이라고 하기보다는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뤽 페리교수가 신학을 철학의 범주에서 떼어낸데 반하여 저자는 신학 역시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도 중요한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신학을 철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서는 안된다는 뤽 페리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던 참이라서 저자의 견해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과학철학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다루었던 칼 포퍼가 빠지고 근래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마이클 센델을 고른 것도 과연 적절했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개별 철학자의 대표적 주제 두 가지를 5쪽 정도로 요약하고 있어 서양철학의 흐름의 가닥을 잡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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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스탈린 - 강철 인간의 태동, 운명의 서막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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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1879년 12월 21일 ~ 1953년 3월 5일)은 192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고, 1941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한반도를 양분한 것이나, 6.25동란의 발발과정에 간여하였을 것입니다. 스탈린은 서구를 지향한 공업화와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시켜 낙후된 소련의 사회구조를 개조시킴으로써 소련을 강대국으로 끌어올렸지만, 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공포정치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소련 사회의 구조개혁의 성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전후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지배가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로버트 C. 터커가 스탈린을 20세기의 이반 뇌제(雷帝)로 묘사한 것은 25년여에 걸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은 철권통치를 통하여 국민들에게 극단적인 공포를 기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젊은 스탈린>의 저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는 1937~1838년 사이에 소련에서는 대략 150만 명이 총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직접 사형선고장에 서명한 것만도 거의 3만9천명에 달했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스탈린의 지인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략 2,000만에서 3,000만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스탈린을 ‘겨룰 자 없는 정치가, 편집증적인 과대망상가, 히틀러를 제외하고는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참상을 저지른 정신이상의 대가’였다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파국적인 성격은 대체적으로 성격형성기에 문제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서구에서 출간된 스탈린에 관한 수천 권들의 저서 가운데 젊은 시절을 다룬 것은 극히 희소하다고 합니다.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새로 공개된 그루지아의 기록보관소에서는 ‘(스탈린)의 어린 시절, 혁명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과정, 폭력단의 일원이고, 시인이고, 수습 사제이던 시절, 한 여자의 남편이자 혈기방장한 연인의 남자. 또 사생아를 낳게 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저버리는 남자로 살아온 과정에 대해 생생하게 말해줄 새 자료들(11-12쪽)’이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젊은 스탈린>에서 기술할 내용은 스탈린의 성장과정에 대한 진짜 기록을 밝히는데 두었다고 했습니다. 스탈린 숭배나 반스탈린 음모론의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은 원본 그대로의 기록을 다루려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젊은 스탈린 주변에 모여든 캅카스인 남자들의 폭력성과 부족주의는 라트비아, 폴란드, 유대인 심지어는 러시아인들에 못지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갱들의 전쟁, 부족들 간의 경쟁, 민족학살을 함께 겪고, 동일한 폭력의 문화를 수용하였던 것입니다. 즉 스탈린을 형성한 것은 비참했던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한 것이 기여했다고 보았습니다. 소련을 형성한 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라는 사실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입니다.

 

소련의 성립이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였음에도,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유럽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에 내재한 모순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이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가 프로메테우스의 낭만적 환상과 완고한 역사적 유물론이 독특하게 혼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토니 주트 지음, 재평가 195-196쪽, 열린책들,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41266).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보인 행태에서 이들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30년대 말 런던의 이스트엔드에서 공산당 조직가들이 주도한 반파시즘 시위에서 조직가들은 사람들을 내보내 파시스트들에 맞서 싸우게 하고는 자신들은 카페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을 밖으로 내보내 자신들의 이름으로 죽게 만들고 뒤따르는 이익을 거두는 사람들로 인식하게 되면서 영국사람들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토니 주트와 티머니 스나이더 지음, 20세기를 생각한다 113-114쪽, 열린책들, 2015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04215) 초기의 레닌주의에 매료되었던 지식인들도 1936년 스탈린의 시범재판이나 1939년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보고서는 소련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과 레닌의 손에서 왜곡된 마르크스를 구출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사이의 연계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러시아혁명은 1905년과 1917년 두 단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1905년 굴욕적인 러일전쟁의 패배 이후에 300년 이상 지속된 로마노프왕조의 실정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의 시위가 일어났는데, 평화적 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군대가 무차별적으로 살상하였고, 시위대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으로 맞대응하면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시베리아철도 주변 부대의 부대들이 반기를 들면서 황제는 헌법제정과 의회의 창설을 약속하는 것으로 철도와 군대를 다시 장악하고 혁명을 수습했습니다.

