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미식 - 108가지 청두(成都) 맛집여행
캉칭 지음, 임화영 옮김 / 이담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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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출장길에 북경에 한 번 다녀온 것이 유일한 중국방문이었습니다. 출장이었으니 구경은 업무 사이에 잠깐에 불과하였습니다. 가까운 나라이면서도 이렇게 방문할 기회가 없는 것은 우선 먼 나라부터 찾아보자는 원칙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중국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여행에 나서기 전에 중국을 구경해야 한다는 조언도 듣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운 나라를 먼저 보면 먼 나라는 아예 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우선순위를 정한 것입니다.

 

사실 중국을 방문한 적은 없으면서도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있는 중국의 영향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읽은 <펜으로 그린 베이징;  http://blog.joins.com/yang412/14104933>을 비롯해서 중국에 관한 책을 읽을 기회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이 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베이징에 이어 이번에는 사천지방에서 미식으로 이름난 청두의 맛집을 소개한 <사천 미식>을 읽게 되었습니다. 청두출신 작가가 직접 쓴 것이니 틀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두 사람의 미각을 기준으로 했다면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사천음식이 맵다고 알고 있어서 더욱 그렀습니다. 책 내용의 소개에 앞서 잠깐 언급하면, 개구리요리는 그럴 수 있다쳐도, 토끼 머리를 통째로 내는 요리도 있다고 합니다. 몬도가네가 따로 없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언젠가 스위스에서 오신 손님을 모시고 용인 민속촌에 갔다가 번데기를 권했더니 질겁하던 생각이 납니다.

저자는 108곳의 맛집과 그 집의 대표요리를 18부문으로 구분하여 소개합니다. 역시 사천음식의 대표주자인 훠궈를 제일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음식도 훠궈, 고기구이, 면류, 등 다양할 뿐더러, 차, 술안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음식점에서 먹을 수 있는 유명한 음식 뿐 아니라 사천지방에서 흔히 먹는 집밥도 별도로 소개합니다.

혹시 음식을 만드는 법도 같이 소개되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신 분들은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청두에서 맛볼 수 있는 대표적 음식을 잘하는 맛집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며 다른 책과 다른 점은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서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장기를 살려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그림이라는 것이 앞서 읽은 <펜으로 그린 베이징>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음식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림에는 키키라는 다홍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와 무무라는 이름의 팬더, 그리고 비우비우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연은 당연히 음식이 되겠지요? 한 마디로 오감으로 음식을 느껴 구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림을 통하여 눈으로 감상하고, 저자의 설명에 따라 음식을 미각은 물론 소리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108가지의 맛집을 고른 내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청두의 맛집을 고르는 것이야말로 번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려 108가지나 되는 번뇌말입니다. 사실 108번뇌를 경계하는 불교에서는 역시 탐욕을 경계하는데, 미식을 찾는 일 역시 식탐이라 할 수 있겠고, 식탐이 탐욕의 하나라고 한다면 맛집을 찾는 일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작가는 청두의 맛집 소개가 이 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는 있습니다. 별책부록으로 108곳의 맛집의 대표음식을 별도로 그리고 위치정보를 담은 QR코드까지 담아낸 것을 보면 아주 청두의 음식소개에 팔 걷고 나선 듯합니다. 혹시 청두를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면 당연히 챙기셔야 할 것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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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신기주 지음, 최신엽 그림 / 한빛비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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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를 하면 페미니스트의 비난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합니다만, 오늘 날 우리는 남녀평등을 넘어서 여성 우위의 사회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를 읽다보니 제 생각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는 TV 프로그램 <비밀독서단>에 출연하는 신기주기자가 40줄에 들어서면서 느낀 푸념(이런 단어를 써도 되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을 담았다고 보았습니다. 아빠와 남자 사이에서, 본능과 제도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불안한 40대 남자들을 위한 현실적 조언’이라고 요약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남자 나이 ‘40’은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습니다.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나오는 ‘子曰, 吾十有吾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라는 공자님 말씀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내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어 서른에 입신했으며, 마흔이 되니 세상일에 미혹되지 아니하고 쉰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 예순에 귀가 순해지고 일흔이 되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좇았으되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남자 나이 40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아 남의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아니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나이 40이 되어서도 여전히 주관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제도가 잘못되었던지 아니면 남자들 스스로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들어보면 원인을 찾아 바로 잡는 것보다는 남자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니 이를 바로 잡아보자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치료법이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 구한 것들로 보입니다. 즉 ‘옛날로 돌아가자!’는 느낌입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하여 페미니스트들은 상당히 마초적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자가 남성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합니다.

