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악의 발명품 - 삐딱하게 바로 보는
문윤수 지음, 박종진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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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직장이 원주로 이전하는 바람에 매일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서야 하고, 퇴근 역시 두어 시간은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출퇴근 버스 안에서 오롯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만, 잠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조금 피로하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원거리 출퇴근이 가능해진 것은 버스와 고속도로 그리고 지하철이라는 교통체계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발명한 것들 가운데 완벽한 것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익이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류 최악의 발명품>은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 문제의 정도가 심각한 것들을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하시고서 광고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광고학도로 출발한 한 사회학자가 대학을 벗어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인류 발명품과 제도들에 대하여 약간의 역사적 출처를 첨가해가며 기획한 사회 불만서이다.” 불만서라고는 했지만, 책 내용을 보면 종횡무진, 좌충우돌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침없는 필치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인류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암울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는 스무 가지나 되는 것들을 자본주의, 건강 그리고 의식 등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퇴보를 가져올 것으로는 아울렛, 스마트폰, 명품, 24시 서비스 등 4가지를 들었고, 건강의 퇴보를 가져올 것으로는 소시지, 자동차, 음식물 쓰레기, 아파트, 냉장고, 플라스틱, 전자제품, 라면 등 8가지 그리고 의식의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는 정치인, 바비인형, 산아제한, 동물원, 결혼식, 신용카드, 정의, 퍼스트레이디 등 8 가지입니다. 물론 저자가 꼽은 스무 가지는 전적으로 저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우선순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들은 현재 인류가 유용하고 활용하고 있는 발명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유용했던 초기 의도와는 달리 그것들이 한심한 물건이 되어 있거나 타당하지 못한 활용이거나, 아니면 인간성이 상실된 파르마콘(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된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읽다보면 삐딱한 사회학자는 이런 시각으로 사물을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부분에서는 쉽게 공감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문어체로 쓰는 것이 맞다는 구닥다리 같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저자가 참 자유로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대표적 사례는 모택동과 김일성에 관한 평가와 제돌이와 관련된 생각이었습니다. 저자가 보는 모택동과 김일성은 이렇습니다. “산업노동자가 1%밖에 되지 않던 중국을 문화대혁명이라는 똥의 사회로 이끌었던 모택동은 그야말로 똥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 한답시고 축지법까지 쓴다던 신이 된 한국의 김일성는 돌연 민족 간의 이간질 전쟁을 일르켰다. 이들의 행동실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이끈 사회엔 결코 시민이 없었고 그들만이 있었다. 고로 시민사회는 현시될 수 없었다.(165쪽)”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낸 사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저 역시 크게 공감이 가는 점이 있었습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다른 동물은 그냥 둔 채로 돌고래만 구출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 말입니다. 돌고래를 사랑한다는 시민단체는 돌고래만 해방시킬 것이 아니라 동물원을 폐쇄하고 그들을 모두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떠오르는 생각을 쏟아내듯 글을 쓰신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은 일반적인 글쓰기의 맥락이라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글쓰기의 전형에 따랐더라면 씹는 감이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일까요? 어떻든 읽는 재미는 쏠쏠했고, 저자의 생각을 다시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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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까?
김형근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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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복잡해진 탓인지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벌어지는 사건사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걸까?>는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마약중독자들을 위한 회복모임에 참여하면서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중독심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도 일종의 중독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담배, 술 그리고 일 등 일종의 중독에 가까운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담배의 경우는 완전히 끊었습니다만, 술은 조금씩 마시기도 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통제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닙니다.

 

저자는 기독교심리상담연구소를 열고 정신적인 고통을 가지고 오는 분들을 상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랜 상담을 통하여 경험한 사례들을 분류하여, 통제할 수 없는 행동, 마음, 사랑, 일과 꿈, 그리고 나를 가로막는 걱정들, 해결되지 못한 슬픔, 그리고 한없이 커 보이는 결점 등, 심리적 문제들이 왜 생기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마음의 걱정거리가 왜 생겼는지 근원을 밝혀가는 것인데, 저자가 사용하는 기본적인 기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이 중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즉 성장과정에서 만난 정신적 충격이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쳐, 장성한 다음에 성격이나 행동을 지배한다는 이론입니다.