 

이렇게 구성한 의회도 걸핏하면 해산시키는 등 반동정책이 계속되고,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러시아군이 보여준 무기력함에 더하여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자 1917년 3월 8일 제국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시민봉기가 일어나고 대다수의 수도경비대가 여기에 동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퇴위를 결정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로 넘어갔습니다. 이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소비에트는 소련의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6월 16일에는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사회혁명당이 최다석을 차지하였고,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습니다. 7월에 케렌스키를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가 출범하였지만, 좌익의 탈퇴로 내분에 빠졌고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10월 24~25일(신력 11. 6~7) 사이에 봉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다음백과, 러시아혁명;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0215a).

 

다시 <젊은 스탈린>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볼세비키혁명의 과정이나 이념적 배경은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스탈린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도 혁명 이전의 행적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스탈린에게 영향을 미친 캅카스의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보았던지 프롤로그에서는 1907년 6월 26일 지금의 그루지아공화국의 수도인 트빌리시의 중앙광장에서 일어난 은행강도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29살의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강탈한 돈은 레닌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카자크, 은행 직원, 무고한 보행자 등 40여명이 사망했고, 스탈린은 뻔뻔한 은행강도, 살인자, 해적, 방화범 등으로 점철된 경력을 쌓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탈린은 1878년 12월 6일 그루지야의 작은 도시 고리에서 젊은 제화공 베소 주가시빌리와 예카테리나 케케 겔라제 사이에서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스탈린의 두 형은 홍역 등으로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 베소는 알콜중독에 빠졌습니다. 어렸을 적에 소소라고 불렸던 스탈린이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베소는 편집증에 시달리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주교가 되기를 바란 케케는 소소를 성직자의 자녀만 입학할 수 있는 교회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비밀이라고 하네요. 교회학교에서 소소는 공부를 잘하는 합창단 소년인 동시에 길거리의 싸움꾼으로, 반쪽은 옷을 잘 입은 마마보이이며 나머지 반쪽은 부랑아로 이중적인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의 폭력성과 형편없는 처신, 열정적인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타고난 영리함과 거만함이 교대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신중했지만, 화가 나면 잔인해졌고 마구 욕을 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107쪽)” 다른 사람보다 잃을 것이 없었고 감정적인 애착대상이 별로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그럼에도 전교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인 소소는 그림, 연극, 합창 등 다양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1890년 1월 6일 합창단원들이 교회 밖 행사에 나갔을 때, 통제를 잃은 마차에 소소가 치어 큰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베소가 등장해서 소소를 자신이 일하는 구두공장에 도제로 등록시켰습니다. 물론 케케가 후원자들을 동원하여 소소를 다시 교회학교로 돌려놓을 때까지 힘겹게 일하면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에 헌신한, 스탈린이 직접 노동자로 일한 유일한 경험이라고 합니다. 베소의 납치사건 이후로 소소는 폐렴을 심하게 앓았고, 학교에서도 점점 반항아로 변해갔습니다.

 