저자는 <남자는 무엇으로 싸우는가>가 어른으로서, 남편으로서, 연인으로서, 아빠로서, 선배로서, 상사로서, 후배로서, 아들로서 그 무엇으로든 자신만의 스토리를 쓰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으로서의 ‘마흔 앓이’를 통해서 얻은 나름대로의 생각을 40줄에 들어설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4부로 나눈 책에서 저자는 1부에서 마흔 앓이의 원인을 진단하고, 2부네서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아볼 것을 권유합니다. ‘본능에도 이유가 있다’라는 3부의 성격은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떻든 4부에서는 머지않아 만나게 될 죽음을 미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남성지에서 일해 오면서 경험한 영화, 예술 등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40대 남성을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때로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가 40대를 보내던 시절과는 환경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에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두 번도 더 바뀌었으니 말입니다.

저자는 ‘40대 남자는 실수투성이다. 완벽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하물며 질풍노도의 20대와 30대를 거쳐 온 40대 남자는 겉모습은 현명해 보여도 결국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물론 공자께서도 40이 ‘불혹’의 나이라 하셨지만 완전한 존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은 알았다고 했는데, 저자는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어느 한편의 주장에 쏠리지 않은 중립적인 위치를 지켰던 점을 보면 저자는 흔들리지 않는 불혹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저자가 40줄에 들어설 대한민국의 젊은 남자들에게 던지는 조언에 귀를 기울여 볼 이유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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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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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반쪼가리 자작>에 이어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나무 위의 남작>과 함께 <우리의 선조들>을 이루는 3부작의 하나입니다. <반쪼가리 자작>에 이어 현실과는 동떨어진 가상의 시대에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20세기 활동한 이탈로 칼비노는 당시 유행하던 네오리얼리즘 소설로는 복잡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느껴 과거로 돌아가 선조들을 환상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보는 방식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8-9세기에 걸쳐 프랑크왕국을 통합한 카롤루스 대제(혹은 샤를 마뉴 대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남부, 아프리카의 모로코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합니다. 카롤루스대제의 군대를 구성하는 용장들은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장수들인데 그들 가운데 특별한 사연이 있는 몇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얀 갑옷을 입은 아질울포는 육체가 없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만, 당시 기사들이 그렇듯 위기에 처한 처녀를 구해내고 귀족에 임명된 사연을 가지고 있고, 원칙주의자이기도 합니다. 그의 하인이 되는 구르둘루만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존재인 것과는 대조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카롤루스대제를 찾아온 랭보가 있습니다. 전투에 참여하여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입신양명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젊은이는 토리스먼공작입니다. 아질울포가 구해낸 처녀 스코틀랜드의 왕녀 소프로니아의 사생아임을 밝혀 자신의 신분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아질울포의 작위가 잘못되었음을 밝히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벌입니다. 토리스먼으로 인하여 이야기가 급류를 타면서 과거 속에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고, 아질울포가 결국은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고, 랭보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존재하는 기사가 되는 것입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생각 같지 않게 밋밋할 수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를 복잡하게 엮기도 하는데, 그 고리는 아질울포를 사랑하는 여자기사 브라다만테입니다. 그리고 랭보가 다시 브라다만테를 사랑하고, 모자지간으로 알고 있던 소프로니아와 토리스먼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임이 밝혀져 결국 근친상간의 죄를 벗고 사랑을 이루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야기의 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는 테오도라수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써내려가는 수녀는 나중에 브라다만테임이 밝혀집니다. 작가가 반전 장치를 너무 많이 설계한 것 같습니다. 결국은 아질울포와 구르둘루만, 즉 존재와 비존재의 조화를 랭보가 이루어내는 행복한 결말에 이르는 것이 작가가 보여주려는 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읽은 계기는 지난해 다녀온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롤랑의 노래의 주인공 롤랑이 등장한다고 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의 최측근 기사였던 롤랑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에서는 안타깝게도 조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겨우 두 차례 등장합니다. 카롤루스대제에게 “제가 저 녀석을 흔들어놓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아질울포의 하인이 되는 구르둘루를 한번 툭 치는 역할이었고, 두 번째는 카롤루스 대제의 만찬자리에서 아골란테왕으로부터 전설의 명검 엑스칼리버 검을 얻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아질울포에게 거짓임을 추궁당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롤랑의 노래로 유럽사람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 이 이야기에서는 조연급에도 미치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탈리아 사람의 시각에서는 롤랑의 존재를 굳이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헷갈리는 것이 카롤루스대제의 군대가 전투를 벌이는 상대는 사라센사람들이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무어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라센사람들은 아라비아반도 지역에 사는 무슬림을 통칭하며, 무어인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살던 무슬림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아랍계이거나 베르베르족의 후손들로 사라센사람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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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있을걸 - 떠나본 자만이 만끽할 수 있는 멋진 후회
케르스틴 기어 지음, 서유리 옮김 / 예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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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여행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는 것을 보면, 고생과 그 고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소중한 것들을 비교해보면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의 여류소설가 케르스틴 기어의 <그냥 집에 있을 걸>은 마치 여행에서 겪은 엄청난 고생의 기억을 담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재미로 꽉꽉 채워졌던 여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일종의 미끼와 같은 제목이라고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집을 떠나는 두려움에 대하여 심각하게 지적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 두려움의 백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것입니다. 어제만 해도 페루에 여행을 갔던 한국관광객이 폭포에서 사진을 찍다가 추락해서 사망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을 갔다가 집에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다양하겠습니까?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테러에 희생된 여행객, 공항에 도착하던 비행기가 추락해서 승객들이 모두 사망하는 사고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사고들이 저자로 하여금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자에게는 아비오토포비아(Aviotophobia), 즉 비행공포증 같은 것이 생긴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비행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비행공포증이 있어서인지 해외순방길에도 기차를 타고 가는 버릇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의 비행공포증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비행공포증이 저자보다 더 한 친구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포를 감추려는 친구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이 백미입니다.