 

그 가운데는 공감이 되는 설명도 많지만 때로는 그럴까 싶기도 한 설명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랬습니다만,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적당하게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 계속 상승되다가 순간 정신을 놓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미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타인과의 접촉을 거절하며, 그 정도가 심하면 대인공포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폭행의 피해자에게 사건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대목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성폭행의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이야기까지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성장기에 받는 정신적인 압박감이 이상행동 혹은 정서상태의 원인이라는 저자의 분석은 커다란 틀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이 안고 있는 문제라고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1996년에 제가 치매에 관한 책을 처음 내놓았을 무렵에는 초보적인 진단방법은 있었지만, 완치시킬 수 있는 치료법은 없었습니다. 그때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바로 ‘치료하는 방법은 있나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자가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제시하는 해결방안이 조금 구체적으로 정리되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어린 자녀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한 답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E그래서 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책을 읽다가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대목이 있어서 리뷰에 적어둡니다. 바로 창세기의 한 부분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이 하와가 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지자 자신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다고 한다.(72쪽)”는 구절입니다. 눈이 밝아지면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찬탄을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기 전까지는 아담과 하와는 눈이 어두웠던 것일까요? 하느님은 왜 아담과 하와에서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지 않고 선악과라고 하는 열매에 따로 감추어 두셨을까요?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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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 강의 다리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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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보스니아의 모스타르를 여행하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보스니아 내전의 흔적에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 시가지 곳곳에 창문 없이 방치된 건물들은 예외 없이 총탄자국이 마치 마마의 흔적처럼 남아 있고, 들여다보면 건물 안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가이드 말로는 내전의 아픔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복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린 스타리모스트 만큼은 복구했다고 합니다.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의 스타리모스트는 네레바트강을 경계로 나뉘어 있는 가톨릭계 마을과 이슬람계 마을을 연결해주고 있었습니다. 모스타르를 점령한 오스만제국이 1566년에 완공한 스타리모스트는 1,088개의 하얀색 돌을 사용하여 길이 30미터에 폭 5미터, 높이 24미터의 단일 아치형의 이슬람양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400년이 넘도록 이슬람제국이 유럽에 남긴 다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았던 스타리모스트는 1993년 9월 보스니아 내전 당시 무너진 것입니다.

 

한적해 보이기만 하는 모스타르 주민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끔찍한 싸움이 벌어진 것은 지난 세월에 견주어보면 알량하기만 한 민족주의 때문이었습니다. 모스타르의 가톨릭계 주민과 이슬람계 주민들은 스타리모스트보다 더 오랜 세월을 다정한 이웃으로 살아왔습니다. 정교계의 세르비아가 쳐들어왔을 때는 힘을 합하여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세르비아의 기치에 대항한 대크로아티아 기치를 내세운 크로아티아가 모스타르의 가톨릭계와 합세하여 이슬람계 주민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두 세력이 스타리모스트를 경계로 대치하던 중 다리가 폭파된 것입니다. 어느 쪽의 소행인지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투와 살상이 전개되는 동안 냉정하던 모스타르 주민들까지도 다리가 무너질 때는 오열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스타리모스트의 복원이 추진되었습니다. 스타리모스트야 말로 종교간, 민족 간의 화합을 상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97년 나토평화유지군은 강에서 부서진 다리의 조각들을 찾아냈고, 유럽 각국은 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터키는 보관하고 있던 다리 설계도를 바탕으로 건축에 나서 2004년 7월 23일 세계 10개국 정상들과 찰스 황태자,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기념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종헌 지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94-102쪽, 소울메이트, 2012년; hthttp://blog.joins.com/yang412/13778602)

 

