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발견 1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0
스텐 나돌니 지음, 장혜경 옮김 / 들녘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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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만, 어떤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발력이 좋다고도 하는 이런 분들은 대체적으로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대체적으로 느린 사람이 남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가 쉽지 않은 경향과 맞물리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분들이 때로는 커다란 실수를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사안을 빠르게 파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점을 놓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빠른 것이 꼭 옳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느림의 발견>은 바로 느림의 장점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역사교사를 지낸 바 있는 독일 작가 스텐 나돌니가 쓴 <느림의 발견>은 영국의 탐험가 존 프랭클린 해군소장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786년 영국 링컨셔 스필즈비에서 태어난 프랭클린소장은 어려서부터 행동이 굼떠서 왕따를 당하던 소년이었습니다. 이런 그의 진면목을 알아본 사람은 옴선생님과 동네에서 배를 타는 선원 매슈 뿐이었습니다. 매슈는 그에게 해군사관생도가 되라고 권유합니다. 배를 타기 위하여 가출했다가 잡혀온 존은 결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반응이 느린 대신 관찰력과 끈기가 뛰어나다는 장점을 살려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14세때 영국 해군에 들어가 매슈 플린더스가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탐험에 참여하고, 트라팔가해전, 뉴올리언스 전투에도 참정하였습니다. 특히 오스트레일리아 탐험에서는 선장 매슈로부터 위기상황에서 선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세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주변을 꼼꼼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존은 이런 자질을 타고났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적에 친구들과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존 혼자서만 태양의 위치, 바닥의 높낮이 등 느린 화를 관찰하고 돌아가는 길을 이야기했지만 모두들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존의 이런 자질은 전투 중에 빛났습니다.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여유 있게 행동했기에 다른 사람들이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변화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 존은 바람 없는 밤하늘에서 달의 움직임과 구름의 변화를 음미했다. (…) 호흡이 깊어졌다. 자신을 한 조각 바다라고 생각했다.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자신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는 영상들.(89쪽)” 전투 중에 저격병과 마주한 순간에도 확실하게 맞출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습니다. 기다림은 존의 특기였기 때문입니다.

 

2부에서는 북극을 경유해서 신대륙으로 가는 북극항로 개척을 위함 탐험에 여러 차례 나서는 모습과 호주의 태즈매니아섬의 총독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북서항로의 첫 탐험에서는 현지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가 그의 성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일부 대원들의 튀는 행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탐헝에 실패하였지만 대원의 상당수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고, 존은 탐형과정을 출판하여 유명해지게 됩니다. 기사작위를 받게 된 존은 태즈매니아섬의 총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선원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신념에 따라 총독으로서의 임무를 다했던 그는 전임 총독과 유착하여 주민을 착취하던 사람들의 심한 저항을 받으면서 결국은 총독의 임기를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더 있었습니다. 북서항로의 개척은 사람으로서의 소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항해에 필요한 정보, 예를 들면 기상상황, 식량조달문제, 지형 등 모든 상황들은 현지에 가서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탐험이라는 것이 성공보다는 실패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탐험대원들의 안전한 귀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845년 138명의 장교와 선원을 이끌고 북서항로를 찾기 위한 탐험에 나선 탐험대의 생사는 두 번째 아내의 집념에 따라 구성된 수색대가 랭커스터섬 남서쪽 킹윌리엄섬에서 선원들의 유해와 1848년 4월 25일까지 기록된 탐험이록이 발견된 1859년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느림의 발견>을 읽고 나면 느림이 가지는 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느림과 빠름이 어떤 때 유용한 지에 대하여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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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의 바다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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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눈물 위를 달린다; http://blog.joins.com/yang412/13491439>를 통해서 만났던 팀 보울러를 신작 <속삭임의 바다>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외부 세상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섬을 무대로 역시 신념을 지켜가는 소녀가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을 다루고 있어 문제가 많은 학교와 가정 속에서도 꿋꿋하게 바른 길을 걸어가는 소년의 성장과정을 다룬 전작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사방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바다와 수평선 밖에 없는 섬에서는 바람과 파도가 무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집집마다 바다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씩은 꼭 있어서 마음을 기댈 무엇인가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열다섯 살이 된 처녀 헤티가 살고 있는 모라섬도 그런 곳입니다. 어렸을 적에 섬 밖에서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러 나갔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는 할머니와 함께 살아온 모라는 몽상가적 기질이 있어 바다유리를 들여다보면서 무언가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바다유리는 유리병 혹은 유리조각이 파도와 모래에 오랫동안 깎여 매끈한 보석처럼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버린 폐기물을 자연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 되는 셈입니다.

