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뉴스의 나라 -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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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기억은 분명치 않습니다만, 신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침저녁으로 배달되는 종이신문은 물론 인터넷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실이나 집에서도 분명 종이신문을 구독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처음에는 종이신문이 손을 떠나더니 지금은 인터넷신문마저도 꼼꼼하게 읽지 않고, 제목만 훑어보고는 관심이 가는 제목만 열어서 기사를 읽고, 필요하면 블로그에 스크랩합니다. 정치나 경제는 워낙이 큰 관심이 없었던 터라 그렇다고 쳐도 문화 혹은 건강면까지도 도매금으로 넘어간 이유가 분명치 않습니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라는 부제가 달린 <나쁜 뉴스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 같습니다. 신문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나쁜 뉴스의 나라>의 저자 조윤호기자는 신문을 포함한 언론이 대중의 외면을 받게 된 작금의 위기상황은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와 언론이 자초한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향응을 받고 특정인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주거나, 있을 수 없는 오보를 내거나, 권력기관에서 흘리는 대로 받아쓰거나, 혹은 기사를 통해서 여론을 조작하는 언론의 행태를 고발하는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된 것이 영양을 미쳤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영화가 재미를 추구하기 위한 허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 수 없다고, 무언가 이야기를 전개할만한 꼬투리는 현실에서 얻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언론매체를 통하여 쏟아지는 정보가 너무 많은데다가 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이 언론을 외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믿어도 될지 아니면 믿지 말아야 할지는 물론 좋은 뉴스인지 아니면 나쁜 뉴스인지 판단하는 일까지도 결국은 정보소비자의 몫이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서슬이 퍼렇던 유신독재 시절에는 신문을 읽을 때 기자가 행간이 숨겨둔 의미를 찾아 읽어야 했습니다. 읽고 있는 기사를 통해서 기자가 전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려내기 위하여 다시 눈을 부릅떠야 하는 시절이 되돌아온 셈일까요?

 

저자는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여 뉴스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우리 저널리즘의 관행과 방침, 시스템을 알아야 좋은 뉴스를 골라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이런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일하고 있는 ‘미디어 오늘’이라는 언론사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미디어 오늘’은 기자들을 상대하면서 언론을 감시하고, 언론을 취재하는 언론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미디어 오늘의 기자들은 ‘이 기자는 왜 이런 기사를 썼을까?’를 고민하고 취재하는 게 일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을 진단하고 치료방법을 제시하고 미래를 도출한다는 전략에서 책을 구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기레기와 찌라시 전성시대’라는 자기비하적인 자아비판을 통하여 이런 오늘이 있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어서 ‘뉴스란 무엇인가’에서는 뉴스 본연의 자세를 논한 다음, 초급, 중급, 고급편으로 나누어 놓은 ‘나쁜 뉴스 가려내기’의 방법을 정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뉴스의 미래, 짐승 뉴스의 전성시대’라는 제목으로 앞으로 언론이 상대해야 할 경쟁자는 누구이며,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이 마주하고 있는 위기상황은 자초한 일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는 저자는 그 이유로 ‘의도적으로 사실을 누락하거나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 언론의 기본을 지키지 않은 채 특정 정치 세력을 옹호하는 행위, 바로 정파 저널리즘이 언론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진 원인’이라고 진단합니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사건이 일어나고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봇물을 이루던 2015년 5월 14일 미디어 오늘이 단독으로 내보냈던 ‘유병언 계열사에 창조경제 지원금 67억 들어갔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누리꾼들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오히려 배용준과 박수진이 결혼한다는 뉴스가 동시에 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창조경제 지원금 기사는 기사로서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라서 주목받을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용준-박수진 결혼설이 그 순간에 왜 나왔겠느냐는 누리꾼들의 의혹이 만들어낸 음모론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그 기사에 달렸던 ‘이젠 다들 알죠. 연예인 특종이 뜨면 뭔가 있다는 것을’이라는 댓글이 시사하는 것처럼 음모론은 근거 없이 확산되기도 합니다.

 

당연히 음모론의 대상이 사실인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례로 2011년 10월 26일 재보궐선거가 있던 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장애가 발생하여 투표소를 검색하려던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던 사건이 유력한 야당후보의 보좌관의 짓이었음이 밝혀졌던 사건을 들었습니다. 음모론에 곁들여 찌라시 소식도 사실을 왜곡하는데 한 몫을 한다는 사실을 2007년 대선의 화약고로 지목되었던 BBK사건을 수사했던 검사들이 이명박후보의 동업자였던 김경준을 회유하고 협박했다는 내용의 ‘시사IN’의 보도가 허위가 아니라는 판결이 있던 날에도 서태지-이지아 결혼설이 나왔던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언론의 위기를 가져온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가 인용하는 사건들이 주로 정권이나 보수 매체 쪽의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수언론이 그런 짓을 했다면 진보언론은 상대적으로 이익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왜 언론의 위기는 보수나 진보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것일까요? 진보 쪽 언론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였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의문은 2008년 광우병파동을 떠 올립니다. 당시 정부와 보수 언론들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관련하여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진보경향의 사람들이나 매체들은 미국산 쇠고기를 들여오면 우리나라에 인간광우병이 퍼져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경향신문 2008년 05월 19일자 기사 “광우병 위험성 이대통령만 못 듣고 있다”참조;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yang412&folder=10&list_id=9575882)