이종헌은 발칸사람들의 정체성과 수백 년에 걸쳐 평화롭게 공존해오던 사람들이 대립하여 갈등을 빚는 과정을 이해하는데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보 안드리치야말로 발칸사람들의 정체성을 밝히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892년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 부모가 살던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성장해서는 정교의 본산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세르비아어로 작품활동을 했지만,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을 보스니아의 도서관건립기금으로 기증했다고 합니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모두의 과학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베오그라드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까지도 자국 출신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두 살이 채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비셰그라드의 고모에게 맡겨진 이반 안드리치는 드리나 강의 다리 위에서 동네 할아버지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이때 들었던 이야기들은 훗날 안드리치 작품들의 원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장한 다음 사라예보에서 공부하면서 남슬라브의 독립지원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보스니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청년 보스니아 운동’을 전개한 혁명단체에서 활동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의 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대전 이후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퇴직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4년 외교관으로 일하면서도 오스트리아 그라츠대학교에서 <터키 지배의 영향하에서 보스니아 정신생활의 발전>이라는 논문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적 갈등, 문화적 차이가 공존했던 보스니아는 그에게 있어 영원한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작품을 통하여 보스니아인들의 역사, 가치관, 문화를 이야기했고, 특히 운명에 관한 보스니아 사람들의 생각을 풀어내는 서사적 힘을 인정받아 1961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것입니다.(위키백과, 이보 안드리치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B3%B4_%EC%95%88%EB%93%9C%EB%A6%AC%EC%B9%98)

 

드리나 강은 북서 헤르체고비나를 흐르는 타라 강과 피바 강이 합류하여 시작되는데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국경을 따라 흘러서 슬로베니아 북부 알프스에서 시작하는 사바 강에 합류하고, 사바 강은 도나우 강으로 흘러듭니다. 346km를 흐르는 드리나 강은 짙은 녹색을 띄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은 질룐까(녹색)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산세가 험한 발칸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드리나 강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서로마와 동로마제국의 자연적 국경이었던 드리나 강은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세력이 만나는 경계였습니다. 오스만제국이 발칸을 점령하면서 유입된 이슬람까지 더해지면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드리나 강을 따라서 어우러지게 된 것입니다.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에는 다리 주변에 살고 있는 비셰그라드 사람들은 물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다리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부터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무너지기까지 무려 340여년에 걸쳐 다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다리입니다.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이 다리 사이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오는 긴밀한 연대가 있기 때문에 서로 얽혀 있는 운명을 따라 떼어서 말할 수가 없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다리의 유래와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세대와 세대를 거듭해 내려오는 마을의 삶과 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미리 이야기합니다. 일종의 향토지(鄕土誌)라고 할까요?

 

소설 속에 나오는 드리나 강의 다리는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Mehmed-Pasha Sokolovic Bridge)입니다.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예니체리로 끌려간 소년이 장성해서 오스만제국의 파샤가 되었는데, 강을 사이에 두고 불편한 두 마을이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다리건설을 명하였고, 필요한 재원을 마련해주었다고 합니다. 오스만제국의 궁정 건축가 시난의 설계로 1571년 짓기 시작한 다리는 1577년 완공을 보았습니다. 1666년, 1875년, 1911년, 1940년, 1950-52년에 각각 중요한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11개의 아치 가운데 3개가 파괴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5개의 아치가 파괴되었지만 이내 복구되었으며 1992년 보스니아 내전 시 벌어진 비셰그라드학살 사건에서 많은 보스니아 사람들이 세르비아 군에게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다리는 2007년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Wikipedia. Mehmed Paša Sokolović Bridge. ; https://en.wikipedia.org/wiki/Mehmed_Pa%C5%A1a_Sokolovi%C4%87_Bridge)

 