교회학교를 졸업하고 소소는 뛰어난 성적으로 트빌리시의 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 무렵 트빌리시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학교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소소는 금지된 사회주의문헌을 읽는 비밀 독서회에 가입하였고, 결국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봄에는 신학교 밖으로 몰래 나가 철도노동자들의 모임에 참석합니다. 낭만적인 시인이었던 스탈린은 ‘반쯤 신비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독실한 광신주의자’가 되어 갔습니다. 이 무렵 형성된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만이 인류를 해방시키고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주도록 역사가 정해 놓았다. 인류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회주의를 달성하기까지 엄청난 시련과 고난과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섭리에 따르는 이러한 진보의 핵심은 계급투쟁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곧 일반 대중이다. 그들의 해방은 개인의 자유를 위한 촉매제가 된다(148쪽)”라고 설명되었습니다. 결국 소소는 신학교를 떠나게 됩니다.신학교를 떠난 소소는 기상관측소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급진적인 성향의 동료들을 모아 조직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트빌리시의 헌병대 장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등 직업적인 비밀 투사의 길을 밟아 갑니다. 그리고는 파업을 선동하고 시위와 파괴를 주도하면서 경찰과 헌병대의 감시를 받고, 체포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몸을 피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 이어집니다. 때로는 붙잡혀서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내 탈출해서 다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합니다. 1905년 스탈린은 볼셰비키 당대회에 참석할 캅카스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국의 수도에서 레닌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양쪽 부모가 모두 세습귀족인 레닌은 볼품없이 생겼지만 그의 삶은 마르크스주의 혁명에 대한 광신적인 헌신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이때 만난 레닌에 대하여 “‘입만 살아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토록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지성의 힘과 완전한 실용성의 융합이었다.(287쪽)”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이후 스탈린은 레닌에게 경도되어 갔고, 스탈린의 강한 추진력에 매료된 레닌 역시 스탈린을 중시하게 되고 결국에는 후계자로 지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스탈린 역시 모든 활동의 중심에 레닌을 두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젊은 스탈린>을 통해서 저자가 밝히고자한 것은 스탈린의 냉혹한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성장배경에 더하여 러시아제국시절부터 운용해온 비밀경찰들의 은밀한 활동으로 어느 조직이나 배신자가 끼어들 가능성이 있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으면 단호하게 쳐내는 전략을 구사해야만 했던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탈린의 그런 냉혹한 성격은 수없이 등장하는 여성들과의 관계를 맺고 상황이 바뀌면 관심을 두지 않은 데서도 읽혀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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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미술 Art & Ideas 11
조너선 블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한길아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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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왕국이 지배한 지역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유적들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책읽기인 셈입니다. 조너설 블룸과 세일라 블레어 부부가 같이 쓴 <이슬람 미술>을 동네 도서실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매우 반가웠습니다. 서점가에서는 이미 절판된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세력이 왕성하였을 때는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 남쪽까지, 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북쪽 해안을 따라 유럽의 이베리아반도까지, 동쪽으로는 인도의 중부 이남에서 중앙아시아 까지, 북쪽으로는 발칸반도를 넘어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육박하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622년 무함마드에 의하여 창건된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왕국은 불과 10년 사이에 아라비아 전역을 정복하고 빠르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와 같은 동력은 정복한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이슬람화하였던 것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미술에는 다양한 문화가 녹아들어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이슬람이 영향을 미친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다양한 미술작품들에서 지역의 차이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공통된 특징을 찾아보려 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먼저 이슬람의 역사를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시기는 이슬람교가 태동하여 이슬람 사회가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까지로, 이 시기에는 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까지의 지역을 한 명의 칼리프가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두 번째 시기는 칼리프 시대가 무너진 10세기부터 뚜렷한 예술적 전통을 갖춘 지방호족들이 할거하던 시기입니다. 세 번째 시기는 강력한 힘을 지닌 황제가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제국을 이루던 시기로, 지중해를 둘러싼 오스만제국, 이란의 사파위 왕조, 인도의 무굴제국 등입니다.

 