 

2008년 광우병 파동의 한가운데에 있던 필자는 광우병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부풀리고 있는 진보언론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광우병파동을 경계로 하여 언론은 보수와 진보로 뚜렷하게 양분되었고, 피아가 나뉜 것 같습니다. 즉 상대 쪽에는 비판의 날을 세우고 같은 편은 살살 다루거나 아예 눈을 감는 버릇까지도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언론의 위기는 보수나 진보나 크게 다를 바 없게 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는 각자의 진영을 비판하다가 호되게 당한 사례로 보수진영의 경우는 TV조선의 <장성민의 시사탱크>의 ‘추적, 남한 종북 계보’편을, 그리고 진보진영의 경우는 한겨fp신문의 “DJ 유훈통치와 ‘놈현’ 관장사를 넘어라”라는 기사를 각각 인용합니다. 저자는 언론매체가 어느새 정파저널리즘에 빠져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일보도, 한겨fp도 믿지 마라. 믿을 것은 오로지 뉴스 소비자의 눈뿐이다(41쪽)라고 지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성 있는 사례는 거의 대부분 보수 쪽 혹은 정부쪽 사례를 들고 있는 편향성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는 점은 꼭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뉴스가 해야 할 이야기를 드라마와 영화가 대신한 사례로 웹툰 <송곳>과 드라마 <미생>의 사례를 꼽았습니다. 만화나 드라마와 뉴스를 같이 놓고 비교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의 말대로 웹툰이나 드라마는 등장인물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혹은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수월합니다. 하지만 기사는 스토리를 담기에 적절치 않은 구조입니다. 기사는 진실을 담아내는 것으로 독자가 좋은 뉴스로 인식할 수 있다면 제 할 도리를 다하는 셈입니다. 감동을 담아내기 위하여 기사를 윤색하게 되면 아무래도 사실이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기자는 보고 들은 것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걸러내면 되는 것이지, 사실에 대한 개인적 판단을 담아서 독자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인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뉴스가치가 조작되는 사례를 읽으면서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자가 인용한 사례는 청주청원경찰이 기소중지자를 검거하는데 신임여경이 활약했다는 보도자료입니다. 사실 보도자료는 정부는 물론 공공기관에서 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만들어 언론사에 제공합니다만, 기사로 만들어지려면 특별한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 특별한 무엇을 조작했다는 지적을 하고 있어서 보도자료를 만들 때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제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도자료를 만드는 사람과 그 보도자료로 기사를 쓸까를 결정하는 기자와는 눈높이의 차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북소리]가 연재시작 이후 처음으로 나가지 못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기사에 대한 눈높이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가 만들어낸 가상의 사건은 전후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도 드려야겠습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으로 걸린 차량이 대통령께서 탑승하셨는데 행선지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하여 단속한 경찰을 특진시키도록 했다는 결말입니다. 행선지를 밝히지 않으려면 경찰단속 내용을 묵묵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일부러 대통령께서 탑승하셨다고 광고할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작가는 JTBC의 손석기사장이 담당하는 뉴스룸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JTBC뉴스룸의 팩트체크제작팀이 내놓은 <팩트 체크; http://book.interpark.com/blog/neuro412/4163146>를 자화자찬하기 위하여 내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핵심이라고 할 ‘팩트체크가 제대로 되었는가?’와 함께 ‘정치적 의도는 없었는가?’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JTBC뉴스룸이 아젠다설정에서부터 아젠다키핑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점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아젠다키핑이란 주제를 놓치지 않고 심층보도한다는 의미 같습니다. 하지만 시청자가 관심을 둘만한 다른 주제가 아젠다키핑이라는 프레임에 물려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부작용도 지적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젠다키핑 이야기가 나온 김에 꼭 짚고 넘어갈 일은 저자가 일하고 있는 업계에서나 통하는 은어 혹은 외래어를 지나치게 남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사의 꼭지를 ‘야마’라고 하는 업계의 속어는 진즉 사라졌어야 할 것이 아직도 애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적어도 국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이어가는데 앞장서야 할 기자세게에서 말입니다. 필자 역시 몇 개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만 외래어는 최대한 피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 씀으로 해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우리말에 친숙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저자가 일하고 계신 미디어 오늘이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을 보도한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온 뒤에 냈다는 ‘방일영 전 조선일보 회장, 혼외자식만 4남 2녀’라는 기사가 물타기는 아니었다는 해명으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미디어오늘의 기사가 조선일보 너희는 얼마나 깨끗한데 채동욱 총장을 괴롭히냐’는 의미로 해석됐다는 뜻이다(169쪽)”이라고 적고 있어서입니다. “~해석됐다는 뜻이다”라는 설명은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것으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포털의 위력이 언론매체의 힘을 압도할 정도로 성장한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짐승 뉴스의 전성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터넷 신문은 물론 종이신문 역시 수명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지금의 시점에서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들이 현재에 안주한다면 모를까 말입니다. 어떻든 독자 입장에서는 좋은 뉴스를 가려내는 능력을 갖추면 되는 셈이니,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나쁜 뉴스의 나라>는 참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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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제2판 34곳 삭제판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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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최근 일본이 지나치게 우경화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합니다. 세상에는 절로 되는 일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무언가 꼬투리가 있어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모든 작용에 대하여 항상 방향이 반대이고 크기가 같은 반작용이 따른다’라는 뉴턴의 3번째 운동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물리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인간사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일본의 우익들의 주장 가운데 우리나라와 관련된 독도 문제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두 나라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독도문제는 이미 우리나라의 영토라서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 자체로서 분쟁지역임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점점 일본의 꼼수에 말려드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일본군이 강제 동원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적절한 배상을 요구한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본군이 강제동원했다면 일본 군인들이 조선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전선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연초에 [북소리]에서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http://blog.joins.com/yang412/13829357>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존 지역에 주둔한 페루 군인들이 민간여성들을 성폭행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페루 육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면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을 담은 고발적 성격을 띤 작품입니다. 그때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의 실태를 조금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페루 육군이 직영했다는 군 위안부 문제를 우리나라에서 인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점도 있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다루었다는 박유하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고 [북소리]에서 소개하게 된 것은 장정일 작가의 책 <장정일, 작가; http://blog.joins.com/yang412/13836270> 덕분입니다. 제가 가끔씩 내세우는 꼬리를 무는 책읽기의 좋은 사례인 셈입니다.