작가는 다리를 둘러싼 자연환경과 사람들의 삶을 모두 24개로 나누어 풀어내고 있습니다. “먼 발치에서 바라다보면 하얀 다리의 넓은 아치들 사이로 푸른 드리나 강만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 위에 있는 모든 것들과 위로는 남녘의 하늘을 품은 비옥하고 기름진 공간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10쪽)” 물론 번역도 참 잘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담백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은 왜 작가가 ‘발칸의 호메로스’라는 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드리나 강에 세워진 다리가 가지는 다양한 의미 가운데는 전략적인 것도 있습니다. 다리 가까이에는 마을의 장터가 자리하고, 강둑을 따라서 사라예보로 향한 길이 이어지고 있어 다리는 사라예보로 향한 길 양끝을 연결시키면서 카사바와 그 주변마을을 이어주고 있다고 적으면서, ‘연결’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리와 관련된 전설도 인용하여 신비한 감을 더하기도 합니다. 교각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쌍둥이 남매를 교각에 묻어야 한다는 전설을 비롯하여 이교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순교한 이슬람 수도사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스만제국의 발칸지배에 대하여 압제였다는 평가와 그렇지 않았다는 평가가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이중적인 평가의 배경이 이해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메흐메드 파샤로부터 다리건설의 감독을 위임받고 이곳에 온 아비다가는 파샤가 내준 건설자금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주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키고는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원성을 사게 되었습니다. 라디사브라는 농부가 나서서 쌓은 다리를 몰래 허물다가 들켜서 처형을 당하는 일까지도 벌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비다가의 횡포가 중앙정부에 알려지면서 아비다가가 처벌을 받게 되고 새로운 감독관이 파견되어 다리건설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스만제국이 점령지를 다스리는 관리의 부정부패를 철저하게 감시하여 불만의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기본원칙을 지켰다고 합니다만, 그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원칙을 벗어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민족이나 종교를 떠나서 한 마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도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드리나강의 다리까지도 물에 잠길 정도의 대홍수가 있던 날 밤에 흉흉한 물길에 쫓겨 집을 나온 주민들은 한 번도 물이 닿지 않은 메이단의 꼭대기에 있는 집을 찾았는데, 집집마다 모두 문을 활짝 열어 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던 것입니다. 자연의 힘과 공통적인 불행의 짐은 터키인들과 기독교인, 유대인들을 한데 뭉치게 했습니다. 각 종교의 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의논했던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무너진 것은 1808년 세르비아가 혁명의회(Revolutionary Parliament)를 구성하고 오스만제국에 저항하면서입니다. 1813년 오스만제국은 2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세르비아의 저항을 제압하였고, 1816d년 부분적인 자율권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세르비아 내 터키인들이 보스니아로 쫓겨났고 그들은 복수의 기회를 찾게 된 것이 시발점이라고 합니다.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의심되는 세르비아인들은 드리나 강의 다리 위에서 처형되었고, 연고가 없는 시체는 강물에 던졌습니다.

 

19세기 말 오스만제국이 쇠퇴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주민들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통제의 끈을 죄어 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터키인들의 집에는 실망과 혼란이 가득 찼고 기독교 신자들의 집에는 경계와 불신이 가득했다. (…) 입성한 오스트리아놈들은 복병을 두려워했다. 터키인들은 오스트리아 놈들을,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놈들과 터키인들을 두려워했다. 유태인들은 모든 것들과 모든 이들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특히 전시에는 모든 이들이 그들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183쪽)”

 

이렇게 드리나 강의 다리 부근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생긴 갈등은 19세기를 기점으로 확산된 것이었고, 특히 오스트리아, 독일, 소련 등 유럽 국가들의 부축임이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만제국이 물러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반면 세르비아는 독립을 얻었고, 이 지역에 민족주의가 불꽃처럼 일기 시작했습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 중에 드리나강의 다리를 두고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격돌하는 가운데 폭파되어 무너져 내린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스타리모스트나 드리나 강의 다리가 복구된 것처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서 오순도순 살아온 다양한 민족들이 서로 돕고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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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범의 방학 공부법 박철범 공부법
박철범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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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절미하고 <박철범의 방학공부법>은 그야말로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라고 보았습니다. 행차 뒤 나팔이라는 옛말도 있습니다만, 진즉 이런 책을 읽었더라면 인생이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방학은 그냥 신나게 노는 것 이외에 별다르게 공부를 했던 기억이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방학 때 공부를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보았던 기억도 없는 것을 보면 저자가 말하는 폐인(?)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안내하는 방학의 알차게 보내는 비밀은 ‘자신에 맞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서 공부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세 가지 비밀, 즉 1.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2. 부지런하게, 3. 제대로 된 방법으로 공부한다면, 방학은 학기 중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저자는 장담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박철범의 방학공부법>을 이렇게 구성하였다고 설명합니다. “1장에서는 방학에 대한 대표적인 궁금즉 다섯 가지를 다룬다. 이 부분은 방학의 전체적인 계획과 관련된 것이다. 2장은 방학 동안의 시간관리에 대해서 다룬다. 방학에는 아무래도 게을러지기가 쉬운데, 어떻게 해야 게으름을 극복하고 부지런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3장부터 (5장까지는) 본격적으로 방학공부법을 다룬다. 내가 제시하는 방학공부법의 핵심은 ‘공부3력 높이기’다. ‘공부3력’이란, 이해력, 암기력, 사고력을 뜻한다. 이것은 공부에 있어서 마치 기초체력과 같다.(7쪽)”