 

저자는 “헤티는 유리 속을 떠다니는 형상에 대해, 그리고 수년 동안 찾아보았지만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다른 형상에 대해서도 생각했다.(10쪽)”라고 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헤티는 바다유리에서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형상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유리 속에서 발견한 형상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그 비밀이 밝혀지는 날이 오게 됩니다. 헤티는 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에 배를 타고 들어온 노파가 바로 그 사람이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배가 섬에 도착할 무렵 시작된 폭풍에 휩싸여 바다에 빠진 노파를 마을 사람들이 구해냅니다. 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퍼노인은 그 노파가 바로 모라섬에 재난을 가져올 사람이기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고 나섭니다. 어느 동네나 이런 분이 꼭 있는 것도 묘합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선동하던 퍼노인이 사고로 죽고 퍼노인에게 동조하던 친구 그레고르 노인까지도 죽음을 맞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사경을 헤매는 노파를 집으로 모셨지만 헤티의 할머니와 친구들도 회생의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 상황에서 오직 헤티만은 회생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열여섯 살된 앳된 처녀가 마을의 원로에게 맞서 틀린 생각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용기는 쉽게 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헤티의 믿음대로 노파는 사경을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배가 폭풍에 휩쓸려 부서지는 상황에 이어 마을의 원로 둘이서 잇따라 죽음을 맞게 되자 헤티는 노파를 지키는 것이 버겁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작은 배 ‘아기 돌고래’에 노파를 싣고 노파가 살고 있는 동네, 모라섬에서도 한참을 나가야 하는 하가까지 데려다주려고 나서게 됩니다. 섬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든 배, ‘모라의 자랑’이라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헤티의 작은 배로는 어림없는 일일 터인데 용감한 것인지 무모한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신념은 세상에 무서운 일이 없게 만들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아기 돌고래도 결국 파도를 만나 돛이 부서져 표류하게 되는데, 운명이 그렇게 인도한 것인지 노파가 살던 곳, 하가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모라섬으로 흘러온 노파, 마리타 할머니는 바다에서 잃은 딸 로사를 찾아 나선 것이었는데 하가와 모라섬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인연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아 궁금증을 풀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헤티가 무모하다 싶은 행동도 그녀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운명의 끈이 당기는 대로 나아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 ‘세상이 이런 일이’에 나올 만 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건강한 생각을 가진 헤티가 하가에서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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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 아인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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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요즈음 유행한다는 날씬해 보이는 바지를 사러간 적이 있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바지도 넉넉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생각나서 여유가 있는 바지가 다시 유행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신축성 있는 소재가 좋아지고 있어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란 답이 돌아왔습니다. 꼭 유행이 돌고 도는 것은 아마도 옛것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래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사자성어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번쯤 들어보았음직한 이 말은 논어(論語)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라는 구절에서 유래합니다. “‘옛 것을 파악하여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수 있다.’라고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라고 해석합니다. 