 

<장정일, 작가>에서는 43편의 다양한 분야의 책을 낸 저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저자가 책에 담아내고자 했던 생각의 바탕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작가 나름대로 작품의 순서를 골랐겠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작품들을 앞에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국의 위안부>는 두 번째로 소개되어 있고, 특히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값어치가 있다」라는 글제목이 마음이 와 닿았기에 읽어보았고, 나아가 [북소리]에서도 소개하게 된 것입니다. 마중물을 너무 부었나 봅니다. 그러면 장정일 작가가 인터뷰한 내용을 포함해서 <제국의 위안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작가를 소개하면, 세종대학에서 일문학을 가르치는 박유하교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가서 게이오대학과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귀국하여 세종대학에서 재직하면서 근현대 일본 문학과 사상을 소개하는 한편, 일본 근대문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일 양국이 참된 화해를 통하여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제국의 위안부>는 2015년에 나온 개정판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OOOO으로 표기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문을 읽어 그 이유를 알고는 있습니다만, 공연히 짜증이 치밀었던 것 같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도 타인의 자유는 제한하려는 우리네 속된 욕망에 법이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제국의 위안부> 초판은 2013년 8월에 나왔던 것인데, 열 달 뒤에 위안부 할머니 아홉 분의 이름으로 책의 판매 금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접근 금지를 요구하는 가처분신청이 제기되었습니다. ‘허위’ 사실을 적시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여덟 달 뒤 재판부는 가처분신청을 ‘일부 인용’하여,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가운데 34곳을 “삭제하지 아니하고는 출판…해서는 아니 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에 지은이와 출판사는 재판부의 결정에 승복할 수 없어 이의신청을 내고,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있는 공론의 장을 위해 우선 삭제판을 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OOOO으로 표기된 부분에 대한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추가로 논의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책을 읽는 입장에서는 우선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초판을 구해서 읽고 [북소리]에서 소개함이 옳겠지만, 그 부분에 대하여는 장정일 작가가 말하는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값어치가 있다”라는 생각에 무게를 두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장정일 작가의 경우도 표현과 관련하여 사법적 판단을 받은 적이 있어서 일종의 편견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에 이의를 제기하는 측에서 ‘박유하의 논리를 일본 우익이 좋아한다!’라는 감정이 논리보다는 앞세우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의 위안소 운영은 1932년 상하이 사변(上海事變)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군이 민간여성을 강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중장은 나가사키(長崎)의 지사에게 군대위안부 유치를 요청하였다고 합니다. 점령지 민간인의 반발을 잠재울 뿐만 아니라 성병의 위험을 방지하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셈입니다. 여기에서 나가사키지사에게 요청했다는 점이 눈에 띄는 점입니다. 일본은 일찍부터 공창제도를 인정해왔기 때문에 이를 전선으로 차출한다는 개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선이 확대되면서 자국 여성의 동원이 한계에 부딪혔고, 이미 한일합병 이후 조선의 여성을 일본으로 팔아넘겨 매춘행위를 시키는 일이 흔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조선여성으로 부족한 위안부 소요를 채운다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전쟁 중에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조선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이 되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했는가?’하는 점에 관해서는 저자는 구조적 강제성은 분명 있었다고 보지만 물리적 강제연행은 흔치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업자가 조선인 모집책을 내세워서 순진한 조선 여성들을 속여서 전선으로 끌고 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의 주장이 위안부 지원 단체의 반발을 불러온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가 ‘동지적 관계’였다고 적은 데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조선과 일본은 합병된 상태였다는 점과 그렇다면 위안부의 보상 요구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개인 보상에 관한 문제가 거론될 때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한일수교와 관련한 대일청구권은 일괄 타결된 것으로 본다는 국제규약입니다. 대일청구권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기반을 둔 전쟁보상금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상해임시정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승전국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회담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보상금을 청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기반을 둔 대일청구권의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문제에 관해서는 근세에 식민지를 경영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배에 대하여 배상한 바가 없다는 국제적인 통례에 따라 언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본정부가 전쟁기간 중에 일본국민이 받은 피해를 구제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보입니다.