이슬람교는 신의 형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화부문에서는 괄목할만한 작품들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건축, 초기 문자, 직조술, 장식미술, 제책술 등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영향을 미친 지역에서 발견되는 많은 작품들을 비교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 읽어 알고 있는 내용과 차이점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면 모스크에 서 있는 미나렛이 신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려주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실은 높이 세운 미나렛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모스크의 위치를 알리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또한 베일이 이슬람여성들에게 의무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 북아프리카의 투아레그족의 경우는 남성이 베일을 쓴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점입니다. 사실 메리노 양이 스페인에서 개발에 성공한 품종인 줄 알았던 것 역시 8세기경 이슬람 땅의 동부에서 알려진 것이 스페인으로 가서 품종을 개량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슬람 미술에서 건축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왕궁은 물론 이슬람 땅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소한 주택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는 이미 무너진 것들까지도 인용하여 구조와 장식등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건축물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라서 가볼 기회가 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직물과 서책의 비중이 큰 것은 좋은 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스만 제국에서 발달한 세밀화를 포함한 미술작품들은 별로 다루어지지 않아서 아쉬운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맺음말에서 17세기 말 이란의 카자르왕조에 전해진 유화기술이 페르시아 양식과 결합한 독특한 양식의 회화로 발전했다고 설명하면서 국왕의 초상화를 비롯한 몇 개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책도 읽어서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처음 듣게 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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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우처럼 살라 - 행동하는 자유인, 소로우가 월든 숲에서 찾아낸 삶의 본질 다른 길, 자기만의 삶 2
박홍순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아무리 좋은 일도 일상이 되면 심드렁해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지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빨리빨리’문화가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반작용으로 ‘느림의 미학’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박홍순 작가의 <소로우처럼 살라>를 받아들었을 때의 첫 느낌은 ‘느림의 미학’을 이야기하려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인적이 드문 숲속 오두막에서 자급자족하며 산책을 하거나 사색에 잠긴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라고 서문의 첫머리는 무언가 더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특히 “더 중요한 것은 숲 속에서의 생활 자체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한 이유다.”라는 대목에 가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소로우가 제시한 삶이 현대의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이 태동하는 모태가 되었다고 보았고, 그가 선보였던 시민 불복종이라는 형태의 저항을 민주주의 선거절차가 보장된 현대사회에서 부정의한 법이나 정책에 대한 저항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북소리]에서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의 학문적 배경을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로우처럼 살라>의 저자 박홍순의 경우는 관련된 정보를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출판사의 저자소개에서도 ‘앞만 보고 달리느라 반성의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인문학 보급에 힘쓰고 있다.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인문학적 사유를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글을 써왔다.’라고 두루뭉술하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다수의 저작을 통하여 미술, 철학, 종교, 역사 등 다양한 분야와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해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어려워하는 분야이다 보니 그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소로우처럼 살라>가 처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인문학작가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그의 학문적 배경은 역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독서와 집필이 곧 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책을 통하여 지식을 얻고, 그렇게 얻은 지식들을 엮어 인문학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각설하고 저자는 한국 사회가 소로우에 관심을 가지고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가 다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이른 바 근대화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우리는 서구 문명이 제공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틀에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꿰어 맞추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즉, 압축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을 해소하는데 있어 소로우의 사상이 가장 적절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연에 대한 태도, 자유로운 삶의 전망, 불복종을 통한 저항이라는 세 가지 방향에서 소로우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재조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적한 한국적 성장의 폐해가 낳은 문제처럼 저자 역시 소로우의 사상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고루 다루면서 결론으로 향하지 않는, 즉 나름대로 정한 목표에 부합되는 내용들을 모아 꿰어 맞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보니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 두 번 이상은 읽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먼저 저자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읽고, 두 번째에는 비판적으로 읽으며, 다음에는 나름대로의 주관에 따라서 재해석하면서 읽는 방식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월든>, <시민의 불복종>, <강>, <야생사과> 등 주요 저작의 핵심을 통해 소로우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접근하고자 하였으며, 소로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근현대 사상가의 고민을 함께 비교했다고 했습니다. 특히 소로우의 삶을 따라간 스콧 니어링의 삶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주제 ‘자연과 함께 하는 삶’부터 시작해볼까요? 이 주제 안에서 저자는 자연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고, 문명 밖에서 문명을 성찰함으로써 생태적 사고와 삶의 지평을 열게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1845년 3월말 경, 자연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기 위하여 소로우는 도끼 한 자루를 (빌어서) 들고 숲으로 향했고, 월든 호숫가 언덕배기에 집을 한 채 지었다고 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일이라서 입주를 한 것은 7월 4일입니다. 집을 짓는 사이에 주변에 텃밭을 갈아서 씨를 뿌렸습니다. 다만 경작을 했다기보다는 땅을 갈아 씨를 뿌린 것이 전부였고 김매기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은 자연이 키워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해 농사를 마무리할 즈음에 정산해보았더니 일용할 식량이 남았다고 적었습니다.

 

소로우에게 있어 자연에서의 자급자족하는 생활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삶의 여유에 맞추어져 있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삶, 실감을 느끼기 위하여 보통의 한국인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오로지 일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퇴직을 하면 손에 남는 것은 퇴직금 몇 푼과 집 한 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사실저자께서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보신 적은 있는가 싶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적 경험한 바로, 시골에서는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으로 일을 나가서 해가 져서 어두운 다음에야 집에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습니다. 종일 논과 밭에서 고되게 일을 해야 한 해를 버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소로우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책을 읽고 사유하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네 농촌 사정은 소로우가 살던 시절의 미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고려하면 상황은 더욱 나빠집니다. 씨만 뿌리고 내버려두면 과연 가을에 손에 들어오는 수확물이 얼마나 될까요? 모르긴 해도 한 끼 밥을 지을 식량도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남산골샌님들은 냉수만 마시고도 글을 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내려옵니다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습니다. 정신적 여유를 찾기 위해서는 적어도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월든>에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뉴잉글랜드 지방에 처음 도착한 이민자들은 집을 짓는데 시간을 들이지 않고 다음 추수까지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굴을 파서 임시로 거처할 움막을 짓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하나 짓고, 봄에는 널려 있는 공터를 갈아 씨를 뿌리고는 유유자적하는 삶을 2년여 보낸 끝에 다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간 이유와 그 곳에서 지낸 2년여의 삶에만 주목할 뿐, 왜 그가 숲을 떠나 세상으로 향하였는 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실 월든 숲으로 들어간 것은 일종의 실험이었다고 소로우는 전제한 바 있습니다. 즉, 인류의 발명과 근면성이 가져온 편의는 분명 받아들일 수 있으나, 인류는 여전히 그 옛날처럼 소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 숲 생활의 첫 번째 해는 끝이 났다. 그다음 해도 첫해와 큰 차이는 없었다. 1847년 9월 6일 나는 드디어 월든을 떠났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54쪽, 이레, 2010).”라고 소로우는 월든에서의 생활을 정리합니다. 즉, 실험이 끝났기 때문에 떠났던 것입니다.