<그냥 집에 있을 걸>은 특별한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저자가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여행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건사고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렸을 적 여행이야기까지도 나오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비행공포증 이외에도 다양한 공포증을 가지고 있어 여행경험이 다양하지 못하다고 고백하는 저자이지만, 늘어놓은 이야기를 보면 저보다도 훨씬 다양한 여행을 해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그냥 집 안에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좋겠어. 겁쟁이들은 여행을 할 수 없다. 사람이 얼마나 용감하냐에 따라 그의 삶은 넓어지기도 하고 좁아지기도 한다.”라는 엽서를 남편에게 보낸 것을 보면, 저자는 엄살이 심하거나 아예 기우(杞憂)라고 할 쓸데없는 걱정을 이 책의 주제로 삼은 것처럼 보입니다.


여행과 관련한 재미있거나 끔찍한 이야기들은 저자가 직접 겪은 것은 물론 저자가 어머니, 남편, 시누이 등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주어들은 이야기들까지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일상에서 일어난 일까지도 적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남이 하는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들은 이야기들을 소설에서만 써먹는 것이 아니라 수필에서도 써먹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버릇까지도 적었더라구요. 저자는 여행지에서 발견한 독특한 모습의 돌을 수집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고 합니다. 손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돌이라고 하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자의 몸무게에 가까운 커다란 돌덩이를 차에 실어간다고 하면 이는 거의 절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도 남의 나라에서 말입니다. 에필로그를 보면 한술 더 떠서 여행지에서 식물까지도 채집해오는 모양입니다. 국경을 넘어 여행할 때 반입하거나 반출하는 동식물을 통하여 무서운 전염병이 옮겨질 수도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의식이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든 참 독특한 여행가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읽기였습니다. 역시 집을 떠나지 않고는 겪어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모음집입니다. 어쩌면 ‘멋진 추억일수록 틀림없는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글도 있는 것을 보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이 모두 꾸며낸 이야기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역설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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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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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북소리]와도 관련된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북칼럼을 전문적으로 써오지 않은 탓으로, [북소리]가 전문 북칼럼니스트의 글과는 다르다고 느껴오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북소리]에서 그 이유의 일면을 소개합니다. 같이 일하시는 분들과 [북소리]를 공유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각각 한 가지씩 들면서 [북소리]를 고쳐달라는 부탁을 들었습니다. 좋은 점은 [북소리]에서 소개되는 책을 따로 읽지 않아도 내용을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고, 나쁜 점은 너무 길어서 숨넘어가겠으니 줄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북소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제가 정한 방향이기도 합니다. 책 내용을 충분히 요약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그러기 위해서는 길이가 충분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처음 쓴 것은 고등학교 때 여름방학의 국어숙제였는데, 그리고는 잊고 살다가 10여년 전에 블로그를 개설하면서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책읽기에 열을 올리다보니 1,700여권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책을 읽기 위하여 낼 수 있는 시간을 무한정 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즉, 책은 넘쳐나지만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이 세상에 있는 책은 커녕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도 극히 일부 밖에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꼭 읽고 싶은 책(때로는 어쩔 수 없어 읽어야 하는 책도 물론 있습니다)을 중심으로 책읽기를 해고 있습니다.