이 말씀에 담긴 의미는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나오는 “記問之學 不足以爲師矣(기문지학 부족이위사의)라는 구절을 새기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식을 암기해서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온고지신’과 ‘기문지학’에서 옛글을 많이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그 속에서 현재나 미래에도 잘 맞는 새로운 이치를 깨치는 것이야말로 학문하는 자세라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예전에 문제가 있어 버려졌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유익함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임신으로 생긴 입덧, 두통, 불면증, 식욕저하 등을 개선하는 효과가 기대되었던 탈리도마이드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시판 후 팔다리가 없거나 짧은 해표지증(Phocomelia Syndrome)을 가진 기형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폐기되었던 탈리도마이드는 그 작용기전이 밝혀진 최근에 새로운 유용성이 각광받게 되었습니다. 치료가 어려운 다발성 골수종 환자에서 탈리도마이드를 다른 항암제와 같이 사용하면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야말로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속된 말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이번 주에 소개하는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를 그런 의미에서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북소리]에서도 이미 소개한 <건축의 일곱 등불; http://blog.joins.com/yang412/13284036>과 <베네치아의 돌; http://blog.joins.com/yang412/13712775>을 통하여 친숙해진 존 러스킨이기도 합니다. 두 작품만을 놓고 보면 존 러스킨을 미학자로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건축과 장식예술 분야에서 고딕 복고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대중의 예술기호에 큰 영향을 미친 존 러스킨(1819-1900)은 작가이자 화가, 예술비평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회개혁 사상가로, 예술은 물론 문학, 자연과학(지질학과 조류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긴 천재였습니다. 이와 같은 러스킨의 행보에 관하여 ‘다양한 관심이란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다른 공부를 위해서 한 공부를 포기해야 하는 것(다음 백과사전, 러스킨;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0176b)’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순수 미술에 대한 러스킨의 날카로운 비평은 대부분 35세 이전에 쓰인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세를 넘어설 때까지도 그저 예술애호가 정도로 대접받았습니다. 19세기말 들어서야 러스킨의 예술적 견해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지만, 이미 1860년대부터 러스킨의 관심은 예술비평에서 정치경제·사회경제 분야로 옮겨간 뒤였습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1862년)> 역시 이 무렵에 쓴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7년 먼저 발표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애덤 스미스와 맬서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정통파 경제학의 대척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간디, 버나드 쇼, 톨스토이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말미에 ‘마법의 책, 마법의 주문’이라는 제목으로 쓴 간디의 수필을 싣고 있습니다. 간디는 이 책을 읽고 다음 세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1. 개인의 이익이 모든 사람의 이익보다 우선될 수 없다, 2. 노동을 통해 생존권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변호사의 직무나 요리사의 직무나 그 가치는 동일하다, 3. 농부의 삶과 직공의 삶과 같이, 노동하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다.(221쪽)” 간디의 이러한 깨달음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함께 일하면 깨달음을 얻어 행복한 공동체를 이뤄가자는 사르보다야(Sarvodaya) 운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4편의 논문은 출간하기 1년반 전에 콘힐매거진에 연재된 것들인데, 연재하는 동안 대부분의 독자들로부터 거친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는 러스킨의 연재가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잡지불매운동까지 일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킨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말하건대, 이 논문들은 내가 지금껏 써왔던 어떤 글들보다 훌륭하고, 진실하며, 필요한 말들만 사용했고, 또한 사회에 유익을 주는 글이라 믿는다(7쪽)”라고 술회하였습니다.