 

지원단체가 반발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 단체는 주로 진보적 경향을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제국 일본’이 국민동원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비판에 나선 것이고, 뒤늦게 문제화된 것은 ‘전후 일본’의 문제라고 인식한 것입니다. 즉, ‘제국 일본’의 비판이 ‘전후 일본’의 비판으로 선회하면서 ‘현대 일본’을 살아온 일본 국민의 가치관을 다시 묻고 확인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천황제도에 대한 문제제기에 이르게 되면서 우익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한국의 위안부 지원활동에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를 혼동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朝鮮女子勤勞挺身隊)는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8월 23일에 공포된 여자정신근로령에 근거하여 조직된 태평양 전쟁 지원 조직으로 일본은 물론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여성은 20만 명으로 그 가운데 조선여성은 5만에서 7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하여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을 모집하여 주로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지만,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킨 경우도 허다했던 모양입니다. 이 분들은 일본군 위안부 경력자로 오해받을까봐서 쉬쉬하면서 살아왔고, 훗날 보상청구마저도 기피하였다고 합니다.(위키 백과,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조선여자근로정신대) 일제 강점기의 사정에 밝지 못한 세대에서 문제를 제기하려다 보니 개념을 혼동한 바 있고, 이런 사실이 알려진 다음에도 바로 잡으려는 노력에 소홀한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지원 단체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만 있는 줄 알았는데, 부산에도 비슷한 성격의 단체가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산 정대협의 입장은 서울 정대협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서울 정대협에서는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라고 주장해오고 있으며, 최근 세계 1억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합니다. 1995년 일본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역사를 교훈 삼아 새로운 평화를 위한 결의를 다지는 결의」를 채택하고 일본 정부의 주도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발족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원 단체는 이 기금이 민간기금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만, 기금의 상당부분은 정부가 제공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기금’은 한 사람당 200만엔의 보상금과 총리의 편지 그리고 한 사람당 300만엔에 달하는 의료복지사업을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기금은 2002년까지 필리핀, 대만 그리고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285명에 대하여 보상금 지급을 완료하고 해산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두 61명이 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황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보상거부 운동만이 주목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위안부 피해자는 지원단체가 피해자를 이용해서 권력을 얻으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반발도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위안부 지원활동을 했던 이들 중에 상을 받거나, 장관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이런 사람들을 위한 ‘앵벌이’로 전락하여 두 번 피해를 입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는 이제는 위안부 피해여성들이 노령화되어 숫자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며, 이들의 기억도 쇠잔해지는 상황을 걱정하며, 지원 단체의 외골수적인 주장이 오히려 일본 국민들은 물론 세계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고 두 나라가 발전적인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의 옳은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문제를 바로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하여 쉽지 않은 용기를 낸 저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매주 월요일 인터넷 신문 라포르시안의 [양기화의 북소리]에서 소개하고자 하였지만, 불행하게도 기사화되지 못한 리뷰입니다. 데스크의 결정에 따르면서도 개운하지만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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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늙지 않는다
현기영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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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던 제주 4.3사건의 이면사를 세상에 내놓아 충격을 던진 현기영작가의 산문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무장을 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350여 명이 제주도 내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한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남로당 중앙당과의 협의 없이 제주도당이 단독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실시키로 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밑바탕에는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이 거행되는 과정에서 불거진 불상사가 촉매가 되어 경찰이 발포하는 사건이 있을 정도로 팽배한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되어 임계치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고 합니다. 4월 3일의 경찰서 기습사건은 정부의 토벌로 이어졌고, 군경과 남로당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숱한 양민들의 희생이 뒤따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각에 따라서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인 것 같습니다. 현기영 작가는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진실을 토로해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작품 활동 초기에는 많은 고초가 뒤따랐다고 합니다. 등단 이후 40년이 넘는 세월을 바쳐 지켜온 화두를 이제는 내려놓을 법도 하지만, 작가는 여전히 자신의 화두를 짱짱하게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거스를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야속함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으로 읽었습니다.

 

어느날 눈 떠보니 세월을 다 살아냈더라는 느낌을 작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노년은 도둑처럼 슬그머니 갑자기 온다. 인생사를 통하여 노년처럼 뜻밖의 일은 없다. 아등바등 바삐 사느라고 늙는 줄 몰랐다. 그래서 누구나 처음에는 자신의 몸속에 진행되는 늙음을 부정하고 거부하려고 한다.(11쪽)” 그러면서도 세월의 흐름에 거스를 수는 없더라는 생각을 이렇게 에둘러 적기도 합니다. “옛 말에 늙으면 흙내가 고소해진다는 말이 있다. 늙어 흙에 묻힐 때가 머지않았다는 뜻인데, 죽음을 두려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고소한 흙내’로서 흔연히 받아들였던 우리 선인들의 넉넉한 풍류가 가슴을 친다.(195쪽)” 그러니까 작가는 여전히 미진한 무엇을 가슴에 담고 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

 