책읽기도 나름 일일 수밖에 없는데, 제 경우는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우리네 옛말처럼 열심히 책읽기와 독후감쓰기를 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책읽기를 선뜻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정보가 넘쳐나는 요즈음에는 굳이 책을 모두 읽지 않아도 책에 담긴 내용을 이런저런 경로로 들을 수 있기도 하고, 저처럼 열심히 책을 읽어도 금세 잊어버리기도 하니 굳이 책을 읽어야 하냐는 분도 있습니다. 파리 8대학 프랑스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활동하는 피에르 바야르교수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쓰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읽기, 즉 독서와 비독서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과 책을 읽는 우리의 방식을 전반적으로 고찰하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읽기에 대하여 의무로서의 책읽기, 정독의 의무,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한 담론 등, 세 가지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즉 누구와 책에 관하여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그저 읽는 정도를 떠나서 정독을 해서 내용을 꿰고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책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서는 그 책을 통독하지 않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는 편이 바람직 할 수도 있다.(13쪽)’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는 3부로 나누어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비독서의 유형을 설명합니다. 책을 전혀 들춰보지도 않았거나, 대충 뒤적였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거나, 읽었어도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라고 하면 비독서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제2부에서는 살다보면 부딪히는,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소개합니다. 사실 북콘서트나 독서토론회에 참석하는 경우에, 그날 예고된 책의 요점을 정리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충보지도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제3부에서는 비독서자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일련의 조언들을 담았습니다. 즉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이야기해야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각 장의 주제에 맞춤한 책을 끌어와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처음 다룬 주제는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의 경우입니다. 특히 출판계가 죽을 지경이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요즈음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인용하는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 2013년, 북인더갭>에 등장하는 사서는 일반적인 비독서인과는 차별화된 관점에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무려 350만권을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의 사서는 책의 제목과 목차 외에는 전혀 책을 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총체적인 시각에서 책을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정한 책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다른 책들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에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책의 본질,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의 관계 속에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책읽기를 자제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인데,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 폴 발레리의 <작품I, 2015년, 을유문화사>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책을 거의 읽지 않는 편이었던 발레리였지만 평론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발레리의 평론의 일부를 읽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발레리는 대충 읽기의 논거를 정립하였는데, 책의 첫머리에서 시작해서 여러 줄 혹은 여러 쪽을 건너뛰며 끝까지 나가는 ‘선형(線形)의 훑어보기’와 쪽을 따라가지 않고 책을 산책하듯 여기저기를 뽑아서 읽는 ‘순환형(循環形)의 훑어보기’가 있습니다. 두 가지의 훑어보기는 모두 우리가 책과 맺는 관계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주제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경우로, 얼마 전에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2006년, 열린책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수상쩍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을 담은 추리소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의 해석을 둘러싼 관점을 대립시키고 있는데, 사건을 수사하는 바스커빌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시학>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무리수를 둔 호르헤와 마주합니다. 호르헤는 <시학>의 내용을 잘 알고 있지만, 바스커빌은 <시학>을 직접 읽은 적이 없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수집한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종합정리하여 나름대로의 내용을 파악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책이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일련의 의견교환에 의하여 새로운 관념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주목하게 됩니다.