저자는 방학에 대한 궁금증 다섯 가지를 꼽았습니다. 무엇을 공부하나? 학원 혹은 인터넷강의를 어떻게 활용할까? 보충수업이나 방과후 수업은? 독서는? 그렇다면 노는 것은? 등입니다. 저자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되어 있어 저와 같은 옛날 사람들도 쉽게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예 방학은 노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민도 않했지만, 방학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생들이라면 길감이 갈 수 있는 방학 중 시간관리 실패원인을 무려 여덟 가지나 설명합니다. 3~5장에서 다루는 공부3력을 높이는 비법은 ‘3회독’이라고 했습니다. 과목별로 주교재 하나를 선택하고, 방학 동안에 각각 세 번씩 보는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이해’에 초점을 맞춰 공부하고, 두 번째 볼 때는 ‘암기’에 초점을 맞추며, 세 번째 볼 때는 ‘사고’에 초점을 맞춘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저 역시 대학에서 시험준비를 할 때 이와 같은 방식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볼 때는 중요한 것들을 이해해가면서 정리하고, 두 번째는 외우고, 세 번째는 외운 것들이 제대로 외워졌는지 확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저자의 방식과 차이가 있었다면 사고하는 과정이 아니라 외워야 할 것들을 모두 외우고 있는지 확인하는 저와 달리 저자는 ‘사고’ 즉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의과대학 공부는 암기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암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대로 결합암기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혹시 참고가 된다면 조너선 D 스펜스의 <마테오리치 기억의 궁전; http://blog.joins.com/yang412/13778310>을 보시면 고대 기억술사들이 사용하는 암기법의 개략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경험이나 사연들이 대체적으로 공감하는 편이었습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입니다. 데이트에서 화가 난 여자친구를 달래는 모습입니다.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저자에게 여자친구는 ‘뭐가 미안한데?’라고 되묻고는 자신이 삐진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남자 친구에게 ‘이제 보니 자기가 왜 미안한지도 모르고 있네? (…) 됐어! 나 피곤하니까 그냥 집에 갈래!’라고 획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합니다만, 만약 이런 여자 친구라면 과감하게 이별하라고 권고하고 싶어졌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면 남자 친구가 결정한 바에 대하여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성격이라면 쓸테 없이 남자친구를 피곤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방학동안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각론은 책에 잘 정리가 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읽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침 방학이 코 앞에 다가와 있으니 이번 겨울방학을 성적을 끌어올리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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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강주헌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자극적으로 보이는 제목에 이끌려 살펴보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유고집이었습니다. [북소리]의 오랜 독자라면 두어해 전에 소개한 레비-스트로스의 초기작품 <슬픈 열대; http://blog.joins.com/yang412/13245374>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에 체류하였던 1937년에서 38년 사이에 브라질 내륙지방에 사는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 등 원주민 부족들에 관한 민족지(民族誌) 성격의 내용에 자신의 사상적 편력과 민족학에 투신하게 된 배경 등 자서전적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 되어 있습니다. 문화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구조적 관계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여 친족이나 신화체계와 같은 문화체계를 설명하는 구조주의는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난 프랑스계 유태인 레비-스트로스는 파리대학교에서 철학과 법률을 공부하였습니다. 졸업후 잠시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브라질 상파울루대학교에서 사회학교수로 재직하면서(1934-37년) 브라질의 원주민을 현지조사하고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마르세이유에서 밀항선을 타고 뉴욕으로 건너갔습니다. 뉴욕 시의 사회연구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있는 동안(1941~45)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1950에서 1974년까지 파리대학교에서 연구지도교수를 지냈으며, 1959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인류학 학과장이 되었습니다.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가 ‘원주민 사회에서 느낀 비애감이 우울하게 표현되어 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후예이며 동서양 문명의 만나는 교차점에서 살고 있는 터키사람들의 정신세계를 그려낸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슬픈 열대>에 담긴 레비-스트로스의 감정은 ‘슬픔’이라고 정의하여 비애와 차별하고 있기도 합니다. <슬픈 열대>에 담긴 슬픔은 ‘열대지역의 그 모든 가난한 대도시가, 무기력이, 인간 군상이 서양인들에게 느끼게 했던 감정이다. 그는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아니라, 그곳에 도달한 서양인의 죄책감, 선입관과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그가 느꼈던 동정심과 혼합된, 극도의 인간적인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오르한 파묵 지음, 이스탄불 145쪽, 민음사, 2008년; http://blog.joins.com/yang412/13198330)라고 정리하였습니다. 반면 ‘비애는 외부에서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발전시킨 반응’이라고 말하면서, 몰락, 상실 그리고 가난의 고통이 발전시킨 비애감은 이스탄불 사람들을 새로운 패배와 다른 형태의 가난에 예비하게 한다고 우려합니다.