 

각각 ‘명예의 근원’, ‘부의 광맥’, ‘지상의 통치자들이여’, ‘가치에 따라서’라는 제목을 단 4편의 논문을 통하여 러스킨은 ‘부의 정의’와 ‘정직의 회복과 유지’를 논하였습니다. 다만 노동의 재편에 관한 주제는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성립된다면 쉽게 풀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국가 전역에 걸쳐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훈련학교가 정부예산과 감독 하에 설립되어야 한다. 둘째, 직업훈련학교와 연계되어 정부의 전적인 관리 하에 각종 생필품의 생산과 판매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모든 산업에 유용한 기술을 연마할 수 있는 공장과 공방이 설립되어야 한다. 셋째, 남자든 여자든, 혹은 소년이든 소녀든, 누구든지 일자리가 없는 사람은 바로 거주지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직업훈련학교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년층과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택과 함께 안락한 생활이 제공되어야 한다. 아마도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사회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창출되는 부가 지주계급과 자본가에서 편중되지 않도록 하자는 개념을 담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명예의 근원’에서 저자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논합니다.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이해관계를 결정하는 변수는 한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동 양태를 ‘득실의 균형’이라는 해석논리로 귀납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제한 러스킨은 ‘득실의 균형’이 아닌 ‘정의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을 향한 조물주의 의도일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정의’라는 단어는 한 사람이 타인을 향해 품는 ‘애정’을 내포하고 있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즉, “고용주와 고용인이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최대 이익을 안겨 줄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정의와 애정.(32쪽)”이라는 것입니다. 소속 노동자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고용주는 특별히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노동력이 넘치는 상황으로 유능한 노동자마저도 부당한 임금을 받고 있었던가 봅니다. 러스킨은 동일한 노동 분야 임금의 평등화야 말로 우선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라고 하였고, 이어서 시장의 불규칙한 변동에도 불구하고 일정 규모의 노동자를 유지하는 것이 두 번째 목적지라고 하였습니다. 일종의 고용안정화를 주장한 셈입니다. 무능한 노동자가 선도하는 저임금 때문에 유능한 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임시직 노동자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46쪽)’라는 설명은 나름대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노동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정규직으로 진입한 사람들은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자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일삼으며, 새로 정규직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 높은 장벽을 세움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보전하거나 심지어는 자리를 세습하는 일은 없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최근에 의료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선택진료제도의 폐지와 연관지을 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의사와 갓 의대를 졸업한 의사가 내리는 진단의 차이는 직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기울인 전문적인 능력이나 이후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 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라고 전제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같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실력에 상관없이 동일한 사례를 지불하고 있다.(44쪽)’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영국의료제도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희생에 대한 대가는 의사에 대한 존경이었다고 하는데, 요즈음 우리사회가 의사를 존경하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러스킨은 구성원 간의 애정지수가 증가함에 따라 얼마간의 보편적 이익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당시의 경제학이 추구하는 부는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는 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질타하였습니다. 러스킨이 보기에 부자가 되는 기술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서 불평등의 간격을 최대한 벌리는 것(73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사회 구성원 간의 부의 불평등이 국민들에게 유익할지 유해할지는 논리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유보하였습니다. 다만 부당한 방법으로 발생한 부의 불평등은 그것이 사회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 과정 중에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고 보았습니다. 부의 참된 가치는 물리적 수량을 둘러싸고 있는 도덕적 기호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합니다. 꾸준한 노력, 능동적인 마음가짐, 그리고 생산적인 창의력 등을 도덕적 기호로 본다면, 극도의 사치나 무자비한 횡포, 혹은 타인을 파멸로 몰아넣는 사기 등은 부도덕적인 기호로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결국 ‘정의’로 귀납된다고 합니다. 러스킨은 부의 본질이 타인에 대한 지배력에 근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돈의 지배력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지배를 받는 사람이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또 그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부의 가치가 증대한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평등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있기 마련이라는 점을 ‘칼을 든 병사만이 아니라 호미를 든 병사도 필요하다.’ ‘통치와 협력은 만유의 생명의 법칙이고, 무정부 상태와 경쟁은 만유의 죽음의 법칙이다’라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은 사유재산권을 무효화하자는 사회주의 사상과는 단연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당시에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음을 공론화되어온 것처럼 부자들 역시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침해할 수 없음을 공론화되기를 소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논문 ‘가치에 따라서’에서는 밀과 리카도 등 당시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비판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물품의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유용성’과 ‘선호도’이고, 그 물품을 부의 척도로 삼으려면 반드시 이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149쪽)”라고 하는데, 러스킨은 유용성과 선호도는 그 물품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숫자와 성향에 따라서 결정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결국 부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인간의 역량과 성향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러스킨이 정의하는 부는 ‘역량 있는 사람의 손에 소유된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를 평가할 때는 ‘소유재산의 가치’와 그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역량’이라는 두 개의 잣대를 공평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러스킨은 “생명이 곧 부다”라는 심오한 진리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했습니다. 사랑과 환희와 경외가 모두 포함된 총체적인 힘이 바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부유한 국가는 최대 다수의 고귀하고 행복한 국민을 길러내는 국가이고, 가장 부유한 이는 그의 안에 내재된 생명의 힘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내적, 외적 재산을 골고루 활용해서 이웃들의 생명에 유익한 영향을 최대한 널리 미치는 사람이다.(195-196쪽)”라고 한 러스킨의 말을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지속발전을 위하여 부를 서로 나누고 뒤에 올 사람들까지도 챙기는 여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지음