네 번째 주제는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입니다. 기억의 결함을 집요하게 지적한 몽테뉴의 <수상록, 2007년, 동서문화사>을 인용합니다. 방대한 규모의 책을 쓴 몽테뉴임에도 ‘내가 좀 배운 사람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기억으로 간직하는 데는 영 젬병이다’라고 토로하여 독서의 흔적을 간직하는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 심한 경우에는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읽었다고는 하나, 읽지 않은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저자는 책에 대한 담론이 벌어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사교생활에서, 선생 앞에서, 작가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상황을 들었습니다. 어떤 모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책이 화제에 오르는 경우 어쩔 수 없이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교생활의 사례에서 저자는 그레이엄 그린의 <제3의 사나이>를 인용합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만, 오래 전에 명화극장을 통해서 시청한 캐럴 리드감독의 1949년작 <제3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묘지 사이로 난, 낙엽이 뒹구는 가로수 길 저편에서부터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걸어온 안나가 기다리던 마틴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없이 지나가는 장면 말입니다. (원작에서는 마틴스가 안나와 함께 비엔나를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나 봅니다). 이 소설에서 마틴스는 문화부의 크래빈에게 이끌려 문학강연을 하게 되는데, 마틴스가 당시 유명한 작가로 오해됨에 따라서 빚어진 상황입니다. 바로 자신이 논해야 하는 책들을 읽지 않은 작가가 자신이 쓴 책을 읽지 않은 대중과 대면하는 상황, 저자가 ‘귀머거리들의 대화’라고 부르는 상황입니다.


선생 앞에서 선 학생이 책을 읽지 않아도 주제에 충실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는 사례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서아프리카의 티브족에게 설명한 문화인류학자 로라 보헤넌의 경험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사례는 문화인류학 분야에서 꽤나 유명한 사례로 한국문화인류학회가 문화인류학을 소개하는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일조각, 1985년;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에서도 소개되었습니다. 문화적 배경이 다르면 담론구성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책의 내용을 모르더라고 개인의 직관을 바탕으로 충분히 논의가 진행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작가 앞에서 작가의 책을 논하는 경우도 있는데, 피에르 시냑의 유명한 탐정소설 <페르디노 셀린느(국내 미소개)>를 인용합니다. 저도 요즘에 자주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에 몇 차례 참여해보았습니다만, 작가라고 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은 모호한 표현으로 작품이 좋았다고 이야기해주기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하는 문제에서는 해롤드 래미스 감독의 1993년작 영화 <사랑의 블랙홀>을 인용합니다. 누군가를 유혹하려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가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마지막 제3장에서 저자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이야기해야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요령으로, 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그리고 자기 얘기를 할 것 등을 설명합니다. 부끄러워하지 말 것에서는 데이비드 롯지의 <아주 작은 세상(국내 미소개)>을,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에서는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 2012년, 서울대학교출판부>을, 책을 꾸며낼 것에서는 일본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얘기를 할 것에서는 오스카 와일드의 논문 <읽느냐, 읽지 않느냐>를 인용합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논문에서 읽어야 할 책, 거듭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 그리고 사람들이 절대로 읽지 않았으면 하는 책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1부에서 3부에 이르기까지 각각 하나씩, 책읽기를 중심으로 한 생각의 흐름을 이끄는 도서관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집단도서관을, 2부에서는 내면도서관을 그리고 3부에서는 잠재적 도서관이라 이름붙인 형태의 도서관을 소개합니다. 그 각각의 개념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어떤 책에 대한 대화는 겉보기와는 달리 대부분 그 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넓은 어떤 앙상블, 즉 특정 순간 교양이 의거하는 결정적인 모든 책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앙상블을 ‘집단도서관’이라고 했습니다.(33쪽) 각자의 개성이 구축되는 기반일 뿐 아니라 텍스트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구성하는 기반이 되는 책들의 앙상블-즉 그 책들(‘내면’책)보다는 재구성된 어떤 파편적인 오브제, 다시 말해 다른 독자들의 그것과 상관이 없는 개인 적인 어떤 ‘화면’책에 의거한-을 ‘내면도서관’이라 합니다.(107쪽) 그리고 타자들과 구두로나 글로 나누는, 책들에 관한 토론의 공간을 ‘잠재적 도서관’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책에 대해 말할 때 말로나 글로 튀어나오게 하는 유동적이고 파악할 수 없는 오브제인 ‘유령’책이 속하는 도서관입니다. 이 도서관은 각 문화의 ‘집단도서관’의 유동적인 한 부분이며, 토론에 참여하는 각 개인의 ‘내면 도서관’들의 접점에 위치하게 된다고 합니다.


저자는 ‘책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움직일 수 있고, 동시에 그가 가진 가장 독창적인 부분으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228쪽)’는 패러독스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라고 주문합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담론은 자기 발견의 가능성을 떠나서도, 일단은 우리를 창조적 과정 한가운데에 위치시킨다고 합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소박한 형태이지만 진정한 창조활동이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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