<순이 삼촌>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동족에 의한 학살, 그런 이야기를 까발리는 일은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던 분들은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라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에 좌우익 어느 쪽도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을 소상하게 밝혀두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먼 뿌리를 제주에 두고 있는 터라,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2000년 1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사건을 재조명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옥석구분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양민을 학살하는데 깊숙하게 간여했던 사람들이 희생자로 버젓이 탈바꿈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주 출신으로 오랜 세월을 교단에서 보낸 작가적 경험을 녹여낸 제주 특유의 분위기를 손에 잡힐 듯 그려내고 있는 것도 작가가 붙들고 있는 화두 말고도 눈길을 끌었다고 말씀드립니다. 제주 방언으로 닭을 ‘독’이라고 부르는데, 제주방언으로 ‘독새기’는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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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이라 공화국, 또 하나의 파라과이 - 유럽계 이민자와 과이레뇨의 종족성 중남미지역원 학술총서 12
구경모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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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남미를 여행하면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 할 동안 파라과이를 구경했습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국경을 이루는 파라나강에 세워진 ‘이타이푸(ITAIPU)’댐을 구경하고 내쳐서 국경에서 멀지 않은 시우다드 델 에스테(Cuidad del Este)를 찾았던 것입니다. 높이 196m, 길이 7.76km에 달하며 저수량은 190억㎥에 달하는 이타이푸댐은 싼쌰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수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머문 시간은 비록 짧고, 여권에 입국도장도 찍히지 않은 파라과이이지만 그래도 그 땅에 머물렀던 인연으로 읽게 된 구경모교수의 <과이라 공화국, 또 하나의 파라과이>입니다.

 

‘또 하나의 파라과이’라는 표현이 독특한 것처럼 파라과이의 중남부에 위치한 과이라주, 특히 주도인 비야리카(Villarrica)를 중심으로 한 사회현상을 조사한 문화인류학적 연구서입니다. 과이라 주의 면적은 3,846㎢, 인구는 190,035명(2002년 기준)이며, 주도인 비야리카의  면적은 247㎢, 인구는 56,385명입니다. 비야리카는 파라과이 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고, 현지인들을 면접조사하는 방식으로 비야리카가 이질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갈등을 빚는 지역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파라과이의 비야리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문화인류학은 이제는 어느 정도 친숙해진 학문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http://blog.joins.com/yang412/13245374>에서 읽은 것처럼, 문화인류학이란 오지사람의 삶을 우리네 삶과 비교하는 학문이라는 편견을 가졌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시기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다른 사회의 독특한 면을 조사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는 학문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편찬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정체를 알리려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연구자가 생소한 사회에 직접 들어가서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의 연구는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겨야 하는 모양입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저자는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의 빈민지역인 주끄뜨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조사를 중단하는 사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때 대안으로 정한 주제가 비야리카였다고 합니다.

 

파라과이 사람들은 비야리카를 중심으로 한 과이라주 사람을 과이레뇨(Guaireño)라고 부르며 ‘과이레뇨가 반대로 한다’라며 자신들과 구별하거나, ‘과이레뇨가 독립을 하길 원한다’는 식으로 비판한다고 합니다. 파라과이의 현대사를 통하여 일어났던 두 차례의 내전을 자유당으로 대표되는 과이레뇨가 주도한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1947년 홍색당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자유당 세력들이 과이라주를 중심으로 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실패하면서 과이레뇨가 반국가세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파라과이 과이라주의 사례는 앞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씀드렸던 것은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에서도 정치적 사건과 연계한 지역차별이 있었습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거나, 영조 때는,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거나, 순조 때는 홍경래의 난으로 서북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사회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지역갈등은 일제 식민지배 기간 동안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인데, 아마도 특정 지역이 힘을 차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호남으로 대표되는 지역 간의 갈등은 제3공화국 이후로 조금씩 심화되어왔고, 이제는 기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 아닌가 싶어 우려된다 하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과이레뇨가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된 문화사회적 요인과 사건들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습니다. 먼저 인종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지역에는 메스티소라고 하는 유럽 남성과 원주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종의 비중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안데스 산간지방에는 원주민의 비중이 높고, 반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브라질 서남부지역 그리고 파라과이의 일부 지역에는 백인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이는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1843~1914) 장군이 파타고니아지역을 정복하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칠레 쪽으로 추방하는 극단적 조처를 취한 결과이기도 하고, 유럽계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활기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몰려들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코노 수르(Cono Sur)라고 부르는 남미의 남부지역은 내륙의 파라과이를 꼭지로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 칠레, 브라질 남부를 포함하는 원뿔모양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의 주민의 90%이상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계 이주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비야리카가 중심이 되는 과이라주가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브라질의 상파울루 아래 해안으로부터 파라과이 쪽으로 향하는 지역이었습니다. 포르투갈사람들이 침입해오자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스페인계 파라과이정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1554년 파라과이 정부는 요청에 따라 원주민을 보호하고 덤으로 무역로를 개척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탕수수밭을 경영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브라질의 포르투갈계 정복자들이 수시로 비야리카를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도시는 이주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파라과이 동부지역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한편 과이라지역에 유럽계 이민이 급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동맹 3국과 치른 삼국동맹전쟁(1864-1870) 뒤 입니다. 삼국동맹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가장 발전한 국가였습니다. 당시에도 파라과이는 내륙국 신세로 파라과이강과 파라나강을 거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국경을 흐르는 라플라타강 하류를 통하여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해안선 확보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은 브라질 남부의 땅을 확보하여 항구를 얻을 속셈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864년 브라질은 우루과이 국경에서 일어난 갈등을 계기로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우루과이에 친 브라질계 정부를 세웠습니다. 파라과이는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침범했을 때는 개입하지 않다가 두 달후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서 석달 후에는 아르헨티나에도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우루과이는 당연히 브라질 편에 섰습니다.