곽계일 옮김

240쪽

2014년 7월 28일

아인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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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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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 <파랑새>는 벨기에 출신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가 1906년에 발표한 6막 12장의 희곡을 각색한 것입니다. 2년 뒤 <파랑새>는 러시아 연극계의 거장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연출로 모스크바 예술 극장 무대에 올려져 큰 성공을 거두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현대연기론을 정립하여 연기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그의 <배우수업>을 읽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파랑새>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 초라한 오두막집에 사는 틸틸과 미틸남매를 찾아온 요술쟁이 할머니는 아픈 딸이 파랑새를 보고 싶어 한다면서 찾아달라고 부탁합니다. 남매는 할머니가 건네준 다이아몬드가 달린 마법의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 나섭니다.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미래의 나라’ 등 남매는 사람들을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가는 곳마다 우여곡절 끝에 파랑새를 만나게 되지만 파랑새들은 날아가 버리거나, 색깔이 변하거나 심지어는 죽어 버립니다. 결국 남매는 파랑새를 손에 넣지 못하고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남매는 그렇게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자기 집 새장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결국 파랑새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희곡 <파랑새>의 작가 마테를링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사실 철학서 한 장을 번역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파랑새>에는 ‘죽음’, ‘행복’, ‘시간’, ‘운명’ 등이 의인화되어 등장하고, 남매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지하고 탐욕스럽습니다. 게다가 보기에는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나무들’과 ‘동물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저자는 <파랑새>에 많은 상징과 비유를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비유 가운데서도 마테를링크가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바로 ‘행복’입니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소박한 행복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행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해요.’라는 빛의 요정의 말처럼 행복은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파랑새를 빌어서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오늘 소개하는 책이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정복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물론, 러셀이 생각한 행복의 개념이 한 세기가 흐른 오늘날에도 같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지도 같이 고민해보는 책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수리논리학 분야의 저작들과 평화운동, 핵무장 반대운동을 비롯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유명하며,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경은 영국의 모머스셔 트렐렉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인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병사했고 18개월 뒤 아버지도 돌아가시는 바람에 조부모 밑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개인교습을 통하여 교육을 받은 러셀경은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굳어져 갔으며, 모든 것에 대하여 회의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경험을 통하여 논리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된 그는 11살 무렵 수학의 확실성을 알고 기뻐했지만, 동시에 기하학의 공리(公理)는 증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어야하는 것임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18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졸업했지만, 졸업 후에는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형이상학자 J.M.E. 맥태거트의 영향으로 잠시 관념론에 심취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넓은 의미의 경험주의자·실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철학은 ‘과학적인 세계관이 대체로 옳은 견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3가지 주요목표를 추구했는데, 첫 번 째 목표는 인간지식의 겉치레들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줄이는 것이고, 2번 째 목표는 논리학과 수학을 연결하는 것이었으며, 3번 째 목표는 논리적 분석이었습니다.(다음 백과사전, ‘러셀’;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0168b)

 