 

맺음말에 있는 다음 구절을 보면 그의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나 마찬가지로 어떤 중요한 이유 때문에 숲을 떠났다. 내게는 살아야 할 또 다른 몇 개의 인생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으며, 그리하여 숲 생활에는 더 이상의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쉽게 어떤 특정한 길을 밟게 되고 스스로를 위하여 다져진 길을 만들게 되는지 놀라운 일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1-462쪽, 이레, 2010; http://blog.joins.com/yang412/12281440)” 소로우의 선택이 개인적으로는 생태주의 삶을 실험하는 장소가 아니라 과학기술에 기초한 생활방식이 인간에게 강제하는 노예적 삶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는 저자의 설명은 지나쳐 보입니다. 소로우의 삶을 확대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소로우는 어디에서도 문명의 발전을 거부하고 야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바 없습니다만, 저자는 문명의 발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의료기술이야말로 문명이 인간에게 제공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직까지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는 인플루엔자 치료를 예로 들어 의료기술의 발전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감기는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고 특정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이 개발돼야 치료효과가 있다. 세상에 모든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약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에이즈 바이러스를 비롯하여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치료제가 개발되어 환자의 생명을 구하고 있는 단계에 와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주제인 ‘자유로운 삶’ 역시 ‘나는 구속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는 <월든>의 한 대목에서 이끌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로운 삶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점보다는 누군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비정규직문제에서도 동일한 시간노동에도 임금이 싸고 각종 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고 적었지만, 원칙적으로는 비정규직에게도 4대 보험을 보장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근무시간의 단순비교보다는 근무강도나 근무의 내용도 논의되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자유시장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주장에서는 세계가 자유무역, 자유시장을 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부사회의 구성원을 위하여 보호무역, 통제된 시장을 운용하는 것으로 과연 지속가능한 성장은커녕 현상유지조차 가능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인 ‘저항, 그리고 대안을 찾는 삶’은 소로우의 ‘불복종을 통한 저항’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사실 사회의 규범에 불복종하는 행위는 소로우보다 먼저 행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정치가 오노레) 미라보(1749~1791)는 ‘사회의 가장 신성한 규범에 공공연히 대적하는 일에 가담하려면 어느 정도의 결의가 필요한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노상에서 강도짓을 했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0쪽, 이레, 2010)”라고 소로우는 인용했습니다. 그 신성한 규범이 정의로운 것이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으나 소로우는 미국 정부가 텍사스의 병합을 놓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을 탄압하고 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세금의 일부를 납부하지 않았고, 정부는 이러한 소로우를 감옥에 가둔 바 있습니다. 소로우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불복종을 통한 저항을 내세우게 됩니다.

 

저자는 불복종이 정당화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시민 불복종이 법을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올 것이라는 비판을 일축합니다. 문제가 있는 정책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언론을 통하여, 혹은 관련법의 개정을 통하여, 나아가서는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비판론자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나치의 지도부는 그렇다고 쳐도 독일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대규모 학살의 공범 혹은 방관자가 되었다고 설명한 프리모 레비를 인용합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고발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라고 했는데(191쪽), 이런 설명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라는 이유로 괴로워하던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칠 무렵에 나온 것으로, 독일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토니 주트 지음, 재평가 89-110쪽, 열린책들, 2014년; http://blog.joins.com/yang412/13741266)

 

다수가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고 본다면, 마찬가지로 시민불복종을 주도하는 사람 역시 그릇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로우 역시 “사회에 대해 무조건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한 인간의 의무는 아니다. 자기 내부의 법칙을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취하게 되는 태도를,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견지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월든 460쪽, 이레, 2010).”라고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민불복종 또한 개인들의 선택에 달린 문제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로우의 자연 안에서의 여유로운 삶은 분명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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