 

초기에는 파라과이가 전쟁을 주도했지만 1865년 6월 11일, 리아추엘로강 전투에서 막강 파라과이 함대가 브라질 함대에 패하면서 전황이 바뀌고 결국 파라과이는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리고 말았습니다. 전쟁 전에 53만에 달하던 인구는 약 22만명으로 줄었는데, 특히 남성인구는 90%가 사망해서 2만 8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파라과이는 부과된 전쟁배상금은 결국 지불하지 않았지만, 140,000k㎡정도의 영토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파라과이에 속했던 이과수폭포는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세 나라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 ‘삼국동맹전쟁’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_%EB%8F%99%EB%A7%B9_%EC%A0%84%EC%9F%81)

 

전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망명해 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파라과이 정부는 전후재건사업을 펼치면서 줄어든 인구를 회복하기 위하여 외국인에 관대한 이민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아순시온과 비야리카 사이의 철도부설 사업이 속개되면서 여기에 참여한 이탈리아계 철도노동자들이 비야리카에 정착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철도 개통 이후 교통의 요지가 된 비야리카에는 유럽계 이주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 메스티소로 구성된 파라과이에서 비야리카를 중심으로 한 과이레뇨들은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삼국동맹전쟁이 끝나고 1887년 제헌국회의 출범을 앞두고 두 개의 정치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식민 시기부터 아순시온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카우디요(Caudillo)들이 클럽 코무날(Club Comunal)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메스티소나 크리오요로 이루어진 카우디요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에 익숙한 이주민들이 많이 살던 비야리카의 과이레뇨들은 카우디요들의 오랜 독재에 반발하여 클럽 포풀랄(Club Popular)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각각 홍색당(Partido Colorado)와 자유당(Partido Liberal)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로서 과이레뇨들은 정치적으로도 특수한 집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904년 혁명으로 자유당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홍색당을 탄압하였고, 이후에는 2월 혁명당, 공산당 등이 혼전을 벌이게 됩니다. 홍색당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47년인데, 배경에는 1932년부터 4년 동안 이어진 차코전쟁(Guerra del Chaco)과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이 있 때문이었습니다. 차코전쟁은 1878년에서 1884년까지 칠레와 벌인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볼리비아가 해안선을 모두 칠레에 빼앗긴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륙국 신세로 전락한 볼리비아가 라플라타강을 통하여 대서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여긴 그란차코를 차지하려다가 파라과이와 충돌을 빚었는데, 전쟁은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지역에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은 파라과이에서 광범위한 민중적 지지기반을 가진 홍색당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반발한 2월 혁명당이 자유당 및 공산당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1947년 2월 혁명당이 아순시온의 경찰청을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내전은 홍색당과 반홍색당이 대결하는 양상으로 치달았습니다. 비야리카에서도 자유당이 혁명군을 구성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였지만, 아순시온에서 거사했다가 실패하고 아르헨티나를 거쳐 콘셉시온에서 세력을 모으던 혁명군이 8월 15일 다시 아순시온으로 진격하다가 패함으로서 내전은 수습단계에 들어섰습니다.

 