그러면 다시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만나보기 위하여 러셀경의 <행복의 정복>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복>은 크게 ‘행복이 당신을 떠난 이유’와 ‘행복으로 가는 길’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러셀경 답게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행복이 당신을 떠났다’라기 보다는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맞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행복은 파랑새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테니까요. ‘행복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유엔이 전 세계 158개 국가를 상대로 국민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2015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47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1위는 영세중립국 스위스가 차지했다고 하네요(연합뉴스 2015년 4월 24일자 기사, “한국, 행복지수 158개국 중 47위…1위 스위스)” 그런가하면 유럽 신경제재단(NEF)이 148개국을 대상으로 하여 조사한 ‘국가별 행복지수’의 결과에서는 부탄이 1위를 차지했는데, 우리나라는 68위에 머물렀습니다. 신경제재단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가를 조사한 것과는 달리 유엔은 국내총생산(GDP), 관용의식, 기대수명, 정부와 기업의 부패 지수 등 5개 항목을 0~10점까지 점수를 매겨 합산한 결과입니다. 결국 조사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는 셈인데, 중요한 것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러셀의 접근 방식은 행복에 관한 파랑새 이론과 흡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행복이 당신을 떠나간 이유, 즉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아홉 가지나 늘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외부적 요인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논의대상에서 제외한 둔 것은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심리적 치유를 통하여 행복을 되찾게 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유 없는 불행은 없는 법, 저자는 끊임없는 경쟁이야말로 불행의 근원적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물론 이어 나오는 단조로운 일상 때문에 불행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경쟁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사람들을 쉽게 지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경쟁이 습관화되면 자신과 직접 관계가 없는 부분에까지 침투하여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일정한 기간 동안 소비되는 재화의 수량이 증가할수록, 그 재화의 추가분에서 얻는 한계 효용은 점점 줄어든다.’라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행복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로 즐거움을 얻게 되었을 때는 같은 일로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다음번에는 강도가 더 높아지거나 빈도가 높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행복에서의 한계효용체감의 문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은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근본적인 만족감을 표면적인 쾌감으로, 지혜를 얄팍한 재치로, 아름다움을 생경한 놀라움으로 바꾸어 버린다. 나는 극단적으로 자극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일정한 양의 자극은 건강에도 이롭다.(69쪽)” 결국 적절한 수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중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경쟁은 걱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일종의 연쇄반응인 것입니다. 걱정은 두려움으로 발전하고 결과적으로는 정신적 피로를 가중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경쟁이 가중되다 보면 경쟁 대상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사실 질투는 행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도덕적으로 보나 지적으로 보아 나쁜 버릇입니다. 경쟁상태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축하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질투라고 하는 소모적 감정에 빠지지 않는 좋은 방어수단입니다.

 

불합리한 죄의식 역시 사람을 불행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원인입니다. 본의 아니게 도덕 원칙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경우 합당한 속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을 털어내지 못하게 되면 자존감이 손상되고 심하면 절망감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특히 종교인의 경우, 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우 심한 죄의식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을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변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쏟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피해망상이 심해지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지나친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게 되면 해결방안은 쉽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사람이 느끼는 행복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가지 행복 사이에는 중간 상태의 여러 가지 행복이 존재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 행복은 무엇일까요? “두 종류의 행복은 평범한 것과 엄청난 것, 또는 동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정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156쪽)”라고 변죽을 올리고는 이어서 “두 가지 종류의 행복이 가진 차이를 가장 간단하게 묘사한다면,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허용되는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행복을 느끼는데 있어 학습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열정, 사랑, 노동, 관심, 그리고 노력 등이 행복을 제대로 느끼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하기 위하여 불행의 개인적 요소이면서도 심리적 요인이 아닐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지켜야 할 것이라고 주문합니다. “그것은 바로 건강을 유지하는 것, 자신의 능력을 전체적으로 유지하는 것, 생계유지에 충분한 소득을 유지하는 것, 처자식에 대한 의무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182쪽)” 등입니다.