 

박옥줄교수는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 원주민들에게서 비애(혹은 슬픔)을 느낀 것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의 영광’에 대한 입증을 다른 미개민족의 후진성에서 발견하려 했던 초창기 다른 인류학자들과는 정반대의 시각으로 인류학적 탐구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는 제목에서부터 레비-스트로스의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나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에 담긴 글들은 레비-스트로스가 이탈리아의 일간지 <라 레프블리카(La Republica)>의 요청을 받아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쓴 글들을 모아 그의 사후에 발간한 것입니다.

 

이 책을 기획한 모리스 올랑데는 서문에서 레비-스트르스의 글은 “누구나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야만적인 것으로 부른다”라는 몽테뉴의 말을 떠올린다고 적었습니다. 1992년 몽테뉴 400주기를 맞아 레비-스트로스가 “계몽시대의 철학이 인류 역사에 존재한 모든 사회를 비판하며 합리적 사회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면, 상대주의는 하나의 문화가 권위를 앞세워 다른 문화를 재단하는 절대적 기준을 거부했다. 몽테뉴 이후로, 그의 선례를 따라 많은 철학자가 이런 모순에서 탈출할 출구를 끊임없이 모색해왔다(6쪽)”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의 관계는 떼어놓을 수도 어느 하나로 통합할 수 없다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즈음 케이블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1988년의 우리사회를 회상하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산타클로스의 존재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195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디종성당 앞 광장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타클로스를 불태우는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산타클로스에 부여되는 상업적 중요성이 종교적 가치가 없는 신화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며, 성탄절의 진정한 종교적 의미를 왜곡하는 정도가 우려할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고 판단한 종교계의 단호한 입장을 나타낸 것이라고 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사건을 통하여 사회적 축제에 대한 종교의 우려를 비판합니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유럽의 성탄절 행사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아 전에 없던 규모로 커지고 있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산타클로스의 정체를 양면적으로 설명합니다. 기원과 역할을 설명해주는 신화나 관련된 역사적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산타클로스를 신화적 혹은 전설적 인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탄절이라고 하는 정해진 기간이 되면 등장하여 전유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정의되는 산타클로스는 신적인 존재에 속한다고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산타클로스는 성탄절이면 와서 한 해 동안 착한 일을 한 어린이이게는 선물을 주고 못된 짓을 한 아이에게는 벌을 준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의 존재를 믿는 어린이들에게 산타클로스는 신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린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으라고 온갖 속임수를 써가면서 부추기는 어른들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지금의 성탄절 무렵에 행해지던 로마의 사투르누스 축제를 인용하여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해석합니다. 사투르누스 축제는 원귀(寃鬼)들을 달래는 축제였다고 하는데, 로마신화에 농경의 신으로 나오는 사투르누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우라노스를 제거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위치를 차지합니다. 누이인 옵스를 아내로 맞았는데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죄의식과 자신도 같은 운명을 걸을 것이라는 예감에서 아내가 자식을 낳는 족족 삼켜버립니다. 결국은 막내아들 주피터에게 살해되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달래는 축제의 끝에는 어린아이에게 은혜를 베푸는 선량한 성 니콜라우스가 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로마제국의 말기에 기독교 교회는 이교도의 축제인 사투르누스축제를 기독교의 축제로 대체하기 위하여 예수의 탄생일을 12월 25일로 결정하였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산타클로스는 사투르누스를 계승한 무질서의 지배자이면서도 정반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해왔다고 설명한 레비-스트로스는 이와 같은 변화는 우리와 죽음의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반증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디종의 화형식을 통하여 산타클로스를 버리려 했던 디종의 성직자들의 희망과는 달리 오히려 산타클로스의 영속성을 입증하는 모순을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역시 철학적 해석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리는 식인종이다’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1993년에 발표된 이 글은 1996년에 발표된 ‘미친 소의 교훈’과 연결하여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식인종이다’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지역적으로 유행한 쿠루(kuru)병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고, ‘미친 소의 교훈은 2008년 우리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광우병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쿠루병은 파푸아뉴기니의 동부 고원지대에 사는 포레(Fore)족 사이에서 1950년대 무렵 갑자기 나타난 풍토병입니다. 뒤에 역학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바에 따르면 쿠루병이 발생하기에 앞서 포레족에게 식인풍습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포레족은 전투를 통하여 살해한 적의 시신을 먹은 것이 아니라 사망한 가까운 친족들의 시신을 먹었는데, 이는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포레족에게 식인풍습이 전해진 다음에 어느 시점에서 백만 명에 한명 꼴로 발생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콥병(이하 CJD)으로 죽은 환자의 뇌를 나누어 먹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생긴 쿠루병이 포레족 사회에 고착된 것입니다. 마치 광우병에 걸린 소에서 나온 물질을 먹고 인간광우병이 생긴 것처럼 말입니다.