1959년에 벌어진 5월 14일 운동은 1947년의 내전에 비하면 상당히 조직적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5월 14일 운동에서 혁명군은 아르헨티나에서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결전의 날 파라나강을 건너 파라과이로 진입하였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하던 파라과이군의 기습으로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47년 내전 이후에 비야리카의 경제를 주도하던 자유당원들이 도피의 길에 오르면서 비야리카의 경제가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5월 14일 운동 이후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은 혁명군을 지원한 아르헨티나와의 관계를 줄이면서 브라질과의 교역을 늘리기 위하여 이과수폭로 건너편의 밀림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 아순시온과 스트로에스네르항을 잇는 국도를 건설하였습니다. 스토로에스네르항은 뒤에 시우다드 델 에스테로 이름을 바꾸었고 성장을 거듭하여 결국 비아리카를 추월하였고, 지금은 22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파라과이 제2의 도시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로에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게 거주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요? 2008년에는 56년 만에 자유당이 정권을 다시 잡았습니다. 과이레뇨들은 파라과이 내부에서 떠돌던 비판적 담론을 부정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역사만들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파라과이 비야리카의 사례에서 분명 우리가 배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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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크로니클 - 우주 탐험, 그 여정과 미래, 대한출판문화협회 "2016년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 지음, 에이비스 랭 엮음, 박병철 옮김 / 부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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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까마득한 기억으로 묻혔습니다만,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9년 7월20일 인류는 지구 밖 천체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습니다. 미국의 아폴로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 무렵 중학교에 다니던 필자도 몇 차례의 아폴로 우주선발사로 관심이 많아져 우주에 관한 책들을 꽤나 읽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분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지구 밖 먼 행성으로 가기 위하여 저온에서 수면상태로 여행한다거나, 조운트라고 해서 특정 장소로 순간이동하는 기술이 실용화된다는 내용의 공상과학소설입니다. 그때는 금세 사람이 사는 기지를 달에 건설하고, 화성에도 갈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궁금했던 것인데, 오늘 소개하는 <스페이스 크로니클>을 읽고서야 전모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 부설 헤이든 천문관의 소장인 닐 디그래스 타이슨박사입니다. 뉴욕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은 1869년에 설립되어 입체모형을 통하여 자연 서식지와 동식물의 생태를 볼 수 있는 전시를 특징으로 합니다. 박물관은 화석과 곤충 등 수천만 점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표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헤이든 천문관은 자선가 챨스 헤이든(Charles Hayden)의 기부로 1935년 문을 열어 1997년까지 운영되다가, 2000년에 로즈지구우주센터(Rose Center for Earth and Space)로 개편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구와 우주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태양계 행성과 지구 모형의 조형물, 최첨단 장치를 통하여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타이슨소장은 자연사박물관에서 발행하던 <내추럴 히스토리>라는 잡지에 ‘우주(Universe)'라는 주제의 칼럼을 써온 인연으로 1996년 헤이든 천문관의 소장으로 부임하여 지금의 로즈지구우주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스페이스 크로니클>은 로즈지구우주센터의 타이슨소장이 지난 15년간 우주개발 혹은 탐사의 필요성에 대하여 쓴 글을 엮은 책입니다. 엮은이는 <내추럴 히스토리>의 편집장이던 에이비스 랭입니다. 편집인은 ‘왜 우리는 우주를 동경하며, 왜 우주로 나가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우주를 탐사해왔으며, 미래에는 어떤 방법이 사용될 것인가? 그리고 우주를 향한 도전의 걸림돌은 무엇인가? 등 지금까지의 우주개발정책의 변천사가 한 편의 서사시처럼 펼쳐져 있다.’라고 요약하였습니다.

 

저자는 1960년대 미국의 우주개발정책이 급물살을 탈 수 있었던 것은 냉전의 산물이었다고 잘라 말합니다. 구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를 쏘아 올렸고, 한 달 뒤에는 역시 최초로 생명체를 태운 스푸트니크1호를 성공적으로 지구궤도에 진입시켰으며, 1961년 4월에는 최초의 유인우주비행을 성공시켰습니다.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에 탑승하여 우주비행을 마치고 성공적으로 귀환한 것입니다. 소련이 우주개발을 선도하자 우주가 전략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미국은 우주개발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초기 우주개발경쟁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는 모조리 소련의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 최초의 우주유영, 최초의 우주 정거장 건설, 최초의 달 궤도 비행, 달에 최초로 캡슐을 착륙시킨 것도 모두 소련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달 탐사 차량, 화성과 금성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는데 성공한 것도 소련이 처음이었습니다.

 

스푸트니크1호의 발사성공으로 충격을 받은 미국은 우주개발의 군사적 중요성과 전후 미국의 위상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년 뒤에 NASA를 설립하고, 과학부문에 대한 인적 물적 투자를 과감하게 확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달에 보내는 아폴로 프로그램을 출범시킨 것은 그때까지 소련에 밀리던 우주개발경쟁을 일거에 뒤집어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969년 최초로 달에 사람을 보내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단숨에 우주개발경쟁에서 우위를 빼앗은 미국이 우주개발경쟁에서 독주체계를 굳히기 위한 노력을 버리다시피 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선두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심심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바로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경쟁 상대가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상대가 없는 시합은 흥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상이나 수영과 같은 기록경기는 좋은 경쟁상대가 있을 때 새로운 기록들이 잇달아 작성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타이슨소장은 미국이 우주개발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주장해왔다고 했습니다. 특히 최근에 중국이 우주개발분야에서 빠른 속도로 미국을 따라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소련과 각축을 벌이면서 우주개발을 선도하던 과거의 분위기를 되살리려는 속셈도 있다고 보입니다. 대부분의 현대과학 분야처럼 우주과학 역시 정부의 적극적 투자가 없다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당국의 지속적 투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위기설을 주장하는 과학의 영역일수록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냉정한 판단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로 광우병파동이 일었을 때, 미국산 쇠고기가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이 왜 나왔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엮은이는 ‘인류는 왜 우주로 갈 수 있어야 하는가?’를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우주개발은 인간과 같은 우주생명체의 존재나 우주의 생성의 비밀을 캐는 일처럼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나 인류의 무한한 도전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닥칠 수도 있는 인류절멸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쥘 베른과 함께 19세기 과학소설의 선구자로 꼽히는 영국작가 허버트 조지 웰즈가 소설 <우주전쟁>에서 화성인이 지구로 쳐들어 왔다는 가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위험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소행성과 같은 거대한 낙하물이 지구와 충돌하는 상황은 기적과 같이 드물 수도 있지만, 달이나 태양계 행성에서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도  1994년 7월에는 슈메이커-레비9 혜성의 조각들이 목성에 충돌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공룡의 멸종원인과 연관 짓기도 합니다.