 

이 책이 발표된 이후로 벌써 여러 세대가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관한 저자의 인식은 요즈음 사람들에게 바로 적용해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탁월한 것입니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차이는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을 정의하면서 사랑에는 일종의 보호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큰 틀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지만, ‘사랑이 소유욕의 위장된 형태인 경우가 많은데, 상대에 대한 걱정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상대방에 대한 보다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목적도 있다’라는 견해는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그 여자를 지배하게 된다는 견해는 여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독신여성으로 남아 있을 경우에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자유 때문에, 여성들은 어머니가 될 각오를 하려면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이제는 예전에 부모 노릇을 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단순한 기쁨은 사라지고 없다(208쪽)”라는 구절을 읽다보면 바로 지금의 시점에 꼭 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가사에 전념하는 여성들은 남성들이나,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보다 훨씬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최근에 가사노동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일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겠습니다.

 

저자는 행복이란 마치 무르익은 과일처럼 운 좋게 입안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려는 사람은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불행의 원인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복의 정복>에 담긴 행복에 대한 보편적 진리를 새삼스럽게 재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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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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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시작되는 노래는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하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거사실패를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왕조시절, 무지렁이 백성들은 무슨 짓을 해도 꼼짝 못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지배층에 팽배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고,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옛말처럼 순박한 것 같은 백성들도 궁지에 몰리면 수를 내게 된다는 것을 동학농민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이 극에 달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봉기가 전개되고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5회 혼불문학상을 수상한 이광제의 장편소설 <나라 없는 나라>는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다양한 사료들을 바탕으로 하고, 읽는 맛을 더하기 위한 약간의 픽션이 가미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읽히면서도 봉기 전후의 긴박한 상황에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느낌이 절로 드는 실감나는 책읽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담대한 사내라고 하더라도 대사를 앞두고는 심리적 갈등이 많았을 터이다. 작가가나라 없는 나라>를 통하여 묘사하는 전봉준 개인의 심리적 고뇌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에 더 몰입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임오군란의 실패로 권력의 뒤안길로 물러나 있던 대원군과 전봉준이 만나 교감하는 장면이나, 동학농민운동을 빌미로 하여 일본을 끌어들여 갑오경장 때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젊은 개혁파들의 행보가 과연 무엇을 지향하였는지 다시 새겨보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개혁도 나라가 있는 다음이어야 할 터인데, 그들은 근대화된 일본에 매몰되어 일본의 시커먼 속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학군 역시 청국과 일본이라는 외국세력들이 반도에 밀고 들어오는 빌미를 제공한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20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던 1894년 무렵이라면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아 시민계급들의 고조된 인식이 우리나라에도 전해졌을 터입니다. 급박하게 변하는 세상의 움직임에 조선의 지배계층만이 눈을 닫고 있었으니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 있었던 셈입니다. 백성들까지도 누가 도둑인지 알고 있는 마당에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기댈 언덕을 찾아 우왕좌왕한 셈입니다.

 

과연 동학농민군은 대원위대감에게서 희망을 읽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보다 긴밀한 접촉이 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청국의 파병에 따라 서울에 들어온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허수아비로 세워 새로운 정권을 수립한 상황에 따라 동학군이 다시 세를 규합하여 서울로 향하는 과정이 보다 선명하게 그려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첫 대면에서 ‘나라의 명운이 그대들의 손에 달렸음을 명심하라. 조선의 마지막 기회니라(25쪽)’라며 기대를 품었던 대원군이었다면 전봉준과의 접촉을 보다 긴밀하고 은밀하게 가져갔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라 없는 나라>에서는 동학군을 이끄는 무리들의 최종 목표가 중앙권력을 나누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거병을 하면서 전봉준이 내세운 바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다고 밝혔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감추어진 진실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기는 합니다.

 

일본군이 뒤를 받쳐주는 관군에 밀려 결국은 패퇴를 거듭하는 동학군의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면서 정보와 지리에서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마무리를 싸움터로 떠난 정인의 생사를 뒤쫓는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도 아쉬운 점의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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