 

시신을 먹을 수 있도록 조리하는 역할을 한 여성들이 조리과정에서 1차 감염되고,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2차 감염이 일어났던 것으로 레비-스트로스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포레족 남성들은 사냥과 채집활동을 통하여 얻은 먹거리를 통하여 단백질을 섭취할 기회가 많았지만 여성들은 단백질을 섭취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친족들의 시신을 먹는 일은 주로 여성과 아이들의 몫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양기화 지음, 눈초의 광우병 이야기, 도서출판 be, 2009년) 실제로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프리온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쿠루병을 처음 밝힌 칼턴 가이듀섹은 파푸아뉴기니에서 쿠루병 환자가 죽은 뒤에 뇌를 맨손으로 꺼내곤 했다고 합니다만, 그는 프리온병으로 사망하지 않았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쿠루병과 성장장애를 앓는 어린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사용한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은 어린이들에서 CJD가 확산된 사건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환자들에게 사용된 주사제는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자극하는 물질이 들어있는 사체의 뇌하수체를 모아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CJD환자로부터 얻은 뇌하수체가 섞여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의료행위와 관련된 의인성 CJD와 죽은 사람을 먹는 식인행위를 같이 비교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전제하면서도 레비-스트로스는 두 가지 행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과학으로 포장된 의료행위 역시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여전히 미신이고 맹신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광우병파동이 일었을 때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프리온병에 취약한 코돈129번이 MM형인 빈도가 높은 것은 식인습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레비-스트로스가 알았더라면 식인관습에 관한 유럽 사람들의 편견을 맹렬하게 비난했을 것 같습니다. 코돈129번의 유전자형은 프리온에 감염되었을 때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MM형이 가장 빠르게 나타나고 MV형, VV형으로 잠복기가 길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동아시아사람의 선조들이 일찍이 식인풍습을 버렸기 때문에 굳이 MM형을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은데 반하여 식인풍습을 오래 유지했던 유럽 사람들은 집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프리온의 발현을 지연시키는 쪽으로 유전자의 변화가 생겼다는 해석입니다.

 

‘미친 소의 교훈’은 인간광우병이 발생하기 이전인 1996년에 발표된 글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읽어야 합니다.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을 식인행위와 비교한 레비-스트로스는 파푸아뉴기니의 쿠루병처럼 동물의 질병이 인간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상존함을 지적합니다. 광우병의 경우는 아마도 적절하게 통제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종간의 장벽을 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은 선견지명을 엿볼 수 있습니다. 광우병 파동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원인에 따라서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습관을 버리게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이 식인풍습을 버리고서 쿠루가 진정된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 인용한 내용 이외에도 여성 할례와 대리 출산, 남미의 농경방식을 인용한 발전의 유형별 차이에 대한 해석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색다른 시각에서 해석을 내놓고 있어 매우 흥미로운 책읽기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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