 

공룡은 삼첩기 후기에 출현하여 쥐라기와 백악기에 이르도록 지금의 인간처럼 전 세계에 걸쳐 살던 우세종의 육상동물이었습니다. 화석을 통하여 확인된 것들 만해도 600여 속에 달하는 공룡은 30cm의 작은 것부터 40m가 넘는 커다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할 수 있었던 것은 2억년이 넘게 진화해왔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물종 가운데 공룡이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런 공룡이 백악기-제3기에 익룡, 어룡, 수장룡 등을 제외한 모든 종이 순식간에 멸종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하여 많은 설이 제시되었습니다. 새로 등장한 초본류를 먹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초식동물 부적응설이나 생존경쟁에서 밀렸다는 생존경쟁설 등처럼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도 있고, 지구기온의 하강으로 인하여 생식에 문제가 생겼다는 추위설과 여기 관련된 화산 활동설, 운석 충돌설이 있습니다. (위키백과. ‘공룡’편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A%B3%B5%EB%A3%A1)

 

1990년경 멕시코의 유카탄(Yucatan) 반도의 칙쇼루브 (Chicxulub)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160-320km나 되는 직경의 단층이 발견되면서 운석충돌설이 힘을 얻었습니다. 대략 6천4백만 년 전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칙쇼루브단층은 운석충돌결과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 정도의 크기면 지구상의 생명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운석충돌설로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저자가 제시한 지구로 떨어지는 충돌체의 크기와 충돌로 발생하는 에너지 양, 그리고 그와 같은 충돌이 발생하는 빈도에 관한 자료를 보면, 칙쇼루브에 떨어진 운석은 직경이 10km 짜리로 충돌에너지가 TNT백조톤, 즉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50억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축구장 크기의 충돌체는 천년의 빈도로 떨어질 수 있는데, TNT 5천만톤 즉 원자폭탄 2500배에 해당하는 에너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축구장만한 크기의 소행성이 2002년 1월 지구와 달 사이의 두 배 정도 되는 거리를 스쳐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소행성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기 12일 전에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니, 우리는 우주에서 떨어질 수 있는 날벼락에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는 셈입니다. 이렇듯 위험한 물건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일이 급선무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10년 정도 뒤에는 이런 규모의 소행성의 위치를 모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위치가 파악된다는 것은 개별 소행성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2029년 4월 13일에 초대형 축구장 크기의 소행성이 지구궤도에 떠있는 통신위성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스쳐지나갈 것으로 예측된다고 합니다. 아포피스라고 명명된 이 소행성이 지구의 중력구멍에 해당하는 고도까지 접근한다면 재상봉하게 되는 2036년에는  캘리포니아와 하와이 사이의 태평양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그로 인한 피해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1908년 구소련의 퉁구스카에서 발생한 폭발사건입니다.

 

퉁구스카 폭발사건은 시베리아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의 밀림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공중폭발 사건입니다. 당시 목격자들은 불덩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폭발했다고 전했습니다. 폭발로 인하여 2,150 제곱킬로미터의 숲이 파괴되었는데 나무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워낙이 오지라서 소련이 성립한 1921년에서야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져 원인규명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운석이나 소행성의 충돌 혹은 메탄가스가 폭발한 것이라는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1929년에 들어서야 운석에 풍부한 자철광이나 규소광물로 형성된 물질을 발견하면서 운석충돌로 인한 사건으로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얼음, 금속, 규소 화합물로 이루어진 반지름 40m 정도의 소천체가 대기권을 통과하면서 연소되다가 퉁구스카 상공 약 8km 지점에서 폭발하였고 이때의 폭발 에너지는 15~20메가톤 규모에 달했다는 것입니다. (나무위키. ‘퉁구스카 대폭발’ 참조; https://namu.wiki/w/%ED%89%81%EA%B5%AC%EC%8A%A4%EC%B9%B4%20%EB%8C%80%ED%8F%AD%EB%B0%9C) 저자는 이러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우주탐험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 비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전략적 측면에서의 우주개발 뿐 아니라 상업적 이유로도 우주개발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데 자칫하면 미국이 다시 이들에게 밀리는 상황도 예견된다는 것입니다. 거리 우주여행에 관심을 가진 일반인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상업적 우주여행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우주왕복선계획이 종료된 미국으로서는 손 놓고 구경만 해야 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우주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과학적 발견이 일상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는 점도 빠트리지 않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우수한 기능을 자랑하는 기상위성과 통신위성을 제작하였지만, 정작 위성을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로켓기술이 없어서 다른 나라의 발사체를 이용하려다보니 저자세로 일관해야 하는 서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켓기술은 극도로 보안이 유지되는 핵심기술인지라 쉽게 얻을 수 없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1377년 최무선이 실용화에 성공한 신기전이 최초의 로켓이라고 한다면 장구한 역사를 가진 셈인데, 과학이 천대받던 시절 발전이 없다가 해방이후 기지개를 켜고 있는 셈입니다. 2020년에는 한국형발사체가 개발완료될 것이라고 하니 기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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